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9일 금요일

비동시성의 동시성 (2)

"나찌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틴 니묄러가 쓴 <전쟁책임 고백서>중에서....)

오세철 교수 체포에 대한 생각을 담은 어느 블로그 글에 누군가가 이런 내용을 덧붙였다. 지금은 2008년 8월이다.

2008년 8월 28일 목요일

비동시성의 동시성

내가 꼭 챙겨보는 것 중에 'YTN 돌발영상'이 있다. 황우석 사태 개입, 최근 낙하산 사장 착륙 등등 해오고 있는 짓을 봐선 YTN 생산품을 소비해주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이 '돌발영상' 만큼은 내가 앞장서서 판촉에 나서고 싶고, 제작진에 대해서는 기립박수를 쳐 주고 껴 안아주고 싶다. 대한민국 정치풍자의 수준을 여러 단계 올린 것이다. 최근 낙하산 사장이 강림하셨는데도 꿋꿋하게 그 '돌발'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게 무척이나 대견하다 (과연 남은 4년 동안 버틸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지만). 오늘 네이버에 올라온 것도 그 돌발정신의 산물로 역작 중 역작이다 (올릴 수 있는 영상을 찾지 못했다. 링크해 놨으니 꼭 한 번 보삼). 제목은 '체육대통령'이고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올림픽 선수단 환영행사을 담은 영상. 우리 대한민국의 대통령 2MB, 남녀노소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 공평하게 모두에게 반말로 찍찍... 감짝 놀랐다. 심지어 50에 가까울 김경문 감독에게도... '어, 그래...' 이런 장면을 본 후 내가 겪어야 했던 심적 상황의 변화를 굳이 자세히 표현하지 않으련다. 일일이 표현하다간 나도 그들처럼 천박해질수도... 제작진이 역점을 둔 畵龍點睛의 순간은 IOC선수위원으로 뽑힌 문대성 선수와 인사하는 순간이다. 그 때 뒤에서 들리는 말 (동시에 자막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말): '대통령이 만들어주신 거야...' 그 목소리의 임자는 분명 '양촌리' 출신 그 유모 장관임에 분명하다. 할렐루야!! 우리 聖君 이명박 대통령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 세세에 빛나리! 아멘!!
그것이 며칠 전 그러니까 2008년 8월 대한민국 서울에서 찍힐 수 있는 영상인지 의심해 본다. 그 무리들 주위 공간에는 다른 시간대가 적용되고 있음에 분명하다.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더니, 그들의 정신세계는 그런 발언에 실제로 지배를 받나보다. 그들과 나는 동시대에 있지만,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다. 슬프다. 한 인간 때문에 역사가 거꾸로 가는 그런 경험을 한국에서 해야 하는 현실이...

ps) 그새 이 동영상이 급속도록 확산되고 있다. 누군가는 "소름끼친다"는 감상을 어디엔간 남겼더만. 나는 "ㅎㅎ" 다. 흑흑...

2008년 8월 27일 수요일

'중국인의 反韓 정서 이해하기' 혹은 '한국인의 反中정서 이해하기'

내가 며칠 전에 한 얘기를 듣기나 한 듯이 중국 전문가(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왜? 서강대 중국문화과 교수이니까) 이욱연 교수가 대민써비스에 나섰다.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 제목은 "언제까지 '타자'의 눈으로 중국을 볼 건가? [기고] 중국의 '혐한', 그 뿌리를 밝힌다" (부제가 쌩뚱맞다). 제목이 이미 밝히고 있듯이 그는 한중관계를 성찰하기 보다는 '타자의 눈으로 중국을 보'는 우리를 성찰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한국인들의 이런 반중 정서가 바로 중국인들의 반한 정서의 토대다. (...) 따라서 반한 정서를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의 반중 정서부터 치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보는 우리의 눈을 갱신해야 한다. (...) 미국의 눈, 일본의 눈으로 중국을 보지 말고, 냉전의 틀을 버리고 동아시아 공동체 시대에 걸맞게 중국을 보는 새로운 눈, 우리의 눈을 가져야 한다." 백번 옳은 말씀이긴 하지만 왠지 시원하지 않다. 아마 가려운 데가 그 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차라리 며칠 전 소개한 어느 무명의 블로거 글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2008년 8월 26일 화요일

위기, 실망의 일상화

"Die Konservativen beginnen mit Enttäuschung, die Progressiven enden mit Enttäuschung, alle leiden an der Zeit und kommen darin überein. Die Krise wird allgemein." (Luhmann 1996 [Protest]: 91)

