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31일 금요일
2008년 10월 30일 목요일
마광수 교수 근황을 듣고...
인터뷰 중 반가운 구절을 발견했다. 얼마전 타계하신 작가 박경리와 '토지'에 대한...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국 '토지'를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생각 한 켠에 늘 자리잡고 있던 불편함을 일거에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ㅎㅎ 쌩유, 광마선생.
“박경리씨는 살아있을 때부터 대가 취급을 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난 <토지>도 잘 썼다고 생각 안해. 문장도 100% 일어 문장이야. 세 권 읽다 말았어. 애들한테 물어봐도 20권 다 읽은 경우 못봤어. 눈치보기야. 독자들도 <토지> 안 읽어놓고, 왕따 당할까봐 그 말을 못해. 통탄할 일이지.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는 후대가 하는 거야."
2008년 10월 28일 화요일
다움
2008년 10월 27일 월요일
주말 단상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관계는 정말 복잡하고 미묘하다. 현대의 의사소통의 경우, 그 상황을 위해서 위계적으로, 신분제적으로, 혹은 여러 가지 규범으로 정해진 행동지침이 많지 않다보니 대화의 규칙을 만들어가고 상황을 해석하고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다음 대화 turn에서 확인해가고... 대단한 기술과 집중력,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것. 늘 코드를 맞춰나가야 한다. 그 과정은 맞춰지거나/맞춰지지 않거나, 이항코드로 선택될 수 있는게 아니라, 아나로그다. 0과 1 사이에 무수하게 많은 가능성이 있는 것. 그 관계가 아주 단순화되어 오해의 여지가 적은 경우는 대표적으로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좀 더 복잡하지만 그래도 단순한 경우는 표준화된 단순 노동을 하는 작업장 동료들 간의 관계. 부부나 '친한' 친구 같은 관계는 친밀도와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이 넓어서 오히려 오해의 폭이 적은 경우. 가장 힘든 경우가 어정쩡하게 친한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대화상황에서 도대체 眞意가 무엇인지, 왜 무슨 의도로 이 얘기를 꺼내는지, 아니면 침묵하는지 순간 순간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언젠가 썼듯이 그 경우 그 찰나의 타이밍이 중요해서 그것을 놓치면 벌써 상황종료, 새로운 상황 시작...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산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그러할까?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현대인들은, '정상적'으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은 이런 폭넓은 해석과 선택의 도전을 외면하며 살 수 없다. 인간관계를 잘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 상태를 얘기하는 것일까? 그 과정을 유연하게 잘 처리해서 이음새가 잘 눈에 뜨지 않는 경우. 모든 상황을 souveraen하게 통제해 나가는 경우 아닐까?
그건 그렇고... 나도 '문명병' 환자라면 환자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 애쓰는 편이지만... 단답형 지식은.... 그런 형태의 지식도 왜 쓸모가 없겠는가마는, 그게 필요한 시기나 분야는 매우 제한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너도 나도 목청높이어 답다는 기계 만드는 한국 교육의 퇴행성을 지적한지도 꽤 오래되었는지만 크게 바뀌진 않은 것 같다. 우연한 기회로 인터넷을 통해 초등 혹은 중고등 시험문제를 보면서, 참 아직도 저런 문제를 내고 그에 대한 정답을 요구하는구나, 안타까움을 넘어서 화가 날 때가 있다. 특히, 국어나 도덕, 윤리, 사회 그런 쪽 문제들... 쉽게 바뀌지 않는 걸 보면 그런 객관식, 단답식 지식을 습득하는 게 현대 사회의 성공적인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인식이 꽤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어떤 장점이 있을까? 뭐니 뭐니 해도 평가의 계량화, 한마디로 순위매기는 데 그보다 더 손쉬운 방식은 없다. 객관식, 단답식, 경쟁, 줄세우기, 계량화된 성적, 그 서열에 앞자리에 서기, 성공, 출세, 모두 의미의 연결망 속에서 가까운 곳에서 발견될 단어들이다. 심지어 겸손, 사랑, 섬김이 더 본질적이어야 할 교회에서도 큰 문제의식 없이 수용될 정도로....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를 열어주는 교회들, 남은 어떻게 되든 내 자식만큼은 평소 공부한 것 이상 좋은 점수 '따게' 해주고, 앞으로도 쭈욱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마인드'. 지난 수십년 간 한국은 물신주의 가치관, 성장, 성공에 대한 욕망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이 땅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국산 기독교의 성공지향적 세계관, 가르침은 그런 사회적 기대와 기가 막힌 찰떡궁합을 이루지 않았던가. 그 결과 이젠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더라도 떨쳐버릴 수 없는 한국인 '심성'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는지... 경쟁을 만들어 내서 공부하기... 사람이 공부할 거리, 공부방식을 만들어내지만, 그런 방식이 또 사람과 사람들이 관계하는 방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다시 한 번 co-evolution). 인간(의 노동)이 자신이 만들어 낸 대상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을 우리 맑스 형님은 Entfremdung, 疏外라고 부르시지 않았던가. 참, 낯선 어쩌면 기괴하기까지 한 풍경이다. 교회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자연스럽기도 한 그런... 나도 그 풍경의 일부였다.
