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 아니 정확히 'bioethics'란 단어는 미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완전히 새로운 단어는 아니고, 'bio'와 'ethics'의 조합어다 . 누가 이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는지도 이미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그 '영예'는 위스콘신대 종양학(oncologist) 교수인 Van Rensselaer Potter에게 주어진다. 1970년에 발표한 논문 "Bioethics, the science of survival"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이어 1971년에 ' Bioethics: The Bridge to the Future'라는 이름의 책을 냈음). 이 논문제목이의미심장하다. 생존의 과학이라... 그는 여기에서 bioethics를 “생물학의 지식과 인간의 가치체계에 관한 지식을 결합하는 새로운 학문분야”로 정의했다. bio"는 생물학적 지식, 즉 생물체에 대한 과학을 나타내고, "ethics"는 "인간 가치 체계에 대한 지식"을 대표한다는 의미로서 말이다. 진화론적, 생리학적, 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생명계(biosphere)를 유지하기 위한 ‘생존의 학문’이었다. 요즘 개념으론 환경윤리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의미로는 그 이후 널리 사용되지 않아서 요즘 시각으로 보면 낯선 발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개념 창시자로서 그에게 주어진 영예는 반쪽짜리인 셈.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생명윤리', 즉 '생명과학 혹은 생의학의 윤리'라는 개념으로 'bioethics'를 처음 사용한 이는 조지타운대 Andre Hellegers 교수라고 한다 (the Dutch obstetrician/fetal physiologist/ demographer, 무슨 전공이지 도대체??). 1971년 그가 조지타운 대학에 "The Joseph and Rose Kennedy Center for the Study of Human Reproduction and Bioethics"을 세우면서 (사실은 70년에 세운 "the Kennedy Center for the Study of Human Reproduction and Development"의 개칭) 그 이름에 'bioethics'를 집어 넣은 것. 연구소 하나 생겼다고 당시에는 낯설었을 그 단어가 널리 퍼졌을 리는 없고, 그 전후 사정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여러 연구들이 있다. 여하튼 매우 '미국적인' 상황에서 '미국적인' 이해를 반영한 개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생명윤리'라는 새로운 개념, 루만식으로는 표현하면 이 새로운 의미론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은 사회학적 설명을 요하는 사태다. 물론 의미론의 세계화는 개념의 확산 뿐 아니라 같은 개념이 다른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다른 의미가 부여되는 현상도 포함한다. 실제로 국가 혹은 지역마다 '생명윤리'란 의미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또 사용되는 있다. 그러고보니 '이 쪽', '생명...; 언저리엔 신조어들이 꽤 있다. biomedicine, biotechnology 등등. 생명윤리의 개념사는 이런 '생명...'을 접두사로 삼는 개념들의 개념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유전공학 (genetic geneering, Gentechnik)이 언제부터인가 생명공학 (biotechnology, Biotechnologie)가 되었다. 개념사연구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독일에서는 Gentechnik/Biotechnologie (Gentechnologie는 Biotechnologie가 널리사용된 후에 Gentechnik을 지칭하면서 등장한 것 같다, 내 관찰에 따르면, 독일어 Biotechnologie는 biotechnology의 번역어겠지. genetic engeneering을 Gentechnik이라고 나름대로 줏대있게 번역해 놓고선... ), 영어권에서는 genetic engeering/biotechnology. 생물을 다루는데 "engeneering"을 붙이다니, 아마 그 때는 좀 더 공학적으로 보이고 싶었나보다. bioengineering? 이게 시도되기나 했을까? 글쎄... 한국에서는 영어단어를 좇아 유전공학/생명공학.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독일과는 반대로 biotechnology의 번역어로 직역 '생명기술'이 아닌 '생명공학'이 된 것. 어떤 이들은 biotechnolgoy를 '생물기술'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하나, 널리 쓰이는 것 같지 않다. 아마 익숙해진 유전공학과 '운'을 맞추기 위해서겠지만, 미국에서는 빠진 engeneering이 한국에서는 살아남아있다. '공학'이라는 수식어가 '그냥 기술'보다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나 보다. 하긴 '생물기술'보단 '생명공학'이 더 듣기에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익숙한 탓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engeneering 과 '공학'은 모국어 화자들에게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상식이지만.
