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정책의 핵심은 "법"과 "돈"이다. 법을 통과시키느냐 못시키느냐, 예산이 늘었느냐 줄었느냐... 많은 정책 관련 정치적 논쟁, 공공 논쟁은 이 두 질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정책에 대한 학문적 논의 역시 그런 질문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즉, 법 혹은 법 규정이 있는지의 여부나 예산의 증가, 감소 추세가 정책의 현실, 상황을 기술, 설명하는 결정적인 지표로 '애용'된다. 이명박 정부의 복지정책을 예로 들어보면... 예산이 늘었네, 줄었네... 그게 핵심적인 논쟁점이다. 한 쪽에선 줄어든 예산을 거론하면서 복지정책의 후퇴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선 복지예산 총액이 최고치라고 얘기한다. 아마 둘 다 옳을 것이다. 그러면 논의는 이제 예산의 증가의 성격, 내용을 따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거기에서도 갑론을박하며 결론이 어느 한 쪽으로 내려지진 않을 것이다. 그런 비슷한 논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있었고, 앞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반복될 것이다. 그런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그저 모든 게 MB탓... 삽질하기 위해 여기 저기 돈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물론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삽질 - 정말.. 삽질도 저런 삽질이 없을... - 하는 정권을 비판하기 위한 중요한 논리로 사용되면서, 우린 정권만 바뀌면 금새 복지예산이 늘어 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번 정권 들어서 복지예산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정권비판을 그저 예산의 증액 가지고 설명하는 건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손쉬운 만큼 헛점도 많고... 그렇다고 달리 표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책의 해석적, 문화적 측면을 중심으로 정책을 설명하는 방식이 있기도 한대... 그것도 명확한 그림을 보여주긴 힘들다.
결론은... 이런 저런 설명, 분석을 종합하는 수 밖에 없는 듯
2011년 6월 30일 목요일
2011년 6월 29일 수요일
하고 싶은 얘길 다 쏟아 놓지 말아야 한다
다 쏟아내면 순간 그 희열을 느낄진 모르겠지만 (분노도 일종의 희열, 카타르시스에 속한다)
그러면 사람이... (이 부분에서 표현하고 싶은대로 다 표현하지 않으련다)
젊은 시절 - 그러니까 '더' 젊은 시절 - 절제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절제'와 '눈치보기'를 구분하지 못한 탓이다
절제는 '배려'에 가깝다
상대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혼자 있을 때 절제의 끈을 더 쉽게 놓는게 인지상정이지만
'가능한' 오래 잡고 있어야 한다
그게 자기를 살리는 길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을
우린 '聖人' 혹은 '偉人'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절제'가 또 다른 강박이 되어선 안된다
'강박' 혹은 '순결주의'는 너무도 예민해서 쉽게 무너지고 깨지기 때문이다
'강박', '결백', '순결주의'와 '분노'는 너무도 친하다
유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유연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모순처럼 들리지만
모순으로 가득 찬 인생, 세상, 역사에서 잘 살기 위해선
모순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쉽게 분노하지 마라
세상을 그리고 인간을 그렇게 쉽게 단정짓지 마라
운전 중에 갑자기 끼어 드는 사람들
길에서 침 뱉는 사람들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
너무 쉽게 단죄하지 마라
내가 쏟아 낸 말들은
돌고 돌아
결국 죄다 내게 돌아온다
(...)
2011년 6월 28일 화요일
"‘개념 사전’ 집필을 시작했다. 조중사가 보조필자로 참여하고 편집자들과 매주 만나며 진행하니 반년이면 꼴이 나올 듯. '개념없는 놈'이라는 말도 있지만 세상이 뒤틀리고 나빠질 때는 반드시 개념이 먼저 뒤틀리는 법이다. 이를테면 오늘 한국의 교육이 무너진 건 교육이 아닌 걸 교육이라 하기 때문이며 교회가 무너진 건 교회가 아닌 걸 교회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자는 이른바 정명(正名)론을 통해 이름이 흐트러져 세상이 흐트러진다, 모든 사람이 제 이름을 분명히 함으로서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이야말로 正名이 필요한 사회다. 보수를 보수라 하고 개혁을 개혁이라 하고 진보를 진보라 하는 게 그리 어려울까? 개념을 바로 세운 다음에야, 의견 교환을 하든가 토론을 하든가 할 수 있는데 이놈의 사회는 제 이해관계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개념을 뒤트는 게 오히려 일반적이다. 박정희가 제 군사독재를 ‘한국적 민주주의’라 부른 걸 시작으로, 근래 좌파 출신 386 기득권세력이 스스로를 ‘한국적 좌파’ 혹은 '현실적 진보'라 부르기 까지, 한국에서 개념 왜곡의 역사는 매우 뿌리 깊고 또 사회적 해악 또한 크다. 치우침 없이 엄정하고 간명한, 그러나 고등학생(중학생이면 더욱 좋고)이면 읽을 수 있는 개념 사전이 목표." (김규항 블로그에서)
특히, 공감 가는 부분... "오늘 한국의 교육이 무너진 건 교육이 아닌 걸 교육이라 하기 때문이며 교회가 무너진 건 교회가 아닌 걸 교회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디 교육, 교회 뿐이랴. 저들이 그토록 지겹게 들먹이는 '국민', '국민의 뜻', '선진국', '발전', '환경', '녹색 성장'... 虛名이다...