사회 발달의 속도에 대한 성찰, 사회가 스스로를 관찰하는 방식의 시간화는 위기의 일상화를 낳는다. 위기의 일상화는 곧 실망의 일상화이기도 하다. 太平聖代는 역사책에서나 찾을 수 있는 개념이 되었다. 또한 이는 정권교체가 코드인 민주주의적 정치체계의 작동방식과 맞물려 증폭된다. 위기와 실망감이 팽배해야 대안이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그 과정에서 보수/진보는 각기 실망과 다른 관계를 맺는다. "보수는 실망에서 출발하고, 진보는 실망으로 끝난다". 루만은 가끔씩 이런 寸鐵殺人 같은 비유로 나를 놀래킬 때가 있다.

ps)보수/진보에 대한 좀 더 익숙한 경구로는...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선인들의 공부법

<성학십도>는 노년의 퇴계 이황(李滉 ; 1501~1570) 선생이 17세의 임금 선조에게 성리학의 기본 이념을 열 개의그림으로 정리하여 올린 책이다 (원명칭은 "진성학십도차병도 進聖學十圖箚幷圖"). 성학이라는 말은 곧 유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로 성학을 풀이하고 있다. 그 중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 Diagram of the Admonition on "Rising Early and Retiring Late")"가 특히 흥미롭다."숙흥야매잠(夙興夜昧箴)이란 남당(南唐) 진무경(陳茂庚)이 만들어 잠언을 삼은 것인데, 왕노재가 이것으로 자신을 가르치고 학생들에게도 외어서 실천하도록 학습시켰다고 한다. 퇴계는 왕노재가 작성한 아홉 번째 그림을 모방해서 그림을 그리고 보충해설을 덧붙였다. '숙흥야매'란 글자 그대로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부지런히 수양하라는 내용이다." 요즘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하는 때 염두에 둘만한 가름침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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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 진무경]
닭이 울어 잠에서 깨어나면 생각이 일게 되니 그 사이에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혹은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모아 차례와 조리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근본이 확립 되었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옷을 갖추어 입고 단정하게 앉아 몸을 가다듬는다. 마음을 끌어 모으되 밝게 떠오르는 햇살처럼 해야 한다. 몸을 업숙하고 가지런히 정돈하여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한결 같아야 한다.

책을 펴서 성현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회와 증자가 앞뒤에 있을 것이다. 성현께서 말씀하신 것을 친절하게 귀담아 들어 제자들의 질문과 변론을 반복하고 참고하여 바르게 고쳐야 한다.

일이 생겨 대응할 경우에는 실천으로 증명해야 한다. 밝은 천명은 빛나는 것이니 항상 눈을 거기에 두어야 한다. 일에 대응하고 나면 예전과 같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아 사사로운 생각을 멈추게 해야 한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순환하는 것을 오직 마음만은 볼 수 있으므로 고요할 때 이 마음 잘 보존하고 움직일 때 관찰하여 마음이 둘 셋으로 나뉘어서는 아니 된다. 글을 읽다가 틈이 나면 간혹 휴식을 취하고 정신을 활짝 펴서 성정을 아름답게 길러야 한다.

날이 저물어 사람이 피곤해 지면 나쁜 기운이 들어오기 쉬우므로 몸과 마음을 잘 가다듬어 정신을 맑게 이끌어야 한다. 밤이 깊어 잠을 잘 때는 손발을 가지런하게 모아 아무 생각을 하지 말고 마음과 정신을 잠들게 해야 한다.

밤의 기운으로 마음과 정신을 잘 기르면 정이 다시 원으로 돌아 올 것이다. 이것을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두어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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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우(右) 잠(箴)은 남당 진무경(陳茂卿)이 지어 스스로 경계한 것입니다. 금화 왕노재(王魯齋)가 일직이 태주의 상채(上蔡) 서원에서 교육을 맡았을 때, 오로지 이 잠만을 가르쳐, 배우는 사람들마다 모두 외고 익혀서 실행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삼가 노재의 경재잠도를 본떠 이 도를 만들어 그의 도와 상대가 되게 하였습니다. 원래 경재잠에는 공부해야 할 영역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영역에 따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도에는 공부해야 할 때가 많이 적혀 있으므로, 그 때에 따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습니다.

무릇 도의 유행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한 자리도 이가 없는 곳이 없으니, 어느 곳에서 공부를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잠깐 사이라도 정지되는 일이 없으므로 한 순간도 이가 없을 때가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를 그만두어서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사자(子思子)는 이르기를, "道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삼가 조심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고 하였고, 또 "은밀한 곳보다 잘 드러나는 곳이 없고, 세미(細微)한 것보다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활에 있어, 장소와 때를 막론하고 존양(存養)하고 성찰하여 그 공부를 힘쓰게 하는 법입니다. 과연 이와 같이 할 수 있으면, 어느 영역에서나 털끝만큼의 과오마저 없게 될 것이며, 어느 때나 순간의 끊임마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병진해야 합니다. 성인이 되는 요결, 그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상의 다섯 도는 심성에 근원을 둔 것인데, 요점은 일상생활에 힘쓰고 경외의 태도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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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빌레펠트대학 LiLi도서관에 경북대에서 발간한 "퇴계학연구" 여러 권이 꽂혀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아마 기증했을 것이고 어느 한 사람 들춰나 봤을까 싶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일이다.

