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9일 금요일

내 능력,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talk but of power.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보다 더 말 잘하는 달변가들이 많아서 바울을 업신여기기도 하고 바울 보다 자기가 위대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성도들이 멀리 있는 바울보다 대면해서 설교하고 말발까지 좋은 그들의 가르침에 쉽게 마음을 내 주었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위 본문은 그 달변가들에게 바울이 하는 말이다. "너희들 말이 좀 좋은 것 같긴 한데,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는 거거든?" 약간 삐딱하게 해석하자면 바울은 말보다는 '능력을 보이는 일'에 더 자신이 있었나 보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 정도로 해석하면 좋겠다. 맥락상 내세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리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곳에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능력이다. 말 자체가 사실은 능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말만 잘 하는 것보다는 능력이 드러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점. 얼핏 당연한 얘기인 것 같다. 누가 말보다 능력이 중요한 걸 부정하겠는가? 문제는 능력이 드러나기까지 오래 걸리기도 한다는 데 있다. 말로는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지만, 능력이란건 그렇지 않다. 말이 좋은 사람이 능력이 좋을 수도 있고, 말만 잘하고 끝끝내 능력을 보여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을 쉽게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 '능력'이란 것도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말하는 것 그 자체가 능력일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한 때는 '내가 기도와 찬양의 자리에 이른 것, 그것이 이미 대단한 능력이 발휘된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랴' 생각했었다. 물론 원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고, 그런 생각, 마음을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요즘, 내 인생의 그 어느 시기에서보다 더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드는 생각은, 왠지 내게 있어서 찬양, 기도가 '말'의 차원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어쩌면 이젠 '능력'을 보여줄 때가 된 것은 아닌지...
그런데 윗 구절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구절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능력,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일 텐데, 그 속에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나? 동어반복인가? 그럼 능력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느끼는 건 하나님 나라에 속해 살지 않는다는 뜻? 그렇다. 말은 아주 잘하지만 실제 내 내면과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통치에 내어드리지 않은 것이다. 그 정도는 내 능력의 범주에 속하는 것인가? 통치에 들어간다는 것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닐 터이니, 내 능력은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사회구조와 의미론 (루만, 슈텔리)

사회구조와 의미론의 관계에 대해서 루만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 (1) 사회구조와 의미론은 각각 다른 현실에 관련된 것이다. (2) (대개) 의미론은 구조의 뒤를 좇는다. (루만은 의미론, 자기기술, 담론 등을 구조가 만들어진 이후의, 즉 사후적 사건으로 본다는 점에서 분명히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해체주의와 담론이론은 이 두 전제의 근거를 침식시킨다. 사회구조와 의미론(담론) 사이의 분명한 구분을 유지하기 힘들고, 담론은 사회구조로 환원시킬 수 없는 독자적 규칙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약점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슈텔리(Stäheli 1998, 2000)의 체계이론의 해체적 독해를 통해 구조, 의미론의 관계를 유연하게 볼 것을 제안한다. 루만의 기본적 아이디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사회구조와 의미론의 구분을 포기할 필요가 없고, 사회구조를 의미론이 뒤쫓는 다른 이해 역시 마찬가지다. 의미론은 구조가 없는양 루만이 이야기 한다면, 사회구조와 마찬가지로 의미론도 의미를 매개로 조직된 구조로 이해한다. 즉, 사회적 구조와, 의미론적 구조가 있는 것이다. 이 두 구조 사이의 관계는 '구성하면서 뒤쫓기'로 이해한다(»konstitutiven Nachträglichkeit«). 의미론적 구조는 사회구조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구조를 좇아가기도 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그것에 연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소급하는 효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후 관찰(그리고 기술)을 통해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담론은 담론 이전에 일어난 실제 사건에 대한 관찰, 증언일 뿐 아니라, 의미론이 사후에 비로소 그 사건을 의미있게, 다시 말해 실제 사건으로 만들고, 이어질 커뮤니케이션에 관련있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루만의 의미론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확장한 것이다.