어쨌든 생명윤리, bioethics의 의미론적 성공은 두말할 필요 없이 biomedicine, biotechnolgy의 의미론적 성공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biomedicine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분야가 생겨나고, 첨단 연구, 기술이 바로 적용되던 그 분야 윤리적인 문제를 기존의 의료 윤리와 구분해서 보고자 생명윤리가 환영받았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반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bioethics란 의미론이 등장, 확산되면서 그 동안 관련 없이 떨어져서 '잘' 진행되던 연구들 어느 순간 함게 묶이기 시작한다. 사실 인간 배아를 사용하는 연구는 불임치료연구의 일환으로 별 사회적 저항없이 80년대 이후 쭉 있었던 현상인데, 복제가 문제된 이후 이제 그것마저 규제논쟁의 대상이 된 것이고, 생명윤리라는 의미론이 확산되면서 배아연구 뿐 아니라, 낙태, 안락사, DNA정보 이용 같은 이슈들까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것. 좀 극단적 예를 든다면, 낙태운동하던 인사들이 생명윤리학자가 되고, 생명윤리학자로서 그들은 이제 낙태 뿐 아니라 '생명윤리'가 적용되는 여러 이슈들을 개척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나는 구조의 변화를 의미론이 좇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새로운 의미론이 기존 communicaiton process를 새롭게 구조하는 작용도 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의미론과 구조의 관계는 참으로 '친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covariation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bioethics가 1990년대 후반에야 알려지고, 생명윤리학회는 1998년 8월에야 결성되지만, 새로운 의미론임에도 대중 논쟁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biotechnology란 의미론의 대중화와 맞물려 있다. biotechnology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잘 어울리지 않는가: 생명공학 vs. 생명윤리. 생명윤리논쟁의 동인이었던 복제 기술이 생명공학의 하나로 히해되고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에 대한 댓구로서 생명윤리가 도입되면서 (대표적으로 NGO들) 이제 생명윤리란 의미론이 윤리적 문제가 될만한 대상을 선택해 가기 시작한다. 본인들 입장에서는 '돌리'때문에 뜬금없이 불려나가서 함께 야단 맞는 그런 기술, 연구분야들이 선별되는 것이다. '모든 건 MB탓'이 아니라 '돌리' 탓이다. 사실 생명윤리의 구성적인 측면은 약간 과장된 것이기도 하다. 복제기술 뿐 아니라, 그 무렵 이 bio쪽이 북적북적 시끄러웠던 건 사실이니까. 인간유전체 프로젝트가 그랬고, 줄기세포가 그랬고... 그런 와중에 bioethics란 의미론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얼떨결에 불려나온 건 '낙태', '뇌사' 정도가 될 것이다.
라익이 재미있는 얘기를 남겼다. "나는 생명윤리라는 분야는 생명윤리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신조어는 많은 것을 내포하며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신조어가 논의에 새로운 초점을 제공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다양한 분과학문들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모으면서, 결국 윤리라는 단어에서 풍겨나는 이데올로기적 냄새를 제거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I think that the field of bioethics started with the word bioethics because the word is so suggestive and so powerful; it suggests a new focus, a new bringing together of disciplines in a new way with a new forum that tended to neutralize the ideologic slant that people associated with the word ethics) (Reich 1993: S7).
개념사, 혹은 사회학적 의미론 연구의 입장에서는 바로 Reich의 견해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개 생명윤리학자들은 이제는 널리 사용되는 '생명윤리'라는 개념을 가지고서 동서고금 역사를 들추면서 '생명윤리'를 찾아낸다. 전통적 생명윤리, 이슬람, 유교적 생명윤리... 등등. 물론 그런 작업 자체가 의미있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마는, 앞뒤를 분명히 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명윤리란 한국 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당연히 있었던 것이라는 전제는 좀, 아니 많이 재미가 없다. 왜 그동안 '생명윤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개념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현상, 현실을 표현하는 이름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개념의 구성적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푸코, 데리다 등 바로 언어의 이런 측면에 주목했던 것 아닌가).
Reich, Warren Thomas (1993), How bioethics got its name. Hastings Cent Rep. Nov-Dec;23(6):S6-7
정선생의 시각은 상당히 경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는군요.