2011년 6월 27일 월요일
한국 문화, 그 독특함에 대한 이야기 나누다. 언제가 이곳에도 기록해두었던 나이 따지는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자 모두 공감. 시간이 지나도 전혀 쇠퇴하지 않는 나이 따지는 문화... 끈질긴 생명력...쌍둥이들 까지 따져서 형, 동생을 정해야 하는... 얘긴 그 정도에서 끝났지만 그렇게 마무리하기엔 석연치 않다. 반대 경우도 있으니까. 가족들 사이에서 존대법은 분명히 훨씬 덜 지켜지고 있으니까. 비록 형, 동생 서열은 분명하게 해 두지만 실제 대화를 보면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부모와 자식의 대화의 경우에도... 내 관찰에 따르면 위, 아래를 따지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분화되고 있는 것이다. 또래들 사이에선 몇 개월 나이를 따지는 10대, 20대의 경우에도 집에선 그렇게 하지 않는... 그러니 존대법, 위 아래 분명하게 따지는 문화는 이전 문화의 유산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새롭게 형성, 구성된 문화로 봐야 할 것이다. (...)
우리가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게 결국 어떤 의미일까.
세상이 복잡하다... 중심, 머리가 없이 그저 '고만고만한' 다양한 체계들, 조직들이 서로 얽혀 있고 각자 정체성을 찾고 유지하려고 한다... 그 복잡함 속에서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 다양한 메카니즘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겨우 유지되는 질서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고... 어쨌든 유지되는 것 자체가 개연성이 낮은, 그러니까 신기한 일이고...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사회가 진화되면서 인간이 얻은 건 인권, 개인의 권리, '법 앞의' 평등.... 아니,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진화의 요건에 가깝다. 기능체계가 수평적으로 분화되기 위해서 인간은 일단 사회 바깥으로 나가 줘야 하고 특정한 체계의 상황, 세팅에 따라 특정한 역할, 인격으로 호명되는데 체계가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 참여 가능성은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니까... 물론 인권 같은 평등 뿐 아니라 각종 근본주의, 집단주의적 정체성, 성별 차이, 경제적 능력에 따른 차이 (계급) 등 각종 차이 역시 근대적 조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동등한 주권을 갖는 주권 국가 중심 근대 정치 체계의 형성은 '내셔널리즘'의 형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데 사실 '내셜널리즘' (민족주의, 국가주의)는 인권, 개인주의와 친할래야 친할 수 없는 이념이니...
다시 말해 현대사회는 사회구조적으로 복잡할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더 할 나위 없이 복잡하고 산만하다. 서로 다른 정체성, 문화, 이념, 사상들이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다. 애써서 어느 한 쪽으로 통합하려고 하면 할수록 부작용들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현대적 사회구조, 문화를 잘 달래가면서 써야 한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그 때 그 때 '스마트'하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파국을 면할 수 있다. 어느 한 체계, 한 문화를 강조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삼는 순간 이 위태로운 질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게 경제가 되었건, 국가가 되었건.... 종교 근본주의던, 국가주의던 간에...
기능적 분화 이론이 다른 이론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결정론'을 배격한다는 데 있다. 경제 결정론 (계급, 양극화 강조하는...)은 물론이고 문화 결정론도 배격한다 (언어학적 전회, 문화적 전회 이후로... ). 주체, 인간 중심주의는 물론이고 구조 결정론과도 거리를 둔다. 어떤 종류 어떤 이름이건 '결정론'은 배척의 대상이다. 구성주의! 물론 구성주의 안에도 여러 입장이 있지만 여하튼 구성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구성주의적 조건 위에서 구체적으로 구조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급진적 구성주의와도 구분이 되고...
그렇다면 다른 입장은? 구성주의가 득세를 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구체적 사회 분석에선 여전히 실재론, 결정론이 주류다. 경제 중심 설명 (계급, 양극화,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이고 - 흥미롭게 그런 입장엔 좌우가 모두 공감한다. 신자유주의를 옹호하거나 비판하거나.. - 혹은 세대 중심 설명도 큰 고민없이 쉽게 수용되는 것 같다 (아래 경제학과 학부생들 발표에 대해서 언급한 것 참고).
재미있는 건 근대적 조건, 즉 사회가 복잡하고 혼란스럽다는 그 조건이 오히려 결정론, 결정론적인 설명을 선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세상이 이미 복잡한대 - 사실 누구나 체감하고 있는 사실! - 거기에다 사회학자라는 사람들이, 네 맞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복잡하고 어디로 튈 지, 어느 방향으로 진화할 지 알 수 없습니다 - 라고 얘기한대서 누가 좋아하겠는가.... 결과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걸 다 알면서도 경제학자들의 예측이 환영받는 사실! 경제학자들, 혹은 통계적, 수리적 설명을 지향하는 학문들이 환영을 받는 현실... 기능 분화 이론의 논의를 빌면 기능 분화 이론이 각광 받지 못하는 이런 현실까지 설명할 수 있다.