- Stäheli, Urs (1998): Die Nachträglichkeit der Semantik. Zum Verhältnis von Sozialstruktur und Semantik. Soziale Systeme 4 (2), S. 315-340

- Stäheli, Urs (2000): Sinnzusammenbrüche. Eine dekonstruktive Lektüre von Niklas Luhmanns Systemtheorie. Weilerswist: Velbrü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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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uktur; semantics; »lineare Nachträglichkeitsverhältnis« der Semantik gegenüber der Gesellschaftsstruktur; »konstitutiven Nachträglichkeit«

2008년 2월 28일 목요일

권력, 법, 진리의 삼각형

푸코의 권력 연구는 다음 두 가지 메카니즘에 대한 연구로 요약된다: 권력을 공적으로 제한하는 법(권리) 규정에 대한 연구; 권력이 만들어내고 전파하는 진리효과와 그 진리가 다시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연구. 이를 권력, 권리(법), 진리의 삼각형이라고 부른다. (법 -> 권력, 권력-> 진리, 진리-> 권력).
푸코는 정치철학의 고전적 질문을 '진리담론 (그 최고의 형태는 철학)이 권력의 법적 한계를 어떻게 제한하는가?' (진리 -> 권력) 로 요약하고, 자신의 문제설정은 그 아래에 놓여있는 실제에 대한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건 기실 정치철학 질문의 앞뒤를 바꾼 것이다. , '권력관계가 진리담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어떤 법규칙이 사용되는가?' 다시 말해 '권력이 어떻게 그토록 영향력있는 진리담론을 생산하는가? (권력 -> 진리(담론))

Foucault (1980), Lecture two: 14 Jan. 1976 (of Two Lectures. in: Power/Knowledge.) (also in Analytik der Macht)
(p. 93) a triangle: power, right, truth; 'discourese of truth'; 'the rights of power'; 'rule of right'(rechtliche Regeln)

지식의 계보학

흔히 푸코의 저작을 고고학 시대와 계보학 시대로 구분한다. 계보학은 genealogy(영)를 옮긴 말인데 '계통 연구'라고 해야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지식의 고고학'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계보학 역시 '지식'의 계통을 연구하는 것이다. 방법론적으로 실증주의적 방식, 혹은 통합된 이론을 가지고 구체적 지식을 탐구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지식이란 것이 축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단절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계보학은 기존 실증주의보다 더 엄밀한 방식으로 과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반과학적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푸코의 그런 표현을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도발적으로 표현한 것이니까. 과학을 그렇게 협소하게 정의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지식의 계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전문지식과 대중지식 (이것은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계보학은 이런 지식체계를 가리키는 말. 계보학적 연구는 지식의 체계에서 '종속적 지식의 반란' 역사를 탐구하고, 부적절한 지식으로 강등된 대중지식의 복권, 귀향을 지향한다.

Foucault (1980), Lecture one: 7 Jan. 1976 (of Two Lectures. in: Power/Knowledge.)
(p.81) a return of knowledge, insurrection of subjugated knowledges,
(p.82ff) erudition; erudite knowledge; buried knowledge of erudition
knowleldegs diaqualified from the hierarchy of knowledge and sciences; local, discontinuous, disqualified, illegitimate knowledges; local memories; popular knowledge

social order, natural order

사회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의 관계는 서로를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연이 객관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우리는 그 자연을 직접 접하지는 못한다. 지평선과 같은 것. 우리 경험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자연은 사회적으로, 즉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 구성된다. 그렇게 구성된 자연은 다시 사회를 제한한다. 이를 사회질서와 자연질서의 공진화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이는 S. Jasanoff. 하지만 그런 비슷한 착상은 Latour에게서도 보이고, 철학에서도 드물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비슷한 아이디어는 knowledge/power의 관계에 대한Foucault의 이론에서 찾을 수 있기도 하고. 권력이 지식, 특정 담론을 강제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담론이 다시 권력의 위치를 정하고.
내 논문의 주제는 embryo politics이다. 왜, 어떻게 embryo가 정치적 담론의 주제가 되는지를 연구하는 것. embryo라는 얼핏보아 '순수한' 자연적 질서로 보이는 것이 어떻게 정치적 질서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는 지와, 그렇게 얘기되고, 이해되고, 정의된 embryo의 자연적 질서가 어떻게 정치적 질서를 다시 재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2008년 2월 26일 화요일

No country for Old Men (2007) Joel & Ethan Coel


주연: Tommy Lee Jones, Javier Bardem, Josh Brolin, Woody Harrelson, Kelly Macdonald

