"일찍이 스테판 말라르메는 시인이 언어를 소유해서 부리는 게 아니라 시인 자체를 언어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시인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은 언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 자일 뿐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텍스트에서 저자의 권위를 빼앗고 독자의 탄생을 선언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시는 독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말라르메가 언제적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르트라면 프랑스 구조주의 언저리에서 늘 언급되는 사람아닌가. 이런 진술이 그래서 전혀 놀랍지 않다. '저자의 죽음' 얘길 읽으며 난 역시 그 구조주의 영향에서 씌여졌던 푸코의 '말과 사물' (1966) 말미의 '인간의 죽음 (혹은 사라짐)' 주장을 떠올린다. "man is an invention of recent date. And one perhaps nearing its end. If..., then one can certainly wager that man would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at the edge of the sea." (p.422). 물론 바르트가 얘기한 '저자의 죽음'의 논지가 '인간의 죽음 (혹은 사라짐)'에도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2008년 11월 27일 목요일
2008년 11월 18일 화요일
'총과 장미'의 '11월에 내리는 비'
.... Cause nothing lasts forever, and we both know hearts can change. And it's hard to hold a candle, in the cold November rain...
... So never mind the darkness. We still can find a way. Cause nothing lasts forever. Even cold November rain ...
Guns N' Roses - November Rain (1992)
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한국 최초의 계급 정권: 2mb와 그 친구들
대학시절 맑시즘 정치이론의 핵심 테제인 계급투쟁, 노동자 계급 혁명을 얘기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얼마나 낯설어 보였는지... 그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흘러서 혁명 운운하는 소리는 후일담에서나 듣게 되었고, 그 많던 좌파들, 맑시스트들은 제도정치권으로, 시민운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허나 한국의 정당의 정체성이 여전히 모호하다는 건 누구나가 쉽게 지적하는 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라고 하질 않나, 진정한 좌파정당이라고 자부하는 민노당에는 '민족해방'(NL) 세력의 입지가 더 커졌다. 도대체 한국에서 좌파/우파, 진보/보수가 제대로 나뉘어본 적이 없다. 보수정부라고 얘기하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추, 김영삼 정권에서도 꽤 진보적이라고 할만한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었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된다. 의료보험도입, 과외금지, 고교평준화 같은 걸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보수/진보를 얘기하며 정체성이 불분명하다고 투덜거리게 된 건 사실 매우 행복한 고민이다. 우리는 수십년 동안 독재/민주로 세상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재정권과 보수정권은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때로는 독재정권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대중의 눈치를 살피며 좀 더 평등지향적인 정책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신한국당 출신이지만 여전히 민주화 세력, 상대적으로 진보적 인사들을 많이 기용했고, 스스로 매우 대중추수적 입장을 지녔다. 그렇게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선명한 보수정권, 계급 혹은 지지세력의 이익에 노골적으로 복무하는 정권은 2mb정권이 최초가 아닌가 생각한다. '독재정권' 혹은 '3당야합' 같은 핸디캡 없이 출발했다는 점은 이 정권이 노골적으로 수도권, 건설족, 강부자등으로 대표되는 자신들의 지지핵심집단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참 이 무슨 역사의 장난인가.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가 종부세에 대해서 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일부 인용한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큰 흐름에서 볼 때 우리 현대사는 끊임없는 발전과 진보의 역사였다. (...) 지난 10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보수적 정부가 집권해 왔지만, 진보의 도도한 흐름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흥미로운 점은 주요한 진보적 개혁이 거의 모두 보수적 정부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제도 등의 사회복지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전두환 정부 때였으며, 토지공개념이란 급진적 성격의 개혁안이 나온 것은 노태우 정부때였다. 또한 김영삼 정부 때는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등록이라는 굵직한 개혁이 이루어진 바 있다. 지금 이런 개혁안이 나왔다면 보수진영은 좌파의 책동을 막아야 한다고 난리를 쳐댔을 것임에 틀림없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좌파정책의 표상처럼 되어 있는 평준화교육을 도입한 사람이 바로 보수진영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평준화의 틀은 그 뒤를 이은 보수적 정부하에서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져 왔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 실정중 하나로 들먹여지는 대학입시 ‘삼불정책’의 기본골격도 실제로는 보수적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큰 흐름에서 볼 때 우리 현대사는 끊임없는 발전과 진보의 역사였다. (...) 지난 10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보수적 정부가 집권해 왔지만, 진보의 도도한 흐름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흥미로운 점은 주요한 진보적 개혁이 거의 모두 보수적 정부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제도 등의 사회복지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전두환 정부 때였으며, 토지공개념이란 급진적 성격의 개혁안이 나온 것은 노태우 정부때였다. 또한 김영삼 정부 때는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등록이라는 굵직한 개혁이 이루어진 바 있다. 지금 이런 개혁안이 나왔다면 보수진영은 좌파의 책동을 막아야 한다고 난리를 쳐댔을 것임에 틀림없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좌파정책의 표상처럼 되어 있는 평준화교육을 도입한 사람이 바로 보수진영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평준화의 틀은 그 뒤를 이은 보수적 정부하에서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져 왔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 실정중 하나로 들먹여지는 대학입시 ‘삼불정책’의 기본골격도 실제로는 보수적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2008년 11월 14일 금요일
유럽의 자기성찰: Can Europe produce an Obama?
