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7일 토요일

삶과 죽음: 디지탈 혹은 아나로그?

'죽음'은 일상의 영토 바깥으로 밀려나서 이제 특별한 계기가 아니면 직접 대면할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 그렇게 밀려난 죽음이 언론의 영토 안으로 밀려 드는 것인양 우리는 그렇게 대개 한 다리 건서서 죽음을 접한다. 죽음과 삶은 흔히 이것 아니면 저것, 즉 binary 혹은 디자탈적으로 이해하지만 - 다시 말해 죽지 않은 모든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 사실 죽음과 삶의 관계는 '아나로그'로 보는 게 맞을 듯 하다. 우리는 출생과 삶의 종점 위 어느 한 점에 있는 것이고, 그렇게 보면 사는 건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게 사는 것이고... 뭐, 그런 개똥철학... 얼마 전 돌아가신 그 분이 남긴 말,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그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이런 저런 경로로 訃音을 여럿 듣게 된다. 독일식으로 '미햐엘 약존'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그 양반의 죽음, 사회학 이론사에서 맑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자유주의적 반론으로 한 페이지를 차지하던 Ralf Dahrendorf 선생의 부고에다, 며칠 전 학교소식지에선 문학전공 교수였던 Jörg Drews 교수의 부음도 읽었다. Drews 교수는 한국문학에 대한 짧은 기사를 쓰기 위해서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한 적도 있어서 그 죽음의 의미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70세면 아직 한창인데.... Dahrendorf교수의 죽음은 학부시절 들었던 Popper의 죽음이나 들뢰즈의 자살 소식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마이클 잭슨이야 더 멀다. 영국에서 다이애나비의 죽음 이후로 가장 충격적인 죽음이라고 하던데, 내게도 딱 그 정도 무게를 갖는... 난 마이클 잭슨의 노랠 좋아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워낙 '댄스음악'을 즐기지 않는데다, 너무 대중적인 것들은 일단 회피하려는 심리가 그 땐 더 강했다. 혹 누가 알랴. 노통의 죽음 이후에 그 양반을 '재발견'한 이들이 그렇게 목놓아 애도하듯이, 나도 '약존'씨를 재발견하며 그의 천재성을 몰라 본 내 짧은 안목을 탓할지. 나보다 몇 해 어린 중국인 '동료'는 그 양반 노래 전곡을 '소장'하고 있는 광팬이라 지난 주말 '애도'하며 보냈다고 한다. 나름 애도하는 마음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양반 노래 'Ben'을 연결해 둔다. 아.. 저랬던 소년이...




어찌되었건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더 민감해지는 건 적어도 내게는 분명하다. 삶과 죽음이 binary하게 이해되기 힘든 카데고리라는 건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는 얘기지만, 최근에는 인간이 그 경계 설정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이 커지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기도 하다. '생명윤리'가 각광을 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존엄사 (안락사), 낙태, 배아연구, 연명기구 사용이나 좀 더 고전적인 주제로 '사형' 같은 경우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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