(기능적 분화 이론을 기초로 삼는) 체계이론 연구자의 과제는 이처럼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는 - 구름 위 비행 같은 - 논지를 땅쪽으로 끌어 내리는 일이다. 기능 분화, 다양성의 공존, 패러독스, 딜레마, 구성, 공진화... 다 좋아. 근대 그래서 어쨌다구??!! ㅠㅠ 팔장끼고서 냉소적 시선으로 내려다 보며 이렇게 묻는 이에게 - 체계이론 논지에 대해서 '냉소', '반감'도 모자라서 '적의'(敵意)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있다 - 좀 더 손에 잡히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메조' (meso) 차원이라고 할까... 혹은 중범위 (middle range)...
국가론, 조정 (steering, Steuerung)논의가 활발 할 때 '조정 비관주의', 세계화 논의가 활발할 때 세계사회론이 괜찮았고, 그 이후 환경문제나 위험 관련 논의 시장에서 루만식 체계이론이 꽤 짤짤하게 팔렸었다. 수년 전부터 가장 각광을 받는 주제는 아마 복지, 정체성 논의와 관련하여서 '포함/배제 (inclusion/ exclusion)'가 아닌가 싶다. 물론 조정 논의는 거버넌스와 관련해서 계속 얘기할 수 있고, 세계화도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예전만큼 흥미롭지 않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 복지, 포함/배제 논의도 사실 그 정점을 지난 것 같고... (역시 지나가고 있는 주제인듯한) 지식사회 논의에 이르면 벌써 체계이론 담론의 핵심에서 많이 벗어나게 된다. 9.11. 이후에 반짝 근본주의 등을 '통합 의미론' 으로 풀어 보려는 시도가 있었고...
내 생각에 좀 더 '파먹을' 수 있는 여지가 남은 주제 중 하나는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체계이론적 설명이다. 신자유주의는 전형적인 경제 결정론적, 경제 중심적 설명 방식인데 거기에 대해서 꽤 그럴듯한 대안적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논의 맥락을 한국으로 가지고 오면...
한국을 기능적으로 분화된 세계사회라는 틀 속에서 이해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체계이론이 끼어 들어서 기여(?)할 수 있는 논쟁적 주제가 어떤 게 있을까?
시사성은 떨어지지만 예나 지금이나 의미있는 주제들로는...
- 한국의 민주화, 민주주의
- 시민사회, 사회운동, NGOs...
- 한국 근대화, 근대성, 근대의 다양성, 다중 근대성 논의와 연결해서....
좀 더 시사적인 주제들로는...
신자유주의? 거버넌스? 국가론? 인권? 개인화? 포함/배제? 복지국가? 국가 역할? 정의, 공정성, 신뢰?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다. 강당에서 '그런 식'의 집단 교육을 받은 건 예비군 훈련장 이후로 처음인 듯. 아니... 독일에서도 비슷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군. 요식업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받아야 하는 위생 교육... 그런 식의 '관(官)'에서 주관하는 교육은 어디에서나 분위기가 비슷하다. 군대에서 정기적으로 받아야 했던 '교육'도 그렇고... 학교 '교육'도 대개 그렇고. 대학에선 좀 달랐지만 그 중에서도 '교양필수' 과목 분위기는 '관(官)'주도 교육이 풍기던 그 냄새에 가까웠던듯. 의무, 필수... 모두 계몽을 목적으로 하며 정답이 있는 교육들이다. 생각해 보면 주일학교 교육에서도 그런 냄새가 난다. 대학부 시절 가졌던 성경공부는 토론식이서 나름 재미를 느꼈던 것 같은데, 그 이전엔 주입식에 가까웠으니까. 여하튼 입식 공부, 계몽을 목적으로 하며 정답을 듣길 원하는 교육에 대한 거부감은 뼛 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 같다.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카리스마 있는 선배, 어른을 좋아하며 나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여하튼...
그래도 오늘 교육에서 얻은 게 없진 않은데...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선녀와 나무꿋'에 대한 재해석. 사슴을 구해 준 나무꿋에게 사슴이 선녀 옷을 훔치라고 했고 그 일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런, 그렇고 그런 '스토리' 아니던가. 강사의 문제 제기. 선녀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는 것. 사슴은 왜 지가 입은 은혜를 당사자 의사도 묻지 않고서 선녀를 통해서 갚느냐는... 선녀의 인생(?)은 도대체 모냐고... 흠. 틀린 얘기가 아니다.
p.s.) 강사는... 흠... 크게 나쁘진 않았는데, 뒷줄부터 지목해서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별로'였다. 질문할 대목이 되면 긴장감이 도는 것도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런 지목질을 당해야 하나... 노인대학에서도 그럴까.... 더구나 오늘은 지목당하지 않아도 여기 저기에서 의견을 쉽게 꺼내는 분위기였기에 더 아쉽다. 기를 쓰고 말하지 않아도 인정해주는 한국의 문화가 편할 때도 있지만 (독일에선 찾아 볼 수 없는...), 그건 말을 쉽게 꺼내기 힘드는 문화라는 뜻이기도 하다. 역시 모든 걸 한꺼번에 가질 수는 없는 일인가...
