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30일 화요일

대개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오늘 아침처럼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으면 좀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자꾸 의식하지 않으려고 밖으로 밖으로 몰아 내려 애쓰던 생각, 아이디어 한 조각이 소재가 되어 한 편의 드라마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겪었던 그 황당한 '시츄에이션', 오해 그리고 내 '변명' 혹은 '논변' 내용이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내 의식 속에 남아 있다. 어제 깊은 잠을 방해하는 외적 요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찜찜하다. 맺힌 일들 없도록 가능한 드러내면서 유하게 살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얼마 전에 본 '다큐'에선 보면 수십년 동안 묵은 그런 '쓴 뿌리'가 있어서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사례를 보기도 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생각만큼 쉽지 않은 것 같다. 마음 혹은 심리체계의 자율성, autopoiesis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꿈에 대한 루만의 생각을 우연히 발견했다. Deutschland Radio에서 루만 메모상자를 다룬 적이 있는데 그 방송 원고에서 (여기). 유감없이 발휘되는 루만식 건조한 유머도 들어 있다.

"Zettel Nr. 52/25s: Träume – Bewußtsein mit schlechter Beleuchtung und verminderter Fähigkeit, die Differenz intern/extern zu handhaben. (...)
Zettel Nr.52/25s1: Träume sind unbeobachtbare Beobachtungen. Eben deshalb fehlt ihnen der Realitätswert."

"꿈: 조명 상태가 좋지 않고 내부/외부 구분 능력이 떨어져 있는 의식 상태
꿈은 관찰불가능한 관찰이고, 바로 그 때문에 꿈엔 현실가(價)(현실감感?)가 모자란다."

Gibt es in unserer Gesellschaft noch unverzichtbare Normen?

youtube에서 가끔씩 'Luhmann'을 검색해 보는데 오늘 새롭게 건진 게 있어서 연결해 둔다. "Gibt es in unserer Gesellschaft noch unverzichtbare Normen?" 제목의 강연 중 일부... 아마 시작 부분인듯... "Meine sehr geehrte Damen und Herrn. In dem Titel des Vortrags kommen Worte vor, die Sie kennen. Sonst würden Sie vermutlich gar nicht gekommen sein..".



찾아보니 이 강연은 1991.12.11 'Hospitalhof in Stuttgart'에서 있었는데,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겠다. 강연 내용은 이미 단행본으로 나온 바가 있고 (1993) "Die Moral der Gesellschaft"(2008)에도 실려있다. 영역본이 Soziale Systeme 2008년 호에 실리기도 했는데, 내려 받을 수도 있다: "Are There Still Indispensable Norms in Our Society?" 강연 영상이 올 해 DVD로 나온 모양인데 유투브엔 아마도 홍보 목적으로 일부 올려 놓은 듯. DVD 정보는 여기
그렇담 이 강연의 제목에 대한 루만의 답은? 현대 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규범이란 것이 아직 존재하는가? 아직 꼼꼼하게 읽진 않았지만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사회에선 '가치' (Werte, values)에서 그런 규범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 같다 (그 이전 사회에선 '자연법' 등으로). 이 글에서도 언급되지만 루만은 한 편으로 자연법, 주체, 이성 등에서 규범적 근거를 찾는 접근을 낡은 유럽적 사고라고 배격하지만 동시에 'anyting goes'적 접근 - '포스트 모던'? - 도 피하려 한다. 나는 그런 점을 루만의 가장 큰 장점이자 혁신적인 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내 주장을 시큰둥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적지 않게 본다. 그렇다. 모두가 루만에 동의하거나 높게 평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국정치의 이념과 사상 - 보수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급진주의" (강정인, 하상복, 김수자, 2009, 후마니타스)


한국에 있었더라면 당장 샀을 책. 인터넷에 내용 요약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서 일부 인용해 놓는다. 그럴듯 하게 들리고 요즘 내가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방향과도 맞아 떨어지는 그런 설명인데, 이런 테제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 이승만은 독립 운동에 대한 기여로 인해, 박정희는 경제적 민족주의의 일환으로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추진한 업적으로 인해, 각각 정권의 '반민주성'에도 불구하고 '반민족적'이라는 비판을 어느 정도 비켜 가거나 상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에 광주 민주 항쟁을 짓밟고 출범한 전두환 정부는 그 정부가 반민주적이기 때문에 바로 '반민족적'이라는 비판을 상쇄할 수 있는 이념적 자원을 태생적으로 결여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이후의 통치 과정에서도 민주주의는 물론 민족주의의 관점에서도 정당성의 결함을 메울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정부는 급진화된 저항 세력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운 연합 공세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으며, 궁극적으로 1987년의 6월 항쟁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한겨레가 이 책과 관련해서 강정인 교수 인터뷰 기사를 실었는데 일부 오려 놓는다. 나로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설명이다.

