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상이다'/'십상이다'. '쉽상이기'를 쓰진 않을 것 같은데 '십상'도 그 어원을 모르면 쓰기 참 어색하다. 찾아보니... "'쉽상이다'는 '십상이다'의 잘못된 표현이다. '십상'은 '십상팔구(十常八九)'의 준말로 거의 예외없이 그러할 것이라는 추측을 나타내는 말이며, '십중팔구(十中八九)'와 같은 뜻이다."
그리고 '데/대'가 헷갈려서 또 찾아보았다.
'-데'와 '-대'의 표기 문제 : '했다더군'처럼 말하는 이의 생각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했데'가 옳지만, 만약 '했다고 하더군'처럼 남의 말을 전하는 뜻을 표현할 적에는 '했대'와 같이 적는 것이 바른 표기입니다.
[보기]
* (내가 보니까) 그 연극 참 잘 됐데. (잘 됐더군)
* (아무개 말이) 그 연극 참 잘 됐대. (잘 됐다고 하더군)
2009년 3월 31일 화요일
2009년 3월 28일 토요일
가난의 반대는?
몰트만이란 독일 신학자에 대해서는 민중신학에 심취했던 한국 대학 시절에 자주 들었고 또 읽기도 했다. 막상 독일에 온 후론 들은 적도, 읽을 기회도 갖지 못했는데, 어제 우연히 몰트만의 '공동체론'을 언급한 신문 기사를 발견하고서 좀 찾아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몰트만은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가능했던 원인 중 하나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란 구절을 언급하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제안은 이렇다. 가장 좋은 것은 적절한 크기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며, 서로와 함께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려는 생각을 강화하는 것이다. 가난의 반대는 소유가 아니다. 가난과 소유의 반대는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부유해진다. 친구와 이웃, 동무와 동지, 형제와 자매로 부유해진다. 공동체로 살아가면, 우리는 대개의 곤경 속에서도 자신을 도울 수 있다. 사람과 이념, 능력과 에너지는 실로 충분하다. 이 모든 것들은 단지 개발되지 않았고, 위축되었으며, 억압되었을 뿐이다. 우리의 부유함을 재발견하자. 우리의 연대성을 재발견하자. 공동체를 만들자"
요즘 경제위기 때문에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쉽게 얘기하면 그 위기때문에 더 가난해졌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처방들이 난무한다. '그린 뉴딜'은 그나마 점잖고, 심지어 멀쩡한 차를 폐차시키고 새차를 사면 보조금을 지원해 준다는 그런 법도 시행되고 있나보다 (여기). 다른 나라도 아닌 독일에서... 이런 모든 '짓거리'들을 조정하는 건 '천민 자본주의 정신'이다. 어떤 생태적, 사회적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경제를 살리려는' 즉 더 많이 소비하게 하고, 더 많은 돈이 돌게 하려는, 한 마디로 더 부유한 상태로 만들려는... 그것이 생태계와 사회적 삶에 가져올 장기적 효과에 대해선 모른 척한다. 자본주의, 특히 금융자본주의적 파생상품이 만들어 낸 거품이 꺼지면서 위기가 찾아왔는데, 또 다른 거품을 만들어 내는 걸 위기극복 방안이라고 주장하는 꼴이다. '가난'을 참고, '무소유'의 덕을 칭송하는 건 남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인지상정이다. 재미있게도 자본주의의 천박성이 온천하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별로 저항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 많던 사회주의자들, 그 많던 맑시스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89년 이후 역사가 종말했다더니 (물론 후쿠야마는 '자본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승전가를 부른 거였지만) 이것도 일종의 역사 종말기의 그 증상인가... 요즘 그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차라서 그런지, 몰트만의 경구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이다."가난의 반대는 소유가 아니다. 가난과 소유의 반대는 공동체이다." 이 얼마나 순진무구한 생각인가. 이런 얘길 할 때 귀기울여 들을 사람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심지어 교회, 즉 '나름' 공동체 안에서도 하루 빨리 경제위기를 극복해서 다시 흥청망청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형편아닌가. 이런 시대상황을 성찰하면서 난 이스라엘과 유대의 멸망을 예언하던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심정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라던 예수 가르침의 정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된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제안은 이렇다. 가장 좋은 것은 적절한 크기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며, 서로와 함께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려는 생각을 강화하는 것이다. 가난의 반대는 소유가 아니다. 가난과 소유의 반대는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부유해진다. 친구와 이웃, 동무와 동지, 형제와 자매로 부유해진다. 공동체로 살아가면, 우리는 대개의 곤경 속에서도 자신을 도울 수 있다. 사람과 이념, 능력과 에너지는 실로 충분하다. 이 모든 것들은 단지 개발되지 않았고, 위축되었으며, 억압되었을 뿐이다. 우리의 부유함을 재발견하자. 우리의 연대성을 재발견하자. 공동체를 만들자"