2008년 8월 25일 월요일

중국 혐한(嫌韓)은 예고된 것

이번 올림픽에서 중국인들이 보인 반한감정에 놀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최근 혐한 분위기의 근원을 두 나라 관계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흥미롭고 설득력도 있다. 전문가가 쓴 글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거칠기도 하지만, 이만한 글도 - 인터넷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 한국언론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많은 중국전문가들은 다 뭐하시나? 물론 이런 진술을 학술적 코드로 판단할 일은 아니다. 학자들이 쓴다면 대국민 서비스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내용을 일부 발췌해 놓는다.

과거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을 아주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호감의 밑바탕이 한민족이 역사상 중국에게 별로 대든 적이 없이 중국의 충실한 꼬붕 노릇을 했다는 경험이라는 점이었다. 단채 신채호는 중국의 주변 민족이 모두 한번 씩은 중원을 차지해 황제 자리에 올라 한족을 지배했으나 오직 조선 민족만이 중원을 차지하기는 커녕 소중화를 자부하면서 한족의 노예 노릇을 자청했다고 한탄했다. (...)
중국인들은 과거 중국의 속국이었고 유교문화에 깊숙하게 빠졌으며, 중국에 반항한 적이 없다는 이유가 한국을 좋게 본 밑바탕이었다. 여기에 한국의 경제성장은 개혁개방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는 중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모델이었고, 마침 한국 드라마와 가요 등도 보고 듣기에 좋으니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당시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부러움과 멸시감이 묘하게 복합된 이중적 양태였다. 단 우리 눈에는 부러움만이 부각됐을 뿐 멸시감이 한쪽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
그런데 중국이 한국과의 교류가 급격하게 늘면서 자세하게 보니 그들의 원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됐다. 우선 중국인들은 한국을 역사적 '꼬붕'으로 봤는데, 한국인들은 중국을 야만인으로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 여기에 중국 안의 의도적인 혐한류 조장도 한 몫을 했다. 특히 중국 연예오락계를 중심으로 한 혐한류 조장이 최소한 5년전부터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연예계는 한국 드라마와 가요가 중국 시장을 장악하자 큰 피해를 봤던 것이다. (...) 반한류 움직임이 좀 더 복잡하게 전개된 것은 중국 정부의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중국 정부는 강대국들의 패권을 분석하면서 단지 무력이 아니라 소프트 파워, 즉 문화 권력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어떤 민족을 지배하는데 단지 무력 만으로는 부족하며 문화적 동화가 훨씬 더 위력적이라고 본 것이다. 정권적 차원의 반한 감정은 더 큰 문제 중국도 자신의 소프트 파워로 아시아를 장악하고 싶은데, 한류가 중요 경쟁 상대였다.

열등감과 자부심의 기묘한 결합이라고 봐야 하겠다. 컴플렉스는 적게 가질수록 좋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2008년 8월 22일 금요일

