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31일 금요일

2008년 10월 30일 목요일

마광수 교수 근황을 듣고...

오랜만에 마광수 교수 소식을 들었다 (한겨레 기사). 전과2범, 20세기 한국에 태어난 게 죄라면 죄인... 한국, 한국인의 장점이 많지만 그 장점의 원천을 이루는 정서는 가족주의나 동질감 아닐까? 물론 어디 한국에서 뿐이랴. 동서고금 그런 정서는 모습을 바꿔가며 갈등, 전쟁, 살육을 일으키지 않았나,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어쩌면 한국들이 배타적인 정도는 '귀여운' 수준 아닌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주노동자들 같은 당사자들이 들으면 기겁할 얘기겠지만, 인류사에서 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특히 해방 이후에는 남북분단이라는 현실과 그것을 이용해 먹으려 들었던 위정자들에게 큰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없앨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현실, 또 서기 2008년에 '간통죄'가 존재하고 여전히 폐지하지 못하는 현실은 썩 잘 어울리는 현상이다 ('간통죄'가 얼마는 웃기는 짜장, 짬뽕인지에 대해선 여길 참고). 성에 대한 독특한 취향을 글로 표현한 것을두고 현직 문학전공 교수를 구속했던 과단성과 작곡가 윤이상씨에게 생전에 다시 고향땅 밟을 기회를 끝내 주지 않은 그런 일관성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마교수, 그래도 좀 더 꿋꿋하게 오래 사시길 기원한다.
인터뷰 중 반가운 구절을 발견했다. 얼마전 타계하신 작가 박경리와 '토지'에 대한...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국 '토지'를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생각 한 켠에 늘 자리잡고 있던 불편함을 일거에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ㅎㅎ 쌩유, 광마선생.

박경리씨는 살아있을 때부터 대가 취급을 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난 <토지>도 잘 썼다고 생각 안해. 문장도 100% 일어 문장이야. 세 권 읽다 말았어. 애들한테 물어봐도 20권 다 읽은 경우 못봤어. 눈치보기야. 독자들도 <토지> 안 읽어놓고, 왕따 당할까봐 그 말을 못해. 통탄할 일이지.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는 후대가 하는 거야."

2008년 10월 28일 화요일

다움

'답다'라는 우리말, 듣기에 좋다. 어른답다, 아이답다, 학생답다... 물론 '-답다'라는 표현은 위계질서상 위쪽에 있는 이들이 즐겨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이 생각하는 옳은 질서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 써먹는, im Grossen und Ganzen 여전히 효과적인 담론 자원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 학생다워야지...'. 그 문장에서 '학생답다'는 표현이 가리키는 바는, 뭐, 뻔하지 않은가. 바른생활... '내가 언젠가 조카들에게 거의 '무아지경' 상태에서 내뱉었던 그런 표현... '엄마아빠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그런 권위적인 냄새를 풀풀 풍기는 용례를 제외한다면, '- 답다'는 말은 좋은 의도를 전달할 때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이 표현이 부정적인 상황을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그럼 그렇지, 역시 너'다운' 짓이야. 어쨌거나... ).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런 상황, 상태가 있지 않은가? 너무 꾸미거나 세상이치에 밝으면 10대답지 못한 것 같고, 다시말 해 그리 좋아 보이지 않고... 20대 땐 패기를 갖고서 무모해 보이는 일에도 도전해 보는 모습이 보기 좋고... (아, 그런 모습, 정말 아름답다! 예를 들어, 자전거로 세계일주하는 청년들의 모습,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 그들에게 무한한 찬사를...!!!). 30대 후반, 40대에 이르면 푸근하고, 넉넉해 보이며, 적어도 어느 한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이고, 또 살아온 길에 대해 자신감도 은근히 내비치는...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든 생산적으로 기여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고 그리고 요구되기도 한 그런 모습이고 덕목이다. 고민, 갈등, 방황, 자신감 없음, 무기력 등은 - 물론, 속으로야 누군들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마는 적어도 겉으로는 - 이 또래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허나 여전히 생산하는 자의 입장에 서지 못한 채 40대를 바라보는 '늙은 학생'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젋게 살아서 나이를 '안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먹어야 할 나이를 '못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젊게 산다는건 제 나이값 못하는 이들에 대한 립서비스이거나 자기위안은 아닌지... [물론 그 맘때 '일반인' (혹은, '정상인' ㅎㅎ) 또래들이 겪는 부정적인 증후군을 적게 겪는 것 같긴 하다. 그런 장점마저 없으면 얼마나 더 비참할꼬...] 어쩌랴... 스스로 선택한 길인걸. 허나 그래도 뭔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보자면... 어쩌면 '늙은 학생다운' 모습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리라.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내 나름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그것까지 공개하진 않으련다.

2008년 10월 27일 월요일

주말 단상

일요일 저녁, 어쩐 일인지 어탭터가 굉음을 내면서 전력을 계속 공급해준다. 오늘 오전, 컴이 한참 긴요한 시간에 충전해 가면서 썼다 켰다 반복하던 일을 생각하면, 이 굉음은 오히려 반가운 소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이런 저런 계기로 잡게 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관계는 정말 복잡하고 미묘하다. 현대의 의사소통의 경우, 그 상황을 위해서 위계적으로, 신분제적으로, 혹은 여러 가지 규범으로 정해진 행동지침이 많지 않다보니 대화의 규칙을 만들어가고 상황을 해석하고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다음 대화 turn에서 확인해가고... 대단한 기술과 집중력,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것. 늘 코드를 맞춰나가야 한다. 그 과정은 맞춰지거나/맞춰지지 않거나, 이항코드로 선택될 수 있는게 아니라, 아나로그다. 0과 1 사이에 무수하게 많은 가능성이 있는 것. 그 관계가 아주 단순화되어 오해의 여지가 적은 경우는 대표적으로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좀 더 복잡하지만 그래도 단순한 경우는 표준화된 단순 노동을 하는 작업장 동료들 간의 관계. 부부나 '친한' 친구 같은 관계는 친밀도와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이 넓어서 오히려 오해의 폭이 적은 경우. 가장 힘든 경우가 어정쩡하게 친한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대화상황에서 도대체 眞意가 무엇인지, 왜 무슨 의도로 이 얘기를 꺼내는지, 아니면 침묵하는지 순간 순간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언젠가 썼듯이 그 경우 그 찰나의 타이밍이 중요해서 그것을 놓치면 벌써 상황종료, 새로운 상황 시작...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산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그러할까?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현대인들은, '정상적'으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은 이런 폭넓은 해석과 선택의 도전을 외면하며 살 수 없다. 인간관계를 잘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 상태를 얘기하는 것일까? 그 과정을 유연하게 잘 처리해서 이음새가 잘 눈에 뜨지 않는 경우. 모든 상황을 souveraen하게 통제해 나가는 경우 아닐까?
그건 그렇고... 나도 '문명병' 환자라면 환자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 애쓰는 편이지만... 단답형 지식은.... 그런 형태의 지식도 왜 쓸모가 없겠는가마는, 그게 필요한 시기나 분야는 매우 제한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너도 나도 목청높이어 답다는 기계 만드는 한국 교육의 퇴행성을 지적한지도 꽤 오래되었는지만 크게 바뀌진 않은 것 같다. 우연한 기회로 인터넷을 통해 초등 혹은 중고등 시험문제를 보면서, 참 아직도 저런 문제를 내고 그에 대한 정답을 요구하는구나, 안타까움을 넘어서 화가 날 때가 있다. 특히, 국어나 도덕, 윤리, 사회 그런 쪽 문제들... 쉽게 바뀌지 않는 걸 보면 그런 객관식, 단답식 지식을 습득하는 게 현대 사회의 성공적인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인식이 꽤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어떤 장점이 있을까? 뭐니 뭐니 해도 평가의 계량화, 한마디로 순위매기는 데 그보다 더 손쉬운 방식은 없다. 객관식, 단답식, 경쟁, 줄세우기, 계량화된 성적, 그 서열에 앞자리에 서기, 성공, 출세, 모두 의미의 연결망 속에서 가까운 곳에서 발견될 단어들이다. 심지어 겸손, 사랑, 섬김이 더 본질적이어야 할 교회에서도 큰 문제의식 없이 수용될 정도로....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를 열어주는 교회들, 남은 어떻게 되든 내 자식만큼은 평소 공부한 것 이상 좋은 점수 '따게' 해주고, 앞으로도 쭈욱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마인드'. 지난 수십년 간 한국은 물신주의 가치관, 성장, 성공에 대한 욕망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이 땅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국산 기독교의 성공지향적 세계관, 가르침은 그런 사회적 기대와 기가 막힌 찰떡궁합을 이루지 않았던가. 그 결과 이젠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더라도 떨쳐버릴 수 없는 한국인 '심성'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는지... 경쟁을 만들어 내서 공부하기... 사람이 공부할 거리, 공부방식을 만들어내지만, 그런 방식이 또 사람과 사람들이 관계하는 방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다시 한 번 co-evolution). 인간(의 노동)이 자신이 만들어 낸 대상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을 우리 맑스 형님은 Entfremdung, 疏外라고 부르시지 않았던가. 참, 낯선 어쩌면 기괴하기까지 한 풍경이다. 교회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자연스럽기도 한 그런... 나도 그 풍경의 일부였다.