“서구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주의가 출현하고, 이후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사회주의가 등장합니다. 반면 한국 같은 후발국가에서는 구질서의 이념이 잔존하는 가운데 온갖 근대 이념들이 동시적으로, 급작스럽게 출현합니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 안에 과거 질서인 권위주의와 미래 질서인 자유민주주의가 병존하는가 하면, 같은 시기에 등장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두고 격렬하게 충돌하게 되는 거지요.”

강 교수가 볼 때 보수주의 정권인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부가 붕괴한 것은 그들이 ‘세계시간의 압력’에 의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자유민주주의라는 지배이념이 권위주의적 통치행태와 충돌하면서 지속적인 정당성 위기를 불렀기 때문이다. 서구에서와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전통이 취약한 것도 마찬가지다. 해방 직후 한국의 정치현실을 자유주의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 이념적 활력과 계급 역량이 취약했던 상황에서 자유주의보다 더 광범위한 호소력을 지닌 사회주의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일거에 보수·반동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우파 대중운동

오늘 프레시안에 실린 손호철 교수의 칼럼이 요즘 생각하던 바를 제대로 건드리고 있어서 기록으로 남겨두려 한다.

1922년 로마. 검은 제목에 흰 완장을 찬 군중들이 거리를 장악하고 역사를 암흑으로 몰고 갔다. 역사적인 파시스트 대중운동이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물론 대중운동이 파시즘을 규정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인가는 논쟁적이다. 파시즘을 1930년대 대공황기에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몰락한 중산층과 룸펜플로레타리아트 등 광범위한 대중적인 지지와 동원에 기초한 독재체제로 이해하는 일반적 방식에 비해 파시즘의 등장은 위로부터의 쿠데타 등 다양하며 대공황기에 남유럽과 동유럽 등 세계자본주의의 반주변부 전반에 생겨났던 체제로 인식하는 학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문제의식에 기초해 일부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은 1980년대 피노체트 정권, 브라질 군사정권 등을 대중운동과 대중적 지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종속적) 파시즘이라고 주장했고 국내 학계에서도 이같은 입장을 채택해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종속적) 파시즘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시즘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극우적 대중운동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역사의 가장 비극적 현상 중의 하나이다.

이와 관련, 우리 사회에서도 최근의 경제공황과 관련해 국가폭력의 증가와는 별개로 독일과 같은 파시즘적인 대중운동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겨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난 3월 출범한 애국기동단이다. 해병대 구국결사대, 여군 전우회, 특별경호단 등으로 구성된 이 민간 극우조직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인 진실, 정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며 "종북반역 세력을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는 일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는 섬뜩한 선서를 했다.

그리고 이들 애국기동단과 고엽제전우회 회원 40여명은 지난 24일 새벽 시청 앞 대한문 앞에 설치되어 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민분향소에 난입해 강제 철거하는 폭력을 행사했다. 즉 공언한 대로 직접 폭력행사에 나선 것으로, 파시스트 대중운동의 단초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아직 이 같은 운동은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방공간에 나타났던 서북청년단과 같은 백색테러조직이 부활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동안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온 (좌파)신자유주의 정책과 최근에 터진 세계경제위기와 이명박 정부의 우파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생존의 벼랑에 몰린 대중의 절망과 분노가 1930년대의 독일과 이탈리아처럼 엉뚱하게도 노동자계급과 진보세력으로 향할 경우 사태는 무서운 방향으로 전개되고 말 것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이미 극우세력의 지지층인 영남, 50대 이상의 노령층,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이외에도 경제위기가 장기화될 경우 퇴출되고 있는 600만 명 수준의 자영업자, 100만명에 이르는 실업자와 850만명의 비정규직, 잠재적 실업층인 20대에 주목해야 한다. 26일 열린 맑스 코뮤날레의 종합토론에서도 심각하게 논의되었지만 이들의 분노가 이명박 정부로 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 노동조합=노동귀족, 공기업=철밥그릇 같은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에 호응해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을 공격할 수도 있다.

대중의 심리란 복잡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같은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날 토론에서는 노동운동이 지금과 같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투쟁을 벗어나 이들 사회적 약지들의 이익을 보다 강력하게 대변하고 이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주장 등이 제기되었지만 안타깝지만 딱 맞는 해답은 없다.

