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30일 화요일

'친구' 의미론의 진화 혹은 우정의 불가능성

友情에 대해서는 동서고금 여러 사람들이 '논'하였다. 유명한 키케로의 우정론도 있고, 연암 박지원 선생도 우정에 대해 한 말씀 남기신 모양이다. "우정이 있는 게 아니라, 가끔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한 작가가 있다고도 하고, 그 얘기를 자신의 우정론 앞머리에 꺼낸 김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를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같이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의내린다. 우정에 대한 담론이 활발했던 시기는 분명히 친구 관계가 가져오는 영향이 컸고 관련된 문제도 많이 드러났던 시기였을거라고 추측해 본다 [기존 담론, 의미론 연구의 결과를 원용해 보자면 말이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親舊, 벗. 이런 단어들이 촌스럽게 들리기 시작한다. 왜 사람들은 특정한 유형의 관계를 친구, 우정이라는 의미론을 사용해서 기술하는가? 왜 친구 의미론은 달라지는가? 자, 우선 방법론에 대해 고찰을 해보자. 우리가 우정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경우 본질적인 그 무엇이 있어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탐구하고, 분석하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정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담론을 추적하고, 발굴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우정의 의미론이 문화권마다 다르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있다. 독일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이미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고, 한 번은 오해를 불러 일으켜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한국사람들은 독일인들에 비해서 대개 친구를 좀 더 폭 넓게 정의하는 것 같다. 어쩌면 개인주의가 훨씬 강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일대일 관계를 훨씬 더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또 친구는 철저하게 사적 관계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exklusive Semantik der Frendschaft).한국 사람들은 그 보다는 집단 속에서 개인이 규정되기가 쉽고, 사적관계가 공적관계로 쉽게 전환되는 편이다. 그래서 집단 혹은 연결망 속에서 알게 된 관계 - 일대일 관계가 매우 희박할지라도 - 도 친구관계로 묶어두는 게 유리할 때가 많은 것이다 (inklusive Semantik der Freundschaft). 이런 다른 의미론은 실제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Diskursive Praxis. 담론과 프락시스는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대개 한국사람이 그런 것처럼 친구관계를 넓게 정의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구분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진정한 친구, 참친구 등등 친구를 수식하는 말이 필요하다. 그렇담 진정한 친구, 참친구가 구분의 한 면이라면 다른 면은? 진정하지 않은 거짓 친구? 흠. 그건 좀 그렇고... 덜 진정한 친구 정도 되지 않을까? 어쨌든 내 경우에는 서로 비밀을 나누거나 약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좀 '진한' 친구관계라고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천성적으로 자기 얘기를 잘 하는 경우가 있긴하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나중에 뒤통수 맞는 경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어떻게 이해될지 생각해봐야 하고, 나에 대해서 나중에 뭐라고 할 지 예지력까지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걸 친밀한 관계, 우정이라고 얘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 신뢰. 믿을만하다는 것, 그건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카니즘이다. 신뢰는 곧 예측가능성, 복잡성 감소의 메카니즘이기도 하다. 뒤통수 맞는 일은 바로 이 신뢰가 깨지는 것. 내가 무심코 드러낸 약점이 어느 순간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일. 이중, 삼중, 사중... 우연성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 너무 솔직해서는 곤란하다. 늘 여러 가면을 들고 다녀야 하는 것. 심지어 피곤할 때는 그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는 가면도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하고... 정도의 차이일 뿐,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맨얼굴을 보여주지 못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짐승이다. 여러 가면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맨얼굴 보는 일이 부담스러워진다. 가끔 맨얼굴 보였다가 그게 화근이 되는 경험이라도 몇 번하게 되면 이제 더 꼭꼭 숨긴다. 가면을 쓴 우리들에겐 가끔 '자유인'이라고 등장하는... 예를 들어 전인권 같은... 이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이다. 바로 이 가면을 벗지 못하는 한 우정은... 없다.

壁路, 월스트리트...

왜 미국이 요새 저토록 체면을 구기고 있나. 최종 책임은 금융자본에 물어야 하는 것 같다. 그 월가 사람들... [월가란 이름은 오래 전 뉴욕의 맨해턴 남부에 인디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높은 담을 쌓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맑스 형님 말씀처럼 자본주의의 진화의 종착지가 '금융자본주의'이고 경제공황은 불가피하다고 소비에트 경제학 원론에 나올 테제를 반복할 수 있겠으나, 너무 큰 얘기라 불만족스럽다. 미국 은행이나 금융시장 구조가 그렇게 부실했던가? 왜 이제서 이렇게 난리법석인가? 나름대로 한 경제학 하셨던 조순 형님이 한 말씀 거드셨다. 한겨레 신문을 통해...

"미국은 원래, 금융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나라였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 흥청망청하는 국민이 아니다. 그런 미국에 왜 이런 거품이 생겼는가. 그 이유는 1980년대 말부터 경제정책의 중점이 ‘메인스트리트’로부터 ‘월스트리트’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월가출신 인물이 계속 중앙은행 총재 자리를 지켰다. 재무장관도 월가 출신이 많았다. 경제정책의 기조는 월가의 이익이 되도록, 가급적 유동성을 많이 공급하여 자산시장을 부추겼다. 종래 경제정책의 중점이었던 산업구조, 국제수지, 사회보장, 서민생활 등은 사각지대로 물러났다.