[덧붙임: 우연히 오늘, 화요일자 '뉴스앤조이' 기사 중에서 다음 기사를 발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전북 이리노회 이리노회 주일학교 25주년을 맞아 '초등부 성경 골든벨' '성경 필사본 시화전' 개최한다." '성경골든벨'이라면 내게는 매우 친숙한 방식이다. 대단히 효과적이란 검증도 이미 끝났고. (ㅎㅎ) 하긴 고등부 시절 건축업을 하시던 부장 장로님께서 연말까지 성경일독하면 (내 기억이 맞다면) 만원씩 준다는 '공약'을 내걸기도 하셨는데, 그것보다야 훨씬 세련된 방식이다. 그 당시 상금이 집행되었던 건 분명한데 나도 그 '만원' 수령자였는지는 무슨 까닭인지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안' 혹은 '못'받았으니 기억을 '안' 혹은 '못'하는 것일까? 어쨌든... 돈 욕심 때문에라도 성경 한 번 읽는 게 안 읽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총동원전도주일에 선물 받을 욕심으로 교회 문턱을 한 번 넘어서 보는 것도 비신자들에겐 복음을 들을 드문 기회일 수도 있다. 허나...모두... 좀 '거시기'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문화를 넘어설 수 있는 깊이를 갖춘 이들 아닌가? 영의 세계를 맛보았고, 진리를 과감하게 외칠 수 있는 이들 아닌가? ]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컴퓨터 혹은 인터넷 금단증

몇 주 전부터 골골하던 노트북 어탭터가 '드디어' 숨넘어가기 직전에 이르렀다. 켜지 않은 상태에서 배터리에 충전은 되나 컴퓨터에 전원을 넣는 순간 배터리로만 작동하는 것. 배터리만으로는 10분을 넘기기 힘드니 거의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 되어 버렸다. 컴퓨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당장 새어댑터 사려고 시내에 나섰으나, 왠걸,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다. 할 수 없이 ebay로 눈을 돌릴 수 밖에... 화요일 저녁에 비경매로 나온 매물을 구입해서 바로 입금했으나, ebay 물건구입에 대한 이전 경험이 보여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토요일인 오늘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목요일에 보냈다는데... 덕분에 며칠 간 컴퓨터 없다시피한 집에 살고 있다. 급한 일은 학교 도서관에서 처리한다. 성능 좋은 컴퓨터들이 여기 저기 놓여있고, 지금처럼 한글 입력에도 전혀 문제가 없으니 사실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허나 어제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 있다가 컴퓨터 없는 방에 들어서니 왜 그리 낯선지. 잠자기 전까지 인터넷 뒤적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습관이 되다시피해서, 도대체 이 밤에 뭘하지?,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 '설상가상' 텔레비전을 소유하지 않은지 벌써 오래 되었으니... 대체품도 마땅찮은 것. 결국 모처럼, 정말 모처럼 공부용이 아닌 교양용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과 컴퓨터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면서 여가시간이라고 책을 읽어본 기억이 참 오래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심지어 일어나자마자 컴퓨터 켜고 인터넷으로 한국 뉴스 확인하며 아침 먹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적지 않은 돈 들여서 받아보고 있는 종이신문을 읽을 시간은 더 줄어들게 되었고... 또 영어 도튜멘타리를 틀어 놓고서 잠드는 습관도 갖게 되었다 (최근엔 리차드 도킨스 출연 다큐를 주로...). 화면을 덮어 놓은 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려고 집중하다보면 '쉽게' 잠에 빠져들곤 했다 [확실히 이런 방식으로 난 재미를 보고 있다. 난 꼭 뭔가를 들으면서 잠을 청하는데 너무 잘 들리는 내용이나 혹은 아애 안 들리는 음악 같은 것보다 집중해야 들리는 그런 내용, 영어나 독일어로 누군가 고른 음색으로 얘기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편이다. 그래서 한 때는 루만의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 효과적이긴 했으나, 다시 듣고 싶진 않다 ㅎㅎ]. 활자, 책, 문법, 언어 등 문자문화가 직업에 해당하는 세계라 여가시간이 영상매체로 채워지는 게 자연스럽긴 하다. 그런 저런 핑계로 영화나 재미있는 도큐 같은 것 골라 보는 재미가 쏠쏠했었는데...
지난 주부터 점심 시간 일하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오전에는 인터넷을 보지 않고, 그래서 아침먹을 때도 신문을 읽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어댑터까지 고장나서 한편 자발적으로 다른 한편 울며겨자먹기로 컴퓨터 특히 인터넷 사용을 줄이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시각적 정보가 주는 그 즐거움, 재미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모든 감각기관을 동시다발적으로 적절하게 자극해 주는 그런... 언제부터인가 심지어 음악도 '보게' 되지 않았는가. 난 담백한 걸 좋아해서 컴퓨터도 최대한 슬림하고 소박한 상태로 나름 '최적화'해 놓고 있는데도 [한 가지, 프로그램은 가능한 최신 버전을 써야 만족하는 편이다. 그렇게 보면 뼈속 깊이 아날로그형 인간은 아닌 지도... 이런 블로그에 글을 쓰려고 끄적거리... 아니 틱틱거리고 있는 것도 하나의 반증이되겠지만... ],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컴퓨터나 인터넷, 영상매체의 '유혹'에 그동안 너무 많은 자리를 내 주었던 것 같다. 이번 기회에 반성하고 좀 더 문자적으로, 아날로그적으로, 그리고 흑백의 정신으로 살아볼 생각이다. 오전엔 인터넷없이, 자기 전 시간엔 아애 컴퓨터 없이 지내볼까 한다. 처음엔 낯설고, 어색하겠지만... '중독'의 특징은 당시에는 '중독'이라고 못 느낀다는 것, 또 알더라도 쉽게 끊을 수 없다는 것.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무신론의 宗敎化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내년 1월부터 영국 런던의 버스에서 ‘무신론 광고’를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종교계의 ‘불신지옥’(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이란 위협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맞불 광고’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신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이제 걱정은 그만하고, 인생을 즐기세요”라는 버스 광고(사진)를 내기 위한 모금이 21일 시작돼, 하룻만에 4만7900파운드가 걷혔다고 22일 보도했다. 애초 목표인 5500파운드의 9배가 넘는 금액으로, 4주 동안 버스 30대에 광고하려던 계획 또한 크게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코미디 작가 애리언 셰린은 “전국 규모로 확대할 수도 있고, 지하철 광고나 다른 문구도 시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이 기사를 읽으면서 누구보다 리차드 도킨스가 좋아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기사 아래 쪽에 언급되어 있다.