요즘 경제위기 때문에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쉽게 얘기하면 그 위기때문에 더 가난해졌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처방들이 난무한다. '그린 뉴딜'은 그나마 점잖고, 심지어 멀쩡한 차를 폐차시키고 새차를 사면 보조금을 지원해 준다는 그런 법도 시행되고 있나보다 (여기). 다른 나라도 아닌 독일에서... 이런 모든 '짓거리'들을 조정하는 건 '천민 자본주의 정신'이다. 어떤 생태적, 사회적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경제를 살리려는' 즉 더 많이 소비하게 하고, 더 많은 돈이 돌게 하려는, 한 마디로 더 부유한 상태로 만들려는... 그것이 생태계와 사회적 삶에 가져올 장기적 효과에 대해선 모른 척한다. 자본주의, 특히 금융자본주의적 파생상품이 만들어 낸 거품이 꺼지면서 위기가 찾아왔는데, 또 다른 거품을 만들어 내는 걸 위기극복 방안이라고 주장하는 꼴이다. '가난'을 참고, '무소유'의 덕을 칭송하는 건 남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인지상정이다. 재미있게도 자본주의의 천박성이 온천하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별로 저항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 많던 사회주의자들, 그 많던 맑시스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89년 이후 역사가 종말했다더니 (물론 후쿠야마는 '자본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승전가를 부른 거였지만) 이것도 일종의 역사 종말기의 그 증상인가... 요즘 그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차라서 그런지, 몰트만의 경구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이다."가난의 반대는 소유가 아니다. 가난과 소유의 반대는 공동체이다." 이 얼마나 순진무구한 생각인가. 이런 얘길 할 때 귀기울여 들을 사람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심지어 교회, 즉 '나름' 공동체 안에서도 하루 빨리 경제위기를 극복해서 다시 흥청망청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형편아닌가. 이런 시대상황을 성찰하면서 난 이스라엘과 유대의 멸망을 예언하던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심정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라던 예수 가르침의 정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된 것 같다.
스테레오타입, 프레임, 하비투스
사회과학에서 외부 사건을 해석하는 틀을 '프레임'(frame)이라고 하고 그 프레임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프레이밍'(framing)이라고 한다. 표현이 좀 다를 뿐이지만 - '스테레오타입'도 친척뻘 쯤되는 개념 - 이런 관점은 구성주의적 인식론을 공유하는 접근에서 대개 공유하는 바이고, 다만 왜 특정한 방식으로 '프레이밍'되는지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따름이다. 사회학자들은 개개인의 '프레이밍'마저도 심리적 요인으로만 환원해서는 설명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부르드외 'habitus' 개념은 프레임, 프레이밍의 원인을 '구조'로 돌리려는 전형적 시도다. 심리적 환원론도 아닌 '뇌' 환원론적 설명도 있음을 알게되어서 옮겨 놓는다. 경영대 교수가 조선일보에서 쓴 칼럼에서 옮겨 온 것.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두 설명될 수 없음을 염두에 둬야 할 것.
"인간 두뇌의 질량은 몸 전체의 2%에 불과하다. 그런데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에도 뇌는 우리 에너지의 20%를 소모한다. 심장(10%)이나 두 개의 허파(10%), 두 개의 신장(7%)보다 훨씬 많은 양이다. 더구나 생각에 몰두하게 되면 뇌의 칼로리 소모량은 급속히 증대된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두뇌가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 장치의 하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스테레오타입(stereotype•고정 관념)에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사물에 대해 한번 판단하고 나면 그와 유사한 사물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을 이용하려 한다. 그러므로 소비자의 새로운 소비 행태를 유도하려면 그들로 하여금 스테레오타입을 접고, 잠시나마 사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만들어야 한다."
"인간 두뇌의 질량은 몸 전체의 2%에 불과하다. 그런데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에도 뇌는 우리 에너지의 20%를 소모한다. 심장(10%)이나 두 개의 허파(10%), 두 개의 신장(7%)보다 훨씬 많은 양이다. 더구나 생각에 몰두하게 되면 뇌의 칼로리 소모량은 급속히 증대된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두뇌가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 장치의 하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스테레오타입(stereotype•고정 관념)에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사물에 대해 한번 판단하고 나면 그와 유사한 사물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을 이용하려 한다. 그러므로 소비자의 새로운 소비 행태를 유도하려면 그들로 하여금 스테레오타입을 접고, 잠시나마 사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만들어야 한다."