한국에서는 흔히 '서구'라고 통칭하지만, 사실 그 당사자들은 한묶음으로 묶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서로를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 신대륙과 구대륙. 이 구분은 주로 '신대륙' 사람들이 즐겨 쓰는 것 같다. '구대륙'사람들은 다시 대륙과 앵글로색슨으로 나누어 부르는 경우가 잣은 것 같다. 허나 이는 다시 '구대륙' 안에서도 대륙 사람들의 입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토와 '바닷것'들을 구분하고, 그리고 그 '바닷것'의 영향권 아래서 만들어진 '미국' 도 그 편으로 편입시키고. 독일인들 오랫동안 타자를 '서구' 혹은 '선진국' 으로 불렀다. 독일 왼쪽에 있는 개명한 선진국들을 한편으로 부러워하고, 또 그들의 물질문명, 실증주의적 경향을 경멸하며... 이런 자아/타자구분법을 연구해도 재미있겠다. '오리엔탈리즘'이 대표적인 연구일텐데, 그 후 관련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온 것 같지 않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어제 본 신문 기사 하나를 소개하려다 그렇게 되었다. IHT 첫면, 헤드라인뉴스로 박힌 제목: "Can Europe produce an Obama?" 유럽과 미국의 관계, 그 역사는 참 복잡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대 문명의 - 아름다운 그리고 추하기도한 - 꽃은 비록 유럽에서 싹트긴 했지만, 미국 땅에서 비로소 만개했다. 자본주의는 물론이거니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20세기 초반 유럽 지성인들 중 미국 정치제도를 부러워한 사람들이 많았다 (토크빌, 맑스 베버가 대표적).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강력한 패권국가로 등장했지만, 동시에 국제 깡패짓을 많이 해서, 복지국가 체계를 정비해 가던 구대륙 사람들은 미국의 현실적 힘은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경박하게 날뛰는 미국 것들 은근히 무시하였다. 인종주의에 대해서도 그 뿌리는 유럽에 있지만 많은 유럽인들은 그동안 미국의 인종주의, 흑백갈등을 언급하며 그 보다는 훨씬 낫지 않느냐며 자신들의 상황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미국인들의 미국 무시는 이번 부시 정권 시기에 그 정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싶다. 서유럽 국가들의 친미성향 정도를 조사해 본다면 상위권에서 내려 오지 않을 독일에서도 공공연하게 미국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정치인들이 많았으니까.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이번 미대선에서 오바마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것도, 그리고 오바마 당선을 내 일인양 기뻐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터. 허나 공교롭게도 오바마가 당선되자 유럽인들은 자기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흑인을 미국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인들, 미국사회. 누구도 이렇게 쉽게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IHT는 그런 '유럽'이 느끼는 당혹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국회의 경우 본토 출신 의원 중 흑인은 한 명이 있을 뿐이고, 영국에서는 하원 646명중 15명이 비백인. 8천2백만명 인구의 3%에 달하는 2백9십만이 터키계인 (독일 시민권자는 8십만명) 독일에서는 연방의원 613명 중 5명이 터키계라고 한다. 언제쯤 프랑스나 영국에서 흑인 대통령 혹은 수상이, 그리고 독일 같으면 터어키계 출신 수상이 뽑힐 수 있을까?
사실 수치로 보면 미국도 그리 나은 편은 아니다. 오바마는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이고, 이번에 새로 구성된 하원의원 중 흑인은 39명으로 약 9퍼센트라고. 미국인구 중 흑인이 13퍼센트라고 하니까... 하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그리고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대통령으로 흑인을 선택함으로서 미국인들은 그들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부시의 실정과 미국의 쇠락을 은근히 즐기던 이들에게 보기좋게 한 방 먹였다. 지난 수년 동안 부시와 미국 때리기를 즐기던 유럽인들은 이제 당분간 역사 앞에서 또 한 번 선수를 치고 앞서가는 미국을 부러워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IHT 기사 중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영국같은 의회제 아래에선 의외의 인물이 수장으로 뽑힐 기회가 훨씬 줄어든다는 것. "영국에선 오바마처럼 뛰어나게 연설을 잘 한다고 해서 주목을 받기는 힘듭니다. 의회에서 서열을 따라 커가야 하는 거지요" 영 노동부 장관의 말씀.]
이 시점에서 우리 '조국'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바마 당선 이후, "새로운 미국의 변화를 주창하는 오바마 당선자와 새로운 변화를 제기한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의 비전이 닮은 꼴"이라고 주장했다던 2MB와 청와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코미디와 비교를 불허하는 빼어난 수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코디미계, 개그계의 쾌거!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한국 코미디계는 앞으로 2MB가 접수한다.
ps) 지난 주말 독일 녹색당 전당대회에서 터키계 2세인 Cem Ozdemir가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1994년 터키계 최초로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고, 2004년 대단치 않은 스캔들로 유럽의회로 물러났었는데 이번에 국내정치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 "흑인최초..."를 달고 다녔던 오바마가 미대통령이 되었으니, 어쩌면 오즈데미르도 독일 수상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 42살이라니 아주 불가능해보이지도 않고. Wer weiss...
서두가 길어졌는데, 어제 본 신문 기사 하나를 소개하려다 그렇게 되었다. IHT 첫면, 헤드라인뉴스로 박힌 제목: "Can Europe produce an Obama?" 유럽과 미국의 관계, 그 역사는 참 복잡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대 문명의 - 아름다운 그리고 추하기도한 - 꽃은 비록 유럽에서 싹트긴 했지만, 미국 땅에서 비로소 만개했다. 자본주의는 물론이거니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20세기 초반 유럽 지성인들 중 미국 정치제도를 부러워한 사람들이 많았다 (토크빌, 맑스 베버가 대표적).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강력한 패권국가로 등장했지만, 동시에 국제 깡패짓을 많이 해서, 복지국가 체계를 정비해 가던 구대륙 사람들은 미국의 현실적 힘은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경박하게 날뛰는 미국 것들 은근히 무시하였다. 인종주의에 대해서도 그 뿌리는 유럽에 있지만 많은 유럽인들은 그동안 미국의 인종주의, 흑백갈등을 언급하며 그 보다는 훨씬 낫지 않느냐며 자신들의 상황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미국인들의 미국 무시는 이번 부시 정권 시기에 그 정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싶다. 서유럽 국가들의 친미성향 정도를 조사해 본다면 상위권에서 내려 오지 않을 독일에서도 공공연하게 미국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정치인들이 많았으니까.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이번 미대선에서 오바마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것도, 그리고 오바마 당선을 내 일인양 기뻐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터. 허나 공교롭게도 오바마가 당선되자 유럽인들은 자기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흑인을 미국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인들, 미국사회. 누구도 이렇게 쉽게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IHT는 그런 '유럽'이 느끼는 당혹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국회의 경우 본토 출신 의원 중 흑인은 한 명이 있을 뿐이고, 영국에서는 하원 646명중 15명이 비백인. 8천2백만명 인구의 3%에 달하는 2백9십만이 터키계인 (독일 시민권자는 8십만명) 독일에서는 연방의원 613명 중 5명이 터키계라고 한다. 언제쯤 프랑스나 영국에서 흑인 대통령 혹은 수상이, 그리고 독일 같으면 터어키계 출신 수상이 뽑힐 수 있을까?
