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30일 화요일
왜 서울에선 엘리베이터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내리기도 전에 쇄도해 들어오는걸까?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이해를 시도해본다.
(1) 바빠서? 실제로 서울 지하철 역에선 천천히 걷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나를 포함해서... 계단을 두 칸씩 성금성큼 밟고,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걸어올라가고... 갈아타는 전철을 잡아타려고 뛰고... 바쁜 건 지하철 운전자도 마찬가지. 버스보다야 덜 하지만... 사람이 타기무섭게 문이 닫힌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빨리 타라고 재촉하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2) 불안해서? 내 이익을 먼저 챙기고 보자는 습성?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 금새 문이 닫힐 지도 모르고, 그러면 다음 기차까지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하고...,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가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자리를 잡을 수 있고.... - 내리는 사람 배려해주기가 힘든 것.
(3) 그냥... 습관? 별 생각없는? 그럴 수도 있다. 굳이 바쁜 시간도 아니고, 탈 자리도 넉넉히 보이는데도... 기어코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느니까. 아니... 어쩌면 일찍 타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를 잡으려는 마음때문일 수도... 서울 지하철에선 먼 거리를 가는 사람들이 많다. 자리에 앉고 못앉고는 매우 절발한 문제일 수 있다.
(4) 불특정 다수,잘 알지못하는 사람에겐 좀 무례해도 괜찮음? 이는...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 대한 과잉배려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태도다. 가까운 이들에겐 지나치게 체면을 차리지만, 안면이 없는 사람들 앞에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일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전쟁, 가난, 발전 등 생존의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삶들은 남을 신경쓸 겨를이 없는 것...
(1) 바빠서? 실제로 서울 지하철 역에선 천천히 걷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나를 포함해서... 계단을 두 칸씩 성금성큼 밟고,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걸어올라가고... 갈아타는 전철을 잡아타려고 뛰고... 바쁜 건 지하철 운전자도 마찬가지. 버스보다야 덜 하지만... 사람이 타기무섭게 문이 닫힌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빨리 타라고 재촉하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2) 불안해서? 내 이익을 먼저 챙기고 보자는 습성?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 금새 문이 닫힐 지도 모르고, 그러면 다음 기차까지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하고...,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가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자리를 잡을 수 있고.... - 내리는 사람 배려해주기가 힘든 것.
(3) 그냥... 습관? 별 생각없는? 그럴 수도 있다. 굳이 바쁜 시간도 아니고, 탈 자리도 넉넉히 보이는데도... 기어코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느니까. 아니... 어쩌면 일찍 타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를 잡으려는 마음때문일 수도... 서울 지하철에선 먼 거리를 가는 사람들이 많다. 자리에 앉고 못앉고는 매우 절발한 문제일 수 있다.
(4) 불특정 다수,잘 알지못하는 사람에겐 좀 무례해도 괜찮음? 이는...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 대한 과잉배려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태도다. 가까운 이들에겐 지나치게 체면을 차리지만, 안면이 없는 사람들 앞에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일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전쟁, 가난, 발전 등 생존의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삶들은 남을 신경쓸 겨를이 없는 것...
2013년 4월 29일 월요일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the wall"(1979)를 토대로 만든 영화 "the wall"(1982)를 잠깐 봤다. 감독은Alan Parker.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어린이들이 일렬로 기계를 통과해선 똑같은 가면을 쓰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가공"되어 "생산"되는 모습.... 개인성의 말살... 이런 접근은 개성,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의 이면이다. the wall의 비판은 결국 "개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할 뿐이다. 과연 개인, 주체가 논의의 시작점이자 종점이어야 하는가?
"문화와 역사가 다르고 인성과 품성이 다른데 어떻게 서양이 만들어놓은 인간관에 우리를 짜맞춰 넣으려 하는가. 바로 거기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양은 개인의 주체성과 독창성을 강조한 이성적인 존재를 인간의 전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관계의 그물망에 그물코와 같은 아름(개인)들의 역할과 어울림을 강조한 맥락적 존재를 인간의 표본으로 간주했다. 우리의 삶과 역사에 뿌리를 둔 인간에 대한 이론을 창의적으로 개발해낼 때 인문학의 위기에 놓인 이 지구촌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이기상 교수의 칼럼, "한국發인문학 이론의 태동을 기대하며" 중"
"서양은 개인의 주체성과 독창성을 강조한 이성적인 존재를 인간의 전형으로 생각했다.