2009년 3월 22일 일요일
Life isn't dramatic, either!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결승 결과를 챙겨본다. 혹 졌을 수도 있다며 실망할 준비도 어느 정도 하고서... 결과는 10-2 승리! 참, 어떻게 저런 '드라마'를 계속 써가는지 참 신기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그 동안 10타수 1안타로 부진했던 '추신수'를 처음으로 우익수로 내보냈더니 첫타석에서 3점 홈런을 쳐 내고... '믿음야구'에 보답... 운운하는 기사가 평소에 그네들이 발로 써내는 것 같은 '오버성' 기사와는 질이 다르다. 특히, 박지성을 띄우는 기사들... 원인은 야구, 축구의 차이에 있을 수도. 홈런, 점수 등으로 실력 혹은 기여도가 양화되기 쉬운 야구와 다르게 축구는 경기를 직접 보지 않고, 또 '골'을 넣지 않는 이상 '열심히 뛰었다'는 것 이상 얘기할 근거가 참 희박한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인가 '도움'도 '공격포인트'로 계산하고, 선수마다 평점도 매기고, 요샌 심지어 뛴 거리까지 계산해서 알려주더구만... 아기자기한 구석이 많은 야구는 현장에서 봐야 그 맛을 느낀다는 축구와는 달리 중계방송에 확실히 더 잘어울리는 것 같다. 또, 내가 언젠가 다른 글에서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스포츠가 그토록 큰 시장이 되고, 언론이 열성적으로 보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드라마성'때문이다. 테러나 전쟁, 자연재해 처럼 놀랄만한 사건들이 늘 신문 첫머리를 장식하지만 '선진국'의 일상은 대개 너무도 지루하고 계산가능하다. Life isn't cool얘길 어제도 했지만, Life isn't dramatic, either! 'Dramatic' 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 종족 유지에 도움을 주는 방향이라서 그런지, 인류는 어떤 방식으로 그런 욕망(이란면 욕망)을 충족시킬 대체물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늘 크고 작은 전쟁, 분쟁, 혹은 환경의 위협에 노출되었던 '옛날'에야 그럴 필요조차 없이 삶 자체가 드라마였고, 가까이는 우리네도 일제강점, 한국전쟁 등등 온통 삶 자체가 드라마 '잇셀프'이지 않았던가. 사회가 안정되고, 예측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우리네도 이제 인위적으로 제공된 드라마로 만족해야 해야 될 모양이다. TV 드라마, 영화, 각종 공연 등으로 그 '드라마'는 분화되었고, 최근에 그것도 모자라서 '리얼(리티)' 드라마/ 쇼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드라마'성 효과는 사실 스포츠만한 게 없다. 특히, 예측 불가능성이 큰 종목일수록... '이변(異變)' 혹은 '기적(奇蹟)'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그런 상황이 종종 발생하니까... cool/uncool에서 제기했던 그 논지를 적용시켜 보면, dramatic한 사건을 보러/ 보여주려 안달하는 경향은 삶이 그만큼 undramatic 혹은 예측가능하다는 사태의 반증이다.
Life isn't cool
Life isn't cool! 내가 두세 주에 한 번쯤 들어가보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블로그 '언제나 영화처럼'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전업으로 영화 평하기 전에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를 했었는데, 이젠 '영화계'에서 나름 자리를 굳혀가고 있는 것 같다. 블로그를 찾아가 보면 알겠지만 영화평이건 그냥 사는 이야기건 매우 편하게 글을 쓴다. Life isn't cool!이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그는 cool과 uncool의 경계에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재주를 가졌다. cool한 척 하지도 않지만 얼핏 '구질구질'하게 들릴 만한 얘기도 'cool'하게 만들어 내는 그런...
한 번 주어지는 인생 cool하게 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사실 자꾸 cool을 강조하는 건 그만큼 사람 사는 게 uncool하다는 현실인식, 그 현실에서 좀 벗어나고 싶은 조급함의 표현일 따름이다.
한 번 주어지는 인생 cool하게 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사실 자꾸 cool을 강조하는 건 그만큼 사람 사는 게 uncool하다는 현실인식, 그 현실에서 좀 벗어나고 싶은 조급함의 표현일 따름이다.
2009년 3월 20일 금요일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 英譯 계획
체계이론 메일링 리스트에서 오고간 대화를 옮겨 놓는다. 배커 교수 발언이니 신뢰해도 좋을듯. GdG 영어 번역이 준비되고는 있는 모양이나, 5월에 번역사업 재정지원이 결정이 된다고 하니 설령 지원을 받더라도 막상 출간되는 걸 보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러다 우리말 번역이 먼저 나오는 건 아닌지...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루만 번역서 출간에 꽤 적극적으로 나서는 출판사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 자체로야 반가운 소식이나, 학문적 논의의 맥락과 분리되어서 출판사 입맛에 맞는 책들이 그것도 졸속 번역으로 나온다면...
어휴. 여기에서 이렇게 궁시렁거려봐야 내 입, 아니 손만 아프지...
And while I'm on the topic of books, does anyone know if there are any plans for an English translation of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Chris
Yes, there are plans to translate into English Luhmann's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There is currently an application being submitted with a big German foundation for a grant to finance the translation such that the publisher can focus on the risk of the production of the book. A decision is due in May 2009.
Dirk
어휴. 여기에서 이렇게 궁시렁거려봐야 내 입, 아니 손만 아프지...
And while I'm on the topic of books, does anyone know if there are any plans for an English translation of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Chris
Yes, there are plans to translate into English Luhmann's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There is currently an application being submitted with a big German foundation for a grant to finance the translation such that the publisher can focus on the risk of the production of the book. A decision is due in May 2009.
Dirk
2009년 3월 19일 목요일
<싸구려 커피> (장기하와 얼굴들, 2008)
'장기하'라... 이름을 들어보긴 한 것 같은데, 이 양반(들) 노랠 찾아서 들을 생각까지 한 건 순전히 오늘 메일로 받아 본 창비주간논평에서 이들 얘길 읽었기 때문 ('인디음악의 역습'). 6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록 노래 부문,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음악인 남자 부문, 올해의 노래상을 받아 3관왕이 되었다고...