사실 수치로 보면 미국도 그리 나은 편은 아니다. 오바마는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이고, 이번에 새로 구성된 하원의원 중 흑인은 39명으로 약 9퍼센트라고. 미국인구 중 흑인이 13퍼센트라고 하니까... 하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그리고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대통령으로 흑인을 선택함으로서 미국인들은 그들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부시의 실정과 미국의 쇠락을 은근히 즐기던 이들에게 보기좋게 한 방 먹였다. 지난 수년 동안 부시와 미국 때리기를 즐기던 유럽인들은 이제 당분간 역사 앞에서 또 한 번 선수를 치고 앞서가는 미국을 부러워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IHT 기사 중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영국같은 의회제 아래에선 의외의 인물이 수장으로 뽑힐 기회가 훨씬 줄어든다는 것. "영국에선 오바마처럼 뛰어나게 연설을 잘 한다고 해서 주목을 받기는 힘듭니다. 의회에서 서열을 따라 커가야 하는 거지요" 영 노동부 장관의 말씀.]
이 시점에서 우리 '조국'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바마 당선 이후, "새로운 미국의 변화를 주창하는 오바마 당선자와 새로운 변화를 제기한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의 비전이 닮은 꼴"이라고 주장했다던 2MB와 청와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코미디와 비교를 불허하는 빼어난 수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코디미계, 개그계의 쾌거!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한국 코미디계는 앞으로 2MB가 접수한다.
ps) 지난 주말 독일 녹색당 전당대회에서 터키계 2세인 Cem Ozdemir가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1994년 터키계 최초로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고, 2004년 대단치 않은 스캔들로 유럽의회로 물러났었는데 이번에 국내정치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 "흑인최초..."를 달고 다녔던 오바마가 미대통령이 되었으니, 어쩌면 오즈데미르도 독일 수상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 42살이라니 아주 불가능해보이지도 않고. Wer weiss...
2008년 11월 13일 목요일
'독립'의 의미론
'인문계' 쪽 출신들은 외우기에 능하는 전설 혹은 선입견이 전해져 온다. 하긴 인문계 시험에 외워서 치루는 과목의 비중이 높고, 인문계 출신들 성공의 지름길인 각종 '고시'의 당락도 대개 암기력에 좌우되는 것 같으니 아주 근거 희박한 주장도 아닐 터이다. 외우기를 잘 한다는 사태 그 자체는 판단중립의 영역일 것이나, 어디 그것을 판단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보자.
우선 한국 인문계열에서 요청되는 외우기 방식의 문제점은 그들이 외워야 하는 지식이 너무 편협하는 데에, 또 닥달 외운 지식이 더 종합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허나 정확한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채 후자만을 강조하다 보면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귀결되기 쉽다는 점도 잊지말하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의 엄밀성,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허나 역사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부터 함량미달이다. 예를 들어 다음에 인용할 史實.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일수호조약(1876)에서 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일관된 주장은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이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조선 진출의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에서 '독립'의 주장은 '친일'과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독립문 현판을 '매국노' 이완용이 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독립'이라고 다 같은 '독립'이 아니었던 것. '독립'의 의미론. 이 멋진 주제를 누가 연구했을까?
우선 한국 인문계열에서 요청되는 외우기 방식의 문제점은 그들이 외워야 하는 지식이 너무 편협하는 데에, 또 닥달 외운 지식이 더 종합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허나 정확한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채 후자만을 강조하다 보면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귀결되기 쉽다는 점도 잊지말하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의 엄밀성,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허나 역사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부터 함량미달이다. 예를 들어 다음에 인용할 史實.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일수호조약(1876)에서 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일관된 주장은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이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조선 진출의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에서 '독립'의 주장은 '친일'과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독립문 현판을 '매국노' 이완용이 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독립'이라고 다 같은 '독립'이 아니었던 것. '독립'의 의미론. 이 멋진 주제를 누가 연구했을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김교빈 선생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쉽게 설명하고자 했다. 잠시 그것을 옮기면 우선 김교빈 선생은 인간이란 '3일을 굶으면 담장을 넘는' 그런 존재임을 설명했다. 물론 이 말 한마디 한 것은 아니고 물질 세계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풀이가 이어졌다.
다음으로 덧붙인 것은, 그렇게 굶어 죽기 직전에 처한 인간에게 누군가 밥을 주면서, 정성껏 차리거나 그도 아니면 자기네들이 먹는 상에 숟가락 하나 더하여 같이 먹자고 하는 게 아니라, 먹다 남은 거 긁어 모아서 적선이라도 하듯이 내밀면 비록 사람이 3일을 굶었어도 '싫소, 나는 그거 먹지 않겠소' 하면서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택한다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억압적 현실이 비참한 상황을 강요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땅히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그것이 진실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실천 의식이라는 설명이었다."
내가 여러 번 인용한 정윤수 블로그에 오늘 올라 온 얘기 중 일부다. 내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물질 (혹은 요즘식으론, 유전자) 환원론적 이해에 큰 매력을 못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고. 근대과학, 즉 실험과학 혹은 엄밀과학의 방법론으로 인생사, 세상사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 인문학, 사회이론의 존재감은 바로 그런 인식에서 주어지는 것 아닌가? 자연과학 흉내내서 얻은 것도 많지만, 이제 그 자연과학마저도 변하지 않는가 (cf. '통섭'논쟁). 인문학, 사회이론은 세계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줘야할 시대적 사명까지 갖고 있는 것이다.
ps) 김교빈 교수가 호서대 '철학과' 교수였는데, 이 과의 이름이 '문화기획학과'로 바뀌었다고 한다. 코메디아닌가? 문화기획학교? 상지대 사회학과 교수는 언제부터인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소개되던데... 소리도 요란한 그 '문화의 과잉'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사회 '문화 빈곤'의 징표다. 2MB 일당이 각개 각층의 지원을 받아 활개칠 수 있는 그런 '문화적 토양'말이다.