[덧붙임: 우연히 오늘, 화요일자 '뉴스앤조이' 기사 중에서 다음 기사를 발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전북 이리노회가 이리노회 주일학교 제25주년을 맞아 '초등부 성경 골든벨'과 '성경 필사본 및 시화전'을 개최한다.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컴퓨터 혹은 인터넷 금단증
지난 주부터 점심 시간 일하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오전에는 인터넷을 보지 않고, 그래서 아침먹을 때도 신문을 읽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어댑터까지 고장나서 한편 자발적으로 다른 한편 울며겨자먹기로 컴퓨터 특히 인터넷 사용을 줄이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시각적 정보가 주는 그 즐거움, 재미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모든 감각기관을 동시다발적으로 적절하게 자극해 주는 그런... 언제부터인가 심지어 음악도 '보게' 되지 않았는가. 난 담백한 걸 좋아해서 컴퓨터도 최대한 슬림하고 소박한 상태로 나름 '최적화'해 놓고 있는데도 [한 가지, 프로그램은 가능한 최신 버전을 써야 만족하는 편이다. 그렇게 보면 뼈속 깊이 아날로그형 인간은 아닌 지도... 이런 블로그에 글을 쓰려고 끄적거리... 아니 틱틱거리고 있는 것도 하나의 반증이되겠지만... ],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컴퓨터나 인터넷, 영상매체의 '유혹'에 그동안 너무 많은 자리를 내 주었던 것 같다. 이번 기회에 반성하고 좀 더 문자적으로, 아날로그적으로, 그리고 흑백의 정신으로 살아볼 생각이다. 오전엔 인터넷없이, 자기 전 시간엔 아애 컴퓨터 없이 지내볼까 한다. 처음엔 낯설고, 어색하겠지만... '중독'의 특징은 당시에는 '중독'이라고 못 느낀다는 것, 또 알더라도 쉽게 끊을 수 없다는 것.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무신론의 宗敎化
영국 일간 <가디언>은 “신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이제 걱정은 그만하고, 인생을 즐기세요”라는 버스 광고(사진)를 내기 위한 모금이 21일 시작돼, 하룻만에 4만7900파운드가 걷혔다고 22일 보도했다. 애초 목표인 5500파운드의 9배가 넘는 금액으로, 4주 동안 버스 30대에 광고하려던 계획 또한 크게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코미디 작가 애리언 셰린은 “전국 규모로 확대할 수도 있고, 지하철 광고나 다른 문구도 시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누구보다 리차드 도킨스가 좋아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기사 아래 쪽에 언급되어 있다.
"베스트셀러 <만들어진 신>의 저자로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 교수도 “이런 광고를 실으면 사람들은 생각을 해보게 될 것이다. 종교는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며, 추가로 5500파운드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도킨스 교수는 종교계의 시내버스 광고에 빗대, “종교는 면세 혜택 등을 통해 ‘공짜 탑승’하는 데 익숙하다”며 “‘모욕’당해선 안 된다는 특권과 어린이들을 세뇌시킬 권리를 주장”하는 종교계를 비난했다."
이쯤되면 무신론'교'라고 불러도 크게 어색하지 않으리라. 재미있는 현상이다. 무신론이야 인류역사에서 늘 찾아볼 수 있었겠지만, 요새 무신론은 또 하나의 종교가되는 것 같다. 종교의 해악을 지적하는 것이 하나의 신앙이되는... 종교가 뭐 별건가. 천당/극락을 가르쳐야 종교라는 '편견'을 버린다면...