아시아에서는 개인들의 역할과 어울림을 강조한 맥락적 존재를 인간의 표본으로 간주했다."
이런 동서양 구분법은 너무 낡아서 심히 지루하고 감동도 없다. 하지만...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결국 서양은 근대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꾸 맥락과 관계를 강조한다. 아시아에서 대안을 찾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아시아의 많은 문제는 오히려 맥락과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서양의 과거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이러다가 수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에 대한 이런 구분을 조직, 사회적 체계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사회적 체계들의 관계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탈맥락적인 독립적 체계들이란 것이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개인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반면에 동양, 대표적으로 아시아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이 있다. 개인, 주체성에 대한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 공동체주의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수렴할 것도 없이... 원래 큰 차이가 없었다고 봐야 할까? 그건 또 아닐 것이다. 결국 지향점, 강조점 차이 아닐까?
서구의 경우 근대화는 매우 독특하게 "개인"을 강조하는 흐름이 강조된 것이다.
"문화와 역사가 다르고 인성과 품성이 다른데 어떻게 서양이 만들어놓은 인간관에 우리를 짜맞춰 넣으려 하는가. 바로 거기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양은 개인의 주체성과 독창성을 강조한 이성적인 존재를 인간의 전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관계의 그물망에 그물코와 같은 아름(개인)들의 역할과 어울림을 강조한 맥락적 존재를 인간의 표본으로 간주했다. 우리의 삶과 역사에 뿌리를 둔 인간에 대한 이론을 창의적으로 개발해낼 때 인문학의 위기에 놓인 이 지구촌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이기상 교수의 칼럼, "한국發인문학 이론의 태동을 기대하며" 중"
"서양은 개인의 주체성과 독창성을 강조한 이성적인 존재를 인간의 전형으로 생각했다.
아시아에서는 개인들의 역할과 어울림을 강조한 맥락적 존재를 인간의 표본으로 간주했다."
이런 동서양 구분법은 너무 낡아서 심히 지루하고 감동도 없다. 하지만...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결국 서양은 근대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꾸 맥락과 관계를 강조한다. 아시아에서 대안을 찾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아시아의 많은 문제는 오히려 맥락과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서양의 과거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이러다가 수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에 대한 이런 구분을 조직, 사회적 체계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사회적 체계들의 관계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탈맥락적인 독립적 체계들이란 것이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개인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반면에 동양, 대표적으로 아시아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이 있다. 개인, 주체성에 대한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 공동체주의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수렴할 것도 없이... 원래 큰 차이가 없었다고 봐야 할까? 그건 또 아닐 것이다. 결국 지향점, 강조점 차이 아닐까?
서구의 경우 근대화는 매우 독특하게 "개인"을 강조하는 흐름이 강조된 것이다.
...아래 포스팅에 이어쓰자면... 생각보다 일을 일찍 끝낸 아내가 카페로 찾아와서 "그 놈의 공부"는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어젠 가까운 친척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엘 다녀왔다. 그리 순탄치 못한 생을 사셨고... 남편도 자식도 없어서... 썰렁했다. 찾아 온 친척들 이야기 속에서도 고인에 대한 추억은 듣기 힘들었다. 심지어 로아의 재롱에 폭소가 터지기도... 고인은 배제된 장례식장 풍경... 아니. 어쩜 친척들은 그 신산스러운 삶을 굳이 또 한 번 되새기기 싫어서 애써 외면했을지도....
결국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내내 공부와 관련해선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다시 월요일 아침. 봄비치곤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로아때문에 5시경에 일어났다. 차를 쓸 수 있어서 그 시간에 바로 출근할까하다가... 일찍가봐야 어짜피 어정쩡한 시간을 보낼 것 같아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잠시간을 조정했다.
어제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야구 소식도 좀 보고 커피마시고.... 9시가 다 되었다. 이제 그놈의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올해도 벌써 3분의 1이 지났다는 것 아니겠어. 우습군... 우훗.
