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이런 책이 나오는구나! 반가운 마음에 얼른 훓어보았다. "사회이론의 역사" (캘리니코스 저, 박형신 외 역, 한울 2010). 2007년에 나온 2판을 번역했다 (1판 번역서는 일신사에서 출간됨 2007?). 목차를 보니 제목 그대로 '사회이론의 역사'다. 글쎄 교과서로 쓰기에 좋을 지 모르겠지만 - 번역, 출판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인? - 이런 접근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그냥 덮으려는 찰나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지멜. 하, scohn wieder.... 초기 독일 사회학자 Simmel을 그렇게 옮겨 놓으셨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Simmel은 '짐멜'로 부르는게 온당하다 (한국어로 된 다른 '사회학' 문헌에서 Simmel을 지멜로 표기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Simmel 지멜'로 검색하니까 상당히 많은 결과물이 뜨긴 하지만.. 쩝...). 독일사람이고 독일에서 그렇게 부르니까... 미국식으로 읽으면 지멜인가? 글쎄...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부르는 것 같지 않지만 Max Weber의 경우 한동안 '베버'가 아닌 '웨버'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런 유형의 오독일까? Marx의 경우 여전히 대부분 '마르크스'라고 쓰지만 '맑스'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한 것 같다. Durkheim의 경우 뒤르껭,뒤르카임 등도 쓰였는데 최근에는 '뒤르켐'으로 정착되는 것 같고. 남의 나라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책도 아니고 '사회이론의 역사'를 다룬, 그것도 '짐멜'의 '돈의 철학'을 낸 '한울'에서 나온 책에서 Simmel을 '지멜'로 옮기는 건 좀 실망이다. [음. '돈의 철학'은 한길사에서 나왔다. 착각^^ 그걸 지적한 댓글을 누가 달았던 것 같은데 사라졌음. 여하튼 감사...]
ps1) 헌데 상표 이름 'Tommy Hilfiger'를 '타미 힐피거'로 표기하는 걸 보고선 좀 당황했다. '타미'라... 미국상표고 미국에서 그렇게 부르니까? 흠. 쉽지 않다.
ps2) 아마 고유명사 표기 원칙은 "고유명사의 출신국가에서 발음되는대로 가깝게...".. 대략 그렇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Ronaldo도가 호나우도가 되었고... 어쩌면 난 그게 불편한 모양이다. 독일어, 영어를 떠나서 가능하면 a -> ㅏ, o -> ㅗ 등으로 일관되게 표기하는 게 옳은 것 같다. 독일어 발음은 우연히 그런 표기방식에 더 가까운 것이고.(...) 아니, 그것도 쉽지 않은게 영어권 이름 Jane을 '자네'라고 표기할 순 없는 것 아닌가?
ps3) '원칙적'으로 고유명사는 말 그대로 고유한 것, 유일한 것이니 발음과 표기도 '가능한' 그 고유성을 최대한 지켜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각 언어권에서는 그 나름대로 - 고유하게 - 외래 명사를 읽는 방식을 정할 수 있고 또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두 원칙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 것. 예컨대 미국에선 그네들이 읽는 방식을 좇아 Max Weber를 [막스 웨버]로 부를 수도 있고, 우리가 W -> [ㅇ]으로 표기하기로 했다면 '웨버'로 적을 수 있는 문제다. 내 경우 Kwang-Jin이 독일에서 '크방인'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거부감을 갖지 않았고 심지어 스스로 그렇게 소개하기도 했으니까 (몇몇 한국인은 이런 내 '행태'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Kwang-Jin은 이미 '광진'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담... Simmel을 '지멜'로 표기할 수도 있단 말인가? 아니! 이 경우엔 'm'이 두 개니까 '짐멜'로 쓰는 게 한국식 라틴알파벳 읽는 습관에 비추어 볼 때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결론: 혹 미국에서 Simmel을 [지멜]로 부를 수는 있겠지만, 한국어로는 어찌되었건 '짐멜'이어야 한다.
ps4) 잠실 루터회관에 루터 상이 있는데 한글로 '말틴 루터'라고 써 놓은 걸 확인했다. Marx를 맑스로, Martin을 말틴으로 쓰는 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인데 '맑스'만큼 자부 보지 않아서인지 어색하다. 왜 이 경우엔 '마르틴' 혹은 '마틴'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지? 도대체 내 원칙은 뭔가? 내게 익숙한 것? -_- '
그러다 맑스'란 표기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발견했다.
대단히 비정상적인 표기입니다. 우리말에서 ㄺ 받침이 있을 때 뒤에 모음이 오면 (예를 들어 '맑은'에서 처럼) ㄹ과 ㄱ 발음이 다 나지만 뒤에 자음이 오면 ('맑다') ㄹ을 발음하지 않습니다. Marx는 발음이 [marks]인데 자음이 세 개가 연이어 있지요. 우리 말에서는 그런 경우는 없기때문에 중간에 ㅡ(으) 모음을 넣지요. 따라서 말크스나 마릌스, 마르크스는 가능해도 맑스는 불가능한 표기법입니다. 그런데 말크스는 r 발음이 나지 않고 l 발음이 나기때문에 원음과는 동떨어져 있어서 쓰이지 않지요. 마릌스 역시 '릌'자가 생소하기 때문에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표기는 당연히 마르크스여야 겠지요. Marx를 영어식으로 발음할 때는 물론 r 발음이 혀를 마는 정도로만 발음이 되지만 그렇다고 맑스라고 쓸 수 없는 것은 우리말에는 그런 발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의 ㄹ은 r 또는 l 의 음가를 갖지만 ㄺ에서의 ㄹ은 소리날 때 항상 l 의 음가만을 갖습니다. 비슷한 예로 독일 화폐 단위는 Mark인데 이것을 '맑'이라고 쓰는 경우는 없지요. 흠... 어렵다. 국립국어원은 '맑스'가 아닌 '마르크스'의 손을 들어 주고 있다. "실제 원어 발음은 '칼 막스'에 가깝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카를 마르크스'가 맞다. x를 '크스'라고 쓰기 때문이다."
