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3일 토요일

숙제

글을 올리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사람 하나 없지만 6월도 초순을 넘긴 지금 이번 달 글이 하나도 없다는 게 은근히 부담이 된다. 생각해둔 쓸 거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막상 쓸 여유가 없어서 미뤄 둔 숙제처럼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서 초간단 모드로 털고 가려고 한다.

우선 최근 시국 관련...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하는 이들도 있고, 현 정권의 성격을 '독재'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지역 교수들이 낸 성명서에서 그런 '프레이밍'을 본 적이 있고, 어제인가 김대중님이 그런 말씀을 하며 궐기를 촉구하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워낙 시국이 각박하고 어이없고, 또 말도 안되는 고집을 피워대니 그런 극단적인 언사로라도 징계하고 싶은 심정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아니 많다. 이 시국은 우리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고 있다.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지... 이 정권은 이전 독재정권과 어떤 점이 다른지. 어떻게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할 지... 며칠 전 이 문제를 가지고 몇몇 유학생과 얘길 나눴는데 그 때 내가 한 얘기를 옮겨 놓으려고 시작했는데, 아... 쓰기 싫다. 정말 숙제하는 심정으로 핵심 테제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현상황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길게는 87년 이후, 짧게는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이뤄낸 성과도 있지만 극복하지 못한 여러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런 곪은 상처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 자화상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순기능도 있다. 언제가 쓴 글에도 언급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한국 최초의 계급정권이라고 봐도 좋다. 독재 정권은 독재라는 원죄 때문에 때로는 진보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고 대중, 국민들(그게 누구던 간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진보정권들도 워낙 활동 공간이 협소한 탓에 - 강력한 기득권 세력, 또 좌로부터의 공격까지 -, 또 우왕자왕하면서 진보적인 정책을 마음껏 펴기 힘들었다 (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하지 못한 것). 이명박 정권은 독재정권이 안고 있었던 정당성 결핍 같은 태생적 한계도 없고, 한국 사회의 강고한 기득권 세력이 뒷받침 해주니 언론, 검경을 수족처럼 부리며 마음껏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5년 동안 대한민국의 '오너' (혹은 '씨이오') 로 임명받았다고 생각하고, 또 민주주의를 다수의 지배라로 이해하는 초딩적 사고를 하고 있으니, 늘 숫자만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서울대 교수들이 성명서를 발표해도 수천명 교수 중에 몇 백명, 촛불시위를 해도 수천만 국민 중 고직 몇십만 많아야 몇백만, 이런 식이다. 그렇다고 독재로 몰아부쳐도 좀 곤란하다. 그러기 보단, 우선 좀 약해 보이긴 하지만, 헌법, 기본권 보장 이런 전략이 장기적으로 더 유익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서울광장 사용에 대해 어떤 의원이 했다는 말 '서울시 조례 따위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캬, 멋지지 않은가. 이 정권이 '법치'를 좋아하니 도대체 '법'이 뭘하자는 것인지, 그들의 이해하는 법의 기능의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워낙 철면피라 쉽게 먹히진 않겠지만, 그렇게 차근차근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원칙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물론 당장 급한 불을 끄고, 후안무치한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 좀 오버할 필요가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식인, 학자 집단에서는 좀 다른 반응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원칙을 세우는 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더 그러하다.

며칠 전 Kunsthalle에 갔었다. "1968. Die Grosse Unschuld"란 제목으로 꽤 큰 전시회를 열고 있다. 68운동에 직접 연관된 그림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그 무렵에 만들어진 당대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아담한 편인 Kunsthalle 내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공간을 이용해서 전시하고 있었으니, 전시 작품 수가 꽤 많았다. 현대미술이라 사실 이런 저런 볼 거리도 많다고 해야 할 것이지만, 받은 느낌은 너무 '구닥다리'같다는 것. 고작 40년 전 작품들인데도 백년, 2백년 혹은 거 오래된 작품들보다 더 낡아 보였다. 다들 어찌나 유치찬란한지 나름 튄다는 앤디 워홀의 'big electric chair' 세 점이 그나마 '고전미'가 있는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정도니... 모델인 전기의자는 다름 아닌 사형기구다. 베네통 광고 사진 철학의 뿌리는 워홀에 닿아있다고 해야할 듯. 최첨단이라고 하는 현대예술이 금새 촌스러워지는 현상은 '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함께 간 후배가 언급했다. 클래식 음악 쪽이라면 난 쉽게 '윤이상'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현대음악을 들을 기회란 그리 많지 않다). 어쨌든 현대예술에 오면 말이 많아진다. 구구절절히 설명을 해야 하고... 사실 그게 또 맛이기도 하다. 어쩌면 모처럼 가진 고급문화 '체험'이 별 소득 없이 끝난 건 '전문적 식견' 부족 탓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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