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인가 세계사회인가? 루만이 1997년에 발표한 논문 제목이다. 부제는 '근대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루만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개념정의를 하거나 개념사를 통해서 논지를 풀어내는 것이다. 루만이 어디선가 '정의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출처 기억나지 않음). 어떤 면에서 개념을 정의하거나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해두는 일이 루만 이론의 핵심이다 [대표적으로 '사회체계'(1984)]. 그런 작업이 아닌, 개념사 자체가 그의 이론의 응용인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그의 지식사회학, 위험사회학, 정치사회학적 작업, 그리고 말년의 'Die Gesellschfat der Gesellschaft'의 뒤쪽). 사회 재생산의 기초인 Operation/Beobachtung 중에서Beobachtung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Operation 쪽이 수학공식처럼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반면, Beobachtung 쪽은 매우 혼란스럽다. 어제, 오늘 있었던 Semantik 컨퍼런스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지만... 그 쪽 개념들은 대표적으로 자기관찰, 자기記述, 지식, 문화, 의미론, 테마, 프레임, 스크립트 등등. 어쨌든 루만에게서 개념사는 논의를 하기 위해 거치는 통과의례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허나 세계화, 세계사회에 대해서 위에서 소개한 이 논문은 '세계화, 세계사회'의 개념사는 아니고 세계사회에 대한 개념 정의에 가깝다 (1971년에 발표한 논문 'Weltgesellschaft'와 더불어). 재미있게도 제목에 내 건 '세계화'란 개념이 막상 본문에선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이런 질문은 등장한다: "세계체계는 하나의 사회인가 아니면 파슨스 식으로 사회들의 체계인가?" (Is the global system a society, or is it a system of societies, as Parsons would have it?). 사회가 단수인가, 복수인가라는 질문이다. 사실 세계사회는 루만 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개념, 내용으로 주장한다. 이제는 고전이 된 맥루한의 '지구촌' (global village)라던지,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도 있고, global society, world society는 Burton, Meyer, Shaw 등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 Beck은 'cosmopolitanism' 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내용은, 음, 별 것 없다 (하여튼 이 양반은 껍데기만 번지르한 새개념 만들어 내는데 도사라니까). 어쨌든 루만의 세계사회 주장의 핵심은 현대사회의 우선적 분화기준은 기능적 분화이고, 각 기능체계는 세계적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기능체계의 독립성 (그것에 기초한 의존성) 때문에 현대사회는 다극 혹은 다중심적일 수 밖에 없고, 더 이상 연대, 문화, 유사성, 통합 등에 기초해서 '사회'를 정의할 수 없다. 그러니 '세계사회'는 서로 도달'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의 합이나 커뮤니케이션의 지평일 뿐이고, '사회'라는 개념은 그런 면에서 이제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루만의 세계사회론에서 세계, 사회는 사실 구분되기 힘들고, 결국 동어반복 아니냐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여기가 바로 루만의 세계사회론이 다른 세계사회론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다른 학자들은 대개 세계사회, 세계체계를 상정하더라도 그 내부에 다른 사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루만의 단일한 세계사회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 대개 사회는 '공간' 개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루만의 주장이 가능한 것은 바로 사회 개념을 'Temporalisierung'했기 때문이다 (그 뿌리는 분명히 Simmel에게 닿아있다. Simmel의 'Vergegellschaftung'개념). 루만의 세계사회론으로 세상을 보는 건 적지 않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공간'(Raum)을 의미(Sinn)의 한 차원으로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는데, 그건 루만 이론의 건축물을 몽땅 해체, 재구성하지 않는한 힘들지 않나 생각한다. 대신 Raum 을 커뮤니케이션의 매체(Medium)이라고 보자는 의견에 한 표. 그런데... 