ps5) 'enjoy'를 '엔조이'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실수도 아니고 원어민 발음을 몰랐기 때문도 아니라 스스로세운 표기 원칙에 따른 것 같은데... (김용옥). (왜 '즐기다' 등으로 표현하지 않고 굳이 '엔조이'라는 표현을 가져다 쓰는 지는 논외). 어떤 원칙일까? 그가 일본어, 중국어에 관해선 아내와 함께 CK-표기법을 만든 건 알고 있는데, 그 밖 외국어를 표기하는 것에 대해선 어떤지... CK표기법의 원칙을 '원음주의'라고 하던데 "enjoy"를 "엔조이"로 쓰는 건 그 원칙을 따르는 게 아니잖은가?
ps6) 이참에 '공식' 외래어 표기법을 찾아 보았다. 그 문제에 대해서 오랫 동안 고민한 사람들이 분명한 원칙을 마련해 둔 걸 확인했고 앞으로 그 원칙을 존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표기의 기본 원칙"으로
제1항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 자모만으로 적는다.
제2항 외래어의 1음운은 원칙적으로 1기호로 적는다.
제3항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
제4항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5항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
제3항에 따르면 '맑스'로는 쓸 수가 없다.
또, 같은 단어라고 하더라도 언어별로 다르게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인 Luther, Martin는 "루터, 마르틴"이지만 미국인 "King, Martin Luther Jr."는 "킹, 마틴 루서"다.
ps7) 조관희 교수의 글 중에서...[중국어 한글표기법 논의를 바라보는 한 시각]. "필자가 중국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면 누구나 필자를 “조관희”가 아니라 “자오콴시(趙寬熙)”라 부른다. 하지만 고유명사라는 것은 “말 그대로 둘이 아닌 오직 하나뿐인 고유한 존재에 붙이는 이름일진대, ‘조관희’는 세계 어디에 가더라도 ‘조관희’일 따름일 뿐, 그 어떤 별도의 독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독 중국인들만이 나의 이름을 ‘자오콴시’라 부 르고 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더 이상 ‘서울’이 ‘한청(漢城)’이 아닌 ‘서우얼(首爾)’이듯, 나의 이름도 ‘자오콴시’가 아닌 ‘조관희’일 따름이다.” 흠... 이것도 일리가 있는 말인데. 그렇다면 나는 독일인들이 내 이름을 "크방인"이라고 부를 때 가능한 그들 발음을 교정했어야 했나? 흠... 다음 말도 일리가 있다. "결국 이상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찾을 수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한 변화의 한 사례로 우리는 모택동에서 등소평 또는 덩샤오핑을 거쳐 쟝쩌민과 후진타오에 이르는 하나의 흐름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毛澤東’은 ‘마오쩌둥’이라는 명칭보다는 ‘모택동’ 쪽이 더 친숙한데 반해, ‘鄧小平’의 경우는 ‘등소평’이나 ‘덩샤오핑’ 모두 익숙하다. ‘江澤民’의 경우도 ‘鄧小平’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胡錦濤’에 이르면 상황은 그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진다. 이미 ‘胡錦濤’는 ‘후진타오’가 익숙하지 ‘호금도’라는 ‘소리’는 아주 낯설게 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원음주의를 따를 것인가 하는 것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현실은 이미 원음 그대로 읽는 것이 하나의 대세로 굳어가도 있다는 것이다."
ps8) 이 글에 ps를 계속 달면서 정리하고 있는 중인데, 물론 전문가들이 애써서 만들어 놓은 '외래어표기법'을 존중하는 게 옳을 것이다. 쓸만하기만 하다면... 기본적으로 '원음주의'를 원칙으로 삼으면서 각 언어권에 따라 표기하는 방법을 구분해서 구체적으로 마련해 놓은 듯하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헛점 투성이다. Luther를 독일어권 이름인 경우 '루터', 영어권 이름은 '루서'로 하도록 한 모양인데, 왜 그런 이해할만한 규정이 'mm' 같은 복자음엔 적용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Simmel이나 Zimmermann을 '지멜'이나 '치머만'으로 쓰게 되어 있는 건 무슨 속인지 원... (글자 중간에 있는 복자음은 하나만 인정한다! 뭐 그런 원칙인가? 헐... ) 재미있는 건 Zimmermann의 'Zi-'를 '치'로 쓰는 것. 왜? 차라리 '지머만'이라고 하지? Weber도 '웨버'라고 하고! 맑스'가 아니라 '마르크스', '함부억' '함부릌' '함부륵'이 아니라 '함부르크'로 쓰게 하는 건 이해할만한데 왜 '지멜', '치머만'?
ps9) Simmel을 '지멜'로 표기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동지'를 만났다 (여기). 최근에 출간된 '화폐 인문학'을 소개하면서 이 블로그 주인은 이렇게 써 놓고 있다. "흥미로운 주제. 역자가 짐멜 Simmel을 지멜이라 명명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 짧은 언급에 달린 댓글이 또 재미있다.
