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할수록 경계는 또렷해지기보다는 더 모호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 모호한 경계선의 기록이다." 고종석의 새 책 <경계 긋기의 어려움>를 소개하는 프레시안 기사 중 일부다. 한국에서 자유주의 '대표선수'로 자주 거론되는 - 아, 공병우, 전경련의 그 '자유주의'나, 한나라당, 재향군인회가 얘기하는 '자유민주주의' 의 그 '자유주의' 말고, 유럽적 의미에서... 아니 그렇다고, 독일 FDP 쪽도 아닌(것 같은)데... - 고종석은 '내가 아끼는' 글쟁이다. 특히 언어에 대해 보여주는 깊은 성찰에서 배우는 바가 많다. 이 책은 시사 칼럼을 모아 놓은 것이라 기사에 소개된 구절만 봐서는 너무 '얕은' 느낌을 주긴 하지만... (사실 그의 글은 대부분 '에세이'다. 언어에 대해서 한 수 배우게 되는 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너무 갈고 닦은 문장들이긴 하다. 정보 밀도가 높은 글을 선호하는 내겐 너무 가벼운 것. 그런 탓에 난 술술 읽히면서도 각종 지식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는 도올 선생의 책과 강연을 높게 평가한다. 물론 학술적인 맥락이 아닌 '교양' 차원에서... 난 소설을 읽더라도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많이 들어있는 쪽을 고르는 편이다 (아니 '편이었다'. 지금은 어디 고를 일 자체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한국에서 대학 다닌 던 시절, 이병주, 이문열, 조정래, 김원일 류의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던 것이고... )
(…) 삼성의 기업 윤리는 조선일보보다 나은가? 내가 바라는 세상에 대해 삼성은 조선일보보다 더 너그러운가? 그럴 거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삼성 제품을 기꺼이 사서 쓰는 내가 조선일보를 지네 보듯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한쪽은 그저 물질을 팔고 다른 쪽은 거기 사악한 정신을 끼워 파니 둘을 나란히 놓는 것은 어불성설인가?"
기자는 "'윤리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호소"하며, " '이념이나 윤리를 기준'으로 경계를 긋고도 곧바로 생기는 어려움" 토로하고 있다는 해설을 덧붙이고...
좀 다른 맥락에서 이런 얘기를 해보자. 한국과 독일의 차이점 같은... 그 차이에 대해서 가장 명쾌하게 애기할 수 있는 사람은 독일에 체류한 지 6개월이나 1년 정도 된 경우가 아닐까. 그도 안되면 그 차이가 눈에 들어 오지 않을 것이고, 한 1년쯤 되면 누굴 만나더라도 가장 신나게 독일과 한국의 차이에 대해서 떠들 수 있을 것이다. 막상 그런 시기도 지나면 이제 다시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한편 한국에 대한 기억이 - 아니 '기억'이나 '정보'보다는 '느낌'이 - 가물가물해지기도 하고, 그보다는 독일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감히 '독일의 대표음식은 '슈바이네 학세다' 같은 얘길 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해서 아는 건 '독일'이 아니라 '빌레펠트' 아닌가. 특별히 장기한 체류하지 않는 이상 독일 다른 곳에 대해선 나도 여행자들이 갖는 정보, 지식, 인상 외에 갖고 있는 바가 없다. 물론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상 공부하면서 또 언론을 통해 독일에 대해서 보고 듣는 바가 많이 있긴 하다. 허나 그런 정보가 얼마나 피상적인가.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거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하게 돌아간다. 자동차 옆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유리에 이런 글이 써져 있지 않은가: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던가.... 사회에 대해서 우린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쭉 밀고 나가면 어쩌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전도서).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랫 동안 한 집에서 살았던 그 역사학 교수, '영감님'은 나와 대화할 때 사회학자들이 스스로 깜짝 놀라면서 새로운 현상이라고 하던 그 주장의 근거가 얼마나 희박한지 '풍부한' 역사적 사례를 열거하면서 논박하곤 하였다. 통계나 국가간 비교 처럼 사회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접근 방식의 한계도... 물론 어쩔 수 없이 갖게 되었을 '역사학적 bias'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대화에서 배운 바가 적지 않았다.
경계를 나누는 일은 필요하다. 아니 불가피하다. 내가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경계없이, 구분하지 않고서는 도대체 '의미' 자체가 생성되질 않는다. '지옥' 없이는 '천국'이 천국일 수 없다. 더 이상 '지옥/천국' 구분이 '의미'가 없는 순간, 그러니까 '천국'에 진입해서 더 이상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 없는 그 순간부터 그 '천국'은 더 이상 우리가 얘기하는 그 '천국'이 아닌 것이다. 시간이란 것도 그렇다. '시간'이란 개념이 있어야 최초, 최후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 '시간'이 만들어지기 전 그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개념이 얘기하는 그 지평을 넘어선다는 말이다.
경계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경계의 의미'를 성찰해 보아야 하고, 그 경계가 만들어 내는 의미의 의미도 해체해 보아야 한다. 그게 지식인, 학자,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그러니까 제 2, 제 3 질서의 관찰자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한국과 독일, 과거와 현재, 나와 너, 모든 게 다르기도 하고, 모든 게 같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선과 악을 구분하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일 역시 조심스럽게 된다.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도서관의 그 많은 책들, 논문들, 아니 인류역사 자체가 바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경계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은 많은 경우 깊은 성찰 없이 이루어진다. 아니 '단순한' 경계긋기는 때때로 요청되기도 한다. 특히, 적과 동지를 구분해야 하는 경우나 도덕적 커뮤니케이션의 경우. 대표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흔하게 경험하는 경우가 좌우 구분. 한 편에 '좌빨', '빨갱이'가 있다면 다른 한 편엔 '조선일보' 혹은 '조중동', '삼성', '미국', '친일파'가 있다. 자, 마무리는 고종석씨에게 부탁하자.
조 선일보와 한겨레에 어떤 경계를 그어놓고 보면, 이내 (사적으로 알고 있는) 딱하다 싶을 만큼 매력 없는 어떤 한겨레 기자들과 (역시 사적으로 알고 있는) 넉넉히 매력적인 어떤 조선일보 기자들이 떠올라 마음이 스산해진다. 그 매력은 재능만이 아니라 됨됨이(예의나 겸손이나 너그러움이나 신의 같은 미덕으로 이뤄지는 개인 윤리)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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