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시대 (자연)철학자와 수학자에 대한 이야기. 철학자가 자연과학자 역할을 하고 있었구만.
"왜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의 관심을 끌고 후원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을까? 그가 베네치아 의회와 총독에 접근한 것을 보면, 그는 망원경을 이용해서 더 많은 보수, 더 큰 명성을 바랬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메디치 가문의 궁정은 그에게 베네치아 총독은 제공할 수 없었던 다른 매력적인 이점을 제공했다. 그것은 파두아 대학교의 수학교수인 갈릴레오가 메디치 궁정에서는 “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된 점이다. 당시에는 수학자와 철학자의 구분이 매우 엄격했다. 예를 들어, ‘자연이 실제로 이렇다’는 식의 얘기는 (자연)철학자들의 몫이었다.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 논할 때에도, (자연)철학자들만이 ‘실제 물체의 운동이 이렇고 저렇게 이러난다’고 논할 수 있었고, 수학자들의 분석은 실제 세상이 아니라 단지 수학을 사용한 가설이나 모델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갈릴레오는 1590년대와 1600년대 초엽의 연구를 통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의 대부분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수학과 실험을 통해서 자유낙하 운동법칙과 같은 자신만의 독특한 운동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그가 수학 교수였기 때문에, 당시 자연철학자들은 갈릴레오의 이론이 실제 세상이 아닌 추상적인 수학적 세상에서나 가능한 이론적 논의라고 생각하고, 이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갈릴레오는 세상이 수학의 언어로 씌어졌고, 물체의 운동은 수학을 통해서만 가장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믿음은 소수의 수학자들 사이에서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지, 수학자들의 집단 밖에서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이 갈릴레오에게 부여한 공식 직위는 “수학자 겸 철학자”였다. 파두아 대학교의 수학자가 궁정에서는 이제 철학자가 되었고, 세상의 운동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서도 철학자들과 동등하게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과학사학자 비아지올리의 용어를 빌자면, 갈릴레오는 메디치 궁정에서 수학자와 철학자라는 두 개의 ‘잡종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궁정 내에서는 수학의 언어로 모델이 이닌 실제 자연 세계에 대해서 논할 자격을 부여 받았다. 궁정에서 수학은 단지 자연에 대한 가설적 모델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과 운행 그 자체를 드러내는 좋은 언어가 되었다.
1610년 이후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자들은 갈릴레오의 수학을 쉽게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가장 막강하고 영향력있는 궁정에서 갈릴레오가 철학자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의 급격한 지위 상승은 1633년에 벌어진 “갈릴레오의 종교 재판”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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