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7일 화요일

어제 저녁 약간 감성적인 짧은 글을 남겼는데 인터넷 접속 불량으로 사라졌다. 다시 쓰려면 쓸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까지야...
요새 이 곳은 정말이지 거의 일기장 혹은 메모장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공적인 나눔을 '페북'에서 하면서 그렇게 된 듯...
얼마 전 'blogger' 관리 메뉴가 바뀐 이후로 게시물에 대한 접속 통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내 첫 반응은 경악... 접속 수가 상상 이상 많은 것. 조금 더 확인해 보니 대부분 검색 결과로 내 블로그 게시물이 걸려 들었다는 의미였다. 어쨌거나 내 블로그 글이 그런 식으로라도 노출되는 걸 알게 되면서 마음이 걸리긴 한다.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용도로 공적 공간이기도 한 이 곳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런 블로그나 SNS는 공적/사적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일기장으로 진화하고 있는 상황도 그렇지만, 너무도 건조하고 재미없는 그저 푸념 같은 글이 이어지고 있어서 그것도 걸린다. 쓸 거리가 없는 건 아닌데... 얼마 전 다녀 온 연주회, 최근에 본 영화들 등등... 왠지 그 쪽으로 '당기질' 않는다.

뭐, 굳이 의의를 찾자면... 블로그의 현상황 자체가 나름 개인사의 한 기록일 수도 있겠다. 2011년 9월 무렵의...

덧글) 어제 쓴 글 일부가 자동 저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워버렸다. 식은 음식 같은  문자 덩어리 같으니라구... 

2011년 9월 24일 토요일

성향 혹은 태도의 진동수

비슷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진동수 폭이 커서 내 독특한 진동수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허나 진동수는 여러 방식으로 '측량'될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좀 구분해서 얘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지식 혹은 성향의 진동수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한 여러 유형의 진동수 중에서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일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성향 혹은 태도의 진동수'가 아닐까 생각힌다. 비슷한 성향 진동수를 가진다면 비록 살아 온 경험이나 관심사, 축적해 온 지식의 내용이 다르더라도 무릎을 치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다른 점을 솜이 물을 빨이들이듯이 서로 흡수해 가서 자신의 지적 자양분으로 삼을 것 같다. 지식, 경험 등 겹치는 부분이 작지 않은데도 얘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 이 성향 진동수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성향 진동수를 가진 사람들을 몇 명 꼽을 수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고, 그럴수록 그 몇 명의 존재가 소중하고 고맙다. 그들은 대개 겸손하고, 열려있고, 지적인 호기심 강하고, 고집도 있지만 인간 혹은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상대의 말을 일단 수긍할 줄도 알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세게' 나가는 경우는 대개 내 이 마지막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가르치려 들거나, 대화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못하는 이들... 운전 중에 내가 불끈하는 경우도 대개 다른 운전자나, 행인들 배려하지 못하고 제 편함만을 생각하는 경우를 목격했을 때다 (허나 그런 경우를 직면했을 때 내 반응은 종종 시크chic하지 못하다. 반성... OTL).
어떤 경우든  성향 진동수가 맞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 그리고 불끈하는 일은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불편한 경험이다. 하지만 어쩌랴... 사람이 다 나와 같지 않고,  '수양'이 아직 부족한 것을... 그저 그런 경험을 내 성향이나 태도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그런 경우도 '소화'할 수 있도록 도를 더 닦는 수 밖에...

2011년 9월 20일 화요일

요즘 텔레비전을 보거나 뉴스를 읽으면서 가끔씩 '울컥'할 때가 있다. 최근엔 기억에 남는 일로는 학생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교사 이야기를 다룬 다큐나 '남격' '청춘 합창단'이 찾아간 청소년 재소자들이 'you raise me up'을 부르는 장면을 볼 때. 대개 나이 탓으로 돌리던데 그러기엔 난 아직 너무 어리지(^^) 않은가? 여하튼... 오늘은 인터넷으로 확인한 기사 하나 때문에 또 한 번 울컥...야구인 장효조의 마지막 모습 얘기였다.