2008년 10월 23일 목요일
다른 場, 다른 의사소통 기술
일이 복잡해지거나, 의사소통의 내용이 복잡할수록, 제대로 의사소통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전제조건이 더 많아진다. 언어적, 비언어적 여러 수단을 통해야 하고, 한 번 꼬이면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언제가 썼듯이 이런 복잡한 의사소통의 場에서 인간관계를 잘 풀어가기 위해서는 고도로 숙련된 언어능력과 대화기술이 필요하다. 그런 기술을 익히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외국인들, 혹은 외국어로 의사소통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선 결정적인 경우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구두 의사소통과 비교할 때 문자 의사소통은 해석의 가능성을 급격하게 줄여준다. 그나마 고마운 일 아닌가?
진중권 교수는 구두문화와와 문자문화의 구분 도식을 가지고 한국의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데, 지나치게 단순하고 그냥 수긍하기엔 좀 내키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참 설득력있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합리화와 문자문화의 발달은 거의 동의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 문자를 쓰던 역사는 수천년을 헤아리지만, 아쉽게도 문자로 의사소통을 자유자재로 하던 이들의 비율은 20세기 중반을 지날 때까지 매우 제한적이었다. 최최의 금속활자를 발명했다고 자랑만할 일도 아니다. 그런 활자로 고작 수십부의 책을 찍었을 뿐이니. 문자적 합리성이 채 자리잡기도 전에 그놈의 인터넷이 한국의 커뮤니케이션에 지나치게 중요한 역할을 넘겨 받았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은 비록 문자를 매개로 하지만 그 행태는 전형적인 구두문화의 그것이다. 진중권씨가 그런 점을 반복해서 지적하는데 난 아직도 그 주장에 대해 어떤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
큰 주식시장, 작은 외환시장: 한국 금융시장의 이중적 구조
"배상근 : 우 리나라는 아주 개방화된 소규모 경제단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방도가 워낙 커서 외부의 조그만 충격도 직접적으로 우리 경제에 와닿게 되는 거죠. 그리고 또한 우리나라 주식시장이나 외환시장의 특징이 있는데요. 주식시장의 경우는 신흥국가들 중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외국인의 지분비율이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과거에는 한 40%까지 있다가 최근 들어 외국인들의 순매도가 굉장히 증가하면서 27% 수준으로 크게 떨어졌는데요. 미국계 자본 같은 경우는 일단 내 코가 석자 아닙니까? 바로 우리 주식시장에서 돈을 빼서 미국으로 지금 본국으로 송환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고요. 여타국의 자본 같은 경우도 돈을 빼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격이 떨어진 국가에서 수익률을 본달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식시장에서 대규모로 돈이 빠져나가고 있는데 그 돈이 어딜 거쳐야 되냐면 외환시장을 거쳐가야 되거든요. 달러를 바꿔야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 외환시장 규모가 상대적으로 굉장히 작고, 외환시장이 작은 규모다 보니 큰 돈이 빠져서 작은 시장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외환시장이 크게 요동되고 있고요. 특히 우리 외환시장은 98%가량이 달러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근에 규칙통화로 돼 있는 달러의 불안전성이나 달러가뭄이 아주 심한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보여지죠."