루만 스스로도 이 공간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계사회에 대한 논의를 펼치는 곳이나, Die Politik der Gesellschaft에서 '지역적 분화' 혹은 '중심, 주변부' 같은 개념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어렵긴 하다. 현실적으로 관찰되는 '공간'의 '기능'(?)을 배제하자니 설득력이 떨어지고, '공간'을 강조할수록 루만 이론의 급진성은 삭감되거나, 이론적 토대가 흔들리고... 나도 바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한국 내 생명윤리 논의'가 연구 대상인데 벌써 '한국'이라는 공간의 문제가 체계이론적 틀과 계속 부딪히는 것. '세계화'라는 익숙한 틀을 버리고, 루만 버전 '세계사회론'을 취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부담이다. 체계이론에서도 '세계화'란 개념을 쓰는 학자들이 있다 (Albert, Bora). '세계화'를 '기능체계'가 아닌 '조직'이나 '상호작용' 차원으로 보는 것. 기능체계는 이미 세계적이다, 세계화되는 게 아니라. 하지만 조직이나 상호작용은 어짜피 공간적으로 제한되지 않을 수 없는데, 조직, 상호작용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적 경계가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세계화라고 보는 것이다. 이 정의는 세계사회, 기능적 분화, 세계적 기능체계라는 이론적 틀을 깨지 않으면서, 실제로 관찰되는 확산 과정을 기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하지만 세계화가 특정 모델의 일방적인 확산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기 때문에 (Meyer 식 확산, 수렴 모델을 연상시킴), Robertson 식 Glocalization 개념을 쓰는 것이 어떨까? 그게 체계이론의 논리에 더 맞는 것 아닌가? 혹은 구조차원에서 쓰는 개념을 빌린다면 의미론의 '내적 분화'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Burton, John (1972), World Socie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Luhmann, Niklas ([1971], 1975), Die Weltgesellschaft. In: ders. Soziologische Aufklärung 2.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Luhmann, Niklas (1997), Globalization or world society: How to conceive of modern society? In: International Review of Sociology 7(1): 67 – 79
Meyer, John W. (2007), Globalization: Theory and Trends, in: International Journal of Comparative Sociology, Vol. 48, No. 4, 261-273
Shaw, Martin (1994), Global Society and International Relations: Sociological Concepts and Political perspective. Cambrige: Polity
천선영 (2001), 세계화인가, 세계사회인가 - ‘사회’를 다시 묻는다, 한국사회학 제35집 3호, 31-49
궁금한게 있는데요,(제게 루만의 이론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ㅜㅜ) 궁극적으로 루만은 globalization과 world society의 두 대안들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한다고 보면 되는지요? 제가 파악하기로는 world society가 맞는 것 같은데...확신이 안 드네요. 루만은 세계가 세계화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 되어 있다고 본 것인가요?그렇다면 이것은 너무나 이론에 머무는 얘기가 아닌지..
답글삭제아!그리고 대체..재귀준거가 무슨 뜻인가요??ㅜㅜ
답글삭제루만의 출발점이자 종점은 '세계사회'입니다. 현대사회의 구조는 이 단일한 세계사회의 내적 분화로 본 것이고요. 예컨대, 국가는 세계정치체계의 내적 분화 형태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 민족국가, 혹은 국가경제의 '세계화'가 아닌 것이지요. 근대사회는 세계사회다! 는 매우 도발적으로 들고, 개념적으로 세계화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 같지만, 실상 루만과 체계이론가들의 세계사회론을 살펴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고 무척 복잡합니다. 일관되지 않은 면도 있고요. 뭐. 자세하게 설명하려니 지금 집중하기 힘든 상태라ㅠㅠ 우선 윗 본문에 새로 써 넣은 천선영 교수의 논문을 읽어 보시길.
답글삭제그리고 루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입문서나 쉬운 소개 논문들이 있으니 우선 그런 것들 구해서 읽어 보시고요.
'재귀준거'는 self-reference (Selbstreferenz)를 박여성 교수가 그렇게 번역하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자기준거' 혹은 '자기지시'로 번역하는게 옳습니다. 남을 준거로 삼지 않고 자기 자신을 준거로 삼아서 작동하는 상태를 말하고,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체계를 자기준거적 체계라고 부릅니다. 그것과 구분되는 '타자준거적' 체계가 있겠죠 (Fremdreferenz).