월가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금융에 대한 기본을 망각했다. 원래 금융업이란 남의 돈을 가지고 차질없이 운영해야 하는 기업이다. 때문에 좋은 금융가는 보수적이어야 하고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월가 사람들은 너무 자유롭게 자기 이익만 챙겼다. 그러다가 이번의 덜컥수에 걸렸다. 그린스펀 전 연준의장은 최근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금융에 작동해야 경제가 잘 된다는 말을 했다. 19년이나 중앙은행 총재직을 지킨 사람이 이런 글을 쓰다니,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였다. 아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소련이 망한 후로 1990년대 미국에는 장밋빛 도취감이 감돌았다. 이제, 전쟁과 혼란의 역사는 끝났다, 자유방임을 하면 다 잘 된다,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 경상수지 적자 따위는 문제 없다, 기업은 주가를 올리면 된다, 이런 식이었다. 자유화, 개방화, 민영화, 작은 정부면 그만이라는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 확산됐다. 남미, 아시아, 러시아 등의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월가의 금융꾼들은 많은 이익을 챙겼다.

아! 그러나, 인간의 시야는 짧은데 비해 세상은 빨리 변한다. 환락이 지나치면, 비애가 온다. 미국경제가 부메랑 효과를 맞았다. 개도국이나 맞아야 할 ‘국제통화기금(IMF) 폭탄’을 미국이 맞은 셈이다.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했다. 5대 투자은행이 거의 다 몰락했다.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 에이아이지(AIG)가 ‘구제’를 받았다."

말[言] 그리고 글

말[言]. 참 다스리기 어려운 '놈'이다. 말 자체는 의사소통 수단일 따름이니까 사실 어려운 것은 말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대화라고 해야 옳겠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대화 상황에서 적절하게 말하는 것,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화법(話法), 화술(話術)이라는 표현이 있을까. 현대의 그 복잡다난한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마스터하면서 큰 무리없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 그것만으로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들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여러 가면(persona)을 가지고 다니며 상황에 맞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친밀도를 상중하로 나눌 때 가장 대화에 신경쓰이는 경우는 중급일 것이다. 친밀도가 낮은 경우야 매우 의례적인 대화상황으로 끝날 때가 많고, 친밀도가 높은 경우 비대화상황이 대화상황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화상황 자체의 중요도는 떨어진다. 친밀도가 중간 정도일 경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숙련된 의사소통 기술을 갖추어야 한다. 인간관계나 화법에 대한 책자들이 대부분 권고하는대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진심으로 대하는 것.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 호감을 그대로 확장시켜나가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 어떻게든 장점, 좋은 점들을 찾으려고 해야 할 것이고, 그것도 힘들 때는 오히려 접촉 기회를 줄이는게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호감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대화 상황에 억지로 참여하게 될 때는 자주 탈이 난다. 서로 공감하는 영역이 적을수록 그럴 위험이 더 커지는 것같다. 특히 외국인들과 관계에서. 친밀도가 낮은 경우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인사하고 안부 묻는 일 정도는 쉽게 마스터할 수 있지 않은가. 조금 더 친밀한 단계를 향해 갈 때, 자, 이제 길 곳곳에 장애물들이 놓여있다. 공유하는 지식의 범위가 다르고, 제2 혹은 심지어 제3 외국어를 가지고 의사소통 할 때 오해의 가능성, 의사소통이 실패할 가능성은 급격히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 탓, 서로 다른 문화 탓을 해보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결론은 마음에 있는 것 같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대와는 어찌되었건 대화가 잘 되지 않는가. 국적을 불문하고 말이다. 당연히 긍정적인 얘기를 나누려고 할 것이며,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도 더 좋은 해석을 취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호감과는 거리가 먼 상대와 대화를 하거나,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닐 경우, 그런 대화 상황은 가능한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피할 수 없다면 대화에 참여하더라도 아애 말수를 줄이던지. 물론 궁극적인 해결책은 好感에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일 터.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까다롭거나, 비판적이지 않도록 애쓸 일이다.
대화상황에서 화를 내야 할 시점을 잘 놓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 혼자서 씩씩거리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그 때 했어야 할 말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를 때 참 괴롭고, 어떻게 풀어야 할 지 얼마나 난감한지 알 사람은 안다. 허나 할 말 다하는 것 보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더 나은 것 같다. 화가 났을 때 나오는 말이 얼마나 날카롭겠는가. 물론 매번 타이밍을 놓치고서 답답함을 풀지 못한 채 쌓아둬야 한다면 속병이 되겠지만... 역시 음식이건 말이건 잘 소화해야 뒤탈이 없다.
말의 어려움을 경험한 뒤에야 글의 힘, 그리고 글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의 장점을 새삼 인정하게 된다. 말이 주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되는 상황이 대표적으로 대면의사소통, interaction인데 그 상황에서는 말을 통한 정보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비언어적 정보들이 주어진다. 물론 글에 대해서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해석해야 할 정보의 복잡성은 급속도로 줄어든다. 말로 쌓인 문제를 굳이 말로 풀 필요는 전혀 없다. 글이 갖는 독특한 효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과제....

2008년 9월 25일 목요일

自淨능력

自淨능력이란 표현은 '하천의 자정능력'처럼 주로 자연현상과 관련된 상황을 설명할 때 자주 접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한 기술에서도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개인에 대해서는 쓰지 않고 자정능력을 갖추도록 기대되는 단위는 조직이나 종교, 과학 등 기능체계인 것 같다. 황우석 사태가 마무리된 후 '우리 과학계'가 자정능력을 갖춘 탓이라며 뿌듯해 하는 목소리를 듣기도 했고, 벌써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아 그렇지, 김용철 변호사가 로비 비리를 폭로했을 때 우린 삼성엔 자정능력이 없다고 얘기했다. 오늘 확인한 뉴스앤조이 기사는 교회의 자정능력을 얘기한다. "김국도 낙마, 교회 자정능력 현주소"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선거를 앞두고 후보였던 김국도 목사를 두고 다른 후보 3명이 ‘김국도 목사 후보등록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으며 서울중앙지법이 ‘교단이 후보 자격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는 것이다. 감리회의 교회법은 후보 자격을 ‘교회재판법이나 사회재판법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실이 없는 이’로 정하고 있는데, 김 목사는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으로 1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은 전력이 있으므로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것. 허나 감리회 현집행부는 막강파워 '도'자 돌림 형제의 일원인 김목사에게 교회법을 무시하고 후보자격을 부여했다가 결국 법원 판결로 얼굴 구기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법'의 기능이 얼마나 화려한지, 다시 한 번 경탄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어쨌든 '자정능력', 그리고 마찬가지 맥락에서 '윤리' 같은 의미론의 활발한 사용은 -윤리경영, 연구윤리, 국회 윤리위원회 등등 - 내가 보기에는 분명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기능적 분화에 대한 의미론의 추적.
-----
9월 29일자 보도를 보니 선거는 끝났는데 두 명의 감독회장 후보가 서로 당선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혼란 중에 선거위원장이 바뀌었는데 신구 선거위원장이 다른 두 목사에게 당선증을 주었다는 것. 참으로 可觀이고 漸入佳境이다.