결국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내내 공부와 관련해선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다시 월요일 아침. 봄비치곤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로아때문에 5시경에 일어났다. 차를 쓸 수 있어서 그 시간에 바로 출근할까하다가... 일찍가봐야 어짜피 어정쩡한 시간을 보낼 것 같아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잠시간을 조정했다.
어제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야구 소식도 좀 보고 커피마시고.... 9시가 다 되었다. 이제 그놈의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올해도 벌써 3분의 1이 지났다는 것 아니겠어. 우습군... 우훗.
2013년 4월 27일 토요일
아내 회사 근처 카페다. 아내가 로아와 함께 회사에 있다. 직원들에게 로아도 선보일 겸.. 덕분에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한산하다. 카푸치노를 마셔서 커피 맛을 제대로 맛보지는 못했다. 해서 아메리카노를 다시 주문했다. 들고 나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카푸치노는 일회요 컵에 주었다. 해서 아메리카노는 머그컵에 달라고 별도로 이야기했다. 혼자 전세내서 이 공간을 누리니... 그 정도는 써 줘야 할 듯. 커피 가격도 강남치고는 착한 편... 쿠키도 하나 샀다. 음. 너무 달다. ㅠㅠ 좀 놀았으니 이제부턴 공부를 좀 해야 한다. 그놈의 공부를...
2013년 4월 26일 금요일
2013년 4월 18일 목요일
"기능적 분화"가 우세하다는 것은 다른 분화에 어떤 의미인가? 다른 분화라 함은... 경제적 수준을 기준으로 삼은 계층간의 분화, 인종적 차이, 민족적 차이를 기준으로 삼은 인종적/ 국가적/지역적 분화, 혹은 개인적 친분, 인맥 등을 중심으로 관계있음/관계없음의 구분으로 유지되는 분화(특히, 전통적 분화). 이런 다른 분화의 중요성은 약화되는가? 혹은 기능적 분화와 갈등할 수밖에 없어서 겨우 명백을 유지하거나, 기능적 분화 원칙을 근본적으로 훼손하고서 존재하는가? 아님 공존가능한가? 심지어 상호 촉진하는 관계인가? 세상이 기능적 분화라는 원칙만 가지고 작동할 수 없기에 사회는 더 없이 복잡하다. 상호작용, 조직과 기능체계와의 관계도 중요하고, 사회 전체를 아울르는 다른 분화와 방식도 중요하다. 다른 분화 원칙은 기능적 분화를 이용해서 더 부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계층적 분화의 경우, 기능적 분화를 통해서 더 강화되기도 한다. 경제적 원칙만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대개 돈(자본)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부(이윤)을 얻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체계에도 직접적 악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가진 이들이 정치적 권력도 갖게된다거나, 교육이 자본주의적 인간만을 만들어낸다거나... 이는 체계통합의 위협이다. 또 무엇보다 사회통합이 문제가 된다. 배제되는 사람들이 생겨나니까... 다른 방식의 분화와 기능적 분화는 공존 공생 상생하기 위해서 타협점을 마련한다. 그 사이에서 다양한 메커니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메커니즘은 기능적 분화의 사회 분화 원칙을 전복하진 못한다. 그 원칙이 갖는 무자비함, 그리고 다른 분화원칙과 결합되어 발생하는 부작용을 제한하는 정도가 최선이다.
2013년 4월 17일 수요일
요즘 여덟 시 전에 사무실에 나온다. 8시 반경이면 등장하는 "동료"가 있기 때문에, 삼십분 경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커피콩을 갈고 물을 내려서 집에서 가져 온 빵과 함께 먹는다. 페이스북, 뉴스를 훑어보고 음악도 듣는다. 세상은 정지되어있고 나만 활동하도록 허락된 마법은 "동료"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깨진다. 현실이 마법의 순간을 몰아내는 것.
이런 저런 일들로 마음이 아주 편친 않다. 일, 관계... 아무래도 "관계"와 관련된 생각이 더 오래 남는다. 새벽기도회에 가서 마음을 좀 정리하고 싶었지만 피곤이라는 "생각"을 이기지 못했다. 다른 공간에서는 그런 묵상이 잘 되질 않는다.
억지로 John Scott의 "Through the bible through the year"를 읽어야겠다.