동수 2010-12-29 11:48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지멜(O), 짐멜(X)" 입니다. http://www.korean.go.kr/09_new/dic/rule/rule_foreign.jsp
faai 2011-01-04 09:36
'에 따르면'은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영어 'according to'를 일본어로 번역한 후, 이를 우리말로 직역한 표현이라 합니다. 한문 투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 speller.cs.pusan.ac.kr
ps9) 아마 마지막 부기가 될 듯. 내 나름 결론을 내렸으니. 독일어에서 자음이 중복되는 경우라고 항상 발음되는 것은 아니다. 나름 헤아려 보니 'mm' 과 'nn'이 이에 해당하는 것 같다. 외래어 표기법은 이걸 인정하지 않으니 Simmel은 지멜, Immanuel Kant는 이마누엘 칸트, Anna는 아나, Emma는 에나, Zimmerman은 침머만이 되어야 옳은 것이다. 참 기가막히고 코가막힌다, 그죠? 외래어 표기법을 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아주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다. "같은 자음이 겹쳤을 때에는 겹치지 않은 경우와 같이 적는다. 다만, -mm-, -nn-의 경우는 ‘ㅁㅁ’, ‘ㄴㄴ’으로 적는다." 캬. 그럼 게임 끝인가? 모두 이 구절을 몰랐단 말인가? No! 왜냐하면 위 내용은 이태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타이어 표기법에서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스웨덴어 이름 'Bromma'는 '브롬마'라고 예까지 들어 주고 있다. 왜 이런 내용이 독일어 발음에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 참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상한 규정때문에 칸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이마누엘'이라고 불러야 하다니... 무슨 호부호형 못하던 홍길동도 아니고, 참...
ps10) 약간의 충격..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지금까지 독일어 발음을 잘못 알고 있었단 말인가?
"자음이 중복될 때는 단자음과 음가가 같지만 앞의 모음이 짧은음이 됩니다.
ⓐ ff [f] : hoffen [h f n] (= to hope)
ⓑ ll [l] : Brille [bril ] (= glasses)
ⓒ mm [m] : kommen [k m n] (= to come)
ⓓ nn [n] : nennen [nέn n] (= to call) (...) "
"Double consonants (FF, LL, MM, NN, PP, RR, TT, rarely BB, DD, GG, KK, WW, ZZ) are always pronounced as one. They indicate that the preceding vowel is short. The only exception to this rule is SS."
독일어 발음이 병기되어 있는 사전을 찾아 보니 역시 같은 내용이다. 정말 그런가? 믿기 힘들다... 칸트의 이름은 이마누엘이고, 고전 사회학자는 지멜이었나? 잘못된 언어 습관, 선입견이 그동안 엉뚱하게 듣게 한 걸까? 흠...
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영성=사랑=관심
영성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본질은 관심이다. 영성=사랑=관심. 욕망, 습관, 자동화 기제의 틀을 깨는 게 영성, 즉 사랑의 관계에 이르는 훈련의 출발점이라면, 그건 곧 무관심의 벽을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타자에 대한) 습관화된 무관심! 그런 틀을 깨고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의 일상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 투성이다. 지나치게 많이 주어지는 정보들 - 현대인의 관심을 끌어 보려고 감수성을 자극하고 찔러대는 저 광고들을 보라 - 생존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관심사들, 처리해야 할 일들만으로 우리 정보처리 능력은 이미 포화상태인 것이다. 그 때문에 긴요하지 않다고 이해되는 일들로 관심을 돌리기가 어렵다. 혹 여력이 있더라도 우리 관심은 대개 우리 자신에게 쏠려있다. 자기애... 넓어져 봐야 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식구들 정도? 가족애... ('피붙이'라 하더라도 가정의 울타리만 넘어서도 관심의 강도와 영역은 급속히 줄어든다.)
어짜피 가용 에너지와 처리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니 "영성=사랑=관심"의 일에 투자하려면 다른 쪽에 쏠리는 에너지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단순하고도 느리게 살 필요가 있는 것. 우리 관심을 끌어 당기는 정보를 제한하고 -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매스미디어 -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어떤 일에 왜 관심을 갖게 되는지, 왜 무관심한지... 습과화된 관심, 자기애, 가족애를 비우고 습관, 자기, 가족의 경계 바깥에 있는 타자 - 사람, 자연, 사물, 등등 -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습관을 거스르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할 범인들은 아마 평생을 이쪽 저쪽 기웃거리며 안절부절하며 보낼 것이다. 그런 일로 안절부절 할 수 있기만 해도 이미 성공한 인생이다.
어짜피 가용 에너지와 처리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니 "영성=사랑=관심"의 일에 투자하려면 다른 쪽에 쏠리는 에너지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단순하고도 느리게 살 필요가 있는 것. 우리 관심을 끌어 당기는 정보를 제한하고 -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매스미디어 -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어떤 일에 왜 관심을 갖게 되는지, 왜 무관심한지... 습과화된 관심, 자기애, 가족애를 비우고 습관, 자기, 가족의 경계 바깥에 있는 타자 - 사람, 자연, 사물, 등등 -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습관을 거스르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할 범인들은 아마 평생을 이쪽 저쪽 기웃거리며 안절부절하며 보낼 것이다. 그런 일로 안절부절 할 수 있기만 해도 이미 성공한 인생이다.