2008년 9월 24일 수요일

MB 앨범 발매!! (2008, blue house production) ^^

■이명박 Vol. 1. 거짓말

01. 시대 유감 (feat. 어청수)
02. 거짓말 (feat. 강만수)
03. 날 닮은 너 (feat. 전두환, 김영삼)
04. 거꾸로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두환처럼
05. 너에게 속았다 (feat. 대한민국 국민)
06. 제리제리고고
07.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feat. 노태우)
08. 탓 (to 노무현)
09. 이중인격자 (feat. 한나라당 알바)
10. 세월이 가면
11. 잘못된 만남 (feat. 대한민국 국민)
12. 슬퍼지려 하기 전에
13. 너이길 원했던 이유 (feat. 경제 박사)
14. 우리 사랑 이대로 (feat. 노노데모)

스페셜 트랙
1. 가스펠 서울봉헌가
2. 오해야~(feat. 어린쥐)

■이명박 Single: 지역 감정

01. 화개장터
02. 화개장터 Remix ver.

■이명박 Vol. 2. 핑계

01. 주님은 천원을 원하지 않죠 (feat. 소망교회 어린이 합창단)
02. 커플 (feat. 강만수)
03. 아름다운 구속 (feat. 어청수)
04. 제자리 걸음 (feat. 강만수)
05. 변명
06. 체념 (feat. 대한민국 국민)
07. 머니 (feat. 강부자)
08. 내가 쓰는 기록 (feat. 이신바예바)
09. 나는 문제 없어 (feat. 미국소)
10. 포기하지마 (feat. 정대만)
11. 핑계
12. Get Show (feat. 자전거)
13. 대화가 필요해
14. 날 닮은 너 Remix ver. (feat. 김정일. 허정무)
15. 내게 남은 사랑을 다 줄게 (feat. 조지 W 부시)

(source 생략)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한국에 시민사회는 있는가?

시민사회라...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진 이후 국내 (진보?) 사회과학계는 맑시즘이 빠져나간 그 빈자리를 이 '시민사회론'에 내주었다. '민중' 혹은 '노동자계급'이 '시민'/ '시민사회'라는 좀 덜 부담스러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시민사회'는 있어줘야될 것 같은 사회과학적 카데고리에서 꽤나 설득력있는 설명변수로 자리잡았다. 그래도 한국에 시민사회가 있으냐 없으냐는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물론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시민사회를 얘기하는 것인가? 시민사회가 잃어버린 멘자카드 찾듯이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시민사회라는 담론이 시민사회를 만들어 내는 측면도 분명히 얘기할 수 있다. 사회과학자들이 한국에 시민사회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주제로 견해가 갈린다고 할 때, 우리는 대개 주로 잘 알려지고 정식화된 어떤 '시민사회' 모델을 상정하고 그런 시민사회 모델의 특징을 한국에서도 발견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논쟁한다고 봐주면 된다. 오늘 한겨레를 거쳐 박노자씨 글방에 들어가 보게 되었다. 난 박노자씨를 기본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편이다. 정통 맑시스트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서 공감하지 못할 때가 종종있긴 하지만, 그렇게 분명한 태도를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것,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이라고 높이 사려는 편이기도 하고. 허나 오늘 읽은 글에 나오는 한국 시민사회에 대해서 언급하는 구절은 영 불편하다:

"필자에게 송두율 교수가 프라하의 한 학회에서 1995년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이란 "시민사회"라기보다는 각종 유사 가족적 연고집단의 결합체입니다. 그 중에서는 제일 큰 것은 "단군의 후손들'이라는 "민족적 대가족"이지만, 또 그 안에서는 동문 집단마다, 지역마다, 하다 못해 대기업의 중년 남성 정규직 노동자의 집단마다 다 그 강력한 집단적 정체성과 이해관계 의식이 형성돼 있지요. 그리고 그 연고적 소집단의 단결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시자면 "이명박 동문"을 찍어주는 "진보적" 고대 출신들의 행태 정도를 관찰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공동체는 이 땅에서 수천년 존재해왔지만 "계급'이라는 일본식 번역어가 수입된 지 100년 정도 된 것입니다. 그것도 학교 교과서에서 아직까지도 - "민족"과 달리 - 많이 안나오는 단어인지라 뭇 인간들의 머리 속에서 뿌리 내리기 힘들죠."

박노자씨의 글 밑에 historian이란 이가 달아 놓은 글에 공감이 가 일부 인용한다.