이번에 오스카상 넷을 받은 작품. 상당한 매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코엔(코언?) 형제가 만든 영화로, 그들의 영화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2000)" 밖에 보지 못한 나로서 그들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가 차지할 지위를 평가할 수는 없기에 ( '오 형제여..'에 대해서는 재담꾼이 만든 잘 짜여진 코미디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빌리기로 한다: "지난 1월 영국의 영화지 <엠파이어>는 코언 형제에 관한 특집을 마련하면서 그들의 지난 11편을 총정리했다. 그러면서 영화마다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코언 형제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요소들에 대한 정리였다. 그들의 영화에 언제나 등장하는 것은 바로 비명(Scream!), 뚱보(Fattie!), 뚱보의 비명(Fattie screaming!), 구토(Vomit!), 기괴한 이름(Bizarre names), 이상한 헤어스타일(Crazy hair), 그리고 원(Round and round) 등이다. 아마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기괴한 헤어스타일이나 그의 공격으로 인해 뚫리는 열쇠구멍 같은 원의 이미지 정도만이 이전과의 접점들일 것이다. 혹은 그가 연기하는 ‘쉬거’라는 이름도 ‘기괴한 이름’에 포함될지도 모르겠다. <밀러스 크로싱>(1990)을 제외하자면 코언 형제의 영화 중 가장 많은 살인이 일어나지만 전혀 비명을 들을 수 없다. 그러니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언 형제 영화의 이전작들에 늘 등장하던 비명이나 뚱보 같은 이른바 ‘잡다한’ 것들을 모두 걷어낸 간결한 영화다." '노인을...'은 유일하게 원작 소설이 따로 있는 영화라 아무래도 이 형제의 전형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여지가 적었던 탓은 아닌지 모르겠다.
(덧붙임: 그러고보니 파고(Fargo 1996)도 보았었는데 이 형제의 이름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이 영화로 오스카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깐느에선 감독상을 받기도. 잘 만든 영화임에는 분명한데, 왠지 낡은 영화 같은 느낌. 1987년 미네소타가 배경인데 셋팅, 의상 등을 너무 잘 재현한 탓일까? 아니, 내 느낌은 갑갑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긴 이야기를 단편으로 축약해 놓은 것 같은 느낌. 지나치게 잘 짜여진 것 같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재현한 것이라 장난을 덜 친다고 누가 평했던데, 그 때문일까? 그렇다면 다른 영화를 더 봐야 이 형제들이 어떻게 노는지 파악할 수 있으려나? 짐작컨대 번뜩이는 기지는 보이지만 스스로 만들어 놓은 전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어쨌든 '노인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 형제의 가장 성공한 영화로 남을 것 같다. 다음 영화에선 CIA를 다룬다는데 과연 '노인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가 2005년에 쓴 동명소설이다 (소설이 출간되기도 전에 제작자 스콧 루딘이 판권을 샀고, 코엔 형제에게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배경은 1980년대 텍사스. '국경을 넘나드는 마약전쟁이 아주 폭력적인 국면으로 접어들던 시대'라고 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마약밀매 대금 2백만불을 놓고 텍사스와 멕시코를 넘나들며 쫓고 쫓기는 '싸나이'들의 세계... 주제는 한 마디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인들의 푸념 18번, "요즘 젊은 것들... 쯧쯧... 세상이 점점 못살 곳이 되는 것 같아. 그 때가 좋았지... "

제목이 독특해 혹 특별한 유래가 있는 건 아닌지 우리 '네이버'에게 물어보았다.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고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아일랜드의 시인 Y.B.Yeats가 노년기인 1928년에 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의 첫 구절("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따온것이라고 한다. 시의 내용은 죽음에 관한 것이고, 이 구절 원래의 뜻은 '거기(비잔티움, 시에서 비잔티움은 영원함을 상징하는 상상의 세계)는 늙은이들이 살 곳이 못된다' 정도에 해당. 우리말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런 면에서 시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게 해석될 수 있도록 번역되었다. 허나 출전의 의미보다는 감독 혹은 작가가 어떤 의도에서 가져다 썼는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지난 해 '밀양'의 한자를 'secret sunshine'으로 해석한 것이 옳은 지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도 했는데, 제목은 영화의 내용을 짐작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한다면 오히려 영화보는 재미를 스스로 줄이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과감하게 제목을 포기한 그런 영화는 없는 것 같다. 그림에서 흔한 '무제'(no title)란 제목을 달고 있는 영화는 없지 않은가? 김기덕 감독이 최근 추상화 쪽으로 경도되는 것 같은데 '숨'보다 좀 더 추상으로 나가면 '무제'라는 제목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매우 잘 짜여져있다. 없어도 좋을 장면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줄거리가 탄탄하고 긴장감 있게 편집했다. 또 매우 절제된 사운드만 내보낸다. 배경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다심지어 죽는 장면에서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웃음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나름 웃기는 멘트들이 가끔 등장하는데 그건 관객을 위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운드의 효과는 오히려 더 크다. 관객들이 세세한 소리에도 쉽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계단 밟는 소리, 산소통을 이용해 문 따는 소리, 자동차 소리 등등. 대사도 많은 편이 아니다. 쫓고 쫓기는 장면이 많으니 그럴수 밖에 없겠지만, 많지 않은 대사는 대개 함축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영화는 자칫 느슨해지고 지루해질 수 있는데, 영화의 긴장을 유지시켜 주는 건 우선 스토리다. 쫓고 쫓기고, 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스릴러는 대개 그런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은 놀래키기도 한다. 죽어야 할 시점이 아닌데 주인공이 죽어버린다거나,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듯 등장했던 인물도 힘한번 못쓰고 죽기도 하고, 뜬금없는 교통사고가 나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도 참 싱겁다. 늙은 보안관이 알듯 모를 듯한 꿈얘기를 하고 있는 중에 크레딧이 올라오는 것이다. 분명한 결말을 보지도 못했고, 확실한 교훈을 얻지도, 듣지도 못한 관객들은 어리둥절 박수칠 타이밍도 갖지 못한 채 극장을 떠나도록 내몰린다. 관객에게 불친절한 영화. '즐길 수 있는 자들만 보시오. 누가 내 영화 보러 오라고 했소.'라는 감독의 배짱이 느껴지는 영화.