사회체계는 이중 우연성이 지배하기 때문에 (die Unwahrscheinlichkeit der Kommunikation) 자기준거적으로 작동하는 심리체계는 때때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심리체계와 심리체계가 직접 부딪히는 '상호작용'의 경우에 당혹감을 주고 받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오고 가는 정보가 이해되는 가능성의 경우 수를 줄여주는 매체가 - e.g. '신뢰' '프레임' '스크립트' 등 - 공유되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당혹감은 상호작용 참여자가 상호작용의 독특한 코드를 찾거나 좇는 대신 심리체계의 코드에 충실하는 경우다. 그러면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이 끊기며 분위기가 갑자기 차가워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당혹감을 해결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우선 자신이 준거로 삼는 의미틀로 당혹스러운 상황을 예외적인 것으로 규정, 처리하려는 유형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를 '지배적 커뮤니케이터'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권위적인 '어른들'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당혹스럽게 느껴질만한 상황의 발생 빈도를 원천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심리체계가 준거로 삼는 의미의 공간을 '평소에' 넓혀두어여 한다.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 그저 흘러 보내지 않고 - 심리체계의 준거로 삼을 수 있어야 비로소 그런 넓은 영토을 확보할 수 있다 (상호작용 참여자에 대한 이해, 혹은 다양한 심리체계에 대한 이해... ). 그런 경우를 두고 '세련된' 혹은 '능숙한' 커뮤니케이터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사
꼬박 사흘 더하기 1/3일 동안 이사에 매달렸다.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사라서 그런지 이사 전후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오늘 아침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집을 나서면서도... 내겐 귀국 이후 지속되던 '일상'이지만 그게 다른 '공간' 속에선 달리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음을 새삼 느꼈으니... '공간'의 의미, 무게...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서예
이번 주엔 '서예전시회'다. 한국화 혹은 동양화와는 다르게 서예는 꽤 볼만하다. 흰색, 검정색 뿐이지만,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더 깊이가 느껴진다. 특히 흘려쓰는 필법은 - '초서'가 그 중 하나지 아마? - 정말 예술적이다. 기회되면 서예를 한 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었지만... 서예는 역시 한자를 써야 제 맛이 난다. 획과 모양이 한글과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기 때문이고, 중요한 다른 이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이해가 되지 않아야 글씨가 아니라 그림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2010년 12월 16일 목요일
지나치거나 또는 모자라거나
식당이야기 (2)
오늘 점심은 '통영굴밥'집. 이 식당은 손님에 대한 인사에 인색한 편이다. 들어설 때는 서너번에 한 번쯤, 나설 땐 거의 듣지 못한다. 오늘은 계산하고 나설 때까지 음성을 이용한 의사소통이 전혀 없었다. 다들 묵언수행이라도 하시는지, 집단적으로 고요함을 유지하는 영적 훈련이라고 하는지 인사를 너무 아낀다. 손님과 직원들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너무 한다싶어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는 것으로 소심하게 내 의사를 표시하려고 한다.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사실은 더 심한 집도 겪어봤다. 근처 분식집. 주인이거나 혹은 주인의 딸처럼 보이는 젊은 아가씨는 김밥을 썰다가 들어서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바로 시선 외면... 예상했던 대로 그 집을 나설 때 어떤 인사도 듣지 못했다. 물론 그 뒤로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음식의 질, 맛, 청결 이런 걸 떠나서 손님 아니 인간에 대한 예의에 무지한 식당은 그렇게라도 '응징'해야 한다.
한국생활이 '재미'있는 건 그 반대 경우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 근처 우리은행의 경비 겸 안내 담당인듯한 젊은 청년. 말쑥하게 차려입고서 손님이 '입장'할 때마다 목소리를 높여서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문제는 조용한 은행 안이 그 때마다 쩌렁쩌렁 울린다는 것. 또 대형마트에 들어설 때마다 깊숙하게 숙여서 건네는 인사를 받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들어서는 손님 대부분은 무슨 인사기계나 투명인간을 보는 듯 무시한다. 그렇게 인사하도록 시키는 것 역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처사다. 그런 대형마트는 어떻게 '응징'하지?
인사커뮤니케이션의 이런 모자람과 과도함의 공존엔 우연이나 개인차로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구조적 원인이 있을 것 같다. 언제가 전화 통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어 커뮤니케이션에 인사 문화 혹은 인사 코드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게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탓이 아닐런지. 특히 안면이 없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에 대해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공공영역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 조정 메카니즘이 부실해 보이는 것이다. 예절, 문화, 코드... 뭐라고 이름 붙이든. 식당이나 지하철서 같은 데서 천방지축 나대는 아이를 나무랐다간 그 부모로부터 이런 얘긴 듣기 십상이다. "당신이 뭔데, 남의 애한데..."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또 재미있는 현상은 가깝고 친밀한 사이에서 의사소통 코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친족이나 직장, 학교 등 조직에 속한 사람들기리 언어 예절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위계적이고 사람들은 세밀한 표현 차이를 기가막힐 정도로 잘 포착해 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직계 가족간의 관계에선 갈수록 자유분방해져서 반말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참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ps)아래 영성에 대해서 써 놓은 글이 자꾸 목덜미를 끌어당긴다. 특히 '응징' 운운하는 태도가 과연 '영성'과 어울리는 지에 대해서... 영성의 본질을 '사랑의 각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손님에 대한 인사에 인색한 식당을 다른 방식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먼저 인사를 한다거나 나올 때면 "덕분에 참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같은 인사를 환한 미소와 함께 사랑의 마음을 담아 건넨다던지... 상상만해도 닭살 돋는 '시츄에이션'이지만 과연 그게 대안일까?
오늘 점심은 '통영굴밥'집. 이 식당은 손님에 대한 인사에 인색한 편이다. 들어설 때는 서너번에 한 번쯤, 나설 땐 거의 듣지 못한다. 오늘은 계산하고 나설 때까지 음성을 이용한 의사소통이 전혀 없었다. 다들 묵언수행이라도 하시는지, 집단적으로 고요함을 유지하는 영적 훈련이라고 하는지 인사를 너무 아낀다. 손님과 직원들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너무 한다싶어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는 것으로 소심하게 내 의사를 표시하려고 한다.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사실은 더 심한 집도 겪어봤다. 근처 분식집. 주인이거나 혹은 주인의 딸처럼 보이는 젊은 아가씨는 김밥을 썰다가 들어서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바로 시선 외면... 예상했던 대로 그 집을 나설 때 어떤 인사도 듣지 못했다. 물론 그 뒤로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음식의 질, 맛, 청결 이런 걸 떠나서 손님 아니 인간에 대한 예의에 무지한 식당은 그렇게라도 '응징'해야 한다.