그러나 최근 극우단체들의 폭력를 보면서, 한국에도 파시스트 대중운동이 오는가 하는 불행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황우석 사태나 '디 워' 논쟁 때 '대중 파시즘' '대중 독재' 논의가 등장하기도 했었다. 유학생들끼리 가졌던 세미나에서 그런 내용을 언급했다가 대중을 무시하는 먹물근성, '파시즘'을 함부로 들먹이다니... 그런 반응을 접한 적이 있는 터라 2mb 정부 아래에서 드러나는 이런 변화가 새삼스럽다. 박정희 정권이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국민총동원체제를 벌였고 그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걸 두고 대중운동이라고 부르긴 힘들 것이다. 그러니 그 시기는 대중운동 없는 파시즘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 파시즘적인 대중운동의 기미는 공교롭게도 민주주의 이후에 보이기 시작했다. 월드컵, 황우석, 디워 지지는 그 연장 선상에 있는 것들이다. 지난 해 촟불집회나 노무현 전대통령 애도의 물결은 오히려 민주화 운동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어떤 기준? 아직 모르겠다. 어쨌든 2002 월드컵에서 드러난 스포츠 민족주의는 자본, 국가, 매스미디어, 스포츠권력 등이 멍석을 깔긴 했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박스컵' 같은 정부가 만들어 낸 스포츠 민족주의와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과학민족주의의 경우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박정희 시절 '전국민의 과학화'와 '황우석 지지' 사이엔 일부 연결점도 있지만, 전자가 위로부터 민족주의였다면 후자는 아래로부터 민족주의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손 교수는 "특히 이미 극우세력의 지지층인 영남, 50대 이상의 노령층,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이외에도 경제위기가 장기화될 경우 퇴출되고 있는 600만 명 수준의 자영업자, 100만명에 이르는 실업자와 850만명의 비정규직, 잠재적 실업층인 20대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들 중에는 빨간 마후라를 들고 나타나시는 '해병전우회'나 '반공...' 도 있지만 인터넷 등 매체를 자유자재로 이용하고, 세련된 논리를 만들어 내도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mb 정부가 그렇게 뻔뻔스럽게 나올 수 있는 데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 80년 이후, 또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묵은 과제들이 조금씩 청산된 이후, 이젠 본격적으로 계급갈등, 이데올로기 갈등이 나올 수 있는 여러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 갈등이 '대중운동' 같은 힘 싸움, 길거리 위 세력대결의 형태로 불거나오지 않아야 할텐데... 어떤 목적을 위해서건 길거리 정치라는 방식을 통하는 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듯하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든 이 정부에 궐기하고, 저항하라고 선동하는 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처방인 것 같다. 지금은 민주화운동기가 아니다. 기존 질서를 근원적으로 바꾸기 힘들 정도로 '안정된' 상황에서 운동이 가져오는 변화는 '반동'일 수도 있다. 우파 대중운동... Wer weiss...

2009년 6월 27일 토요일

삶과 죽음: 디지탈 혹은 아나로그?

'죽음'은 일상의 영토 바깥으로 밀려나서 이제 특별한 계기가 아니면 직접 대면할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 그렇게 밀려난 죽음이 언론의 영토 안으로 밀려 드는 것인양 우리는 그렇게 대개 한 다리 건서서 죽음을 접한다. 죽음과 삶은 흔히 이것 아니면 저것, 즉 binary 혹은 디자탈적으로 이해하지만 - 다시 말해 죽지 않은 모든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 사실 죽음과 삶의 관계는 '아나로그'로 보는 게 맞을 듯 하다. 우리는 출생과 삶의 종점 위 어느 한 점에 있는 것이고, 그렇게 보면 사는 건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게 사는 것이고... 뭐, 그런 개똥철학... 얼마 전 돌아가신 그 분이 남긴 말,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그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이런 저런 경로로 訃音을 여럿 듣게 된다. 독일식으로 '미햐엘 약존'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그 양반의 죽음, 사회학 이론사에서 맑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자유주의적 반론으로 한 페이지를 차지하던 Ralf Dahrendorf 선생의 부고에다, 며칠 전 학교소식지에선 문학전공 교수였던 Jörg Drews 교수의 부음도 읽었다. Drews 교수는 한국문학에 대한 짧은 기사를 쓰기 위해서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한 적도 있어서 그 죽음의 의미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70세면 아직 한창인데.... Dahrendorf교수의 죽음은 학부시절 들었던 Popper의 죽음이나 들뢰즈의 자살 소식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마이클 잭슨이야 더 멀다. 영국에서 다이애나비의 죽음 이후로 가장 충격적인 죽음이라고 하던데, 내게도 딱 그 정도 무게를 갖는... 난 마이클 잭슨의 노랠 좋아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워낙 '댄스음악'을 즐기지 않는데다, 너무 대중적인 것들은 일단 회피하려는 심리가 그 땐 더 강했다. 혹 누가 알랴. 노통의 죽음 이후에 그 양반을 '재발견'한 이들이 그렇게 목놓아 애도하듯이, 나도 '약존'씨를 재발견하며 그의 천재성을 몰라 본 내 짧은 안목을 탓할지. 나보다 몇 해 어린 중국인 '동료'는 그 양반 노래 전곡을 '소장'하고 있는 광팬이라 지난 주말 '애도'하며 보냈다고 한다. 나름 애도하는 마음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양반 노래 'Ben'을 연결해 둔다. 아.. 저랬던 소년이...




어찌되었건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더 민감해지는 건 적어도 내게는 분명하다. 삶과 죽음이 binary하게 이해되기 힘든 카데고리라는 건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는 얘기지만, 최근에는 인간이 그 경계 설정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이 커지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기도 하다. '생명윤리'가 각광을 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존엄사 (안락사), 낙태, 배아연구, 연명기구 사용이나 좀 더 고전적인 주제로 '사형' 같은 경우가 있겠다.