영화의 문법

영화가 방송드라마와 다른 점은 그 문법이 좀 더 복잡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영화평론가는 있지만 드라마평론가는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고. 영화에 대해서는 뭔가 할 말이 더 많은 것이다. 그 더 복잡하다는 문법의 내용이 무엇일까? 우선 '장르'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의 내적 분화라고 볼 수 있겠다.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자면, 액선, 스릴러, SF, 호러, 드라마, 슈퍼히로, 애니메이션, '에로' 등등. 장르에 대한 거라면 우리 드라마 쪽도 할 얘기가 있을 것이다: 불륜, 신분을 초월한 연애, 역사물, 정치물 등등. 하지만 영화 쪽 장르가 더 세분화되어있고, 장르에 대한 충성도도 더 높다. 왜 그럴까? 단순하다. 드라마는 불특정 다수가 보는 것이고, 혹은 적어도 그걸 전제하고서 만들고, 영화는 입장료를 내고서 영화를 볼 준비가 되어있는 관객층을 고려해서 만드는 것이다. 영화 역사가 길고 영화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한 지역의 관객일수록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이다 (딱히 제시할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긴 블로그아닌가). 코흘리개서부터 80대 할머니까지, 4천만이 보는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보기 시작해도 심지어 몇 회를 빼먹었더라도 계속 따라올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아닌게 아니라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대개 그렇다. 물론 영화에 대한 담론이 세분화되기 전에 영화도 그런 식으로 작동했고, 아직 그런 '전통'이 남아있기도 하다. 한국에서 수백만 심지어 천만 관객이 드는 영화는 대개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최근 상영되고 있는 '놈놈놈'은 깐느 버전이 아닌 한국용 버전이라는 얘길 들었다. 깐느 버전은 액션을 더 강조했고, 한국 버전은 줄거리를 좀 더 강조했다고 한다. 액션영화를 그것으로 즐길 수 있는 관객이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몇 년 전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영화 '디워'도 CG나, 괴물/괴수에 초점을 맞춰서 보면 그 정도로 혹평을 받아야 할 영화는 아닌데 뜬금없이 애국심 마케팅이 끼어들어서 오히려 더 이상한 영화로 만들어 버렸다. 허나 최근에는 한국 관객들 취향이 좀 더 까다로워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수준이 높아졌다'고 표현은 좀 거북하고, 장르이해도가 높아졌다고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앞으로는 감독이나 관객이나 더 장르에 충실하게 될 것이다. 장르를 지키건 깨건, 그것을 중심으로 영화 커뮤니케이션이 프레이밍될 것 같다는 얘기다. 사실 '장르'에 대한 이해는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데 실제로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007 씨리즈를 보면서 왜 저리도 비현실적이냐는 핀잔을 던져서는 곤란하다. 007에서는 제임스 본드의 카리스마, 적성국 설정, 본드걸, 무기, 자동차 추격전 등 007영화 코드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본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벼랑 위의 포뇨' (2008),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2004).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과 예비거장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다. '포뇨'는 감독의 전작에 비해서 줄거리가 빈약하기 그지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진정한 아동용이었다. '구름의...' 는 그 양반 특유의 '잔잔함'이 너무 강해서 끝까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언제가 두 영화를 극장에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림이 참 보기 좋았던 것이다. '포뇨'는 CG를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화면이라고 하고, '구름의...'에 대해선 다른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자세한 묘사가 뛰어나서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다. 최근에 미국에서 엄청난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다크 나이트'도 장르적 특성을 고려해야 잘 감상할 수 있다. 이른 바 '슈퍼히로'물인데, 배트맨은 슈퍼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과는 다르게 매우 인간적인 인물(?)이다. 과거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소심하기도 하고... '다크 나이트'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전작 '배트맨 비긴스' (2005)에서는 배트맨을 더 '인간화'시켰다. 이번 영화에서는 심지어 배트맨과 조커의 선악구도를 훨씬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런 영화는 '슈퍼히로물'이라는 장르의 진화로 봐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핸콕'(2008, Peter Berg)도 전형적 '초딩용' 영화인데도, 그나마 인상에 남는 건 새로운 슈퍼히로상을 만들려 고 했다는 점. 세상에... 노숙자 슈퍼히로라니... 물론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라면 장르같은 문법을 모르는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을 것이고,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런 '명화'가 나오는 일은 참 드문 일 아닌가. 또 한 가지 중요한 영화의 문법으로 '감독'을 들 수 있을텐데, 그 얘긴 나중에... 어쨌든 난 드라마나 텔레비전을 멀리 하는 편인데, 많은 시간을 요구하기도 하려니와, 당장 먹기에는 좋은, 설탕 많이 넣은 음식 같아서 그렇기도 하다. 내 음식 취향을 찾아가는 그런 재미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티비프로그램도 찾아가며 볼 수 있긴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않다. 대개 한 손에 리모콘을 들고 있거나, 적어도 손이 닿는 범위 안에 놓아 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지만... 참, 놀기 위해서도 공부해야 하다니. 직업병인가... 근처 도시로 간단한 여행을 떠날 때도 그렇지 않은가. 대략 역사, 주요 건물 건축양식이라고 알고 가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직업병? 문화병? 문명병?

스포츠와 연애의 공통점

오늘 한일전 야구 준결승 소식을 들으면 든 생각. 8회말 2대 2, 상황에서 이승엽의 홈런으로 극적인 역전. 캬... 왜 이럴 때 아나운서들이 쓰는 상투적 표현이 있지 않은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어쩜 실제로 '시청자'는 스포츠와 드라마를 같은 맥락에서 소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맥락이란 게 뭘까? 특히 전문화된 운동경기는 왜 그렇게 성공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상상하기 힘든 엄창난 액수가 오가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가? 드라마나 전문스포츠가 갖는 기능을 '예측불가능한 상황, 극적인 상황의 체험'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사회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근대화는 합리화, 분화의 과정이다. 베버는 합리화를 탈주술화, 예측가능성 증대 등으로 표현한다. 예측가능성의 극대화가 근대를 이끌어 낸 힘의 원천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비합리적으로 치부되던 모든 것들이 원천적으로 배제되거나 관리가능한 영역 안으로 포섭된다. 광기, 감정, 신분, 도덕, 육체 등등. 허나 모든 게 예측가능한 사회란 또 얼마나 지루한가. 그렇다고 우연, 예측불가능성이 과도하게 드러나는 상황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전쟁, 공황, 외환시장 붕괴 등을 생각해 보라. '재미있게'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드라마적인 요소는 있어야 하지 않은가?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욕구를 합리적인 방식, 관리가능한 범위에서 채울 수 있는 방식으로 전문 운동경기가 등장한 것은 아닌지... 드라마, 영화도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지 않는가? 누구나 불륜, 일탈, 복수 등을 꿈꾸지만 그런 욕망은 통제당한다. 안전한 방식으로 극적인 상황을 간접체험하게 해주는 기능을 하는 건 아닌지. 우리 마교수님의 지론이 '문학의 기능은 대리배설'아니었던가? 문학, 영화, 스포츠는 어짜피 '문화상품', '소비재'라는 점에서 경제체계와 연동된다.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연애도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결혼, 신분 이동 혹은 신분확인, 경제적 안정성, 경제력 확보 등에 대한 부담에서 해방된 현대 연애는 어떤 면에서 스포츠, 드라마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은 실제로 체험한다는 것. 아, 실제로 운동경기에 참여하는 것도 그런 욕망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담 결국 인간일까? 인간의 욕망? 허나 그 욕망이란 것도 본원적으로 주어진 것만은 아니니, 결론은 다시 共進化인가? 욕망과 사회의 공진화?