"베스트셀러 <만들어진 신>의 저자로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 교수도 “이런 광고를 실으면 사람들은 생각을 해보게 될 것이다. 종교는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며, 추가로 5500파운드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도킨스 교수는 종교계의 시내버스 광고에 빗대, “종교는 면세 혜택 등을 통해 ‘공짜 탑승’하는 데 익숙하다”며 “‘모욕’당해선 안 된다는 특권과 어린이들을 세뇌시킬 권리를 주장”하는 종교계를 비난했다."

이쯤되면 무신론'교'라고 불러도 크게 어색하지 않으리라. 재미있는 현상이다. 무신론이야 인류역사에서 늘 찾아볼 수 있었겠지만, 요새 무신론은 또 하나의 종교가되는 것 같다. 종교의 해악을 지적하는 것이 하나의 신앙이되는... 종교가 뭐 별건가. 천당/극락을 가르쳐야 종교라는 '편견'을 버린다면...

2008년 10월 23일 목요일

다른 場, 다른 의사소통 기술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모습은 왜 어느 하늘 아래에서나 다 비슷할꼬... 순한 사람, 강한 사람, 순한것 같은데 알고보면 만만하지 않은 사람, 센 척 하지만 알고보면 따뜻한 사람, 항상 인상쓰고 다니는 사람,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사람, 왠지 같이 있기 불편한 사람. 재미있는 건 상대가 보이는 반응에 내가 기여한 부분이 상당히 크다는 점. 나와 상대의 합작이다. 어쨌든... 아마 단순한 일로 얽힌 관계에서 사람을 판단할 때는 개인적 경험에서 얻게된 판단력에 의존해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누구나 경험상 사람을 구분하는 나름대로의 판단틀을 가지게 되고, 그런 판단기준은 살면서 검증받고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예측가능성은 높아진다. (관상, 점쟁이들은 특히 그런 '감'에 의존한 사람판단에 숙련된 이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이라면 과학이다. 그것도 경험과학 ^^). 하지만 이같은 판단기준에 따른 사람평가의 성공률이 높은 삶의 영역은 매우 제한되어 있는 것 같다. 우선, 처리해야 할 커뮤니케이션 상황의 복잡성이 낮을수록 이런 '감'이 잘 통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단순한 노동을 반복하는 작업장이나 혹은 스포츠 활동이 일어나는 운동장 같은 경우, 그 '場'을 지배하는 법칙이 매우 단순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놀거나 천천히 움직이면, 다른 사람이 더 일하거나 더 뛰어야 한다던지, 뭐 그런... 혹은 상대에 대해서 알고 싶은 혹은 알 필요가 있는 정보가 매우 단순하다거나.... 운동을 잘 한다/ 못한다, 나이, 독일체류기간, 결혼 여부 등, 고려할 것이 많은 의사소통 상황에서는 금기시되던 질문들이 여기 저기에서 날라든다.
일이 복잡해지거나, 의사소통의 내용이 복잡할수록, 제대로 의사소통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전제조건이 더 많아진다. 언어적, 비언어적 여러 수단을 통해야 하고, 한 번 꼬이면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언제가 썼듯이 이런 복잡한 의사소통의 場에서 인간관계를 잘 풀어가기 위해서는 고도로 숙련된 언어능력과 대화기술이 필요하다. 그런 기술을 익히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외국인들, 혹은 외국어로 의사소통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선 결정적인 경우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구두 의사소통과 비교할 때 문자 의사소통은 해석의 가능성을 급격하게 줄여준다. 그나마 고마운 일 아닌가?
진중권 교수는 구두문화와와 문자문화의 구분 도식을 가지고 한국의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데, 지나치게 단순하고 그냥 수긍하기엔 좀 내키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참 설득력있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합리화와 문자문화의 발달은 거의 동의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 문자를 쓰던 역사는 수천년을 헤아리지만, 아쉽게도 문자로 의사소통을 자유자재로 하던 이들의 비율은 20세기 중반을 지날 때까지 매우 제한적이었다. 최최의 금속활자를 발명했다고 자랑만할 일도 아니다. 그런 활자로 고작 수십부의 책을 찍었을 뿐이니. 문자적 합리성이 채 자리잡기도 전에 그놈의 인터넷이 한국의 커뮤니케이션에 지나치게 중요한 역할을 넘겨 받았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은 비록 문자를 매개로 하지만 그 행태는 전형적인 구두문화의 그것이다. 진중권씨가 그런 점을 반복해서 지적하는데 난 아직도 그 주장에 대해 어떤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

우스개?

어느 대학생이 크게 유행하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들고 교수를 찾아갔다.
‘선생님, 이 소설 읽어 보셨어요?’
‘아니 왜?’
그러자 학생이 실망한 듯
‘아니, 교수님. 이 책 나온 지 두 달이 넘었어요. 빨리 읽어보세요.’
‘그래? 그럴까, 그런데 학생.......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읽어 봤나?’
‘아뇨, 왜요?’
‘야 이 놈의 자식아. 그 책 나온 지 2700년이 넘었다. 빨리 가서 밑줄 치고 외워!’

이윤기 선생이 들려 준 이야기임을 밝히며 정윤수 선생이 들려 준 이야기.

큰 주식시장, 작은 외환시장: 한국 금융시장의 이중적 구조

換亂 때문에 짐싸서 돌아간다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아직 이웃 도시 얘기지만. 지금 경제위기가 세계적인 현상이긴하지만 우리나라 처럼 환율이 큰폭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대외경제변화에 대해서 우리나라가 유독 취약한 이유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현장'을 잘 아는 (것 같은) 전문가의 설명이 쉽고도 설득력 있어 옮겨 놓는다.

"배상근 : 우 리나라는 아주 개방화된 소규모 경제단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방도가 워낙 커서 외부의 조그만 충격도 직접적으로 우리 경제에 와닿게 되는 거죠. 그리고 또한 우리나라 주식시장이나 외환시장의 특징이 있는데요. 주식시장의 경우는 신흥국가들 중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외국인의 지분비율이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과거에는 한 40%까지 있다가 최근 들어 외국인들의 순매도가 굉장히 증가하면서 27% 수준으로 크게 떨어졌는데요. 미국계 자본 같은 경우는 일단 내 코가 석자 아닙니까? 바로 우리 주식시장에서 돈을 빼서 미국으로 지금 본국으로 송환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고요. 여타국의 자본 같은 경우도 돈을 빼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격이 떨어진 국가에서 수익률을 본달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식시장에서 대규모로 돈이 빠져나가고 있는데 그 돈이 어딜 거쳐야 되냐면 외환시장을 거쳐가야 되거든요. 달러를 바꿔야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 외환시장 규모가 상대적으로 굉장히 작고, 외환시장이 작은 규모다 보니 큰 돈이 빠져서 작은 시장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외환시장이 크게 요동되고 있고요. 특히 우리 외환시장은 98%가량이 달러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근에 규칙통화로 돼 있는 달러의 불안전성이나 달러가뭄이 아주 심한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보여지죠."