"일단 "필자에게 송두율 교수가 프라하의 한 학회에서 1995년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이란 "시민사회"라기보다는 각종 유사 가족적 연고집단의 결합체입니다."라고 쓰신 부분은 좀 딴지를 달고 싶습니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가 독일에 있을때 송두율 교수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 중 '시민사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송두율 교수가 당장 말을 끊으면서 "아니 우리나라에 무슨 시민사회가 있다고 시민사회 이야기를 하십니까?"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진중권 교수가 "아! 이 양반이 한국을 오랫동안 떠나 있어 한국실정을 전혀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했답니다.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계 좌파지식인과 북미에 거주하는 자영업자 교포들의 보수우파적 성향은 물과 기름처럼 확연히 다르지만 '한국비하'내지는 '무지'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송두율 교수의 저 발언은 "한국같이 가난한 나라에 베스킨라빈스 같은 고급(?) 아이스크림 가게가 다 있느냐?"고 물었다는 어느 재미교포의 무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정말 송두율 교수와 박노자 선생의 견해가 옳다면 지난 촛불집회는 뭐고 참여연대는 뭐고 경실련은 뭡니까? 이것도 유사 가족적 연고단체란 말인지요? "

송두율 교수야 한국에 대해 쌓인 게 많고 당한 게 많아서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한국에서 떨어져 산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던가. 외부에서 오히려 한국을 더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적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현실감을 잃게 되는데 아무래도 후자 쪽이 아닌가 싶다. 독일에서 산 지 수십년된 교민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아무리 자주 한국에 다녀도 아주 독특한 한국관을 가지고 계시지 않은가. 송두율, 박노자 교수의 입장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럼 독일 혹은 노르웨이에는 시민사회가 있는가? 도대체 독일 어디에서 한국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시민사회를 찾을 수 있는가? 오히려 나는 독일이건 한국이건 시민사회란 개념 자체가 낡은 유럽적 의미론에 불과하다고 보는 루만의 관찰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대한 애증, 자부심과 비하 사이에서 겪는 혼란을 외국에서 오래 산 [누구 표현대로 '장기수' '반열'에 오른] 이들이라면 드물지 않게 경험한다. 열심히 한국 [어떤 한국?] 욕을 하다가도, 누가 맞장구치면 다시 한국 편을 들기도 하는... 외부 관찰자의 시각은 왠지 다를 수 밖에 없다. 한국에 돌아가서 내부자가된 독일 유학 선배들을 만날 때 느끼는 은근한 이질감의 근원도 거기에서 찾아야 할 듯.

[p.s.] 박노자 교수가 시민사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조금 더 분명하게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다 (여기).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글과 이전 글에 달린 논평을 읽어보니, 박교수와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시민사회에 대한 대단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을 "defekte Demokratie"라고 분류하던 학자들이 있는데 (Croissant et al.) 박교수, 송교수 입장이 바로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독일, 미국엔 시민사회가 발달해서 'defekt' 되지 않은 'ordenltich'한 민주주의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가? 과도한 자부심, 민족주의도 문제지만, 겸손이 지나쳐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도 없다.

2008년 9월 18일 목요일

과학지식/ 일상지식

„Das wissenschaftliche Wissen ist weniger sicher als das Alltagswissen. In der Interpretation von Wahrnehmungen des Alltags entstehen normalerweise keine Zweifel.“ (Luhmann 1990 WissG: 325)

Jeff Buckley - hallelujah

서른 살이 되던 해 수영하다 익사한 제프 버클리 (1966 - 1997). 생전에 낸 유일한 앨범 'Grace' (1994)에 실린 노래. 원래 Leonard Cohen이 부른 노래이나 Cohen 스스로 자신의 노래보다 제프 버클리 버전이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리메이크.

2008년 9월 17일 수요일

남 그리고 여

여자 「자동차 시동이 안 걸려」
남자 「그래? 배터리 나간거 아냐? 라이트는 켜져?」
여자 「어제까지는 제대로 됐는데. 왜 갑자기 시동이 안 걸리지?」
남자 「엔진 트러블이면 곤란한데. 일단 배터리 문제인가부터 확인해 봐. 라이트는 들어와?」
여자 「아이 참, 나 오늘 OO까지 가야되는데! 차 없으면 안 되는데...」
남자 「그거 큰일이네. 어때? 라이트는 켜져?」
여자 「아 분명히 어제 탔을 때는 괜찮았는데, 히잉. 이 고물차! 이럴 줄 알았으면 차 안 바꾸는건데!」
남자 「라이트는 켜져? 안 켜지는거야?」
여자 「O시에 약속이니까 아직 시간은 있지만, 걸어서 가기에는 넘 멀어~」
남자 「그래. 그런데 라이트는 어때? 켜져?」
여자 「응? 미안, 잘 안 들렸어」
남자 「아, 뭐, 라이트는 켜져?」
여자 「왜?」 남자 「아, 시동 안 걸리는 거 아니야? 배터리 나가서 그러는 걸 수도 있으니까」 여자 「무슨 말이야?」
남자 「응?」
여자 「에?」
남자 「자동차 배터리 나갔을 수도 있으니까, 그거 확인부터 해보자구. 라이트 켜 봐」
여자 「그게 왜? 배터리 방전됐으면 라이트 안 켜지잖아?」
남자 「아니, 그러니까. 그걸 알아보려는 거니까 라이트 좀 켜 봐」
여자 「혹시 지금 화내고 있는 거야?」
남자 「아니 별로 화 안 났어」
여자 「화내고 있잖아. 왜 화 내?」
남자 「그러니까, 화 안 났다고」
여자 「뭐 내가 잘못했어? 말하면 사과할께」
남자 「괜찮아. 화 안 났어. 괜찮아, 괜찮으니까」
여자 「뭐가 괜찮은데?」
남자 「휴~ 아냐 배터리 말한거야」
여자 「차 이야기하는거야?」
남자 「아 그래, 차 이야기」
여자 「지금 차가 중요해? 」

도대체이 남녀는 왜 동문서답하다가 결국 싸움에 이르게 된 걸까? 정답은 여기 해설 사이트에서.

