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9일 일요일

그늘...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ps) 이 시는 안치환의 노래로 먼저 알게 되었다 ( 안치환 9.5집, '정호승을 노래하다', 2008). 뭐랄까... 좀 촌스러운 느낌? '서울의 예수'의 정호승과 '소금인형'의 안치환의 노래는 좋으나 21세기에 들어선지도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도 여전한, 아니, 예전보다 더 '통속적'이된 그 모습을 확인하는 일엔 반가움보단, 뭐랄까 안타까움이 앞선다. 그런데 이 촌스럽고 통속적인 노래가 오늘따라 생각났다. 그래... 촌스러움에 힘이 있는 것 아니겠어? 우연에 우연으로 점철되어 줄거리만 듣고선 도무지 볼 것 같지 않지 않은 드라마가 '국민 드라마'가 되는데 이유가 있지 않겠어? 이러다 어느날 '뽕짝' 가사가 절절하게 내 가슴 속을 파고드는 일이 생길지 누가 알랴...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삶의 그늘','우울' 이런 걸 연상하게되는데 - 나도 그랬다 - 그게 아니라 햇볕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 얘기다 (아, 이 무슨 '아낌없는 나무'같은 상상력이란 말인가...)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없다. 모든 속내를 다 뒤집어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이 있다? 모두 구라다. 아니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냥 들어만 주면 되는데... 그리고 표내지 않으면 되는데... 대개 그러질 못하니까 아애 말을 꺼내기 힘든 것 아닌가... (특히, '어른'들이 그냥 듣고만 있질 못한다. )
하고 싶은 말을 그냥 혼자 속으로 삭혀야할 일이 생겼는데, 그 상황에서 이 노래가 떠올랐고, 그래서 멀쩡한 안치환, 정호승 제씨가 불려나와 싫은 소릴 듣고 계시는 중...ㅠ ㅠ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上京 후기

최근 上京한 이후, 내가 좋아해서 오랫동안 휴대용컴 배경화면으로 띄워놓기까지 했던 뉴욕 중심가 정도로 화려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비교할' 정도는 되는 경치를 보여주는 잠실  오피스텔 15층에 살면서 새삼스럽게 발견한 점이지만 난 생각 이상 都會地 풍경 속에서 더 만족을 느끼는 족속의 일원이었다 (뉴욕 시간에 맞춰서 생활한다는 전설의 그 '된장남''된장녀'에 감히 비교할 바는 못되겠지만... ). 심지어 가끔씩 산책을 하는 집 앞 석촌호수와 그 주변 풍경의 '키치'성이 눈에 거슬려 정말이지 파리,  베를린, 뉴욕 정도엔 살아 '줘야' 만족할 것만 같은...
사실 내겐 좀 낯선 이런 생각을 하며 한 편으로는 짧지 않은 그 시간을 그 크지 않은 독일 도시에서 어떻게 '나름' 만족하면서 살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른 한 편 어쩌면 내가 새삼스럽게 발견한 이  '도회지성'을 끼워준 게 바로 그곳이었다는 생각도 했다. 한국의 풍경과 비교해서 생각하자면 빌레펠트만 하더라도 그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미적인 감수성의 수준은 정말 높은 편이었으니까... 
아니, 이게 반드시 되회지/비도회지 문제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게... 난 농촌(다운) 풍경을 볼 때나 최근에 걸었던 팔공산 파계사 가는 그 길 위에서도 속에서도 큰 만족감을 느끼는 편이다. 허나 파계사의 경우 보기 좋은 길을 걸어서 올라 가 보니 도무지 어떤 틀에 넣어서 이해해야 할 지 모를 국적, 역사 불명의 기괴한 콘크리트 새건물 앞에서 당혹감을 느꼈었다. 그런 경험을 염두에 둔다면, 내 미적 감수성은 아애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풍경 속에서나, 인간이 손이 닿았다면 자연의 시간,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다듬어져서 익은 냄새를 풍기는 그런 환경 속에서 채워지는 모양이다.
나무 무늬를 가진 콘크리트 장식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된 인공 조명,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끊이질 않는 '분칠'한 것 같은 석촌호수보다, 시간의 길이와 무게가 느껴지는 도시 뒷골목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빌레펠트는 어쩌면 그만한 규모의 도시가 풍길 수 있는 절제되면서 조화로운 모습과 결코 짧지 않은 역사가 자연스럽게게 녹아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범'도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서울이나 그 밖의 한구 도시의 경우 나이살은 많이 잡솼으나 끊임없는 성형수술과 분장, 치장으로 도무지 원숙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모양새다. 그 절정은 청계천이나 광화문 광장일 것이다 (아직 가 보지 못했다). 캬... 그 발상하며, 그 '안타까운' 미적 감수성이라니... 물론... 좋아지고는 있다.
그러면 나는? 세월에 맡겨두어 포기하던가, '눈'을 낮추던가, '다시' 이사를 가던가... 아니면 지금처럼 불평하면서 그것도  재미로 삼던가... 생각해 보니 선택의 폭이 의외로 넓다.

답답함

흠... 기대치 않은 즐거운 소식을 듣고서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동안 쓰고 싶었던 얘길 잊어버렸다. 답답하다...

