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나온 논문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되었다. 한국 민족주의에 대해서 뭔가를 써야 하는데, 도대체 밑천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조선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박정희시대를 다룬 여러 논문을 '섭렵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논문들에 대한 접근 통로를 '열어 준' P군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비록 생각 이상 오래 걸려서 '데미지'도 적진 않지만, 얻은 게 훨씬 더 많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 동안 나름 한국 학계 동향을 좇아가려고 애쓴 편이긴 하나 그런 노력이 얼마나 미흡했는지 '처절하게' 반성하기도 했다. 한국 학계의 연구 수준, 논의 수준에 많이 놀랐다. 특히 내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국 근대(성)'의 태동기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많아서 무척 반가웠다. '경제'나 '정치'가 아닌 '문화'적 접근이라고 할까. 그 동안 식민지 시기를 다루는 데 큰 방해였던 이념 혹은 규범적 굴레에서 퍽 자유로워 보이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민족' '국가'라는 무거운 주제를 매우 유연하게 다룬다. 그 중에서 특히 큰 '감동'을 준 소장 학자 두 명만 언급한다: 권보드래, 천정환. 그들의 단행본 저작을 소개하면...
권보드래 (2000),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소명출판
권보드래 (2003),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천정환 (2003), 근대의 책읽기. 푸른역사
천정환 (2005), 끝나지 않은 신드롬: 친일과 반일을 넘어선 식민지 시대 다시 읽기. 푸른역사
천정환 (2008), 대중지성의 시대. 푸른역사.
사회학적 상상력에 대한 강박증 비슷한 걸 '소유'하게 된 나로선 이처럼 '꼼꼼한' 연구들이 많이 쌓이는 건 무척 반갑고도 고마운 일이다. 예를 들어서 '연애'의 의미변화에 대한 권보드래의 언급을 읽으면서 루만의 "Liebe als Passion"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한반도 맥락에서 '발굴'된 사실들을 - 루만이 했던 것처럼 - 하나의 이론으로 꿸 수는 없을까... 허나 이런 연구들은 한 편으로는, 예를 들어, 친일/반일 같은 선경험적인 이해틀을 넘어 서길 요구하지만, 동시에 성급한 이론화도 경계하는 것 같다. 이 시기 민중 삶의 다양한 지층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 '일차적' 의의를 두는 것 같고... 이런 입장이 이른 바 '탈식민주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여전히 분명한 '입장' 밝히기를 요구받는 한국 풍토에서 보면 분명 이쪽 저쪽에서 두루 '욕 먹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 관심과 지향에 대해선 '성급한 이론화'라는 비난의 전형적 사례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이래 저래 생각이 많아진다.
이런 접근의 물꼬를 튼 연구로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김진송, 1999, 현실문화연구)를 들 수 있겠다. 이 책을 서점에서 들어 보고선 '흥. 누가 이런 가벼운 책을 읽는다고...' 류의 반응을 보였던 기억이 난다 (원래 기억은 늘 현재형이니 알아서들...). '트렌드'를 읽는 감각이 참으로 둔했던 것. <모던뽀이 京城을 거닐다> (신명직, 2003, 현실문화연구)도 '연애의 시대'와 같은 해에 나왔다. 이런 류의 식민지 문화적 일상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영화로 'spill over'되어 하나의 트렌드를 만들고 있지 않나 싶다. 경성 스캔들 (2007), 기담 (2007), 원스 어폰 어 타임 (2008), 라듸오 데이즈 (2008), 모던보이 (2008), 그림자 살인 (2009). 금시초문이나 '경성기방 영화관'(2008)이란 TV 드라마도 있었던 모양이다. 영화계 '경성 트렌드'에 대한 프레시안 기사를 보니 문학 쪽에서도 그런 듯. "출판계에서는 이미 앞서 말한 [경성애사]나 [경성 트로이카], [경성기담], [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처럼 소설 혹은 교양인문서적의 형태로 경성을 그리는 책들이 스테디셀러에 오른 지 오래이며, 이런 책들에 일종의 선구자격 노릇을 했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가 이미 1999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10년 가까이 경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조금씩 축적되어 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떤 글에서 보니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한 대중문화콘텐츠의 제작은 세계적인 유행"이란 견해도 있는 모양이다. 내 '나와바리'가 아니니 남들이 얘기하는 장단에 맞춰 춤을 출 밖에...
좀 다른 맥락에서 적어 놓을 이야기 하나. 며칠 전 읽은 논문이 민족주의에 대한 유연한 접근과 더불어 깔끔하고 세련된 문장을 지니고 있어서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윤혜준 (1999), '스포츠'와 대중민족주의, 사회비평 제20권: 194~208. 저자는 현재 연세대 영문과 교수 (그 무렵엔 외대). 그러고 보니 제목은 너무도 범상해서 유려한 문체와 어울리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권보드래, 천정환의 경우에도 문장이 좋다. 빼어난 내용에 외양까지 멋들어지는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능력,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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