2008년 9월 16일 화요일

'벌침'이 부른 '내 마음의 모습'

청명한 가을이 아닌 스산한, 쓸쓸한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 Sting이 1993년 발표한 앨범 'ten summoner's tales' 중 9번째 이야기 'shape of my heart'. 영화 '레옹'(1994)에 삽입되어 유명해졌지만 막상 OST 앨범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ps 1) 박목월 시인이 남겼고 그 아들 박동규 교수가 이어가고 있는 시잡지 ‘심상(心象)’이 있다고 한다. 그 '심상'이 바로 '마음의 모습' 아닌가... 비슷한 표현을 공유하고 있는 건가?
ps 2) 이 노래 전주만 들어도 가슴이 싸해지곤 했는데, 요샌 더 이상 그렇질 않다. 그리 자주 듣지도 않았는데... 노래 약발이 다된 건지, 아님 요즘 너무 편해졌나? 그 싸한 느낌을 즐기곤 했는데... 아쉽다... 다른 노래를 발굴해야 할까? (2010.01.)

2008년 9월 15일 월요일

정치의 미학: 公益, 私益 사이에서 균형잡기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Who Killed the Electric Car)"(2006)란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영화는 캘리포니아 헐리우드 포에버 묘지에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 갖는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한다.제네랄 모터스가 개발한 전기 자동차 EV1는 1996년 캘리포니아 도로 곳곳에서 발견되었다가 10여년 후엔 거리에서 그 자취가 사라졌다. 첫 장면 장례식의 주인공은 바로 그 EV1인 것. 도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누가 전기자동차를 사라지게 했는가?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영화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제너럴모터스에서 개발하고 시중에 내놓은 전기자동차 EV1은 단순히 자동차를 팔아서 수익을 올리기 위함이 아니었고, 100조 달러의 어마어마한 시장을 가지고 있는 석유회사들이 전기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시장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응했다는 것. 지미 카터에서 레이건, 클린턴, 부시 대통령에 이르는 정책 변화와 그에 맞물려 있는 자동차 회사들의 이해관계와 로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전기 자동차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소개한다. 놀랍게도 개발사인 제너럴모터스도 여기에 큰 몫을 담당했다는 점이 의외이다. 이 회사는 목적은 애초 자동차 판매가 아닌 전기 에너지를 동력으로 전환하는 독점 기술을 확보하려는 것이었고, 그 계획은 단기간 내에 수익을 내기 힘들다는 이사회의 결정으로 종말을 맞게 되었다고."대기업과 정치의 관계를 성찰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영화다.
최근호 한겨레 21의 한 기사는 도로에 편중된 한국 공공 교통 정책을 다루고 있는데, 그 기사를 읽으면서 난 이 영화를 떠올렸다. "단위면적당 고속도로와 국도의 연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6위에 올라있다. 2001~2005년 정부의 교통시설 투자 현황을 보면, 총 66조7594억원 가운데 도로에 투자된 비율은 59%였고, 철도는 22%에 불과했다. 2008년 교통시설 투자도 비슷하다. 여전히 도로 부문이 50%에 이르고, 철도는 그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2007년 한 해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광역도로 등 481개의 도로 건설에 투자한 예산은 7조원에 이른다. 반면 철도는 수십 년 동안 제자리다. 2005년 말 현재 철도 연장은 총 3392km인데, 이는 25년 전인 1980년에 비해 약 260km 증가한 수치다. 2004년 기준 도로의 여객수송 분담률은 82%인데, 철도는 15%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여전히 도로와 자동차 중심의 교통체계를 버리지 못하고 국제사회의 흐름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도로로 먹고사는 왜곡된 카르텔의 구조가 너무 크고 강하기 때문이다. 국토해양부를 중심으로 건설업계과 자동차업계, 또 여기에 기대 살아가는 관련 전문가 그룹 등이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기업, 행정당국에 모든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 교통정체를 예견하면서도 굳이 자동차를 끌고 도로로 나서게 만드는 자동차가 주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이다. 내가 좌우할 수 있는 공간을 갖는다는 것, 쉽게 떨쳐내기 힘든 유혹이다 (mobility!). 그러니 독일처럼 철도 교통이 발달한 나라에서도 자가용 운전자들을 철도를 비롯한 대중교통으로 유인하기 위해 갖가지 유인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한겨레 기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공공성과 경제성, 에너지 효율, 환경보존 등 모든 방면에서 철도와 도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건 자명하지만, 실제로 그런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이런 일을 하도록 정치, 행정이 있는 것 아닌가?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할 수 있는 여러 이익집단들, 혹은 공익에 관심이 없는 시민들의 이기적 행동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공익'의 실현을 우리는 공공 정책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기대 혹은 하나의 이상형이겠지만... 전기자동차의 죽음 혹은 도로중심 정책이 시사하는 것처럼 국가는 실제로 대기업, 자본가들의 이해에 크게 좌우된다. [물론, 공익과 사익의 경계는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전기자동차를 도입하거나, 도로보다는 철도에 투자하는 게 더 공익에 부합한다는 것도 하나의 해석일 따름이다. 사익이 공익이기도 한 경우가 많다. 기업은 곧 고용 혹 세금납부 등의 형태로 공익에 이바지한다. 그런 공익/사익 구분 자체가 갖는 배제적 혹은 포섭적 속성을 들추어내는 것도 재미있고 또한 유익한 작업이리라. 허나 누구에게 유익한?]
난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맑스 형님의 혜안에 크게 감탄하는 편인데, 기업, 재벌, 자본가들의 영향력이란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한국은 그 동안 이런 전형적인 자본제적 사회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거론되었다. 자본가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기는 커녕 한국에서 국가는 오랫동안 사기업의 명운을 좌우하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일군의 학자들은 이런 국가를 발전국가로 부르며 경제중심적인 사회이해를 수정하도록 요구했다 (Bringing 'the state' back in!).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게 일제시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에선 지주계급의 물적 토대가 크게 무너졌고 (이승만 정권이 울며겨자먹기로 시행했던 농지개혁도 일조했을 것이다), 자본가라고 할만한 이들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발전국가가 키워낸 재벌들은 이제 오히려 국가를 좌우하려고 든다 ('삼성공화국'! 혹은 '토건국가'). 이제 발전국가 모델은 버리고 국가는 사익실현의 원칙을 마련해 주고 그 과정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공익을 의제화하고 실현하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발전국가도 아닌, 그렇다고 신자유주의 국가도 아닌, 정체성 혼란을 보이는, 아니 그런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우리의 '실용정부'는 어쩌면 현대 국가가 보여주는 최악의 사례를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OECD 국가급에서 말이다). 복잡성이 여러 겹을 이루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철학의 부재가 능력의 부재보다 훨씬 더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2008년 9월 12일 금요일