" 2011년 9월 7일, 프로야구는 '타격의 달인' 장효조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네 차례 타격왕을 차지한 장효조는 통산 타율 1위(0.331)에 올라 있는 전설이다. 프로야구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고인이 남긴 발자취가 그만큼 깊고 묵직하기 때문이다. (...) 장효조는 9월 5일 저녁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뭔가 생각난 듯 곧바로 부인 강경화씨를 찾았다. 아들 장의태씨도 병상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장효조는 이미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눈 앞이 흐릿했고 암세포가 퍼져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말을 할 힘도 없었지만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다. "여보, 나 먼저 천국에 가야겠어. 그동안 잘해줘 고마웠어. 사랑해…." 무뚝뚝하고 자존심 강한 그도 사실은 속정 깊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장의태씨는 "평소 그런 말씀 전혀 안 하셨다. 나도 어머니도 놀랐다"고 말했다. 어렵게 입을 연 장효조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여보, 사랑해"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

2011년 9월 19일 월요일

"개같은 가을이"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ps) 정말이지 가을이 "쳐들어" 왔다. 더군다나 오늘은 흐리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시가 어울릴 정도로 우울한 날이거나 그런 기분은 아니다. '개같은' 이란  형용구를 쓸 정도는 더더구나 아니고. 그냥 한 번 가져와 봤다. 뭐, 가을을 지내다 보면 한 번쯤 이 시가 생각날 때가 있지 않을까...

2011년 9월 16일 금요일


"노동을 인간의 ‘본질’로 끌어올렸던 헤겔, 고전경제학, 맑스와 달리, 비판이론은 프로이트를 따라 작게는 인간 개체 크게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즉 필연성(Ananke)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한 종류로 본다. 노동은 원래 외적 필연성을 극복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활동이었지만, 점차 인간이 자연을 신화의 세계로부터 인간의 세계로 전화시키는 합리적 활동으로 격상된다." (최종렬 2010, 무조건적 소모의 사회 2: 가부장적 핵가족의 내파와 사회의 에로틱화)

노동은 이제 심지어 권리로 이해된다. 노동할 권리... 일할 권리라.... 조선시대 조상님들이 봤으면 놀라 자빠졌을... 그런 탓에 국가는 장애인들이 노동할 권리를 얘기하고 어떻게든 고용시켜서 일하게 만든다. 물론 그런 국가 정책의 뒤켠엔 장애인의 물질적 토대를 스스로 마련하도록 유인하려는 생각이 있을 테고... 물론 장애인의 노동시장 참여는 경제적 자립만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다. 여하튼 낯설게 보일 수도 있는 풍경이다. 장애인도 일하겠다고 하고, 국가도 일자리를 마련해 주러 애쓰고...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Idealtypus'는 베버의 사회과학연구방법론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한국어 문헌에서는 대부분 '이념형'(理念型)으로 번역하고 있어서 난 독일어로 'Ideentypus' 정도 되는 줄 알았다. 왠걸... 아마 한국어에서 '이상형'(理想型)은 대부분 '이상적인 異性像' 이나 적어도 '바람직한 상태'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베버의 Idealtypus는 그런 '바랄만한 좋은 상태'가 아닌 '어떤 사회 현상의 핵심적인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특정한 측면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념형'이란 신조어를 선택한 것 같다 (필경 일본어 문헌에서 그렇게 번역했을 것). 하지만 그 자체로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든 '이념형' 보다는 '이상형'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想像 혹은 抽象의 형태를 가리킨다는 부연설명이 따라야 겠지만... ). 요즘 문헌에서도 주로 '이념형'이 선호되는지 확인한 바는 없지만 오늘 우연히 읽게된 홍성기 교수의 베버 소개글에서 '이상형'이란 번역어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기록해 둔다 (베버의 '이상형'. 현대 사회과학방법론의 기초).

본문 중 베버와 칸트를 연결짓는 구절이 있는데 흥미롭다.