認定

사람을 바꾸는 가장 센 힘은 '인정'(認定)이다. 어쩌면 '사랑', '우정'은 '인정'이 표현되는 여러 모습을 구분하기 위한 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조금 더 건조하게 - 다르게 표현해서... '씁쓸하게' 혹은 껍질을 걷어내고서 - 얘기하자면,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 - 人間 -, 그 사람들의 관계는 결국 '인정'을 얻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한 '투쟁'일지도... Anerkennungskampf!

2009년 11월 15일 일요일

디어 클라우드


참 보기 좋은 풍경인데다
내가 좋아하는 디어 클라우드를 - 그렇다면 사진 속 여인은 보컬리스트 '나인'  - 
찍은 사진이래서
남의 '작품'을 그냥 가져왔다.
네이버 포토갤러리에 '별똥이'의 작품으로 '전시'되어 있는... (출처 여기).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연하는 있는 모습인 모양.

(수 개월 후... : 여전히 좋아하는가? 글쎄... 역시, 취향은 변덕스러운 것... 매력을 유지하기란 그만큼 어렵다) 

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한국 생명윤리

일본 생명윤리학자의 발표문을 읽다가 다음 구절에 눈이 갔다. "The Bioethics Movement in Japan around the beginning of 1980s can be understood as a 'Liberation Movement' from the dominant and paternalistic power of medical and techno-scientific professionalism."
일본은 올 해에 '비로소' 전후 첫 정권교체를 경험했고,  민주주의 역동성으로 따지자면 대개 한국보다 여러 급수 아래라고 평가한다/ 된다. 분단, 혁명(?), 독재, 민주화운동, 민주화, 여야 정권교체, 전직대통령의 자살 등 정치 관련해서라면 한국만큼 극적인 사건을 많이 경험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를 국가별로 조사, 비교해 본다면 한국은 분명히 최상위권에 있으리라.
시민권에는 여러 차원이 있고, 역사적으로 그 내용이 끊임없이 바뀌고 재규정되는데,  '정치적 시민권'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한국에선 지나치게 '정치적' 시민권에 집중하거나 - 정권/국민의 관계에서 - 그마저도 선거권 정도로 소극적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막상 정당이나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적다는 말씀. 한국 공중이 매우 정치적이란 얘기도 따져보면 사실 그 내용이 빈약하기 그지 없다. 그나마 덜 정치적인 쪽으로 가면 한국의 '시민권' 논의는 여전히 바닥이다. '생명윤리'의 경우 그 틀은 들어왔지만, 복제논쟁, 생명윤리법논쟁, 황우석논쟁에서 보여주듯이 여전히 그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논쟁은 오히려 대개 너무도 '정치적'으로 이해되어서 오히려 '의료적 시민권'이랄까, 그런 이해는 배제되었다.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도 그런 얘기 아닌가? '촛불시위'때 새로운가능성을 발견했건 처럼 호들갑을 떠들었고, 어떤 이는 마침내 '삶의 정치'(life politics)가 한국땅에 도래한양 감격하기도 했지만... 도대체 뭐가 남았는가? 한국인의 정치성 혹은 정치적 시민권에 대해서 아직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인은 자주 놀라고, 이웃을 잘 놀래킨다. IMF사태 도래에 놀랐다가 수년만에 쨉사게 '탈출'해서 놀랐고, '촛불시위에' 놀랐다가 그런 역동성이 잠복기에 들어가 흔적을 찾기도 힘든 현실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어쩌면 기존 정치이론, 민주주의이론, 시민권 논의, 사회이론 등을 모두 잊고서, 정말 '창의적인' 발상으로 한국을 뜯어볼 필요가 있을 지도...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라투르 책 번역 얘긴 이미 20세기말부터^^ 있었는데 마침내  첫 번역서가 나왔다. 국내에선 STS쪽에서만 알아주는 스타급 학자였는데 이번 번역서 출간을 계기로 인지도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STSer들 서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두 개를 연결시켜 놓는다: 김환석의 서평 (프레시안), 김종영의 서평 (교수신문). 아무래도 지면 제약이 없다시피한 프레시안에 실린 서평에선 책 내용이 좀 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고, 교수신문 서평은 그보다는 간략하지만 '촛불시위'에 대한 라투르적 해석가능성을 소개하는 등 책 바깥의 맥락까지 짚어주고 있다.
서평을 읽으면서 새삼 든 생각이지만 라투르만큼 창의적인 사회이론가도 드물다.
"라투르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공학을 넘나드는 탈경계적 분석방식과 사회/물질(자연)세계를 동시에 관계론적으로 분석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따라서 이 책의 부제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의 대칭적 인류학(상징적인 의미.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와 역동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학문)이란 인문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공학과 소통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학문적 체계를 의미한다." (김종영)

같은 서평을 또 일부 인용하자면...
"라투르의 야심은 근대에 대한 해석을 넘어 인문사회과학의 전면적인 혁신을 주장한다. 그가 비판하는 세 가지 학문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학자는 다음과 같다. 윌슨(자연화), 부르디외(사회화), 데리다(해체)이다. 윌슨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윌슨의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오직 한국에서만 ‘통섭’이라는 기괴한 괴물로 진화했다. 한국학계의 수준이 얼마나 얕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부르디외는 사회론적 환원주의, 데리다는 담론 환원주의(기존의 재현방식을 해체시키지만 여전히 세계의 물질성과 잡종의 정치를 보지 못하고 재현과 담론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방식. representational perspective (데리다) vs. performative perspective (라투르))로 비판받는다".