국가연구개발촉진법?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법인가? '국가연구개발촉진법'이라니? 각종 과학, 기술 관련 진흥법이 모자라서 또? "교육과학기술부는 국가연구개발 관리제도의 선진화를 위해 제정ㆍ추진 중인「국가연구개발촉진법」에 대하여 대학ㆍ출연연ㆍ기업 등 국가연구개발사업에 관련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o 9월 11일(목) 14:00부터 서울팔래스호텔 로얄볼룸에서 ‘국가연구개발촉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한다."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니 그리 흥분할 일만은 아니다. " '국가연구개발촉진법'은 그동안 국가연구개발관리에 관한 기본법의 부재로 인해 부처별로 상이한 연구개발관리제도가 운용됨에 따라 발생하는 비효율과 규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연구자 친화적인 관리체계로 재정립하기 위해 제정ㆍ추진되는 범부처 국가연구개발 통합근거 법률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공적 연구 관리 체계를 정비하겠다는 얘기다. 현황이 어떤 지 잘는 모르겠지만, 필요할 수 있겠다 싶다. 허나 그걸 굳이 법으로까지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여튼 법만들기 좋아한다니까. 한국에 법만능주의가 오히려 판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거버넌스 메카니즘이 발달하지 못한 탓이다. 자율규제 전통이 매우 취약한 것이다.
그리고 법이름이 그게 뭔가? 80년대 중반 '유전공학육성법' 만들던 그 정신세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더군다나 보아하니 법제정의 직접적인 취지는 '촉진'과 거리가 먼데도... '연구개발' 관련된 것이라면 '촉진' '진흥'을 가져다 붙여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일까? '과학기술'이라고 하지 않고 '연구개발'이라고 표현한 것은 적절한 것 같긴 하다만. 그토록 치열하게 황우석 사태를 겪고서도 '과학, 연구'에 대한 공적 논의 수준이 그리 향상된 것 같지 않아서 우울하다.

Lebensthema

일주일 쯤 전 학문에 投身한 (<-- 적어도 현재 상태로 보아 ^^) 이들과 더불어 늦은 밤까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어찌하다 "Lebensthema"가 話題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이영미라는 대중가요 연구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수들 사생활이나 무대 뒷얘기를 들려주는 이들이 평론가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던 시절, 그이는 최초로 대중가요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했던, 한 마디로 '선구자'였다. 이미 내가 한국에서 대학다니던 시절에 정태춘 평전 두 권을 냈으니까.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건만 여전히 미발전 분야로 남아있는 것 같으니, 혹 이런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이라면 도전해 봄직한 것 같다. 책 한 권만 내면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영역이라도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과감하게 개척할 수 있는 삶. 멋지지 않은가? 그런 주제를 가지고 있는가? 삶을 던질만한 그런 주제? 그런 얘기였다.
학문적 인생을 관통하는 테마를 가졌던 사회학자 중 일인인 루만 선생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대가들은 대개 그런 주제를 가졌던 것 같다. 막스 베버를 보라. 그의 평생 화두는 '왜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발생했는가']. 학자 이전 그의 인생경력을 볼 때 '사회학자 루만'은 약간 어색하기까지도 한데, 어쨌든 사회학에 투신한 이후 그는 '사회학', 정확히 사회에 대한 이론을 바꾸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 같은 발언에 비하자면 터무니 없이 소박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사회학자로서 사회학을 바꾸는게 목표라고 얘기하는 것도 꽤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런 꿈을 어느 정도는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30년짜리 Lebensprojekt를 '거의' 완성했고, 전무후무할 사회이론의 거봉이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루만 이전과 이후로 사회학을 나누지않으면 안 될 정도로 대단한 변화를 가져온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루만은 평생을 걸만한 주제를 발견했고 성과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던언컨대 'super'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난 그렇게 투신할만한 Lebensthema를 가지고 있는가? 새벽녘 그 대화 자리에서 얘기한 게 있긴 하지만 아직 "in making" "under construction" 상태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심장 박동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 Lebensthema라고 하기엔...

진리는 구체적이다

“진리는 구체적이다.” 브레히트의 좌우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좌우명이라... 좌우명이나, 금언, 격언, 왠지 무지 낡은 느낌을 주는데, 요샌 이런 표현 잘 쓰지 않고, 또 좌우명이 무엇인지 선뜻 얘기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 우리 루만 선생은 옛날 사람인지 그런 걸 가지고 있었나보다. "Guter Geist ist trocken" 이었다고... 기계적으로 번역은하면 "좋은 영혼은 건조하다." 영혼이 좋을 수 있다? 아니 영혼도 이상하다. 정신이 더 어울릴듯. 아니, 이런 건 차라리 그대로 놔두자. Guter Geist ist trocken. 루만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군더더기 없이 절제, 정제된 언어 뿐 아니라 비쩍 마른 몸까지 걸치고 있었다. (한 가지. 그의 말은 군더더기 없는 것 같지만 만연체다. 조금이라도 법에 삶을 의탁했던 이들의 특징.) 브레히트의 잠언도 그에 어울린다. 맑시스트 예술가. 정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살아 꿈틀대는 군상들을 접하게 되지 않는가. 노동자, 계급이 아닌...