하지만 지금 위기가 한국 금융산업에 호기일 수도 있으며, 금융부문이 앞으로 고용을 창출하는 중요한 산업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부분에 대해서 왠지 신뢰가 가질 않는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금융자본주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실물경제와 금융의 괴리가 클수록 위기의 확산속도나 파급효과가 큰 것 아닌가? 아이슬란드 같은 나라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모델을 도입했다가 지금 IMF에게 손 벌리는 신세가 된 것 아닌가? 18년(1987~2006년) 동안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연준) ‘마에스트로’(거장), ‘경제계의 현자’라는 칭송까지 받았던 자유시장주의 전도사 앨런 그린스펀(82) 마저 "은행 등 금융기관이 주주와 자산을 보호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내가 실수했다.(I made a mistake.)”라고 고백하는 판 아닌가 (관련기사). 도대체 한국이 금융산업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내 상상력으로는 그 모습을 그릴 수가 없다. 이 양반 혹시 신종 '신자유주의 전도사' 아닌가? [배상근 박사의 평소 주장을 알아볼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과도한 억측을 발설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울러 인터뷰라는 설정 탓에 발언이 짧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

"하지만 여기서 머물지 말고 이러한 금융위기를 우리의 기회로 전환시킬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제조업은 고용의 한계를 느끼고 있죠. 첨단산업 같은 경우는 고용숫자를 늘린다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장비를 늘이고 사람을 줄이는 측면이 있고요. 제조업은 3D업종은 사람이 필요하지만 우리 청년층이 가려고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청년층의 눈높이에 걸맞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고요. 우리 경제를 이끌어갈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금융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융산업을 왜 주목할 필요가 있냐면, 지금 최근에 나온 IMF의 은행위기보고서가 있는데 지난 37년간 124개 은행위기를 살펴봤습니다. 그런 경우를 보면 대개 위기가 끝나는데 53개월... 4,5년 정도 걸립니다. 대공황시기나 저축대부조합의 연쇄파산시기도 그렇지만 그 당시 시기에는 어떤 일이 발생하냐면, 규제가 강화되고 금융의 혁신이 없습니다. 금융의 신상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서 선진국 경제에 있는 금융기관들이 어떻게 보면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탭니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과감하게 규제를 완화하고 노력해간다면 지금은 많이 떨어져 있지만 선진국 금융기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향후 한 5년 정도 벌어놓은 상태거든요. 이 기회에 우리가 보다 노력해서 우리 금융산업을 발전시킨다면 수출로만 이끌어가던 우리 경제에서 우리 경제 안에 금융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활약할 수 있고 이와 동시에 우리 국민들이 원하는 보다 좋은 일자리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추가: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라는 의미에서 금융시장으로 주식시장, 외환시장을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금융시장 거래의 핵심은 개인/기관 사이의 단기, 장기간 거래아닌가? 물론 그런 거래 역시 매일 사고 파는 행위가 이루어지며 거기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겠지만. 한국 금융기관들은 일본, 중국에 비해서 외국 금융기관과 거래 비중이 높다고 한다. 그게 외부 환경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2008년 10월 21일 화요일

가을 속으로








몇몇이서 가을 속으로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그 날 찍은 사진 몇 개를 소개한다. 위에서부터. (1): 출발지였던 Guetersloh의 숲. 보자마자 컴퓨터 배경화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완벽한 가을경치. 사진으로는 그 감흥의 1/10도 보여주기 힘든... (2), (3):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찍어보기도 했다. (2)는 흔들림 때문에 예술 사진이 되어 버린 경우. (4) 목적지였던 Warendorf 는 생각 이상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시청은 13세기에 지어진 건물) 구시가지는 온통 돌밭이었다. 그 바닥을 찍은 것. (5) 조그한 시가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고딕식 성당이 있었다. 그 성당 출입문 문양이다.

근대, 불확실성, 위험

'불확실성', '위험'은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포스트모던적 특징이 아니라 바로 근대의 본질적 측면이라는 게 루만의 입장이다. 사회의 질서유지 혹은 통합이 더 이상 위로부터의 - 종교적 혹은 정치적 - 지배에 의해 가능하지 않게 되고, 수평적인 기능체계들로 분화가 일어나면서 위험은 점점 일상이 된다 [우리말 어감상 '위험'은 당연히 근대로 제한할 수 없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위험은 Risiko/risk의 번역어로 이해해야 한다]. 위험은 정상적인 활동의 부작용으로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가 되어서 위험을 회피하려는 것 자체가 다른 위험을 가져오는 순환구조가 이미 뿌리깊게 자리잡혀있다.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그 대표적 사례다. 금융시장에 항존하는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각종 금융파생상품들의 연결망이 가지고 있던 위험은 너무 복잡해서 산정불가능한 상태였고, 한쪽 고리에서 터진 문제가 이 정도로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 예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럴 때 우리의 구세주는 국가다. 각종 지원책 꾸러미를 만들어낸다. 허나 국가, 그리고 이들이 핵심적 행위자인 정치체계는 위험 혹은 위기를 먹고 사는 체계다. 없던 위기도 만들어내지 않는가. 이명박 정권은 집권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경제위기설을 퍼뜨리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북괴'위 위협, 사회안정을 헤치는 '좌파세력' 같은 공세의 말발이 떨어진 시대에 '경제위기론'이 그런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한 모양이다 (그 석두에서 나오는 발상이 그렇지 뭐. 아, 그리고 좌파 운운은 여전히 써먹고 있긴 하다. 스스로 그게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다가 막상 위기가 닥치자 '한국 경제는 튼튼하다, 내가 언제 위기설 운운했느냐'며 발뺌하기 바쁘다. 아무리 정치가 없던 위기까지 만들어내며 목숨을 유지하는 체계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도덕은 있어야 하지 않나. '책임'말이다. 이른 바 선진 민주주의라면 바로 그 '책임'을 지거나 지우는 메카니즘도 함께 발달된 상태를 일컫지 않을까. 미국이 아무리 꼴똥 깡패 국가이고 많은 구성원이 무식, 무지하더라도 내 기억엔 대통령 선거에 떨어지고서 재출마한다거나 비리로 정치'판'을 떠났다, 잊혀질만하면 다시 슬거머니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보는 보도에서 관찰될만한 고위급 정치인들의 경우). 독일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아무리 관리해봐야 위험은 피할 수 없고, 위험과 친해지는 게 오히려 덜 위험하게 사는 방식일지 모르겠지만, 위험, 위기의 시대에 '책임의 원칙'도 함께 발전해 줘야 한다.
얼마나 예측하기 힘든지 최근 유가, 환율의 상관관계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늘 신문을 보니 유가가 갑자기 떨어져서 또 나름의 위기를 두려워하는 산유국들이 있는 모양이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푸틴 치하 십여년간 천연자원 가격 상승덕을 보며 잘 나가면서 기고만장하더니 어느새 좀 불쌍한 처치에 놓이게 되었다.
근대와 위험, 불확실성의 원래 친밀한 관계지만 요새 너무 친해져서 하루 하루 사정이 급변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내실을 다지고, 원칙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환율, 주식 등 조그마한 단기 이익에 민감해서는 제명에 살긴 힘든 세상이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일희일비하지 않고, 멀리보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원칙을 지키며 살 일이다.

共進化

共進化 (co-evolution)는 자연, 사회, 인문 등 학문의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개념이다. 어쩌면 가장 진화된 이론화 방식이 아닐런지. 비록 '공진화' 개념이 사용되진 않았더라도 비슷한 착상은 여기 저기서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건축가 승효상과 언론인 박인규와의 대화에서....