한국생활이 '재미'있는 건 그 반대 경우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 근처 우리은행의 경비 겸 안내 담당인듯한 젊은 청년. 말쑥하게 차려입고서 손님이 '입장'할 때마다 목소리를 높여서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문제는 조용한 은행 안이 그 때마다 쩌렁쩌렁 울린다는 것. 또 대형마트에 들어설 때마다 깊숙하게 숙여서 건네는 인사를 받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들어서는 손님 대부분은 무슨 인사기계나 투명인간을 보는 듯 무시한다. 그렇게 인사하도록 시키는 것 역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처사다. 그런 대형마트는 어떻게 '응징'하지?
인사커뮤니케이션의 이런 모자람과 과도함의 공존엔 우연이나 개인차로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구조적 원인이 있을 것 같다. 언제가 전화 통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어 커뮤니케이션에 인사 문화 혹은 인사 코드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게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탓이 아닐런지. 특히 안면이 없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에 대해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공공영역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 조정 메카니즘이 부실해 보이는 것이다. 예절, 문화, 코드... 뭐라고 이름 붙이든. 식당이나 지하철서 같은 데서 천방지축 나대는 아이를 나무랐다간 그 부모로부터 이런 얘긴 듣기 십상이다. "당신이 뭔데, 남의 애한데..."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또 재미있는 현상은 가깝고 친밀한 사이에서 의사소통 코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친족이나 직장, 학교 등 조직에 속한 사람들기리 언어 예절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위계적이고 사람들은 세밀한 표현 차이를 기가막힐 정도로 잘 포착해 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직계 가족간의 관계에선 갈수록 자유분방해져서 반말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참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ps)아래 영성에 대해서 써 놓은 글이 자꾸 목덜미를 끌어당긴다. 특히 '응징' 운운하는 태도가 과연 '영성'과 어울리는 지에 대해서... 영성의 본질을 '사랑의 각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손님에 대한 인사에 인색한 식당을 다른 방식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먼저 인사를 한다거나 나올 때면 "덕분에 참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같은 인사를 환한 미소와 함께 사랑의 마음을 담아 건넨다던지... 상상만해도 닭살 돋는 '시츄에이션'이지만 과연 그게 대안일까?
2010년 12월 14일 화요일
영성을 돌 볼 시간 아니 마음이 없는 현대인. 종교성은?
잠자고 있는 영성을 일깨우려면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그 훈련에선 대개 침묵, 고요함을 전제로 삼는 것 같다 (아는 게 많이 없어서 표현이 조심스러움 ㅋ). 현대인들의 영성이 무딜대로 무딘 이유는 바로 이 고요한 시간을 찾기 어렵기 때문 아닐까. 아니,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서 워낙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또 그 생업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또 시간을 내야 하니 도대체 고요한 시간 가질 새가 없다. 그게 익숙해져서 이젠 고요한 걸 견디기 힘들어 한다 (조용한 식당을 못 견뎌서 기어이 들고 다니는 텔레비전 소리로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길거리, 지하철 등에서 귀에 뭔가를 꽂고서 뭔가를 듣는 행위는 실제로는 무차별적으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스스로 선택한 소음으로 바꿔보려는 몸부림이다.
'우리' 부지런한 '얼리 버드'들은 - 대표적으로 2mb ㅋ - 고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긴 하다. 새벽... 특히, 한국 신자들의 경우에 새벽에 기도하는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되기까지 하다 (불교 새벽예불의 영향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새벽기도 시간에도 - 어디 새벽에만 그럴까마는... - 시끄러운 기도소리로 가득하다. '신'이 들어 주셔야 할 일들을 열거해야 하는데 그 시간도 모자랄 지경이니까.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처음에는 기도가 말하는 것인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더 그윽한 경지에 이르면 결국에 가서는 기도가 듣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Christian Discourses" 중에서)
A man prayed, and at first he thought that prayer was talking. But he bacame more and more quiet until in the end he realized that prayer was listening.
어디 기도시간 뿐인가 이런 저런 예배, 프로그램, 활동, 교제로 가득 찬 교회생활에서 고요함을 찾기란 힘들다.
내 경우에도 집중력이 떨어지면 쨉싸게 그 시간을 대체할 일들을 찾는다.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다면 일순위는 불문가지. 그렇지 않은 경우 이런 저런 긴요하지 않은 책이나 컴퓨터 폴더 속을 뒤적인다. 집에서라면 텔레비전을 켜 둘 때도 있고... 어쩔 수 없는 현대인... 생각을 깊게 해야 할 경우에도 그 속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자꾸 다른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 그래서 요즘엔 컴퓨터를 아애 켜지 않으려 애쓸 때도 있다. 뭔가를 쓰라고 깜박거리른 '커서'의 재촉을 받지 않고서 백지 위에 손글씨로 생각을 정리하는 재미를 맛보기도 하면서... 또 늦은 밤에 고요한 시간을 가져 보려고도 한다. 그러면서 관찰한다. 흘러 다니는 생각을.... 도대체 그 뿌리에 무엇이 있나... 그러다 "점점 그윽한 경지에 이르면" 정말 뭔가를 듣게 될까?
영성과 종교성을 구분해 보면 좀 다른 방향으로 얘길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슷한 내용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은 있는데 그게 '영성'과 '종교성'을 구분하는 방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 서구 계몽주의 시대, 근대의 개화기 동안에는 바야흐로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면 종교 같은 구시대 유물은 사라질 거라고 과감하게 주장하던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생시몽, 콩트가 대표적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 콩트가 말년에 인류교라는 합리성의 종교를 창시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종교의 끈질긴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도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얘기하는 특정 신이 죽었다는 얘기 아니었던가. 영성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종교성만큼은 인간, 호모 사피엔스 (= 호모 렐리기오수수)가 존재하는한 어떤 식으로든 추구될 것이다.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신을 섬기는 있지 않은가?
