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30일 월요일

촛불 이어가기

촛불집회, 혹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촛불시위의 양상과 환경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머지않아 그 뜨거웠던 열정만 기억에 남고 다 사그라들 것이다. 모두들 일상으로 돌아갔다가 또 다른 조건이 충족되면 새로운 판이 만들어질 것이다. 월드컵 응원이나 황우석 지지 시위가 그러했듯이... 어쩌면 좀 더 진화된 형태를 보여줄 수는 있겠지만, 그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집단행동의 원인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은 더욱 중요해진다. 강준만 교수 글이 던져주는 파급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나도 그를 특별히 주목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촛불집회에 대해 쓴 오늘 한겨레 칼럼은 읽을만하다. 아마 내 생각을 좀 더 정제된 문장으로 정리해 준 것이 고마왔는지도... 앞부분을 우선 옮겨 놓는다:
" '촛불집회가 이명박 정부를 좌초시킬지도 모른다는 보수적 관점이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진보적 관점 모두 수용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일 정년퇴임한 고려대 최장집 교수가 마지막 수업에서 한 말이다. 그는 “(집회 참가자들이) 직접민주주의적 요소 확대를 통해 이상적 민주주의에 대한 선망을 보이고 있지만 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최선의 체제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 강화, 이를 통한 운동의 역할을 축소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역시 최장집이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정부 여당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야당의 지지율은 10%대를 맴돌고 있는데다 촛불집회에서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배제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는 ‘반(反)정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정치의 무덤’ 위에 핀 꽃이다. 그간 정당들이 해온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지만, 이후 정치권이 더 큰 불신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그렇다고 ‘촛불정당’을 만들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 해야 정당정치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세 가지 의제를 던져보고자 한다."
바로 이거다: "촛불집회는 '반정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정치의 무덤' 위에 핀 꽃이다." 그는 또 이렇게도 쓰고 있다: "유권자들의 투표 행태는 ‘반감’(反感)과 ‘응징’을 두 축으로 삼고 있다. 정치가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투표 행태는 극단적인 쏠림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쪽을 죽였다가 저쪽을 죽이는 식으로 돌아가면서 죽인다. 그런 죽임의 부작용이 나타나면 그땐 직접행동으로 해결하려고 든다." 그렇지. 묻지마 지지를 하다가,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난 후 3,4개월만에 지지도가 10페선트 대로 떨어진다. 정상적인 정치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 대선 후 투표율이 역대 최저라는 게 대선 결과보다 더 의미심장한 사태라고 언급해 둔 적이 있는데, 사실 묻지마 지지, 대선, 촛불시위 모두 연속성을 갖는 일련의 사태인 것이다. 이명박은 대선 전 사실 '여의도식 정치'를 벗어나겠다는 얘기를 자신의 '실용주의'와 연결시키곤 했는데 그건 많은 이들에게 매우 통쾌한 발언으로 들렸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문제 중 하나는 체계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과학(학문)', '정치','경제', '예술', '언론' 등 주요 기능체계에 대한 자기관찰, Fremdbeobachtung (언론, 학문에 의한), 성찰, 성찰이론 등의 미발달이다. 그게 내 지론이기도 한데, 난 그런 관점에서 황우석 사태, 신정아 사건, 이번 촛불집회 등의 공통분모를 보려는 것이다. 다시 촛불집회로. '정당정치'를 살려야 한다는데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물론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으나 내 경험 혹은 기억으로 그런 상상력은 대개 상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세상이 어디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던가. 소위 우리가 혁명이란 부르는 사건들도 대개 前史나 後史가 알려진 것보다 길다. 칼럼에서 정당정치의 복원, 활성화를 위해 제시한 내용은 좀 부실하다. 그 중에 이런 발언엔 좀 상상력이 발휘된 듯하다: "의원에 대한 예우를 서민 수준으로 낮추면서 금배지를 ‘근로봉사’의 상징으로 여기게 만들 수는 없는가? ... 지금처럼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이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도 개인과 가문의 영예를 위해 금배지 한 번 달아보겠다고 목숨 걸고 발버둥 치는 풍토가 계속되는 한 정치개혁은 영영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정당개혁은 정당 내 개혁과 의회제도의 개혁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둘은 물론 연결되어 있다. 의원에 대한 예우를 낮추는 것,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의회의 기능을 축소하자는 얘기는 아닐 터이고 그렇담 의원이 갖는 특권을 제한하자는 것인가? 대개 의회기능 보장을 위해 갖는 권리들 아닌가? 그렇게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정치권 진입을 시도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인가? 흠. 그런 연구가 있어야겠다. 사회과학자들의 연구는 그동안 너무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에만 시각이 고정되었던 것 아닌가? 국회의원들의 보상메카니즘에 대한 미시적 연구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되려는 혹은 대통령을 배출하려는 정당, 아니 정치세력의 욕망은 너무도 잘 드러난다. '자리'아니던가... 전리품처럼 '공직' 나눠갖기. 그런 욕망을 조금도 감출 줄 모르는 이명박씨 덕에 우리가 더 분명하게 알게되었지만... 국회의원에 대한 예우, 특권이 많다지만 어떤 방식으로 그 자리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지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천국이다. 연구할 거리가 여기 저기 널려 있지 않은가.

2008년 6월 27일 금요일

bittere Wahrheit

"(...)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선물’이란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선물이 보답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선물이 아니라 교환의 시작이며, 그것이 거저 주는 것이라면 그 또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가 거지에게 돈을 줄 때 선물을 준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주고받아온 것일까? (...)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애초에 선물이란 말 그대로 ‘논리적 모순’이지만,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시간’이라는 요소를 도입해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다. 선물 교환은 교환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시간 차이를 두고 교환을 하는 행위다. 그래서 베풂의 성격을 담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란 ‘비연속적인 베풂의 행위’인 셈이다. 어느 사회나 받은 선물에 대해 곧바로 답례하는 것은 ‘받은 선물을 거절하는 것과 다름없는 결례’라는 문화가 존재한다. 답례를 하지만 그 자리에서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간격을 두고 교환을 하는데, 그 시간 차이가 관계를 형성한다는 얘기다. (... )(정재승, "선물, 그 음험한 전략", 한겨레 21)

찔리지 않는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이런 '계산'을 하면서 살아간다. 내색을 안할 뿐이지... 이런 얘긴 그래서 bittere Wahrheit에 속한다.
사회이론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모든 사회관계로 확장한 것이 합리적선택이론, 교환이론 아닌가? 그런 접근의 설명력 자체를 부인하진 않지만, 그것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또 있는 것이고... 우리 삶을 '계산, '교환', '합리적 선택'으로 다 돌릴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런 주장은 bittere aber nur halbierte Wahrheit 아닌가 싶다, Gott sei dank... 좀 다른 맥락에서.... 언제 동료들과 얘기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 뇌물과 선물 그 구분도 애매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맙게도 우리에겐 우리 고민을 덜어주는 정의의 사도, 심판관, 기자들이 있다. 그들은 '뇌물'일 때만 알려준다 ('선물'은 뉴스가치가 없다). 그렇다. 그게 언론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거야 말로 bittere Wahrheit다.

그대는 왜 촛불을 켜셨나요?