하지만 지금 위기가 한국 금융산업에 호기일 수도 있으며, 금융부문이 앞으로 고용을 창출하는 중요한 산업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부분에 대해서 왠지 신뢰가 가질 않는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금융자본주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실물경제와 금융의 괴리가 클수록 위기의 확산속도나 파급효과가 큰 것 아닌가? 아이슬란드 같은 나라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모델을 도입했다가 지금 IMF에게 손 벌리는 신세가 된 것 아닌가? 18년(1987~2006년) 동안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연준) ‘마에스트로’(거장), ‘경제계의 현자’라는 칭송까지 받았던 자유시장주의 전도사 앨런 그린스펀(82) 마저 "은행 등 금융기관이 주주와 자산을 보호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내가 실수했다.(I made a mistake.)”라고 고백하는 판 아닌가 (관련기사). 도대체 한국이 금융산업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내 상상력으로는 그 모습을 그릴 수가 없다. 이 양반 혹시 신종 '신자유주의 전도사' 아닌가? [배상근 박사의 평소 주장을 알아볼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과도한 억측을 발설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울러 인터뷰라는 설정 탓에 발언이 짧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
"하지만 여기서 머물지 말고 이러한 금융위기를 우리의 기회로 전환시킬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제조업은 고용의 한계를 느끼고 있죠. 첨단산업 같은 경우는 고용숫자를 늘린다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장비를 늘이고 사람을 줄이는 측면이 있고요. 제조업은 3D업종은 사람이 필요하지만 우리 청년층이 가려고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청년층의 눈높이에 걸맞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고요. 우리 경제를 이끌어갈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금융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융산업을 왜 주목할 필요가 있냐면, 지금 최근에 나온 IMF의 은행위기보고서가 있는데 지난 37년간 124개 은행위기를 살펴봤습니다. 그런 경우를 보면 대개 위기가 끝나는데 53개월... 4,5년 정도 걸립니다. 대공황시기나 저축대부조합의 연쇄파산시기도 그렇지만 그 당시 시기에는 어떤 일이 발생하냐면, 규제가 강화되고 금융의 혁신이 없습니다. 금융의 신상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서 선진국 경제에 있는 금융기관들이 어떻게 보면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탭니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과감하게 규제를 완화하고 노력해간다면 지금은 많이 떨어져 있지만 선진국 금융기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향후 한 5년 정도 벌어놓은 상태거든요. 이 기회에 우리가 보다 노력해서 우리 금융산업을 발전시킨다면 수출로만 이끌어가던 우리 경제에서 우리 경제 안에 금융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활약할 수 있고 이와 동시에 우리 국민들이 원하는 보다 좋은 일자리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추가: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라는 의미에서 금융시장으로 주식시장, 외환시장을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금융시장 거래의 핵심은 개인/기관 사이의 단기, 장기간 거래아닌가? 물론 그런 거래 역시 매일 사고 파는 행위가 이루어지며 거기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겠지만. 한국 금융기관들은 일본, 중국에 비해서 외국 금융기관과 거래 비중이 높다고 한다. 그게 외부 환경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2008년 10월 21일 화요일
가을 속으로
몇몇이서 가을 속으로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그 날 찍은 사진 몇 개를 소개한다. 위에서부터. (1): 출발지였던 Guetersloh의 숲. 보자마자 컴퓨터 배경화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완벽한 가을경치. 사진으로는 그 감흥의 1/10도 보여주기 힘든... (2), (3):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찍어보기도 했다. (2)는 흔들림 때문에 예술 사진이 되어 버린 경우. (4) 목적지였던 Warendorf 는 생각 이상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시청은 13세기에 지어진 건물) 구시가지는 온통 돌밭이었다. 그 바닥을 찍은 것. (5) 조그한 시가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고딕식 성당이 있었다. 그 성당 출입문 문양이다.
근대, 불확실성, 위험
얼마나 예측하기 힘든지 최근 유가, 환율의 상관관계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늘 신문을 보니 유가가 갑자기 떨어져서 또 나름의 위기를 두려워하는 산유국들이 있는 모양이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푸틴 치하 십여년간 천연자원 가격 상승덕을 보며 잘 나가면서 기고만장하더니 어느새 좀 불쌍한 처치에 놓이게 되었다.
근대와 위험, 불확실성의 원래 친밀한 관계지만 요새 너무 친해져서 하루 하루 사정이 급변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내실을 다지고, 원칙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환율, 주식 등 조그마한 단기 이익에 민감해서는 제명에 살긴 힘든 세상이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일희일비하지 않고, 멀리보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원칙을 지키며 살 일이다.
共進化
"승효상 : 제가 믿는 바로는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고 믿고 있어요. 도시도 마찬가지, 사회가 도시를 만들지만 도시가 다시 사회를 만듭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요즘 많은데 아마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잘못된 도시구조에 그 원인이 상당 부분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은 삶, 좋은 공동체적 삶을 원한다면 우리 건축을 사고 파는 부동산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가 근본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문화의 대상으로 파악해야 우리 도시와 건축이 나아지고 결과적으로 선과 후의 공동체가 진보할 거라는 믿음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박인규 :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그런 말은 들어봤지만 사람이 건축을 만들고 건축이 사람을 만든다. 인문적 건축이랄까요. 그런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2008년 10월 20일 월요일
좋은 글
침묵 속에 있는 평안을 기억하여라.
할 수 있는 대로, 굴복하지는 말고
모든 사람과 좋게 지내라.
