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5일 월요일

근대 한국은 언제부터

근대(성)(모더니티, modernity)은 사회학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 핵심에는 근대성이 단수인지 복수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다.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늘상 관찰하는 차이를 다르게 설명하는 것이다. 모두가 동일한 근대성을 향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좇아가고 있거나, 단일 근대성의 변주로 볼 수도 있고 - 이런 입장은 '유럽 혹은 서구 중심주의'나 심하게 표현하면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 있고, 근대(성)란 것도 단일한 것으로 이애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 multiple modernities (S.Eisenstadt) 그 대표적 이론이다. 물론 '근대(성)' 같은 거대 담론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도 물론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부 근대성 이론에 따르면 그같은 거대 담론에 두드러기를 내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적 시각마저도 근대성이 갖는 한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근대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회학 이론사를 좇아갈 수 없다.
나는 근대(성)을 단수로 보는 견해를 수용하는 편이다. '편이다'라고 한 것은 '수용한다'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기가 망설여지기 때문인데, 이 지구 사회의 변방 출신이 벗어버리기 힘든 '컴플렉스' 탓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리라. 특히 근대성은 그 자체가 세계적이고, 그러니 근대사회는 곧 세계사회이라는 입장, 그 근대 세계사회를 특징짓는 구조적 핵심적은 기능적 분화라는 체계이론적 근대 사회 이해가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체계이론이 얘기하는 근대성을 이루는 특성은 - 기능적 분화, 기능 체계들 간의 관계 등등 - 은 '이상형'을 진술하는 것에 가깝고 워낙 추상적인 표현이라, 실제로 그 특성은 지역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그런 다양성이 바로 근대성의 핵심적 특성이고... 이런 - 어찌보면 - 환원론적인 설명 방식만이 이론화 시도 자체를 포기하지 않고 복잡한 근대의 특성을 파악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체계이론적 근대성 이해는'varieties of modernity' (V. Schmidt)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이전은 분명 세계사회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러니 지구적 차원에서 동일하게 작동하는 그런 원칙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오버'라는 것이다. 물론 루만도 '분절적 사회'와 '위계적 사회' 같은 사회 유형을 도입하긴 하지만, 그런 사회 구분은 맑스주의와 달리 진화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시간적 구분만은 아닌 것이다. 근대 이전엔 지역적 차이가 크고, 지역간 영향을 주고받기야 물론 있었겠지만 그건 세계적 차원에서 동일한 거시적 사회 구성 원칙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거의 오백년 동안 지속된 세계사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은 그저 동아시아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또 근대 이전 한국에서 '근대성'의 맹아를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지구의 여러 지역은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적 질서에 - 때로는 강제적으로 - 편입되면서 근대 세계사회를 함께 만들어 나가게 된 것이다. 그 유럽 외 지역에서 볼 때 근대성은 이식된 것이다. 한국도 그런 지역에 포함된다 [이 경우 한국은 조선시대, 일제감정기 치하의 한반도, 해방이후 남한, 북한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
근대사회는 본질적으로 세계사회다. 그 근대 세계사회의 구조적 특징은 기능적 분화인데, 각 기능체계는 세계를 준거로 삼는다. 그런 기능체계의 등장과 세계화는 지역적으로 볼 때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근대, 근대 한국의 시작은 언제로 볼 수 있을까? 서구 문화와 접촉, 지식, 문물 등을 수용, 흡수한 것을 근대의 시작이라 볼 수 없고, 사회의 질서의 핵심 작동 원칙이 '기능적 분화'가 되고 세계적 차원의 기능체계에 참여하게 된 그 시점을 고려해야 한다.
아시아 지역이 서구와 접촉한 시점은 대개 16세기로 잡는 것 같다.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의 위상을 높이려는 예수회의 전략적 접근이었다고 보는 것 같고. 예수회 신부들은 인도, 일본 중국에 각각 1542년, 1549년, 1583년에 처음 도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임진왜란 중인 1593년 경남 응포에 예수회 신부가 처음 발을 디뎠다고 하고. 그 이후 한국은 오랫 동안 서구의 지식, 문물과 직접 대면하지 못했고 17, 18세기를 거치며 주로 명청을 통해 서학서, 서교서 등을 수용한다. 그러다 19세기 초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그런 접촉점도 줄어 들게 되고. 1876 개항, 1879 미국과 수교 등은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그런 사건이 한반도 커뮤니케이션 작동 방식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일거에 바꾼 것은 아니지만, 그 무렵 한반도는 이미 거스릴 수 없는 엄청난 근대의 압박을 받게 된다. 기능적 분화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체계가 대표적이다. 이미 아편전쟁(1840년 ~ 1842년)이후 중국 중심 세계관이 도전을 받았고, 특히 한국의 정치체계를 세계정치체계의 관점에서 보려는 논의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만국공법'의 유입, 조선제국의 성립 등이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 최근에 읽어 본 '국가' '국민'에 대한 개념사 연구들이 그 당신 구조적 변화와 의미론적 변화의 상호 관계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다른 기능 체계는 어떠한가? 여러 기능체계가 시차를 두고 상호작용하며 등장, 발전한 유럽과는 달리 후발국에선 정치체계, 특히 강력한 국가가 다른 체계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 물론 경제는 예외일 수 있다. 사실 다른 어떤 체계보다 경제의 세계화가 가장 먼저, 강력하게 진행되지 않았던가. 한국은 그 흐름에서 비껴나 있었지만. 어쨌든 한국의 경우 법, 경제, 교육, 종교 등 여러 커뮤니케이션은 오랫동안 신분적 질서라는 지배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위계적 분화가 지배적이었던 것. 그러니 신분제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과 기능적 분화의 원칙이 관철되는 것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시점은 대략 언제로 봐야 할까? 우선 갑오경장(1894)이 핵심적 계기가 아닐까. 갑오경장의 배경과 내용은 대략 이렇다.