2011년 6월 26일 일요일
2011년 6월 24일 금요일
어제 어떤 모임 - 내게 그럴듯한 직함을 안겨 준... - 에 갔더니 경제학과 학생들이 세대간 차이에 대해서 수주간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학부생들임을 감안해야겠지만 어쨌든 큰 안타까움을 남긴 발표였다. 무엇보다 '세대' 개념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너무 얕았다는 점이...
지난 주엔 완전히 다른 '세팅'에서 경험적 정책 분석에 대한 연구 결과 발표를 들었는데 오늘은 그 연구자와 잠시 얘길 나눴다. 그 양반은 '경험적' 특히 '통계적' 연구 방법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증적 연구 방법'을 쓰지 않은 어떤 정책 분석 연구가 매우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다고도 하면서...)
개념 사용에 민감하며 역사적, 해석적 방법을 사용하는 사회학은 이 둘 중간쯤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누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니 접근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착한' 결론을 내리면 모두가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그러기엔 석연치 않은 뭔가가 남는다. 한 마디로... 잘 모르겠다...
2011년 6월 22일 수요일
식사하면서 반려동물, 애완견 그런 주제로 얘길 나누다. 그런 동물을 오래 키우다보면 가족처럼 느끼게 된다, 잃었을 때 상실감이 커서 장례식도 치뤄준다 등등... 얘길 나누면서 어린 왕자 어떤 구절이 생각났으나 정확하게 떠 올릴 수 없었다. 해서 한 번 찾아봤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보러 갔다.
"너희들은 나의 장미와 하나도 닮지 않았어.
너희들은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들에게 말했다.
"아무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들 역시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들은 예전의 내 여우와 같아.
그는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꼭 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여우야"
그러자 장미꽃들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너희들은 아름답지만 텅 비어있어"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누가 너희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나의 꽃은 지나가는 행인에겐
너희들과 똑같이 생긴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그 꽃 한 송이는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도 더 중요해.
내가 그에게 물을 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벌레를 잡아 준 것(나비 때문에 두세 마리 남겨둔 것말고)도
그 꽃이기 때문이지.
불평을 하거나 자랑을 늘어 놓는 것을,
또 때로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내가 귀기울여 들어 준 것도
그 꽃이기 때문이지.
그건 내 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는 여우에게로 돌아갔다.
"안녕" 그가 말했다.
"안녕"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런거야.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가 되뇌었다.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나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어 버렸어" 여우가 말했다.
"하지만 넌 그것을 잊으면 안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게 되는거지.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나는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는 되뇌었다.
(어린 왕자/앙뚜완느 드 쎙 떽쥐뻬리)
내가 떠 올리고 싶었던 구절은 바로 이거였다.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보러 갔다.
"너희들은 나의 장미와 하나도 닮지 않았어.
너희들은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들에게 말했다.
"아무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들 역시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들은 예전의 내 여우와 같아.
그는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꼭 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여우야"
그러자 장미꽃들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너희들은 아름답지만 텅 비어있어"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누가 너희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나의 꽃은 지나가는 행인에겐
너희들과 똑같이 생긴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그 꽃 한 송이는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도 더 중요해.
내가 그에게 물을 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벌레를 잡아 준 것(나비 때문에 두세 마리 남겨둔 것말고)도
그 꽃이기 때문이지.
불평을 하거나 자랑을 늘어 놓는 것을,
또 때로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내가 귀기울여 들어 준 것도
그 꽃이기 때문이지.
그건 내 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는 여우에게로 돌아갔다.
"안녕" 그가 말했다.
"안녕"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런거야.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가 되뇌었다.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나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어 버렸어" 여우가 말했다.
"하지만 넌 그것을 잊으면 안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게 되는거지.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나는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는 되뇌었다.
(어린 왕자/앙뚜완느 드 쎙 떽쥐뻬리)
내가 떠 올리고 싶었던 구절은 바로 이거였다.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이것을 적용하면!
"반려동물을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동물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그렇게 서로 길들여지고 길들이고... 그렇게 사는 거다. com... communication...inter... interaction... 혹은 人間, 人...間... 사이... inter... 인간...
읽다보니 이 구절도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들 역시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그렇다.
너희들 역시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그렇다.
"반려동물을 네가 길들이는 것 같지만
반려동물 역시 나를 길들인다."
그렇게 서로 길들여지고 길들이고... 그렇게 사는 거다. com... communication...inter... interaction... 혹은 人間, 人...間... 사이... inter... 인간...
"열심히 하긴 보단 즐겨라"는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인데 - 때로 나 자신에게도 - 요샌 여기 저기에서 너무 많이들 해대서 신선도가 뚜욱 떨어졌다. 그렇지만 그 말이 '진리'라는 내 확신엔 변함이 없다. 오늘 기사 하나를 읽다가 그런 사례를 하나 발견했다. '나가수'의 - 그렇다. 그렇게 표현해도 좋다 - '나가수'의 김범수 얘기다. ("김범수, 뭘해도 칭찬받는 이유").