조용하고 분명하게 너의 진실을 말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라. 비록 무지하고 어리석지만
그들에게도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목소리 크고 다툼질 좋아하는 자들을 피하여라.
그들은 영(靈)에 성을 내는 자들이다.
네가 만일 너를 남들과 비교한다면
허탈감과 쓰라림을 맛보게 되리라.
너보다 잘났거나 못난 자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너의 계획과 함께 네가 이룬 것들을 즐겨라.
(........)
무미건조하고 매력 잃은 자들 앞에서
사랑은 풀잎처럼 싱싱한 것이다.
늙은이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젊은이들이 하는 일을 너그러이 받아들여라.
갑작스런 불운이 닥쳤을 때
너를 지켜 줄 영(靈)의 방패에 기운을 넣어 주어라.
그러나 공연한 상상으로
근심을 사서 하는 일은 없도록 하여라.
많은 불안이 고단함과 외로움에서 온다.
몸에 좋은 수련을 쌓고
너 자신에게 다정하여라.
너는 우주의 자식이다. 저 나무와 별들 못지않게
너 또한 여기 있을 자격이 있다.
너의 포부가 무엇이든 시끄러운 세파 속에서
영(靈)의 평안을 유지하여라.
온갖 부끄럽고 천박한 일이 일어나고
꿈들이 부서져도,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이다.
기운을 내어라.
행복하려고 애써라."
도종환 시인이 '참 좋은 글'이라며 소개했다. 글쓴이는 모른다며... 그렇다. 모든 사람과 좋게 지내되 굴복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을 즐기고, 내 자신에게 다정하며, 행복하려고 애쓸 일이다. 행복하려고 애쓸 일이다...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심리기제
ps) 생생한 그 느낌을 그래로 남겨두고자 아침부터 컴앞에서 시간을 보냈더니 이미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은 누굴 원망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내 결정의 결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미련을 가질 게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
2008년 10월 16일 목요일
2008년 10월 9일 목요일
창의성
방송 앞부분에 등장한 창의성 점검 문제 하나를 소개한다.
"성냥개비 4개가 있다. 이를 이용해서 밭 전(田)자를 만드시오."
창의성 점검 문제임을 명심하시라. 정답은 다음 호(?)에...
ps) 난 '물론'(!) 못 풀었다. 답을 알고 보니 예전에 한 번 들었던 기억이... 창의성은 커녕 기억력마저 신통찮은 것이다.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역설의 신앙
Clothe yourselves with humility toward one another, because, "God opposes the proud but gives grace to the humble." Humble yourselves, therfore, under God's mighty hand, that he may lift you up in due time.
베드로전후서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와 더불어 공동서신 (The Catholic Epistles)혹은 일반서신(The General Epistles)이라고 불린다. "공동서신이라는 표현은 여러 사람이 이 서신들을 함께 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서신이 모든 사람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서신은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들이다. 말하자면 발신자의 공동성이 아니라 수신자의 공동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공동서신은 심오한 신학론이나 신비스러운 경험보다는 대중적이요, 윤리적이요, 교훈적인 내용이 주된 주제다. 실제적인 신앙 훈계와 권면으로 당시 핍박과 이단의 유혹과 신앙적 시험에 둘러 쌓였던 모든 교회에게 힘과 지혜를 주고자 기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서신을 통해 당시 초대교회가 당면했던 보편적인 문제와 다양한 삶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베드로전후서의 저자가 과연 편지 서두에 언급된대로 사도 베드로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적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윗 본문도 이런 당대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 활발하게 늘어나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 교인들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말이다. 본문은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조건 혹은 결과는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는 것이고... 이는 마리아의 노래(눅 1), 산상수훈에서 등 성서 여러 곳에서 반복되어 강조되는 역설적 가르침이다. 이런 "역설"은 사실 동서고금 여러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나온다는 "必死卽生 必生卽死", 혹은 한용운 선생의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僕從)을 좋아해요" 라는 시편... 이런 가르침은 수익창출 메카니즘에 대한 한 단계 높은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즉, '높아지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자유롭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서라도 '낮아지고, 죽으려 들고, 복종하라'는 게 아니다. 기존 사고틀(framing) 안에서 이렇게 표현될 수 밖에 없지만, 사실은 이런 구분법 자체를 넘어서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했단 말이지. 내가 지금은 비록 이 모양이지만 열심히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면 언제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명예, 부를 누리게 될 거야"가 아닌 것이다. '낮음/높음'으로 구분하는 상식의 전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기독교의 가르침은 훨씬 더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듯하다.