그리고 오늘을 진도를 좀 빼 봐야겠다. 마음 속 부담을 더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를 위해 무엇보다 인터넷 접속을 적어도 오전 동안엔 끊을 것이다. ㅎㅎ
그를 위해 무엇보다 인터넷 접속을 적어도 오전 동안엔 끊을 것이다. ㅎㅎ
2013년 4월 16일 화요일
2013년 4월 11일 목요일
푸코는 인간, 개인, 주체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후기구조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자율적 주체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윤리도 개인의 윤리를 중심으로... 구조적 윤리 강제로부터 "진정한" 개인의 윤리를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듯...
하지만 구조의 윤리와 개인의 윤리를 다른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둘이 겹치는 지점이 있지만... 그러니까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궁극적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 개인의 윤리, 개인의 자율적 선악판단이 강조되면... 도대체 사회적 윤리는 어떻게 유지되지?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의 자율성, 개인의 윤리, 사회의 윤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면서 균형을 잡아가야 한다. 그것이 어쩌면 이론과 실천의 미학이다. 특정한 상태를 최선으로 상정하고 그쪽으로 밀고나가는 것은 도덕주의, 도덕원리주의, 그리고 파시즘에 오히려 가깝다.
2013년 4월 10일 수요일
도덕/ 윤리 구분과, 도덕/윤리의 대상으로서 개인/ 사회의 구분이 필요.
특히, 개인의 도덕/윤리와 사회(체계)의 도덕/윤리 구분이 불분명한 경우 도덕주의로 결론을 내리기 쉽다. 무책임한, 혹은 형식적 윤리만을 지키는 사회(체계), 그리고 개인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푸코, 바우만)
반면에 개인과 사회를 구분하는 경우는... 훨씬 더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니버의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나 루만의 경우...
그리스인들은 윤리(학)을 도덕과 연관시키기보다는 관습과 관례에 연관시켰다(Ethik <---ethos p="">
스피노자(1632 - 1677)에겐 항상 자연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특수한 질서(순서)로 합성에 참여하게 되는 관계들이 있다. 선(Good)과 악(Evil)은 없으며, 좋음(good)과 나쁨(bad)이 있을 뿐이다. "선악을 넘는다는 것은, 적어도 이 말은 좋음과 나쁨을 넘어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좋다는 것은 어떤 신체가 직접적으로 그 관계를 우리의 신체와, 그리고, 우리 신체의 모든 것 혹은 그 힘의 일부분과 합성시킬 때, 우리의 신체를 증대시킬 때이다."
칸트에게 도덕은 환원 불가능하고 초월적인 보편적 요구이고, 윤리는 사회 공동체에 근거하여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다가간다. 칸트는 도덕보다 윤리학을 선호한다.
헤겔은 보편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음으로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의무인 "도덕"(Moralität)과 특정한 장소와 시대에 요구되는 삶의 방식인 "윤리"(Sittlichkeit)를 구분... 헤겔은 엄격한 도덕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니체는 "선과 악"(good/ evil, gut/ böse)의 구분을 도덕으로 보고, 好/不好(good/bad, gut/schlecht)의 구분은 "윤리"로 보았다. 니체는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짐. 존재로부터 도덕적 당위를 거부 즉 "도덕적 존재론"을 거부한 것. 니체의 "비도덕적 도덕"은 인간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힘에 의한 도덕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노예의 도덕"을 거부. "노예의 도덕"은 어떤 것에 의해 부과되는 도덕 즉 규범윤리학을 의미. 따라서 이말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부정이고, 도덕 판단의 절대성과 무조건성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
푸코에 따르면 기독교의 생성과 발전 이후로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발전한 삶을 미적인 관점에서 배려하고 돌보는 의미로서의 "윤리"가 점차 의무나 금지를 강조하는 도덕으로 대체되어갔다고 주장. 자아의 정체성과 윤리적 행동을 둘러싸고 이를 일방적으로 규정하려는 힘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과 투쟁이야말로 윤리적 행동의 시작이다. 윤리적 삶의 목표가 자유의 실천을 통하여 자아라는 형식을 주체적으로 채워나가는 것이라면 현실에 안주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비윤리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코드화되어 있으면서 금지와 의무를 강조하는 도덕 이외에도 우리의 구체적 삶을 대상으로 하는 윤리의 세계가 있고 이것이 지금까지는 너무 소흘히 취급되었다는 사실인 것이다. 윤리란 "개인이 자신과 맺어야만 하는 관계를 말하며...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행동의 도덕적 주체로서 자신을 어떻게 구성하는 가를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어가는 관점에서 보편적인 준칙을 따라야하는 도덕과는 다른 윤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푸코의 윤리학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에서 윤리적인 것은 인간본성에서 도출되지 않음. 윤리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발생. 따라서 본질적인 윤리적 주체를 설정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 윤리의 "기초"가 없다면, 급진적 사회운동이 필요로 하는 윤리 또는 집합적인 윤리적 주체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 "우리가 매일 해야 하는 윤리적, 정치적 선택은 어느 것이 주요한 위험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것.
