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중계 방송 중에 일어난 아나운서와 해설자들의 '막말 실수'가 화제다. '매운 고추가 맵다', '태환아... 화이팅', '아이씨', '으악, 으악... 울어도 좋아요' 등등. 다채롭다. 재미거리로 기술되기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불평하는 목소리가 좀 더 큰 것 같다. 좀 더 전문적인 해설을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 스포츠 해설가는 전문직이기도 하지만, 이름이 익숙한 허구연, 신문선 등 야구, 축구 해설가들을 제외하곤 그 활동이 직업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4년에 한 번 정도 불려오는 '해설위원'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해설위원들이라고 같은 해설위원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그 자리에 불려나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되는 불쌍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해설가를 뽑는 공인된 기준이 있을리 없으니 대개 과거 금메달을 땄던 선수들이다. 좋은 선수가 좋은 감독되기가 더 어렵다고 하지 않은가. 조금만 노력하면 그 분야에 대해서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맛깔나게 해설할 수 있는 '일반인'들도 찾을 수 있을 터인데... 어쨌든 그 선배, 언니, 형, 해설위원들은 일반인, 선배, 해설가의 정체성을 매순간 자유롭게 선택하는 통에, 해설가의 본분을 잊었다는 둥 '비난'을 받는 모양이다. 억측 혹은 논리의 비약일 수 있겠으나, 난 이런 현상을 '전문가'에 대한 의미론적 정체현상의 하나라고 본다. 구조적으로 한국은 기능적으로 분화된 체계들, 조직들이 매우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 전문적인, 특화된 체계와 조직들의 작동은 그에 걸맞는 의미론의 발전과 연동되어 있다. 반드시 구조가 먼저, 의미론이 나중, 그런 건 아니지만, 한국의 경우 그 동안 일어난 구조적 변화를 의미론이 좇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 담론이 전문적 담론을 끌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매스미디어, 정치, 기타기능체계 등의 담론이 퇴행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발전된 구조에 걸맞는 의미론의 옷을 걸치고 있지 못하다. 그 갈등이 여러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촛불시위에서부타, 해설자들에 대한 불만까지... 나아가 황우석, 신정아, 디워... 모든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전문직에 대한 의미론적 지체현상과 함께 기능체계, 전문조직의 자율성에 대한 의미론도 지체현상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KBS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수장이 누구냐에 따라 KBS 방송 기조가 쉽게 바뀌지는 않은 것이다. KBS 같은 조직이 그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다. 허나 언론을 손 좀 봐줘야겠다는 발상, 무리를 해서라도 자리를 만들어 '공신'들 챙겨주려는 그 헝그리 정신, 시대정신, 역사의 흐름을 읽을 줄 모르는 그 무식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지만 가끔 무서움을 느낄 때도 있다. 설마 저러다가 정말 나라 절단내는 것 아닌지... 한국 현대사가 보여준 진보에 대한 신뢰 때문에 때로는 퇴행적인 세력들이 파멸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더 긴 역사가 보여주었던 가르침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가 그저 여러 체계들의 하나일 뿐이라고 안심할 때가 아니라는 것도... 정치를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 도대체 그 역겨운 무리들이 횡행하는 것을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단 말인가? 언론, 국회가 박살나고 있다면, 거리의 정치 밖에 없단 말인가? KBS 사건 같은 경우 사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노무현 탄핵 때처럼), 사실 그 쪽도 그리 신뢰할 곳이 못될 뿐더러 또 모든 사건을 법문제로 만들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한국에서는 왜 여론이 정당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 것일까? 정치를 어떻게 재조직해야 할 것인가? 정말 지금은 그 언제보다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대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68운동의 구호였다던 "상상력에게 권력을!"('Pouvoir à l’Imagination'/ 'Power to the Imagination')이 지금처럼 절실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한국'의 변혁운동은 이제 비로소 시작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맑스'의 변혁운동, '주체사상'의 변혁운동이 아닌, '한국', '남한'의 변혁운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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