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복제가 개체복제와 배아복제로 분화되면서 본격적으로 갈등 구도가 드러난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999년 9월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주최로 열렸던 합의회의 (9.10 - 9.13). 16명중 14명의 반대로 배아복제에 대해서도 반대하기로 합의한 것. 이는 물론 몇몇 비전문가들이 숙고해서 만들어낸 제안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진행될 논쟁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합의회의에서 윤리적 측면, 생명윤리가 중요한 논점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연구 현황, 법적 윤리적 논점, 여러 국가의 규제 정책 현황 등 생명윤리논쟁에 대한 기본적 논의 도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생명윤리'는 서구에서 마련되었던 원칙론(4원칙) 혹은 나중에 황우석 사건 때 문제가 되는 사전동의 (informed consent) 같은 생명윤리, 의료윤리의 기본적 원칙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시기 생명윤리는 복제, 줄기세포 등 최첨단 연구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였고, 연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과기부, 복지부가 법제정 논의를 주도하며 경쟁하던 시기에 (2000 - 2003) '생명윤리' 의미론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여러 방식으로 표현된다. 만들려고 하는 법을 '생명윤리법', '생명윤리기본법'으로 부르는 것 만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생명윤리는 '복제'의 윤리적 문제라는 틀을 넘어서서 생의학 여러 분야를 다루도록 전환된다. 생명공학에서 생의학 문제로 전환되는 데에는 무엇보다 보건복지부의 역할이 컸다. 과기부와 주도권 싸움에서 결국 인간개체 복제 금지 등 최소한의 규제를 지향하던 과기부마저도 '생명윤리'가 지칭하는 내용을 확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과기부 주관으로 구성되었던 '생명윤리자문위원회' 활동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000. 11. - 2001.10.). 자문위원회 활동과 발표된 시안을 중심으로 제시되었던 논의도 배아연구 허용 범위가 핵심이었다. 윤리논쟁이 매우 특정한 이슈에 집중된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여러 생명윤리 이슈들은 별 논의없이 서구에서 널리 알려져있는 방식에 따라 수용되고, 큰 저항없이 기타 넓은 연구 분야가 규제의 대상으로 도입되게 된다. 한편으로 생명윤리의 의미가 확대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확대된 생명윤리가 여러 영역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이기도 했지만, 결국 가장 논쟁적이었던 주제는 '배아를 이용하는 연구 허용 범위'가 되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 생명윤리가 쉽게 정착되었지만 전반적으로 '생명공학육성법'을 만들었던 그 경로 위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술발전, 경제성장에 걸리는 분야에 논의가 집중되는 것이다. 그게 지배적인 해석틀이고 반대를 하더라도 그 틀을 수용하는 선에서 문제제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공유하는 것. 그 결과 '생식 기술', '여성의 몸', '환자의 권리' 등은 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생명윤리'라는 의미론이 갖는 포괄성을 이용하려는 담론연합체가 한 쪽에 있고, 다른 담론연합체는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피하려는 한다. 관철시키려는 법안의 이름이 다르다. 생명윤리법, 생명윤리기본법, 생명안전 및 윤리에 관한 법률이 한 편에, 인간복제금지에 관한 법률이 다른 한 편에.
국가 차원의 논의에서 그런 지배적인 해석틀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개인의 권리, 독일의 경우 인간 존엄성이다. 영국은 어쩌면 '관련 연구를 선도하기'일 것이다. 생명윤리 논쟁도 사실 그 큰 프레이밍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황우석 사건과 더불어 자발적 동의가 큰 문제가 되었지만 더 이상 지속적인 논쟁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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