이 책 독일어 번역서를 사 두고 일부 읽어보긴 했지만 이런 내용이 있는 줄 몰랐다 (뭘 읽은 거지 ... ).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구분이다. 이에 따르면 루만은 부르디외와 데리다 중간 정도로 위치시킬 수 있겠다. 커뮤니케이션에서 출발하지만 (데리다) '사회적인 것'으로 사회를 설명하려는 이론이니까 (부르디외). 이 블로그 어디 쯤에 있을텐데, 루만과 라투르를 비교하는 논문들은 이미 적지 않게 나와있다. 라투르를 들어 루만을 치기는 쉬운 편이다. 루만을 전형적인 '사회학주의자'로 보면 되니까. 루만을 들어서 라투르를 칠 수 있을까?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라투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지? 음. 이 부분을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을 듯. 한국 STS 맥락에서 루만을 소개하려면... 루만 이론의 출발은 Sinn인데 철저하게 인간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라투르가 강조하는 비인간 행위자를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봉쇄되는 건데, 'Protosinn'이란 개념을 도입하자는 주장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좀 군색해 보이는 제안이다. 여하튼 라투르 이론을 좀 더 진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루만과 비교하는 일도 앞으로 본격적으로 해 봐야 할 듯 싶다. 어짜피 사회이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을 상태에서 연대해야 필요성이 커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재배치'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 창작, 표절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이 논문은 가위와 풀로 만들어졌다'느니,  'scissors and paste', 'copy and paste'  같은 표현이 학위논문이나 책 서문에 곧잘 등장한다. 그리 '창의적'이지 않다는 겸손을 드러내기 위해 굳어진 표현인데, 어짜피 해아래 새 것이 없고, 창의성의 본질이  '창작'이 아니라 '재배치'에 있다면, '창착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Ctr+C & Ctr+F'다. 오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Ctr+C' 와 'Ctr+F'를 누르면서 든 생각. 남의 쓴 문장, 표현을 몇 단어 이상(?) 그대로 가져다 쓰는 건 표절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막상 따져야 할 건 얼마나 '창의적으로' 표절했느냐 아닐까? 여기 저기 기운 자국 투성이인 내 논문을 이렇게라도 구원시켜주고 싶은 주인의 심정... ㅠ ㅠ

라디오스타, 김현식...

쓸까 말까 마음과 머리 속에 맴돌던 생각을 누군가 가지런히 정리해줬다. 품을 덜어 준 데에 대한 고마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지'가 있다는 반가움이 교차한다. '무릎팍도사'와 함께 '황금어장'이라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라디오스타' 얘기다. 사실 이 둘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프로그램이다. '무릎팍도사'는 한 마디로 웃기는 토크쇼인데, 가장 한국적인 토크쇼 컨셒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웃음, 인생, 솔직, 감동 등이 섞여 있는... 많은 예능프로그램들이 출연자, 아이템, 배경은 바뀌지만 대개 매번 분위기가 비슷하고, 대본을 좇아간다는 느낌을 주는데 반해, '무릎팍 도사'는 출연자에 따라 분위기가 확확 바뀌어서 'Interaktion' 상황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재료이기도 하다. PD 입장에선 위험성이 높은 컨셒이고, 실제로 지루한 경우도 가끔씩 있지만, 이런 방송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디오스타'를 왜 좋아하는지는 오마이뉴스 기사로 대체한다: "라디오스타"가 고품격 음악방송인 이유. MBC 프로그램 '황금어장'의 '라디오스타' 감상기"

위 기사에도 언급되지만 어젠 이승철, 봄여름가을겨울이 출연해서 진행자 4인방과 함께 김현식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김현식을 다시 봐야 할 것 같은... 사실 아주 꼼꼼하게 들어보진 않았지만, 그가 부른 노래들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거나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내사랑 내곁에...), 다른 사람이 불렀을 때 더 좋은 노래들이거나, 아니면 나머진 그저 그렇다. 결국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현식 곡은 - 다시 '검토'해봐도 - 하모니카 연주곡인 '한국사람'이다 (언젠가 이 블로그에 소개한 바 있는...여기). 어제 '라디오스타'에선 '인간' 김현식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름 일가를 이룬 이승철, 봄여름가을겨울에게서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는 선배 가수. 야, 그 사람이 저 정도였나, 싶은... 

올릴만한 곡을 찾던 중 그나마  낫다 싶은 노래가 '쓸쓸한 오후'. 지금처럼 비오는 늦가을 오후에 어울린다. 김종진의 첫 작품으로 김현식 3집 (1986) 10번 트랙으로 실렸는데, 그 배경에 대해선 어제 방송을 참조하시라. 1986년도에 저런 세련된, 혹은 앞선 음악을 쓸 수 있었던 김종진씨에게 박수를. 짝짝. 문제라면 그 이후에도 크게 진보된 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무식하니까 이런 용감한 발언을...^^). 그래도 이 노래는 '늘어지는' 김종진 목소리가 더 어울린다.

2009년 11월 11일 수요일

창의성 - 낯설게 하기

창의성의 핵심이 익숙한 것들의 재배치라면, 그건 곧 '낯설게 하기' 아닌가? 익숙한 것들을 다른 맥락에 집어 넣어서 낯설게 하기? 그러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케 하는 것!