니체와 푸코식의 사고에서 만약 윤리가 존재한다면 보편 법칙 대신 자유로운 정신의 미학적 실험이 장려되고 그것이 다원주의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미학적 윤리"가 됨. 윤리가 실존의 미학과 동의어가 되며, 실존의 미학에 던질 수 있는 "급진적 질문"은 그 미학이 "상호 주관적 미학"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 이 질문은 개인의 자율성의 극대화가 현존하는 사회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변형됨.
특히, 개인의 도덕/윤리와 사회(체계)의 도덕/윤리 구분이 불분명한 경우 도덕주의로 결론을 내리기 쉽다. 무책임한, 혹은 형식적 윤리만을 지키는 사회(체계), 그리고 개인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푸코, 바우만)
반면에 개인과 사회를 구분하는 경우는... 훨씬 더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니버의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나 루만의 경우...
그리스인들은 윤리(학)을 도덕과 연관시키기보다는 관습과 관례에 연관시켰다(Ethik <---ethos p="">
스피노자(1632 - 1677)에겐 항상 자연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특수한 질서(순서)로 합성에 참여하게 되는 관계들이 있다. 선(Good)과 악(Evil)은 없으며, 좋음(good)과 나쁨(bad)이 있을 뿐이다. "선악을 넘는다는 것은, 적어도 이 말은 좋음과 나쁨을 넘어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좋다는 것은 어떤 신체가 직접적으로 그 관계를 우리의 신체와, 그리고, 우리 신체의 모든 것 혹은 그 힘의 일부분과 합성시킬 때, 우리의 신체를 증대시킬 때이다."
칸트에게 도덕은 환원 불가능하고 초월적인 보편적 요구이고, 윤리는 사회 공동체에 근거하여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다가간다. 칸트는 도덕보다 윤리학을 선호한다.
헤겔은 보편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음으로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의무인 "도덕"(Moralität)과 특정한 장소와 시대에 요구되는 삶의 방식인 "윤리"(Sittlichkeit)를 구분... 헤겔은 엄격한 도덕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니체는 "선과 악"(good/ evil, gut/ böse)의 구분을 도덕으로 보고, 好/不好(good/bad, gut/schlecht)의 구분은 "윤리"로 보았다. 니체는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짐. 존재로부터 도덕적 당위를 거부 즉 "도덕적 존재론"을 거부한 것. 니체의 "비도덕적 도덕"은 인간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힘에 의한 도덕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노예의 도덕"을 거부. "노예의 도덕"은 어떤 것에 의해 부과되는 도덕 즉 규범윤리학을 의미. 따라서 이말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부정이고, 도덕 판단의 절대성과 무조건성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
푸코에 따르면 기독교의 생성과 발전 이후로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발전한 삶을 미적인 관점에서 배려하고 돌보는 의미로서의 "윤리"가 점차 의무나 금지를 강조하는 도덕으로 대체되어갔다고 주장. 자아의 정체성과 윤리적 행동을 둘러싸고 이를 일방적으로 규정하려는 힘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과 투쟁이야말로 윤리적 행동의 시작이다. 윤리적 삶의 목표가 자유의 실천을 통하여 자아라는 형식을 주체적으로 채워나가는 것이라면 현실에 안주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비윤리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코드화되어 있으면서 금지와 의무를 강조하는 도덕 이외에도 우리의 구체적 삶을 대상으로 하는 윤리의 세계가 있고 이것이 지금까지는 너무 소흘히 취급되었다는 사실인 것이다. 윤리란 "개인이 자신과 맺어야만 하는 관계를 말하며...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행동의 도덕적 주체로서 자신을 어떻게 구성하는 가를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어가는 관점에서 보편적인 준칙을 따라야하는 도덕과는 다른 윤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푸코의 윤리학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에서 윤리적인 것은 인간본성에서 도출되지 않음. 윤리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발생. 따라서 본질적인 윤리적 주체를 설정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 윤리의 "기초"가 없다면, 급진적 사회운동이 필요로 하는 윤리 또는 집합적인 윤리적 주체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 "우리가 매일 해야 하는 윤리적, 정치적 선택은 어느 것이 주요한 위험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것.
