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시위,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한 논의가 아주 재미있다. 한 편에 어찌되었건 정당정치, 특히 양당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최장집 교수가 있고, 그를 최 교수를 서구 민주주의 모델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보수적 제도민주주의학파의 일원으로로 보며 촛불시위를 창조적 대안으로 이해하려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오늘 오마이 뉴스 기사에서는 '지행네트워크'의 이명원, 오창은 씨가 소개되었다 ('오마이' 성공비결은 시민기자에 있는 것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전임기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기사작성법 정도는 제대로 가르쳐야 할 것 같다. 인터뷰까지 한 걸 봐서 전임기자가 쓴 것 같은데,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서 가져 온 글, 인터뷰, 자기 견해 등이 난삽하게 짜집기 되어 있다. 이런 것도 제도화된 기사작성의 틀을 깨보려는 창조적 노력의 결과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내 지론이기도 하지만 이런 얘기는 이제 전문가들이 주도해야 한다. 이명원, 오창은 모두 국문학을 하는 사람들이다. 혹 그들이 속해있는 지행네트워크가 민주주의, 사회운동 같은 주제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단체라면 달리 생각할 볼 일이고, 다른 사실 정치학, 사회운동 전문가들 중에서 경청할만한 일관된 견해나 창조적 해석을 내놓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은 형편을 고려하면, 오마이를 통해서라도 이런 얘길 듣게 되는 걸 고마워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이 부족, and/or, '서구' 모델에 경도된 탓인지 나도 최장집 교수 견해에 동의하는 편인데, 아침부터 더 따지고 들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아서, 몇 가지 중요한 논점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기회되면 가까이에 있는 사회(운동)전문가들의 견해도 들을 수 있게 되길...
최장집:
최장집 전 교수는 최근 한 토론회에서 "권위주의적 권력행사와 정책결정에 결정적 제약을 가했다"고 촛불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운동만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고 일갈했다.
"하나의 정책이슈를 운동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때, 쇠고기 수입협상문제가 끝나면, 민영화, 교육 등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시민들은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고,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운동간의 충돌로 일관하게 된다."
최 전 교수는 "무엇보다도 현대민주주의는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며 "시민들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과 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 결사체들을 통해 최대한 광범하게 정책과정에 투입되어야 한다"고 자신의 지론인 '정당정치의 복원-활성화'를 강조했다
최 교수가 언급한 '운동의 5가지 한계'란 ①대안을 형성하거나 여러 대안들을 조정해 결정하기 어렵고, ②각 이슈들의 중요성을 위계적으로 배열해 일상적으로 정책을 추구하기 어렵고, ③다른 이슈들이 등장할 때마다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고, ④강열한 열정이 장기간 유지되기 어렵고, ⑤시민사회 내부의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 등이다.
이명원:
결국 '양당체제의 복원'이라는 대의제의 '신화화'에 끈길기게 구속되어 있다. 이들의 민주주의론은 내 판단에 이제는 '낡은 보수주의'다.
그들은 광장에서 이론을 구성하지 않고, 이론에서 광장을 유추하고 있다.
이런 텍스트 자유주의가 한국정치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냉소주의와 허무주의 이외에 과연 대안이 있는가. 여의도 국회와 무관하게 아름다운 촛불을 그 낡아빠진 '이론'의 안경을 벗고 볼 수는 없는 걸까. 정치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말보다는 '상상력의 빈곤'이라는 것.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오창은:
"촛불시위는 경험의 반복이면서도 운동의 형식 등에서 새로운 변화들이 있다. 운동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예전의 시위나 집회와 다르다. 무거운 이슈임에도 거리에서 소통하는 방식은 밝고 즐겁다. 촛불에는 구호로서가 아니라 행위로서 낙천성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대상을 질타하는 방식과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오 연구위원은 "촛불을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로 봐야 한다"며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는 데서 벗어나 생명의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기가 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사안을 두고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것을 포용해서 어떤 성과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강박이다. 그런 강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 강박은 애시당초 '촛불은 내 것'이라고 생각한 데서 비롯됐다. 의미, 수습, 성과 등에 너무 조급해하면 안 된다. 그런 강박이 촛불을 수그러들게 하고 자발적 진화에 걸림돌이 된다. 자연발생했기 때문에 갈 때까지 가는 것이다. 질적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미래의 일이다."
"정당질서와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비상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 군주제 시절에도 시민의 동의는 실질적이든, 형식적이든 요구되었다. 국가는 시민의 동의없이 운영될 수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적 질서 속에서 시민의 동의가 이뤄지지 않은 정책이 강압적으로 추진되었고, 시민의 저항에도 무심할 뿐이니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동의의 원칙'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복원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최 교수의 태도는 '교과서적 강박'일 뿐이다."
오 연구위원은 "더 큰 문제는 최 교수의 시각이 현 상황을 오로지 정치영역만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데 있다"며 "광범위한 영역에서 생명의 정치, 일상의 정치, 광장의 문화정치가 싹트고 있는데도 이러한 가능성을 제도정치라는 온실 속으로만 옮기려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연구위원은 "(촛불의 진로를) 제도의 민주주의로 수렴하려는 것은 (촛불의) 미래를 가두는 것"이라며 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한국사회는 서구사회가 가지 않는 길을 만드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서구의 민주주의가 우리의 모델일 수는 없다. 한국의 길은 전혀 다른 길일 수 있다. 그걸 두려워하지 말자. 시민의 직접행동과 주체의 판단에 따라 정치적 상황이 바뀌고, 한 공동체의 진로가 바뀌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촛불시위는) 한국 사람들이 가진 역량과 우리가 올바르다고 생각해온 서구의 근대적 정치질서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대의제 민주주의론'에 천착해온 최 전 교수를 겨냥한 것이다. 그가 서구의 민주주의 모델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그는 "최 전 교수가 제도권적인 냄새를 풍긴다"는 지적까지 내놓았다.
"최 전 교수가 대의정치를 강조했던 80-90년대와 2000년대의 맥락은 다르다. 2000년대 들어서 시민의 직접 의사표현이 강해졌다. 대의제에 대한 실망이 쌓이면서 직접 얘기해야겠다는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대의제의 오작동 상태가 아니라 대의제의 비상상태다. 권력을 위임받는 쪽에서 주권자의 요구와 무관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은 주권자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