한국 '현대 음악'이 다양해지는 풍경을 구경하는 건 매우 즐거운 일이다. 지난 2월에 나왔다는 앨범 《별일 없이 산다》을 '구해서' 들어보니 독특한 가사가 우선 신선하고 음악도 나름 색깔이 있다. 모던한 복고풍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기존 인디음악보다는 좀 더 '트로트' 쪽에 가까이 가있다. '뽕짝필 인디'라고 할 수 있을지... 잠깐 찾아 보니 어떤 소개글에 이런 문구가 있는데 매우 적확한듯. "...옛날 대중 가요의 영향을 흠씬 받은 소리에 일상 생활의 구질구질함이나 연애 상황의 찌질함 등을 말 같이 노래하는 특유의 창법으로 담아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인디음악의 분화를 보여주는 사례일까? 허나 생각해 보면 그런 쪽 - '봉짝 인디' 혹은 'b급 인디'라고 할 수 있을 ... - 을 선점한 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황신혜 밴드'. 명곡 반열에 올려 주고 싶은 노래 '짬뽕'을 들어 보았는가? 그에 비해 장기하와 얼굴들... 약간의 신선함이 없진 않으나 그 깊이가 깊지 않은 것 같고, '싸구려 커피'에서 보여 준 그 재치가 변주될 수 있을 지 의심이 간다.
내친 김에 유튜브에서 '짬뽕'을 찾아보니 올라와 있다. 누구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b급 음악에 걸맞는 b급 뮤비를 '지대로' 만들었다.
덧: 뮤비 마지막에 Directed by Takashi Nemoto라고 나오네. 1997년작인 모양이고. 이렇게 묵은 노래인줄 몰랐음을 고백...
2009년 3월 18일 수요일
2009년 3월 17일 화요일
오랜만에 본 객관식 시험! 그것도 체계이론 '실력' 테스트...
남 사회학 과제물 '검토'를 위해 인터넷을 신나게 항해하던 중에 아주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다. 온라인 상에서 치뤄볼 수 있는 여러 유형의 시험을 올려 놓은 곳 (문제 출제 범위는 매우 다양하다. >Liebe & Sex< 부터 >Finanzen< 까지). 그 중에 루만 체계이론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문제도 있었다. 이름하야... "Soziologie: Kennen Sie Luhmanns Systemtheorie?" 오랜만에 객관식 시험문제를 접해 본다. 시험결과는... 음... 공개하지 않으련다. 굳이 핑계를 찾자면... 내 중고등학교 시절에 객관식 정답은 꼭 하나여야만 했다... 그런 탓에 "Es können mehrere Antwortoptionen richtig sein" 같은 단서가 달리면 문제 풀기 전에 짜증부터 확 나는 것이다.
2009년 3월 9일 월요일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독일인들. 왜?
가끔씩 들어가 보는 '베를린 리포트'에 '포키노'란 양반이 재미있는 얘기를 해 놓은 걸 발견하곤 옮겨 놓는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듯하게 들린다.
"장례식 특히 서구권의 장례식은 한국보다 차분합니다. 상주들도 선글라스를 끼고 눈물을 흘리더라도 감추려고 노력합니다. 반면에 한국의 장례식하면 손바닥으로 땅을 두드리며 오열하는 아주머니가 생각날 겁니다. 장례식은 일종의 문화라 어느 문화가 좋고 나쁘다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를 뿐이죠.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이야 동서양이 같을 것입니다. 다만 그 표현방법이 다를 뿐이겠죠. 특히나 서양의 차분한 장례식을 보면 언제나 목회자라 불리는 종교인이 주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 종교 교리상 죽음은 천국행...즉 신에게 간 것이므로 전혀 슬픈일이 아니죠. 비인간적이지만 마녀 사냥이 횡행하고 종교교리가 삶을 지배하던 카톨릭의 영향력이 아주 강했던 교조주의 시대의 신부들에게는 슬프게 오열하는 가족들은 큰 질책의 대상이 되었고 경우에 따라 종교적인 압박-최악의 경우 마녀 사냥의 희생양-이 있기도 했었기에 그 영향으로 현재의 서양의 장례식도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에 차양모자까지 쓰기도 합니다. 현재의 한국도 모태신앙, 기독교 종교인이라면 전통적인 장례보다 훨씬 차분합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종교의 영향력이 미국과 비교하면 거의 사라진 현재의 유럽-독일-의 경우도 장례만큼의 전통 기독교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점입니다."
"장례식 특히 서구권의 장례식은 한국보다 차분합니다. 상주들도 선글라스를 끼고 눈물을 흘리더라도 감추려고 노력합니다. 반면에 한국의 장례식하면 손바닥으로 땅을 두드리며 오열하는 아주머니가 생각날 겁니다. 장례식은 일종의 문화라 어느 문화가 좋고 나쁘다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를 뿐이죠.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이야 동서양이 같을 것입니다. 다만 그 표현방법이 다를 뿐이겠죠. 특히나 서양의 차분한 장례식을 보면 언제나 목회자라 불리는 종교인이 주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 종교 교리상 죽음은 천국행...즉 신에게 간 것이므로 전혀 슬픈일이 아니죠. 비인간적이지만 마녀 사냥이 횡행하고 종교교리가 삶을 지배하던 카톨릭의 영향력이 아주 강했던 교조주의 시대의 신부들에게는 슬프게 오열하는 가족들은 큰 질책의 대상이 되었고 경우에 따라 종교적인 압박-최악의 경우 마녀 사냥의 희생양-이 있기도 했었기에 그 영향으로 현재의 서양의 장례식도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에 차양모자까지 쓰기도 합니다. 현재의 한국도 모태신앙, 기독교 종교인이라면 전통적인 장례보다 훨씬 차분합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종교의 영향력이 미국과 비교하면 거의 사라진 현재의 유럽-독일-의 경우도 장례만큼의 전통 기독교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점입니다."