2008년 10월 6일 월요일
이왕 사는 것 이 정도는 살아야...

"‘그’는 초등학생도 갖고 다니는 휴대전화를 가져본 적이 없다. 운전면허증도 승용차도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터는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간다. 점심 도시락도 꼭 싸들고 다닌다. 머리는 다듬지 않아 항상 헝클어져 있고 수염도 텁수룩하다. 신용카드는 있지만 쓰지 않고 TV도 안보고 인터넷도 거의 하지 않는다. 각종 회식 자리에도 가지 않는다. ‘삼천리 금수강산을 남북한 인구로 나눈 면적만큼만’ 땅을 사 자기 먹거리의 농사를 짓는다. (...) 해마다 3~4권씩, 지금까지 60여권의 책을 펴냈다. 주말에는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음악 듣고 화랑도 찾는다. 직접 그림도 그리고 등산도 한다. 이해·연줄에 얽히지 않은 친구나 지인들을 집으로 초청, 가마 솥에 장작불 피워 소머리 곰탕도 끓이고 술잔도 나눈다. 수십권의 책을 쏟아냈지만 전공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그 분야가 법·예술·사회·인물 등 다양하다. 이렇게 사는 사람, 영남대 박홍규 교수(56)다. 노동법을 전공한 법학자다. 지난 해 법학과에서 교양학부로 옮겼다.
(...).아침식사는 밭에서 난 채소에다 된장국을 넣고 비빈 비빔밥 한 그릇이 전부다. 다른 반찬 없이 먹고 남은 밥과 국으로 도시락을 싸서 출근한다. 학교까지 2~3㎞를 자전거 타고 다닌다. 빨리 달리지 않는다. 천천히 페달을 저으며 풀 냄새도 맡고 하늘도 보고 연꽃 밭도 구경하며 간다. (...) 도시락을 고집하는 건 ‘학생 때부터의 습관’이기도 하고 군대처럼 구내식당에서 밥 먹기 위해 식판 들고 줄서는 것도, 밥 한끼 먹기 위해 몇 십분씩 자동차 타고 나가는 세태가 싫어서다. 연구실 한쪽에 ‘학기중 회식 NO’란 문구가 적혀 있다. 대상이 동료 교수든 학생이든 학연·지연·혈연 등의 각종 연줄로 엮여 벌어지는 부조리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그는 60여권의 책을 썼고 수십권의 번역서를 냈다. 우리 사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책인데도 소개되지 않았다 싶으면 번역했고 모두가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책을 썼다. 그는 “100명 중 99명이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1명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지평도 넓어지고 차원도 한 단계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책 쓰는 것을 돈벌이로 생각하지 않기에 ‘지적재산권’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 씻지 않는다. 천성 탓인지도 모르지만 필요 이상으로 물을 낭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 같아 께름칙한 것도 이유다. 수염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가위로 자른다. 매일 면도를 하지 않는 것은 귀찮기도 하지만 ‘수염을 기르는 것 가지고도 시비를 거는’ 우리 사회의 획일성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있다. 그는 물욕·돈·힘·공공성 붕괴·인조·획일을 대한민국의 ‘육적(六敵)’으로 지적했다. 돈과 힘 등으로 가치를 따지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고도 했다. “국가 권력이든 관습이든 그 무엇이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무엇이든 넘치도록 갖는 것도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죄악입니다. 욕망을 최소화하고 의식주까지 간소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2008년 10월 2일 목요일
악플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인터넷

2008년 10월 1일 수요일
그림 읽기 (2)
욕실 안은 아무런 장식도 가구도 보이지 않는다. 마라의 목 아랫부분에 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욕조에 고여있으며, 그의 오른손 옆을 보면 핏자국이 남은 그를 찌른 상아 손잡이가 달린 칼이 보인다. 잉크병이 놓인 낡은 나무상자에 '마라에게, 다비드가 바친다(A MARAT, DAVID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라는 '이성의 시대'를 상징하는 펜과 잉크를 꽉 붙잡고 있다. 여기저기에 남은 핏자국이 이 끔찍한 죽음의 비통함을 더해준다. 욕조는 흰 천으로 덮여 있는데 마라의 혁명적 저술작업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흰 천과 죽음을 맞은 마라의 자세는 예술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당시 혁명세력은 전체 민중을 위해 교회의 소유물을 국유화했다. 이제 종교는 이성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마라는 그 새로운 시대의 순교자였다. 다비드는 욕조 앞에 놓인 낡은 나무 탁자를 통해 마라의 검소함을 강조하면서, 이 탁자의 전면에 마치 묘비처럼 마라를 추모하는 사인을 그려 넣고 있다.
