友情에 대해서는 동서고금 여러 사람들이 '논'하였다. 유명한 키케로의 우정론도 있고, 연암 박지원 선생도 우정에 대해 한 말씀 남기신 모양이다. "우정이 있는 게 아니라, 가끔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한 작가가 있다고도 하고, 그 얘기를 자신의 우정론 앞머리에 꺼낸 김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를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같이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의내린다. 우정에 대한 담론이 활발했던 시기는 분명히 친구 관계가 가져오는 영향이 컸고 관련된 문제도 많이 드러났던 시기였을거라고 추측해 본다 [기존 담론, 의미론 연구의 결과를 원용해 보자면 말이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親舊, 벗. 이런 단어들이 촌스럽게 들리기 시작한다. 왜 사람들은 특정한 유형의 관계를 친구, 우정이라는 의미론을 사용해서 기술하는가? 왜 친구 의미론은 달라지는가? 자, 우선 방법론에 대해 고찰을 해보자. 우리가 우정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경우 본질적인 그 무엇이 있어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탐구하고, 분석하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정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담론을 추적하고, 발굴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우정의 의미론이 문화권마다 다르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있다. 독일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이미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고, 한 번은 오해를 불러 일으켜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한국사람들은 독일인들에 비해서 대개 친구를 좀 더 폭 넓게 정의하는 것 같다. 어쩌면 개인주의가 훨씬 강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일대일 관계를 훨씬 더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또 친구는 철저하게 사적 관계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exklusive Semantik der Frendschaft).한국 사람들은 그 보다는 집단 속에서 개인이 규정되기가 쉽고, 사적관계가 공적관계로 쉽게 전환되는 편이다. 그래서 집단 혹은 연결망 속에서 알게 된 관계 - 일대일 관계가 매우 희박할지라도 - 도 친구관계로 묶어두는 게 유리할 때가 많은 것이다 (inklusive Semantik der Freundschaft). 이런 다른 의미론은 실제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Diskursive Praxis. 담론과 프락시스는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대개 한국사람이 그런 것처럼 친구관계를 넓게 정의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구분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진정한 친구, 참친구 등등 친구를 수식하는 말이 필요하다. 그렇담 진정한 친구, 참친구가 구분의 한 면이라면 다른 면은? 진정하지 않은 거짓 친구? 흠. 그건 좀 그렇고... 덜 진정한 친구 정도 되지 않을까? 어쨌든 내 경우에는 서로 비밀을 나누거나 약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좀 '진한' 친구관계라고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천성적으로 자기 얘기를 잘 하는 경우가 있긴하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나중에 뒤통수 맞는 경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어떻게 이해될지 생각해봐야 하고, 나에 대해서 나중에 뭐라고 할 지 예지력까지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걸 친밀한 관계, 우정이라고 얘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 신뢰. 믿을만하다는 것, 그건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카니즘이다. 신뢰는 곧 예측가능성, 복잡성 감소의 메카니즘이기도 하다. 뒤통수 맞는 일은 바로 이 신뢰가 깨지는 것. 내가 무심코 드러낸 약점이 어느 순간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일. 이중, 삼중, 사중... 우연성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 너무 솔직해서는 곤란하다. 늘 여러 가면을 들고 다녀야 하는 것. 심지어 피곤할 때는 그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는 가면도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하고... 정도의 차이일 뿐,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맨얼굴을 보여주지 못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짐승이다. 여러 가면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맨얼굴 보는 일이 부담스러워진다. 가끔 맨얼굴 보였다가 그게 화근이 되는 경험이라도 몇 번하게 되면 이제 더 꼭꼭 숨긴다. 가면을 쓴 우리들에겐 가끔 '자유인'이라고 등장하는... 예를 들어 전인권 같은... 이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이다. 바로 이 가면을 벗지 못하는 한 우정은... 없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