2009년 3월 7일 토요일
<경계 긋기의 어려움> (고종석 2009)
"성찰할수록 경계는 또렷해지기보다는 더 모호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 모호한 경계선의 기록이다." 고종석의 새 책 <경계 긋기의 어려움>를 소개하는 프레시안 기사 중 일부다. 한국에서 자유주의 '대표선수'로 자주 거론되는 - 아, 공병우, 전경련의 그 '자유주의'나, 한나라당, 재향군인회가 얘기하는 '자유민주주의' 의 그 '자유주의' 말고, 유럽적 의미에서... 아니 그렇다고, 독일 FDP 쪽도 아닌(것 같은)데... - 고종석은 '내가 아끼는' 글쟁이다. 특히 언어에 대해 보여주는 깊은 성찰에서 배우는 바가 많다. 이 책은 시사 칼럼을 모아 놓은 것이라 기사에 소개된 구절만 봐서는 너무 '얕은' 느낌을 주긴 하지만... (사실 그의 글은 대부분 '에세이'다. 언어에 대해서 한 수 배우게 되는 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너무 갈고 닦은 문장들이긴 하다. 정보 밀도가 높은 글을 선호하는 내겐 너무 가벼운 것. 그런 탓에 난 술술 읽히면서도 각종 지식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는 도올 선생의 책과 강연을 높게 평가한다. 물론 학술적인 맥락이 아닌 '교양' 차원에서... 난 소설을 읽더라도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많이 들어있는 쪽을 고르는 편이다 (아니 '편이었다'. 지금은 어디 고를 일 자체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한국에서 대학 다닌 던 시절, 이병주, 이문열, 조정래, 김원일 류의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던 것이고... )
(…) 삼성의 기업 윤리는 조선일보보다 나은가? 내가 바라는 세상에 대해 삼성은 조선일보보다 더 너그러운가? 그럴 거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삼성 제품을 기꺼이 사서 쓰는 내가 조선일보를 지네 보듯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한쪽은 그저 물질을 팔고 다른 쪽은 거기 사악한 정신을 끼워 파니 둘을 나란히 놓는 것은 어불성설인가?"
기자는 "'윤리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호소"하며, " '이념이나 윤리를 기준'으로 경계를 긋고도 곧바로 생기는 어려움" 토로하고 있다는 해설을 덧붙이고...
좀 다른 맥락에서 이런 얘기를 해보자. 한국과 독일의 차이점 같은... 그 차이에 대해서 가장 명쾌하게 애기할 수 있는 사람은 독일에 체류한 지 6개월이나 1년 정도 된 경우가 아닐까. 그도 안되면 그 차이가 눈에 들어 오지 않을 것이고, 한 1년쯤 되면 누굴 만나더라도 가장 신나게 독일과 한국의 차이에 대해서 떠들 수 있을 것이다. 막상 그런 시기도 지나면 이제 다시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한편 한국에 대한 기억이 - 아니 '기억'이나 '정보'보다는 '느낌'이 - 가물가물해지기도 하고, 그보다는 독일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감히 '독일의 대표음식은 '슈바이네 학세다' 같은 얘길 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해서 아는 건 '독일'이 아니라 '빌레펠트' 아닌가. 특별히 장기한 체류하지 않는 이상 독일 다른 곳에 대해선 나도 여행자들이 갖는 정보, 지식, 인상 외에 갖고 있는 바가 없다. 물론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상 공부하면서 또 언론을 통해 독일에 대해서 보고 듣는 바가 많이 있긴 하다. 허나 그런 정보가 얼마나 피상적인가.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거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하게 돌아간다. 자동차 옆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유리에 이런 글이 써져 있지 않은가: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던가.... 사회에 대해서 우린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쭉 밀고 나가면 어쩌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전도서).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랫 동안 한 집에서 살았던 그 역사학 교수, '영감님'은 나와 대화할 때 사회학자들이 스스로 깜짝 놀라면서 새로운 현상이라고 하던 그 주장의 근거가 얼마나 희박한지 '풍부한' 역사적 사례를 열거하면서 논박하곤 하였다. 통계나 국가간 비교 처럼 사회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접근 방식의 한계도... 물론 어쩔 수 없이 갖게 되었을 '역사학적 bias'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대화에서 배운 바가 적지 않았다.
경계를 나누는 일은 필요하다. 아니 불가피하다. 내가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경계없이, 구분하지 않고서는 도대체 '의미' 자체가 생성되질 않는다. '지옥' 없이는 '천국'이 천국일 수 없다. 더 이상 '지옥/천국' 구분이 '의미'가 없는 순간, 그러니까 '천국'에 진입해서 더 이상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 없는 그 순간부터 그 '천국'은 더 이상 우리가 얘기하는 그 '천국'이 아닌 것이다. 시간이란 것도 그렇다. '시간'이란 개념이 있어야 최초, 최후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 '시간'이 만들어지기 전 그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개념이 얘기하는 그 지평을 넘어선다는 말이다.
