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1일 수요일

발상의 전환 - 한국을 도시국가로?

직전에 소개한 책에서 김정운 교수는 창의성을 '독특하게' 정의한다. 대개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을 창의성, 창의적 행위로 정의하는데, 김교수에 따르면 세상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그런 종류의 새로움은 없다는 것. 하지만 우리가 새롭다고 느끼는 것들이 분명히 있지 않은가? "예전에 있던 것들이 다른 맥락에 놓이면 우리는 새롭게 느낀다". "정확히 말해 창의성이란 아주 익숙한 것을 다른 맥락에 놓아 새롭게 느끼게 하는 능력을 뜻한다." (82쪽).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 해석틀을 가져다 쓰는 건 전형적인 비창의적 혹은 반창의적 행위다. 한국에서 '근면''성실'이 아닌 '창의성'이 강조되는 건 한국 사회 인식의 틀 (인식론)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창의성은 다른 발로 발상의 전환이다. '발상의 전환'은 오히려 김정운 교수가 얘기하고자 하는 창의성의 내용을 더 직접적으로 전해주는 표현이다. 그런 창의성 혹은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어서 하나 소개한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을 하나의 도시로 만들자' 이색주장. 한국만한 중(中) 충칭도 나라 아닌 도시" 무슨 웃기는 소리?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조금 더 인용한다.

"중국의 충칭시는 면적 8만2300㎢에 인구 2800여만명이 하나의 도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한의 면적은 10만㎢, 인구는 4900만명이기 때문에 하나의 도시처럼 사는 게 가능합니다."
그는 "영국의 도시전문가인 피터 홀(Hall) 런던대 교수도 '한국은 결국 하나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송 교수는 "과거엔 홍콩·싱가포르 등 도시국가만이 하나의 도시처럼 기능했지만 각종 기술 발전으로 인해 미래엔 하나의 국가가 도시처럼 긴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예로 들었다. 휴대전화가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없이 하나의 도시 안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을 하나의 도시로 만드는 물리적인 수단으로는 KTX 등 고속철도를 들었다. 송 교수는 "시속 400㎞의 고속철도를 이용해 서울~부산, 서울~목포를 1시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선형도시'를 만들고 이를 다시 전국으로 확산시키면 된다"고 말했다. 이런 아이디어를 지난 6월 출간한 '세계경제전쟁, 한국인의 길을 찾아라'에 담았다. 또 이를 바탕으로 지난 7월 발족한 'KTX경제권 포럼'의 민간 공동위원장을 맡아 활동 중이다.


최근 한국을 다녀보면서 새삼 느낀 거지만 한국 도시나 마을은 어디 가나 비슷비슷한 외형을 취하고 있다. 구석 구석 다니다 보면 차이들이 더 느껴지겠지만, 적어도 도로나 철도가 다니는 길 주변 풍경은 큰 차이가 없다. 국토가 좁다고 아우성치기도 한다. 사실 남한만 따지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철로 2시간이면 충분하니까 아닌게 아니라 좁다.
또 언젠가 지적했듯이 한국에선 공산국가의 '인민..' '공훈...' 마냥 '국민...'을 좋아한다. 국민배우, 국민여동생, 국민과학자, 국민가수, 국민영화, 국민드라마 등등. 4천만 인구에 천만이 보는 영화가 등장하고, 한국처럼 유행에 민감한 나라도 없다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 또 시시때때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잘 뭉치는가.
이런 현상을 문제로 삼으면 대개 '지역다양성', '문화 다양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규범적으로 보아 설득력있고, 옳은 방향일 수는 있으나 사실 그리 창의적인 발상이 아니다. 도덕 선생님 발언처럼 들리지 않는가. 참여정부의 국정 목표였던 '지방 분권화'에 대해서 과도한 수도권 집중이 가져오는 문제를 고려할 때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으나, 좀 참신한 발상이란 평가를 주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문제 혹은 단점, 약점으로 생각하는 한국의 특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아이디어, 그런 게 창의적 발상이지 않겠는가? '도시국가화' 주장은 국토가 넓지 않고, 문화적, 지역적 다양성이 부족한 것들을 역이용하는 발상이다.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은 짧은 기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창의성에 대한 접근은 학술적 담론에서도 적용될 것이다. 아니 적용되는 정도가 아니라, 학술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번뜩이는 아이디어 싸움의 장 아니던가. 그런 맥락에서 도덕선생님같은 하버마스보다 루만이 이론적으로는 더 급진적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렇다고 루만얘기나 주장을 반복하는 것만큼 또 지루한 일은 없다. 후학들은 끊임없이 루만을 넘어서려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서 루만을 탈구조주의적인 맥락에서 해석한다던지.... (U. Staeheli) [이것도 벌써 낡은 애기...].
하지만 창의적인 건, 새것을 선호하는 '신상증후군'과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외국이론을 선호하거나, 외국에서 유행하는 학술 담론 주제를 가지고 '들어오고', 외국 사례, 정책을 가져다 쓰는 건만큼 비창의적인 일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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