"승효상 : 제가 믿는 바로는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고 믿고 있어요. 도시도 마찬가지, 사회가 도시를 만들지만 도시가 다시 사회를 만듭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요즘 많은데 아마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잘못된 도시구조에 그 원인이 상당 부분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은 삶, 좋은 공동체적 삶을 원한다면 우리 건축을 사고 파는 부동산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가 근본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문화의 대상으로 파악해야 우리 도시와 건축이 나아지고 결과적으로 선과 후의 공동체가 진보할 거라는 믿음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박인규 :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그런 말은 들어봤지만 사람이 건축을 만들고 건축이 사람을 만든다. 인문적 건축이랄까요. 그런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2008년 10월 20일 월요일

좋은 글

"시끄럽고 분주한 복판으로 차분하게 지나면서
침묵 속에 있는 평안을 기억하여라.
할 수 있는 대로, 굴복하지는 말고
모든 사람과 좋게 지내라.
조용하고 분명하게 너의 진실을 말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라. 비록 무지하고 어리석지만
그들에게도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목소리 크고 다툼질 좋아하는 자들을 피하여라.
그들은 영(靈)에 성을 내는 자들이다.
네가 만일 너를 남들과 비교한다면
허탈감과 쓰라림을 맛보게 되리라.
너보다 잘났거나 못난 자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너의 계획과 함께 네가 이룬 것들을 즐겨라.
(........)
무미건조하고 매력 잃은 자들 앞에서
사랑은 풀잎처럼 싱싱한 것이다.
늙은이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젊은이들이 하는 일을 너그러이 받아들여라.
갑작스런 불운이 닥쳤을 때
너를 지켜 줄 영(靈)의 방패에 기운을 넣어 주어라.
그러나 공연한 상상으로
근심을 사서 하는 일은 없도록 하여라.
많은 불안이 고단함과 외로움에서 온다.
몸에 좋은 수련을 쌓고
너 자신에게 다정하여라.
너는 우주의 자식이다. 저 나무와 별들 못지않게
너 또한 여기 있을 자격이 있다.
너의 포부가 무엇이든 시끄러운 세파 속에서
영(靈)의 평안을 유지하여라.
온갖 부끄럽고 천박한 일이 일어나고
꿈들이 부서져도,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이다.
기운을 내어라.
행복하려고 애써라."

도종환 시인이 '참 좋은 글'이라며 소개했다. 글쓴이는 모른다며... 그렇다. 모든 사람과 좋게 지내되 굴복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을 즐기고, 내 자신에게 다정하며, 행복하려고 애쓸 일이다. 행복하려고 애쓸 일이다...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심리기제

도서관 연체료 대박을 맞았다. 일당을 조금 넘는 거액... 흑흑. 잠시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지만 이내 '제정신'을 찾았다. 너무도 쉽게 이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내 심리체계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난 그런 편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에 미련을 별로 두지 않고 쉽게 잘 잊는다. 흔히 하는 얘기로 '정신 건강에 아주 좋은' 태도임에 분명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태도는 권장된다. 비슷한 내용을 담은 속담 혹은 관용구가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된다는 사실. 독일어 표현에 "was passiert ist, ist passiert", 영어에선 "It's no good/use crying over spilt milk" ... 우리말에서는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원래 우리 속담일까?) 혹은 '모던'한 버전으로 "버스지나간 후 손들어 봐야 소용없다" 정도? 어쨌든 일종의 심리적 기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우리가 mechanism의 번역어로 자주 사용하는 '기제'(機制)가 국어사전에 등재되어있지 않다. 옳은 표현이 아닌가? 어쨌거나 '기제'는 서로 다른 상황에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행동 방식, 심리적 (해석) 유형을 일컫는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과는 다르게 사회학에는 사실 '기제' 혹은 'mechanism'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 것 같진 않다. 특별히 ethnomethodology 의 methodology를 그런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Oder irre ich mich an diesem Punkt?] 어느 정도 정형화된 심리기제라고 하면 심리학 비전문가로서 당장 '신포도 기제'나 엽기적 인질 사건 보도에 흔히 언급되던 '스톡홀름 증후군' 정도를 떠 올릴 수 있다. 우리 심리체계가 경험하는 건 많은 경우 기제라고까지 얘기하기 힘든 개인적 경향, 태도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연체료 대박' 처럼 가끔씩 겪는 사건, 사고는 쉽게 수용한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사람과 관련되어 일어난 일은 좀 오래 마음에 두는 편이다. 예를 들어 며칠 전 Steh-Cafe 에서 '아줌마'에게 어떤 말을 건냈는데 못 알아듣는 '사고'가 발생했다. 물론 세 번째 'turn'에서 [ㅎㅎ 어제 들은 걸 활용했다] 상황 정리가 끝났지만, 바로 옆에 서 있던 독일 녀석 둘이서 내 말을 자기들도 잘못 알아들었다면 지들끼리 얘기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 어떤 말을 해 줘야 할 지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 갔는데, 몇 걸음 떼지 않아서 그냥 넘어갈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해 줄 말이 생각나고... 하지만 그 몇 초의 시간이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만들어 버려서 다시 돌아가서 걔들 나무라기가 참 어색하게 되어 버렸다 [의사소통에서 1초, 2초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는 시간이다. 그 순간은 분명한 메세지를 전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특히, 싸울 때나 농담을 할 때. 순간, 타이밍을 놓치면 싸움도, 유머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으로서 외국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들을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대개 공감할텐데... 수업에서 문답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서 끼어들어 보려고 기회를 노린 적이 있는데 그 몇 초를 놓쳐서 결국 한 마디도 못하고 말았던 적....] 적어도 그날은 그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고 해 주었으면 좋았을 말들이 떠 오르는 것이다. 모국어가 아니라서 더 그렇기도 했겠지만 난 원래 말싸움 할 때도 가끔씩은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적절한 단어, 표현이 생각나서 뒤늦게 분해하는 편이다. 언제가도 썼듯이 관계를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 답답함, 분함을 처리하는 심리적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드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분함이나 억울함을 풀지 못하는 경우에는 -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그 독일 녀석들처럼 -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해결해 주도록 맡기는 수 밖에 없지만, 그 상대가 친밀한 사람일 경우 어떤 식으로든 나중에라도 내 생각, 심정을 털어놓는 편이다. 가까운 사람과 오해나 불만을 다 처리하지 못하고선 도무지 관계지속이 어렵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움직여가는 것을 관찰하면 난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났거나 되돌이킬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건, 사고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고, 개선이나 해소할 여지가 있는 사람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는 편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ps) 생생한 그 느낌을 그래로 남겨두고자 아침부터 컴앞에서 시간을 보냈더니 이미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은 누굴 원망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내 결정의 결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미련을 가질 게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

2008년 10월 16일 목요일

2008년 10월 9일 목요일

창의성

지난 8월 방영된 EBS 다큐 '창의성을 찾아서'를 일부 보았다. 최근 한국 방송사들이 만든 다큐멘타리를 보면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독일에서 arte, 3sat 같은 방송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쯤...' 이런 생각을 가졌는데 이런 방송물만 보면 독일 부럽지 않다. 혹시 케이블 TV의 등장으로 방송사들이 많이 생기고 관련 활동이 활발해진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건 아닌지... (물론 한 두 편 프로그램이 아닌 arte, 3sat 같은 채널 자체가 생기기까진 더 오래 걸리겠지만...).
방송 앞부분에 등장한 창의성 점검 문제 하나를 소개한다.

"성냥개비 4개가 있다. 이를 이용해서 밭 전(田)자를 만드시오."

창의성 점검 문제임을 명심하시라. 정답은 다음 호(?)에...

ps) 난 '물론'(!) 못 풀었다. 답을 알고 보니 예전에 한 번 들었던 기억이... 창의성은 커녕 기억력마저 신통찮은 것이다.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역설의 신앙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5-6). .

