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호 한겨레 21의 한 기사는 도로에 편중된 한국 공공 교통 정책을 다루고 있는데, 그 기사를 읽으면서 난 이 영화를 떠올렸다. "단위면적당 고속도로와 국도의 연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6위에 올라있다. 2001~2005년 정부의 교통시설 투자 현황을 보면, 총 66조7594억원 가운데 도로에 투자된 비율은 59%였고, 철도는 22%에 불과했다. 2008년 교통시설 투자도 비슷하다. 여전히 도로 부문이 50%에 이르고, 철도는 그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2007년 한 해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광역도로 등 481개의 도로 건설에 투자한 예산은 7조원에 이른다. 반면 철도는 수십 년 동안 제자리다. 2005년 말 현재 철도 연장은 총 3392km인데, 이는 25년 전인 1980년에 비해 약 260km 증가한 수치다. 2004년 기준 도로의 여객수송 분담률은 82%인데, 철도는 15%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여전히 도로와 자동차 중심의 교통체계를 버리지 못하고 국제사회의 흐름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도로로 먹고사는 왜곡된 카르텔의 구조가 너무 크고 강하기 때문이다. 국토해양부를 중심으로 건설업계과 자동차업계, 또 여기에 기대 살아가는 관련 전문가 그룹 등이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기업, 행정당국에 모든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 교통정체를 예견하면서도 굳이 자동차를 끌고 도로로 나서게 만드는 자동차가 주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이다. 내가 좌우할 수 있는 공간을 갖는다는 것, 쉽게 떨쳐내기 힘든 유혹이다 (mobility!). 그러니 독일처럼 철도 교통이 발달한 나라에서도 자가용 운전자들을 철도를 비롯한 대중교통으로 유인하기 위해 갖가지 유인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한겨레 기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공공성과 경제성, 에너지 효율, 환경보존 등 모든 방면에서 철도와 도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건 자명하지만, 실제로 그런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이런 일을 하도록 정치, 행정이 있는 것 아닌가?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할 수 있는 여러 이익집단들, 혹은 공익에 관심이 없는 시민들의 이기적 행동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공익'의 실현을 우리는 공공 정책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기대 혹은 하나의 이상형이겠지만... 전기자동차의 죽음 혹은 도로중심 정책이 시사하는 것처럼 국가는 실제로 대기업, 자본가들의 이해에 크게 좌우된다. [물론, 공익과 사익의 경계는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전기자동차를 도입하거나, 도로보다는 철도에 투자하는 게 더 공익에 부합한다는 것도 하나의 해석일 따름이다. 사익이 공익이기도 한 경우가 많다. 기업은 곧 고용 혹 세금납부 등의 형태로 공익에 이바지한다. 그런 공익/사익 구분 자체가 갖는 배제적 혹은 포섭적 속성을 들추어내는 것도 재미있고 또한 유익한 작업이리라. 허나 누구에게 유익한?]
난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맑스 형님의 혜안에 크게 감탄하는 편인데, 기업, 재벌, 자본가들의 영향력이란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한국은 그 동안 이런 전형적인 자본제적 사회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거론되었다. 자본가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기는 커녕 한국에서 국가는 오랫동안 사기업의 명운을 좌우하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일군의 학자들은 이런 국가를 발전국가로 부르며 경제중심적인 사회이해를 수정하도록 요구했다 (Bringing 'the state' back in!).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게 일제시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에선 지주계급의 물적 토대가 크게 무너졌고 (이승만 정권이 울며겨자먹기로 시행했던 농지개혁도 일조했을 것이다), 자본가라고 할만한 이들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발전국가가 키워낸 재벌들은 이제 오히려 국가를 좌우하려고 든다 ('삼성공화국'! 혹은 '토건국가'). 이제 발전국가 모델은 버리고 국가는 사익실현의 원칙을 마련해 주고 그 과정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공익을 의제화하고 실현하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발전국가도 아닌, 그렇다고 신자유주의 국가도 아닌, 정체성 혼란을 보이는, 아니 그런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우리의 '실용정부'는 어쩌면 현대 국가가 보여주는 최악의 사례를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OECD 국가급에서 말이다). 복잡성이 여러 겹을 이루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철학의 부재가 능력의 부재보다 훨씬 더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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