그렇다. 본의 아니게 애조띤 발라드만 부르게 된 가수가 평소에 가수로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발산했던 것이다. 그런 시도가 청중평가단, 대중에게 항상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아니지만 가수 스스로는 아쉬움을 훨씬 덜 가질 것 같다. 나가수란 프로그램은 몇몇 가수들의 가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성공한 프로그램이다 (지금처럼 목청 좋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가수들만 계속해서 살아남게 된다면 아름다운 마무리를 고민해야겠지만...). 아니 평소 김범수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서 고맙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가수보단 라디오방송 진행자로서 더 좋아했지만...). 즐기는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 이미 꽤 가까이 왔다고 본다. (물론 무엇을 '성공'으로 정의하느냐는 긴 논의가 필요한 주제).
즐기면서 성공한 사례로 언젠가 한 번 언급한 쿠엔틴 타란티오 감독이 있다. 그 양반은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고 하니... 그래서 나도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써서 논문 혹은 책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또 다른 사례가 '무한도전' 김태호 피티 아닌가 생각한다. 그 양반도 어떤 인터뷰에서 평소에 하고 싶던 다양한 장르를 무한도전에서 시도해 본다고 한 적이 있어서. 실제로 대부분 예능 프로그램은 안정적으로 정착된 포맷을 크게 바꾸지 않는다. '무한도전'은 포맷의 다양성을 정체성으로 삼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그 점을 이해하고서 즐기는 매니아 집단이 형성되어 있는 이유고...
여하튼 '최대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일이다. 단, 전문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설 자리가 많아져야한다. 그런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2011년 6월 20일 월요일
야구에 대해서 얘기할 때 '야구 센스'란 표현을 자주 쓴다. 난 바로 그런 '야구 센스'를 가진 선수를 좋아한다. 거기에 근성까지 갖추면 금상첨화... (아래 쪽 어디에 비슷한 얘길 쓴 것 같다. 아, 그렇구나. '스마트한 근성' 운운한...).
'기아'의 야수 중에선 이용규, 김선빈, 안치홍, 이범호, 투수 중엔 윤석민이나 신동섭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듯.
축구 선수 중에 대표적으로 박지성, 그보다는 좀 떨어지지만 이청룡 정도...
이들은 설령 운동선수가 되지 않았더라도 다른 분야에사 빼어나 활약을 했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는 선수들이다.
악으로 깡으로 운동하던 시대는 한참 지나갔다. 그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있어서 그렇지... 시대의 흐름을 읽는 스마트한 지도자로 국가대표 축구감독 조광래씨가 떠오른다. 프로야구엔... 글쎄... 김경문, 김시진 정도? 팀 성적이 별로다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 분은 심지어 사퇴하기까지... 야구가 감독 영향력이 큰 경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고 보면 그것도 아닌가?
여하튼 보진 못했지만 어제 기아 경기 패인을 분석한 기사를 보니 스마트하지 못한 선수들의 스마트하지 못한 '플레이'가 눈에 보이는듯 해서 몇 자 적어둔다.
독일 시절 쓰던 낡은 노트북(들)은 네트워크 카드(?)를 꽂아야 비로소 무선인터넷과 연결될 수 있었다. 그 덕에 난 내 '접속하려는 욕망'을 무척 손쉽게 조정할 수 있었다. 기숙사에선 안타깝게도 그러질 못했고, 그게 내가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얼마 전부터 컴퓨터 앞이라면 늘 접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ㅠ ㅠ). 그래서 접속하고 싶을 때 - 다시 말해, 수시로... - 여기 저기 들쑤시고 다닌다. 시간을 투자해야 할 과제가 눈 둔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대도 말이다. 그러다 제풀에 지치길 기대하며. 그러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내가 자주 들르는 곳은 뻔하다는 것! 다시 말해 얼마 전에 들른 곳을 또 들르고... 또 들르고... 왜 그럴까? 일종의 '단골 효과'? 익숙한 곳에 가야 비로소 Entspannung, entertainment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새로운 곳을 개척하려면 별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니까...
그 중 출입이 가장 빈번한 장소 몇 개만 소개하자면...
- media daum
- naver 야구
- 호랑이 사랑방 (기아 타이거즈)
- 메일 확인 (두 곳)
- facebook
모두 습관이다. 길들이기 나름이다. 과도한 억압은 집착을 낳는다. '과도한'... 적절한 억압이 필요하다. 긴장과 해소... 밀고 당기기...
2011년 6월 19일 일요일
정부 정책 수정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 참석하다. 논의 중 한 가지 대안이 제시되었는데 - 한 번 생각해 봄직한... - 그 대안에 대해선 별 이야기들이 없는 것. 나중에 한 번 더 그 대안이 언급되었는데 그에 대한 반론 (반론? 혹은 논평!)인즉슨... : 외국 (선진국?)에서 그런 방식이 시도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수십년 동안 좇아가면서 [catch up] 성공한 기억이 있으니 - 혹은, 경로가 만들어 졌으니... [path-dependent] - 굳이 남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로 갈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post catch-up 시대라고 한 쪽에서 떠들지만 실제로 그런 방향을 취하기엔 위험성이 너무 많은 것.