괜찮은 입문서로 "게오르그 크네어, 아민 낫세이 (2008)『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 도서출판 갈무리"를 추천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처음부터 을 읽어서 너무 어려웠나봅니다. 도움 감사드려요!^^
답글삭제정말 죄송한데 하나만 더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루만입문자에게 도움을 주세요..하하 궁금한 것이, 어떠한 의미에서 루만의 체계이론 역시 계몽주의 혹은 유럽근대철학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글쓴 분의 의견이 궁금하네요.
답글삭제전 개인적으로 이런 질문, 대화 무척 좋아합니다. 서로 배우는 거니까 부담갖지 말고 질문해주세요^^
답글삭제우선, '계몽주의' '유럽근대철학' 모두 무척 넓은 개념이네요. 우선 방금 검색을 통해서 찾은 정성훈 교수의 설명을 옮겨 놓습니다.
"이 강의는 루만의 체계이론을 새로운 계몽 기획 혹은 현대성의 재구성 기획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인간을 사회의 주체로 보지 않는 반휴머니즘적 체계이론에 따라 거대 사회이론을 구축하며, 근대철학이 이용했던 정신/자연, 주체/객체 등의 도식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의 반휴머니즘이 인간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며 그의 근대철학 비판이 포스트모던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철학적 계몽을 끊어 밝히는 사회학적 계몽의 기획에 따라 합리성 개념을 재정식화하고 현대성을 관찰자에 대한 2차 관찰의 가능성이 확장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분화된 합리성들’을 법, 정치, 경제, 학문 등 여러 기능 맥락에서 밝혀내며, 인권을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명령으로 간주한다. 또한 사회의 환경에 놓여있으며 결코 이성적일 수 없는 개인이 어떻게 그의 ‘유일무이한 개체성’을 확인받는지 친밀관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 밝혀낸다.
[출처] 철학아카데미 겨울 강좌: 니클라스 루만의 현대성 관찰"
제가 이해하는 대로 질문과 연결해서 좀 풀어쓰면...
루만이 '사회학적 계몽'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 때 계몽은 사회를 계몽하려는 그런 (철학적) 계몽주의의 한계를 (사회학적으로) 설명 혹은 계몽하겠다는 의도이지요. 혹 구유럽적 계몽주의를 싸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계몽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루만은 근대철학적 개념들을 모두 '구유럽적' 운운하면서 낡은 것으로 여깁니다. 합리성, 이성, 주체 등등. 근대/현대를 넘어서려는 게 아니라 (그러니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부르긴 좀 뭣하죠) 체계이론적 관점에서 현대를 다시 쓰는 것지요. 이 역시 어찌 보면 근대철학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죠. 여전히 그 울타리 안에서 머무니까. 넓은 의미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그런 비판을 하고, 하버마스 같은 학자는 루만은 결국 근대 주체철학에 머무르고 있다고 얘기해요. 주체의 자리에 사람이 아닌 체계를 갖다 놨을 뿐이라고... 루만의 어떤 경향은 포스트모너니즘이라고 얘기하는 그런 경향과 유사하기도 해요. 특히 데리다와....
루만이론, 체계이론은 양파껍질 같아서 벗기고 벗겨도 실체를 알기 힘들고, 복잡하고, 다면적이어서 대개 보고 싶은 쪽만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루만은 복잡한 현대사회를 묘사하려는 사회이론은 이론 그 자체가 복잡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성공한 셈일지도 모르겠어요.
혹시 페이스북 하세요.
제가 거기 '루만 사회이론 토론방'을 열어 놓았는데, 개점휴업같은 상태니까. 그 쪽으로 오실래요? 혹 더 토론할 얘기들이 있다면....
http://www.facebook.com/group.php?gid=125553887459853
페이스북 계정이 없네요 제가.ㅜㅜ 저는 이번 철학 전공 수업에서 루만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이 블로그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드려요.
답글삭제루만은...정말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그의 눈으로 세상을 한 번 보고 싶을 정도로요.하하
그런데 이론이 약간 상상력을 요하는 것 같아요 유독. 처음 읽을 때는 정말 공상과학소설 같았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