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의 핵심이 익숙한 것들의 재배치라면, 그건 곧 '낯설게 하기' 아닌가? 익숙한 것들을 다른 맥락에 집어 넣어서 낯설게 하기? 그러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케 하는 것!
낯설게 하기란 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 미학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 남의 지식을 짜집기 해보면 -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지각의 자동화에 맞서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보았단다. 러시아 이론가 슈클로프스키는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함으로써 지각의 과정 그 자체가 미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고. 형식주의 예술론에서는 지각과정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상을 ‘낯설게 하는’예술적 기법과 예술가의 창조적 개입을 얘기했고...
여하튼 낯설게 하기의 핵심을 재배치로 이해하면 그걸 미학적, 인지적 차원이 아니라 공간적 차원에서까지 구현된 미술작품이 뒤샹의 '샘'. 욕실에 있는 완제품 변기를 전시장으로 재배치시키니까 작품니 된다. 캬, 기각 막히지 않는가. 어쩌면 가장 손쉽게 창의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금기를 깨는 것일 터이다. 벗뜨... not always... 금기를 깨는 것도 반복되다 보면 더 이상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으니까. 또 다른 금기를 찾는다? 포스트모던 시대엔 오히려 그게 지루하다. 돌고 돌아 모던, 중세로 돌아갈지 누가 알랴. 정말이지 역사는 어쩌면 돌고 도는 것일 수도...
재배치는 정말이지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루만을 한국에 소개할 때... 루만이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에 대한 창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이란 공간 속 의미 연결망 속에 체계이론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집어 넣어야 하니까 말이다. 가장 자주 시도되었던 방식이 하버마스와 비교였다. 다른 방식이 있을까? 사회학을 공부하는 후배와 나눈 대화 속에서 얻은 생각인데, 루만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을 재비판 하는 건 어떨까? 행위에 대한 분석이 없다던지, 대안이 없다던지, 몰역사적이라던지... 그런 비판에 대해서 그게 아니라거나 오해라고 설득하는 차원이 아니라, 바로 그런 점을 중심으로 루만 이론이 요소들을 재배치 하는 것.
창의성은 재배치를 통해서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함으로 얻을 수 있다면, 그건 정말이지 여러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블로그의 레이블... 늘 불만이기도 했는데, 그 분류가 너무 식상하단 말이지. 언론, 역사, 영화, 문학... too 20세기적. 지식의 체계를 분류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좀 창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지나친 창의성 발휘가 가져 올 수 있는 의사소통의 장벽, 그것의 위험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는 있지만...). 학문 분류에 대해서도 그렇고. 한국에 통섭, 학제간 연구 등에 대한 담론이 무척 무성하던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 역시 한국의 인식론적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창의적이어야 한다, 뭔가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게 주류 - 적어도 학술 담론에서는 - 되고 있는 상황. 아니면 그런 강박에 시달리고(만)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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