나이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안목은 있으나 젊은이들의 총질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늙은 보안관 에드역의 토미 리 존스.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며 전체 영화를 끌고 가는 역할. 원래 텍사스 출신이라더니 먼지 폴폴 날리는 배경과 잘 어울림. ('파고'의 여자 경찰 마지 군더슨 같은 분위기. 자기 역할은 제대로 잘 수행하지만 세상사에 시큰둥한... 어떤 의미에서 '블랙 코미디'적인...)

르웰린 모스역의 조시 브롤린. 베트남전 참전 용사이며 아내와 함께 트레일러에 산다. 직업은, 글쎄, 사냥꾼? 표정변화가 거의 없으면서도 절제된 연기를 빼어나게 잘 함. (우리 스티븐 시갈 헹님의 그 '변화무쌍한 무표정연기'와는 급이 다름.ㅎㅎ)

안톤 쉬거(Anton Chigurh)역의 하비에르 바르뎀. 냉정한 킬러의 전형. 죽임에 대한 일관된 철학의 소유자. 하지만 그 일관성은 우연을 배제하지 않는다. 가끔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하는데, 그 결정 방식은 동전던지기. 이 양반이 전신불수로 스페인 영화 Sea Inside의 주인공이었던 그 배우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아차렸다. 도무지 비슷해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그 영화에소는 몸도 불었고, 머리도 벗겨지고, 입까지 비뚜룸해서 실제로 몸이 불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내는 것이다. 이번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받았는데, 이 정도 핵심역할을 했으면 주연상을 주고도 남을 뻔했다. 이 영화에서 바르뎀이 주인공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더 이상 기괴할 수 없는 머리 스타일을 하고 나온다. 이 영화는 그 헤어스타일만으로도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유머라고는 도통 모를 것 같은 연쇄살인범이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다니. 스페인어 억양이 있다는데 난 전혀 catch하지 못했다. 한 번 더 보면 들리려나?