'촛불집회'에 대해서 진중권씨같은 시사 평론가가 할 얘기들은 다 나온 것 같고, 이제 좀 더 전문적, 학술적 담론의 자리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허나 전문적 담론이란 걸 한 두 개념을 만들어 쓰거나 비트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겠다. 위험사회 개념 빌려다 한국을 '복합위험사회'라고 하거나, 2000년 이후 월드컵 이후 신공동체를 발견해냈던 맥락에서 촛불집회를, 예컨대 '미시적 생활정치'라고 부르는 것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 좋다. 허나 산뜻한 개념중심으로 뭔가를 정의할 때 한편으로 언론이나 대중이 사회전문가에 대해 갖는 기대, 혹은 일부, 혹은 대다수의 전문가들끼리 서로의 작업에 대해서 갖는 기대를 더 쉽게 충족시킬 수 있을 지는 모르나,계속 그런 식으로 즉흥적으로 일회성 개념들을 반복적으로 생산해 내는 것으로 만족하기엔 좀 아쉽지 않은가? 좀 큰 규모의 사건이 발생하면 매번 놀라고, 새로 발견하는 그런 역할은 언론이나 진중권씨에게 맡기고 사회전문가들은 좀 거시적, 역사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역사적이란 표현을 붙이기도 뭣하지만, 내가 보기에 황우석 사태와 촛불집회는 매우 유사한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예컨대 일부 사회평론가들에게 황우석 사태의 주역은 과학의 메카니즘을 잘 모르고 애국주의에 경도된 대중이었고 촛불집회의 주역은 미시적 관심과 이해도 표출할 줄 아는 정치의식 높은 시민들인 모양이다. 오해마시라. 그게 틀린 관찰이라는게 아니라, 그렇게만 볼 때 놓치는 것들이 많다는 걸 지적하는 거니까. 적어도 사회학자들은 좀 높은 데서 내려다 볼 필요가 있다 ("구름 위 비행").
그런 의미에서 오늘 확인한 한겨레 21 기사가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한겨레21>이 고려대 한국사회연구소(소장 박길성 사회학과 교수) 갈등연구센터와 함께 "촛불집회에 참여한 중고생 333명(중학생 33.8%, 고등학생 66.2%)을 대상으로" "최초의 체계적 면접조사를 벌였다"고 한다."진행한 설문조사는 6월1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실시됐다. 이번 조사연구의 책임을 맡은 김철규 갈등연구센터장(사회학과 교수)은 '촛불집회를 촉발한 10대 참여자의 특성과 의식에 대한 객관적인 측면들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촛불 소녀(여학생 70.6%)와 소년(남학생 29.4%)에게 43개 항목에 걸쳐 물었다. 그대는 왜 촛불을 켜셨나요? " 음.... 광장에 앉아 있는 333명의 중고생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구나. 답변을 보니까 설문문항은 5점 척도로 구성했고... 허나 처음에 반가운 마음으로 기사를 읽기 시작하다 서서히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설문결과가 별로 궁금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내가 원칙적으로 양적 조사, 통계학적 분석을 불신하는 건 아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의견, 태도를 묻는 설문조사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다. 물론 대통령 후보로 누굴 지지하는지 정도는 물을 수 있다. 또 참석자들에 대한 기본적 사실을 양적으로 조사하는 건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도 잘 모르고 있을 촛불 집회 참석 동기같은 걸 물어서 나온 결과가 과연 얼마나 의미있는 지식을 제공해 줄까? 본문 인용: "먼저 이들은 무엇 때문에 촛불을 들게 되었나. ‘처음 촛불집회에 나오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56.1%가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고 응답한 비율(14.0%)을 훨씬 상회했다." 이것도 분명히 제시된 답변 중 선택하는 방식으로 설문한 결과일텐데, 항목이 제시되지 않았다. 인간은 한 가지 분명한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는 그런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대개 정부 정책에 대한 부노,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 친구가 가니까, 그냥, 놀러, 심심해서, 뭐 하나 궁금해서, 대략 이런 여러 생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 중에서 그래도 어떤 게 가장 중요한 동기였는지를 끄집어 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런 설문에 대고 "그냥 왔어요"라고 대답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설문과정도 하나의 상호작용인데 특히 한국사람들은 설문자가 기대하는 대답을 하려고 한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아닌가. 재미있는 결과, "참석자 중 56.1% 촛불 든 후 61% 자기 만족도 높아져” 하하. 재미있지 않은가? '자기 만족도'라? ... 다시, 정리하자. 이런 설문조사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한겨레 21이 주관 혹은 참여한 건 벌써 문제의 소지가 있다. 또 설문항목 구성에 좀 아쉬움이 있고, 이런 복합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차라리 포커스그룹인터뷰를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또 이번 사건처럼 이슈변화나 참여자 구성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경우엔 몇 번에 걸쳐서 조사를 했을 때 훨씬 더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북한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노래, 그 때를 생각할 때... 어쩌면 이 노래는 들었던 것보다 더 자주 불렀을 수도... 그러고보니, 누가 정태춘 노래 다시 불렀다는 얘기는 못 들어본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너무 무거운가? 그렇지 않은 노래도 많이 있는데... 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쉽다.음반 사전검열철폐를 이루어낸 것만으로도 모든 가수들은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이도 이제 그만 투사의 persona를 벗어도 될텐데... 요샌 뭐하시나. [덧붙임: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촛불집회에서 참여하는 가수 목록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노래 배경이 좀 허접해도 이해하시라. 그래도 youtube에 올라와 있는 가수에 '집중'하게 하는 영상보다는 나으니까...]

2008년 6월 26일 목요일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모처럼 식구들과 통화하던 중 대화 상대가 바뀌어 이제 조카들 차례가 되었다. 유치원생과 초등 2학년인... 그게 참 애매한 상황이다. 서로 공유하는 대화 주제를 그리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나와 어린 조카들... 몇 마디 나누다가보니 스스로에게 전형적인 한국 어른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나를 발견: 동생(형)하고 싸우지 마라, 엄마 아빠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참... 내가 그런 '관습적' 얘길 남발하는 '어른들' 중 일인이되다니....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른이 되면 잔소리가 많아진다? 한국 어른들 잔소리란.... 나도 어쩔 수 없이.... 뭐 그런 걸까? 그보다는 조카들도 이해할만한 방식으로 대화 상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택한 주제 아니었을까? 그 상황은 정색을 하고 내 인생관을 들려주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예컨대, 얘들아, 공부만 하지 말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렴.... 그리고 자주 보는 사이라면 또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주로 그런 어른스런 멘트를 날리는 한국 어른들은 대개 명절 때나 가끔씩 보던 친척들이었던 것 같다. 대개 그 자리엔 그 멘트를 들어야 할 아이들 뿐 아니라 아이 부모 등, 다른 어른들도 함께 있다. 얘들은 물론 어른들이 들어도 수용할만한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이끌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communicator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제 1 덕목, "분위기 파악"! 허나 '분위기 파악'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눈치보기'다. 그 경계? 매우 모호하다. 자, 난 어느 쪽인가? 분위기 파악할 줄 아는 센스있는 사람과, 대화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치보는 비굴한 인간. 분위기 파악할 줄 모르는 센스 꽝인 사회부적응형 고집쟁이와, 어떤 굴복에도 자신의 신념, 소신을 굽히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 세상 일이란게 다 이런 식으로 구분되고, 어느 한 쪽에 서도록 요구받는다. 이런 구분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또 그에 걸맞는 구분이 주어진다: 한 편으로 '경계인' 혹은 '회색인', '성찰할 줄 아는...', '고뇌하는...', 다른 한 편으론 '회색분자', '박쥐', '절충주의자', '수정주의자' 가 된다.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차이, 구분, 경계... 그것 없이 세상을 볼 수조차 없지만, 그 구분은 또 그것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결론은? 그러니 자-ㄹ 살자!

2008년 6월 25일 수요일

벡 선생 한국에 훈수두다

울리히 벡 선생이 현 한국 시국에 대해 한 말씀하셨다. 한겨례 특별기고 형식으로. 허나 '특별기고'라는 표현이 무색하리만큼 분량도 적고 내용도 빈약하기 그지 없다. 그래도 어딘가, "위르겐 하버마스, 앤서니 기든스 등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께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인가? (톤이 좀 시니컬해도 이해하시라. 그 양반 지명도에 거품이 많이 꼈다고 생각하는 쪽이니까...). 왜 '특별'히 '기고'할 생각을 했을까? 본인의 표현을 빌면 "한국의 현 갈등 상황은 내가 쓴 책 <글로벌 위험사회>(Weltrisikogesellschaft)에서 묘사한 체계의 모든 특징을 빼닮았"다는게 신기했나보다. 그 양반 테제는 대개 매우 추상적이어서 한국 아니라 지구 그 어디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도 한 두마디 거들 수 있을 터이니 그것 자체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 딱히 그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Beck 교수의 기본 테제는 내가 이미 읽은 다른 책을 통해서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이런 내 추측이 틀리지 않음은 본문에서 입증된다. "재난이 아니라 재난에 대한 예견이" 문제이고 "이 모든 것은 초국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게 이 짧은 '기고'에서 그가 "묘사한 체계의 특징"으로 제시된다. 제목도 좀 자극적이다: “이명박 정부, 시장·미국에 충성…절대적 국민 건강권 내버렸다”. 한겨레신문 편집자가 달았겠지만 마음에 안 든다. 아닌게 아니라 한겨레도 그렇지, 벡 교수가 예를 들어 New York Times나 Sueddeusche Zeitung에 기고할 때 이렇게 무성의하게 썼을까, 그걸 덮썩 받아가지고선...특별기고 운운... (나만 그렇게 보는건가? 세상을 너무 어둡게 보나?)
사실 내용의 핵심은 (워낙 글이 짧아서 핵심이란 표현도 우습지만) - 어쩌면 이것도Weltrisikogesellschaft 테제에 포함되는 내용일 수도 있겠다 - 신자유주의 국가 비판이다. 인용: "신자유주의적 국가는 글로벌 위험사회 문제에 직면해 실패의 위협을 받고 있는가? 국가는 이런 갈등을 통해 국민이 점점 거세게 요구하는 안전에 대한 기본권을 보장하는 국가적 책임을 떠맡는 방향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이로써 전통적 좌우 대립이 새로운 양상을 띨 것인가?" 이런 질문은 이명박 정부 뿐 아니라 메르켈 정권, 부시 정권은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권 모두에게 던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구상에서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부는 글쎄 차베스나 카스트로, 김정일 정도? 그러니까 벡 선생은 노무현 정권의 특정 정책에 대해서도 똑 같은 얘기를 했을 거란 말이지. 한국학자도 아닌 이에게 더 정확한 분석, 해설을 요구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건 완전히 '하버마스에게 남북관계에 대해 묻기'-식 아닌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서 이런 내용을 인터넷 토론장에 올렸다고 생각해보라. 아니면 내가 한 번 실험해볼까?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이러지 않을까? 그런 하나 마나한 소리 집어치워, 어이 초딩, 방학 언제하니..., 아, 괜히 아침부터...
[p.s. 좀 부연하면, 벡 교수가 한국 전문가가 아니니 침묵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특히 그로서는 (세계)위험사회라는 자신의 평소 주장에 맞아떨어지는 듯한 사례를 발견했으니 이런 저런 얘기 할 수 있다. 다만 그게 대한민국 한겨레 신문에 특별기고라는 형태로 실릴려면 어느 정도 질은 담보해야 하지 않냐는 거다. 점심식사 후 커피마시면서 한 두마디 언급한 것 같은 내용을 세계적 석학의'고견'인양 실어주고 수용하는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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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새 덧글이 44개 달려있다. 그 중 몇 개를 골라 옮겨놓는다.

silver8203(211.XXX.35.203)
2008/06/26 13:16:24
저분이 저런말 할 정도면..... mb는 저분이 누군지는 알까?? 왜 독일인이 선동한다고 그러겠지?? 저런분의 말을 알아먹을리가 없지~ㅉ ㅉ

11215(210.XXX.80.241)
2008/06/25 10:08:17

울리히 백 같은 유명 사회학자의 한국문제 언급을 환영한다.녹색당이 강한 독일의 입장에서 전 세계적 자본주의 물결에 대한 광범위한 발언은 상당히 고민해봐야할 틀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위기와 폭력의 정치성과 재난과 재난의 예고에 대한 역학적 생각은 좋은 사회학적 모델로 보여진다..