다음으로 덧붙인 것은, 그렇게 굶어 죽기 직전에 처한 인간에게 누군가 밥을 주면서, 정성껏 차리거나 그도 아니면 자기네들이 먹는 상에 숟가락 하나 더하여 같이 먹자고 하는 게 아니라, 먹다 남은 거 긁어 모아서 적선이라도 하듯이 내밀면 비록 사람이 3일을 굶었어도 '싫소, 나는 그거 먹지 않겠소' 하면서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택한다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억압적 현실이 비참한 상황을 강요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땅히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그것이 진실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실천 의식이라는 설명이었다."
내가 여러 번 인용한 정윤수 블로그에 오늘 올라 온 얘기 중 일부다. 내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물질 (혹은 요즘식으론, 유전자) 환원론적 이해에 큰 매력을 못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고. 근대과학, 즉 실험과학 혹은 엄밀과학의 방법론으로 인생사, 세상사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 인문학, 사회이론의 존재감은 바로 그런 인식에서 주어지는 것 아닌가? 자연과학 흉내내서 얻은 것도 많지만, 이제 그 자연과학마저도 변하지 않는가 (cf. '통섭'논쟁). 인문학, 사회이론은 세계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줘야할 시대적 사명까지 갖고 있는 것이다.
ps) 김교빈 교수가 호서대 '철학과' 교수였는데, 이 과의 이름이 '문화기획학과'로 바뀌었다고 한다. 코메디아닌가? 문화기획학교? 상지대 사회학과 교수는 언제부터인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소개되던데... 소리도 요란한 그 '문화의 과잉'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사회 '문화 빈곤'의 징표다. 2MB 일당이 각개 각층의 지원을 받아 활개칠 수 있는 그런 '문화적 토양'말이다.
2008년 11월 12일 수요일
'더' 독해지기
기본적으로 여유있고 느슨하지만 나름 독하고 모진 면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뭐 그냥 저냥 만족한다. 내 얘기다. 허나 '자기만족'은 여러 면을 갖고 있다. 정신건강에 좋긴하지만, 동시에 현실안주, 현실정당화하기도 쉽다는 말씀. 그렇다고 내가 자기만족에만 도취되어서 사는 것만도 아니다. 며칠 전에 '악몽'에 대해서 쓰지 않았던가...
인생에서 '자기만족', '자존감'이 꼭 필요하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시기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기본적으로는 항상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허나, 자신에게 너무 관대해선 곤란하고 스스로를 더 모질게 몰아붙여할 때도 있다. 현대사회의 비극은 이른 바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바로 그런 '때'가 쭈욱 이어진다는 데 있지만... 독일 체류 기간이 늘어날수록, 당연히, 추월당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오늘 그런 사례를 또 경험했다. 음... 혹자는 지금도 충분히 모질게 살고 있지 않느냐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럴 근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아니다. 지금은 더 모질고, 독해져야 할 때다. '독한 사람'! 항상 긍정적인 뜻을 전달하려고 쓰는 말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경우, 그 말은 순도 100% 칭찬이다.
ps) 초딩들 방학일기에나 어울릴 이런 '- 해야겠다'류 얘기를 - 몇 명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 남에게 읽으라고 내 놓기가 좀 '거시기'하지만, 그래도 떡하니 올려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나름 더 독해지기로 생각하고 결심한 바가 있지만 차마 그 내용까지 공개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그 방향은... 뭐겠는가, "논문에 집중하기"지. 특히 홀로 있는 시간에 논문 쓰는 일에 도움되지 않는 일들을 과감히 배제하고, 절제하기. 정신활동을 좀 단순하게 하고, 대신 운동 시간을 늘릴 것. 허나 블로그는 도움되는 정신활동으로 분류했으니 '염려'(?) 놓으시라. 무슨 근거로? 내 맘이지 ㅎㅎ
인생에서 '자기만족', '자존감'이 꼭 필요하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시기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기본적으로는 항상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허나, 자신에게 너무 관대해선 곤란하고 스스로를 더 모질게 몰아붙여할 때도 있다. 현대사회의 비극은 이른 바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바로 그런 '때'가 쭈욱 이어진다는 데 있지만... 독일 체류 기간이 늘어날수록, 당연히, 추월당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오늘 그런 사례를 또 경험했다. 음... 혹자는 지금도 충분히 모질게 살고 있지 않느냐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럴 근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아니다. 지금은 더 모질고, 독해져야 할 때다. '독한 사람'! 항상 긍정적인 뜻을 전달하려고 쓰는 말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경우, 그 말은 순도 100% 칭찬이다.
ps) 초딩들 방학일기에나 어울릴 이런 '- 해야겠다'류 얘기를 - 몇 명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 남에게 읽으라고 내 놓기가 좀 '거시기'하지만, 그래도 떡하니 올려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나름 더 독해지기로 생각하고 결심한 바가 있지만 차마 그 내용까지 공개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그 방향은... 뭐겠는가, "논문에 집중하기"지. 특히 홀로 있는 시간에 논문 쓰는 일에 도움되지 않는 일들을 과감히 배제하고, 절제하기. 정신활동을 좀 단순하게 하고, 대신 운동 시간을 늘릴 것. 허나 블로그는 도움되는 정신활동으로 분류했으니 '염려'(?) 놓으시라. 무슨 근거로? 내 맘이지 ㅎㅎ
2008년 11월 11일 화요일
바디 랭귀지
위대한 인류의 업적을 가능하게 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이 무엇일까? 언어사용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언어는 인간 최대의 발명품. 언어 없는 인간, 사회? 상상하기 힘들다.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다양한 학문적 해석이 있을 터이고, 동물도 '나름' 언어를 사용한다는 주장도 있는 것 같지만, 인간 종의 기원에 대해서 자연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처럼 인간의 언어사용능력에 대해서도 그러하리다. 성서의 경우 인간과 피조된 이후 바로 신과 언어를 사용해 의사소통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언어가 다양한 언어로 나뉘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시도를 응징의 결과로 이해되지만. 어쨌든... 인간의 언어의 능력은 인류가 만들어 낸 문명의 근원 중 근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언어의 발명은 또 한 번 획기적인 전환점이었고.
음성언어나 문자언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동시에 의사소통의 비언어적 수단의 중요성은 줄어드는 것 같다. 대화상황에서 비언어적 요소의 기능, 역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따로 있기도 하지만... 비언어적 요소라... 뭐가 있을까? 제스춰, 특히 손모양, 위치, 움직임 등 몸동작? 이런 것들은 음성언어의 보조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같다.