낯설게 하기란 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 미학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 남의 지식을 짜집기 해보면 -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지각의 자동화에 맞서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보았단다. 러시아 이론가 슈클로프스키는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함으로써 지각의 과정 그 자체가 미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고. 형식주의 예술론에서는 지각과정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상을 ‘낯설게 하는’예술적 기법과 예술가의 창조적 개입을 얘기했고...

여하튼 낯설게 하기의 핵심을 재배치로 이해하면 그걸 미학적, 인지적 차원이 아니라 공간적 차원에서까지 구현된 미술작품이 뒤샹의 '샘'. 욕실에 있는 완제품 변기를 전시장으로 재배치시키니까 작품니 된다. 캬, 기각 막히지 않는가. 어쩌면 가장 손쉽게 창의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금기를 깨는 것일 터이다. 벗뜨... not always... 금기를 깨는 것도 반복되다 보면 더 이상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으니까. 또 다른 금기를 찾는다? 포스트모던 시대엔 오히려 그게 지루하다. 돌고 돌아 모던, 중세로 돌아갈지 누가 알랴. 정말이지 역사는 어쩌면 돌고 도는 것일 수도...

재배치는 정말이지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루만을 한국에 소개할 때... 루만이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에 대한 창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이란 공간 속 의미 연결망 속에 체계이론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집어 넣어야 하니까 말이다. 가장 자주 시도되었던 방식이 하버마스와 비교였다. 다른 방식이 있을까? 사회학을 공부하는 후배와 나눈 대화 속에서 얻은 생각인데, 루만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을 재비판 하는 건 어떨까? 행위에 대한 분석이 없다던지, 대안이 없다던지, 몰역사적이라던지... 그런 비판에 대해서 그게 아니라거나 오해라고 설득하는 차원이 아니라, 바로 그런 점을 중심으로 루만 이론이 요소들을 재배치 하는 것.

창의성은 재배치를 통해서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함으로 얻을 수 있다면, 그건 정말이지 여러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블로그의 레이블... 늘 불만이기도 했는데, 그 분류가 너무 식상하단 말이지. 언론, 역사, 영화, 문학... too 20세기적. 지식의 체계를 분류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좀 창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지나친 창의성 발휘가 가져 올 수 있는 의사소통의 장벽, 그것의 위험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는 있지만...). 학문 분류에 대해서도 그렇고. 한국에 통섭, 학제간 연구 등에 대한 담론이 무척 무성하던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 역시 한국의 인식론적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창의적이어야 한다, 뭔가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게 주류 - 적어도 학술 담론에서는 - 되고 있는 상황. 아니면 그런 강박에 시달리고(만) 있는...

발상의 전환 - 한국을 도시국가로?

직전에 소개한 책에서 김정운 교수는 창의성을 '독특하게' 정의한다. 대개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을 창의성, 창의적 행위로 정의하는데, 김교수에 따르면 세상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그런 종류의 새로움은 없다는 것. 하지만 우리가 새롭다고 느끼는 것들이 분명히 있지 않은가? "예전에 있던 것들이 다른 맥락에 놓이면 우리는 새롭게 느낀다". "정확히 말해 창의성이란 아주 익숙한 것을 다른 맥락에 놓아 새롭게 느끼게 하는 능력을 뜻한다." (82쪽).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 해석틀을 가져다 쓰는 건 전형적인 비창의적 혹은 반창의적 행위다. 한국에서 '근면''성실'이 아닌 '창의성'이 강조되는 건 한국 사회 인식의 틀 (인식론)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창의성은 다른 발로 발상의 전환이다. '발상의 전환'은 오히려 김정운 교수가 얘기하고자 하는 창의성의 내용을 더 직접적으로 전해주는 표현이다. 그런 창의성 혹은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어서 하나 소개한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을 하나의 도시로 만들자' 이색주장. 한국만한 중(中) 충칭도 나라 아닌 도시" 무슨 웃기는 소리?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조금 더 인용한다.

"중국의 충칭시는 면적 8만2300㎢에 인구 2800여만명이 하나의 도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한의 면적은 10만㎢, 인구는 4900만명이기 때문에 하나의 도시처럼 사는 게 가능합니다."
그는 "영국의 도시전문가인 피터 홀(Hall) 런던대 교수도 '한국은 결국 하나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송 교수는 "과거엔 홍콩·싱가포르 등 도시국가만이 하나의 도시처럼 기능했지만 각종 기술 발전으로 인해 미래엔 하나의 국가가 도시처럼 긴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예로 들었다. 휴대전화가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없이 하나의 도시 안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을 하나의 도시로 만드는 물리적인 수단으로는 KTX 등 고속철도를 들었다. 송 교수는 "시속 400㎞의 고속철도를 이용해 서울~부산, 서울~목포를 1시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선형도시'를 만들고 이를 다시 전국으로 확산시키면 된다"고 말했다. 이런 아이디어를 지난 6월 출간한 '세계경제전쟁, 한국인의 길을 찾아라'에 담았다. 또 이를 바탕으로 지난 7월 발족한 'KTX경제권 포럼'의 민간 공동위원장을 맡아 활동 중이다.