답글삭제태초에 신이 세상만물과 더불어 인간을 만들고 "아담아, 네가 이름짓고 필요한대로 이용해라"라고 했다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어쩌면 나는 아닐지도 모르지만-는 아담의 후손이고, 신은 우리에게 preadaptive variety, 즉 population을 '만들어' 주었고, 그것을 질서지을-즉 unterscheiden und bezeichen- 권리를 위임받은 것입니다. 개념(예를 들면 bioethics)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신으로부터, 어쩌면) 위임받은 권리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개념은 가능성이면서 동시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결정되지 않은 것이면서 동시에 결정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위의 말로 하자면 population이면서 동시에 unterscheiden(!)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Klass라는 개념은 우선은 자본가와 노동자가 아니 것을 구분하도록 해주며 (Selektion aus Population), 다음으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을 구분하게 해주는 것(Selektion aus Selektion, Selektion zwieter Ordnung)이지 어떤 일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Bioethic도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해 "전통적 생명윤리, 이슬람, 유교적 생명윤리... 등등"이 있었지만, 그것이 다만 Bioethic으로 불리지(unterscheidet) 않았다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고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계급의 '개념'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계급 자체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Bioethic's'라면 다를지도 모릅니다. 즉 생명윤리'학'이라고 한다면 전통적 생명윤리'학', 이슬람, 유교적 생명윤리'학'... 등등은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고 보면 위에서 우연찮게(!) 신의 예를 든 것이 실로 그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창조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만 존재하는 것들을 질서지울 수만 있는지도 모릅니다. 즉 우리는 "produzierender Faktor" (Subjekt)가 아니라 단지 "Träger der eigentümlichen Reduplizierung von Auffassungsmöglichkeit" (Beobachter)입니다.(vgl. SS, S. 384f und danach S. 119)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생산자가 아니라 파괴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질서지움은 곧 파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vgl. SA 5, 2005, S. 18; Formbegriff! "Verletzung der Welt", oder Entrophie!="Difference makes difference!" z.B.) "개념의 구성적 힘"-"푸코, 데리다 등 바로 언어의 이런 측면에 주목했던"?-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랜만에 등장하셨구만요. 뭐,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루만 식으로 표현하면 구조와 의미론은 Kovariation 관계입니다. 참 편한 말이지요. Staehli, Stichweh 등 여러 학자들이 나름대로 그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해보려고 애를 쓰긴했지만요. 내가 본문에서 언급한 bioethics라는 의미론이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는 건 그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Staehli 는 자신의 입장을 해체주의적 체계이론 독해로 표현하는데 그는 사실 일관되게 이렇게 볼 것을 주장합니다. 이름이 붙여지기 전, a riori하게 있는 구조를 상정할 수 있냐는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이런 시각이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구조가 의미론을 결정한다 좀 딱딱하지 않습니까? (아, 박 선생 견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예로 든 Klasse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답글삭제"고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계급의 '개념'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계급 자체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고대에도 계급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생명윤리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죠. 그렇지만 이 경우, 계급, 생명윤리는 '최진사댁 감나무'처럼 후대인들이 발굴해 낼 수 있는 그런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있었던 어떤 entity를 불러내는 것이죠, 계급 혹은 생명윤리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어떤 방식으로 불러내느냐, 혹은 구성하느냐, 거기에 따라 우리는 완전히 다른 버전의 세계 혹은 역사를 경험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개념, 언어, 담론의 힘에 주목하자는 것이지요. 코멘트 끝 부분은 솔직히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대략 이해한대로... 생산자, 파괴자... 어떤 기준을 가지고 구분한다는 것은 곧 다른 기준을 배제한다는 것이니까 당연히 파괴적인 속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분 기준이 똑 같은 힘을 발휘하지는 않겠죠. 푸코의 담론/권력 관계 아닙니까? 언제가 언급했던 푸코가 "말과 사물"에 서문에 인용했던 그 동물분류기준... Why not? 우리는 현재 '생명윤리'라는 이름으로 구분하고 질서지우는 그런 사태를 완전히 다른 개념을 사용해서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에서 지금은 생명윤리라는 의미론이 세계화되었고, 이제 그것을 수용한 학자들은 그 틀을 가지고 자신의 세계,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아님 내가 코멘트의 논지를 잘못 이해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