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요즘 언론을 통해서 자주 듣는 단어, 개념 중에서 의미론 연구 대상을 꼽는다면 난 '소통'과 '진정성'을 꼽겠다. 둘 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아주 '각광받는' 개념이 되었다. 내 관찰에 따르면 이정부는 초기에 '섬기는 리더쉽', '일꾼' 이런 식으로 새정부의 틀거리를 잡아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인수위 때부터 능력과 철학 부족으로 갈팡질팡하자 이제 그 모든 비난의 근거가 '오해'였다고 강변하기 시작한다. 문제의 본질을 제대포 파악할 능력마저 갖추지 못한 이 인사들은 해결 방식을 이제 '진정성'을 담은 '소통'에서 찾으려고 한 모양이다. 진심을 몰라주는 야속한 국민들,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 하면 오해가 풀리고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 생각해보면 이건 하버마스식 해법아닌가? 5공시절로 돌아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어쩜 하버마스식 이상적 담화상황을 지향하려고 하는 이 정부의 속내를 우리가 너무 몰라주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들은 소통개념은 자신들의 일관성 없는 메세지를 어떻게든 이해시키려는 PR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상대가 전하는 메세지는 전혀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 처럼. 참으로 '소통', '진정성'이라는 개념이 부끄러워해야 할 사태다. 재미있는 건 왜 굳이 '소통', '진정성'이란 개념을 가져다 썼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 개념들은 매우 어색하고 생뚱맞아 보이는 데도 말이다. 그럴듯하게 들리니까?
내 관찰에 따르면 '진정성'은 문학평론 등 문학 언저리에서 주로 쓰이던 단어다. 그건 그나마 참아줄 수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진정성'이 들어간 표현을 더 자주 듣게 되었는데, 주로 사회운동이나 나름 진보적 인사들의 발언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그러다 이제 심지어 이 정부 인사들의 입에서 이 단어를 듣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진정성'이 전달하는 의미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소통이란 표현도 비슷한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의사소통'은 아마도 'communication'의 번역어로서 처음 등장했을텐데, 언제부터인가 '소통'으로 줄여서 쓰는 일이 생겼다. 어쩌면 하버마스의 책 'Theorie des kommunkativen Handelns"의 한글판 제목을 '소통행위이론'으로 단 것이 그 첫 시도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역자 서문에 하버마스의 Kommunikation 은 언어적 의사소통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에 '소통'으로 번역한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건 그 무렵부터 네 글자인 의사소통의 절반만으로 비슷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경제성 때문인지, 아니면 왠지 애매모호하면서도 그럴듯하게 들리는 효과때문인지 '소통'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게되었다. '진정성', '소통'이라는 단어가 왜 그렇게 즐겨 선택되며, 도대체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 더 자주 쓰이게 되면서 그것이 전달하는 의미 또한 변했을까? 구조적 차원의 변화와 연결지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구조적 변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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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이 MB정권에 의해서 애용되고, 이 정권에 대한 비호감도가 급증하면서 '소통'이라는 단어에 깜짝 놀라는 현상도 등장한다. 2008년 9월 27일자 기사 "김기덕 감독 '관객과의 소통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기사에 대한 반응 중:
'소통' 얘기 좀 꺼내지 말아줬으면... [1] 유빈님 08.09.26
이젠 이 단어만 들으면 무서버 그넘아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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