11215(210.XXX.80.241)
2008/06/25 10:09:19

그러나 아직 이번 촛불 시위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 경향에 대한 정확한 숙고가 모자란 듯이 보인다.. 즉 서구 사회가 제시한 민주주의 틀안에서 한국을 대상화해서 바라보고 있는 측면으로 , 이 운동의 내막은 이미 자신이 제단한 미래상의 일부로서 묘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덜 착한 시위를 기대하며...

촛불 시위 원인, 대안, 효과 등에 대한 여러 해석, 견해가 드러나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해야 할 것이다. 학자들도 칼럼만 쓸 게 아니라 연구해서 논문을 내야 할 것이다. 오늘 본 하승우 한양대 연구교수라는 분 인터뷰도 나름 신선한 시각을 담고 있다. 읽으면서 얻은 '영감'으로 나도 지금 이 글을 쓰고 것이고... (프레시안 기사). 먼저 기사 일부 인용: "모두가 촛불집회의 '새로움'에 주목했지만 하승우 한양대 연구교수는 촛불집회의 '연속성'을 얘기한다. '촛불소녀들과 유모차 부대가 촛불집회를 통해 거리로 나온 게 아니다. 학교(어린이집) 급식 문제나 두발자유화, 아르바이트생 착취 등 문제와 관련해 이미 그들은 저항의 주체였다'는 것이다. 다만 '국가적 의제는 성인 남성들의 몫'이라는 기존의 '남성 정치'의 시각으로 봤기 때문에 여성과 청소년이 처음 눈에 보였을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관점이 잘못된 것 아닐까. 왜 자꾸 누군가를 대신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성인이 청소년을 대신하고, 남성이 여성을 대신하고, 정당이 대중을 대신하고." "학생들은 학교, 노동자들은 공장, 여성들은 가정, 각자의 공간에서 싸울 수 있는 틀을 만들어 주는 게 정당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싸우는 게 정말 어려운 문제고 누군가 지원해줘야 하는 문제다. 이번 촛불집회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있는데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싸우다 잘린다. 이럴 경우 정말 정당과 시민단체의 그러면 정말 정당과 단체의 힘이 필요하다. 제도정치로 흡수하려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공간에서 풀 수 있도록 지원해줘야 한다." 구구절절 - 대부분 - 맞는 "말씀"이다. 이런 발상은 내가 보기엔 최장집 교수의 "그래도, 제도화된 정당으로 돌아가야-론"보다 한 걸음 나간 것 같다. 참, 갈 길이 멀고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루만의 처방처럼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알아서 작동하고, 결정할 수 있는 단위들로 자꾸 분화되는 게 맞다. 물론 그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생태문제, 탈통합 혹은 배제, 여러 유형의 위험처리, 무책임 등등. 그렇다고 특정한 체계나 조직, 세력이 다른 영역에 과도하게 개입, 조정하려드는 건, 참 시대착오적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촛불시위의 핵심은 사실 그런 시대착오적 개입, 조정에 대한 거부의 몸부림 아닌가? (그런 면에서 하교수의 분석도 왠지 초점을 겨냥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도대체 2MB 세력들의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까? 진짜, 밥은 먹고다니는지 묻고 싶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그런데 우익이나 검찰, 조중동 찌라시들이 하는 '짓'을 보면 그'것'들이 아주 근거없이 나대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 세력'들의 뿌리가 그렇게 깊이 뻗어 있는 것이다. 민주화 후 20년으로도 씻어내지 못한 그런 '몰상식'의 세력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하교수가 내린 처방은 신선하긴 한데 어째 유토피아 쪽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뭐,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라고 하니... 그런 김에 나도 한 번 '상상력'을 발휘해 보련다. 무슨 '주의'로 스스로를 얽어매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치이데올로기 중 내가 지향하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게 자유주의라고 생각한다. FDP 처럼 배부른 자들의 정치클럽 같은 느낌을 풍기는 자유주의자들 집단도 있지만, 아직 상식이 통하는 사회까지 갈 길이 멀수록 자유주의는 '보수화된 진보'보다 차라리 더 진보적일 때가 많다. 그런 자유주의는 어쩌면 자율주의, 아나키즘 쪽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지... (더 이상 묻지 마시라, 사실 이 쪽 공부 많이 하지 않았다). 어쨌든 한국 사회가 당분간은 2MB 세력처럼 시대착오적 발상을 하는 무리들을 몰아내고 상식, 기본이 통하도록 하는 일에 집중해야겠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은 하교수 지적처럼 좀 다양한 견해들이 일상 공간, 공적, 사적 여러 공간에서 드러나고 그것을 잘 조정해나가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난 촛불시위가 더 과격해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파리나 LA에서처럼 폭동을 일으키라는 게 아니라, 좀 더 '덜 착한' 주장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따옴표에 유의할 것!). 하교수의 상상력은 '고작' "학교(어린이집) 급식 문제나 두발자유화, 아르바이트생 착취 등 문제" 였지만, 예를 들어 이런 건 어떤가, 병역의무철폐, 대학공립화 혹은 평준화, 性적 자기 결정의 자유, 존대말 폐지 같은... 허나 현실 속은 청소년, 청년들은 집회 끝나고나서도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치우도록 '사육되고' 있다. 너무도 착한 우리 젊은이들... 이번 미쇠고기 협상 건은 비록 일부 박해를 받더라도 뚜렷한 명분도 있고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착한' 이슈에 속한다. 좀 '덜 착한' '미시적' 주장을 더 많이 듣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머잖아서 요즘의 이 '착한' 시위의 시대를 그리워할 날이 닥칠지도... Wer weiss... 상상력이 필요하대잖아....