2008년 9월 11일 목요일

주례사 분석

한겨레 21 최근호에 여성민우회와 함께 주례사 80건을 조사한 내용이 실렸다 ['사회의 과학화' 현상이라고 할만하다. 사회과학적 연구 방법을 언론, 시민단체들이 자연스럽게 가져다 쓴다. '지식사회화'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결론은 전혀 놀랍지 않다. 기사 제목만 읽어도충분할 정도로: "주례사, 조선시대 유림의 환생. 최근 사례 80건 여성민우회와 공동 조사… 성차별·가부장적 충효사상·하나 마나 한 뻔한 말들". 그렇다. 주례사가 무척이나 노골적이어서 단순한 내용분석만으로도 충분한 기사거리를 얻어낸 것 같다. 물론 같은 텍스트를 가지고서 사회학자들이 요리를 했다면 훨씬 더 재미있는 (누구에게?) 진술을 했겠지만... (정말?) 어찌되었거나 너무도 흔한 얘기는 사회학적 연구 소재로 잘 채택되지 않는다. 참고할만한 얘기. 루만이 쓴 사랑이야기(!) "Liebe als Passion"의 재료는 당대 통속 연애 소설이었다. 사회학자들은 주례사를 역사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결혼, 연예, 남녀, 부모관계, 가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견해의 변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테니까. 물론 사회구조 -> 의미론, 강한 인과적 관계를 전제하는 건 아니지만, 주례사 같은 일상적 의미론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구조와 그 변화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아니 구조, 혹은 비담론은 의미론이나 담론을 통해서만 그 정체를 드러내니까 다른 접근방식을 상상하기 힘들다. 주례사는 심리체계의 산물이고, 심리체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작동하는지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만, 그럼에도 주례사는 사회적 구성물이기도 하다. 아니 사회적 구성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2008년 9월 8일 월요일

우는 애 떡 하나 더 주기

나이를 먹을수록 짧은 몇 마디로 삶의 법칙을 적나라하게 까발겨주는 속담의 힘을 느낀다. 오늘 생각해 볼 속담은 '우는 애 떡 하나 더 주기'. 이 속담을 좀 길게 풀면: 때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방식으로라도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어찌되었건 그 존재감을 인정받는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라도 똥을 피하려는게 인지상정이므로. 존재감을 드러내려 바둥거리는 짓은 어떻게 보면 상대방이 인간관계에서 가질 복잡성을 줄여주는 고마운 행위이기도 하다. 누구에게 관심을 더 줘야 할 지 매순간 고민하지 않는가.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한 편에 '우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른 쪽엔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하거나, 돈, 지위, 학력 같은 매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시야를 조금 넓혀보면 이른 바 시위, 파업 등은 전형적인 '우는' 행위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표출하지 않아도 챙김을 받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은 이런 행위를 '떼법'이라고 부르며 우습게 본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감이 조금이라도 무시당한다고 느끼면 쉽게 막발하고 술병 던지는 인간들이다. 막무가내 떼쓰는 사람이나, 표는 못내고 은근히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나, 결정적인 순간에 본성을 드러내버리는 이들이나 사실 거기서 거기다. 한 가지... 성찰적일수록 떼를 못쓰게 되는 것 같긴 하다. 그럴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많지 않다. 어쩔 수 없다.

문법/ 규칙/ 기대구조

언젠가 "영화의 문법"이란 표현을 썼었는데 사실 거기에서 문법이란 개념은 규칙, 혹은 더 사회학적 표현으로 '기대구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단문에서는 영화에 대한 기대구조의 분화를 얘기했던 것이고. 내가 매일 챙겨 읽는 정윤수 씨 블로그에서 오늘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메소드' 연기라는 게 있다.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1930년대에 완성한 이론이자 실제 방법론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들을 훈련 시키기 위해, 극중 배역에 온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몰입시키는 방법론을 만들어냈다. 그 이전까지 '연기'는 일종의 '역할극' 같은 개념으로 어떤 상황이나 배역이 정해지면 그것을 고전적 관습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게 현대연극의 출발점이 아닐까. 고전극에서는 대개 이미 알고 있는 줄거리를 확인하러 간다. 어느 대목에서 웃어야 할 지, 혹은 슬퍼해야 할 지 대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을 잇고 있는 오페라나 우리의 판소리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예술은 넓의 의미에서 일종의 제의 혹은 예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제의 참여자들은 이미 어떻게 진행될 지 알고 있으면서, 바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종교적 예식에 참여한다. 여러 예식도 마찬가지고. 국립묘지에 우르르 몰려가는 정치인들 집단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들에게서 심각한 표정, 검정색 양복과 넥타이를 기대한다. 이명박씨가 광주 망월동에서 묘지 상석을 밟고, 웃는 모습을 보여 두구 두고 욕을 먹는 것은 바로 그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일종의 연극인데 그 코드를 깨뜨려 버린 것이다. 중세시대 때 교회음악에서는 심지어 각 음, 화음에 대한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적인 시적 표현이었던 정형시는 또 어떠한가. 근대의 출현은 사회 여러 부분에서 그런 중세적 질서, 익숙함을 깨드리는 것이 새로운 질서 혹은 기대구조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은 소비할 영화, 음악, 미술작품을 고를 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 물론 그 안에도 어느 정도 질서는 있다. 장르라고 표현되는 그런 질서 말이다. 크로스오버도 있고 복합장르도 있지만 모두 장르적 분화를 전제로 하는 얘기다. 어느 정도 제의적 기대구조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드는 불가피한 필수적 요소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터인데, 연극, 오페라, 시조, 한국화 같은 것이 강한 쪽이다. 근대 이전 예술가들은 창작의 고통을 상대적으로 덜 겪었을 것이다. 재주가 필요했을 뿐.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질 않으니 굳이 예술가의 이름이 남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코드, 문법이 바뀌었는데 고전적 문법을 고수하는 이들은 이제 우스개거리가 된다. 퇴약볕에 학생들 운동장에 모아놓고 훈화하는 교장선생님을 상상해 보라. 혹은 IOC 선수위원이 된 교수에게 "다, 대통령 덕이야"라고 하며 아부하는 인간들.

