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14일 토요일

세계문화? 문화의 세계화?

'문화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중 가장 모호한 개념 중 하나다'(Luhmann 1995: 398, Die Kunst der Gesellschaft). 사실 '문화' 개념의 용처를 찾아보면 루만의 이런 평가가 별로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화, 드라마에서 옷, 김치, 요리솜씨, 유적, 여러 종류의 상징, 학문, 스포츠, 소설 등등. 심지어 Kulturwissenschaft는 사회학을 대체할 개념으로 진지하게 제안된 바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A.Weber 와 F.Tenbruck). 하지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 '문화'란 개념이 모호해서 싫다고 그 개념이 가리키는 내용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루만, 아니 루만 할아버지일지라도... "체계이론은 문화라는 불분명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을 가진다" (1997: 109,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하하, 그렇지, '문화'라는 개념이 지칭하는 현상을 모른척 하지는 않으면서 문화라는 모호한 개념을 쓰지는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럼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는 데로 루만에게 그건 '기억', '의미론(구조)', '지식'이다 (cf. Laermans 2007*). 어떤 이유에서인지 문화이론 혹은 문화연구적 입장과 루만을 비교하는 작업이 최근 활발하다. 소원했던 '문화'와 루만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학자들이 발벗고 나선 모양새다. 루만의 문화론이라.... Die Kultur der Gesellscahft라고 제목을 붙여 줄 수도 있겠다, D. Horster가 만들어 놓은 "잘못된" 선례를 따른다면. cf. Die Moral der Gesellschaft 2008) [파슨즈가 문화에 latent pattern maintenance라는 기능을 부여해 둔 데에 반해서, 세계사회를 기본 범주로 삼고 있는 루만에게서 상징적, 규범적 통합 기능을 한 체계에 부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사회의 문화'같은 표현은 대놓고 루만에게 맞서보겠다는 의지의 발로다. 그러니 루만을 소개하면서 그런 제목을 달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회의 도덕'도 마찬가지인데, 그 책은 이미 나와버렸다. 이해하기 힘든...]. 어쨌든 나도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세계문화론' 혹은 '문화의 세계화' 논의에 루만을 끼워 넣어볼까 한다. '문화'라는 개념을 피하려고 했지만, 반면에 - '세계화'가 아닌 - '세계사회'라는 강력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던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세계문화', '문화의 세계화'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문화 세계화'(globalization of culture)에 대한 접근, 입장은 매우 다양한데, 세계문화의 가능성 혹은 'Stellenwert'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기준을 삼으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세계문화 같은 건 없다는 회의론자에서부터 (multiple modernities theory), 세계문화란 경제, 정치의 세계화에 종속된 것이라는 주장 (근대화론, 세계체제론: 물론 이 둘의 결론은 정반대다), 그리고 문화적 세계화는 독자적인 동학을 가진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Meyer, Robertson. Meyer에게는 세계문화의 확산, Roberston은 세계문화가 독립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국지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의 연속)... 그럼 우리 루만 선생은? 물론 이는 먼저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다. 아, 이쯤해서 언급해야 할 사실은, 루만이 문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사실.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 재생산은 주제(Themen)의 재생산을 통해 진행된다. (…) 그 주제의 저장고(Themenvorrat)를 ‚문화‘, 그리고 특별히 커뮤니케이션을 목적으로 저장된 것을 ‚의미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따라서 진지하고, 저장할만한 의미론은 문화의 일부분이고, 그것은 개념사, 사상사를 통해 전해내려오는 것이다."(1984: 224, Soziale Systeme). 한 마디로 문화는 '주제의 저장고', 혹은 '비축되어 있는 주제들'이다, 언제든지 커뮤니케이션의 부르심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런 매우 언어지향적인 문화 개념이 사회과학에서 아주 생소한 것도 아니고, 좁혀서 세계문화론 논의 속에서도 충분히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는 접근이다. 루만식 '문화의 세계화'란 특정한 '주제' 혹은 '의미론'의 지구적 확산을 의미한다. 문화가 다른 곳에서는 주로 의미론과 연결되어서 등장하므로, 앞으로 '주제'는 빼고 문화를 '의미론'의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곧 '문화 세계화'를 '의미론의 세계화'로 보겠다는 말씀. 아래 게시물 논의에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의미론의 세계화인가, 세계 의미론인가?'