몸이 의사소통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는 언제일까? 예를 들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경우가 있다. 바디랭귀지를 쓸래야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적극적으로 음성언어의 한계를 이용해서 몸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경우는 무엇이 있을까? 춤은 어떤가? 이런 경우는 의사소통의 목적 장체가 다른 것 아닌가? 의사소통의 목적은 사실 이해아닌가? (오해도 이해다). 춤을 비롯한 현대 예술의 특징은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것을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평론가들이 있긴 하지만, 다양한 해석 가능성 혹은 해석의 불가능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 아닌가? 우리 백남준 형님이 남기신 '예술은 사기다"라는 명언이 바로 이것을 얘기하는 것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예술에 대한 평론가들의 언어가 왜 그리 호사스러운지 이해할만하다. 원래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작품, 예술활동을 말로서 풀어내려니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음성언어나 문자언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동시에 의사소통의 비언어적 수단의 중요성은 줄어드는 것 같다. 대화상황에서 비언어적 요소의 기능, 역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따로 있기도 하지만... 비언어적 요소라... 뭐가 있을까? 제스춰, 특히 손모양, 위치, 움직임 등 몸동작? 이런 것들은 음성언어의 보조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같다.
몸이 의사소통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는 언제일까? 예를 들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경우가 있다. 바디랭귀지를 쓸래야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적극적으로 음성언어의 한계를 이용해서 몸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경우는 무엇이 있을까? 춤은 어떤가? 이런 경우는 의사소통의 목적 장체가 다른 것 아닌가? 의사소통의 목적은 사실 이해아닌가? (오해도 이해다). 춤을 비롯한 현대 예술의 특징은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것을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평론가들이 있긴 하지만, 다양한 해석 가능성 혹은 해석의 불가능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 아닌가? 우리 백남준 형님이 남기신 '예술은 사기다"라는 명언이 바로 이것을 얘기하는 것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예술에 대한 평론가들의 언어가 왜 그리 호사스러운지 이해할만하다. 원래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작품, 예술활동을 말로서 풀어내려니 무리가 따를 수 밖에.
현대문명이 오해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의사소통에 기반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생의 많은 부분이 지니는 의미는 그런 방식으로 표현될 수 없다. '지식'의 증가는 동시에 '비지식'의 증가를 가져온다. 도대체 뭘하는지 알기조차 힘든 현대예술이 '장사가 되고', 종교에 대한 열정이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이런 포스트모던한 현상은 어쩌면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이루어낸 현대 문명의 이면일지도 모르겠다.
만화 출처: 한겨레 비빔툰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地平融合
'지평융합'. 해석학의 용어 'Verschmelzung der Horizont'의 번역어인데 그 동네에서 어떤 뜻으로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개념이 마음에 들어서 내방식으로 이해해서 쓰기로 한다. 그래도...급하게 검색해보니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텍스트를 대하기 전에 일종의 편견을 갖는다. 이 편견을 선이해라 한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우리의 선이해가 만들어놓은 한계 - 지평 - 속에서 이루어진다. 각자의 선이해 와 모순되는 텍스트는 선이해 속 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이 때 각각의 선이해는 텍스트 속의 선이해와 융합하여 새로운 선이해로 변화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선이해가 만나 하나의 선이해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지평융합이라고 한다. 이 새로운 선이 해는 다시 다른 텍스트들을 해석하는 데 사용되며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 내가 '지평', '지평융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분명히 다르지만, 신경쓰지 않고 내 길을 가련다. 뭐, 글 개념들에 특허가 있는 것도 아니니... 지평은 다분히 공간적 개념이다. 유사표현으로 '경계'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평이란 개념으로 난 심리적인 상황을 기술하고 싶으니 - 루만식으로 얘기하자면 - '심리체계의 경계' 정도로 정의해도 되겠다. '사회 세계'라 표현을 염두에 둔다면 '심리 세계'라고 해도 될것이고, 그 '심리세계'의 경계로 생각하면 되겠다 (Psychische Welt, cf. Soziale Welt). 그렇다고 가능한 모든 심리체계 작동이 가능한 범위로 이해하려는 것은 아니고 개인적 심리 체계 혹은 심리체계로 제한한다. 사회체계의 경계가 끊임없이 재설정되는 것처럼 심리체계 역시 그러하다. 공간적으로 표현을 계속 사용하자면, 내 심리체계의 중심에는 분명히 내가 있다. 그 '나'를 중심으로 이제껏 내가 경험한 온갖 사람, 사물, 사건, 지식, 정보들이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것들은 가까이, 어떤 것들은 멀리, 또 어떤 것들은 감춰진 채로... 지평, 즉 경계가 있다는 건 그것을 기준으로 그 안쪽과 바깥쪽이 구분된다는 얘기... (그러고 보니 지평과 경계에 대해서 조금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지평이 단선적이라면 경계는 원형적이란 느낌을 주는 것. 굳이 둘을 일치시키려한다면 '둥그런 지평'을 상상하면 될 듯. 어쨌든...). 모든 심리체계가 그런 지평/ 경계를 갖고 있다면, 다른 두 심리체계가 의미를 주고 받는 상황에선 어떤 방식으로는 그 두 지평이 만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을 지평융합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체계이론 개념으로는 strukturelle Kopplung이 비슷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 그 배경을 설명하자면...
어제 태어난지 약 30시간 정도되는 '생명체' (표현이 좀 '거석'하지만...)를 만났다. 오랫동안 좁은 동네에서 큰 변화없이 살면서 내 지평이 굳어져서인지 처음에 이 새로운 생명체, 인간 존재를 심리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좀 난감했다. 사실 몇 달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구나 (다른 아이). 그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낯선 느낌... 낯선 성인을 만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인의 경우 상대도 분명한 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이미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 지평과 내 지평의 Kopplung은 자석이 서로 달라붙듯 쉽게 되는 편이다. 서로 공감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상점에서 생전처음보는 판매원에게서 그리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 않지 않는가? 허나 이 아이의 경우는... 그 아이의 지평은 이제 막 형성되는 중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 지평 안에서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낯설게 느끼는 모양이다. 익숙하지 않은 interaction 상황인 것. 갓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을 관찰해보면 대개 말을 알아듣는 큰 애들에게 하듯이 말을 건네며 그런 상황을 처리한다... 그런 상황을 자주 겪지 않는 손님들ㅇ를 배려해서라도 더 익숙한 상황의 하나로 치환하려는 노력아닐까?