Clothe yourselves with humility toward one another, because, "God opposes the proud but gives grace to the humble." Humble yourselves, therfore, under God's mighty hand, that he may lift you up in due time.

베드로전후서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와 더불어 공동서신 (The Catholic Epistles)혹은 일반서신(The General Epistles)이라고 불린다. "공동서신이라는 표현은 여러 사람이 이 서신들을 함께 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서신이 모든 사람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서신은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들이다. 말하자면 발신자의 공동성이 아니라 수신자의 공동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공동서신은 심오한 신학론이나 신비스러운 경험보다는 대중적이요, 윤리적이요, 교훈적인 내용이 주된 주제다. 실제적인 신앙 훈계와 권면으로 당시 핍박과 이단의 유혹과 신앙적 시험에 둘러 쌓였던 모든 교회에게 힘과 지혜를 주고자 기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서신을 통해 당시 초대교회가 당면했던 보편적인 문제와 다양한 삶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베드로전후서의 저자가 과연 편지 서두에 언급된대로 사도 베드로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적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윗 본문도 이런 당대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 활발하게 늘어나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 교인들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말이다. 본문은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조건 혹은 결과는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는 것이고... 이는 마리아의 노래(눅 1), 산상수훈에서 등 성서 여러 곳에서 반복되어 강조되는 역설적 가르침이다. 이런 "역설"은 사실 동서고금 여러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나온다는 "必死卽生 必生卽死", 혹은 한용운 선생의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僕從)을 좋아해요" 라는 시편... 이런 가르침은 수익창출 메카니즘에 대한 한 단계 높은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즉, '높아지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자유롭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서라도 '낮아지고, 죽으려 들고, 복종하라'는 게 아니다. 기존 사고틀(framing) 안에서 이렇게 표현될 수 밖에 없지만, 사실은 이런 구분법 자체를 넘어서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했단 말이지. 내가 지금은 비록 이 모양이지만 열심히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면 언제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명예, 부를 누리게 될 거야"가 아닌 것이다. '낮음/높음'으로 구분하는 상식의 전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기독교의 가르침은 훨씬 더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듯하다.

2008년 10월 6일 월요일

이왕 사는 것 이 정도는 살아야...

남대. 영남대라면 대구로 이사가기전 2년여 남짓 경산에 살던 중학시절 자전거로 즐겨 찾던 드라이브 명소였고 대학시절 가끔씩 놀러갈 때마다 확 트힌 전경이 늘 눈에 시원하던 그 곳 아닌가. 그 곳은 염무웅 (문학평론가, 독문과),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영문과) 같은 전국구 지식인의 직장이기도 하다. 또 다른 누구보다 이 대학에서 가르치는 노동법 전공 박홍규 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워낙 튀는 책을 많이 써서 유명해졌지만 사는 방식도 기이하기 그지 없다 [범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양반이 펴냈다는 60여권의 책 중에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확신하지만, 훗날 그가 쓴 어떤 책을 읽더라도 고개 끄덕이며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오늘 우연히 경향신문에서 이 양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늘 갖게되는 생각이지만, 길지 않은 인생, 하고 싶은 대로 살 일이다.

"‘그’는 초등학생도 갖고 다니는 휴대전화를 가져본 적이 없다. 운전면허증도 승용차도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터는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간다. 점심 도시락도 꼭 싸들고 다닌다. 머리는 다듬지 않아 항상 헝클어져 있고 수염도 텁수룩하다. 신용카드는 있지만 쓰지 않고 TV도 안보고 인터넷도 거의 하지 않는다. 각종 회식 자리에도 가지 않는다. ‘삼천리 금수강산을 남북한 인구로 나눈 면적만큼만’ 땅을 사 자기 먹거리의 농사를 짓는다. (...) 해마다 3~4권씩, 지금까지 60여권의 책을 펴냈다. 주말에는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음악 듣고 화랑도 찾는다. 직접 그림도 그리고 등산도 한다. 이해·연줄에 얽히지 않은 친구나 지인들을 집으로 초청, 가마 솥에 장작불 피워 소머리 곰탕도 끓이고 술잔도 나눈다. 수십권의 책을 쏟아냈지만 전공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그 분야가 법·예술·사회·인물 등 다양하다. 이렇게 사는 사람, 영남대 박홍규 교수(56)다. 노동법을 전공한 법학자다. 지난 해 법학과에서 교양학부로 옮겼다.
(...).아침식사는 밭에서 난 채소에다 된장국을 넣고 비빈 비빔밥 한 그릇이 전부다. 다른 반찬 없이 먹고 남은 밥과 국으로 도시락을 싸서 출근한다. 학교까지 2~3㎞를 자전거 타고 다닌다. 빨리 달리지 않는다. 천천히 페달을 저으며 풀 냄새도 맡고 하늘도 보고 연꽃 밭도 구경하며 간다. (...) 도시락을 고집하는 건 ‘학생 때부터의 습관’이기도 하고 군대처럼 구내식당에서 밥 먹기 위해 식판 들고 줄서는 것도, 밥 한끼 먹기 위해 몇 십분씩 자동차 타고 나가는 세태가 싫어서다. 연구실 한쪽에 ‘학기중 회식 NO’란 문구가 적혀 있다. 대상이 동료 교수든 학생이든 학연·지연·혈연 등의 각종 연줄로 엮여 벌어지는 부조리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그는 60여권의 책을 썼고 수십권의 번역서를 냈다. 우리 사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책인데도 소개되지 않았다 싶으면 번역했고 모두가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책을 썼다. 그는 “100명 중 99명이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1명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지평도 넓어지고 차원도 한 단계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책 쓰는 것을 돈벌이로 생각하지 않기에 ‘지적재산권’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 씻지 않는다. 천성 탓인지도 모르지만 필요 이상으로 물을 낭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 같아 께름칙한 것도 이유다. 수염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가위로 자른다. 매일 면도를 하지 않는 것은 귀찮기도 하지만 ‘수염을 기르는 것 가지고도 시비를 거는’ 우리 사회의 획일성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있다. 그는 물욕·돈·힘·공공성 붕괴·인조·획일을 대한민국의 ‘육적(六敵)’으로 지적했다. 돈과 힘 등으로 가치를 따지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고도 했다. “국가 권력이든 관습이든 그 무엇이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무엇이든 넘치도록 갖는 것도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죄악입니다. 욕망을 최소화하고 의식주까지 간소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2008년 10월 2일 목요일

악플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인터넷

악플. 네이버 국어사전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악플 [←惡+reply] 신어
[명사]다른 사람이 올린 글에 대하여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내용을 담아서 올린 댓글."