경계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경계의 의미'를 성찰해 보아야 하고, 그 경계가 만들어 내는 의미의 의미도 해체해 보아야 한다. 그게 지식인, 학자,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그러니까 제 2, 제 3 질서의 관찰자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한국과 독일, 과거와 현재, 나와 너, 모든 게 다르기도 하고, 모든 게 같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선과 악을 구분하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일 역시 조심스럽게 된다.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도서관의 그 많은 책들, 논문들, 아니 인류역사 자체가 바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경계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은 많은 경우 깊은 성찰 없이 이루어진다. 아니 '단순한' 경계긋기는 때때로 요청되기도 한다. 특히, 적과 동지를 구분해야 하는 경우나 도덕적 커뮤니케이션의 경우. 대표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흔하게 경험하는 경우가 좌우 구분. 한 편에 '좌빨', '빨갱이'가 있다면 다른 한 편엔 '조선일보' 혹은 '조중동', '삼성', '미국', '친일파'가 있다. 자, 마무리는 고종석씨에게 부탁하자.
조 선일보와 한겨레에 어떤 경계를 그어놓고 보면, 이내 (사적으로 알고 있는) 딱하다 싶을 만큼 매력 없는 어떤 한겨레 기자들과 (역시 사적으로 알고 있는) 넉넉히 매력적인 어떤 조선일보 기자들이 떠올라 마음이 스산해진다. 그 매력은 재능만이 아니라 됨됨이(예의나 겸손이나 너그러움이나 신의 같은 미덕으로 이뤄지는 개인 윤리)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 삼성의 기업 윤리는 조선일보보다 나은가? 내가 바라는 세상에 대해 삼성은 조선일보보다 더 너그러운가? 그럴 거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삼성 제품을 기꺼이 사서 쓰는 내가 조선일보를 지네 보듯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한쪽은 그저 물질을 팔고 다른 쪽은 거기 사악한 정신을 끼워 파니 둘을 나란히 놓는 것은 어불성설인가?"
기자는 "'윤리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호소"하며, " '이념이나 윤리를 기준'으로 경계를 긋고도 곧바로 생기는 어려움" 토로하고 있다는 해설을 덧붙이고...
좀 다른 맥락에서 이런 얘기를 해보자. 한국과 독일의 차이점 같은... 그 차이에 대해서 가장 명쾌하게 애기할 수 있는 사람은 독일에 체류한 지 6개월이나 1년 정도 된 경우가 아닐까. 그도 안되면 그 차이가 눈에 들어 오지 않을 것이고, 한 1년쯤 되면 누굴 만나더라도 가장 신나게 독일과 한국의 차이에 대해서 떠들 수 있을 것이다. 막상 그런 시기도 지나면 이제 다시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한편 한국에 대한 기억이 - 아니 '기억'이나 '정보'보다는 '느낌'이 - 가물가물해지기도 하고, 그보다는 독일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감히 '독일의 대표음식은 '슈바이네 학세다' 같은 얘길 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해서 아는 건 '독일'이 아니라 '빌레펠트' 아닌가. 특별히 장기한 체류하지 않는 이상 독일 다른 곳에 대해선 나도 여행자들이 갖는 정보, 지식, 인상 외에 갖고 있는 바가 없다. 물론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상 공부하면서 또 언론을 통해 독일에 대해서 보고 듣는 바가 많이 있긴 하다. 허나 그런 정보가 얼마나 피상적인가.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거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하게 돌아간다. 자동차 옆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유리에 이런 글이 써져 있지 않은가: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던가.... 사회에 대해서 우린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쭉 밀고 나가면 어쩌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전도서).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랫 동안 한 집에서 살았던 그 역사학 교수, '영감님'은 나와 대화할 때 사회학자들이 스스로 깜짝 놀라면서 새로운 현상이라고 하던 그 주장의 근거가 얼마나 희박한지 '풍부한' 역사적 사례를 열거하면서 논박하곤 하였다. 통계나 국가간 비교 처럼 사회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접근 방식의 한계도... 물론 어쩔 수 없이 갖게 되었을 '역사학적 bias'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대화에서 배운 바가 적지 않았다.
경계를 나누는 일은 필요하다. 아니 불가피하다. 내가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경계없이, 구분하지 않고서는 도대체 '의미' 자체가 생성되질 않는다. '지옥' 없이는 '천국'이 천국일 수 없다. 더 이상 '지옥/천국' 구분이 '의미'가 없는 순간, 그러니까 '천국'에 진입해서 더 이상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 없는 그 순간부터 그 '천국'은 더 이상 우리가 얘기하는 그 '천국'이 아닌 것이다. 시간이란 것도 그렇다. '시간'이란 개념이 있어야 최초, 최후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 '시간'이 만들어지기 전 그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개념이 얘기하는 그 지평을 넘어선다는 말이다.