니체와 푸코식의 사고에서 만약 윤리가 존재한다면 보편 법칙 대신 자유로운 정신의 미학적 실험이 장려되고 그것이 다원주의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미학적 윤리"가 됨. 윤리가 실존의 미학과 동의어가 되며, 실존의 미학에 던질 수 있는 "급진적 질문"은 그 미학이 "상호 주관적 미학"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 이 질문은 개인의 자율성의 극대화가 현존하는 사회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변형됨.
바우만은 개인의 도덕이 보편적이고 수단적 윤리의 종속물로 변질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규범적 관점올 유지하고 있다.
(바우만의 도덕/윤리 구분은 니체, 푸코와는 정반대다. 니체, 푸코는 사회적의 강제되는 도덕과 개인의 윤리를 구분했는데, 바우만은 보편적, 수단적 윤리와 개인의 도덕을 구분한다. 이런 걸로 볼 때도 알 수 있지만 도덕, 윤리 구분은 그때 그때 다르다)
---ethos>
2013년 4월 9일 화요일
신우회 모임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오셔서 설교하시는 목사님.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메세지 내용이 없는 건 아닌데... 이건 뭐 성경 본문은 그저 장식일 뿐이고... 그 메세지의 근거가 신앙인지 신학인지 인생철학인지 교양독서인지... 불분명하다.
점심 식사하면서... "차별금지법" 얘기를 어떤 분이 꺼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라고... 그 분은 무엇보다 '동성애자'를 언급했다. 식사 자리에서 그런 주제로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 댓구를 하진 않았다. 게다가 그 분은 분명히 '신우'들 사이엔선 공감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얘기를 꺼낸 것 같아서... 또 그 양반은 일상적으로 규율될 일들도 지나치게 법으로 규제하려드는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세상에... "차별 금지"만큼 법적으로 규제할 일이 필요한 일이 또 어디 있다고... 목사님은 또 요즘 한국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불분명해진다는 탄식도 쏟아냈다. 그런가? 60, 70년대의 그 개발독재 시절에는 발전, 근대화, 경제성장이라는 "옳은" 목표로 온국민의 의지와 열정, 노력이 모아졌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분명한 시기였다는 것인가? 동성애자 차별 금지를 얘기하는 분위기가 도덕적 타락의 징후로 읽히는가?
차별금지 공론화의 출발점이자 가장 큰 의의는 사실 차별을 인정하는 것이다. 차별 받는 자, 차별 받는 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그 내용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동성애자가 차별받는 소수자라는 점, 법률적으로 보호받아야하는 대상으로서의 정당한 위치를 얻게 되는 것, 그게 불편한 것이다. 모든 소수자들은 그런 대접을 받게 된다. 어디 여자가... 어디 장애자가....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예수라면... 어떠셨을까? 답은 분명하게 나와있자 않은가? 예수께서 오정현 목사가 설교하는 사랑의 교회 신축 성전에 기꺼이 찾아가실까?
점심 식사하면서... "차별금지법" 얘기를 어떤 분이 꺼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라고... 그 분은 무엇보다 '동성애자'를 언급했다. 식사 자리에서 그런 주제로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 댓구를 하진 않았다. 게다가 그 분은 분명히 '신우'들 사이엔선 공감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얘기를 꺼낸 것 같아서... 또 그 양반은 일상적으로 규율될 일들도 지나치게 법으로 규제하려드는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세상에... "차별 금지"만큼 법적으로 규제할 일이 필요한 일이 또 어디 있다고... 목사님은 또 요즘 한국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불분명해진다는 탄식도 쏟아냈다. 그런가? 60, 70년대의 그 개발독재 시절에는 발전, 근대화, 경제성장이라는 "옳은" 목표로 온국민의 의지와 열정, 노력이 모아졌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분명한 시기였다는 것인가? 동성애자 차별 금지를 얘기하는 분위기가 도덕적 타락의 징후로 읽히는가?