한국 공영방송의 미래

강형철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최근호 창비주간논평에서 한국 공영방송을 이렇게 평가한다. 우선 그동안 "KBS와 MBC 그리고 EBS라는 우수 공영방송을 가진 데에 자긍심을 느꼈"다고 얘기하면서, "한국의 공영방송은 방송 품질 면에서 서구의 우수 사례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창의력이나 건전성이 서구의 그것들에 크게 뒤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적으로 미약한 공적 재원 규모나 군부독재가 남긴 외상을 고려한다면 지난 20년간의 발전상은 사실 놀라울 정도이다. 한국의 공영방송은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역동적 사회변혁의 중심에 서서 문화적·정치적 진보에 일정부분 기여하며 서구 공영방송의 일반적 모델에 근접하는 길을 걸어왔다. 이는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정적인 일본 체제를 반영하는 데 그쳐 문화적, 정치적으로 모두 보수적이며 관료적인 색채를 띠어온 것과 대비되는 점이었다." 지속적으로 방송을 관찰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진 않지만, '어둠의 경로'를 통해 접하게 되는 프로그램들을 일별해보면 난 강교수의 평가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본 것만 언급하자면... "EBS 다큐 프라임 상황심리프로젝트: 인간의 두 얼굴" 삼부작이었다. 그 제목은 각각 1.상황의 힘, 2. 사소한 것의 기적, 3. 평범한 영웅.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상황의 힘을 실제로 실시한 다양한 실험, 국내외 자료화면, 전문가들의 발언을 토대로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실 전형적인 사회학적 주제임에도 - ethnomethodology 혹은 '사회'심리학 (not 사회'심리학') - 초대받은 사회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 심리학자, 교육학자들이 '우리도' 할 수 있는 얘기를 독점하고 있었다. 아니 사회학자가 참여했다면 더 재미있는 다큐가 되었을 것이다. 허나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이 분야를 심도있게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는 사회학자는 - 내가 아는한 - 없다. 어쨌든 EBS에게 이 한 마디는 해 주고 싶다. Weiter so!
허나 현 시국은 공영방송에 불리하고 전개되고 있다. 강교수도 "이번 KBS 사장 해임사태를 보면서 그간 공영방송에 관심을 두고 공부해온 사람으로서 착잡한 마음이 든다"고 얘기한다. "정연주 사장의 해임사태는 한국에서 어렵게 건설해온 공공영역의 가능성을 일거에 없애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권력이 쉽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 자체가 공공영역이며 공영방송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상업방송의 난립상황에서 공영방송이 방송의 표준 향상을 위해 기여하는 기능이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언젠가도 썼지만 난 이명박씨에게 빚을 진 게 있다. 내게 역사가 거꾸로 흐를 수도 있다는 귀중한 가르침을 내려주신 것이다. 또 덕분에 한국 현대사가 이뤄낸 성과가 그냥 마땅히 주어져야 할 것도 아니었고, 언제든지 뺏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내 어찌 고마워하지 않을소냐... 그들은 그 언저리에 있으면 그동안 직접 투자했던 '주주'들에게 전리금, 이익금 배당하는데 혈안이되어 최소한의 상식, 양식, 체면지키기를 포기한 집단이다. 자리챙겨주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제 본격적으로 계급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촛불시위도 그렇다. 촛불시위를 이해하고 이어나가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하다던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건의 현장에서 함께 웃고 울고 분노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대중, 언론이 잦아들 때 덩달아 말 수가 적어지면 곤란하지 않은가? 무슨 새역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그들은 모두 어디 갔는가? (아, 아애 사건의 시대사적 의의, 맥락을 좇아가지 못하는 부류는 당연 논외다). 최장집 욕하는 이들이 많은데, 내 관점에서 보면 그만한 인물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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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우울한, 아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뉴스를 또 접한다. 아... 정말이지...
"청와대가 22일 신임 KBS 사장 인선문제로 청와대 주요 인사들과 KBS 전현직 임원들이 만난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모임의 목적은 사장 인선 개입은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저를 포함해 정정길 실장과 최시중 방통위원장, 유재천 KBS 이사장 등이 만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하면서도 “그러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KBS의 공영성 회복과 방만경영 해소라고 하는 과제에 대해 방송계 원로분들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자리”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경향신문> 이날치 신문에서 지난 17일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이동관 대변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유재천 KBS 이사장 등이 서울시내 모 호텔에서 만나 KBS 신임 사장 인선과정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이번 신임 사장 공모에 응해 이사회에서 추린 5명의 후보에 포함된 김은구 전 KBS 이사도 참석했다."