2011년 6월 18일 토요일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사슴처럼 두려워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잡보장경 <까닭이 있는 공간> 5월호)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번 호에서 발견한 글이다. 출전을 밝히긴 했는데 뭐라는 건지. '잡보장경'은 불경 중 하나인가? 여하튼... 인생은 온통 이런 역설 투성이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고. 이렇게 해야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또 아니다. 좀 덜 여문 사람들이 섣부르게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단정적으로 얘기한다. 좀 더 여문 사람들은 그저 사태를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때로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지만 또 때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야 한다. 그 이상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저 이 땅을 떠나는 그 때까지 지혜를 구하고 또 구하는 수밖에...
2011년 6월 8일 수요일
" (..._ 경쟁구조는 반드시 경쟁의 격화와 가치의 획일화를 초래하게 되어있다. (...) 근본적으로 반문화적인 것이다. 아이유가 효린을 눌렀나, 아니면 효린이 아이유를 눌렀나 하는 식으로 둘 사이에 등수를 매기는 사고방식은 앞에서 말했듯이 폭력에 불과하다.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개성을 하나의 가치에 구겨 넣어 재단하는 폭력. 서열화 경쟁은 이렇게 시청자들이 폭력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고 이미 현실화되었다.
한국의 정치권, 교육전문가들이 이런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10년 이상 다양성 교육을 하겠다며 온갖 개혁이 진행됐지만 우리 교육현실이 여전히 '개판 5분전'이다. 지식사회를 맞이해서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자율적 교육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다양성과 경쟁이 서로 상극이란 것을 간과했다. 입시경쟁 구조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심지어 고교입시 등 경쟁구조를 더 강화해가면서 다양성 개혁을 했기 때문에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경쟁구조의 파괴력은 그렇게 무섭다. (...)" (하재근)
한국의 정치권, 교육전문가들이 이런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10년 이상 다양성 교육을 하겠다며 온갖 개혁이 진행됐지만 우리 교육현실이 여전히 '개판 5분전'이다. 지식사회를 맞이해서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자율적 교육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다양성과 경쟁이 서로 상극이란 것을 간과했다. 입시경쟁 구조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심지어 고교입시 등 경쟁구조를 더 강화해가면서 다양성 개혁을 했기 때문에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경쟁구조의 파괴력은 그렇게 무섭다. (...)" (하재근)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하지만 '경쟁구조'가 가져올 수 있는 유익을 강조하는 견해에도 동의하게 될 것이다. 강조점의 문제다. 워낙 '경쟁'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한국 현실에서 대중 문화 영역에서까지 경쟁구도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지긋지긋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음악들이 시장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 시장중심적 경쟁구도 - 새로운 형태의 경쟁구도 - 관중심적 경쟁구도 - 를 도입해서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다양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닌 것이다. 경쟁의 맥락, 경쟁의 다양성에 주목하지 않고 '경쟁은 무조건 나쁘다'는 결론만 되풀이 한다면 좀 답답한 일이다.
자본주의 기제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길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원천적으로 불평등 (양극화!) 심화 등 부정적 결과를 많이 낼 수밖에 없는 체계인 건 분명하지만, 그걸 단숨에 철폐할 수 있겠는가? 사회주의 국가가 보여주었던 계획적 경제체계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없을테고 복지국가 정도가 대안이 될텐데... 그건 어짜피 자본주의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거시 영역에서 자본주의 기제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자본주의', '자본'을 허수아비처럼 때려서 좀 얻어내는 게 있거나, 정신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런 전략은 좀 진부하다 (김기덕의 '반자본주의적' 영화제작 방식이 갖는 한계를 지적한 경향신문 논평 "[문화수첩] 열정만 먹고 살 수 없는 영화계 막내들도 있다" 참고).
'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길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자본주의는 그런 식으로 통칭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자본축적, 불평등 심화 그런 차원이 아닌 아주 기초적 차원에서 볼 때 자본주의는 화폐경제, 시장경제체계인데 그런 차원을 무시하고 살기 힘들다는 것이다. 김 감독도 어쨌든 수익이 나면 나눠주겠다는 얘기인데 그것 역시 자본주의적 기제에 속하는 것이다. 철저한 반자본주의적 방식이라면 수익을 필요한 사람이 나눠갖도록 해야겠지. 감독이나 주연배우라고 더 많이 가져가는 게 아니라...
경쟁, 자본주의 = 경쟁자본주의. 여하튼 이기는 것 , 더 많은 수익을 내는 것, 그런 경향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는 일은 더 많아져야 하겠지만, 세상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으니 그걸 표현하고 비판하는 방식도 좀 더 복잡해져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단순화는 정치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전략이긴 하지만... 어휴...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패스.
2011년 6월 7일 화요일
문제는 틀을 어떻게 짜느냐에 달려있다
"문제는 틀을 어떻게 짜느냐에 달려있다!" 영어로 "Framing matters!"를 풀어서 쓰면 이런 표현이 나오지 않을까? 여하튼...