"베버의 학문 방법론으로서 이상형의 도입은 그 연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그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으로서 현실간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한 신칸트학파로부터 현실이란 개념 없이는 접근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을 배웠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고 개별적이며 무정형적이고 무질서한 현실에 접근하는 길은 보편적이고 반복 사용 가능한 개념을 통해서, 즉 현실을 개념을 통해 구획화, 범주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인식주관과 물자체(Ding an sich)의 간극에 대한 철학적 기원이 칸트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다른 한편 개인의 자유와 의무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었던 베버는 이상형을 도입함에 있어서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앞에서 인용한 이상형에 대한 베버의 설명에서 연구대상의 몇몇 측면에 대한 ‘일방적(einseitig)’ 강조를 솔직하게 인정한 것도 바로 연구자의 주관적 가치판단이 이상형의 형성에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구자의 주관적 가치판단 없이는 현실의 어느 측면도 포착될 수 없고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주관성이 분명하게 강조되지 않으면 독자는 물론 연구자 스스로 주관성과 객관성을 혼동할 위험에 빠진다고 베버는 판단했다. 즉 연구자 스스로 자신의 연구가 갖고 있는 주관적 한계를 명철하게 의식해야 하고, 오로지 이런 경우에만 그의 작업이 분명한 학문적 의미를 부여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학자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비극적 운명을 명철한 정신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운명을 극복하는 영웅적 측면을 갖게 된다. 바로 이점에서도 우리는 주관적이지만 보편성을 지닌 미학적 판단의 이중성을 역설한 칸트와 흡사한 점을 보게 된다. 어떤 베버 연구가가 칸트는 철학자이고 베버는 사회학자이며, 두 사람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서 끝난다고 말한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ps) Idealtypus 번역어 선택에 대해서 나와 다른 견해를 발견해서 기록해 둔다. 그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념형: M. 베버의 사회과학방법론의 기본적 개념. 이 말은 원래 G. 옐리네크에서 유래하지만, 베버에서는 규범적 의미는 전혀 가지지 않고 순수하게 방법적 개념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을 이상형(理想型)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베버에 의하면 <사회과학적 인식은 경험적 현실의 사유(思惟)에 의한 정서(整序)>를 목표로 하는 것이지만, <현실을 그 문화의의와 인과적 연관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을 구체적인 목적으로 한다. 베버는 기본적으로 H. 리케르트의 가치관계적·개성기록적이라는 문화과학의 규정으로부터 출발하면서 그것을 더 한층 발전시켜, 오로지 개성의 기록에만 그치지 않고 문화나 사회의 개성적 특질을 보편적 연관이라는 역사적인 형태를 통하여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론으로 구상된 것이 이념형론이었다." (출처: 파란사전)

2011년 9월 14일 수요일

"권위주의 정권 시절 연예인은 도덕적 책임을 지는 공인에 불과했지만, 문화의 산업화가 고도로 발달하는 단계로 진입하면 연예인은 또 다른 지위를 얻는다. 1990년 이후 문화의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한국의 연예인은 공인이자 동시에 ‘셀레브리티’(Celebrity)라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산업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가 대체하듯, 문화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스타’를 대체하는 셀레브리티는 후기 문화산업의 특산품이다. 미디어 산업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면, 그 미디어 산업의 콘텐츠를 채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셀레브리티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화제와 가십거리가 없다면, 그 많은 케이블 방송과 잡지와 인터넷 매체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는가. 비틀즈가 팝 아티스트였다면, 마이클 잭슨은 셀레브리티이다. 비틀즈의 새 앨범은 기사화되어 음악전문잡지 롤링 스톤즈 에 실린다. 비틀즈는 가십 전문지 타블로이드 신문인 더 선 (The Sun)의 1면을 장식할 일이 없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은 다르다. 마이클 잭슨은 롤링 스톤즈 뿐만 아니라 더 선의 기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화제’를 제공하는 셀레브리티이다. 마이클 잭슨은 일자리를 창출한다. 마이클 잭슨을 ‘원소스멀티유스’의 대상으로 삼는 다양한 직업군이 등장한다. 마이클 잭슨 덕택에 파파라치 사진사는 밥을 먹고 살고, 마이클 잭슨을 둘러싼 루머를 취재해 타블로이드 판 신문에 기사를 팔아먹는 셀레브리티 가십 전문 연예 기자도 있다." (노명우 (2010), '사회적 사실'인 연예인의 자살)