우선 심취해서 이성적 심리 상태를 뛰어 넘는 무엇인가가 표출되는 상황은 대개 종교적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음악이나 춤에 열광하는 상태, 만취 상태, 각종 '약물'은 말할 것도 없고... 또한 겉으론 매우 이성적, 합리적인 사고에 기인하는 것 같지만 무엇인가를 과도하게 섬기는 상황. 그것도 넓게 보아 종교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고요할 시간이 없는 바쁜 현대인들. 그들은 어쩌면 그 '바쁨'을 섬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일중독'은 그냥 비유적 표현이 아닌 종교성의 영역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상태다. 자식에 '올인'하는 부모들은 자식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고, 사랑의 짜릿한 감각을 찾아서 헤매다니는 사람들은 사랑 혹은 사랑의 감각을 섬기고 있는 것고... 각종 제도 종교들을 믿는 신자들 중엔 - 본인은 의식하지 못할 지라도 - 그저 인간 본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종교성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그 종교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물론 영성과 종교성을 정확하게 구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영성을 추구하는 종교'와 '종교성을 만족시키는 종교'라는 구분 역시 하나의 생각 실험일 뿐 그런 구분을 과도하게 밀고가는 게 큰 유익을 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 어느 시기 못지않게 아니 혹은 그 이상 종교성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21세기에 - 세계 곳곳에서 관찰되는 종교근본주의자들의 그 활약상을 보라 (절에 가서 '땅밟기' 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 ), 그리고 술, 섹스, 음악, 애정, 인정, 기도응답에 대한 탐닉을.... - 그런 종교성을 좀 '다른' 아니 좀 '더 나은' 방식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영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내 속을 들여다 보며, 그 '어떤' 음성 듣기를 구하며...
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잠 못 드는 밤
쉽게 잠들 수가 없다. 일요일이라 좀 늦게 일어난 탓인지, 아니면 연말이 다가올수록 더 많아지는 생각 탓인지... 취침용 독서도 별로 효과가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는 어떤 기운이 그냥 누워있을 수 없게 만든다. 해서 인터넷을 통해 여기 저기 산책해 보지만 별로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과 비슷한 심리 작동 상태인듯. 그래서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밀어내려고 하지 않고 차라리 그 뿌리까기 파헤쳐 볼 생각이다. ...observation of the observation of the observation....
2010년 12월 11일 토요일
하바드대 출신, 파란 눈의 스님 얘기 들어 본 것도 같다. 현각 스님. 그 양반 지나치게 많은 이름을 얻는 통에 한국을 떠나서 지금은 뮌헨에 정착해 있나 보다. 최근 인터뷰 기사에서 알게 된 내용 (여기).
그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독일이 심심하진 않나. 한국처럼 다이내믹한 사회에서 살다 가셨으니.
"거제도에서 기암절벽을 구경하는데 배 안에 '뽕짝'이 쿵작쿵작 울려 퍼지더라. 선장에게 소리 좀 줄여달라 부탁했더니 뽕짝을 안 틀면 승객들이 심심해한다고 했다. 한국이 내게 준 가르침 중 하나가 센세이션과 자극이다.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고요와 평화, 여백을 즐길 줄 모른다. 카페에 가보라. 연인이 나란히 앉아 스마트폰만 열심히 문질러대고 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리며 108배를 하는데 주머니에선 휴대폰이 쩌렁쩌렁 울려댄다. 걱정스럽다."
―독일이 심심하진 않나. 한국처럼 다이내믹한 사회에서 살다 가셨으니.
"거제도에서 기암절벽을 구경하는데 배 안에 '뽕짝'이 쿵작쿵작 울려 퍼지더라. 선장에게 소리 좀 줄여달라 부탁했더니 뽕짝을 안 틀면 승객들이 심심해한다고 했다. 한국이 내게 준 가르침 중 하나가 센세이션과 자극이다.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고요와 평화, 여백을 즐길 줄 모른다. 카페에 가보라. 연인이 나란히 앉아 스마트폰만 열심히 문질러대고 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리며 108배를 하는데 주머니에선 휴대폰이 쩌렁쩌렁 울려댄다. 걱정스럽다."
이 얘기가 오늘 낮 식당에서 겪었던 일을 생각나게 했다. 한국 어지간한 식당에선 그 시간이면 대개 텔레비전을 켜 둔다. 보는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하지만 오늘 처음 간 그 식당은 그렇지 않은 드문 경우였다. 들고 간 책을 보면서 밥을 먹고 있는데 옆 자리에 두 남성 손님 착석. 얘기를 몇 마디 주고 받더니 곧 침묵 모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식당은 그 손님 중 한 사람의 '휴대용 텔레비전' - 정확한 명칭이 있을 텐데 잘 모르므로 통과... - 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로 가득찼다. 당연히 클 수 없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거의 '발악' 혹은 '통곡'에 가깝게 들렸다. 그 발악을 들으며 마주 앉아서 '조용히' 식사를 하는 모습이라니... 게다가 식당 안 다른 사람들은 병풍 정도로 여기는 듯한 그 심리체계의 작동방식 또한 참으로 저질이다. 생각할수록...
왜 편한 사이엔 좀 듣기 싫어할 것 같은 소리도 하게 되지 않은가. 애정과 관심의 표현 방식이기도 하고. 이 나라, 이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런 것 같다. 잔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물론 많이 좋아졌고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 의심하지 않지만, 천박한 행태들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너무 많이 보고 또 듣게 되는 탓이다. 어쩌면 아직도 이방인의 시선을 거두지 못해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생활인'으로 그 속에 들어가게 되면 좀 달라질까?
