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9일 월요일

'2008년 촛불시위가 창조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오늘 아침 인터넷 산책 중.... "9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종로구 수송동 희망제작소 세미나실에서는 '2008년 촛불시위가 창조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날 토론회는 <오마이뉴스>와 희망제작소의 공동 주최로 열린다"는 사실 발견. 이런 구절도 있다: "경찰의 현장 체증단보다 몇 배나 많은 시민들의 카메라가 움직이고, 우리 나라 최대 발행 부수 신문의 광고주가 시민들의 항의에 광고를 거둬들이는 사태, 인터넷 동호회원들이 일간지 1면에 후원성 시민 광고를 싣는 상황, 불과 8일 만에 <오마이뉴스>의 자발적 시청료가 1억 원을 돌파하는 상황 등 인터넷을 매개로 한 집단지성과 시민참여의 '어리둥절'한 민주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핵심적으로 논의한다". 어리둥절하신가? 훗훗. 내가 한국사회학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 중, 한 번 소개한 바 있는 하버마스 한국 방문 외,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두 가지가 떠오른다. 2002년 월드컵 열풍이 지나간 후였다. 거리응원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 계기였고, 아마 많은 사회학자들도 그 무리들에 속에서 들뜬 마음으로 그 뜨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 흥분이 채 가라 앉기 전 월드컵 사회학, 신공동체주의 논의가 있었다. 그 신공동체는 흥분이 사라지며 동시에 사라졌는지, 과문한 탓인지 거리응원과 비슷한 사건이 이후에 여러 번 있었는데도 그 개념을 더 이상 들어보지 못했다. 또 다른 사례는 위험사회. 삼풍백화점 붕괴에서 시작해 일련의 대형 사고에 놀란 한국사회, 한국사회학, 한국사회 속에서 '위험사회'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놀람이 사라진 후 위험사회 논의가 쑥 들어간 것은 오히려 놀랄 일이 아니다. 아니, 한 번의 부흥기가 있긴 했다. 대구 지하철 사고 이후... 맑시즘의 영향 아래에서 한반도의 남쪽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혹은 '신식민지반봉건자본주의'였다가, 포스트모던사회이었던 적도 있다가, 위험사회를 거치며, 새로운 공동체로 발견하고, 이제 인류 역사 초유의 참여민주주의를 실험하는 공간이 되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토론회는 '희망제작소', '오마이뉴스' 주관이지만, 조만간 발빠른 학술적 논의가 있을 것이며, 이번에는 '신참여민주주의', 뭐 이런 비슷한 개념들이 나오지 않을까? 언론의 핵심기능은 정보, 뉴스 생산이다. 낡은 것도 새 것으로 가공해내는 판에 이런 좋은 기사감이 어디 있을까. 사회운동도 그런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대중을 동원하려면 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줘야 하니까. 사실 한국사회학 사례를 들었지만, 한국 바깥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보라. '성찰적 근대, '제2의 근대', 현란한 개념들의 잔치다. 공교롭게 체르노빌 사건과 맞물리며 대박이 터졌고 하루 아침에 세계적 석학이 되셨다. 최근 사회학에서 즐겨쓰는 '지식사회', '세계화' 같은 개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학자 중 언론과 비슷하게 경기들려 있는 사회학이 있다. 그 속에서 위험사회, 정보사회, 지식사회 같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지거나, 기존 개념에 이런 저런 접미사가 붙인다. 신, 새, neo, new, post, 제2, 제3... '시대진단의 사회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선 '토건국가'란 개념을 수년 전부터 미는 학자그룹들이 있다. 이명박씨 덕에 좀 득을 보긴 했는데도 '기대만큼' 반응이 신통친 않은 것 같다). 이 사회학의 경쟁상대는 언론과 언론인들. 칼럼보다 조금 더 길고, 복잡해 보이는 글이라고 보면된다. 언제부터인가 은근히 사회학적 작업의 질이나 기능을 따지며 구분하는 경향을 갖게되었다. 그렇다고 루만 사회학이 질 좋은, 고급 사회학인가? 사실 그 얘기는 아닌데... 지식, 성찰이 넘쳐날수록 그것을 추상적 수준에서 성찰하는 작업이 더 긴요해진다는 얘기다. 왜 그런 흥미로운, 매력적인 역할을 내 던지고서 같이 놀라고, 흥분하고, 안절부절 하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하는 얘기다. 대번 이런 나무람이 날아올 것 같다: 지식인, 학자도 '현실'에 '참여'하고, 상아탑 속에서 고준담론만 나눌 게 아니라 '실천'을 해야지, 맨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서야.... ('구름 위 비행'). 아, 그런 이해에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 않다. 현실, 참여, 실천에 대한 다른 프레이밍 사이에서 화해를 기대할 수는 없는일이니 말이다. 왜 게슈탈트심리학(이거 아직 현역인가? 아님 퇴출되었나?)에서 쓰는 (혹은 썼던) 그런 사례들 있지 않은가가. 대표적인 것이 할머니 얼굴로도 보이고, 고개를 돌린 젊은 여성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 그림. 그 그림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두 해석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다시 바뀔 지라도). 두 프레임이 모두 보인다고 섞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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