2008년 8월 21일 목요일

"complexity can be handled only by complexity"

Professor Hornung, the President of the University of Marburg, acknowledged that Luhmann’s restriction to observation and non-intervention may seem to be an unaffordable luxury in crisis-ridden times. Hornung admits that sociologists “are in fact under daily pressure in our jobs to “produce” both scientific results and students to the precise profiles requested by the economy and the “market”. But he cautions against ignoring Luhmann’s lesson that “complexity can be handled only by complexity (Hornung 1998).”

좀 억지스럽긴해도 들어줄만한 변호아닌가?

君子無所爭

난 먹는 것에 그리 큰 욕심을 내지 않는 편이다. 이왕이면 가진 재료로 맛있게 해먹으려고 하고, 또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가 있으면 고마울 따름이지만, 그 이상 기를 쓰고 찾아나서지는 않는 것이다. 몇 시간 차를 타고 나가서 식재료를 구해오기, KFC를 찾아 옆도시로 원정가기, 베를린에서 도너츠 사오기 등등, 모두 내게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또 경쟁하는 걸 싫어해서 승부가 걸려있는 운동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참여하게되면 은근히 욕심을 부릴 때도 있고, 또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편이긴 하지만... 여럿이 어울려 하는 축구, 배드민튼, 탁구, 테니스 같은 운동도 승부없이 그냥 열심히 치고, 때리고, 달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승부가 결정되기까지 그 긴장감을 즐기진 않는다. 졌다고 두고 두고 분해하거나, 이길 때까지 하려드는 사람들, 잘 이해하지 못한다. 도올 선생이 올림픽에 '즈음하야' 쓴 글을 읽다가 든 생각이다.

『논어』를 펼치면 「팔일」편에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씀이 실려 있다: “군자는 다투는 법이 없다. 그러나 굳이 다투는 것을 말하자면 활쏘기 정도일 것이다. 상대방에게 읍하고 사양하면서 당에 오르고, 또 당에서 내려와 벌주를 마신다. 이러한 다툼이야말로 군자스럽지 아니한가!”(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 공자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활쏘기는 잘잘못의 결과로써 항상 자신을 반성케 만들 뿐이라는 것이다(射求正諸己). 타인을 탓할 건더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흐흐. 그렇담 이 몸은 군자 쪽????

2008년 8월 16일 토요일

"외국인 교수 22명 서울대 새로 임용"

재미있는 소식이다. 서울대가 최근 외국인 전임교수 22명의 임용을 결정했단다. 현재 서울대의 외국인 전임 교수 10여 명이 대부분 자연대·공대 소속인데 반해, 이번에는 여러 단대에 퍼져있다. 그 중 네 명이 정년보장(테뉴어)를 받았는데, 그 중에 사회학과에 오게 될 런던시티대의 앤서니 우디위스(63) 교수도 있다. 한글로 표기된 이름만 봐선 낯선데, 뭐 하던 양반인지... 명단을 대충 훓어보다 눈에 띄는 게 있다. 자연대에 임용될 제랄트 트루트나우는 현재 빌레펠트대학에 재직중이라는 것 (Gerald Trutnaut??). 그러고보니 자연대 3인이 모두 독일 대학에 재직 중이다 (나머지는 뮌헨, 튀빙엔). 음.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도... 또 앞으로 서울대는 모든 행정 공문에서 한글과 영문을 함께 표기하기로 결정했다고도 한다. 2mb정부의 영어사랑 정책과 딱 맞아떨어지니, 칭찬받겠다, 총장. 얼마전 KAIST 서남표 총장의 대학개혁에 대한 방송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 신입생들부터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한다고 하던가... 한국 대학 풍경, 참 많이 변했을 것 같긴 한데, 드문드문 들리는 이런 소식만 가지고선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그나저나 그 풍경 속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내 일로 절실히 느껴져야 할텐데, 내가 '누리는' 이 편안함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008년 8월 14일 목요일