2009년 6월 24일 수요일

the end of the beginning

오늘 IHT에 실린 최근 이란 사태에 대해서 Roger Cohen이 쓴 칼럼 제목이다. 1979년 이란 혁명은 거의 일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번엔 시작하는 것 같더니 곧 사그러 들고 있다는... 벌써 수십 명이 사망하는 등 폭압적 진압 탓이겠지만, Twitter revolution 운운하던 얘기들이 참 민망해 지는 상황이다. 인터넷, 트위터 등의 기여를 얘기하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지난 해 '촛불 시위'를 떠올렸는데, 쉽게 사그라드는 걸 보면서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이런 것도 세계화 추세인가... 사회운동 연구자들에게 재미있는 주제임에 분명하다. 뭔가가 있다. etwas steckt dahinter... 갈등과 저항의 일상화, 민주주의의 일상화... 극단을 피하는 그런 메카니즘이 마련되 있는 것이다. 학습효과라고 해도 좋고, 역사의 발전이라고 해도 좋을... 이명박 정권이 박정희, 전두환 정권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이런 맥락에서 발견해야 할 것 같고... 그런 메카니즘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걸 더 고민해 봐야할 듯.

독재 논쟁

떠 오른 생각을 잃기 아까워서 크게 마음이 동하진 않지만 숙제하는 마음으로 써 본다. 아침부터...
하나는 이명박 정부 성격 논경,'독재'에 대하여...
특별히 찾아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한국 언론을 들추다 보면 자연스럽게 접하는 내용들이다. 그 중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내는 두 글만 특별히 적어 두기로 한다.

우상호: 왜 독재라는 말이 나올까
김원: 다시 ‘독재’를 생각한다. 김대중-노무현 때도 비슷…추모 머문 대안의 후퇴

우상호의 주장은:

흔히 독재냐 아니냐를 따질 때,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느냐, 그리고 비판세력, 반대세력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판단한다. 어느 나라의 독재자도 자기 지지세력을 괴롭히거나 탄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법에 의한 통치는 독재적 행태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 참으로 한심한 이야기다. 독재자들은 다 법을 이용한다. 기존 법으로 반대세력의 입과 발에 재갈을 물리다가, 해당 법규정이 없으면 황당한 법(가령 마스크 금지법, 무차별 도청법 등)을 만들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 전두환 정권 때 감옥 간 수많은 민주인사들도 다 법의 심판을 받았다. 사형선고를 받고 숨진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도 다 법에 의해 끌려간 것이다. 무리한 수사와 고문, 정권의 눈치를 본 사형선고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간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법에 의한 지배가 독재가 아니라는 주장은 몰역사적인 주장이다. (...) 나는 이명박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규정하는 데에는 아직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후퇴 수준이 과거의 독재적 행태를 떠올리게 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지금의 국정운영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이명박 정권은 점점 더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틀린 얘긴 분명 아닌데 좀 뭐가 많이 빠진 듯하다. 시원한 분석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 것.

그렇담 김원의 얘기는 어떤가?

그럼 '독재'란 무엇일까? 담론 수준에서 독재는 '군부지배', '일당-일인의 전횡적 통치', '억압적 통치' 등이 아닐까? 요즘 보수정당이나 일부에서 자주 쓰는 '소통의 부재'란 아마도 시민사회와 반대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행정부와 다수 여당이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행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

되돌이켜 보면 이전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시기에는 소통이 잘 이루어졌나 질문하면 그 역시 아니다. 포퓰리즘적 통치에 기초한 정당제와 대의제의 약화는 2000년대 내내 지속된 현상이다. 그래서 최장집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라고 비판했고, 시민들에게 지적인 충격을 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

MB정권은 이전 정권에 비해 공권력으로 상징되는 억압적 국가기구의 사용이 잦다,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 등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 강력하다 등이 이를 보여주는 주된 현상들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전 정권에도 사회운동 등에 대한 탄압은 존재했고, 억압적 국가기구도 작동했다. 불안정노동, 구조조정, 노사관계로드맵 등을 기억하면 된다. 다만 우리는 너무 쉽게 잊을 뿐이다. 물론 억압적 국가기구 작동이 이전보다 노골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독재라고 부르는 근거는 아니다.

(...) '대안'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재를 부르는 순간, 그 대안은 민주주의가 되고, 대안-담론 수준의 민주주의는 정상적인 정당정치, 소통의 원활 등으로 좁혀진다. 다시 1987년 수준의 민주주의로 회귀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독재라는 담론을 사용하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 담론 수준에서 독재에 대항해 투쟁하자고 대중들에게 외치면, 대중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할 것이고, 그 민주주의는 87년 제8차 개헌에서 규정한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즉 민주주의의 계급성이 아주 쉽게 망각된다는 것이다. 지금 운위되는 민주주의는 이른바 독점자본의 정치적 외피로서 민주주의이다. 그 외피에 상처를 내는 반동적 부르주아지들의 지배에 대항하자는 것이 현재 시점이다. (...)