"하느님도 왜 이리 무심하실까
데리고 가라는 000은 안 데려 가고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장효조. 최동원을
데려가다니 ..."
감독이 팬들의 불신을 받고 있는 어떤 프로야구팀의 게시판에는 저런 내용의 글이 여럿 올라 와 있다. 무섭다.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두 '레전드'에 빗대어 살아있는 자의 '죽음'을 '기원'하다니...

ps) 어제 ㅎ팀에 18점을 주면서 대패했다. 이런 결과와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감독이나 선수들을 이해하기 정말 힘들다. 그래도 평생 야구를 한 사람들이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야구 관전구력이 늘면서 내린 결론인데, 아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mb와 비슷하다. 두뇌용량 및 처리능력 부족이고 무능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이 순간 저 투수로 바꾸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같은 불안한 예감은 여지 없이 맞아 떨어진다. 신뢰를 줘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져 있다. 야구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팀스포츠기에 지도자에게 소통과 공감능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이고 그래야 비로소 선수들이 가진 능력을 때로는 그 능력 이상을 끌어낼 수 있는 법인데... 옹호하려고 해도 장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선수들이 잘 할 때 그냥 기본은 하는 감독인 것처럽 보일 뿐... 무색무취, 안절부절....
그럴 때면 감독에게 저런 저주를 퍼붓는 팬들이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2011년 9월 9일 금요일

읽으려고 빌리긴 했는데 시간사용 우선순위에서 늘 밀리면서 이제나 저제나 차례만 기다리고있는 책 한 권을 과감하게 반납하기로 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서지정보와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해 두려고 한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원제: The Shallows: What the Internet Is Doing to Our Brains). 저자 니콜라스 카 (Nicholas Carr)는 경영컨설턴트로 특히 IT 업계 쪽에 영향력이 있는 모양이다. 이 책의 요지는 한 마디로 '미디어는 인간을 변화시킨다'. 맥루한이 설파한 미디어의 영향력 담론의 업데이트된 버전 정도 되겠다. 특히 인터넷의 영향에 대해서.. 1부에선 맥루한식의 주장, 문자 혁명이 인간 사고를 확장시켰다는 얘기. 2장은 인터넷이 생각을 넘어서 뇌 구조까지 바꾼다는 얘기. 대개 인터넷 사용 이후 인간 뇌는 산만해지고 집중력이 분산되고, 온라인상 습관이 다른 구매체 사용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컴퓨터, 인터넷이 뇌의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무척 우울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는 일이고 설득력이 없지도 않다. 과도한 신미디어 예찬론자들에게 꼭 읽혀주고 싶은 이야기다. 하지만 신미디어에 대한 환상을 가진 이들 못지않게 비관적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기술결정론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그런 결정론적 사고에 큰 짜증이나 때론 분노까지 느끼는 편이라... 쓰고 보니 그렇게 오랫동안 내 책상 위에 놓여있을 필요가 없었던 듯. 제대로 읽지도 않고 너무 악평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쏴리.. 미스터 카!

2011년 9월 8일 목요일

결국 '사회변동'이고 '사회변동론'인가? 굳이 따지자면? 그래... 그게 가장 가깝겠다. 그럼 구체적으로 무슨 사례를 가지고서 어떤 변화를 보여주겠다는 건가?
도대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비유하자면, 사방이  산이고 난 그 속에 길을 잃은 채 갇혀서 옴짝달싹 못할 처지인데 해까지 저물고...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justice)'라고 했다.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그러나 사회는 ... 이기심, 반항, 강제력, 원한 등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는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라인홀트 니버 이야기를 유시민이 정리, '국가란 무엇인가')

감동할 땐 감동하라고?

안철수가 박원순에게 양보한 일과 관련해서 '페북친구들' 간에 가벼운 설전이 있었다. 한 쪽에서 왜 그리 안철수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다른 쪽에선 '감동할 땐 좀 그냥 감동 좀 하게 놔두면 안되냐. 가르쳐들려고 하지 말고...'라며 발끈...
둘 다 이해는 하지만 난 앞에서 언급된 친구 편이다. 물론 사사건건 가르치려드는 사람들을 내가 좋아할리는 없지만, 이런 경우엔 좀 가르쳐도 된다.