모스의 부인 칼라를 연기한 켈리 맥도널드양. 백치미라고 할까. Kalifornia (Dominic Sena, 1993)의 Juliette Lewis같은 분위기. 그녀에 대한 평을 베껴온다. "일견 다정다감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내의 모습이지만 남편의 잘못된 선택을 방관하였고 욕망에 편승했다.거액의 돈을 원했고 보안관의 도움을 거절하였다.안톤이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묻는다.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꼭 그렇게 안할 필요는 무엇인가?안톤은 이렇게 되묻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영화 속에서 드러나지는 않는다. 반드시 알야 할 필요는 또 무엇인가? 여하튼 르웰린, 칼라는 전형적인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직, 부정, 연민, 독함의 경계를 쉬 넘나드는... 정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자기 욕심에 충실하기도 하는... 오히려 안톤같은 킬러가 일관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처음과 끝을 늙은 보안관 에드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혹은 꿈으로 마무리 하면서 일견 일관성을 유지하고 주제의식도 드러내는 것 같은데 - 그 장면의 해석에 집착하는 평이 많은 것 같다 - , 내가 보기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뜬금없는 죽음, 교통사고, 결말 등은 영화 혹은 소설을 꼭 그런 식으로 볼 필요는 또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어짜피 우리 인생도 그리 잘 짜여져있지는 않지 않은가? 주요소에서 생사를 가를 동전에 대해 안톤 왈 "나도 동전하고 똑같은 식으로 여기 온거야"라고 말한다. 인생은 그런 우연의 연속인 것이다. 그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p.s.) 이 영화에 왜 이렇게 후한 점수를 주었는지 자문해 본다. 오스카상 타기 이미 수개월 전에 이 영화를 봤고, 또 그 전까지 다른 이들의 평론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의 영향이 크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내 기호가 크게 작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인간의 내면과 복잡한 삶을 사실적으로 잘 드러내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기고, 관객에게 아부하지 않는 감독의 스타일이 세련된 방식으로 드러나는 영화. 그래서 대부분의 김기덕 영화나 이명세의 'M' 에서 보여주려는 촌스러운 스타일은 사절. 또 실험적이지만 절제할 줄 알고, 너무 무거운 척하지 않는 영화를 선호한다. 타코르프스키 같은 '왠 철학자?' 스타일은 그래서 별로. 이미 영화 바깥 세상에서 충분히 공부하고 있거늘, 영화까지 공부하면서 보고 싶지는 않거든. 이런 까다롭다면 까다로운 내 취향에 맞았던 영화는 최근에 본 것으로 한정할 때 이 '노인을...' 외에 루마니아의 감독 Cristian Mungiu의 '4 months, 3 weeks & 2 days' (2007)나 '밀양'(2007)을 꼽을 수 있겠다.
한가지 더. 영화 포스터가 촌스럽기 그지없다. 영화 배경이 1980년이기 때문에 포스터까지 '고풍스럽게' 가져가는 건 좋은데, 얼마든지 다른 방식이 있지 않을까. 윗 사진은 널리 알려진 포스터보다 밝고 또 텍사스 풍경(이겠지?)도 보여서 조금 더 낫다. 포스터가 더 발랄했더라면 메마른 유머가 기본 정서인 이 영화에 훨씬 더 어울릴 뻔했다. (결국 다른 포스터를 찾아 바꿨다. 훨씬 낫다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 2월 25일 월요일

두 세계

우리는 두 세계에 살고 있다. 준비된 세계와 즉흥적 세계. 후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날 것 그대로 일이 벌어지는 세계이고, 전자는 성찰하고 추수려서 걸러진 생각 혹은 행동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우리는 즉흥의 세계가 주는 찰나의 미적 체험을 즐기기도 하고, 사태와 거리를 둘 수 있고, 그렇게 확보된 거리가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준비된 세계의 안정감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두 세계의 경계를 구분할 수 있지만, 대개는 - 특히 대화상황에서는 - 두 세계 경계의 중첩, 분리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우리의 삶은 두 세계 간의 경계가 너무 분명하거나, 그 간극이 너무 넓을 경우에 쉽게 고달파진다. 더 행복하게 살려면 간극을 좁힐 필요가 있다. 즉흥적 세계에 더 노출되어 단련되는 것도 필요할 것이고, 준비된 세계의 외연을 넓여 두 세계의 접경지대를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2008년 2월 20일 수요일

체계를 해체하는 두 가지 방식

체계를 해체(분해)하는 두 가능성이 있다. (1) 하부체계들로 해체하는 것. (2) 체계를 이루는 요소들을 낱낱이 밝히는 것. 체계를 집으로 비유하자면, 집은 비슷한 속성을 지닌 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고 (1), "돌, 지주, 못"등의 관계로 이해할 수도 있다 (2). 첫번째 해체방식은 체계분화이론으로 발전되고, 두번째 해체방식은 체계복잡성 이론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두 차원을 구분함으로써 동어반복을 피하며 다음 진술을 할 수 있게된다: 분화의 증가와 혹은 분화형태의 변화와 더불어 체계복잡성이 증가한다.

해체: Dekomposition
Luhmann 1984: 41 (e. 21)

정치적 조정

체계는 자율성을 갖는다. 조작적으로 닫혀 있다고 표현한다. 그렇지만 환경의 정보에 대해서는 열려 있다. 또한 독자성을 획득한 체계는 바로 그 때문에 다른 체계의 역량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체계가 다른 체계에 제공해 주는 것을 '역량'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정치는 모든 구성원들이 따라야 하는 결정을 내려 줌으로 다른 체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를 제한한다 (복잡성을 줄여준다). 다른 체계의 작동을 직접 조정할 수는 없고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제한할 뿐이다. 정치와 법이 다른 체게에 미리 내린 결정을 관철시키거나 강요하는 방식으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다. 조정과정은 다른 체계가 이미 스스로 가진 변화 의도를 법이 사후에 정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Willke, 1989: 51).