현재 억압적 국가기구의 작동은 '독재'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가 총자본의 장기적 정치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자율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나타난 상황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작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국선언이 확대되는 와중에 '시민사회는 독재에 맞서고 있다'는 주장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시민사회는 이념적인 면에서나, 조직적인 면에서 분화가 공고화된 상태이다. 지금 시국선언은 시민사회내 MB정권의 공권력의 과잉 사용과 시민사회내 이익매개 기능의 단절을 비판하며 나온 - 모두가 아니지만 적어도 최대 반대연합이란 의미에서 - 현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독재와 소통의 부재라는 현실 진단은 매우 제한적이고 현재 상황에서 사회운동의 대안을 스스로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안이 퇴영적인 만큼 설득력을 시민사회에서 좀 더 넓게 가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혹자는 87년 6월 이전을 회고하며, '좀 더 대중적인 슬로건'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별로 대중적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시민사회내 존재하는 대항세력의 입지를 좁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옛 민주당 대변인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단상'에 비하면 훨씬 던 시원한 분석이다. 역시 '레디앙'에 실린 글 답게 결론이 과격하다. 결국, "국가가 총자본의 장기적 정치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자율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나타난" 아주 "자연스러운 작동"인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고작 87년으로 회귀하는 소극적 대안 제시를 못마땅하면서 자본제적 질서를 뿌리째 뒤집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도 또 언제적 이야기인가.

2009년 6월 18일 목요일

interaction에서 비로소 결정되는 성향, 견해의 위치

好不好 드러내길 좋아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를 양 극단에 배치하면, 대개 개개인의 평소 성향은 그 중 어디쯤에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그 '성향'은 꽤 큰 편차를 보이면서 그 선상에서 이동할 것이다. 내 관찰에 따르면... [물론 그 표본 수가 극히 적지만^^] 그 이유는? 우리의 성향은 - 많은 경우 - 상대에 따라서 달라진다. 즉, 변함없이 고정된 성향이 있다기 보단, 우리 성향은 대개 interaction에서 비로소 결정된다. 好不好를 스스로 분명하게 드러내는 상대에겐 好不好를 드러내지 않기 쉽고, 그 역도 성립하고. 물론 사람품평회를 할 때 맞장구치면서 '씨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는 그런 성향의 조합도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 "'착한사람' X '착한사람'"의 조합도 있겠지만... 여하튼 대개 한쪽이 치우치는 것같으면 대개 어느 정도는 반발하려는게 인지상정인 것 같다. 好不好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의견의 대립의 경우에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는 것 같다. 물론 단순무식, 시종일관, "모든 빨갱이를 몰아내자"류의 '단순무식'도 없진 않지만, 머리 용량이 2mb만 넘어도 대개 의견이나 입장은 상대에 따라서 변하기 쉽다. 글쎄, 왜 그럴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否定의 힘

상대가 듣기 싫어할 것같은 말을 전달하기 위해 온갖 좋은 말, 긍정적인 표현을 동원할 때가 있다. 하지만 상대는 그 많은 듣기 좋은 소리 속에 묻어 놓은 싫은 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그런 능력을 도대체 우린 어떻게 보유하게 되었을까? 특별히 배우지도 않았을텐데... 아래에서 언급한 '私心' 알아채는 능력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否定'이란 놈은 여하튼 힘이 쎄다. 그러니 잘 다스려야 한다.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근대 한국은 언제부터

