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이 글은 조금 전 문정환 글을 대략 읽어본 이후에 든 생각을 적어 놓으려고 시작했는데...
대략 80년대까지 루만 스스로도 기능적 분화로 정점과 중심 없는 사회가 되었음을 강조하였고, 그것 자체가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수용되었다. 여전히 정치나 국가 혹은 다른 극단에선 경제나 계급 중심적인 사회이론이 지배적이었으니까. '포스트모더니즘' - 대략 이렇게 표현하기로 하자 - 이 득세하면서 루만은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이해되기도 하였고, 사회이론에서 여전히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대주의자이면서 하버마스 식은 아니라 좀 참신한 면이 남아있긴 하지만, 루만의 기본적 착상은 포스트모드니스트나, 기든스 벡 같은 후기근대주의자들에게도 대부분 수용이 되어 버렸거나 결과적으로 비슷한 얘기를 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물론 루만과 체계이론가들은 무엇보다 체계의 경계 유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여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구별이 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매우 고리타분, 혹은 이미 늙어버린 보수주의자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 "기능적 분화된 사회이다. 체계는 경계를 유지하게 되고, 그래서 위계적 통제나 합의의 가능성이 떨어진다" 이건 80년대 후반 Oekologische Kommunikation을 출간할 때나 파격적으로 들리던 얘기라는 말씀. 내가 추적한 바로 일부 체계이론가들은 이미 교조적인 '기능적 분화' 주장을 떠나고 있다 (Bora 교수도 - 체계이론 발전에 기여할 목적을 갖진 않았지만 - 법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참신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체계이론이 참신하게 들리는 경우는 어쩌면 기능적 분화를 '전제'하고서 바로 그 전제 때문에 이전에 익숙하던 현상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사례들 아닌가 싶다. 왜 현대사회에서 '사랑'이 오히려 중요해지는가, 왜 기능분화에도 민족주의/국가주의/근본주의가 득세를 하고 있는가, 왜 파편화된 사회에서 개인을 포섭/배제하는 메카니즘이 중요해지는지 등등. 혹은 역시 기능적 분화를 전제로 하고서 장기간 의미론의 변화를 추적하는 지식사회학적 작업이랄지 (한국 근대성의 기원 같은...). 여기에서 혼자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는 그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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