2008년 6월 24일 화요일

'생명윤리' 개념사

생명윤리, 아니 정확히 'bioethics'란 단어는 미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완전히 새로운 단어는 아니고, 'bio'와 'ethics'의 조합어다 . 누가 이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는지도 이미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그 '영예'는 위스콘신대 종양학(oncologist) 교수인 Van Rensselaer Potter에게 주어진다. 1970년에 발표한 논문 "Bioethics, the science of survival"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이어 1971년에 ' Bioethics: The Bridge to the Future'라는 이름의 책을 냈음). 이 논문제목이의미심장하다. 생존의 과학이라... 그는 여기에서 bioethics를 “생물학의 지식과 인간의 가치체계에 관한 지식을 결합하는 새로운 학문분야”로 정의했다. bio"는 생물학적 지식, 즉 생물체에 대한 과학을 나타내고, "ethics"는 "인간 가치 체계에 대한 지식"을 대표한다는 의미로서 말이다. 진화론적, 생리학적, 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생명계(biosphere)를 유지하기 위한 ‘생존의 학문’이었다. 요즘 개념으론 환경윤리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의미로는 그 이후 널리 사용되지 않아서 요즘 시각으로 보면 낯선 발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개념 창시자로서 그에게 주어진 영예는 반쪽짜리인 셈.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생명윤리', 즉 '생명과학 혹은 생의학의 윤리'라는 개념으로 'bioethics'를 처음 사용한 이는 조지타운대 Andre Hellegers 교수라고 한다 (the Dutch obstetrician/fetal physiologist/ demographer, 무슨 전공이지 도대체??). 1971년 그가 조지타운 대학에 "The Joseph and Rose Kennedy Center for the Study of Human Reproduction and Bioethics"을 세우면서 (사실은 70년에 세운 "the Kennedy Center for the Study of Human Reproduction and Development"의 개칭) 그 이름에 'bioethics'를 집어 넣은 것. 연구소 하나 생겼다고 당시에는 낯설었을 그 단어가 널리 퍼졌을 리는 없고, 그 전후 사정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여러 연구들이 있다. 여하튼 매우 '미국적인' 상황에서 '미국적인' 이해를 반영한 개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생명윤리'라는 새로운 개념, 루만식으로는 표현하면 이 새로운 의미론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은 사회학적 설명을 요하는 사태다. 물론 의미론의 세계화는 개념의 확산 뿐 아니라 같은 개념이 다른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다른 의미가 부여되는 현상도 포함한다. 실제로 국가 혹은 지역마다 '생명윤리'란 의미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또 사용되는 있다. 그러고보니 '이 쪽', '생명...; 언저리엔 신조어들이 꽤 있다. biomedicine, biotechnology 등등. 생명윤리의 개념사는 이런 '생명...'을 접두사로 삼는 개념들의 개념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유전공학 (genetic geneering, Gentechnik)이 언제부터인가 생명공학 (biotechnology, Biotechnologie)가 되었다. 개념사연구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독일에서는 Gentechnik/Biotechnologie (Gentechnologie는 Biotechnologie가 널리사용된 후에 Gentechnik을 지칭하면서 등장한 것 같다, 내 관찰에 따르면, 독일어 Biotechnologie는 biotechnology의 번역어겠지. genetic engeneering을 Gentechnik이라고 나름대로 줏대있게 번역해 놓고선... ), 영어권에서는 genetic engeering/biotechnology. 생물을 다루는데 "engeneering"을 붙이다니, 아마 그 때는 좀 더 공학적으로 보이고 싶었나보다. bioengineering? 이게 시도되기나 했을까? 글쎄... 한국에서는 영어단어를 좇아 유전공학/생명공학.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독일과는 반대로 biotechnology의 번역어로 직역 '생명기술'이 아닌 '생명공학'이 된 것. 어떤 이들은 biotechnolgoy를 '생물기술'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하나, 널리 쓰이는 것 같지 않다. 아마 익숙해진 유전공학과 '운'을 맞추기 위해서겠지만, 미국에서는 빠진 engeneering이 한국에서는 살아남아있다. '공학'이라는 수식어가 '그냥 기술'보다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나 보다. 하긴 '생물기술'보단 '생명공학'이 더 듣기에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익숙한 탓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engeneering 과 '공학'은 모국어 화자들에게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상식이지만.
어쨌든 생명윤리, bioethics의 의미론적 성공은 두말할 필요 없이 biomedicine, biotechnolgy의 의미론적 성공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biomedicine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분야가 생겨나고, 첨단 연구, 기술이 바로 적용되던 그 분야 윤리적인 문제를 기존의 의료 윤리와 구분해서 보고자 생명윤리가 환영받았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반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bioethics란 의미론이 등장, 확산되면서 그 동안 관련 없이 떨어져서 '잘' 진행되던 연구들 어느 순간 함게 묶이기 시작한다. 사실 인간 배아를 사용하는 연구는 불임치료연구의 일환으로 별 사회적 저항없이 80년대 이후 쭉 있었던 현상인데, 복제가 문제된 이후 이제 그것마저 규제논쟁의 대상이 된 것이고, 생명윤리라는 의미론이 확산되면서 배아연구 뿐 아니라, 낙태, 안락사, DNA정보 이용 같은 이슈들까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것. 좀 극단적 예를 든다면, 낙태운동하던 인사들이 생명윤리학자가 되고, 생명윤리학자로서 그들은 이제 낙태 뿐 아니라 '생명윤리'가 적용되는 여러 이슈들을 개척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나는 구조의 변화를 의미론이 좇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새로운 의미론이 기존 communicaiton process를 새롭게 구조하는 작용도 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의미론과 구조의 관계는 참으로 '친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covariation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bioethics가 1990년대 후반에야 알려지고, 생명윤리학회는 1998년 8월에야 결성되지만, 새로운 의미론임에도 대중 논쟁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biotechnology란 의미론의 대중화와 맞물려 있다. biotechnology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잘 어울리지 않는가: 생명공학 vs. 생명윤리. 생명윤리논쟁의 동인이었던 복제 기술이 생명공학의 하나로 히해되고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에 대한 댓구로서 생명윤리가 도입되면서 (대표적으로 NGO들) 이제 생명윤리란 의미론이 윤리적 문제가 될만한 대상을 선택해 가기 시작한다. 본인들 입장에서는 '돌리'때문에 뜬금없이 불려나가서 함께 야단 맞는 그런 기술, 연구분야들이 선별되는 것이다. '모든 건 MB탓'이 아니라 '돌리' 탓이다. 사실 생명윤리의 구성적인 측면은 약간 과장된 것이기도 하다. 복제기술 뿐 아니라, 그 무렵 이 bio쪽이 북적북적 시끄러웠던 건 사실이니까. 인간유전체 프로젝트가 그랬고, 줄기세포가 그랬고... 그런 와중에 bioethics란 의미론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얼떨결에 불려나온 건 '낙태', '뇌사' 정도가 될 것이다.
라익이 재미있는 얘기를 남겼다. "나는 생명윤리라는 분야는 생명윤리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신조어는 많은 것을 내포하며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신조어가 논의에 새로운 초점을 제공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다양한 분과학문들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모으면서, 결국 윤리라는 단어에서 풍겨나는 이데올로기적 냄새를 제거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I think that the field of bioethics started with the word bioethics because the word is so suggestive and so powerful; it suggests a new focus, a new bringing together of disciplines in a new way with a new forum that tended to neutralize the ideologic slant that people associated with the word ethics) (Reich 1993: S7).
개념사, 혹은 사회학적 의미론 연구의 입장에서는 바로 Reich의 견해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개 생명윤리학자들은 이제는 널리 사용되는 '생명윤리'라는 개념을 가지고서 동서고금 역사를 들추면서 '생명윤리'를 찾아낸다. 전통적 생명윤리, 이슬람, 유교적 생명윤리... 등등. 물론 그런 작업 자체가 의미있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마는, 앞뒤를 분명히 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명윤리란 한국 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당연히 있었던 것이라는 전제는 좀, 아니 많이 재미가 없다. 왜 그동안 '생명윤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개념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현상, 현실을 표현하는 이름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개념의 구성적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푸코, 데리다 등 바로 언어의 이런 측면에 주목했던 것 아닌가).

Reich, Warren Thomas (1993), How bioethics got its name. Hastings Cent Rep. Nov-Dec;23(6):S6-7

2008년 6월 18일 수요일

윤리의 세계화?

루만에게서 윤리는 도덕 커뮤니케이션의 성찰이론이고, 법은 규범적 기대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가지는 체계이다. 도덕, 윤리커뮤니케이션은 독자적 체계가 아니는 어느 체계에서나 관찰된다. 루만은 현대사회가 도덕적으로 통합되어있다는 착상을 포기한다 (cf. 뒤르카임, 파슨즈). 역설적으로 이런 탈도덕화는 체계의 재도덕화의 조건이다. 사실 도덕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도덕커뮤니케이션을 성찰하는 윤리커뮤니케이션은 줄어들거나, 상호작용 차원으로 축소되니는 커녕 (cf. T. Luckmann) 여러 체계에서 오히려 더 흥왕하고 있다. 특히 어떤 조건에서 그런가? 우선 병리학적 경우일 수 있는데, 기능체계의 커뮤니케이션이 도덕화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코드에 기초한 커뮤니케이션의 안정성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도핑 (스포츠), 표절, 자료 조작 (과학), 부패 스캔들 (정치)과 같은 사건들이 발생한 후 도덕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 윤리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윤리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체계는 대개 윤리적 의미론을 가지고 있다. 기업가윤리 (경제), 연구윤리(정치), 청렴, 정직 (정치) 등등. 그런 윤리 커뮤니케이션은 체계 경계의 안정, 재생산의 보장을 위한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다른 한 편 체계의 재생산에 도덕 코드가 사용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대표적으로 정치. 이슈의 도덕화는 정치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가장 좋은 전력이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도 마찬가지. 체계에서 윤리의미론이 활발하게 사용되는 것은 다른 한 편 법적 제재를 피하는 기능도 하는 것 같다. 윤리에 대한 의미론의 내용이 되는 경우는 대개 그 자체로 공적인 제재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자발적, 자율적 규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몇 가지 사례를 제외하고 법의 제재력은 대개 영토국가 내에서 발휘되는데, 윤리/법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제윤리는 사정이 좀 다르다 (cf. Luhmann 1999). 법을 통한 제재가능성이 매우 낮은 국제관계에서 국제 윤리가 세계법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환경문제에 대한 국제적 윤리 논쟁 (cf. H. Jonas 책임윤리), 인권 논의 등등.
그런 이유에서 윤리는 쉽게 세계화된다. 세계 차원에서 연결되는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고, 규범적 기대치가 상충하는 경우가 많아지는데 반해서, 결정을 내리고, 제재할 수 있는 instance의 역량은 턱없이 못미치기 때문이다. 세계화는 윤리화를 동반한다,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윤리의 세계화. 여기서 윤리는 의미론으로서 윤리다, 분과학문으로 윤리, 도덕에 대한 성찰이론으로서 윤리가 아니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윤리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의 세계화'가 될 것이다. 허나 '윤리 커뮤니케이션'과 '윤리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구분하는 건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Luhmann, Niklas (1997), Politik, Demokratie, Moral. In: Konferenz der deutschen Akademien der Wissenschaften (Hg.), Normen, Ethik und Gesellschaft. Mainz: Zabern, 17 – 39.
Luhmann, Niklas (1999), Ethik in internationalen Beziehungen, in: Soziale Welt 50(3): 247-254