최근 한국을 다녀보면서 새삼 느낀 거지만 한국 도시나 마을은 어디 가나 비슷비슷한 외형을 취하고 있다. 구석 구석 다니다 보면 차이들이 더 느껴지겠지만, 적어도 도로나 철도가 다니는 길 주변 풍경은 큰 차이가 없다. 국토가 좁다고 아우성치기도 한다. 사실 남한만 따지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철로 2시간이면 충분하니까 아닌게 아니라 좁다.
또 언젠가 지적했듯이 한국에선 공산국가의 '인민..' '공훈...' 마냥 '국민...'을 좋아한다. 국민배우, 국민여동생, 국민과학자, 국민가수, 국민영화, 국민드라마 등등. 4천만 인구에 천만이 보는 영화가 등장하고, 한국처럼 유행에 민감한 나라도 없다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 또 시시때때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잘 뭉치는가.
이런 현상을 문제로 삼으면 대개 '지역다양성', '문화 다양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규범적으로 보아 설득력있고, 옳은 방향일 수는 있으나 사실 그리 창의적인 발상이 아니다. 도덕 선생님 발언처럼 들리지 않는가. 참여정부의 국정 목표였던 '지방 분권화'에 대해서 과도한 수도권 집중이 가져오는 문제를 고려할 때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으나, 좀 참신한 발상이란 평가를 주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문제 혹은 단점, 약점으로 생각하는 한국의 특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아이디어, 그런 게 창의적 발상이지 않겠는가? '도시국가화' 주장은 국토가 넓지 않고, 문화적, 지역적 다양성이 부족한 것들을 역이용하는 발상이다.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은 짧은 기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창의성에 대한 접근은 학술적 담론에서도 적용될 것이다. 아니 적용되는 정도가 아니라, 학술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번뜩이는 아이디어 싸움의 장 아니던가. 그런 맥락에서 도덕선생님같은 하버마스보다 루만이 이론적으로는 더 급진적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렇다고 루만얘기나 주장을 반복하는 것만큼 또 지루한 일은 없다. 후학들은 끊임없이 루만을 넘어서려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서 루만을 탈구조주의적인 맥락에서 해석한다던지.... (U. Staeheli) [이것도 벌써 낡은 애기...].
하지만 창의적인 건, 새것을 선호하는 '신상증후군'과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외국이론을 선호하거나, 외국에서 유행하는 학술 담론 주제를 가지고 '들어오고', 외국 사례, 정책을 가져다 쓰는 건만큼 비창의적인 일도 없으니까...

2009년 11월 10일 화요일

"노는만큼 성공한다" (김정운, 2005)

어제 천안에서 대구로 오는 기차 속에서 책 한 권을 독파했다. 베를린에서'13년 동안' '그 어렵다는 문화심리학을 공부하고 독일학생들을 가르'쳤고 지금은 명지대 여가경영학과 (석사과정) 교수인 김정운의... 결코 만만치 않은 내용을 워낙 소화하기 쉬운 문장으로 쉽게 써 놓아서 '먹물'들이 '시간죽일' 때 이용하기에 맞춤인 그런 책이었다. 구체적인 책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할 여유나 여력은 없지만, 몇 가지 느낀 점을 잊기 전에 기록해두려 한다.

전문적인 지식을 쉽게 전달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전달하려는 전문적 지식이 개인적 경험, 삶 이야기와 잘 맞물려서 '씨너지' 효과를 낸다. 심리학과 동료였던 하버마스 아들이 '수줍고 착실한 생리심리학'자라거나, 악셀 호네쓰가 하버마스의 사위라는 주변적인 정보를 흘리는데, 일종의 '후광효과'를 노린 것이리라. 그렇듯 자기 자랑격인 얘기들이 적지 않은데 동시에 중간 중간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기도해서 그렇게 밉상스럽게만 보이지 않는다. 얄미울 정도로 독자를 울렸다 웃기는 능력.
세상엔 세 종류 교수가 있다고 소개한다 (p.128). 1. 어려운 이야기를 무척 어렵게 하는 교수 2.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사람. 3. 정말 쉬운 이야기를 아무도 못 알아듣게 설명하는 사람. 그러면서 스스로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자부함을 감추지 않는다.
가장 부러운 점은... 자신이 던지고자 하는 메세지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것이 지금 한국 상황, 맥락에서 아주 잘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과 기업과 정부와 각종 매체에서 와달라고' 조른다는 얘기를 떡하니 써 놓을 정도로...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하는 얘기에 세상이 귀를 기울여 주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지식인에게 또 있을까...
흠. 그러고 보니 자기 자랑이 좀 심한 편이긴 하다. 자기 자랑 심하기로는 김용옥을 따라 갈 이가 드물텐데, 그의 경우 '학벌 컴플렉스'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기고, 서울대). 하지만 그역시 감출 법한 얘기 - 학벌 컴플렉스를 포함해서 - 도 곧잘하며, 스스로에 대해서 충분히 성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자기 자랑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이 책에서도 그런 냄새가 낸다.
이 양반은 스스로 'B&G'를 하며 논다고 소개한다. 풀이한즉슨 '뻥 앤 구라'. 몇 가시 실례도 소개하고 있고... 입담이 좋은 것, 자기자랑,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는 능력, 구라, 뻥... 구분하기 힘든 얘기들이다.