2010년 12월 8일 수요일
'자이언트' 종영
허다한 드라마들 중에서 유일하게 챙겨 보던 드라마였다. 그 '자이언트'가 어제 끝났다. '자이언트'는 결코 수준 높은 드라마였다고 얘기할 수 없다. '홍길동전' 이후 이어내려오던 고전소설의 핵심 특징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21세기 그대로 재현한 드라마였다. 영우, 우연성, 권선징악... 주인공 '이강모'는 쫙 붙는 타이즈를 입거나 날지 않을 뿐 그 능력으로 따지자면 거의 슈퍼맨급이었다. 그리고 주요 장면에선 기가 막힌 시점에 필요한 인물들이 저만치서 현장을 지켜보고 있고... 대부분 차 속에서. 물론 그들이 들키는 법은 없다. 강모와 성모, 이 둘이 형제라는 사실은 '적들'에겐 끝무렵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그렇게 대놓고 만나는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 드라마의 주제를 한 마다디로 요약하자면? 자, 밑줄 그을 준비하시고... 권선징악! 악역을 잘 소화했다고 자자한 칭찬을 받는 정보석이 연기한 '조필연'. 시종일관 악인의 본분에서 벗어나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반대에 있는 이강모 역시 건설업에 종사하면서도 준법정신 투철하고 의리로 똘똘뭉친 매력남이다. 마지막 회에서 착한 쪽에 속하는 '성모'가 죽긴하지만 그런 것 마저 없었더라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들 뻔했다. 이런 불평 거리가 적지 않음에도 괜찮은 면도 찾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차마 언급하기조차 민망한 적지 않은 드라마들과 구별된다.
우선, 역사적 사실을 개인사와 잘 엮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강남개발과 5공, 6공이 주 배경인데 그 시절 현대사를 잘 모를 이들에게는 꽤 의미있는 간접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런 시대극의 경우엔 차라리 '권선징악'의 구도가 더 시원한 경우가 있다. 드라마에서 드라난 작가 혹은 피디가 그 시기를 보는 관점은 어쩌면 상식에 가까운 것이지만 쥐정부 시절이고 더구나 SBS 아닌가? 게다가 SBS 창사 20년 특집극이라니... 혹시 SBS '수뇌부'들이나, '방송통신위원회', 문화부에 계시는 김회장네 둘째 아들, 푸른 지붕 아래에서 사시는 분들 모두 공사가 다망하셔서 이 드라마를 챙겨보지 못하신 탓이 아닌가 싶다. 어찌 2010년 대한민국에서 이런 드라마가 공공연한게 방영되며 그것도 높은 시청률을 올릴 수 있었단 말인가. 수시로 가스통 들고 세종로, 종로로 진출하시던 우리 구국의 용사 할아버지들은 왜 그리 조용하셨던지... 모두 현대사 지식이 박약한 관계로 조필연의 멸망에 박수를 보내는 '우'를 범하신 것은 아닌지...
드라마가 무척 구식이긴 했지만 워낙 시절이 거꾸로 가는 터라 그 우직한 권선징악의 정신마저 그지 없이 반가웠던 것 같다. 이강모 같은 사나이가 정말 그리워지는 때 아닌가. 이제 승부가 끝나고 경찰에게 잡혀가면서 조필연이 이강모에게 얘기한다. "이제, 네 놈이 날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에 대한 우리의 이강모 형님의 멘트 "난 한 번도 널 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어. 난 너 같은 사람이 큰 소리치는 이 세상과 싸워보고 싶었던 거야..."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 캬- 이 얘기 듣고 난 완전히 '감동' 먹었다.
자고로 이런 게 대중문화의 미덕이다. 인간, 역사에 대해서 깊게 파고드는 고급예술은 이렇게 쉽게 싸지르기가 힘들다. 대중문화는 그냥 대중의 힘을 믿고서 뭔가 부조리하고, 고여있고, 썩은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시원하게 내지를 수 있어야 한다. 속이 뻥 뚤리는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해 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난 그 누구보다 피디와 작가에게 큰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짝짝!!

이번 정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참 '착한' 정부다. 반면교사라고 하지... 특히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철학, 역사관, 가치관, 세계관을 분명히 세우는 일이 사람에게나 정부에게나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낀다. 단지 이 정부 고위직에 계신 '높으신' 분들 중에서 병역의무를 다한 사람이 희귀하다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다. 군복무, 군필이 중요하다면 군대에 수십년 복무했거나 복무하고 있는 저 '별'들의 한심한 언행, 대응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최고봉은 아마 평시전작권 가져오기를 두려워하는 저들에 대해서 노무현 전통의 일갈에 대한 그 별들이 보여준 행태일 것이다. 그때 이미 본색이 천하에 드러나 버려서 천안함, 연평도 사건은 속편 정도로 느껴진다).
'쥐'정부(G 20의 그 'G', 혹은 '어륀쥐'[orange]의 그 '쥐'^^)는 국방, 외교에 관해선 철저하게 미국 형님 보호를 받고, 경기부양은 4대강 삽질을 통해서 그리고 세계 시장에서 어찌 어찌 떡고물 떨어지기를 기대하겠다는 국정'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이 주장하는 '잃어버린 10년'은 다름 아닌 기득권을 잃어버렸던 10년이었음을 알려주듯 5년 동안 챙겨갈 수 있는 건 최대한 챙겨가려는 그런 국정철학도 가지고 있다. 그 언저리에서 충성한 똘마니들 밥그릇 챙겨주고, 대기업들 숙원사업도 해결해주고... 뭐, 그것도 철학이라면 철학이겠다.