2008년 6월 14일 토요일

의미론의 세계화

의미론의 세계화를 논하기 이전에, 의미론의 변화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를 해보자.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의미론이 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커뮤니케이션끼리의 연결(방식)이 바뀌는데 의미론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런 의미론은 사회 현실에 대한 접근통로를 잃는 것이고 커뮤니케이션의 내용과 방향을 조정할 수 없다. 구조와 의미론의 관계는 공진화적 혹은 순환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의미론의 변화는 구조변동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 커뮤니케이션 주제의 성공과 의미의 유형화를 결정하기도 한다.
구조와 의미론의 관계를 추적하려면 구조의 어떤 차원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그 점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대사회의 '지식사회'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면, 의미론도 거기에 맞춰서 변화한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내 경우 기능적 분화라는 세계사회의 구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세계차원의 기능적 분화, 지역 조직, 상호작용의 세계화라는 거시적 구조변화가 의미론의 세계화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기능적 분화는 어떤 유형의 의미론을 필요로 하는가? 세계체계의 특징은 끊임없이 그 경계를 스스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점. 일상적을 확인되는 것도 아니고, 정치가 보장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의미론적 발전은 체계 분화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보아야 할 이다. 기능적 분화라는 구조적 차원의 변화를 볼 때 의미론의 가장 큰 기능은 체계의 경계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 체계의 자기관찰, 성찰이론이 대표적이다. 또한 여러 형태의 윤리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필요하다. 경제윤리, 연구윤리, 정치윤리, 생명윤리... 체계가 자율적이되면 체계 유지에 해가 되는 경우를 배제하는 메카니즘은 윤리가 대표적이다. 세계차원에 대해 국가 단위로 영향력이 제한되는 공권력을 쓸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세계차원에서 관철되는 의미론은 우선 매우 추상적이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너무 분명하게 간섭해서는 극도로 상이한 지역적 커뮤니케이션을 조정해서 체계의 재생산을 보장할 수 없다. 이게 생명윤리의 확산과 동시에 지역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다. [이것이 바로 매우 국지적일 것 같은 정치, 법, 혹은 윤리 같은 경우에 대해서도 수렴/분산의 동시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다. 이에 대한 경험적 연구는 이미 충분히 있음.]
하지만 세계사회는 이런 의미론적 수렴, 그리도 동시에 분산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한, 혹은 이전보다 더 활발한 지역적 의미론을 발견한다. 그것은 세계사회의 반작용인가? 아니면 세계사회의 구조에 내재되어 있는 특징인가? 한마디로 얘기하기는 힘들도 체계에 따라 다르게 이용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적 의미론이 가장 설득력있게 작동하는 경우가 대표적으로 정치, 매스 미디어. 물론 가장 큰 전제는 이들도 세계차원에서 작동하는 이상 생각이상 탈지역성을 띤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재생산을 위해서 지역 의미론이 필수적이다. 유권자들에게 호소해야 하고, 독자들에게 어필해야 하는 것이다.

의미론, 세계화

아래 게시물을 보니 '의미론' 개념이 매우 혼란스러워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려고 한다. 또 기본적 정보들도 이 자리에 모아 놓는다. '의미론'으로 번역되는 'Semantik'은 원래 언어학의 한 분야를 일컫는 개념인데, 우선 이에 대한 한글 위키피디아의 설명을 옮겨 놓는다: "'의미론'이라는 용어는 서구에서 그리스어로 '의미하다' (σημαινω)는 단어에 바탕하여 만들어진 단어(영어: semantics, 프랑스어: sémantique, 독일어: Semantik)의 번역 용어이다. 처음 이 단어를 만든 이는 프랑스의 언어학자 미셸 브레알로 알려져 있다. 1897년에 Essai de sémantique 라는 책을 내면서 의미론(프랑스어: sémantique) 이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해 냈다. 당시 브레알은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차원에서 '의미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으며 소리를 연구하는 '음성학'에 대비되는 학문이라는 개념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독일 태생의 논리학자 루돌프 카르납은 '의미론'을 표현과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파악하였으며, 의미론을 한편으로는 화용론, 즉 표현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대비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사론, 즉 표현들 자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와 대비시켰다." 그 이후 언어학을 구분하는 방식은 좀 더 복잡해졌다. 그 중 언어가 낮은 단계의 소리에서 높은 단계의 뜻까지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 따라 그 위계적 구조 속에서 어떠한 대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따라 구분할 때 의미론이 등장한다: "음성학은 음성의 물리적 성질에 대한 학문. 음운론은 화자가 말할 때 심리적으로 구분하는 소리(음운)에 대한 학문. 형태론은 단어의 내부 구조에 대한 학문. 통사론은 문장의 내부 구조에 대한 학문. 의미론은 단어의 의미와 단어의 조합에 따른 의미 변화에 대한 학문. 화용론은 대화에서 화자의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학문. 텍스트언어학은 언어 소통의 궁극적 단위인 텍스트에 대하여 다각도로 연구하는 학문." 짐작할 수 있다시피 언어학의 한 분야로서 '의미론'과 루만의 '의미론'은 그 사이가 멀어도 한참멀다. 하지만 Semantik은 학자들 가운데서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단어, 개념의 어원, 의미변화를 사회구조변화 속에서 추적하는 '개념사'에서 '의미론'이 사용된다 (Koselleck) (ex. '정치적 의미론' ). 루만은 자신의 의미론 개념을 Koselleck에서 빌어왔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우리말로 '의미론'이라고 번역하면 '론' 때문에 루만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받는데 방해가 되는데,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한다. 아래 게시물에서도 언급했듯이 의미론은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져다 쓸 수 있도록 저장된 개념, 주제, 아이디어, 이야기, 세계관 등 구조화된 의미내용를 의미한다 (kondensierte und wiederverwendbare Sinninhalte) .이는 사실 굉장히 폭이 넓은 개념이다, 상상력과 체계이론 기초지식이 필요한! 의미론은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을 결정하고, 의미론 없이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불가능하다.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경우에도 의미론을 배제할 수 없는데, 그런 경우 루만은 오히려 scheme(frame), script 같은 개념들을 소개 혹은 도입한다. 루만은 의미론의 미식적 혹은 일상적 차원에는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경우 Kultur, Wissen, Gedaechtnis 같은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루만이 관심을 기울였던 의미론은 그가 'gepflegte' 'ernsthafte' 같은 형용사를 붙여서 표현했던 의미론이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잘 가꾼 의미론', '세련된 의미론' 정도가 될까.... (아, 루만을 잘 모르는 이가 이런 표현이 담고 있는 내용을 상상이나 해 볼 수 있을까?). 구두대화보다 좀 더 진지하고, 추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저장되고 전해내려오는 의미론. 그것은 각종 텍스트, 역사적 문헌들, 사회의 자기기술, 성찰이론 등을 가리킨다 (철학, 사회학이론, 생명윤리 등등). 의미론은 그 자체로 자가생산적 체계는 아니고 형태의 합일 뿐이다 (벗뜨...읽지는 않았지만 Willke의 최근 저작 'Symbolische Systeme'엔 - 아마 의미론도 거기에 포함될 - 상징들의 체계성을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루만은 의미론 연구는 이런 세련된 의미론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4권으로 이루어진 '사회구조와 의미론'은 17, 18세기 사회구조의 변동과 여러 개념들의 의미론 변화의 관계를 추적하고 있다 (이 거시적, 역사적 연구의 테제는 의미론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좇아간다는 것). 하지만 아주 미시적 차원에서 Operaiton/ Beobachtung 차원을 설명할 때 Beobachtung의 차원을 Semantik으로 보기도 한다 (Staeheli). 그 경우에 슈텔리는 observation이 operation을 '구성하면서 뒤좇아가는 관계'로 보자고 제안한다. Struktur/Semantik과 Operation/Beobachtung을 거의 호응관계로 보는 것이다. 루만이 의미론을 이런 식으로 이해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체계의 자기기술, 성찰이론 같은 경우에도 루만은 이것도 의미론의 일부라는 점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 (적어도 난 보지 못했다). 루만은 이 의미론 개념을 늦게 잡아도 1980년 초에는 도입하는데, 루만답지 않게 일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Operation/ Beobachtung 구분을 기초로 표현하자면, 수학적 세계에 가까운 사회의 Operation 차원은 깔끔하게 잘 정리했는데, 이 Beobachtung 차원에 대해서는 매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사실 이 복잡한 사회현실은 그런 방식의 이론화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의미론적 세계가 그만큼 복잡한 것, 사회구조에 비해서.
세계사회, 세계의미론으로 가 보자. 세계사회는 구조적 차원, 의미론적 차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세계사회는 구조적 차원에서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Eigenstruktur (Stichweh)]: 기능적 분화, 세계적 사건, epistemic communities 등등 (Stichweh). 의미론적 차원은 어떤가? 세계사회론의 대가 Stichweh도 특별히 이 주제에 언급한 것 같진 않다 [이번 Semantik-Tagung에서 맛뵈기로 쬐금 소개하긴 했다. Vortrag 제목: Selbstbeschreibung der Weltgesellschaft]. 체계차원에서 의미의 내용 측면을 다룰 때 루만은 의미론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대신 자기관찰, 자기기술, 성찰이론 등 개념을 도입힌다. 기능체계의 경우 구조적으로 세계체계이기 때문에, 기능체계의 자기기술, 성찰이론은 - also, Semantik - 은 자연스럽게 세계의미론인 것인가? 세계의미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민족주의, 근본주의는 어떠한가? 근본주의는 종교체계의 의미론인가? 이런 경우를 위해 'Einheitssemantik'이라는 표현을 도입하기는 했다 (ex. P. Fuchs). Einheitssemantik의 'Einheit'엔기능체계도 포함하는 것인가? (Why not?)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의미론의 세계화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그렇지 특정 의미론이 지구적으로 확산되어 쓰인다면 그것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론의 확산이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던지 확산되면 그것은 세계화다. 체계이론이 구조적 차원에서는 '세계화' 개념이 좀 걸끄러워서 조직, 상호작용의 차원에 사용한다고 했는데, 어짜피 체계 경계설정에서 자유로운 의미론의 차원에선 세계화, 지역화, 별 부담없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구조가 세계화되면 의미론도 세계화되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 의미론은 구조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독립적 진화궤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논문은 어쩌면 이런 이론적 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사례연구가 아닐지...
과학, 의학의 세계화 (조직, 상호작용)에 따른 의미론의 따라잡기 (bioethics). 그 의미론은 다른 기능체계(조직, 상호작용)에서 '사랑받는' 의미론과 충돌. 내 경우 민족주의라는 Einheitssemantik...