그림 속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적 순교자를 연상시킨다. 오른쪽으로 점점 밝아져 가는 배경은 마치 하늘의 영광이 죽어가는 성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다비드는 이런 그리스도교적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거의 알아차릴 수 없도록 모든 것을 뛰어난 솜씨로 처리하였다 .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다비드 작품의 뛰어남이 확연히 드러난다. 1793년작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1907년에 그려진 뭉크 버전도 매우 신선하다. 의도적으로 사건의 역사성을 제거했다.

The assassination of marat, Weerts Jean Joseph (1886)

Death of Marat I, Edvard Munch (1907)
Death of Marat II, Edvard Munch (1907)
ps) "<마라의 죽음>은 드로잉 등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3점이 존재합니다. 비문처럼 새겨진 나무상자에 A Marat 라고 씌여진 작품은 잘 아시는 것처럼, 브뤼셀 왕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다른 한점은 루브르 미술관에, 그리고 나머지 한 점은 랭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혁명기의 프랑스 정부는 한 점을 더 소유하길 원하였으며, 죽은 마라의 혁명동지이자, 절친한 지인이었던 화가 다비드 역시 한 점을 본인이 스스로 간직하길 원하였다고 합니다." 옆 그림이 프랑스 루브르 (혹은 랭스 미술관) 소장본이고 제목도 좀 달라서 <암살당한 마라> (Marat assassiné, 1793). 얼핏 꼭 같아 보이는 그림의 버전을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마라의 시신 앞 쪽에 놓인 궤짝에 새겨진 글씨이다 (NAYNT PU ME CORROMPRE ILS MONT ASSASSINE 라고 씌여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그림 읽기 (1)
'읽기', '보기'의 구분에 대한 학문 내 논의가 있겠지만 아는 바 없으므로 - '무식하면 용감하다' - 이런 내 나름 구분 방식을 전제로 '깔고' 그림읽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예술작품으로서 그림 앞에 서거나, 여러 인쇄매체를 통해 그림을 접하면 우리는 먼저 그림을 본다. 우선 눈에 보이는 시각적 정보를 통해서 '주관적인 인상'을 갖게 된다. 그림을 읽는다는 건 '주관적 인상'을 넘어서서, 화가가 전달하려고 하는 정보, 정보 사이의 연관관계를 좇아가는 작업이다. 그렇게 이해할 때 우리 주위엔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림들이 많다. 이른 바 장식용으로 걸어두기 좋은 인상파 그림들이 대표적... [물론 마네를 비롯한 이른 바 인상파들이 당시 '보수적' 프랑스 미술계에서 고전했던 역사를 모르는 바 아니나, 현재 사정이 그렇다는 얘기다.] 화가 스스로 어떤 논리적 순서가 중요한 정보를 전달할 의도를 가지지도 않은 경우. 그것도 읽을 수 있겠으나...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고, 해석의 여지도 많은 것이다.
그것과 다르게 아애 처음부터 특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그림들이 있다. 사실 '그림은 보는 대상'이라는 그림 이해는 매우 근대적이다. 중세 종교화를 생각해보라. 종교화는 시각을 통한 미적 체험의 대상이 아니다. 중세 종교화는 전형적인 읽기위한, 아니 읽히기 위한 그림이다. 실제로 글을 모르는 교인들에게 성경의 이야기,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다. 그런 경우에 그림은 시각화된 텍스트일 뿐이다.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읽기의 대체매체였던 것이다 [그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조선시대에도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 삼강행실'도'를 제작했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그림만으로는 사회 유지를 위한 규범을 전달 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쉬운 매체가 필요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한글이다]. 활자 인쇄의 발전으로 문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그림에 시각적 매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라는 독특성이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도 읽기 좋은 그림들이 있다. 작가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 정보 사이의 논리가 분명하게 있어서 그것을 읽어내는 재미를 주는 그런 그림들 말이다. 그러려면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선 문법을 알아야 하듯] 중세 종교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도 성경의 이야기는 물론 그림에 동원에 다양한 상징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직업병' 탓인지 난 공부해야 즐길 수 있는 '읽어야 하는 그림'을 좋아하는 편이다.