"감동 좀 하자"는 얘긴 2002년 월드컵 무렵에도 들은 것 같다. 그 무렵 일부 좌파들이나 인권운동가들이 지나친 스포츠 애국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하자 그들에 대해서 그런 얘기들을 했다. 김어준 같은 경우는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는 강팀이다'라는 '타이틀'을 걸고서 화끈하게 스포츠 애국주의 전사가 되셨다. 화끈한 것 좋아하는 민족이라서 고민하고, 좀 조심스럽게 성찰하는 모습을 못 참나 보다. 자학한다고 생각하는 듯...
물론 감동해야 할 때가 있다. 분노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내 기준에서 볼 때 김대중이나 노무현 대통령 당선 같은 경우, 적어도 그 시점에선 아무리 감동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진짜 좌파 입장에선 그 경우도 좀 온건한 우파의 득세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오바'가 일상화되고 예측가능성이 낮은 나라라서 감동할 일이 많은 지도 모르겠다.

2011년 9월 7일 수요일

오늘 건진 생각...
삶의 시작과 끝을 예측하거나 가늠하기 힘들 때... 그래서 개입하기도 힘들고 그저 받아들여야 했을 때... 인간의 계산이 닿지 않는 신비로운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운명... 이는 동시에 보호받는 영역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언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지 그리고 생명을 언제 마감할지 알 수 있게되고, 그래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질수록 그 신비로움은 깨지기 시작한다. 이제 출생과  죽음은 인간 아니 사회가 보호해야 할  영역이 되었다. 생사여탈권은 이미 많은 부분 개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유달리 낙태나 복제, 배아연구 그리고 다른 쪽에선 안락사나 같은 극단적인 주제에 그렇게 큰 관심이 쏠리는 현상은 바로 그런 부분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그 극단적 경계에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오면 이건 뭐 난리도 아니다. 생명의 탄생과정에 대한 개입,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개입.... 엄청나다.
이것이라도 보호하자는 사회 안전성 유지의 마지막 몸짓인 것이다.

안락사나 낙태, 배아연구 같은 주제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런 극단적 주제에만 관심을 가질 때 그 극단적 경계 안쪽의 현상들을 용인하는 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다만, 자살은 좀 구별되는 현상인 것 같다.
'수정'부터 '죽음'까지 생명의 전과정을 국가와 사회가 관리하는 시대에 자살은 그런 관리를 거부하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생체권력은 어떻게든 강제적으로 때로는 규율, 내면화를 통해서 어떻게든 살도록 (bio) 살아가도록 살아내도록 애를 쓰는데, 그 때문에 그런 권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이기도 한 자살은 더 특별한 예외적인 위협적인 위기의식을 만들어내는 현상인 것이다.

2011년 9월 6일 화요일


천선영 교수의 매우 흥미로운 논문 "자살의 이유를 알아야 하는 이유: 근대적 자살 이해에 대한 사회이론적 논의" (2008).

"이 논문의 질문은 왜 자살률이 증가하는가 또는 어떻게 하면 자살률을 낮출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궁금증의 초점은 근대사회가 자살의 이유 발견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또한 왜 어떤 역사적, 사회적 조건과 과정 안에서 자살이 점점 더 민감한 사
회적 사건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자살의 이유 찾기에 열심인 이유에 대한 하나의 사회이론적 대답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p.294f)

캬~ 멋진 문제제기다. 이런 문제설정은 자살 (혹은 넓게 보아 '죽음') 반대 쪽에 있는 주제, 즉 "생명은 어느 시점부타 생명인가?" 같은 인간의 시작 같은 질문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고, 그 두 질문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한 마디로 정치 혹은 권력의 속성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푸코 근대권력론에 기초하여서...
전통사회에서의 권력은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상징했다. 그러므로 자살은 일반적으로 범죄였다. 이런 죄는 단죄를 하면 그만! 하지만 전통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근대사회의 권력은 삶을 낳고 증대하고 조직하는 생체통제권력(bio-power)이 되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인 사회가 도래하면서 자살은 사회 해체를 낳고, 사회 전체의 '가장된' 안정성 유지를 위협할 우려가 있는 주범이 되는 셈이라는 것.