세계문화? 문화의 세계화?

'문화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중 가장 모호한 개념 중 하나다'(Luhmann 1995: 398, Die Kunst der Gesellschaft). 사실 '문화' 개념의 용처를 찾아보면 루만의 이런 평가가 별로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화, 드라마에서 옷, 김치, 요리솜씨, 유적, 여러 종류의 상징, 학문, 스포츠, 소설 등등. 심지어 Kulturwissenschaft는 사회학을 대체할 개념으로 진지하게 제안된 바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A.Weber 와 F.Tenbruck). 하지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 '문화'란 개념이 모호해서 싫다고 그 개념이 가리키는 내용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루만, 아니 루만 할아버지일지라도... "체계이론은 문화라는 불분명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을 가진다" (1997: 109,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하하, 그렇지, '문화'라는 개념이 지칭하는 현상을 모른척 하지는 않으면서 문화라는 모호한 개념을 쓰지는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럼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는 데로 루만에게 그건 '기억', '의미론(구조)', '지식'이다 (cf. Laermans 2007*). 어떤 이유에서인지 문화이론 혹은 문화연구적 입장과 루만을 비교하는 작업이 최근 활발하다. 소원했던 '문화'와 루만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학자들이 발벗고 나선 모양새다. 루만의 문화론이라.... Die Kultur der Gesellscahft라고 제목을 붙여 줄 수도 있겠다, D. Horster가 만들어 놓은 "잘못된" 선례를 따른다면. cf. Die Moral der Gesellschaft 2008) [파슨즈가 문화에 latent pattern maintenance라는 기능을 부여해 둔 데에 반해서, 세계사회를 기본 범주로 삼고 있는 루만에게서 상징적, 규범적 통합 기능을 한 체계에 부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사회의 문화'같은 표현은 대놓고 루만에게 맞서보겠다는 의지의 발로다. 그러니 루만을 소개하면서 그런 제목을 달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회의 도덕'도 마찬가지인데, 그 책은 이미 나와버렸다. 이해하기 힘든...]. 어쨌든 나도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세계문화론' 혹은 '문화의 세계화' 논의에 루만을 끼워 넣어볼까 한다. '문화'라는 개념을 피하려고 했지만, 반면에 - '세계화'가 아닌 - '세계사회'라는 강력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던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세계문화', '문화의 세계화'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문화 세계화'(globalization of culture)에 대한 접근, 입장은 매우 다양한데, 세계문화의 가능성 혹은 'Stellenwert'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기준을 삼으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세계문화 같은 건 없다는 회의론자에서부터 (multiple modernities theory), 세계문화란 경제, 정치의 세계화에 종속된 것이라는 주장 (근대화론, 세계체제론: 물론 이 둘의 결론은 정반대다), 그리고 문화적 세계화는 독자적인 동학을 가진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Meyer, Robertson. Meyer에게는 세계문화의 확산, Roberston은 세계문화가 독립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국지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의 연속)... 그럼 우리 루만 선생은? 물론 이는 먼저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다. 아, 이쯤해서 언급해야 할 사실은, 루만이 문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사실.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 재생산은 주제(Themen)의 재생산을 통해 진행된다. (…) 그 주제의 저장고(Themenvorrat)를 ‚문화‘, 그리고 특별히 커뮤니케이션을 목적으로 저장된 것을 ‚의미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따라서 진지하고, 저장할만한 의미론은 문화의 일부분이고, 그것은 개념사, 사상사를 통해 전해내려오는 것이다."(1984: 224, Soziale Systeme). 한 마디로 문화는 '주제의 저장고', 혹은 '비축되어 있는 주제들'이다, 언제든지 커뮤니케이션의 부르심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런 매우 언어지향적인 문화 개념이 사회과학에서 아주 생소한 것도 아니고, 좁혀서 세계문화론 논의 속에서도 충분히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는 접근이다. 루만식 '문화의 세계화'란 특정한 '주제' 혹은 '의미론'의 지구적 확산을 의미한다. 문화가 다른 곳에서는 주로 의미론과 연결되어서 등장하므로, 앞으로 '주제'는 빼고 문화를 '의미론'의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곧 '문화 세계화'를 '의미론의 세계화'로 보겠다는 말씀. 아래 게시물 논의에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의미론의 세계화인가, 세계 의미론인가?'
사회구조적에 비해 의미론(구조)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 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썰'이 있지만, '共진화'(Koevolutoin)로 보는 게 무난하다(실제로 이는 루만의 주장이기도). 공진화는 여러 가능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니까, 어떤 관계인지를 밝히는 일은 결국 경험적인 연구의 과제인 것이다. 사회구조도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느니까, 구조와 의미론의 관계는 어떤 사회구조적 측면을 고려하느냐에 달려 있기도하다. 기능체계의 차원에서는 어떠할까? 세계사회의 지평이 중요한 기능체계 차원에서는 자동적으로 세계적 의미론이 연결되는 것일까? 기능체계의 성찰이론, 자기관찰은 세계적으로 관철되는가? 때로는 의미론의 확산이 '구조적 세계화'의 확산에 선행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구조의 세계화란? 기능체계로 분화된 커뮤니케이션이 세계적으로 넓어지는 것인가? Raum 차원 도입을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런 설명을 피하는 방식은 '세계화'를 '기능체계'가 아닌 '조직'이나 '상호작용' 차원으로 보는 것. 기능체계는 이미 세계적이다, 세계화되는 게 아니라. 하지만 조직이나 상호작용은 어짜피 공간적으로 제한되지 않을 수 없는데, 조직, 상호작용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적 경계가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세계화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체계이론의 틀 속에서 '세계화'를 '조직', '상호작용' 차원으로 한정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cf. Bora, Albert). 이같은 '세계화' 이해는 세계사회, 기능적 분화, 세계적 기능체계라는 이론적 기본틀을 깨지 않으면서, 실제로 관찰되는 확산 과정을 기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하지만 세계화가 특정 모델의 일방적인 확산을 주기 때문에, Robertson이 제안한 Glocalization 개념을 쓰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본다. 아니면 구조차원에 대해서 쓰이는 개념을 빌린다면 의미론의 '내적 분화'란 표현을 쓸 수도 있겠다. '세계적 의미론'이란, 세계차원에서 작동하는 구조(대포적으로 '기능체계')의 자기관찰, 성찰이론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고, 굳이 특정 구조에 관련되지 않지만, 즉 구조를 넘나들면서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론을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론은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비유컨대 '화폐'만큼 추상적이어야 한다. 대표적인 게 '인권'. 오해마시라.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차이를 내용으로 담기 위해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의미론의 세계화란, 특정 의미론이 조직, 상호작용의 차원에서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루만의 세계사회론, 사회구조/의미론 주장을 유지하면서 '문화의 세계화' 논의를 도입하는 작업은 한 편으로 기능체계 차원의 세계구조, 세계의미론을 논하고, 다른 한편 조직과 상호작용의 차원에서 세계적 확산을 논의하는 것이다. 사실 세계의미론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론의 세계화가 곧 그 세계의미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의미론적 Glocalization).
내 사례의 경우, 생명윤리는 세계의미론이다 (세계적으로 작동하는 의학, 생의학의 의미론적 측면이라는 뜻에서). 이런 세계의미론은 조직, 상호작용의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것으로 '관찰된다' (세계화화된다). 일방적인 확산과정이 아닌 것 (물론 확산이라고 표현할수 있는 시기, 과정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수용만 하는가? No!). Glocalization, 즉 'global sematnics in making'이 'internal differentiation of global semantics'보다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한국, 한국에 적을 두고 있는 과학 조직, 상호작용의 경우 'bioethics in making' 과정에 참여한 것은 최근 일이다. 초기니까 '확산'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다른 의미론과 경쟁한다. 대표적으로 (경제, 기술) '민족주의'를 들 수 있다. '구조적 세계화 --> 의미론적 세계화'는 operation 자체가 상대적으로 더 글로벌한 과학 체계에서 분명하게 관찰된다. 과학, 의학, 생의학 등의 경계, 한계 등에 대한 성찰이론 중 하나인 연구윤리, 생명윤리는 한국에서도 큰 저항없이 확산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왜 하필 90년대 말인가? 지역적 차원에서 그 경계가 도전받을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 국가가 보장해주다시피 했던 것. 기능적 분화는 한국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드러난다: 정치 우세 약화. 타기능체계 강화 (이 경우 과학, 의료, 매스미디어 등). 반면에 operation 의 Publikum이 주로 지역적을 제한되어 있는 정치, 매스미디어의 경우에는 국지적 의미론, 즉 지역적 맥락에서 operation의 재생산에 유리한 의미론에 지향한다.
결론적으로, 세계문화, 세계의미론의 확산 혹은 의미론의 세계화는 구조적 측면을 고려할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 Laermans, Rudi (2007), Theorizing Culture, or Reading Luhmann Against Luhmann, in: Cybernetics & Human Knowing 14 (2-3), 67-84.

세계화인가 세계사회인가?

