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8일 월요일
문법/ 규칙/ 기대구조
언젠가 "영화의 문법"이란 표현을 썼었는데 사실 거기에서 문법이란 개념은 규칙, 혹은 더 사회학적 표현으로 '기대구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단문에서는 영화에 대한 기대구조의 분화를 얘기했던 것이고. 내가 매일 챙겨 읽는 정윤수 씨 블로그에서 오늘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메소드' 연기라는 게 있다.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1930년대에 완성한 이론이자 실제 방법론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들을 훈련 시키기 위해, 극중 배역에 온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몰입시키는 방법론을 만들어냈다. 그 이전까지 '연기'는 일종의 '역할극' 같은 개념으로 어떤 상황이나 배역이 정해지면 그것을 고전적 관습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게 현대연극의 출발점이 아닐까. 고전극에서는 대개 이미 알고 있는 줄거리를 확인하러 간다. 어느 대목에서 웃어야 할 지, 혹은 슬퍼해야 할 지 대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을 잇고 있는 오페라나 우리의 판소리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예술은 넓의 의미에서 일종의 제의 혹은 예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제의 참여자들은 이미 어떻게 진행될 지 알고 있으면서, 바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종교적 예식에 참여한다. 여러 예식도 마찬가지고. 국립묘지에 우르르 몰려가는 정치인들 집단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들에게서 심각한 표정, 검정색 양복과 넥타이를 기대한다. 이명박씨가 광주 망월동에서 묘지 상석을 밟고, 웃는 모습을 보여 두구 두고 욕을 먹는 것은 바로 그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일종의 연극인데 그 코드를 깨뜨려 버린 것이다. 중세시대 때 교회음악에서는 심지어 각 음, 화음에 대한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적인 시적 표현이었던 정형시는 또 어떠한가. 근대의 출현은 사회 여러 부분에서 그런 중세적 질서, 익숙함을 깨드리는 것이 새로운 질서 혹은 기대구조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은 소비할 영화, 음악, 미술작품을 고를 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 물론 그 안에도 어느 정도 질서는 있다. 장르라고 표현되는 그런 질서 말이다. 크로스오버도 있고 복합장르도 있지만 모두 장르적 분화를 전제로 하는 얘기다. 어느 정도 제의적 기대구조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드는 불가피한 필수적 요소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터인데, 연극, 오페라, 시조, 한국화 같은 것이 강한 쪽이다. 근대 이전 예술가들은 창작의 고통을 상대적으로 덜 겪었을 것이다. 재주가 필요했을 뿐.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질 않으니 굳이 예술가의 이름이 남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코드, 문법이 바뀌었는데 고전적 문법을 고수하는 이들은 이제 우스개거리가 된다. 퇴약볕에 학생들 운동장에 모아놓고 훈화하는 교장선생님을 상상해 보라. 혹은 IOC 선수위원이 된 교수에게 "다, 대통령 덕이야"라고 하며 아부하는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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