근대(성)(모더니티, modernity)은 사회학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 핵심에는 근대성이 단수인지 복수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다.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늘상 관찰하는 차이를 다르게 설명하는 것이다. 모두가 동일한 근대성을 향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좇아가고 있거나, 단일 근대성의 변주로 볼 수도 있고 - 이런 입장은 '유럽 혹은 서구 중심주의'나 심하게 표현하면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 있고, 근대(성)란 것도 단일한 것으로 이애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 multiple modernities (S.Eisenstadt) 그 대표적 이론이다. 물론 '근대(성)' 같은 거대 담론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도 물론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부 근대성 이론에 따르면 그같은 거대 담론에 두드러기를 내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적 시각마저도 근대성이 갖는 한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근대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회학 이론사를 좇아갈 수 없다.
나는 근대(성)을 단수로 보는 견해를 수용하는 편이다. '편이다'라고 한 것은 '수용한다'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기가 망설여지기 때문인데, 이 지구 사회의 변방 출신이 벗어버리기 힘든 '컴플렉스' 탓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리라. 특히 근대성은 그 자체가 세계적이고, 그러니 근대사회는 곧 세계사회이라는 입장, 그 근대 세계사회를 특징짓는 구조적 핵심적은 기능적 분화라는 체계이론적 근대 사회 이해가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체계이론이 얘기하는 근대성을 이루는 특성은 - 기능적 분화, 기능 체계들 간의 관계 등등 - 은 '이상형'을 진술하는 것에 가깝고 워낙 추상적인 표현이라, 실제로 그 특성은 지역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그런 다양성이 바로 근대성의 핵심적 특성이고... 이런 - 어찌보면 - 환원론적인 설명 방식만이 이론화 시도 자체를 포기하지 않고 복잡한 근대의 특성을 파악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체계이론적 근대성 이해는'varieties of modernity' (V. Schmidt)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이전은 분명 세계사회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러니 지구적 차원에서 동일하게 작동하는 그런 원칙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오버'라는 것이다. 물론 루만도 '분절적 사회'와 '위계적 사회' 같은 사회 유형을 도입하긴 하지만, 그런 사회 구분은 맑스주의와 달리 진화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시간적 구분만은 아닌 것이다. 근대 이전엔 지역적 차이가 크고, 지역간 영향을 주고받기야 물론 있었겠지만 그건 세계적 차원에서 동일한 거시적 사회 구성 원칙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거의 오백년 동안 지속된 세계사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은 그저 동아시아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또 근대 이전 한국에서 '근대성'의 맹아를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지구의 여러 지역은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적 질서에 - 때로는 강제적으로 - 편입되면서 근대 세계사회를 함께 만들어 나가게 된 것이다. 그 유럽 외 지역에서 볼 때 근대성은 이식된 것이다. 한국도 그런 지역에 포함된다 [이 경우 한국은 조선시대, 일제감정기 치하의 한반도, 해방이후 남한, 북한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
근대사회는 본질적으로 세계사회다. 그 근대 세계사회의 구조적 특징은 기능적 분화인데, 각 기능체계는 세계를 준거로 삼는다. 그런 기능체계의 등장과 세계화는 지역적으로 볼 때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근대, 근대 한국의 시작은 언제로 볼 수 있을까? 서구 문화와 접촉, 지식, 문물 등을 수용, 흡수한 것을 근대의 시작이라 볼 수 없고, 사회의 질서의 핵심 작동 원칙이 '기능적 분화'가 되고 세계적 차원의 기능체계에 참여하게 된 그 시점을 고려해야 한다.
아시아 지역이 서구와 접촉한 시점은 대개 16세기로 잡는 것 같다.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의 위상을 높이려는 예수회의 전략적 접근이었다고 보는 것 같고. 예수회 신부들은 인도, 일본 중국에 각각 1542년, 1549년, 1583년에 처음 도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임진왜란 중인 1593년 경남 응포에 예수회 신부가 처음 발을 디뎠다고 하고. 그 이후 한국은 오랫 동안 서구의 지식, 문물과 직접 대면하지 못했고 17, 18세기를 거치며 주로 명청을 통해 서학서, 서교서 등을 수용한다. 그러다 19세기 초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그런 접촉점도 줄어 들게 되고. 1876 개항, 1879 미국과 수교 등은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그런 사건이 한반도 커뮤니케이션 작동 방식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일거에 바꾼 것은 아니지만, 그 무렵 한반도는 이미 거스릴 수 없는 엄청난 근대의 압박을 받게 된다. 기능적 분화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체계가 대표적이다. 이미 아편전쟁(1840년 ~ 1842년)이후 중국 중심 세계관이 도전을 받았고, 특히 한국의 정치체계를 세계정치체계의 관점에서 보려는 논의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만국공법'의 유입, 조선제국의 성립 등이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 최근에 읽어 본 '국가' '국민'에 대한 개념사 연구들이 그 당신 구조적 변화와 의미론적 변화의 상호 관계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다른 기능 체계는 어떠한가? 여러 기능체계가 시차를 두고 상호작용하며 등장, 발전한 유럽과는 달리 후발국에선 정치체계, 특히 강력한 국가가 다른 체계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 물론 경제는 예외일 수 있다. 사실 다른 어떤 체계보다 경제의 세계화가 가장 먼저, 강력하게 진행되지 않았던가. 한국은 그 흐름에서 비껴나 있었지만. 어쨌든 한국의 경우 법, 경제, 교육, 종교 등 여러 커뮤니케이션은 오랫동안 신분적 질서라는 지배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위계적 분화가 지배적이었던 것. 그러니 신분제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과 기능적 분화의 원칙이 관철되는 것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시점은 대략 언제로 봐야 할까? 우선 갑오경장(1894)이 핵심적 계기가 아닐까. 갑오경장의 배경과 내용은 대략 이렇다.