자, 이제 그림 한 편 읽어보기로 하자. 이 그림도 그림인이상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누가봐도 잘 그렸다고 얘기할 수 있는 아주 깔끔한 유화이지 않은가? 큰 책, 그에 비해 많이 작은 책, 촛대가 책상 위에 안정된 구도로 놓여 있고, 전체적으로 진한 황색 톤을 써서 안정감, 일체감도 전달해 준다. 만약 제목,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주어진다면 좀 더 흥미로워진다. 이 그림은 고흐의 1885년작으로 제목은 "성경책과 졸라의 소설이 있는 정물화". 아하. 큰 책은 성경책, 작은 책은 에밀 졸라의 소설 [찾아보니 보통 Still Life With (Open) Bible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흠. 고흐가 이런 그림도 그렸구나... 다른 정보 없이 전시장에서 이 그림을 본다면 대개 그쯤에서 멈추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읽으려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한다. 전문서적, 미술사가들의 도움을 받자.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은가. 어떤 작가들은 누구나 원하는대로 해석하길 기대하며 창작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 평론가들, 미술사가들의 그 휘황찬란한 언어는 오히려 거추장스럽지만, 이런 그림의 경우 사정이 많이 다르다. 화가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서 소재를 선택했으니까 말이다 [그것조차 의심하는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겐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지만...].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에 걸려 있다고 하니까 수 년 전 들렀을 때 분명히 봤을 테지만 내 기억 속엔 전혀 남아있지 않다. 최근 클리프 에드워드(Cliff Edwards)의 '하느님의 구두. 거룩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2004) [원제: van Gogh and God : a creative spiritual quest, 1989]를 틈틈이 읽고 있는 중인데 그 책에서 이 그림의 '존재'를 비로소 확인하였다. 에드워드가 이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와 해석을 전해 줘서 이 공간에 그림에 대한 흔적을 남겨놓을 마음을 먹게된 것이고... 이 그림은 개혁파 목사였던 아버지가 1885년 3월 27일 세상을 떠난 후 8월경에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자, 아버지의 죽음은 이 그림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에드워드의 해설을 들어보자 [본문을 오려 붙였다].
"(...) 네덜란드 메멘토 모리파 회화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불이 꺼진 초는 죽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삶은 영원할 수 있다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촛대 옆에 있는 동으로 된 물건은 성경 표지에 달린 걸쇠 두 개다. 낡은 네덜란드어 성경의 각 페이지는 위쪽 절반은 성경 구절, 아래쪽 반은 성경 독서에 도움이 되는 주해로 구분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오른쪽 페이지 맨 위에 적힌 'ISAIE'라는 글자와 그 페이지 오른쪽 여백 근처에 적힌 로마 숫자 'LIII'이다. ... 이사야서 53장 '주님의 종의 노래;... 고흐는 자기가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성경구절, 곧 보리나주의 광부들 사이에서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고난의 종'의 사명에 관한 구절을 펼쳐놓았다. ... 성경 아래쪽을 살짝 누르고 있는 노란색 종이책... 낡고 모서리가 접힌 책 표지에는 'Emile Zola'와 'La Joie de vivre'라는 글자가 보이고, 그 표지 아래쪽에 'Paris'라고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흐는 아버지의 성경책 근처에, 바로 그해 (1885년) 출판된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을 두었던 것이다. ... '삶의 기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고 불만이 가득한 채 살아가는 한 중산층 가정을 그리고 있다. ... 성경책과 현대소설을 대조시킨 것은, 1883년 고흐가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겪었던 아버지와의 갈등을 증언한다. (...)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과 소설 속의 폴린은 둘 다 극기와 희생과 사랑이 육화된 인물이다. ... 고흐는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펼쳐진 성경을 그렸다. 졸라의 소설을 선택한 것은 이 소설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을 현대식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고흐의 편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는 현대 미술가로서 자신의 사명은 성경의 '오래된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을 변화시키는 혁명의 힘과 아름다움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 같은 해석이 그저 상상력의 소산이 아님을 에드워드는 고흐의 편지를 근거로 설득력있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