세계화인가 세계사회인가? 루만이 1997년에 발표한 논문 제목이다. 부제는 '근대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루만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개념정의를 하거나 개념사를 통해서 논지를 풀어내는 것이다. 루만이 어디선가 '정의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출처 기억나지 않음). 어떤 면에서 개념을 정의하거나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해두는 일이 루만 이론의 핵심이다 [대표적으로 '사회체계'(1984)]. 그런 작업이 아닌, 개념사 자체가 그의 이론의 응용인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그의 지식사회학, 위험사회학, 정치사회학적 작업, 그리고 말년의 'Die Gesellschfat der Gesellschaft'의 뒤쪽). 사회 재생산의 기초인 Operation/Beobachtung 중에서Beobachtung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Operation 쪽이 수학공식처럼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반면, Beobachtung 쪽은 매우 혼란스럽다. 어제, 오늘 있었던 Semantik 컨퍼런스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지만... 그 쪽 개념들은 대표적으로 자기관찰, 자기記述, 지식, 문화, 의미론, 테마, 프레임, 스크립트 등등. 어쨌든 루만에게서 개념사는 논의를 하기 위해 거치는 통과의례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허나 세계화, 세계사회에 대해서 위에서 소개한 이 논문은 '세계화, 세계사회'의 개념사는 아니고 세계사회에 대한 개념 정의에 가깝다 (1971년에 발표한 논문 'Weltgesellschaft'와 더불어). 재미있게도 제목에 내 건 '세계화'란 개념이 막상 본문에선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이런 질문은 등장한다: "세계체계는 하나의 사회인가 아니면 파슨스 식으로 사회의 체계인가?" (Is the global system a society, or is it a system of societies, as Parsons would have it?). 사회가 단수인가, 복수인가라는 질문이다. 사실 세계사회는 루만 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개념, 내용으로 주장한다. 이제는 고전이 된 맥루한의 '지구촌' (global village)라던지,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도 있고, global society, world society는 Burton, Meyer, Shaw 등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 Beck은 'cosmopolitanism' 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내용은, 음, 별 것 없다 (하여튼 이 양반은 껍데기만 번지르한 새개념 만들어 내는데 도사라니까). 어쨌든 루만의 세계사회 주장의 핵심은 현대사회의 우선적 분화기준은 기능적 분화이고, 각 기능체계는 세계적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기능체계의 독립성 (그것에 기초한 의존성) 때문에 현대사회는 다극 혹은 다중심적일 수 밖에 없고, 더 이상 연대, 문화, 유사성, 통합 등에 기초해서 '사회'를 정의할 수 없다. 그러니 '세계사회'는 서로 도달'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의 합이나 커뮤니케이션의 지평일 뿐이고, '사회'라는 개념은 그런 면에서 이제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루만의 세계사회론에서 세계, 사회는 사실 구분되기 힘들고, 결국 동어반복 아니냐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여기가 바로 루만의 세계사회론이 다른 세계사회론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다른 학자들은 대개 세계사회, 세계체계를 상정하더라도 그 내부에 다른 사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루만의 단일한 세계사회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 대개 사회는 '공간' 개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루만의 주장이 가능한 것은 바로 사회 개념을 'Temporalisierung'했기 때문이다 (그 뿌리는 분명히 Simmel에게 닿아있다. Simmel의 'Vergegellschaftung'개념). 루만의 세계사회론으로 세상을 보는 건 적지 않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공간'(Raum)을 의미(Sinn)의 한 차원으로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는데, 그건 루만 이론의 건축물을 몽땅 해체, 재구성하지 않는한 힘들지 않나 생각한다. 대신 Raum 을 커뮤니케이션의 매체(Medium)이라고 보자는 의견에 한 표. 그런데... 루만 스스로도 이 공간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계사회에 대한 논의를 펼치는 곳이나, Die Politik der Gesellschaft에서 '지역적 분화' 혹은 '중심, 주변부' 같은 개념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어렵긴 하다. 현실적으로 관찰되는 '공간'의 '기능'(?)을 배제하자니 설득력이 떨어지고, '공간'을 강조할수록 루만 이론의 급진성은 삭감되거나, 이론적 토대가 흔들리고... 나도 바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한국 내 생명윤리 논의'가 연구 대상인데 벌써 '한국'이라는 공간의 문제가 체계이론적 틀과 계속 부딪히는 것. '세계화'라는 익숙한 틀을 버리고, 루만 버전 '세계사회론'을 취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부담이다. 체계이론에서도 '세계화'란 개념을 쓰는 학자들이 있다 (Albert, Bora). '세계화'를 '기능체계'가 아닌 '조직'이나 '상호작용' 차원으로 보는 것. 기능체계는 이미 세계적이다, 세계화되는 게 아니라. 하지만 조직이나 상호작용은 어짜피 공간적으로 제한되지 않을 수 없는데, 조직, 상호작용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적 경계가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세계화라고 보는 것이다. 이 정의는 세계사회, 기능적 분화, 세계적 기능체계라는 이론적 틀을 깨지 않으면서, 실제로 관찰되는 확산 과정을 기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하지만 세계화가 특정 모델의 일방적인 확산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기 때문에 (Meyer 식 확산, 수렴 모델을 연상시킴), Robertson 식 Glocalization 개념을 쓰는 것이 어떨까? 그게 체계이론의 논리에 더 맞는 것 아닌가? 혹은 구조차원에서 쓰는 개념을 빌린다면 의미론의 '내적 분화'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Burton, John (1972), World Socie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Luhmann, Niklas ([1971], 1975), Die Weltgesellschaft. In: ders. Soziologische Aufklärung 2.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Luhmann, Niklas (1997), Globalization or world society: How to conceive of modern society? In: International Review of Sociology 7(1): 67 – 79
Meyer, John W. (2007), Globalization: Theory and Trends, in: International Journal of Comparative Sociology, Vol. 48, No. 4, 261-273
Shaw, Martin (1994), Global Society and International Relations: Sociological Concepts and Political perspective. Cambrige: Polity
천선영 (2001), 세계화인가, 세계사회인가 - ‘사회’를 다시 묻는다, 한국사회학 제35집 3호, 31-49

2008년 6월 9일 월요일

'2008년 촛불시위가 창조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오늘 아침 인터넷 산책 중.... "9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종로구 수송동 희망제작소 세미나실에서는 '2008년 촛불시위가 창조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날 토론회는 <오마이뉴스>와 희망제작소의 공동 주최로 열린다"는 사실 발견. 이런 구절도 있다: "경찰의 현장 체증단보다 몇 배나 많은 시민들의 카메라가 움직이고, 우리 나라 최대 발행 부수 신문의 광고주가 시민들의 항의에 광고를 거둬들이는 사태, 인터넷 동호회원들이 일간지 1면에 후원성 시민 광고를 싣는 상황, 불과 8일 만에 <오마이뉴스>의 자발적 시청료가 1억 원을 돌파하는 상황 등 인터넷을 매개로 한 집단지성과 시민참여의 '어리둥절'한 민주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핵심적으로 논의한다". 어리둥절하신가? 훗훗. 내가 한국사회학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 중, 한 번 소개한 바 있는 하버마스 한국 방문 외,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두 가지가 떠오른다. 2002년 월드컵 열풍이 지나간 후였다. 거리응원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 계기였고, 아마 많은 사회학자들도 그 무리들에 속에서 들뜬 마음으로 그 뜨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 흥분이 채 가라 앉기 전 월드컵 사회학, 신공동체주의 논의가 있었다. 그 신공동체는 흥분이 사라지며 동시에 사라졌는지, 과문한 탓인지 거리응원과 비슷한 사건이 이후에 여러 번 있었는데도 그 개념을 더 이상 들어보지 못했다. 또 다른 사례는 위험사회. 삼풍백화점 붕괴에서 시작해 일련의 대형 사고에 놀란 한국사회, 한국사회학, 한국사회 속에서 '위험사회'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놀람이 사라진 후 위험사회 논의가 쑥 들어간 것은 오히려 놀랄 일이 아니다. 아니, 한 번의 부흥기가 있긴 했다. 대구 지하철 사고 이후... 맑시즘의 영향 아래에서 한반도의 남쪽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혹은 '신식민지반봉건자본주의'였다가, 포스트모던사회이었던 적도 있다가, 위험사회를 거치며, 새로운 공동체로 발견하고, 이제 인류 역사 초유의 참여민주주의를 실험하는 공간이 되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토론회는 '희망제작소', '오마이뉴스' 주관이지만, 조만간 발빠른 학술적 논의가 있을 것이며, 이번에는 '신참여민주주의', 뭐 이런 비슷한 개념들이 나오지 않을까? 언론의 핵심기능은 정보, 뉴스 생산이다. 낡은 것도 새 것으로 가공해내는 판에 이런 좋은 기사감이 어디 있을까. 사회운동도 그런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대중을 동원하려면 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줘야 하니까. 사실 한국사회학 사례를 들었지만, 한국 바깥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보라. '성찰적 근대, '제2의 근대', 현란한 개념들의 잔치다. 공교롭게 체르노빌 사건과 맞물리며 대박이 터졌고 하루 아침에 세계적 석학이 되셨다. 최근 사회학에서 즐겨쓰는 '지식사회', '세계화' 같은 개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학자 중 언론과 비슷하게 경기들려 있는 사회학이 있다. 그 속에서 위험사회, 정보사회, 지식사회 같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지거나, 기존 개념에 이런 저런 접미사가 붙인다. 신, 새, neo, new, post, 제2, 제3... '시대진단의 사회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선 '토건국가'란 개념을 수년 전부터 미는 학자그룹들이 있다. 이명박씨 덕에 좀 득을 보긴 했는데도 '기대만큼' 반응이 신통친 않은 것 같다). 이 사회학의 경쟁상대는 언론과 언론인들. 칼럼보다 조금 더 길고, 복잡해 보이는 글이라고 보면된다. 언제부터인가 은근히 사회학적 작업의 질이나 기능을 따지며 구분하는 경향을 갖게되었다. 그렇다고 루만 사회학이 질 좋은, 고급 사회학인가? 사실 그 얘기는 아닌데... 지식, 성찰이 넘쳐날수록 그것을 추상적 수준에서 성찰하는 작업이 더 긴요해진다는 얘기다. 왜 그런 흥미로운, 매력적인 역할을 내 던지고서 같이 놀라고, 흥분하고, 안절부절 하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하는 얘기다. 대번 이런 나무람이 날아올 것 같다: 지식인, 학자도 '현실'에 '참여'하고, 상아탑 속에서 고준담론만 나눌 게 아니라 '실천'을 해야지, 맨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서야.... ('구름 위 비행'). 아, 그런 이해에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 않다. 현실, 참여, 실천에 대한 다른 프레이밍 사이에서 화해를 기대할 수는 없는일이니 말이다. 왜 게슈탈트심리학(이거 아직 현역인가? 아님 퇴출되었나?)에서 쓰는 (혹은 썼던) 그런 사례들 있지 않은가가. 대표적인 것이 할머니 얼굴로도 보이고, 고개를 돌린 젊은 여성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 그림. 그 그림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두 해석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다시 바뀔 지라도). 두 프레임이 모두 보인다고 섞을 수 없는 것이다.