'악성 댓글'이라고도 한다. 오늘 아침 최진실씨 자살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다 [이런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 둔감해진 탓인지 충격이 그리 크지 않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담담한 것. 쯧쯧...]. 자, 악플이 자살한 연예들을 죽였을까? 語不成說이다. 평소에 잔인한 컴퓨터 게임을 즐기던 청소년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 컴퓨터게임에 책임을 묻는 것과 같은 논리다. 선풍기 틀어 놓은 채 자다가 사망했을 때 선풍기는 단순히 그 옆에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사망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물론 선풍기, 컴퓨터게임, 악플 모두 특정 결과에 영향을 어느 정도는 미쳤을 것이다. 간혹 그것이 유일무이한 직접 원인일 경우도 배제할 수는 없다. 허나 어디 인간 심리체계가 그렇데 단순한 것이던가. Stimulus -> Reaction, 악플 -> 자살, 컴퓨터 게임 -> 살인? 인간 심리체계의 작동양태를 여전히 잘 모르는 인간들이 설명하기 힘든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만들어낸 논리다. 어딘간에 원인은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니까. 그런 저급한 논리를 재생산하며 제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서 날뛰는, 결국 연예인을 두 번 죽이는 악플러보다 더 못한 찌라시 신문들 얘기는 접어둔다 (이에 대한 프레시안 기사 참조). 하지만 달리 뾰족한 설명을 대안으로 내놓지 못하는 이상 그런 식의 단순한 설명방식, 희생양 만들기 메카니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세상이 복잡해지고 인간의 지능이나 설명력 혹은 통제메카니즘이 그런 복잡성을 좇아가지 못할수록 유치한 설명방식(음모론 같은)이나 도덕화, 윤리화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자율, 자정능력 운운 등등). 사실 마땅한 대안도 없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많아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가운에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네티즌'들이 힘을 살인에 동원한다는 아이디어가 인상 깊게 남아있는 영화가 있다: Untraceable (2008, 감독: Gregory Hoblit). 한국에서는 제목을 훨씬 더 자극적으로 걸었다. "kill with me" (영화 속에서 등장한 인터넷 살인 사이트 제목이다). 네티즌들의 접속 수에 따라 살인 속도가 빨라지는데도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 클릭질. 그 장면이 실시간 중계되고 '댓글'로 '감상'을 교환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어떤 blogger가 올린 글이 엽기적인데... "Where can I download this video..."
문자의 발명으로 커뮤니케이션은 시공간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시공간을 벗어난 커뮤니케션이 가져올 수 있는 극단적인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보는 체계이론가들은 의사소통매체, 기술의 발달에 주목한다. 지금까지는 문자의 발명, 활자, 인쇄술 등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인터넷 같은 신매체가 커뮤니케이션에 미치는 영향 같은 주제에 대해선 거의 손을 못대고 있다 [내가 아는 한]. 루만의 착상을 수용하면서 그 이론틀을 과감하게 연장시켜 볼 필요가 있다. 한국학자들이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2008년 10월 1일 수요일

그림 읽기 (2)

La Mort de Marat, Jacques Louis David (1793)

그림 읽기를 연재해볼까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그림이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인터넷에 관련 정보가 넘쳐나서 여기 저기서 빌려와 짜깁기 해 보았다. 일부 내용이 상충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경우 더 그럴듯한 설명을 취했다.

프랑스 혁명 후... 마라(Jean Paul Marat, 1743 ~ 1793)는 혁명세력 중 급진파당의 영수였고 인민정부의 독재를 주창하는 과격주의자였다. '온건파'로 알려진 지롱드당의 열혈 청년당원이었던 샬롯 코르데는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마라의 생각에는 동의했지만,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는 그의 잔인함을 받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거짓 편지를 미끼로 접근, 목욕중인 마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마라는 악성 피부병 때문에 목욕하면서 집무했다고 한다. 1793년 7월 13일의 일이었고 그때 암살자 코르데의 나이는 스물 다섯이었다. 마라가 죽은 후, 자코뱅파의 다른 거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마라의 혁명동지였던 다비드는 사건이 일어난 지 3일 후에 의회로부터 의뢰를 받아 3개월 만에 이 그림을 완성하였다.
욕실 안은 아무런 장식도 가구도 보이지 않는다. 마라의 목 아랫부분에 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욕조에 고여있으며, 그의 오른손 옆을 보면 핏자국이 남은 그를 찌른 상아 손잡이가 달린 칼이 보인다. 잉크병이 놓인 낡은 나무상자에 '마라에게, 다비드가 바친다(A MARAT, DAVID)'는 글만이 외로운 비문처럼 적혀 있다. 그의 한 손에는 샬롯 코르데이가 건네준 청원서가 들려있다. 그녀는 마라가 서명하는 때를 노려, 재빨리 칼로 찔러 살해한 것이다 [오른쪽 그림 참조]. 내용 중 샬롯 코르데, 마라의 이름도 선명하게 보인다. (청원서 아래 쪽에 있는 작은 종이는 아마 처음 면담을 요청했던 그 메모 쪽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라는 '이성의 시대'를 상징하는 펜과 잉크를 꽉 붙잡고 있다. 여기저기에 남은 핏자국이 이 끔찍한 죽음의 비통함을 더해준다. 욕조는 흰 천으로 덮여 있는데 마라의 혁명적 저술작업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흰 천과 죽음을 맞은 마라의 자세는 예술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당시 혁명세력은 전체 민중을 위해 교회의 소유물을 국유화했다. 이제 종교는 이성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마라는 그 새로운 시대의 순교자였다. 다비드는 욕조 앞에 놓인 낡은 나무 탁자를 통해 마라의 검소함을 강조하면서, 이 탁자의 전면에 마치 묘비처럼 마라를 추모하는 사인을 그려 넣고 있다.
그림 속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적 순교자를 연상시킨다. 오른쪽으로 점점 밝아져 가는 배경은 마치 하늘의 영광이 죽어가는 성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다비드는 이런 그리스도교적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거의 알아차릴 수 없도록 모든 것을 뛰어난 솜씨로 처리하였다 .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다비드 작품의 뛰어남이 확연히 드러난다. 1793년작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1907년에 그려진 뭉크 버전도 매우 신선하다. 의도적으로 사건의 역사성을 제거했다.

Charlotte Corday after the murder of Marat, Paul-Jacques-Aimé Baudry (1861)

The assassination of marat, Weerts Jean Joseph (1886)

Death of Marat I, Edvard Munch (1907)


Death of Marat II, Edvard Munch (1907)


source

ㅎㅎㅎ

ps) "<마라의 죽음>은 드로잉 등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3점이 존재합니다. 비문처럼 새겨진 나무상자에 A Marat 라고 씌여진 작품은 잘 아시는 것처럼, 브뤼셀 왕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다른 한점은 루브르 미술관에, 그리고 나머지 한 점은 랭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혁명기의 프랑스 정부는 한 점을 더 소유하길 원하였으며, 죽은 마라의 혁명동지이자, 절친한 지인이었던 화가 다비드 역시 한 점을 본인이 스스로 간직하길 원하였다고 합니다." 옆 그림이 프랑스 루브르 (혹은 랭스 미술관) 소장본이고 제목도 좀 달라서 <암살당한 마라> (Marat assassiné, 1793). 얼핏 꼭 같아 보이는 그림의 버전을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마라의 시신 앞 쪽에 놓인 궤짝에 새겨진 글씨이다 (NAYNT PU ME CORROMPRE ILS MONT ASSASSINE 라고 씌여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그림 읽기 (1)

'그림을 읽는다'는 표현을 가끔씩 접한다. 그림은 보는 것 아닌가? 그림을 읽는다는 것 무슨 의미일까? 우선 좀 더 일반적으로 '보기'와 '읽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보기, 읽기의 공통점은 의미있는 정보 (sinnhafte Informationen)가 전달되는 과정이라는 점. 그렇담 차이는? 우선... 그 의미있는 정보가 어떤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지, 바로 매체의 차이에서. '읽기'는 '문자언어'를 통해서, 보기는 '그림언어'를 통해서... 정보전달의 매체로 선택된 문자를 모르는 사람은 그 문자를 읽을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 '그림 읽기'라는 표현은 바로 그림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니, '문자 - 읽기', '그림 - 보기'라는 연결관계는 너무 단순함을 금새 알아챌 수 있다. 그렇다면 읽기/보기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의 논리적 순서에 따른 배열'인 것 같다. '읽기'는 정보의 일대일 전달이 가능하고, 발신자의 전달하려고 하는 정보 내용이 수신자에게 도달하기 쉽다는 것. 논리적 순서가 중요하다. 글 전체를 볼 수는 있었도, 동시에 읽을 수는 없다. 여러 정보를 구분해 가면서 '쭉' 읽어나갈 때 비로소 의미가 전달되는 것 (선형적, linear). [물론 해독능력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 언어, 코드, 상징에 대한 선지식 - 문법 등]. '보기'가 완전히 비논리적이라는 얘긴 아니나, '보기'의 경우 읽기에 비해 정보의 순서는 덜 중요하고, 정보 간의 조합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읽기에 비해 해석의 가능성이 훨씬 열려있다 (비선형적, nonlinear). (정보 간의 인관관계, 논리성이 명확하지 않다). 한꺼번에 여러 정보를 동시에 접하게 되는 것. 그러니 '인상'을 얘기하기 쉽다. 책 읽기를 예로 들면, 우린 우선 본다. "검은 것은 글자,흰 것은 여백". 글자간 간격 등등. 전체적인 인상 획득 단계가 지나면 개별 정보를 이해하고, 그 정보들 사이 연관관계를 알려고 든다. 다른 표현으로... '읽는다'.