귀국 이후 한국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여러 생각이 든다. 질병, 의학 관련 프로그램들이 유독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그 중 하나. 주로 '명의'를 소개하면서... 거기에다 음식, 체중조절 관련 전문가 의견이랍시고 의사들이 나와서 백과사전에 나옴직한 정보를 읖조리는 장면들까지 포함하면 더 늘어날 테고. 물론 독일에서도 그런 경향은 관찰된다. 과학사회학, 과학과 언론 등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는 세계적 추세다. 다른 과학 분야보다 의학이나 생명과학 분야 뉴스들이 주목을 더 쉽게 받는다.
최근 유명한 식당, 맛집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임을 밝힌 다큐멘타리 '트루맛 쇼'가 작은 파장을 일으켰는데, 사실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든 방송 프로그램들은 피디, 시청자의 시선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완전히 대놓고 조작하느냐 교묘하게 조작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뉴스에 등장하는 인터뷰들을 보라. 대개 마이크를 갖다 대기 전에 이미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이고, 그런 얘길 들을 때까지 인터뷰를 하거나 아님 원하는 발언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트루맛쇼를 보면서 분개하는 사람들은 좀 화를 가라앉히고 방송이라는 제도의 속성을 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요즘 매우 자주 보게 되는 의학 정보 제공이나 '명의' 탐사 프로그램에도 그런 의심의 시선을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정한 질병 치료에 탁월한 업적을 낸 명의들이 맛집처럼 드러 내놓고 가짜이기는 힘들다. 동료들이나 환자들, 시청자들에 의해서 검토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황우석 같은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 경우는 그가 과학정책의 권력 핵심부에 있었기 때문에, 또 워낙 연구하는 집단 자체가 적은 기초 연구였기 때문에 그런 리뷰를 피할 수 있었다).
질병, 의학, 명의를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는 좀 더 엄밀하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현대 과학, 의학은 음식의 영양이나 효과, 질병의 원인이나 치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그런 조언을 따를 때 당신은 좀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 실증주의적 과학관이 전파되는 것이다.
그 반대 쪽에 있는 견해들은 - 생태주의, 환경주의, 통합주의(?)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 쉽게 듣기 힘들다. 때론 그런 견해들마저 '대체 의학' '새로운 건강 정보' 정도로 가공되어서 전달되니까.
[어디 영양학, 의학 뿐이랴. 심리학, 교육학, 뇌에 대한 연구 등도 마찬가지...]
인간은 자신의 몸과 환경 (세계, 생태계, 역사...)에 대해서 좀 더 겸손할 필요가 있다. 내면과 환경을 보면서 성찰할 시간을 더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저 많은 굶주린 채널들, 각종 정보 전달 매체들은 지금도 방송거리, '콘텐츠'를 달라고 아우성이다. 추세를 좇아가보면 더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도 그러할진대 아닌 스마트폰을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들은 더 단순명료해야하고 분명해야 한다. 실증주의에 기초한 단순화된 지식, 정보, 콘텐츠들이 생각할 여지를 잠식해 들어온다.
(...)
2011년 6월 3일 금요일
스마트한 근성
신자유주의 (무엇에 쓰는 물건?) 비판에서 '경쟁'은 '악'의 근원처럼 묘사된다. 방송국들이 앞다투어 만들어내는 각종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도 그런 맥락에서 비판되고. 물론 이유도 모른 채 혹은 어쩔 수 없이 경쟁의 쓰나미 속에 빠져들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니 인간다움을 놓치거나 때로는 목숨까지 포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경쟁이 지나쳐서 인간다움을 잃게 하거나 긍정적 가치를 포기한 채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을 강조하는 게 문제지 경쟁 그 자체가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는 결코 만만한게 볼 게 아니다. 경쟁의 대표적인 경우인 프로스포츠를 보자. 관중, 팬, 시청자들은 응원하는 팀이 늘 이기기만을 바랄까? 어떻게 해서라도? 노우! 네버!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 더 나은 경기력을 보여주려고 연구하고 애쓰는 모습 보기를 원할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근성이 있지만 '스마트'한 선수들을 좋아한다. 승부욕은 좀 다른 맥락인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우린 (누구?) 비록 당장 경쟁 속에서 뒤쳐지 있지만 근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선수나 팀을 응원하게 되고 때론 감동을 받기까지 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넥센과 한화가 그 경우일 것이다. 지금 승률이 가장 낮은 팀인 넥센의 김시진 감독은 어제 신승을 한 후 가진 인터뷰에서 목메는 모습을 모였다. 경기에서 이기려고 애쓰는 선수들이 안스러웠는지... 원래 호감을 가진 감독이기도 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경쟁이란 게 원래 피곤하고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거다 (뭐 승부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 경쟁에서 앞서지 못하는 사람, 팀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경재 없는 인생은 가능할까? 한 가지 경쟁에서 이탈하면 또 다른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설령... 모든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과연 행복할까? 어쩌면 그런 경우 자기와의 싸움, 자기와의 경쟁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지... ('싸움'은 경쟁의 다른 표현인가? 그런 것 같다).