사회구조적에 비해 의미론(구조)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 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썰'이 있지만, '共진화'(Koevolutoin)로 보는 게 무난하다(실제로 이는 루만의 주장이기도). 공진화는 여러 가능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니까, 어떤 관계인지를 밝히는 일은 결국 경험적인 연구의 과제인 것이다. 사회구조도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느니까, 구조와 의미론의 관계는 어떤 사회구조적 측면을 고려하느냐에 달려 있기도하다. 기능체계의 차원에서는 어떠할까? 세계사회의 지평이 중요한 기능체계 차원에서는 자동적으로 세계적 의미론이 연결되는 것일까? 기능체계의 성찰이론, 자기관찰은 세계적으로 관철되는가? 때로는 의미론의 확산이 '구조적 세계화'의 확산에 선행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구조의 세계화란? 기능체계로 분화된 커뮤니케이션이 세계적으로 넓어지는 것인가? Raum 차원 도입을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런 설명을 피하는 방식은 '세계화'를 '기능체계'가 아닌 '조직'이나 '상호작용' 차원으로 보는 것. 기능체계는 이미 세계적이다, 세계화되는 게 아니라. 하지만 조직이나 상호작용은 어짜피 공간적으로 제한되지 않을 수 없는데, 조직, 상호작용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적 경계가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세계화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체계이론의 틀 속에서 '세계화'를 '조직', '상호작용' 차원으로 한정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cf. Bora, Albert). 이같은 '세계화' 이해는 세계사회, 기능적 분화, 세계적 기능체계라는 이론적 기본틀을 깨지 않으면서, 실제로 관찰되는 확산 과정을 기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하지만 세계화가 특정 모델의 일방적인 확산을 주기 때문에, Robertson이 제안한 Glocalization 개념을 쓰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본다. 아니면 구조차원에 대해서 쓰이는 개념을 빌린다면 의미론의 '내적 분화'란 표현을 쓸 수도 있겠다. '세계적 의미론'이란, 세계차원에서 작동하는 구조(대포적으로 '기능체계')의 자기관찰, 성찰이론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고, 굳이 특정 구조에 관련되지 않지만, 즉 구조를 넘나들면서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론을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론은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비유컨대 '화폐'만큼 추상적이어야 한다. 대표적인 게 '인권'. 오해마시라.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차이를 내용으로 담기 위해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의미론의 세계화란, 특정 의미론이 조직, 상호작용의 차원에서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루만의 세계사회론, 사회구조/의미론 주장을 유지하면서 '문화의 세계화' 논의를 도입하는 작업은 한 편으로 기능체계 차원의 세계구조, 세계의미론을 논하고, 다른 한편 조직과 상호작용의 차원에서 세계적 확산을 논의하는 것이다. 사실 세계의미론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론의 세계화가 곧 그 세계의미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의미론적 Glocalization).
내 사례의 경우, 생명윤리는 세계의미론이다 (세계적으로 작동하는 의학, 생의학의 의미론적 측면이라는 뜻에서). 이런 세계의미론은 조직, 상호작용의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것으로 '관찰된다' (세계화화된다). 일방적인 확산과정이 아닌 것 (물론 확산이라고 표현할수 있는 시기, 과정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수용만 하는가? No!). Glocalization, 즉 'global sematnics in making'이 'internal differentiation of global semantics'보다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한국, 한국에 적을 두고 있는 과학 조직, 상호작용의 경우 'bioethics in making' 과정에 참여한 것은 최근 일이다. 초기니까 '확산'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다른 의미론과 경쟁한다. 대표적으로 (경제, 기술) '민족주의'를 들 수 있다. '구조적 세계화 --> 의미론적 세계화'는 operation 자체가 상대적으로 더 글로벌한 과학 체계에서 분명하게 관찰된다. 과학, 의학, 생의학 등의 경계, 한계 등에 대한 성찰이론 중 하나인 연구윤리, 생명윤리는 한국에서도 큰 저항없이 확산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왜 하필 90년대 말인가? 지역적 차원에서 그 경계가 도전받을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 국가가 보장해주다시피 했던 것. 기능적 분화는 한국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드러난다: 정치 우세 약화. 타기능체계 강화 (이 경우 과학, 의료, 매스미디어 등). 반면에 operation 의 Publikum이 주로 지역적을 제한되어 있는 정치, 매스미디어의 경우에는 국지적 의미론, 즉 지역적 맥락에서 operation의 재생산에 유리한 의미론에 지향한다.
결론적으로, 세계문화, 세계의미론의 확산 혹은 의미론의 세계화는 구조적 측면을 고려할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 Laermans, Rudi (2007), Theorizing Culture, or Reading Luhmann Against Luhmann, in: Cybernetics & Human Knowing 14 (2-3), 6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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