 "특정 영토 내 전 구성원들의 안전보장을 그 이상으로 하는 근대국가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자살은 이제 자신의 통합 근거에 대한 직접적인 의문 제기 내지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사회는 자살의 이유와 유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자살이 근대의 신생 학문인 사회학적 분석의 영역으로 들어간 최초의 인간 행위들 가운데 하나가 된 중요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p.307:)

그 밖에도 '자살'에 대한 이런 저런 흥미로운 얘기들이 이어지지만 생략.

10월 어떤 작은 학술 모임에서 자살에 대해서 얘기해야 하는데 더 붙이거나 뺄 것도 없이 이 견해를 소개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험상 착상을 이렇게 빌어와서 머리 속에서 굴리다보면 좀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되긴 하지만...

2011년 9월 5일 월요일


아래 어디에선가 쓴 적이 있지만...
(스스로 평가하기에) 난 균형을 잡으려는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안철수를 '약간은' '깍아내리려는' 내 심리상태는 어쩌면 안철수 지지자들의 찬양 발언들에 자극받아서 형성되었을 수 있다 (특히 페북에서... ).
만약에 안철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대세였다면 난 반드시 그렇게 볼 일만은 아니라고 강변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좌에서 우까지를 섭렵해서 균형을 잡으려 들 정도로 줏대가 없거나 오지랍이 넓은 건 아니니 나름 '진동'하는 범위의 경계는 형성되어있다고 봐야겠지만...

내 균형잡기 혹은 좌충우돌, 이랬더 저랬다 하기, 일관성 부족의 대표적 사례가 소셜미디어의 의미, 정치의 진화 방향 등에 대한 내 견해다.
그런 성향 때문에 미래 변화를 섣불리 예견하거나,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 보다는 (따라서 그런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도 없지), 역사의 흐름을 기초로 현실을 판단하는 일, 그리고 기존의 해석에 대한 새로운 시각, 성찰을 제공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 루만과 체계이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고. 루만은 예측, 예견을 피하는 편이었거든.
오늘 발견한 디르크 배커(Dirk Baecker)의 '미래 사회에 대한 16가지 테제'(Zukunfutsfaehigkeit: 16 Thesen zur naechsten Gesellschaft) 는 그런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체계이론가로서는 드물게 참으로 과감하게 미래 사회의 모습을 예견해 본 것.
번역해 볼 생각...
오마이뉴스 안철수 인터뷰를 보고서... (여기)

한 마디로.. 대기업 경영 등 이런 저런 것 해 봐서 안다는, 잘 할수 있다는... 익숙한 '톤'아닌가? 2mb나 문국현씨 같은...
그리고 서울시 소프트웨어 개선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도 대개 전문가로서 서울 생활하는 이가 평소에 가질 수 있을만한 그런 아이디어들...

아래는 그런 맥락 속에서 페북에 썼다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지운 내용:

독재는 대개 정치혐오증을 먹이삼아 자라난다 (행정국가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물론 항상 그런 극단적 결과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정치혐오증이 좌우를 넘어선 제 삼 세력의 정치화나 생활정치 등으로 표현되면서 민주주의의 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진 '가능성' 정도인 것 같지만... '전문가정치' 역시 전문가, 전문지식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기초로 삼고 있는 생각 아닌가. 플라톤의 국가론 생각이 나네. 그건 정당정치, 이념정치에 대한 불신이기도 하지만, 일반 시민들을 포함한 비전문가를 배제하는 정치 모델로도 연결된다. 한마디로 정치에 대한 이해수준이 너무 낮거나 아니면 논리가 너무 허술하다는 것. 감성정치, 공감정치라고 하면 얼추 맞아 떨어지는 표현이겠다. 서울시 시정은 그런 차원에서 끌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막상 시장이 되더라도 금새 꼼짝달싹 못하는 식물 '행정가'가 되기 십상이다.


벗뜨...
계속 연재되고 있는 인터뷰를 보면서 헷갈리는 것도 사실.
그가 정말 시장이 된다면 꽤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나도 설득당하고 있는 중~)
이러다가 정말 시장선거에 나와서 당선되는 것 아닌가?
내가 소셜미디어의 힘을 너무 얕잡아 보는 건 아닌가?
정치의 변화, 진화에 대해서 너무 보수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꽤 본질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가 이미 시작된 것 아닌가?