경계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경계의 의미'를 성찰해 보아야 하고, 그 경계가 만들어 내는 의미의 의미도 해체해 보아야 한다. 그게 지식인, 학자,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그러니까 제 2, 제 3 질서의 관찰자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한국과 독일, 과거와 현재, 나와 너, 모든 게 다르기도 하고, 모든 게 같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선과 악을 구분하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일 역시 조심스럽게 된다.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도서관의 그 많은 책들, 논문들, 아니 인류역사 자체가 바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경계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은 많은 경우 깊은 성찰 없이 이루어진다. 아니 '단순한' 경계긋기는 때때로 요청되기도 한다. 특히, 적과 동지를 구분해야 하는 경우나 도덕적 커뮤니케이션의 경우. 대표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흔하게 경험하는 경우가 좌우 구분. 한 편에 '좌빨', '빨갱이'가 있다면 다른 한 편엔 '조선일보' 혹은 '조중동', '삼성', '미국', '친일파'가 있다. 자, 마무리는 고종석씨에게 부탁하자.
조 선일보와 한겨레에 어떤 경계를 그어놓고 보면, 이내 (사적으로 알고 있는) 딱하다 싶을 만큼 매력 없는 어떤 한겨레 기자들과 (역시 사적으로 알고 있는) 넉넉히 매력적인 어떤 조선일보 기자들이 떠올라 마음이 스산해진다. 그 매력은 재능만이 아니라 됨됨이(예의나 겸손이나 너그러움이나 신의 같은 미덕으로 이뤄지는 개인 윤리)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욕설의 의미론
오랜만에 중앙일보의 그 인터넷 공간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욕설에 대한 것. 아, 원래는 인터넷, 휴대전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른 바 '외계어'를 소개하는 기사였는데, 욕설에 대한 부분이 특히 눈에 띄인 것. 자, 풀고자 하는 퍼즐은 이렇다. "'한국인만큼 욕(막말)이 발달한 민족은 없다' ... 기껏해야 ‘빠가야로(바보)’ 정도의 욕밖에 없는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욕은 다양하고 거칠다. ‘육시(戮屍)를 할’ 등의 표현의 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사했던 민족이 우리 민족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육시(戮屍)는 이미 죽은 사람을 관에서 꺼내어 머리를 베는 형벌을 말한다.)
언제 어디에선가 일본에서 일본어로 '더빙'된 한국 조폭 영화를 봤던 자의 소감을 읽은 적이 있다. 국산 조폭영화에서 빼놓기 힘든 볼 거리 중 하나가 우리 말의 그 화려한 욕설 잔치인데 일본어 버전으로는 도무지 그 맛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 예를 들어, 더 이상 살벌하기 힘든 맞짱 뜨는 그 순간에, '이 바보야' '바보 같은 녀석...' 이는 곧 장르전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코미디로...
어쨌든 기사는 나름 설득력 있는 분석을 한다. 비교문화론에서 나름 일가를 이루신 이어령 님의 말씀과 기타 '전문가들'의 고견을 소개하면서... 결론은 한 마디로, 유교탓. 유교라는 의미론은 그저 조선시대 사회구조를 포맷하는데 시종일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구조와 의미론의 관계는 공진화로 보는 게 설득력 있는데, 조선시대의 경우 의미론이 구조를 만들어 내는 그쪽 방향도 '상당히' 강하지 않았을까?
"이 고문은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말을 부정적 힘에만 주목했지, 긍정적 힘에는 주목하지 않았고, 그 결과 부정의 언어는 매우 발달한 데 반해 긍정의 언어는 발달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막말뿐만 아니라 일상어에서도 긍정적 표현보다 부정적 표현을 훨씬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성인 전용 극장을 표시할 때도 영어권에서는 ‘성인전용(Adult only)’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연소자출입금지’라는 표현을 쓰는 식이다.
같은 뜻이지만 긍정의 표현을 쓰는 민족과 부정의 표현을 쓰는 민족의 말의 힘에 대한 인식과 활용도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왜 말의 긍정적 힘보다 부정적 힘에 주목하게 된 것일까? 정확한 답은 없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기아 등 사회적 환경이 각박해지면 ‘ㅋ’나 ‘ㄲ’ 등 거센소리, 즉 된소리가 많아지는 경향을 두고 각박했던 근대화의 영향으로 한국인의 말이 거세졌다는 지적이 많다. 물론 이는 아직 학술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달변가를 선호하지 않았던 유교의 영향으로 말을 삼가는 문화가 발달한 것을 이유로 꼽는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유교문화에서는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경계한다”며 “선비의 자세를 뜻하는 말에 ‘신독(愼獨)’이 있는데, 이는 혼자 있을 때도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가라는 뜻이다.
이런 유교문화가 은연중에 한국 민족을 말 못하는 민족으로 만든 것 같다”고 말한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역시 “말의 속성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자기 주장을 전파하는 것인데, 유교에서는 이런 말의 속성을 자기 이해관계를 위한 기술로 생각해 부정적으로 바라봤다”고 지적한다.
유교에서는 말이 많은 사람을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이처럼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고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고자 하는 유교의 가치에 역행하는 것이어서 터부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유교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 역시 선동가라고 생각해서 좋지 않게 봤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말하는 것, 말 많은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관습이 오랫동안 굳어지면서 말의 긍정적 힘보다 부정적 힘이 부각됐고, 긍정적 언어보다 부정적 언어, 즉 막말이 발달하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같은 기사에서 요즘 저자거리에 횡행하는 외계어도 소개해 놓았는데, '소장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옮겨 놓는다.
