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20일 화요일

기독교와 정치적 보수주의

"기독교 문화가 계몽과 정치적 진보의 토양을 제공한 적도 있었다. 개화기에는 계몽적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7~80년대 엄혹한 군사독재의 터널 속에서는 양심의 전광판 노릇을 하기도 했다. 아니, 상업주의 일색의 문화가 새로운 시대의 형이상학으로 등극한 이 세속의 시대에서도,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빛과 소금의 푯대 아래 조용한 살신성인의 행보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민감한 정치사회적 현안일수록 기독교인들의 시각과 동선(動線)은 안으로 굽는다. 만하임(K. Mannheim)은 ‘보수주의는 아예 이론 자체가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로 종교적 파토스(pathos)의 집단주의적 정서는 아예 생각 자체를 무화시킴으로써 사회참여를 위한 합리적 에토스(ethos)를 강직화한다. 가령 나치즘과 일제 파시즘, 그리고 북한의 유일체제가 모두 종교주의적 파토스를 동력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한번쯤 되새겨볼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철학적 인간주의는 이론이 없는 상태에서 결여된 이론의 느낌만을 제공한다’고 했던 알튀세(L. Althusser)를 원용한다면, 과도한 종교신앙적 파토스 역시 ‘결여된 이론의 느낌’만으로 이론을 대체함으로써 현실정치적 판단의 잣대나 기준을 스스로 먹어치운다.

이른바 ‘타율적 종교’라는 기독교의 속성 역시 현실정치적 자율성을 방치하거나 훼손시킨다는 혐의를 둘만하다.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일반이 여전히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의 기운을 오히려 부추기는 경향이 있으며, 이 반지성주의에는 ‘스스로 사유할 용기와 합리성’으로서의 계몽에 역행함으로써 정치적 자율성을 무력화시킬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계몽을 겪어내지 못한 종교가 야만으로 치달은 경우를 역사는 누누이 증거한다.

신화나 종교는 모두 유서깊은 법(nomos)의 원형적 형식들로서 그 일차적 기능은 의당 삶의 질서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것이다. 신화나 종교의 체계 속에 타부나 지옥(地獄)같은 ‘협박의 장치’들이 한결같이 구비되어 있는 이유도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문제는 이 질서와 조화의 욕구가 이데올로기화되면서 현실정치판의 기득권 세력에 삼투되거나 습합된다는 데에서 생긴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의 ‘사랑타령’과 ‘은혜타령’의 문화가 실은 무정견(無定見)의 정견(政見)을 분식하는 허위의식으로 전락하곤 하는 이유가 자명해진다. 종교는 무차별의 포용이라는 미망(迷妄)을 이상으로 내세우지만, 정치는 지악(至惡)을 쉼없이 배제해야 하는 냉엄한 선택의 현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심각한 문제를 꼽자면, 역시 개체 교회들의 자본주의화일 것이다. 물신(物神)과의 싸움에서 가장 견결해야 할 (대형)교회들의 물신화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고, 많은 설교자들은 세속적 부(富)의 축적을 영적 체계 속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의 적나라한 표현을 빌면, “돈이 없으면 교회 속에서도 사람대접받지 못하는” 풍토가 엄연하기 때문이다. 자본이 정치를 포함한 만사를 좌지우지하는 세상에서, 교회마저 자본주의와 적극적으로 결탁할 경우, 신자들은 일반 서민들의 민심과 동떨어진 정치적 선택으로 휘몰려갈 위험에 빠지게 된다. 혹자가 성직자들을 일러 현대의 양반계급이라고 특칭했듯이, 신자들 역시 영적 부르주아 계급으로 재체계화되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한 기득권을 무비판적으로 추인할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원시인과 유아에게 특유한 사고방식을 ‘술어적(述語的) 사고’라고 불렀는데, 이는 술어 사이의 유사성을 곧 주어 사이의 유사성으로 오인하는 인지구조를 가리킨다. 가령 ‘영적 신앙을 지킨다’는 보수(保守)와 ‘정치적 기득권을 지킨다’는 보수는 둘 다 ‘지킨다’는 술어를 공유하지만, 그 주어적 가치는 전혀 다르다. 기독교의 정치적 보수화는 이처럼 우선 보수에 대한 혼동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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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 신문(2004년 4월 5일자)에 실렸나 보다. 글쓴이는 김영민교수. 평소 내 생각을 너무도 정확하게 대변해 주는 글이라 옮겨 둔다. 굳이 주변적인 걸 가지고 트집을 잡자면... 아마 신문 시평으로 쓴 글 같은데 굳이 만하임, 알뛰세, 프로이트 같은 거장들을 등장시켜야 했을까? 독자들 주눅들게 해서 자신의 논지를 방어하려는 지적 장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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