특정 철학, 가치관, 세계관을 신봉하다시피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저런 실용주의도 아닌 빌붙어 생존하고 제 잇속을 채우려는 '가치관'을 가진 이들도 못지 않은, 아니 그보다 더 심한 문제이고 실제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불행한 사건이다. 현 시점에서 더 슬픈 건 2년 후에 정권을 넘겨 받을 세력들이 누가 되는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예감 때문이다. 내 '슬픈 예감'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틀린 적이 없다.
ps) '다행히' 예보와 다르게 눈도 내리지 않는 날에 신문 기사 몇 개 챙겨보다가, 아니 보고 싶지 않아도 수시로 떠 오르는 그런 기사들 때문에 괜히 욱해서 그만...
ps) '다행히' 예보와 다르게 눈도 내리지 않는 날에 신문 기사 몇 개 챙겨보다가, 아니 보고 싶지 않아도 수시로 떠 오르는 그런 기사들 때문에 괜히 욱해서 그만...
2010년 12월 7일 화요일
뭔가를 좀 제대로 설명해보려면 말이 더 많아진다.
그럴수록 의미가 풍부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쪼그라든다.
정말 소중한 것은 입 밖으로 내기 힘든 것.
그런 면에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주저리 주저리 지껄여야 하는 학문은 기껏해야 차선일 뿐이다.
제도화된 종교도 마찬가지고. 설교는 왜 그리 길까...
타자와 구별하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세우는 순간 의미의 풍성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는다.
현대 사회의 체계들, 의미의 풍성함이 탈각되고 뼈대만 남은 그 체계들의 작동에 몸을 맡겨서 사는 현대인들.
사회학은 기껏 그 정도를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생각, 표상, 개념은 단지 기호와 설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재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자신을 우리 나람의 자기 개념에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자아상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어떤 확고한 이미지에 너무 집착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예배하게 된다. (...)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이란 돕는 행위와 애틋한 감정, 헌신된 관계 그리고 낭만의 결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사랑의 일면이지만, 그것은 마치 날씨를 비에, 바다를 파도에 비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형태에 따라 사랑하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심리적, 영적 신경증을 겪게 된다. 심리적인 면에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다.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사랑의 거룩한 신비를 놓치게 된다"
Gerald G. May 2006, 사랑의 각성. IVP, p.42 [org. Awakened Heart (1991)]
2010년 12월 6일 월요일
현대 한국어에서 전화를 이용해서 대화를 할 경우 그 시작을 알리는 표현은 있어도 - 여보세요! - 끝내겠음을 분명하게 알리는 표현은 없다. 오죽하면 노홍철은 '뿅'이란 의성어를 가져다가 쓸까. 별도로 정해 놓은 표현은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을 길게 늘이는 것으로 전화통화를 끝내겠다는 신호를 준다. 여하튼 나는 아직도 그렇게 신호보내는게 영 어색해서 - 예전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만 - 가끔 불쑥 전화를 끊는다는 인상을 상대방에게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은 반대의 경우여서 연결이 끊어진 줄도 모르고 전화기를 한동안 들고 있었다. 음... 뭔가 국가적 대책이 필요한 듯.
좀 더 '쿨'해질 필요가 있다. 긴장의 끈을 잠시 놓쳐도 'uncool'한 것들이 사정없이 비집고 나온다 (예를 들어 잠잘 때,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화가 날 때, 논쟁을 할 때...). 그렇다고 긴장의 끈을 놓칠 새라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uncool한가! Wie uncool!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아마 '영성'에 대한 관심을 실행으로 옮겨보는 게 한 방법일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주 틈틈이 오강남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독일 체류 말기에 가졌던 묵상, 영성에 대해 생각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그 언저리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새로운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탓일까?
2010년 12월 1일 수요일
마침내 12월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_- 그나마 막혀서 나를 괴롭히던 문제 하나가 풀려서 '작은' 위로가 되지만... (물론 분명히 다른 문제가 곧 튀어 나올 것이다. 그래왔다. 지난 수 년동안...). 그러면서 '여유 없음'과 '유머'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여유가 없으면 웃음기가 사라지면서 표현이 거칠어지고 직선적이게 된다. 지성의 정수가 '유머'라면 감성 혹은 삶의 태도의 경우에서도 켜켜이 쌓인 내공은 유머, 해학으로 피어 날 것이다. 어르신네들이 가끔씩 가볍게 던지는 우스개는 그래서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오고 가는 표현들이 거칠고 직선적이라면 그건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의 눈에 게으르게 비쳐졌던 우리 조상들은 분명 달랐을 터. 우린 좀 더 잘 살게 되었고 대신 웃음을 잃었다. 독일 사람들도 유머와 거리가 먼 편인데 이는 아마 날씨 탓일 것이다. 남부유럽인들과 비교해 보면.. 아니, 영국 날씨도 나쁘기로 유명한데 왜 브리티시 유머는 유명한 걸... 세계제국을 경영해 본 이들, 가져 본 자들의 여유인가?
아무래도 여유가 없으면 웃음기가 사라지면서 표현이 거칠어지고 직선적이게 된다. 지성의 정수가 '유머'라면 감성 혹은 삶의 태도의 경우에서도 켜켜이 쌓인 내공은 유머, 해학으로 피어 날 것이다. 어르신네들이 가끔씩 가볍게 던지는 우스개는 그래서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오고 가는 표현들이 거칠고 직선적이라면 그건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의 눈에 게으르게 비쳐졌던 우리 조상들은 분명 달랐을 터. 우린 좀 더 잘 살게 되었고 대신 웃음을 잃었다. 독일 사람들도 유머와 거리가 먼 편인데 이는 아마 날씨 탓일 것이다. 남부유럽인들과 비교해 보면.. 아니, 영국 날씨도 나쁘기로 유명한데 왜 브리티시 유머는 유명한 걸... 세계제국을 경영해 본 이들, 가져 본 자들의 여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