"1894(高宗 31년)에 일본의 지원을 받은 온건 개화파 정권의 개혁, 봉건적 자의적 수탈, 착취의 누적 그리고 지방관의 횡포를 직접 계기로 폭발한 1894년 갑오 농민전쟁의 발발에 놀란 봉건 정부는 농민의 '폐정 개혁' 요구를 받아들여 개혁을 실시했다. 온건 개화파의 관료에 의해 추진된 이 개혁은 이미 갑신정변 때에 제시되었던 정강(政綱)과 박영효의 국정 개혁안을 그 사이 십 년 동안에 객관적 상황의 진전에 맞춰 구체적으로 하고, 정치, 경제, 사회생활 모든 영역에 걸쳐 실시했다. 정치적으로는 최고 국무기관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창설하고 과거제를 폐지(관리 임용법을 제정)하고 공금 횡령 관리를 엄벌, 변상하게 하고,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제정ㆍ경제적으로는 국가 재정 관리 체계의 일원화(갑신정변 때 제기됨). 화폐제도의 정비, 도량형의 통일, 조세의 전면적 금납화(金納化), 환곡(還穀) 제도 폐기(갑신정변 때 제기됨)들을 개혁했고, 사회적으로는 신분제 타파, 연좌제(連坐制) 폐지, 사노비법 폐지, 과부의 재가(再嫁) 허용 등 근대적 제도를 수립하려고 했다."

허나 갑오경장 무럽 한국은 자체적 근대화 동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신분제의 경우만 하더라도 실제로 무력화된 것은 일제감정기 이후라고 하고, 교육, 경제, 과학 등 여러 체계들의 작동을 돕기에 당시 한반도 국가의 역량이 터무니 없이 부족했다. 일제강점기를 거며 기능체계의 세계화 참여가 늘어났다. 이런 견해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체계이론의 '근대' '근대화'는 시기적인 구분일 뿐 그것을 역사적으로 '더 나은' 발전 단계라는 이해를 본원적으로 거부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가 없진 않다. 참고 문헌...)
한국의 기능적 분화의 기원을 이처럼 거슬러 잡는 입장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주제에 대한 논의 자체가 아직 없지만.... 예를 들어 1987년을 그 시작으로 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일제감정기는 물론이고 독재정권기는 정치(국가)가 과대대표된 사회로 봐야 하기 때문에, 그 경우 "체계의 자율성"을 금과옥조로 삼는 "기능적 분화"론에 어긋나 보이기 때문이리라. 허나 기능적 분화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지지않은, 서구에서도 수 세기를 걸쳐서 형성된 원칙이고, 지금도 진화 중에 있는 것으로 보고, 서구의 여러 지역에서도 기능적 분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기능적 분화의 다양성"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고, 그게 바로 "근대사회는 세계사회"라는 루만의 큰 그림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私心

私心을 표면적 의미로 이해하자면 私心을 갖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私心은 대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 정도로 이해되어서 대개 공적인 일이나 혹은 아주 사사롭지 않은 경우나 관계에 개인적 욕심, 이해를 관찰하려는 상황을 서술하는데 사용된다. 私心이 개입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불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심지어 私心을 품은 그 당사자 스스로도 확인해 줄 수 없을 때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해를 받고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하소연 하는 사례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허나 지금껏 살아 오면서 경험한 바로 사람들은 사사로운 마음을 분별해 내는 기가 막힌 센서를 가지고 있다. 언어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우리가 자주 '感'이라고 하는 그런... 굳이 '사심'은 아니지만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경우도 그러해서, 대개 '사심'이 개입되었거나 '집착'하는 경우 오히려 일을 그르칠 경우가 많다. 동서고금 그래서 고만고만한 격언들이 많이 전해져 오고 있지 않은가. 충무공의 生卽死 死卽生가 유명하지만, 수천년 전에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남겼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 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5). 남녀관계, 인간관계에서도 이 '법칙'이 통해서, "백번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정신이 통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대개는 붙잡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특히 한국에선 정치인이 私心없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권력'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보다는 정치가 싫다고 - 그 정치가 무엇이든 - 손사래를 치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기어코 붙잡아서 후보로 내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일반화하긴 힘들어서 우리는 대통령직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던 '준비된 대통령' 김대중 선생을 뽑기도 했고,'정치'를 잘 모른다는 2mb를 (앞으론 소문자로 쓰기로 했다. 대문자도 과분하다) 뽑기도 했다 (2mb를 뽑았을 때는 그의 노골적인 '정치 혐오증' 표출이 분명 도움이 되었으리라). 현대사회에선 私心이 제도화되어서, 예를 들어, 정치권력, 경제력을 추구하는 행동을 더 이상 私心있는 행위로 보지 않는다, 마련된 틀 안에서 '놀기만 한다면'. 그러니까 私心이란 의미론의 의미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달리 이해될 필요가 있다. 원래는 사적영역에 대한 얘기를 할 생각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현대사회' 운운하게 되었는데 (직업병!)... 어쨌든 私心을 갖지 않으려고 애쓸 일이다. 자유인의 필수 덕목이다. 私心이 있을 때 거리낌, 거리감이 생기고, 이런 저런 군말들에 신경쓰게 된다.