p.s.) 본문 중에 "창의성의 원천은 '낯설게 하기'에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얘기를 여러 방식으로 변주, 적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술, 학문의 이해나 글쓰기 등에도. '놀람'의 효과를 줘야 한다.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언젠가 같은 제목으로 뭔가를 쓴 적이 있다. 아마 다시 저 제목을 떠 올린 지금과 비슷한 심리상태에 있지 않았을까... 정말 큰 일은 아니어도 떠올릴 때마다 괜히 다시 속이 끓는 그런 일이 있다. 특히 내 경우엔 내 상식으로 판단할 때 기대되는 행동이 있는데 - 정말, 상식적... - 상대방이 그런 기대를 깨 줄 때... 그 심리체계의 작동 메카니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 화가 난다. 생각해 보면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는 비상식적 행동에 대해서 특히 분개하는 것 같다. 내가 경멸하는 사람들 유형에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 포함된다. 그 밖에 무례한 사람들도 싫어하는데, '무례'와 '배려할 줄 모름'은같은 말인가? 어쨌든 난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겐 기꺼이 무례로 갚아주는 편이다. 때로는 집요하리만큼...

푸코와 한국 근대성 연구

지난 수 년간 한국내 인문학 담론에서 떠 오르는 주제인 '한국 근대성의 기원'을 다룬 저작들을 살펴 보고 있는데, 그 지면들 사이에서 강하게 풍기는 푸코 냄새를 모른 채 할 수가 없다 (혹은, 들뢰즈도?). 푸코가 18세기 프랑스를 대상으로 했던 연구틀을 한국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그대로 가지고 온 듯한. 국가 권력, 위생, 병리학, 감시의 시선, 타자, 탈영토화, 근대성의 주변 등등 자주 등장하는 표현 혹은 주제만 보더라도. 이진경, 고미숙 등의 '수유연구실 + 너머'에서 나오는 작업들, 현실문화에서 펴내는 책들, 권보드래, 천정환 등 국문학자들의 작업들, 민족주의에 대한 탈민족주의적 연구들...
그런데 재미있게도 매우 설득력있게 들린다.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떨어진다. 조금 더 읽어야 한계를 찾아 낼 수 있을텐데... 체계이론을 가져와서 한국 근대성의 '기원'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세종시 백지화는 범법행위”

정세균의 말이다 (한겨레 기사: 정세균 “세종시 백지화는 범법행위"). 이건 아주 좋은 구도 설정이다.'헌재'의 똘아이 짓, 미디어법 통과 및 개정 거부 등이 법률의 권위를 떨어트리는데 일조했고, 사실 이건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법률은 여전히 구속력이 가장 높은 수단이며, '법치국가'는 합리적인 좌파나 우파,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인 지향점을 떠나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점이다. 헌법도 장식적인 기능에 머무르다 조금씩 공공 담론 속에서 그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고. 언제가 내가 칭찬했듯이... 서울시가 광장 집회를 거부할 때, 그 누군가 시원하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서울시 조례 따위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제한할 수 없다'고... 오늘 송영길은 대정부 질문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절차상 하자가 있는 언론관련법도 (헌재가) 유효하다니까 집행하는 총리가, 여야가 합의한 세종시법은 왜 안 지키냐". 정세균 씨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 당장 떠오르진 않지만 - 그네들도 법률 무시하는 행태를 어디 한 두번 보였겠는가마는... 그래서 정세균, 송영길의 이런 비판을 다시 비판하려면 바로 그 점을 지적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박근혜가 행정중심도시 건설이 국민에게 한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고 했을 때, 같은 당의 어떤 이는 그렇다면 대운하 공약도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무식한 발언을 내뱉었는데, 공약과 법률의 차원도 구분 못하는 참 저질 판단력, 사고력을 보여준 행태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 '열사'가 마지막으로 무엇을 외쳤던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아니었던가? 법에 대한 인식에 대해선 한국은 1970년 11월 13일에서 별로 멀리 가지 못했다.

ps) 내 지론이기도 하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내용, 결과물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밖에 없으니, 거기에 대해서 합의를 추구하기 이전에, 절차, 수단, 평가 기준 등에 대한 합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

2009년 11월 5일 목요일

'한국사회'의 인식론적 전환

story telling, narrative 같은 표현은 사회과학 자료 분석 얘기하면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인데 한국 언론에서 자주 접한다. 특히, '마케팅'과 관련해서...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한국의 궁궐 담장이 왜 낮은지, 그 이유를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그냥 담장도 멋진 관광자원이 된다거나, 일본엔 무척이나 비싼 전통주들이 있는데 술만 파는 게 아니라 술에 얽힌 이야기 - 얼마나 오래된 술도가라던지... - 를 함께 팔기 때문이다, 그런게 우리 막걸리엔 없다... 등등.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와인' 을 즐기는 사람들은 와인을 매개로 해서 이야기 거리가 엮고 결국 그것을 함께 즐기는 것 아닌가? 독일 맥주도 그런 반열에 껴줄 수 있을 정도로 묵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어찌 보면 '여행'도 결국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이다. 유명한, 아닌 유명하다는 곳은 대개 이야기거리가 있다. 때로는 과장되어서... 그러니 막상 가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로렐라이 언덕). 이국적이거나 압도적인 경치가 아닌 곳을 안내해야 하는 여행가이드는 그러니까 열심히 입을 놀려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적어도 그 순간 뭔가 이야기거리가 있는 곳을 다녀왔다는 안도감을 줄 수는 있는 것이다 (언제가 나도 잘 모르거나 심지어 가보지도 않은 독일 여행지 가이드를 했었야 했는데, 열심히 얘기거리 외우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미술'감상도 이런 식이다. 변기 하나를 가져다 놓고서 작품이라고 우기는데 (뒤샹), 그걸 도대체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미술, 특히 현대 미술은 결국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를 소비하는 거다.
이런 현대사회 맥락에서 '구성주의'적 인식론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 아닌가? 학문의 현실의 반영이고, 학문은 또 현실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장기한 한국을 떠나 있었던 내 눈엔 '한국사회의 인식론적 전환'이 너무도 분명하게 들어온다.