2008년 9월 4일 목요일

助詞의 능력

토씨라고도 하는 우리말 조사(助詞)의 능력을 보여주는 우스개. 독일어의 경우 그 비슷한 역할을 전철(前綴)이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조사는 명사에 붙고, 전철은 동사에 붙는다는 점이 다르지만.

여자들의 남자 판별법
1등급=키도 크다. 2등급=키만 작다. 3등급=키는 크다. 4등급=키도 작다

여자에 대한 남성 버전도 있다.
1등급=이쁘기까지 하다. 2등급=이쁘기만 하다. 3등급=이쁘기는 하다. 4등급=퍽도 이쁘다.


흠. 농담 속에 진실이 담겨있는 경우다. ㅎㅎ

2008년 9월 2일 화요일

신뢰(상실)

그동안 그들의 궤변, 말뒤집기,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 때문에 적지 않게 받았던 스트레스는 한국 언론기사 좀 덜 보았더라면 줄일 수 있었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환율 변동이 심상찮고, 제2의 IMF 사태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이건 스트레스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더 '실용적'인 빛을 발하는게 바로 원칙이다. 원칙 --> 예측가능성 --> 신뢰. 오늘자 "프레시안" 기사 중에서 몇 구절 모아봤다. 도처에 깔린 원칙부재, 신뢰상실... 이렇게 수가 낮은 이들이 2008년 한국을 지휘하고 있다는 걸 여전히 믿기 힘들다. 코미디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당사자들은 진지하지만 무슨 이야기든 내뱉기만 하면 관중들은 자지러지게 웃거나 또 울기까지 하는 그런 희비극, 블랙코미디, 허무개그. 각색할 필요도 없어서 천하의 채플린이나 마이클 무어가 와도 손 댈 곳이 없을 그런... 신은 공평하시다. 아무나 갖는 그런 재주가 아니지 않은가. 허나 그들은 그 소중한 천부적 재주를 엉뚱한데서 부리고 있다. 2008년 대한민국 비극의 출발이다.
------
그런데 나는 가장 고역스럽고 모멸스러운 게, 이명박 집단이 정권으로 들어선 이후부터 줄곧 행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궤변들이다. 끊임없는 말 바꿈과 말 비틀기인 궤변들, 그 궤변으로 정치, 경제, 사법, 종교, 정부행정을 몰아가고 있는 지독하게 착란적인 현실이 두렵기까지 하다.
------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2일 중단된 한반도 대운하 사업과 관련해 "여건이 조성되고 국민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다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정 장관은 대운하 사업이 중단된 것인지 취소된 것인지 분명히 해달라는 요구에 "대통령의 특별담화 이후 민자사업을 전제로 추진하려던 대운하 사업은 중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정치위기' 피하려 '경제위기' 말할 때는 언제고...
현 정부 출범 이후 경제위기설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리고 옆에서 추임새를 넣은 인물은 이 대통령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 불과 얼마 전까지 스스로 위기감을 조성해 온 청와대와 정부가 지금와서 '걱정 말라'고 외치는 건 매우 부적절한 방식이다. 정부와 권력자의 조변석개에 신뢰만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의 경제위기는 정치위기의 정확한 반영이기도 하다. (...) 김민전 경희대 교수가 "사실 '경제위기'는 경제적 용어라기보다 정치적 용어이다"면서 "경제위기는 바로 정치위기다"고 한 건 그런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집권세력에 대한 '신뢰'는 대단히 중요한 내부적 요인이 된다. 김 교수는 "외부 환경이 좋지 않아도 정치적 신뢰가 있으면 국민들은 IMF 때처럼 장롱 속 금이라도 내놓는다. 하지만 신뢰가 깨지면 정책을 만들기도 어렵고 집행하기도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일으키게 된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이 문제의 핵심을 '신뢰 상실'에 두고 강만수 장관 경질을 요구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
며칠 전 우리의 '돌발영상'이 소개했던 박재완 국정기획수석의 강연은 라이브코미디 혹은 허무개그의 한 획을 긋는 역작이다. 국회의원 시절 황우석 사태 때도 소신발언하는 등 나름대로 괜찮았었는데... 近墨者黑인지, 아니면 그동안 흰 척 하고 있었는지... 찾아보니 벌써 유투브에 올라와 있다. 역시 명작을 알아보는 눈은 있는 법. 아래에 붙여 놓는다. 즐감!!


2008년 9월 1일 월요일

2008년 9월

이제 보니 6월, 7월, 8월, 이 기간에 매달 19개씩 글을 올렸다. 우연일까? 아님 나름 어떤 리듬이 만들어진 것일까? 벌써 9월이다. 주위 사람들이 하나 같이 올 해는 유난히 시간이 빨리 간다고 이야기한다. 특별한 이유를 찾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간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에 교회 일로 만난 독일 목사님이 전해 준 이야기. 사람이 태어나서 18세까지 경험한 시간과 18세 이후 나머지 생에서 경험한 시간의 길이(혹은 무게)가 같다는... 굳이 18세라고 얘기한 것은 아마 성인의 기준으로 삼는 나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되었건 난 2008년 9월을 여전히 이 자리에서 맞이하고 있다. 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