그 일을 계기로 내 지평이 매우 굳어져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굳어진 지평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좀 변화를 주고 싶다면, 심리체계의 한 가운데, 그러니까 좌표로 표현한다면 (0,0) 이거나 (0,0,0)이 될 그 자리를 내주면 어떨까. 인식의 주체마저 내가 아닐 수는 없으니까, 일종의 심리 실험이 되겠지만. 즉, 타인(혹은 절대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지평을 상상하고 그것을 내 지평으로 삼아보기.
어제 태어난지 약 30시간 정도되는 '생명체' (표현이 좀 '거석'하지만...)를 만났다. 오랫동안 좁은 동네에서 큰 변화없이 살면서 내 지평이 굳어져서인지 처음에 이 새로운 생명체, 인간 존재를 심리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좀 난감했다. 사실 몇 달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구나 (다른 아이). 그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낯선 느낌... 낯선 성인을 만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인의 경우 상대도 분명한 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이미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 지평과 내 지평의 Kopplung은 자석이 서로 달라붙듯 쉽게 되는 편이다. 서로 공감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상점에서 생전처음보는 판매원에게서 그리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 않지 않는가? 허나 이 아이의 경우는... 그 아이의 지평은 이제 막 형성되는 중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 지평 안에서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낯설게 느끼는 모양이다. 익숙하지 않은 interaction 상황인 것. 갓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을 관찰해보면 대개 말을 알아듣는 큰 애들에게 하듯이 말을 건네며 그런 상황을 처리한다... 그런 상황을 자주 겪지 않는 손님들ㅇ를 배려해서라도 더 익숙한 상황의 하나로 치환하려는 노력아닐까?
그 일을 계기로 내 지평이 매우 굳어져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굳어진 지평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좀 변화를 주고 싶다면, 심리체계의 한 가운데, 그러니까 좌표로 표현한다면 (0,0) 이거나 (0,0,0)이 될 그 자리를 내주면 어떨까. 인식의 주체마저 내가 아닐 수는 없으니까, 일종의 심리 실험이 되겠지만. 즉, 타인(혹은 절대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지평을 상상하고 그것을 내 지평으로 삼아보기.
2008년 11월 5일 수요일
惡夢
꿈은 매우 독특한 현상이다. 아직 그 기제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다). 우리 프로이트 할아버지 적보다야 많이 알려졌겠지만 주로 수면 행태에 대한 연구인 것 같고 꿈의 발현, 해석에 대해서 획기적 진전을 이루었다고 들은 바 없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영역이니 동서고금 꿈은 이용하고 가지고 장난치기 매우 좋은 소재였음에 분명하다. 특히, 일상적 경험에 의해 해석하기 어려운 상황에 '꿈'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각종 역사책, 경전에서 꿈은 단골 소재였다. 성서에서도 그 흔적을 여기 저기 찾아볼 수 있고. 많은 경우 굳이 '꿈'과 '현실'을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 '꿈'을 '현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그러니까 순수한 '비현실' 세계의 영역으로 몰아내는 과정이 바로 근대화였다 [근대화에서 삶의 공간 밖으로 내쫓겨났던 것들, 혹은 합리적 '터치'를 거쳐야만 다시 유입될 수 있었던 사례들은 많이 있다. 푸코 형님 저작을 참고할 것. 미침(고광기), 몸, 건강, 태어남, 죽음, 감정 등등. biopolitics라고 부르던...]. 프로이트 할아버니가 꿈을 무의식 세계의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거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때 '근대인'들이 펄쩍 뛰었던 일도 큰 무리는 아니다. '탈근대인'이 프로이트에 거부감이 없는 건 바로 그 '탈' 때문이고. 그래도 '꿈'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진 않다. 꿈이 없을수록 숙면을 취한다는 '건강상식' 정도.
꿈에 대해 권위있는 해석이 아직 없는 것 같고, 대개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꿈을 이해하는 것 같다. 요 며칠 惡夢을 꿔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에 보았다.
악몽이 뭘까? 을 여러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깼을 때 '휴,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싶으면 악몽을 꿨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며칠 간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출현했고, 영화 여러 편 찍었다. 굳이 장르로 얘기하자면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시원하게 웃기지도 않고 아픈 부분을 꼭꼭 찌르는...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관계 혹은 감추고 싶은 내 안의 어떤 것들이 꼭 드러난다. 요즘 많이 생각했던 주제나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는 좀 더 이해할만하지만, 어제처럼 요새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아니 그랬다고 믿고 있는 얘기가 뜬금없이 등장할 땐 좀 황당하다. 무의식... 아, 그 부분까지 비워야 하고, 맡겨야 하는 것일까? 기도 중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이런 표현을 종종 듣게 되는데, 정말이지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하게 해달라고 분명하게 요청해야 할 모양이다.
꿈에 대해 권위있는 해석이 아직 없는 것 같고, 대개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꿈을 이해하는 것 같다. 요 며칠 惡夢을 꿔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에 보았다.
악몽이 뭘까? 을 여러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깼을 때 '휴,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싶으면 악몽을 꿨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며칠 간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출현했고, 영화 여러 편 찍었다. 굳이 장르로 얘기하자면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시원하게 웃기지도 않고 아픈 부분을 꼭꼭 찌르는...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관계 혹은 감추고 싶은 내 안의 어떤 것들이 꼭 드러난다. 요즘 많이 생각했던 주제나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는 좀 더 이해할만하지만, 어제처럼 요새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아니 그랬다고 믿고 있는 얘기가 뜬금없이 등장할 땐 좀 황당하다. 무의식... 아, 그 부분까지 비워야 하고, 맡겨야 하는 것일까? 기도 중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이런 표현을 종종 듣게 되는데, 정말이지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하게 해달라고 분명하게 요청해야 할 모양이다.