차별금지 공론화의 출발점이자 가장 큰 의의는 사실 차별을 인정하는 것이다. 차별 받는 자, 차별 받는 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그 내용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동성애자가 차별받는 소수자라는 점, 법률적으로 보호받아야하는 대상으로서의 정당한 위치를 얻게 되는 것, 그게 불편한 것이다. 모든 소수자들은 그런 대접을 받게 된다. 어디 여자가... 어디 장애자가....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예수라면... 어떠셨을까? 답은 분명하게 나와있자 않은가? 예수께서 오정현 목사가 설교하는 사랑의 교회 신축 성전에 기꺼이 찾아가실까?
오랜만에 한국 영화 두 편을 봤다. 극장에서 제대로 감상한 것이 아니라 컴으로 듬성 듬성... "분노의 윤리학"(박명랑)과 "남쪽으로 튀어"(임순례). "분노의 윤리학"은 재미있게 봤다. 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 그 직전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은 "펄프픽션"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방식이 계속 사용되면서 오히려 긴장도가 떨어지고 느슨해진다. 공식에 대입해서 답이 나오는 수학 문제 풀기 같은... 연기가 대부분 좋은 편이고, 또 극의 중심이 여러 인물들에게 분산되어 있고, 독특한 캐릭터들도 있고(문소리), 인간의 이중성, 삼중성을 드러내는 내용들이라 나름 재미있게 봤다. 나중에 찾아 보니 흥행은 죽을 쓴 모양이고 "네티즌"들의 평도 거의 악담 수준이다. "저런 것도 영화냐... " 참. 이렇게 다르구나.
"남쪽으로 튀어"는 기대를 좀 한 탓인지 역시 실망이 컸다. 일본 원작이고 임순례 감독, 김윤석 주연 등. 기대감을 갖게 할 요소들이 없지 않았는데... 역시 뭔가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코미디도 아닌 것이... 연기도 대부분 겉돈다. 김윤석의 연기 역시 매우 작위적이다. "황해"완득이""추격자" "타짜" 같은 좋은 쪽이 아니라, "즐거운 인생"에서의 김윤석이었다. 뭔가. 자연스럽지 않고 "연기"하는 듯한... 인물들이 대부분 겉돈다. 원작의 설정이 한국 현실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동진 씨는 얘기했던데... 맞는 얘기다. 코미디도 아닌 것이, 주제의식만 떠다니는.... 그나마 볼만했던 연기는 큰 딸, 막내딸, 선생님, 그리고 공안 1,2.
"남쪽으로 튀어"는 기대를 좀 한 탓인지 역시 실망이 컸다. 일본 원작이고 임순례 감독, 김윤석 주연 등. 기대감을 갖게 할 요소들이 없지 않았는데... 역시 뭔가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코미디도 아닌 것이... 연기도 대부분 겉돈다. 김윤석의 연기 역시 매우 작위적이다. "황해"완득이""추격자" "타짜" 같은 좋은 쪽이 아니라, "즐거운 인생"에서의 김윤석이었다. 뭔가. 자연스럽지 않고 "연기"하는 듯한... 인물들이 대부분 겉돈다. 원작의 설정이 한국 현실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동진 씨는 얘기했던데... 맞는 얘기다. 코미디도 아닌 것이, 주제의식만 떠다니는.... 그나마 볼만했던 연기는 큰 딸, 막내딸, 선생님, 그리고 공안 1,2.
'사회통합'과 '체계통합'을 구분해서 볼 때... 나는 체계통합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역시 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인간의 활동과 구분되는 사회의 작동(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인간 없이 사회 없고 사회 없이 인간이 없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난 인간과 사회의 관계(사회통합)가 아닌 사회체계들 간의 관계(체계통합)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체계통합이 반드시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 둘은 원칙적으로 다른 질서다. 사회통합과 체계통합의 분리는 근대의 성과이자 동시에 근대 위기 혹은 비극의 뿌리다. 이 둘에 생태적 통합을 더 해서 모두 세 가지 통합양태를 서로 조화시키는 것이 지금 인류가 잘 살기 위해서 다뤄야 할 과제다.