역량: Leistung, performance
Willke, Helmut(1989), Systemtheorie entwickelter Gesellschaften. Dynamik und Risikanz moderner gesellschaftlicher Selbstorganisation, München.

복잡성 (Komplexität)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선택은 복잡성을 축소시킨다. 복잡성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실제 선택된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잡성이 역사 과정에서 점차 증가되어 왔다. 증가된 복잡성에 대한 대응, 즉 복합성의 축소를 위한 전략이 체계의 분화다. 분화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추적할 수밖에 없는데, 분절적분화, 위계적분화가 일차적 분화원칙이었던 시대를 거쳐 근대사회에서는 기능적 분화가 지배적 형태이다.
[복잡성인가 복합성인가? 의미상 복잡성이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너무 일상적인 개념으로 들린다. 복합성? 복합성의 반대는 단순성?]

코드(화) (Code, Codierung)

사건은 코드화를 통해서만 커뮤니케이션이 된다. (사건 > 커뮤니케이션). 코드화된다는 것은 전달되는 과정에서 정보를 두배로 부풀려서 한쪽은 전달하기 위해서서 사용하고 다른 쪽은 바깥에 놔두는 것을 의미한다. 사건은 코드화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코드화된 사건만이 의사소통과정에서 정보로 작용하고, 코드화되지 않은 사건은 소음에 불과하다. 코드화는 의사소통과정의 분화를 가져온다. (Luhmann 1984: 197)
어떤 체계가 다른 체계를 포함하는 환경으로부터 구분되는 것은 체계의 내재적 이원 코드 때문이다. 예를 들면 경제는 이익과 손실 (지불/비지불) , 정치는 권력의 획득과 상실 (권력/무력), 과학은 진술의 진리/비진리라는 코드로 걸러진 사건이다. 체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이러한 코드를 통해서만 연결된다. (Luhmann, 1981 : 20)

사건: Ereignisse
Luhmann 1981: Letitimation durch Verfahren

커뮤니케이션 (루만)

커뮤니케이션은 의미의 선택과정이다. 이 선택과정은 보통 발신/수신이라는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루만은 삼단계 모델을 제안한다. '정보'를 덧붙이자는 것이다 (나머지 절차는 '전달', '이해'이다). 정보의 선택성 자체가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정보는 환경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 중에서 특정한 사건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의 진행과정으로 두 번째 단계는 ‘전달’이다. 전달 역시 선택의 한 과정이다. 타자가 선택한 모든 사건(정보)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입장에서 타자로부터 전달되는 정보는 그 자체의 의미와 함께 타자가 선택했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세 번째 단계는 ‘이해’이다. 이해 역시 선택의 한 과정이다. 전달되는 모든 정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가 스스로 그 중 일부를 선택하는 과정이 이해이기 때문이다. 이해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청자의 상태가 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청자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Luhmann, 1984: 191 이하).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정보가 있는 사건을 인지하는 것과 구별된다 (ibd. S.198).

의미: Sinn, 전달: Übertragung, 인지하는 것: Wahrnehmung

2008년 2월 19일 화요일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 [2007] Julian Schnabe


원제: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주연: Mathieu Amalric; Emmanuelle Seigner

"‘잠수종’은 철교의 기초 공사 따위에서,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 일할 수 있도록 만든 큰 종 모양의 잠수복을 말한다."

줄거리: "프랑스 여성지 ‘엘르’의 편집장이었던 보비(마티유 아말릭)는 세련되고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남이자 방탕한 바람둥이다. 하지만 어느 날 뇌졸중을 일으키며 왼쪽 눈 하나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신세가 된다. “죽지는 않았지만,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비된 상태에서 의식은 정상적으로 유지됨으로써, 마치 환자가 내부로부터 감금당한 상태”, 이름 하여 ‘락트-인-신드롬’(locked-in-syndrome)이라는 상태가 지속된다. 장 도미니끄 보비는 이것을, 답답한 ‘잠수종’에 덕지덕지 갇혀있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헌신적인 언어치료사의 도움으로 15개월 동안 무려 20만 번에 달하는 왼쪽 눈의 깜박거림으로 알파벳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수백 쪽에 이르는 회고록 <잠수종과 나비>를 완성한다. '잠수복이 한결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 길에 나선다. 시간 속으로, 혹은 공간을 넘나들며 날아다닐 수도 있다. 불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하고, 미다스 왕의 황금 궁전을 거닐 수도 있다.'"