(참고로 육시(戮屍)는 이미 죽은 사람을 관에서 꺼내어 머리를 베는 형벌을 말한다.)
언제 어디에선가 일본에서 일본어로 '더빙'된 한국 조폭 영화를 봤던 자의 소감을 읽은 적이 있다. 국산 조폭영화에서 빼놓기 힘든 볼 거리 중 하나가 우리 말의 그 화려한 욕설 잔치인데 일본어 버전으로는 도무지 그 맛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 예를 들어, 더 이상 살벌하기 힘든 맞짱 뜨는 그 순간에, '이 바보야' '바보 같은 녀석...' 이는 곧 장르전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코미디로...
어쨌든 기사는 나름 설득력 있는 분석을 한다. 비교문화론에서 나름 일가를 이루신 이어령 님의 말씀과 기타 '전문가들'의 고견을 소개하면서... 결론은 한 마디로, 유교탓. 유교라는 의미론은 그저 조선시대 사회구조를 포맷하는데 시종일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구조와 의미론의 관계는 공진화로 보는 게 설득력 있는데, 조선시대의 경우 의미론이 구조를 만들어 내는 그쪽 방향도 '상당히' 강하지 않았을까?
"이 고문은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말을 부정적 힘에만 주목했지, 긍정적 힘에는 주목하지 않았고, 그 결과 부정의 언어는 매우 발달한 데 반해 긍정의 언어는 발달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막말뿐만 아니라 일상어에서도 긍정적 표현보다 부정적 표현을 훨씬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성인 전용 극장을 표시할 때도 영어권에서는 ‘성인전용(Adult only)’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연소자출입금지’라는 표현을 쓰는 식이다.
같은 뜻이지만 긍정의 표현을 쓰는 민족과 부정의 표현을 쓰는 민족의 말의 힘에 대한 인식과 활용도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왜 말의 긍정적 힘보다 부정적 힘에 주목하게 된 것일까? 정확한 답은 없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기아 등 사회적 환경이 각박해지면 ‘ㅋ’나 ‘ㄲ’ 등 거센소리, 즉 된소리가 많아지는 경향을 두고 각박했던 근대화의 영향으로 한국인의 말이 거세졌다는 지적이 많다. 물론 이는 아직 학술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달변가를 선호하지 않았던 유교의 영향으로 말을 삼가는 문화가 발달한 것을 이유로 꼽는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유교문화에서는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경계한다”며 “선비의 자세를 뜻하는 말에 ‘신독(愼獨)’이 있는데, 이는 혼자 있을 때도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가라는 뜻이다.
이런 유교문화가 은연중에 한국 민족을 말 못하는 민족으로 만든 것 같다”고 말한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역시 “말의 속성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자기 주장을 전파하는 것인데, 유교에서는 이런 말의 속성을 자기 이해관계를 위한 기술로 생각해 부정적으로 바라봤다”고 지적한다.
유교에서는 말이 많은 사람을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이처럼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고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고자 하는 유교의 가치에 역행하는 것이어서 터부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유교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 역시 선동가라고 생각해서 좋지 않게 봤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말하는 것, 말 많은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관습이 오랫동안 굳어지면서 말의 긍정적 힘보다 부정적 힘이 부각됐고, 긍정적 언어보다 부정적 언어, 즉 막말이 발달하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같은 기사에서 요즘 저자거리에 횡행하는 외계어도 소개해 놓았는데, '소장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옮겨 놓는다.

2009년 3월 1일 일요일
On the Nature of Daylight (Max Richter, 2004)
주로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 피아니스트다. 'The Blue Octavo Notebooks' 와 - 어떻게 불러줘야 할 지 모르는 - Czesław Miłosz의 'Hymn of the Pearl and Unattainable Earth'라고 한다. 이 곡 제목은 우리말로 '햇볕[日光]의 성질에 대하여' 정도로 번역될 수 있으려나... 2월을 보내며 어울릴만한 노래를 하나 올리려고 하던 참에 생각난 곡. 비가 흔한 요즘 독일 날씨엔 어울리진 않지만... 늦겨울, 혹은 초봄 어느 날,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기도한 그런 햇살을 맞는 분위기 아닌가? 유투브에서 찾은 영상은 하지만 너무 우울한 사진으로만 온통 도배질을 해놨다. 하지만 카프카가 앨범의 주된 모티프임을 고려한다면 그게 작곡가가 전하고 싶었던 메세지에 더 가까운 해석일지도... (아래 앨범 표지 사진을 보면 그런 혐의가 더 짙어진다). 어쨌거나 2009년 2월은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고, 난 그걸 핑계로 '적당히' 우울해지고 싶을 뿐이고...
[덧붙임: 이 앨범을 여러 번 들어보니 '우울한 분위기'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윗 영상이 앨범의 느낌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고... 어떤 곡 끝날 쯤엔 까마귀 소리도 들린다. 곡들이 골고루 좋은 것 같진 않고, 역시 On the Nature of Daylight 이 곡이 가장 낫다. 200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