2008년 6월 4일 수요일

무지개는 몇 개의 색으로?

지난 일요일 교회 본당에 무지개를 그린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 색깔이 하나 모자란다고 지적한다. 직접 세본다. 빨주노초파남보... 엥? 하나가 모자란다. 다시. 빨주노초파남보... 어, 역시... '빨주노초파'는 분명한데 '남보...' 쪽에 한 색밖에 없는 것이다. 남색이라고 해도 좋고, 보라색이라고도 해도 좋을... 최근에 인터넷 기사를 읽은 게 생각나서 찾아보니... "무지개가 일곱 색깔이라고 배우는 나라는 몇몇 나라에 불과한데, 이 '무지개 7색설'은 1668년에 '뉴튼'이 프리즘을 통하여 무지개를 발견하면서부터. (...) 우리나라에는 일곱 색깔 무지개가 뜨지만 또 다른 나라에는 3색, 4색, 6색의 무지개가 뜬다." 찾다보니 또 무지개 색 수를 크세노폰이라는 그리스 철학자는 3가지, 아리스토텔레스는 4가지, 세네카는 5가지라고 주장했다는 내용도 발견했다. 하하. 그렇구나. 그럼 독일에서는 무지개가 여섯 색으로 이루어졌다고 가르치고 또 배우는 것인가? 애플사 로고로 1999년까지 사용되었던 그 '베어먹은 사과'를 이루고 있는 무지개 색도 여섯인데 어쩌면 그 배후에도.... 그렇다면 한반도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무지개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색을 구분했을까? 한국에서는 왜, 언제부터 7색설이 널리 퍼졌을까? 동서고금, 인류라면 누구나 관찰하는 대상인 무지개 색의 다양한 이해방식에 대해서 재미있는 에세이 한 편 정도는 쓸 수는 있겠다. '색'은 사회적 구성물인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의 공동생산물 (co-production)이겠지 (여기서 '자연적 질서'라 함은 무지개가 생기는 메카니즘, 우리의 시신경 정도 되겠다). "무지개라는 자연현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데 인간들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 ", 그렇게 봐서는 왠지 허전하다는 입장이 바로 coproductionist 들의 입장이다. 대표적으로 Latour. 우리 La선생의 입장은 장선생이 더 잘 알텐데... (Latour 애기도 철학적 개념을 사용해 표현하지만 주체, 객체의 이원론을 벗어나자는 것. 이 쯤에 남겨 두고 싶은 글이 있어서 인용해 온다. '책'이라는 '객체'를 '주체'인 '내'가 읽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책이 완전한 객체일 때에만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러면 책은 완전한 독립적 객체인가. 그렇다면, 그렇게 독립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접근할 수만 있을 뿐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읽는 책은, 읽을 수 있는 책은 읽을 수 있다면, 주객의 혼합물, 아니면 주객의 경계선에 있는 '물건아닌 것'이다. 책을 읽는 주관은 '근대의 주장'과는 달리 철저하게 독립적인 자기가 아니다. 그것은 대상의 일부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다른 주관들과 경계를 겹치고 있는, 집단의 일부이다. 실상을 인지하고 못하고 여전히 저 주장을 고수하는 것은 착각하는 근대인의 고집이요, 저 주장을 저만치 밀고나간 것은 근대의 심층적 자기 고립과 착각의 심화에 불과하다." (강유원). 이런 진술에 대해서 Latour는 '꼭 그렇지만도 않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오..."라고 대꾸하겠지만... 어쨌든 무지개 뿐 아니라 '자연적으로' 주어진 현상, 우리가 관찰하는 여러 대상에 대한 분류가 달라지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관찰이 불가능하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차이를 만들어내는 원칙, 즉 구분, 분류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언급할 만한 에피소드... 푸코는 '말과 사물' 서문에 보르헤스가 그의 책에 소개한 고대 중국 백과사전에 실린 동물분류법을 읽으면 웃었던 일이 이 그 책을 쓰게된 동기라고 소개하고 있다). 자연과학에 기초한 색 연구에선 큰 진전이 있었나보다.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소리란 이러한 진동을 인류가 감지해서 뇌가 처리한 결과이며 빛이란 또 다른 진동을 인류가 감지해서 뇌가 느끼는 방법입니다. 소리와 빛은 인류의 뇌에서만 존재하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진동 그 자체이며 서로 다른 진동을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뇌에 전달되어 처리된 결과가 소리와 빛입니다. 진동은 실재하는 세계고 소리와 빛은 인지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사실은 뉴튼이 무지개를 보고서 최초로 '발견'했다는 것이다 (발견이라... 뉴튼 나름대로 구성한 것이겠지...). 결국, 빛, 색이란 것은 우리의 뇌, 시신경이 만들어 낸 상이고, 무지개가 몇가지 색으로 이루어졌는지 그것은 자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의 공동산물이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2008년 6월 3일 화요일

oh my 언론 때리기 (2)

오늘도 낚였다. 인터넷이 언론의 중요한 매체로 등장하면서 그들의 낚시기술이 평균적으로 향상되긴 했지만, 그중에서 '다음미디어' 낚시 솜씨는 이제 물이 오를대로 올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주요 뉴스' 스포츠란에 이런 제목이 떴다. "박지성 포르투갈서도 인기절정". 흠... 뜬금없이 포르투갈에서 인기절정이란... 그 동안 쌓인 내공으로 이런 기사는 이제 척 골라낼 줄 ...알지만 속는 셈치고 한 번 들어가 봤다. 아니나 다를까... 본기사 제목은 벌써 상당히 겸손해졌다: "박지성 포르투갈서도 인기. '나니와는 보완 관계'". '절정'이란 강한 수식어가 빠진 것. 내용을 보면 더 소심해진다. 본문을 보자: "'파워엔진' 박지성(27·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인기는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의 모국인 포르투갈에서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마찬가지로 포르투갈 출신인 맨유의 나니와는 보완관계라고 '포르투갈 기자들'이 본다고 소개했다 (기자''에 주의).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 걸까? 도대체 그 기자들이 누구일까? "유로2008 개막을 앞두고 3일 포르투갈대표팀이 첫 공개 훈련을 가진 스위스 뉴샤텔의 말라디에르 스타디움"에 이런 특종감을 보도한 우리 스포츠 서울 기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기자의 취대 대상은 거기에 몰려든 "100여명의 포르투갈 취재진"... 중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는 포르투갈대표팀 통역관을 대신해 외신기자들에게 부지런히 통역을 해주던 포르투갈 기자"였다 (애개, 겨우 한 명...). "자신을 포르투갈 리스본 TSF라디오 소속의 다비드 카르발류 기자라고 소개"했다는데... 스포츠전문기자인지도 불분명한 것 같고... 더구나 그가 했다는 발언은 " 포르투갈에서 맨유 경기의 시청률이 높아 박지성의 인지도도 상당하다" 정도다. 아... 대단한 내공이다. 자칭 라디오방송 기자의 '상당한 인지도' 발언을 '인기 절정'으로 가공해 내는... 그런 내공의 소유자가 누구인가 봤더니 '뉴샤텔(스위스) 박태운 통신원'으로 되어있다. 혹시 부모님 따라 유럽여행 온 초딩이 정체를 숨기고 통신원 행세를 하는 것은 아닌지... 다음 같은 포탈사이트의 단점이라면 단점이 기사의 출처를 모른 채 제목만으로 클릭하게 된다는 것. 첫화면에 뜨는 화끈한 제목은 미디어 다음 '관계자'분들이 만들어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속고도 또 제목만 보고 클릭하는 사람들이 줄지 않으니 그 행태가 반복되겠지만, 관계자 여러분들 좀 챙피하지 않은가? 한 번 상상해보자. 사무실 컴 앞에서 '박지성 포르투갈서도 인기절정'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을 그 '관계자'... 혹은 기자, 혹은 통신원... 물론 그 덕분에 나도 이렇게 - 그것도 언론이라면 - 언론을 때리면서 노는 재미를 맛보니 아주 불평만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