2008년 11월 1일 토요일
축제 (1996, 임권택)
난 임권택 감독 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다. 왜 너무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작품'이나 '물건'들은 값어치있게 여기지 않게되는 그런 심리 있잖은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런 이유로 내게 괄시를 받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고흐도 그 중 한명이어서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고흐 그림 때문에 막상 화가에 대해서, 그 그림에 담겨있을 지도 모를 '깊은 뜻'에 대해서 더 알아볼 생각을 하질 않았었다. 그런 탓에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 방문에선 살아 생전 그림 몇 점 팔아보지 못해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았던 화가의 그림들이 그토록 '삐까뻔쩍'한 건물 속에 담겨져 있다는 어색함만 확인하고 왔고, 수 년 전 브레멘에서 열려서 성황을 이루었던 고흐 전시회에선 전독일에서 구름떼처럼 몰려든 독일의 그 중산층, 고만고한해 보이는 문화병 환자들 구경한 기억 밖에 남아있지 않다. 최근 읽은 클리프 에드워드(Cliff Edwards)의 책 '하느님의 구두. 거룩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989/2004)가 비로소 고호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 비슷한 역할을 임권택 감독에 대해서는 '축제'가 했다. 꼽아보니 애써 찾아 보지 않았던 걸 고려하면 이 양반 영화를 많이 본 편이다. '씨받이'(1986), '아제아제바라아제'(1989)에 대해선 별 기억이 남아있지 않고, '장군의 아들'(1990)은 그저 그런, '태백산맥'(1994)은 내가 봤던 임권택 영화 중 최악 [10권짜리 대하소설을 2시간 남짓한 영화로 옮기면서 너무도 싱거운 얘기가 되어버렸다], '취화선'(2001)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외국 손님용' 혹은 '국제 영화제용'이란 인상을 너무 강하게 풍기는 게 거슬렸고,
역시 '서편제'(1996)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다행히도 '축제는 '서편제'에 가까운 편이었다. 하지만 '서편제'처럼 물흐르듯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윗길로 쳐줄 수는 없겠다.
재미있는 건 <서편제>와 <축제>가 모두 이청준 원작이라는 점. 한 때 이청준의 작품을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있었던 터라 생각해 보면 까닭있는 '우연'일수도 [이청준 원작인 '밀양'도 재미있게 봤으니...]. 이청준 원작이라고 하지만 약간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서편제>의 경우 소설이 완성된 이후에 영화로 각색되어 나온 것이고, <축제>는 "임권택 감독의 요청에 의해 처음 시나리오와 대본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을 새삼 소설로 도로 펼쳐낸 " 것이라고 한니... 축제는 자전적 얘기라고 한다. 주인공은 소설가고, 배경도 남도 어디이고, 좋은 학교를 나왔는데 고작 소설가나 하고 있고, 군수가 대학 친구이고... 허나 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전적 얘기임을, 안성기가 이청준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영화는 사실 그리 극적인 이야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 주인공 노모의 장례를 치루게 위해 모여든 식구들, 친척들, 친구들,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갈등... 죽음이 산 사람들의 관계를 새로이 배열하는 그런... 한 가지, 이오덕 선생께서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축제>(祝祭)가 일본말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제목이 좀 찜찜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잘 어울림을 알 수 있다. 영화 포스터를 보라. 상복을 입고 활짝 웃는 모습이라니... 우리나라 영화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블랙코미디'풍이랄까... ["우리나라의 제사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지낸다. 그래서 제사 제(祭)자 앞에 축(祝)자를 붙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의 제사는 시끄럽게 떠드는 행사로 치른다." 이오덕 지음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임권택 감독은 우리 전통을 어떻게든 영상으로 남겨놓으려 애쓰는 티를 '너무' 내는 편인데...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화면을 잡아내기도 하고, 또 영화 곳곳에 해설용 자막을 집어 넣기도 한다. '취화선'에서 그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서편제'에서도... '축제'는 그 사용이 가장 심한 편인 것 같다. 얼핏 다큐를 보는 것 같기도... 물론 좋은 공부이긴 하지만 영화의 영화로서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고 판단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자막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길 위 군데 군데 놓인 돌멩이들 같다.
영화'축제'의 장점도 많이 있다. 특히 조연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자들은 하나 같이 자연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하고 연기 또한 빼어나다. 허나 너무 빼어나서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기도 하다. 얼핏 무대 위의 연기 같은 것 (연극배우 출신들이 적지 않을 거라는데 백원 건다^^). 주연급도 다 괜찮은 편인데, 다만 갈등관계, 긴장감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오정해의 연기가 좀 거슬린다. 위악적인, 좀 까칠하고 튀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음을 고려해도, 시종일관 크게 바뀌지 않는 오버성 평면적 연기로 일관하는 건 좀 그렇다. 임권택 감독이 특별히 사랑하는 배우인것 같은데, 더 클 수 있을지... 아니, 10년도 더 된 영화이니,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면 안성기 연기는 나무랄데 없다. 이토록 잘 맞는 '옷'을 입은 안성기를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듯.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또 영화의 내러티브를 진행시키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헤치는 인물로 서울말 쓰는 기자를 설정해 놓은 점도 거슬린다. 끝으로 영화는 액자소설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장례식 이야기와 나란히 동화같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그 이야기는 결국 극중 작가가 쓴 동화의 내용이라는 점이 끝무렵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얻긴 하는데, 영화의 흐름을 끊는다. 꼭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소설 '축제'의 구성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건 아닌지... ] 내 눈에 이런 점들이 보인다는 얘기일 뿐이고, 영화는 거장의 손길이 닿은 작품답게 생동감 넘치고, 좋은 영화로 볼 근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내게 있어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한국 전통장례를 체험하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 죽음을 보는 우리의 '시선', 죽음에 대한 우리 '목소리'를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재미있는 건 <서편제>와 <축제>가 모두 이청준 원작이라는 점. 한 때 이청준의 작품을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있었던 터라 생각해 보면 까닭있는 '우연'일수도 [이청준 원작인 '밀양'도 재미있게 봤으니...]. 이청준 원작이라고 하지만 약간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서편제>의 경우 소설이 완성된 이후에 영화로 각색되어 나온 것이고, <축제>는 "임권택 감독의 요청에 의해 처음 시나리오와 대본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을 새삼 소설로 도로 펼쳐낸 " 것이라고 한니... 축제는 자전적 얘기라고 한다. 주인공은 소설가고, 배경도 남도 어디이고, 좋은 학교를 나왔는데 고작 소설가나 하고 있고, 군수가 대학 친구이고... 허나 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전적 얘기임을, 안성기가 이청준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영화는 사실 그리 극적인 이야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 주인공 노모의 장례를 치루게 위해 모여든 식구들, 친척들, 친구들,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갈등... 죽음이 산 사람들의 관계를 새로이 배열하는 그런... 한 가지, 이오덕 선생께서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축제>(祝祭)가 일본말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제목이 좀 찜찜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잘 어울림을 알 수 있다. 영화 포스터를 보라. 상복을 입고 활짝 웃는 모습이라니... 우리나라 영화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블랙코미디'풍이랄까... ["우리나라의 제사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지낸다. 그래서 제사 제(祭)자 앞에 축(祝)자를 붙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의 제사는 시끄럽게 떠드는 행사로 치른다." 이오덕 지음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임권택 감독은 우리 전통을 어떻게든 영상으로 남겨놓으려 애쓰는 티를 '너무' 내는 편인데...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화면을 잡아내기도 하고, 또 영화 곳곳에 해설용 자막을 집어 넣기도 한다. '취화선'에서 그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서편제'에서도... '축제'는 그 사용이 가장 심한 편인 것 같다. 얼핏 다큐를 보는 것 같기도... 물론 좋은 공부이긴 하지만 영화의 영화로서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고 판단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자막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길 위 군데 군데 놓인 돌멩이들 같다.