난 승부욕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쏴리~). 하지만 경쟁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 역시... 과감하게 도전하고 경쟁에 뛰어들어서 스마트한 근성을 가지고서 멋지게 헤쳐나가는 모습. 지거나 뒤쳐지더라도 주눅들지 않고, 좀 잘 나갈 때는 져줄 줄도 아는 그런... 스마트한 근성!
피에수) 경쟁에 참여조차 못하고 원천적으로 배제되는 이들도 있다. 특별한 혜택을 베풀어 줄 수는 있지만 경쟁에 참여하기는 곤란하다며... 순서를 따지자면 경쟁에 참여하여 겨뤄볼 기회를 주는 게 먼저 아닌가 싶다.
2011년 6월 2일 목요일
눈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
=아니다. 우리는 두뇌가 재구성한 이미지를 볼 뿐이면서 현실을 본다고 믿는다. 두뇌가 예상하지 못한 그림이 갑자기 나오면 눈은 그 장면을 보지 못한다. 농구 선수가 공을 몇 번 패스하는지 세보라는 주문을 받으면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다. 우리는 두뇌가 재구성한 이미지를 볼 뿐이면서 현실을 본다고 믿는다. 두뇌가 예상하지 못한 그림이 갑자기 나오면 눈은 그 장면을 보지 못한다. 농구 선수가 공을 몇 번 패스하는지 세보라는 주문을 받으면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한다.
=> 이런 아이디어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영화가 "Source Code" (2011)
"춘천가는 기차"(김현철 1989)
이 곳에 배어있는 칙칙한 기운을 벗어내려고 모처럼 음악을 하나 올린다. 노래 자체는 '칙칙함'에 가깝지만 적어도 화면 - 정지화면! - 은 좀 상큼하지 않은가? 흠. 이 노래가 1989년에 나왔구나. 1990년에 경춘선을 타고 춘천에 간 적이 있다. 재미있게도 누구와함께 왜 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공교롭게도 그 해에에 춘천에 한 번 더 갔었다. 춘천과 관련된 기억은 그게 전부이지만 노노래 탓인지 감수성 풍부하던 청춘 시절 일이라서 그런지 좀 각별하다.
모든 기억은 다 아름답다. 아름다운 기억만 남는다. 아니 남아있는 기억은 모두 아름다워야 한다. . 그렇지 못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 모쪼록 아름다운 기억을 가질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좀 더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이 노래와 쌍벽을 이루는 노래로 '눈물나는 날에는' (푸른하늘, 1989)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래보다 칙칙함의 정도가 더 높아서 적어도 오늘은 듣지 않기로 한다. 아, 지역과 관련된 그 무렵 노래로 '제주도 푸른 밤'(최성원)을 빼 놓을 수 없다. 1989년 친구들과 제주도에 가서 그 노랠 불렀으니...
어쨌든 1989년에 이런 세련된 '사운드'와 '가사'를 들려줄 수 있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 김현철이 요샌 무슨 홍보대사하며 계몽하는 노래 만든단 얘길 티비에서 들은 것 같은데 재능을 너무 일찍 써 버린 탓인가? 하지만... 행복하게 잘 사시나? 그러면 된 것 아닌가?
2시가 넘었다. 새벽... 잠자리에 들었으나 오질 않는다. 잠이... 이런 저런 일들과 생각들이 내 몸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잠에 들지 못할 때 그냥 일어나는 편이다. 어슬렁거다가 뻣뻣히 살아 있는 정신 틈을 비집고 잠님이 들어 오실 순간을 기다린다. 오늘은... 모처럼 라디오를 들어볼까? 이동진 님이 자신의 이름을 건 라디오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했는데... 2시 아니었어? 하하.. 역시... 라디오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다. 허나... 그냥 음악만 틀지... 지금은 왠 여성 기자와 꽤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대화 중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끄기로 한다. 정신사납다...
지난 주에 대학원생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대략 근대(성), 탈근대(성), 문화, 한류... 그 언저리에서 꽤 쉽고 재미있게 얘기했다고 생각했다. 반응도 나쁘지 않았고 질문도 꽤 있었고. 하지만 오늘 간접적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 학생은 너무 어려웠고 그래서 자기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으며.. 원래 그 수업을 맡은 선생님과는 정반대였다는 등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다.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십여명 학생들 중에서 세 명만 얘길 했으니 그 나머지 중 한 명일 것이다. 특강 이후 만족스러운 느낌을 가졌던 건 우선 내가 하고 싶은 얘길 거의 다 전달했기 때문이고, 적어도 질문을 한 세 명은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얘기를 정확하게 이해했고 꽤 흥미롭게 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자기 만족 때문에 삼인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의 마음을 제대로 배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Gut zu wissen...
다시 라디오를 켜 본다. 흠. 아직도 그 기자... 다시 끈다.
누구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고만 고만하지만 그래도 좀 더 이타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늘 자신이 희생하고, 손해본다고 생각한다. '좀 더' 이기적인 사람들은 '좀 더 이타적인' 사람들에게 왜 그러느냐고, 왜 그렇게 사느냐고 질책한다. '좀 더' 이기적인 사람들은 덜 후회한다. 자기 중심적으로 삶을 꾸려가기 때문에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문제는 그런 만족은 대개 '좀 더' 이타적인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