"1894(高宗 31년)에 일본의 지원을 받은 온건 개화파 정권의 개혁, 봉건적 자의적 수탈, 착취의 누적 그리고 지방관의 횡포를 직접 계기로 폭발한 1894년 갑오 농민전쟁의 발발에 놀란 봉건 정부는 농민의 '폐정 개혁' 요구를 받아들여 개혁을 실시했다. 온건 개화파의 관료에 의해 추진된 이 개혁은 이미 갑신정변 때에 제시되었던 정강(政綱)과 박영효의 국정 개혁안을 그 사이 십 년 동안에 객관적 상황의 진전에 맞춰 구체적으로 하고, 정치, 경제, 사회생활 모든 영역에 걸쳐 실시했다. 정치적으로는 최고 국무기관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창설하고 과거제를 폐지(관리 임용법을 제정)하고 공금 횡령 관리를 엄벌, 변상하게 하고,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제정ㆍ경제적으로는 국가 재정 관리 체계의 일원화(갑신정변 때 제기됨). 화폐제도의 정비, 도량형의 통일, 조세의 전면적 금납화(金納化), 환곡(還穀) 제도 폐기(갑신정변 때 제기됨)들을 개혁했고, 사회적으로는 신분제 타파, 연좌제(連坐制) 폐지, 사노비법 폐지, 과부의 재가(再嫁) 허용 등 근대적 제도를 수립하려고 했다."

허나 갑오경장 무럽 한국은 자체적 근대화 동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신분제의 경우만 하더라도 실제로 무력화된 것은 일제감정기 이후라고 하고, 교육, 경제, 과학 등 여러 체계들의 작동을 돕기에 당시 한반도 국가의 역량이 터무니 없이 부족했다. 일제강점기를 거며 기능체계의 세계화 참여가 늘어났다. 이런 견해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체계이론의 '근대' '근대화'는 시기적인 구분일 뿐 그것을 역사적으로 '더 나은' 발전 단계라는 이해를 본원적으로 거부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가 없진 않다. 참고 문헌...)
한국의 기능적 분화의 기원을 이처럼 거슬러 잡는 입장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주제에 대한 논의 자체가 아직 없지만.... 예를 들어 1987년을 그 시작으로 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일제감정기는 물론이고 독재정권기는 정치(국가)가 과대대표된 사회로 봐야 하기 때문에, 그 경우 "체계의 자율성"을 금과옥조로 삼는 "기능적 분화"론에 어긋나 보이기 때문이리라. 허나 기능적 분화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지지않은, 서구에서도 수 세기를 걸쳐서 형성된 원칙이고, 지금도 진화 중에 있는 것으로 보고, 서구의 여러 지역에서도 기능적 분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기능적 분화의 다양성"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고, 그게 바로 "근대사회는 세계사회"라는 루만의 큰 그림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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