2009년 11월 2일 월요일

영웅이 된 과학자...

국민 영웅이 되어 날다가 추락한 과학자를 아시오... 그렇다. 황우석 이야기다. 하지만 동서고금 영웅이 된 과학자 목록은 꽤 길다. 황우석처럼 극적인 부침을 겪은 이도 포함해서...(예를 들어 구소련의 생물학자 리셴코).
오늘 동아일보 기사 제목이다 "한 과학자의 죽음에 13억 중국이 울었다". 첸쉐썬(錢學森) 이란 원로과학자가 지난 달 31일 죽음을 맞이한 것 같은데. 기사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저장(浙江) 성 항저우(杭州) 시에서 1911년 12월 출생한 첸 박사는 상하이자오퉁(上海交通)대를 1934년 졸업한 후 칭화(淸華)대 유학생에 선발돼 중국대륙이 혁명과 항일전쟁으로 들끓던 당시 미국으로 갔다. 1939년 캘리포니아공대에서 항공우주 및 수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에서 미사일 개발에 참여했다. 그는 우수 두뇌 유출을 막으려는 미 당국이 귀국을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6·25전쟁에서 중국에 붙잡힌 미군 조종사와 1955년 교환되면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 중 국방부 전략미사일 개발프로그램에 참여해 핵무기 및 우주개발을 ... "

"첸 박사가 중국인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는 우주과학에 대한 기여 못지않게 중국인에게 애국심과 자부심 등을 심어주었기 때문. “내가 미국에서 배우고 일한 기간은 모두 조국으로 돌아가 인민을 위해 일하기 위한 준비기간이었다. 왜냐면 나는 중국인이니까” “외국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인도 다 할 수 있다” 같은 말 들은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전형적인, 아니 너무도 선정적인 민족주의/국가주의적 레토릭이다. 이런 기사는 내 평온하던 속을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과학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국경/조국이 있다"던 그 황교주님 말씀이 생각나서다. '전국민과학화'를 주창하시던 우리 박총통의 지령이 떠올라서다. '헌재' 수준이나, '조중동' 수준이나. 참...

영웅으로 만들어진 과학자는 적지 않다. 특히, 노벨상이나 최초로 뭘 발견한 사람들은 대개 그 반열에 쉽게 오르고, 또 최초 우주인도 대개 영웅, 적어도 유명인사로 대접 받는다 (최근 발견한 논문은 스웨덴 최초 우주인 Christer Fuglesang을 다루고 있는데 제목이... "Gunnarsson (2009), The First Swede in Space - the making of f a public science hero" 1992년에 우주에 간 모양).
이제 위인전 따위는 얘들 손에서 뺏을 필요가 있는데, 진리만을 추구하던 숭고한 과학자상을 만들어내는 과학사 역시 서가에서 치워야 한다. 첸쉐썬 옹이 정말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는지 모를 일이다.

18세기 역사학자 비코(Vico)는 역사의 전개를 순화과정으로 보았는데 그 한 사이클은 이렇다: 신의 시대 - 영웅의 시대 - 인간의 시대 - 야만의 시대. 어이, 동아일보여, 좀 미련이 남더라도 '영웅 시대'는 이제 좀 보내줘도 되지 않을까?

ps)'영웅' 혹은 '열사(烈士)가 필요한 시대가 있다. 혼란기, 이념 갈등이 치열할 경우. 영우이 필요 없는 시기가 태평성대. 허나... 근대는 기본적으로 위기가 일상화된 시대다. 없는 싸움, 위기도 만들어 내야 굴러가는... 언론, 정치, 학문이 대표적. 위기라고 해야 대안(세력)이 필요하거나 재집권해서 안정시켜야 되고 (정치), 싸움이 있는 것처럼 구성해야 얘기가 더 재미있어 지고 (언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기 위해 태어난 체계 (학문).... 위기가 일상화되면 '인간의 시대'는 불가능한가?

'예능'이란 카테고리...