선배, 해설위원, 일반인...그리고 상상력

올림픽 중계 방송 중에 일어난 아나운서와 해설자들의 '막말 실수'가 화제다. '매운 고추가 맵다', '태환아... 화이팅', '아이씨', '으악, 으악... 울어도 좋아요' 등등. 다채롭다. 재미거리로 기술되기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불평하는 목소리가 좀 더 큰 것 같다. 좀 더 전문적인 해설을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 스포츠 해설가는 전문직이기도 하지만, 이름이 익숙한 허구연, 신문선 등 야구, 축구 해설가들을 제외하곤 그 활동이 직업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4년에 한 번 정도 불려오는 '해설위원'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해설위원들이라고 같은 해설위원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그 자리에 불려나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되는 불쌍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해설가를 뽑는 공인된 기준이 있을리 없으니 대개 과거 금메달을 땄던 선수들이다. 좋은 선수가 좋은 감독되기가 더 어렵다고 하지 않은가. 조금만 노력하면 그 분야에 대해서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맛깔나게 해설할 수 있는 '일반인'들도 찾을 수 있을 터인데... 어쨌든 그 선배, 언니, 형, 해설위원들은 일반인, 선배, 해설가의 정체성을 매순간 자유롭게 선택하는 통에, 해설가의 본분을 잊었다는 둥 '비난'을 받는 모양이다. 억측 혹은 논리의 비약일 수 있겠으나, 난 이런 현상을 '전문가'에 대한 의미론적 정체현상의 하나라고 본다. 구조적으로 한국은 기능적으로 분화된 체계들, 조직들이 매우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 전문적인, 특화된 체계와 조직들의 작동은 그에 걸맞는 의미론의 발전과 연동되어 있다. 반드시 구조가 먼저, 의미론이 나중, 그런 건 아니지만, 한국의 경우 그 동안 일어난 구조적 변화를 의미론이 좇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 담론이 전문적 담론을 끌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매스미디어, 정치, 기타기능체계 등의 담론이 퇴행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발전된 구조에 걸맞는 의미론의 옷을 걸치고 있지 못하다. 그 갈등이 여러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촛불시위에서부타, 해설자들에 대한 불만까지... 나아가 황우석, 신정아, 디워... 모든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전문직에 대한 의미론적 지체현상과 함께 기능체계, 전문조직의 자율성에 대한 의미론도 지체현상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KBS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수장이 누구냐에 따라 KBS 방송 기조가 쉽게 바뀌지는 않은 것이다. KBS 같은 조직이 그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다. 허나 언론을 손 좀 봐줘야겠다는 발상, 무리를 해서라도 자리를 만들어 '공신'들 챙겨주려는 그 헝그리 정신, 시대정신, 역사의 흐름을 읽을 줄 모르는 그 무식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지만 가끔 무서움을 느낄 때도 있다. 설마 저러다가 정말 나라 절단내는 것 아닌지... 한국 현대사가 보여준 진보에 대한 신뢰 때문에 때로는 퇴행적인 세력들이 파멸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더 긴 역사가 보여주었던 가르침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가 그저 여러 체계들의 하나일 뿐이라고 안심할 때가 아니라는 것도... 정치를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 도대체 그 역겨운 무리들이 횡행하는 것을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단 말인가? 언론, 국회가 박살나고 있다면, 거리의 정치 밖에 없단 말인가? KBS 사건 같은 경우 사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노무현 탄핵 때처럼), 사실 그 쪽도 그리 신뢰할 곳이 못될 뿐더러 또 모든 사건을 법문제로 만들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한국에서는 왜 여론이 정당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 것일까? 정치를 어떻게 재조직해야 할 것인가? 정말 지금은 그 언제보다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대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68운동의 구호였다던 "상상력에게 권력을!"('Pouvoir à l’Imagination'/ 'Power to the Imagination')이 지금처럼 절실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한국'의 변혁운동은 이제 비로소 시작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맑스'의 변혁운동, '주체사상'의 변혁운동이 아닌, '한국', '남한'의 변혁운동 말이다.

2008년 8월 13일 수요일

올림픽을 지켜보며 중국 생각

TV가 없는 탓에 내가 지켜보는 것은 인터넷이 보여주는 올림픽이다. 생생한 현장은 못 보고 있다. 어쨌든 인터넷 혹은 IHT 지면을 통해서 올림픽을 관찰하는 내 심정은 복합적이다. 중국인들의 과도한 자부심이 빗어낸 여러 사건들이 언론에 소개된다. 과도한 인민통제, 대기정화에 쏟아붇은 눈물겨운 노력, 빈민가를 가리는 장벽, 개막식에서 립싱크한 소녀,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폭죽장면의 삽입 등등. 본질적으로 1988년 한국에서 경험한 것과 다르지 않지만 이제 그런 시기를 넘겼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우리가 중국을 보는 시선은 서구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내심 '중국때리기'를 즐긴다. 하지만 IHT 같은 미제 언론에서 그런 얘기를 읽을 때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어쩔 수 없다. 팔은 안으로 굽을 수 밖에... 중국인들의 '오버'해서 표출하는 자부심은 열등감의 이면이다. 중국 정도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아편전쟁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단 말인가? 졸부티를 내거나 혹은 졸부도 아니면서 허장성세를 부리기 보다, 좀 가난하더라도 긴 역사와 전통이 남겨 놓은 아우라를 현재화한 선비의 모습을 가질 수는 없을까? 그러고 보면 중국에도 선비전통이란 게 있는 지 모르겠다. 아니면 유교정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지도...

