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1일 화요일

근대, 불확실성, 위험

'불확실성', '위험'은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포스트모던적 특징이 아니라 바로 근대의 본질적 측면이라는 게 루만의 입장이다. 사회의 질서유지 혹은 통합이 더 이상 위로부터의 - 종교적 혹은 정치적 - 지배에 의해 가능하지 않게 되고, 수평적인 기능체계들로 분화가 일어나면서 위험은 점점 일상이 된다 [우리말 어감상 '위험'은 당연히 근대로 제한할 수 없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위험은 Risiko/risk의 번역어로 이해해야 한다]. 위험은 정상적인 활동의 부작용으로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가 되어서 위험을 회피하려는 것 자체가 다른 위험을 가져오는 순환구조가 이미 뿌리깊게 자리잡혀있다.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그 대표적 사례다. 금융시장에 항존하는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각종 금융파생상품들의 연결망이 가지고 있던 위험은 너무 복잡해서 산정불가능한 상태였고, 한쪽 고리에서 터진 문제가 이 정도로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 예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럴 때 우리의 구세주는 국가다. 각종 지원책 꾸러미를 만들어낸다. 허나 국가, 그리고 이들이 핵심적 행위자인 정치체계는 위험 혹은 위기를 먹고 사는 체계다. 없던 위기도 만들어내지 않는가. 이명박 정권은 집권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경제위기설을 퍼뜨리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북괴'위 위협, 사회안정을 헤치는 '좌파세력' 같은 공세의 말발이 떨어진 시대에 '경제위기론'이 그런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한 모양이다 (그 석두에서 나오는 발상이 그렇지 뭐. 아, 그리고 좌파 운운은 여전히 써먹고 있긴 하다. 스스로 그게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다가 막상 위기가 닥치자 '한국 경제는 튼튼하다, 내가 언제 위기설 운운했느냐'며 발뺌하기 바쁘다. 아무리 정치가 없던 위기까지 만들어내며 목숨을 유지하는 체계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도덕은 있어야 하지 않나. '책임'말이다. 이른 바 선진 민주주의라면 바로 그 '책임'을 지거나 지우는 메카니즘도 함께 발달된 상태를 일컫지 않을까. 미국이 아무리 꼴똥 깡패 국가이고 많은 구성원이 무식, 무지하더라도 내 기억엔 대통령 선거에 떨어지고서 재출마한다거나 비리로 정치'판'을 떠났다, 잊혀질만하면 다시 슬거머니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보는 보도에서 관찰될만한 고위급 정치인들의 경우). 독일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아무리 관리해봐야 위험은 피할 수 없고, 위험과 친해지는 게 오히려 덜 위험하게 사는 방식일지 모르겠지만, 위험, 위기의 시대에 '책임의 원칙'도 함께 발전해 줘야 한다.
얼마나 예측하기 힘든지 최근 유가, 환율의 상관관계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늘 신문을 보니 유가가 갑자기 떨어져서 또 나름의 위기를 두려워하는 산유국들이 있는 모양이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푸틴 치하 십여년간 천연자원 가격 상승덕을 보며 잘 나가면서 기고만장하더니 어느새 좀 불쌍한 처치에 놓이게 되었다.
근대와 위험, 불확실성의 원래 친밀한 관계지만 요새 너무 친해져서 하루 하루 사정이 급변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내실을 다지고, 원칙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환율, 주식 등 조그마한 단기 이익에 민감해서는 제명에 살긴 힘든 세상이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일희일비하지 않고, 멀리보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원칙을 지키며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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