하지만 그가 과연 당선될 수 있을까? 더 본질적인 문제는 거기에서 찾아야 할 듯.
그가 서울시장으로 무혈입성하기 힘든 구조적 문제...
단독 후보로 나서면 한나라당에게 좋은 일 시켜주는 일임은 분명하니 (그래서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고) 야당 통합 단일 후보가 되어야 할텐데... 그 과정에서 그는 상처만 입고 낙마할 가능성이 크다.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걸까? 과연 통합 단일 후보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관전포인트'를 그 쪽으로 옮겨야 할 지도... 
9월이다. 아니 9월이 지난지 '꽤' 되었지만 월요일라서 그런지 왠지 새로운 기분이다. 아! 날씨가 '급' 시원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전철역에서 내려 출근번스를 타지 못하는 날엔 마을버스를 타야하고 그럴 땐 정류장에 내려서 한 6,7분 정도 언덕길을 더 걸어 올라가야 한다.   햇볕을 맞으면서... 오늘도 햇살을 꽤 뜨거운 편이었고 도착 후 많은 땀을 흘렸지만 날씨가 달라졌다고 느낀 게 땀이 금새 말라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늦더위에 약간 힘들어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워낙 비가 많은 여름이어서 뜨거운 햇살이 반갑기도 했다. 과일이나 곡식 생장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이제 하루가 다르게 건조해지고 서늘해지는 날씨가 또 반갑다.
어젠 가을맞이 공사를 벌였다. 우선, 볼품없이 자라고 있어서 내 눈총을 받던 야자수(?)를 과감하게 퇴출시키고 너무 자라서 화분이 작아보이는 파키라를 그쪽으로 옮겨 심은 것. 최근 화분 옮겨싦기를 몇 번 시도해서 모두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는데 이번에도 느낌이 좋다.
그리고... 숙원사업이었던 옷장 정리를 했다. 여름 옷 철수시키면서 이참에 쏴악 정리해버렸다.
맥북도 좀 정리했다. 윈도우 시절에 쏠쏠한 재미를 보면서 쓰던 영어, 독일어 사전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설치한 것. 그리고 마음에 쏙드는 마인드맵 프로그램을 만났다. 그 동안 마인드맵 프로그램을 여러 종류 써 봤는데 (거의 10개...) 모두 아쉼을 남겼는데 이번에 만난 녀석은 딱 내 스똬일이다. "MindNode Pro" (상용버전인 Pro를 취득 경로는 음 영업비밀...).
급한 업무는 지난 주 해치워서 적어도 오늘, 내일은 내 공부를 좀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실 고실한 날씨에 점점 내 스똬일로 최적화되어가고 있는 노트북으로...
아, 한 가지 고백을 좀 해두자면... 요즘 깊은 잠을 못자고 있다. 아무리 '행복전도사'임을 자청해도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선 다른 '내'가 잠복 중인 모양이다. 근원적인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할 모양이다. 빨리...

2011년 9월 3일 토요일

정치적 견해 그리고 인간에 대한 호불호를 드러내는 이런 글은 '페북' 같은 곳에 올리기 조심스럽다. '보복'당할 걸 염려해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이야기로 독자의 영혼에 끼치는 폐를 최소화하려는 생각 때문이다 (이곳의 소수의 독자들에겐 죄송. 꾸벅). 더군다나 나와 다른 견해를 갖는 사람들이라면 내 글 읽은 뒤에 원치않는 '부작용'을 경험할 수도 있기에...
안철수 원장과 박경철 원장, 그리고 작가 이외수, 김정운 교수에 대한 이야기다.