유선 방송에선 도무지 언제 적 최초 방영된 것인지 알기 힘든 묵은 영상들이 어지럽게 오고 간다. 그 유선 방송용 프로그램 시장에서 이른 바 '예능'프로그램이 가장 환영받고 있음은 不問可知... 내용을 보고서 재방인지 구분할 능력이 떨어지는 내겐 어짜피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다. 어쨌든 어제 본 '패밀리가 떴다'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있어서 기록해 두고자 한다. 고정 출연자들이 있는데다 이승철이 초대 손님(?)이었다. 공교롭게 유재석을 제외하면 나머진 대부분 가수 출신이었다. 가수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승철의 정체성은 '대선배'다. 개그맨 '출신'이자 프로그램을 이끌다시피하는 유재석에겐 그저 여러 손님 중 하나거나 '방송계' 선배 정도 (물론 '형님'이라고 부르긴 한다). 커뮤니케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중 출연자들이 가수와 개그맨이라는 정체성 중심으로 배치되기 시작하고, 유일한 개그맨 '출신'인 유재석이 소외되는 식으로 진행된다. 중간 중간 정체성에 대한 다른 해석이 충돌하는데... 유재석은 윤종신에게 '예능계' 후배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려 하고, 이승철은 가수라는 정체성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싶어하는 윤종신에게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이라고 하면서 배제하려고 한다.

'예능'이라는 장르가 인기를 얻고 있는 현상이 흥미로운 사회학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얘기한 적이 있었고, 그 특징 중 하나로 '고향' 장르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던 이들이 '예능'이라는 새로운 - 혼성적인, 애매한... - 영역에서 빼어난 활동을 보이는 경우를 언급했다. 어쩌면 정반대에 위치시킬 수 있는 다른 특징을 발견했는데, 즉, '예능'이라는 새로운 장르에서도 '고향' 장르의 정체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아니 '예능'은 바로 고향 장르와 긴장감 때문에 새로운 장르로서 유지될 수 있다.

비슷한 해석은 학문 커뮤니케이션에도 적용된다. 분과학문의 경계와 학제간 연구나 새로운 학문의 경계 혹은 정체성에 대한 논의에서... 학제간 연구는 분과학문의 경계가 무너지지 않고 존재할 때만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경계를 뛰어 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잡종적 현상이 많아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제한된 복잡성만을 감내할 수 있기 때문에 익숙한 경계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부여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주목받고, 성공할 수 있는 유형의 활동이나 인간성이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고향 장르에 연결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면 장기적으로 성공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예능'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만드는 핵심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한 울타리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 긴장감은 아닐지... [흡사 군대 내무반에서 일어나는 현상과도 비슷한...]

2009년 11월 1일 일요일

한국에서 루만에 대한 논의

비록 몸이 한국 땅에 있지만 바로 그때문에 루만이 한국에서 어느 정도로 소개되고 있고 학문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으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더 잘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정보를 접하는 통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 어쨌든... 날이면 날마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열정으로서의 사랑' (새물결)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사회의 사회' 번역작업이 꽤 많이 진척된 것 같고, 다른 루만 저작에 대한 번역계획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있다. 또 올 해 사회학대회에서 "루만의 위험사회론으로 본 2008년 인간광우병 파동"(문정환)이란 논문이 발표된 것을 오늘 확인했다. 루만 전문가로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정성훈은 올 해 초 "루만의 다차원척 체계이론과 현대 사회진단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진보평론 여름호에 - 글 자체는 블로그에서 이미 본 적이 있지만 -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를 발표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루만을 언급하고 있는 한국어 검색물의 질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좋은 현상이다...
사실 이 글은 조금 전 문정환 글을 대략 읽어본 이후에 든 생각을 적어 놓으려고 시작했는데...
대략 80년대까지 루만 스스로도 기능적 분화로 정점과 중심 없는 사회가 되었음을 강조하였고, 그것 자체가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수용되었다. 여전히 정치나 국가 혹은 다른 극단에선 경제나 계급 중심적인 사회이론이 지배적이었으니까. '포스트모더니즘' - 대략 이렇게 표현하기로 하자 - 이 득세하면서 루만은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이해되기도 하였고, 사회이론에서 여전히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대주의자이면서 하버마스 식은 아니라 좀 참신한 면이 남아있긴 하지만, 루만의 기본적 착상은 포스트모드니스트나, 기든스 벡 같은 후기근대주의자들에게도 대부분 수용이 되어 버렸거나 결과적으로 비슷한 얘기를 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물론 루만과 체계이론가들은 무엇보다 체계의 경계 유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여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구별이 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매우 고리타분, 혹은 이미 늙어버린 보수주의자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 "기능적 분화된 사회이다. 체계는 경계를 유지하게 되고, 그래서 위계적 통제나 합의의 가능성이 떨어진다" 이건 80년대 후반 Oekologische Kommunikation을 출간할 때나 파격적으로 들리던 얘기라는 말씀. 내가 추적한 바로 일부 체계이론가들은 이미 교조적인 '기능적 분화' 주장을 떠나고 있다 (Bora 교수도 - 체계이론 발전에 기여할 목적을 갖진 않았지만 - 법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참신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체계이론이 참신하게 들리는 경우는 어쩌면 기능적 분화를 '전제'하고서 바로 그 전제 때문에 이전에 익숙하던 현상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사례들 아닌가 싶다. 왜 현대사회에서 '사랑'이 오히려 중요해지는가, 왜 기능분화에도 민족주의/국가주의/근본주의가 득세를 하고 있는가, 왜 파편화된 사회에서 개인을 포섭/배제하는 메카니즘이 중요해지는지 등등. 혹은 역시 기능적 분화를 전제로 하고서 장기간 의미론의 변화를 추적하는 지식사회학적 작업이랄지 (한국 근대성의 기원 같은...). 여기에서 혼자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는 그 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