크게 더 덧붙일 내용이 없을 정도로 간결하다. 처음엔 '잠수종'이라는 생소한 단어 탓인지 형이상학적인 영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잘못 짚었다. 영화가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우리는 제목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잠수종과 나비라는 그 선명한 대비가 주는 주제와 메세지를 알게 된다. 그 순간 "설마 영화 끝까지 저걸 밀고 갈까" 생각했는데, 하지만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이 영화도 착한 영화였던 것이다, 내가 과히 즐기지 않는...어떤 영화 평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잠수종과 나비>는 기존의 고난 극복 스토리처럼 자기 연민에 빠져 감정을 자극하기보다 극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주인공을 통해 생명력을 예찬한다." 돌발퀴즈: 이 구절을 읽고서 떠오르는 유사한 영화는? 네, 정답은: Sea Inside (2004, Alejandro Amenábar). 씨 인사이드의 주인공은 이야기를 하거나 입으로 펜을 물어 글을 쓸 수는 있었지만 타인의 도움 없이는 1cm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28년을 살아야 했던 라몽. 잠수종과 나비의 보비만큼, 어쩌면 그 이상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자신이 겪는 고통은 누가 보래도 본인에게는 가장 극심한 것이기에 그들이 겪었을 고통을 비교해 보는 일이 부질없는 짓이다. 라몽의 경우 의사소통하고 자신의 생각은 적어도 시원하게 전달할 수 있긴 했지만, 그 상태로 보낸 28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크게 느껴진다. 한 눈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밖에 없었던 보비가 느꼈을 절망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어쨌든 둘은 모두 모던한 신파영화의 주인공답게 그런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두 주인공과 두 영화를 그 밖에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내 분류 기준을 유지자면 Sea Inside가 덜 착한 영화다. Sea Inside의 라몽은 어떻게든 꿋꿋하게 살지 않고 결국 안락사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분명 큰 슬픔으로 남았을 것이다. 반면에 보비는 죽고 싶다고 치료사에게 한 번 이야기했다가 '야단'을 맞은 후 다시는 그런 내색을 비치지 않았고 온 힘을 다해 책을 완성했다. (라몽도 책을 내긴 했다. 비슷한 점이 많네. 둘 다 실화라는 점도 그렇고.). 보비의 독백 중 이런 구절이 있다. "I decided to stop pitying myself. Other than my eye, two things aren't paralyzed, my imagination and my memory." 확실히 이 영화는 착한 영화임에 분명하다.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그런 '인간시대'류... 생각할 거리는 씨인사이드가 훨씬 많이 던져준다. 상식에 도전하는 것이다. 휴먼 드라마를 만들려면 차라리 '인간시대' 식 다큐멘타리가 훨씬 낳은 것 같다. 이런 박한 평을 읽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분명히 '영화가 그 정도로 나쁘지는 않네'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 잘 만든 영화다. 찌임새도 있고, 그리 지겹지도 않고, 다들 연기도 잘 하고... 볼 만하다. 영화적으로 가장 큰 소득은 초반부의 영상일 것이다. 보비가 보는 시각을 공유할 수 있도록 보비가 보는 것처럼 촬영, 편집한 것이다. 매우 신선한 시도였고, 거기에 대해서만큼은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영화라는 장르만이 시도해볼 수 있는 것. 장 도미니크 보비는 책이 출판된 지 딱 10일이 지난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보비에게 경의를...