어제 저녁 유희열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경철님이 초대되었다. 우연히 듣기 시작해서 글쎄 30분 정도 들었을까, 더 이상 듣지 못하고 껐다. 왜? 재미가 없어서. 경철님 얘기는 그 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서 들었던 터였고 그냥 '착한 사람'인 것 같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철수님과 같이 대학생들에게 강연을 다닌다는 얘기도 들었고, 김제동과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한 걸 보기도 했었고...
어제 얘긴... 대부분 그저 그런 일상적이고 소소한 감상이었는데 뭐랄까 도덕선생님의 목소리 같았다. 혹은 수필가... 따뜻한 얘기, 좋은 얘기만 하고 있어서 지루한... 좋아하는 단어가 '살갑다, 그립다'라든지... 조영남의 노래 '모란꽃?(동백꽃)'에 얽힌 이야기랄지...
그러면서 그와 단짝인 철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하겠다는... 오세훈의 전시행정이 아닌 인프라와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겠다는.... '문국현'스러운 출사표!
그들이 청년들의 상담가를 자처한 건 참 보기 좋았는데 왠지 그런 적극적 사회 참여가 그들에게 과도한 책임과 정의감을 불러일으킨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백만 팔로우어를 가지고 있다는 이외수님도 최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맡으셨던데... 그것도 요즘 매스미디어 노출을 무척 즐기시는 김정운님과 함께...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라도 도를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개 호응을 얻으면 거기에 취해서 도를 넘게되기 쉽다. 네 분 모두 적절한 시점에서 물러나거나 새로운 일을 해보길 추천드린다.

난 강호동에 대해서 특별한 호불호의 감정은 없는데 맡은 프로그램이 정상일 때 거기에서 내려오는 그의 '철학'만큼은 참 마음에 든다. 나야 아직 뭐 정상 근처는 커녕 제대로 등산을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지만 조심해야 한다. 특히 '도덕선생화'되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늘 긴장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가늘고 길게 가는 유희열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모름지기 가볍고 유연해야 다치지 않는 법이다. 주제가 무거울수록 가볍고 경쾌하게 표현해야 하고 (좋은 예, 이태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1997'), 운동할 때도 그래야 다치지 않는다.

"The social sciences in general have been unable to deliver on their promise to explain social phenomena in terms of law-like generalizations and, in consequence, to justify technicist claims to expertize in all things 'social'"

(Smart, Barry (1991), Sociology, Ethics and the Present, in: Thesis Eleven 30: 133 – 147. p.140)


사회학 위기의 원인이고, 경제학자들이 그나마 전문가 대접을 받는 이유다 (law-like generalizations). 복잡한 세상. 전문가들에게서라도 뭔가 분명한 대답을 듣기 원하는 것 아닌가? 설령 크게 틀릴 지라도, '이것이 옳다' '이것이 진리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은 것 아닌가?어쩌면 그런 점에서 과학과 종교는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복잡한 것을 복잡한 그대로 드러내는 학문 혹은 종교에 대한 요구도 그만큼 커지고 있는 것도 같다. 좀 더 성찰적인 사람들에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길 듣고 싶어하는... 대답, 정담, 해결책이 아닌 '질문'을 듣길 원하는 욕망... 포스트모던 과학/학문과 영성 추구하는 종교적 경향은 그런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해 현대 과학/학문/종교는 이렇다! 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하기 힘들 정도로, 이미 서로 상반, 상충, 모순되는 경향의 공존! 그게 바로 현대성이다.

같은 면 몇 줄 아래에...

"As Macintyre observes, amongst other things, from the potential volatility and reality-generating capacity of (human) agency. From the fact that 'the unpredictability of certain of his own future actions by each agent individually generates another element of unpredictability as such in the social world'"

정확성, 엄밀성, 법칙은 곧 예측가능성의 다른 표현이다. 사회학의 예측가능성을 뚝 떨어뜨리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현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든스 얘기였던가. 사회학의 어려움은 바로 인간이 말을 하는 데 있다는... 얼마나 감사한가 (사회학도로서)! 동물들의 얘길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2011년 9월 2일 금요일

세계 여러 곳에서 다문화주의를 얘기하지만 겉으로 비슷할 뿐 그 접근방식은 다른 듯.
개인주의, 인권, 자유주의 등의 관점에서 다양성 인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그런 전통이 부족한 곳, 즉 집단주의가 강한 곳에선... "우리 사람"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한국).
흥미롭게도 최근에는 원래 그렇지 않았던 곳에서도 '지배문화' (Leitkultur)로의 통합이 대세인 것 같다 (유럽, 대표적으로 독일, 프랑스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