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 숙어, 사자성어 등이 대개 그렇지만 몇 개의 단어만 가지고서 삶의 단면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그런 문장들에 놀랄 때가 많다. Ende gut, alles gut! 은 어떤가? 다른 문화권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독일어 표현는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약간 비틀면, "Ende nicht gut, alles nicht gut"이다. 더 실감난다. 이런 심리적 기제의 작동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 복음서에 먼 친척뻘쯤되는 비유가 있는데,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내용이다. (마 7: 16 - 20). 독일 속담의 'Ende'와 복음서 '열매'는 어떤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느낌은 약간 다른 것 같다. 그 이전까지의 모든 과정(alles)을 다 정당하게 만들 그런 힘을 가진 'Ende'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성공, 출세 뭐 그런 류 아닌가? 반면에 성경의 '열매'는 좀 더 추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본문을 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고 했으니 말이다.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아름답다, 아름다운 열매라... 그게 뭘까? 우선 순복음 교회의 공식 신학인 '삼박자 (혹은 삼중) 축복'은 어떤가. 삼박자란 영혼, 범사, 건강이고 예수님를 믿으면 그 3박자가 다 잘 풀린다는 좀 뜨악하게 하는 이런 것도-신학이다. 허나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애매하다. 그 중 '건강'이 좀 구체적인 것 같지만 '건강/건강하지 않음'의 구분이 얼마나 위태로운 구분인지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밖에 막스 베버가 얘기했던 개신교 윤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칼빈 교리 중 구원예정설이 있는데 그 예정의 여부는 현세의 경제적 성공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의 친화성이 있다는게 베버의 유명한 테제다. 이런 베버 테제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기독교 안에서 성공, 출세 지상주의가 강하다는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미국, 한국 기독교에서 더 그렇다는 것도... 솔직히 어디 그게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긴인가. 현대인들 중에서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 탓이거나, 아님 자본주의 때문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MB가 원인제공자일수도...
좀 다른 맥락에서... 우린 여러 가면(persona)을 쓰고 살아간다. 내 속내를 드러내더라도 걸러야 한다. 어쩌면 위에서 얘기한 '성공'과 관련된 쪽으로 해석되도록... 사회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특성, 성향, 덕목, 기질은 여과없이 드러내도 되지만, 그 반대를 드러낼 때에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런 조절은 잘 해야 한다. 여차하면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합리화를 하는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너무 솔직해도 곤란하다. 이유는, 뭐,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이것에서 자유로운 사람 역시 별로 없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떤 가면을 쓸 지, 맨얼굴을 얼마나 보여줄 지, 조절을 잘 해야 한다 (아, 그리고 맨언굴과 가면, 그 구분은 실제로는 허구다. 아니 '맨얼굴'은 지평선과 같다고 하는게 더 적절하겠다. 보이긴 하지만 도달할 수는 없는...) 슬픈 현실이지만, 사는 동안 여기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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