2008년 8월 7일 목요일

김회장의 조언

respect for people
- breack the box (도전)
- principle (원칙)
- communication (소통)

김동수 (듀폰 아시아 태평양 사장/듀폰 코리아 회장)

2008년 8월 4일 월요일

누가 油價를 움직이는가?

"현재 세계 2위의 석유소비국이 된 중국. 2005년에는 석유 소비량이 7%나 증가했다. 서구 언론들은 중국이 2015년 제1위의 소비국이 될 거라며 한결같이 고유가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석들은 현재의 유가가 급등하는 진정한 이유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석유지정학 권위자로 손꼽히는 엥달. 그는 최근 유가 급등 폭의 60% 이상이 월가의 투기 탓이라 단언한다. 미 의회 청문회에서도 현재 선물시장에서 거래되는 석유 중 실수요에 기반한 것은 고작 29%, 나머지 71%가 투기라 밝혀진 바 있다. 석유 투기의 핵심에는 서브 프라임 사태로 엄청난 손실을 입은 금융자본 회사들이 존재한다. 미리 사들인 후 예측을 발표해 급상승을 유도한 다음, 거액의 차익을 챙기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골드만삭스다. 골드만삭스는 모건스탠리와 더불어 2007년도에만 에너지부문 거리에서 15조의 순익을 냈다. 그 뒤를 따라 640 종의 헤지펀드, 연기금까지도 투기에 뛰어들었다. 유가는 돈의 힘으로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KBS에서 최근에 방영된 프로그램 소개 글 중 일부이다: "누가 유가를 움직이는가 -오일 쇼크의 배후". 유학생들 삶의 질을 떨어트린 주범 중 하나인데, 그놈에게 당하더라도 뭔가 알고 당해야 할 것 아닌가. 2MB 탓만 하는 것도 석연치 않고... 어쨌거나 금융자본이 원흉이다. 통제없이 활개치는 이런 투기자본의 위험은 심지어 소로스 같은 투기꾼마저 경고하는 판이니...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 거품 경제의 붕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고 보는 모양이다. 미국 애들, 말썽도 참 가지가지... 내년 중반까지 수백 개 미국 은행이 무너지라는 견해를 내 놓은 학자들도 있는 모양이다. 이 프로그램을 KBS가 단독으로 만들었다면, 참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공영방송이 이런 방송하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나저나 우리 맑스 형님의 혜안은 참으로 탁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담 우린 '무엇을 할 것인가?' 형님의 조언을 좇아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게 근본적 대안이겠으나, 당장은'석유의존도'를 줄이는 '소심한' 대안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겠다. 환경운동? 이제 제 무대를 만난 것 아닌가? 허나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한국의 녹색전사들은 꽤 지쳐보인다. 기후변화, 광우병, 에너지 문제까지 호재들이 널렸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MB치하에서 녹색정치가 탄력받기는 더 힘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늘 더 급한 문제들에 밀리지 않았던가... 어떤 면에서 한국 정치는 민주화 운동하던 80년대로 회귀했다.

나는 왜 사회학을 하는가?

"<창작과비평>의 백낙청은 오래 전에 '나는 왜 영문학을 하는가?' 하는 화두를 집어 들면서 '他山之石'과 '以夷制夷'라는 말을 쓴 바 있다. 일단은 쉬운 용어들이다. '타산지석'은 남의 일을 면밀히 살펴 나의 일을 성찰하는 것이고 '이이제이'는 오랑캐로써 다른 오랑캐의 화를 모면케 한다는 뜻인데, 백낙청은 이를 영문학 공부의 화두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영문학은, 외국 문학 혹은 더 확대하여 외국 학문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 백낙청은 영문학(외국문학 혹은 외국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보다 좀더 일찍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 서구가 어떤 역사적, 사회적, 인간적 문제를 겪었으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자 했는가를 알기 위하여(타산지석), 그리고 자본주의 종주국들 내부에서 비합리적이며 비인간적인 억압의 본질과 그것의 해결을 위해 노력한 결실들을 이해하고 적극 지지하기 위하여(이이제이) 영문학을 공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영문학은 영어권 문학이 아니라 결국 우리 삶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윤수라는 잡학가의 블로그에서 읽은 내용이다. 불문학자 김현도 비슷한 얘길했던 것 같고, 그런 입장에서 공부하고 글을 썼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니, 어디 이들 뿐이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서구학문을 할 수 밖에 없는 비서구 출신들 고민의 색깔이야 비슷하리라.

2008년 8월 2일 토요일

용산 전자상가 망해간답니다...ㅎㅎ


모처럼 큰 소리로 웃게 만든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