'읽기', '보기'의 구분에 대한 학문 내 논의가 있겠지만 아는 바 없으므로 - '무식하면 용감하다' - 이런 내 나름 구분 방식을 전제로 '깔고' 그림읽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예술작품으로서 그림 앞에 서거나, 여러 인쇄매체를 통해 그림을 접하면 우리는 먼저 그림을 본다. 우선 눈에 보이는 시각적 정보를 통해서 '주관적인 인상'을 갖게 된다. 그림을 읽는다는 건 '주관적 인상'을 넘어서서, 화가가 전달하려고 하는 정보, 정보 사이의 연관관계를 좇아가는 작업이다. 그렇게 이해할 때 우리 주위엔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림들이 많다. 이른 바 장식용으로 걸어두기 좋은 인상파 그림들이 대표적... [물론 마네를 비롯한 이른 바 인상파들이 당시 '보수적' 프랑스 미술계에서 고전했던 역사를 모르는 바 아니나, 현재 사정이 그렇다는 얘기다.] 화가 스스로 어떤 논리적 순서가 중요한 정보를 전달할 의도를 가지지도 않은 경우. 그것도 읽을 수 있겠으나...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고, 해석의 여지도 많은 것이다.
그것과 다르게 아애 처음부터 특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그림들이 있다. 사실 '그림은 보는 대상'이라는 그림 이해는 매우 근대적이다. 중세 종교화를 생각해보라. 종교화는 시각을 통한 미적 체험의 대상이 아니다. 중세 종교화는 전형적인 읽기위한, 아니 읽히기 위한 그림이다. 실제로 글을 모르는 교인들에게 성경의 이야기,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다. 그런 경우에 그림은 시각화된 텍스트일 뿐이다.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읽기의 대체매체였던 것이다 [그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조선시대에도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 삼강행실'도'를 제작했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그림만으로는 사회 유지를 위한 규범을 전달 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쉬운 매체가 필요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한글이다]. 활자 인쇄의 발전으로 문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그림에 시각적 매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라는 독특성이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도 읽기 좋은 그림들이 있다. 작가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 정보 사이의 논리가 분명하게 있어서 그것을 읽어내는 재미를 주는 그런 그림들 말이다. 그러려면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선 문법을 알아야 하듯] 중세 종교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도 성경의 이야기는 물론 그림에 동원에 다양한 상징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직업병' 탓인지 난 공부해야 즐길 수 있는 '읽어야 하는 그림'을 좋아하는 편이다.

자, 이제 그림 한 편 읽어보기로 하자. 이 그림도 그림인이상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누가봐도 잘 그렸다고 얘기할 수 있는 아주 깔끔한 유화이지 않은가? 큰 책, 그에 비해 많이 작은 책, 촛대가 책상 위에 안정된 구도로 놓여 있고, 전체적으로 진한 황색 톤을 써서 안정감, 일체감도 전달해 준다. 만약 제목,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주어진다면 좀 더 흥미로워진다. 이 그림은 고흐의 1885년작으로 제목은 "성경책과 졸라의 소설이 있는 정물화". 아하. 큰 책은 성경책, 작은 책은 에밀 졸라의 소설 [찾아보니 보통 Still Life With (Open) Bible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흠. 고흐가 이런 그림도 그렸구나... 다른 정보 없이 전시장에서 이 그림을 본다면 대개 그쯤에서 멈추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읽으려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한다. 전문서적, 미술사가들의 도움을 받자.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은가. 어떤 작가들은 누구나 원하는대로 해석하길 기대하며 창작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 평론가들, 미술사가들의 그 휘황찬란한 언어는 오히려 거추장스럽지만, 이런 그림의 경우 사정이 많이 다르다. 화가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서 소재를 선택했으니까 말이다 [그것조차 의심하는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겐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지만...].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에 걸려 있다고 하니까 수 년 전 들렀을 때 분명히 봤을 테지만 내 기억 속엔 전혀 남아있지 않다. 최근 클리프 에드워드(Cliff Edwards)의 '하느님의 구두. 거룩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2004) [원제: van Gogh and God : a creative spiritual quest, 1989]를 틈틈이 읽고 있는 중인데 그 책에서 이 그림의 '존재'를 비로소 확인하였다. 에드워드가 이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와 해석을 전해 줘서 이 공간에 그림에 대한 흔적을 남겨놓을 마음을 먹게된 것이고... 이 그림은 개혁파 목사였던 아버지가 1885년 3월 27일 세상을 떠난 후 8월경에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자, 아버지의 죽음은 이 그림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에드워드의 해설을 들어보자 [본문을 오려 붙였다].

"(...) 네덜란드 메멘토 모리파 회화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불이 꺼진 초는 죽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삶은 영원할 수 있다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촛대 옆에 있는 동으로 된 물건은 성경 표지에 달린 걸쇠 두 개다. 낡은 네덜란드어 성경의 각 페이지는 위쪽 절반은 성경 구절, 아래쪽 반은 성경 독서에 도움이 되는 주해로 구분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오른쪽 페이지 맨 위에 적힌 'ISAIE'라는 글자와 그 페이지 오른쪽 여백 근처에 적힌 로마 숫자 'LIII'이다. ... 이사야서 53장 '주님의 종의 노래;... 고흐는 자기가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성경구절, 곧 보리나주의 광부들 사이에서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고난의 종'의 사명에 관한 구절을 펼쳐놓았다. ... 성경 아래쪽을 살짝 누르고 있는 노란색 종이책... 낡고 모서리가 접힌 책 표지에는 'Emile Zola'와 'La Joie de vivre'라는 글자가 보이고, 그 표지 아래쪽에 'Paris'라고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흐는 아버지의 성경책 근처에, 바로 그해 (1885년) 출판된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을 두었던 것이다. ... '삶의 기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고 불만이 가득한 채 살아가는 한 중산층 가정을 그리고 있다. ... 성경책과 현대소설을 대조시킨 것은, 1883년 고흐가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겪었던 아버지와의 갈등을 증언한다. (...)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과 소설 속의 폴린은 둘 다 극기와 희생과 사랑이 육화된 인물이다. ... 고흐는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펼쳐진 성경을 그렸다. 졸라의 소설을 선택한 것은 이 소설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을 현대식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고흐의 편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는 현대 미술가로서 자신의 사명은 성경의 '오래된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을 변화시키는 혁명의 힘과 아름다움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 같은 해석이 그저 상상력의 소산이 아님을 에드워드는 고흐의 편지를 근거로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ps) '그림 읽기'는 '음악 보기'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까? 한겨레 21기사 '걸그룹들의 진화하는 패션' 을 읽으면서 든 생각. '보는 음악'은 사실 가수들의 패션이나 스타일이 아닌 '뮤직비디오'나 'MTV'의 등장에서 그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MTV 설립은 19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