덧글: 私心을 갖는다는 건, '잔머리를 굴린다'고 얘기하는 그런 상황에 연결되는 것 같다. 차이가 있을텐데, 그게 무엇일까? 좀 더 생각해 볼 것.

2009년 6월 13일 토요일

숙제

글을 올리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사람 하나 없지만 6월도 초순을 넘긴 지금 이번 달 글이 하나도 없다는 게 은근히 부담이 된다. 생각해둔 쓸 거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막상 쓸 여유가 없어서 미뤄 둔 숙제처럼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서 초간단 모드로 털고 가려고 한다.

우선 최근 시국 관련...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하는 이들도 있고, 현 정권의 성격을 '독재'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지역 교수들이 낸 성명서에서 그런 '프레이밍'을 본 적이 있고, 어제인가 김대중님이 그런 말씀을 하며 궐기를 촉구하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워낙 시국이 각박하고 어이없고, 또 말도 안되는 고집을 피워대니 그런 극단적인 언사로라도 징계하고 싶은 심정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아니 많다. 이 시국은 우리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고 있다.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지... 이 정권은 이전 독재정권과 어떤 점이 다른지. 어떻게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할 지... 며칠 전 이 문제를 가지고 몇몇 유학생과 얘길 나눴는데 그 때 내가 한 얘기를 옮겨 놓으려고 시작했는데, 아... 쓰기 싫다. 정말 숙제하는 심정으로 핵심 테제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현상황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길게는 87년 이후, 짧게는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이뤄낸 성과도 있지만 극복하지 못한 여러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런 곪은 상처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 자화상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순기능도 있다. 언제가 쓴 글에도 언급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한국 최초의 계급정권이라고 봐도 좋다. 독재 정권은 독재라는 원죄 때문에 때로는 진보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고 대중, 국민들(그게 누구던 간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진보정권들도 워낙 활동 공간이 협소한 탓에 - 강력한 기득권 세력, 또 좌로부터의 공격까지 -, 또 우왕자왕하면서 진보적인 정책을 마음껏 펴기 힘들었다 (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하지 못한 것). 이명박 정권은 독재정권이 안고 있었던 정당성 결핍 같은 태생적 한계도 없고, 한국 사회의 강고한 기득권 세력이 뒷받침 해주니 언론, 검경을 수족처럼 부리며 마음껏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5년 동안 대한민국의 '오너' (혹은 '씨이오') 로 임명받았다고 생각하고, 또 민주주의를 다수의 지배라로 이해하는 초딩적 사고를 하고 있으니, 늘 숫자만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서울대 교수들이 성명서를 발표해도 수천명 교수 중에 몇 백명, 촛불시위를 해도 수천만 국민 중 고직 몇십만 많아야 몇백만, 이런 식이다. 그렇다고 독재로 몰아부쳐도 좀 곤란하다. 그러기 보단, 우선 좀 약해 보이긴 하지만, 헌법, 기본권 보장 이런 전략이 장기적으로 더 유익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서울광장 사용에 대해 어떤 의원이 했다는 말 '서울시 조례 따위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캬, 멋지지 않은가. 이 정권이 '법치'를 좋아하니 도대체 '법'이 뭘하자는 것인지, 그들의 이해하는 법의 기능의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워낙 철면피라 쉽게 먹히진 않겠지만, 그렇게 차근차근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원칙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물론 당장 급한 불을 끄고, 후안무치한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 좀 오버할 필요가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식인, 학자 집단에서는 좀 다른 반응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원칙을 세우는 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더 그러하다.

며칠 전 Kunsthalle에 갔었다. "1968. Die Grosse Unschuld"란 제목으로 꽤 큰 전시회를 열고 있다. 68운동에 직접 연관된 그림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그 무렵에 만들어진 당대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아담한 편인 Kunsthalle 내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공간을 이용해서 전시하고 있었으니, 전시 작품 수가 꽤 많았다. 현대미술이라 사실 이런 저런 볼 거리도 많다고 해야 할 것이지만, 받은 느낌은 너무 '구닥다리'같다는 것. 고작 40년 전 작품들인데도 백년, 2백년 혹은 거 오래된 작품들보다 더 낡아 보였다. 다들 어찌나 유치찬란한지 나름 튄다는 앤디 워홀의 'big electric chair' 세 점이 그나마 '고전미'가 있는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정도니... 모델인 전기의자는 다름 아닌 사형기구다. 베네통 광고 사진 철학의 뿌리는 워홀에 닿아있다고 해야할 듯. 최첨단이라고 하는 현대예술이 금새 촌스러워지는 현상은 '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함께 간 후배가 언급했다. 클래식 음악 쪽이라면 난 쉽게 '윤이상'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현대음악을 들을 기회란 그리 많지 않다). 어쨌든 현대예술에 오면 말이 많아진다. 구구절절히 설명을 해야 하고... 사실 그게 또 맛이기도 하다. 어쩌면 모처럼 가진 고급문화 '체험'이 별 소득 없이 끝난 건 '전문적 식견' 부족 탓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