영화'축제'의 장점도 많이 있다. 특히 조연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자들은 하나 같이 자연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하고 연기 또한 빼어나다. 허나 너무 빼어나서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기도 하다. 얼핏 무대 위의 연기 같은 것 (연극배우 출신들이 적지 않을 거라는데 백원 건다^^). 주연급도 다 괜찮은 편인데, 다만 갈등관계, 긴장감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오정해의 연기가 좀 거슬린다. 위악적인, 좀 까칠하고 튀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음을 고려해도, 시종일관 크게 바뀌지 않는 오버성 평면적 연기로 일관하는 건 좀 그렇다. 임권택 감독이 특별히 사랑하는 배우인것 같은데, 더 클 수 있을지... 아니, 10년도 더 된 영화이니,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면 안성기 연기는 나무랄데 없다. 이토록 잘 맞는 '옷'을 입은 안성기를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듯.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또 영화의 내러티브를 진행시키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헤치는 인물로 서울말 쓰는 기자를 설정해 놓은 점도 거슬린다. 끝으로 영화는 액자소설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장례식 이야기와 나란히 동화같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그 이야기는 결국 극중 작가가 쓴 동화의 내용이라는 점이 끝무렵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얻긴 하는데, 영화의 흐름을 끊는다. 꼭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소설 '축제'의 구성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건 아닌지... ] 내 눈에 이런 점들이 보인다는 얘기일 뿐이고, 영화는 거장의 손길이 닿은 작품답게 생동감 넘치고, 좋은 영화로 볼 근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내게 있어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한국 전통장례를 체험하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 죽음을 보는 우리의 '시선', 죽음에 대한 우리 '목소리'를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强敵

인용한 글과 사진은 건축가 김진애씨 칼럼에서 가져왔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제봤던 조선일보 기사를 떠올렸다. 아, 그것도 칼럼이었던가? 발로 쓴 것 같은... 지방대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는 현상을 너무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지적해서 불쾌함을 안겨주기도한... 일부를 인용하면...
"지방대학에 대한 편견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약 200여개의 4년제 대학이 있다. 이 중 서울 소재대학은 45개교, 22.5%다. 나머지 77.5%인 155개교는 비서울 지역에 위치한다. 이들 대학들은 '인(in)서울' 대학과 '지방대학'으로 불린다. ...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방대를 수도권대학과 '지잡대(지방에 잡스러운 대학)'로 분류한다. 수도권대학은 거리에 따라 학교 서열이 달라진다. 서울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접근성이 떨어질수록 학교평가가 절하된다. 지잡대는 지방에 소재하고 있는 존재감 없는 대학으로 인식된다. '지잡대'도 '지거국', '돋보잡대', '지잡의대' 등으로 구분된다. '지거국'은 지방의 거점 역할을 하는 국립대, '돋보잡대'는 약간 돋보이는 지방대학, '지잡의대'는 지방의 의대라는 뜻이다. "
'지잡대' 같은 혐오스런 표현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구글해보니 꽤 많은 검색결과를 알려준다. 허나 아무리 저자거리에서 그런 표현을 쓴다고 하더라도, 자칭 일등신문이 그런 것까지 친철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글쓴이는 한병선이라는 교육평론가. 교육평론가는 또 뭔가? 참, 가지가지한다.
최근 미국에서 돈을 받기로...스와프, 스머프... 어쩌구 해서 한국 시장이 좀 안정을 찾아가는 모양이다. 유로가 1,500대까지 내려갔다고 하고 (오늘은 1,600대인 것 같긴 하지만...). 그러자마자 들려오는 소식은 환율급등 못잖게 우울한 혹은 으스스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진애 선생이 전하는 대로 "불황에 수도권에 더 투자하여 그 이익을 지방에 나눠주는게 낫다... 30일 국가경쟁력위원회(위원장:사공일)를 앞세워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수도권 투자활성화 대책’의 명제입니다".
그리고 오늘자 한겨레에 따르면... "정부·여당이 국민적 역량 결집이 절실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법안과 정책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7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초당적 협력과 사회 각 분야의 협력을 요구한 지 4일 만이다. ...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날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박희태 대표와 한승수 총리, 정정길 대통령실장 등이 참석한 고위당정회의를 열고 정기국회 법안처리 대책 등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당정 수뇌부는 전날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확정한 불법시위 피해자 집단소송제 등 이른바 ‘떼법 방지 법안’, 금산분리 완화를 담은 은행법, 대기업의 방송진출을 허용한 방송법·신문법 등 131개 ‘이명박 중점 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난 2MB와 그 일당을 보면서 조직을 망치는 리더 유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머리가 나쁘지만 부지런한 사람". 허나 그들이 망치는 건 그냥 단순한 한 조직이 아니지 않은가. 비극의 시작이다. 경제위기 때문에 그 동안 좀 조용했던 것 뿐이지... 이들은 부지런할 뿐 아니라 집념까지 강한 강적 중 강적이다. 누가알랴. 시절이 더 좋아지면, 운하파겠다고 다시 덤벼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