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9일 금요일

한국에 시민사회는 있는가?

시민사회라...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진 이후 국내 (진보?) 사회과학계는 맑시즘이 빠져나간 그 빈자리를 이 '시민사회론'에 내주었다. '민중' 혹은 '노동자계급'이 '시민'/ '시민사회'라는 좀 덜 부담스러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시민사회'는 있어줘야될 것 같은 사회과학적 카데고리에서 꽤나 설득력있는 설명변수로 자리잡았다. 그래도 한국에 시민사회가 있으냐 없으냐는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물론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시민사회를 얘기하는 것인가? 시민사회가 잃어버린 멘자카드 찾듯이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시민사회라는 담론이 시민사회를 만들어 내는 측면도 분명히 얘기할 수 있다. 사회과학자들이 한국에 시민사회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주제로 견해가 갈린다고 할 때, 우리는 대개 주로 잘 알려지고 정식화된 어떤 '시민사회' 모델을 상정하고 그런 시민사회 모델의 특징을 한국에서도 발견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논쟁한다고 봐주면 된다. 오늘 한겨레를 거쳐 박노자씨 글방에 들어가 보게 되었다. 난 박노자씨를 기본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편이다. 정통 맑시스트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서 공감하지 못할 때가 종종있긴 하지만, 그렇게 분명한 태도를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것,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이라고 높이 사려는 편이기도 하고. 허나 오늘 읽은 글에 나오는 한국 시민사회에 대해서 언급하는 구절은 영 불편하다:

"필자에게 송두율 교수가 프라하의 한 학회에서 1995년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이란 "시민사회"라기보다는 각종 유사 가족적 연고집단의 결합체입니다. 그 중에서는 제일 큰 것은 "단군의 후손들'이라는 "민족적 대가족"이지만, 또 그 안에서는 동문 집단마다, 지역마다, 하다 못해 대기업의 중년 남성 정규직 노동자의 집단마다 다 그 강력한 집단적 정체성과 이해관계 의식이 형성돼 있지요. 그리고 그 연고적 소집단의 단결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시자면 "이명박 동문"을 찍어주는 "진보적" 고대 출신들의 행태 정도를 관찰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공동체는 이 땅에서 수천년 존재해왔지만 "계급'이라는 일본식 번역어가 수입된 지 100년 정도 된 것입니다. 그것도 학교 교과서에서 아직까지도 - "민족"과 달리 - 많이 안나오는 단어인지라 뭇 인간들의 머리 속에서 뿌리 내리기 힘들죠."

박노자씨의 글 밑에 historian이란 이가 달아 놓은 글에 공감이 가 일부 인용한다.

"일단 "필자에게 송두율 교수가 프라하의 한 학회에서 1995년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이란 "시민사회"라기보다는 각종 유사 가족적 연고집단의 결합체입니다."라고 쓰신 부분은 좀 딴지를 달고 싶습니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가 독일에 있을때 송두율 교수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 중 '시민사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송두율 교수가 당장 말을 끊으면서 "아니 우리나라에 무슨 시민사회가 있다고 시민사회 이야기를 하십니까?"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진중권 교수가 "아! 이 양반이 한국을 오랫동안 떠나 있어 한국실정을 전혀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했답니다.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계 좌파지식인과 북미에 거주하는 자영업자 교포들의 보수우파적 성향은 물과 기름처럼 확연히 다르지만 '한국비하'내지는 '무지'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송두율 교수의 저 발언은 "한국같이 가난한 나라에 베스킨라빈스 같은 고급(?) 아이스크림 가게가 다 있느냐?"고 물었다는 어느 재미교포의 무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정말 송두율 교수와 박노자 선생의 견해가 옳다면 지난 촛불집회는 뭐고 참여연대는 뭐고 경실련은 뭡니까? 이것도 유사 가족적 연고단체란 말인지요? "

송두율 교수야 한국에 대해 쌓인 게 많고 당한 게 많아서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한국에서 떨어져 산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던가. 외부에서 오히려 한국을 더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적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현실감을 잃게 되는데 아무래도 후자 쪽이 아닌가 싶다. 독일에서 산 지 수십년된 교민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아무리 자주 한국에 다녀도 아주 독특한 한국관을 가지고 계시지 않은가. 송두율, 박노자 교수의 입장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럼 독일 혹은 노르웨이에는 시민사회가 있는가? 도대체 독일 어디에서 한국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시민사회를 찾을 수 있는가? 오히려 나는 독일이건 한국이건 시민사회란 개념 자체가 낡은 유럽적 의미론에 불과하다고 보는 루만의 관찰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대한 애증, 자부심과 비하 사이에서 겪는 혼란을 외국에서 오래 산 [누구 표현대로 '장기수' '반열'에 오른] 이들이라면 드물지 않게 경험한다. 열심히 한국 [어떤 한국?] 욕을 하다가도, 누가 맞장구치면 다시 한국 편을 들기도 하는... 외부 관찰자의 시각은 왠지 다를 수 밖에 없다. 한국에 돌아가서 내부자가된 독일 유학 선배들을 만날 때 느끼는 은근한 이질감의 근원도 거기에서 찾아야 할 듯.

[p.s.] 박노자 교수가 시민사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조금 더 분명하게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다 (여기).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글과 이전 글에 달린 논평을 읽어보니, 박교수와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시민사회에 대한 대단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을 "defekte Demokratie"라고 분류하던 학자들이 있는데 (Croissant et al.) 박교수, 송교수 입장이 바로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독일, 미국엔 시민사회가 발달해서 'defekt' 되지 않은 'ordenltich'한 민주주의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가? 과도한 자부심, 민족주의도 문제지만, 겸손이 지나쳐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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