지난 주말 도서관에 갔다가 "삼국유사" "한국미술사 2"(유홍준, 삼국시대, 고려시대 편)을 훑어보았다. 도대체 한민족, 조선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어떤 방식으로 성립, 유지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남긴 조상과 지금 나와 어떤 연속성이 있을까? 발해, 신라, 고려는? 그나마 현재와 연속성을 꽤 갖는 조선, 특히 조선 후기 정도가 되어야 연속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일상적으로 남아있는 유교적 관습 정도? 그것도 제사 정도로 남아있을 뿐이긴 하다. 예를 부부유별을 강조해서 남편, 아내가 거하는 곳이 다른(사랑채, 안채) 조선 양반의 풍습이 남아 있나? 불교의 연속성은? 삼국, 고려 이후로 이어지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한반도 불교의?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건 본능에 가깝다. 익숙한, 가까운 시선으로 낯설고 먼 것을 보게 되는 것... 본능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성찰 능력, 특히 역사적 성찰 능력도 가지고 있다. 낯선 시각으로 익숙한 것을 재단할 수도 있는 능력...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지금 현 인류가 싸우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가까운 미래에도 벌써 우습게 여겨질 것이다. 예를 들어 인종, 민족, 성별 차이 등에 대한 수십년 전 견해가 지금 시각에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후진' 관점인 것처럼.... 지금 익숙하고, 상식적인 견해, 행동 중 수십 년 뒤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미래를 현실에 과잉투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긴 하지만...
지난 주말 도서관에 갔다가 "삼국유사" "한국미술사 2"(유홍준, 삼국시대, 고려시대 편)을 훑어보았다. 도대체 한민족, 조선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어떤 방식으로 성립, 유지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남긴 조상과 지금 나와 어떤 연속성이 있을까? 발해, 신라, 고려는? 그나마 현재와 연속성을 꽤 갖는 조선, 특히 조선 후기 정도가 되어야 연속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일상적으로 남아있는 유교적 관습 정도? 그것도 제사 정도로 남아있을 뿐이긴 하다. 예를 부부유별을 강조해서 남편, 아내가 거하는 곳이 다른(사랑채, 안채) 조선 양반의 풍습이 남아 있나? 불교의 연속성은? 삼국, 고려 이후로 이어지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한반도 불교의?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건 본능에 가깝다. 익숙한, 가까운 시선으로 낯설고 먼 것을 보게 되는 것... 본능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성찰 능력, 특히 역사적 성찰 능력도 가지고 있다. 낯선 시각으로 익숙한 것을 재단할 수도 있는 능력...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지금 현 인류가 싸우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가까운 미래에도 벌써 우습게 여겨질 것이다. 예를 들어 인종, 민족, 성별 차이 등에 대한 수십년 전 견해가 지금 시각에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후진' 관점인 것처럼.... 지금 익숙하고, 상식적인 견해, 행동 중 수십 년 뒤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미래를 현실에 과잉투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긴 하지만...
사람은 참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 페북에서 김동호 목사님은 "가난은 개인이 극복할 수 있다"는 요지의 글을 남겼다. 이 분은 이런 내용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파하고 그 때마다 공감을 얻기도 하지만 그에 맞먹는 비판, 비난을 받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데 이는 그 주장에 대한 비판이 그 분의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난? 개인이 극복할 수도 있겠지. 실제 극단적 가난 상태를 벗어나 부자가 된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고. 그리고 깨끗하게 돈을 많이 벌면 좋겠지(소위 "청부론"). 깨끗한 부자들이 기부를 하면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 구제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문제는 시야가 개인의 게으름/부지런함에 고정될수록 가난과 부자 간의 불평등 구조는 오히려 더 고착화된다는 데 있다. 원칙적으로 틀린 얘기는 아니나 그 얘기만 반복하는 건 참... 물론 내 생각 역시 어지간해선 잘 바뀌지 않는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의 눈엔 내가 고집불통으로 보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