2008년 2월 17일 일요일

실용주의, 레토릭 혹은 현실

"'요즘 왜 이렇게 못하냐?' 뒷말 나오는 새정부". 이는 인터넷 신문 사이트에 등장한 기사 제목이다. 무슨 신문일까? 한겨레? 오마이뉴스? 놀랍게도 오늘 아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확인한 것이다. 자체기사는 아니고 연합신문 기사를 받아서 올린 것일 뿐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일보는 운하 논쟁에서 취한 태도를 봐도 알수 있듯이 무조건 이명박 옹호는 아니었고, 최근 칼럼 등에서도 인수위와 이명방 정부에 대한 쓴소리를 내보낸 바 있어서 크게 놀랍진 않지만, 눈에 띄는 건 동아일보. 최근 드러나는 각종 악재, 실언에 대해 온 몸을 던져 이명박 수호천사 역을 자임해오던 터이기 때문이다. 그 동아일보마저 이제 경고 신호를 보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직 취임을 하기도 전에 지지도가 8퍼센트 떨어졌다니 그럴만도 한 것인가? 도대체 끊이지 않는 정책 혼란, 실언, 번복의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나는 이명박씨를 지지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에 정권이 바뀌는 것이 갖는 긍정적 의미를 찾으려는 편이고, 또 이왕 당선되었으니 잘 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컸다. 하지만 당선 후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을 보면서 새정부의 5년이 심히 걱정스럽다. 문제의 뿌리는 철학 혹은 이데올로기의 부재인 것 같다. 한국 기존의 정치 세력을 좌와 우, 진보와 보수로 나누고 그들은 그런 소모적 이념논쟁을 지양하는 실용주의적 입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실용주의는 '중도'라는 표현처럼 듣기에 좋고 득표에도 도움이 될 수는 있는 지향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건 곧 좌표없음, 임기응변, 대중주의 등에 잇닿아 있는 말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정권교체'나 '경제살리기'만 외쳐도 충분했지만, 이제 국정전반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지향점, 철학이 보여야 하는 것인데, 실용주의는 도대체 예측불가능한 것이다. 인수위가 쏟아내는 각종 정책을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없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 같으면서도, 특정 영역에서는 국가의 강화를 이야기 하고, 영어몰입교육과 경부운하를 같은 정권에서 추진하려는 군거를 알지 못한다. 실용주의의 한계, 허구성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정당과 정치세력들이 그래도 지향점을 분명하고 서로 분명한 차별성을 보이는 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된다. 어쩌면 그만큼 한국사회가 성숙한 탓일 수도 있다. 80년대는 민주화가 목표였는데, 그건 결국 대통령 직선제라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성취 이후 더 이상 목표가 될 수 없었다. 이후 등장했던 정부들도 모두 나름대로 시대적 과제 극복과 기대가 정권 출범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노태우 정부는 직선제, 6공화국, 김영삼은 최초의 문민정부, 정경유착 근절, 과거사 재평가, 김대중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호남세력 중심 정권, 노무은 지역주의, 권위주의 극복, 분권화, 참여민주주의 등을 들 수 있다. 2008년 이명박 출범기가 이전 정부의 시작처럼 극적이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것은 어쩌면 과거 숙제처럼 쌓여있던 많은 시대적 과제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는 역설적 상황에 기인한다. 어쩌면 이제야말로 정책의 내용을 가지고 승부해 볼 시기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대선에서는 유권자, 언론, 후보자, 정당들 모두 시대적 과제와 집권 후 정책에 대해서 토론할 기회를 놓쳤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박한 평가 때문에 '정권교체'가 가장 중요한 이슈였던 것이다. 행여나 열우당 세력이 재집권할까봐 이명박씨가 무엇을 할 지 묻지도 않고 지지를 보내주었다. 그 묻지마 지지의 결과를 요즘 우리가 매일 매일 목도하고 있다. 정당의 색깔, 이념이란 것은 정책의 예측가능성을 높여준다. 예를 들어노무현 정권 역시 분명한 철학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관철시켰다는 평가를 받기에는 한참 모자라고, 오히려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측으로 차를 몬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명박 정부는 - 깜박이 비유를 유지한다면 - 좌우깜빡이를 동시에 켜고 (비상상황?) 어디로 운전대를 돌릴 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아닌가? 도대체 영어교육, 대학과 기업 자율, FTA, 운하, 작은정부, 이런 이슈들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가?

2008년 2월 16일 토요일

체계이론과 거버넌스 이론

(주류) 거버넌스 논의와 루만은 이중적 관계에 있다. 한편 루만은 거버넌스 논의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거버넌스 논의의 기초에는 국가중심성, 위계적 조정 능력에 대한 회의가 깔려있는데, 각 사회 체계의 자율성에 주목하는 루만의 체계이론은 오래 전부터 - 남들이 국가를 강조할 때 - 바로 그 주장을 해 왔던 것이다. 위계적 혹은 다른 체계에 대한 개입적 조정이란 없다, 정치는 자기의 문제를 조정할 뿐. 모든 체계는 자기조정적.
다른 한 편 체계이론 입장에서는 최근 거버넌스 논의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수평적 조정으로 조정양식으로 변화함을 과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가? 위계적 거버넌스 (국가의 기능상 어쨌든 위계적이긴 하다. )가 그리 쉽게 다른 양식으로 대체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국가를 강조하는 경향도 있는데, 그런 입장을 논의를 거버넌스 이전으로 돌리는 것 같다.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제한됨.) 거버넌스가 새롭다는 것은 주로 네트워크거버넌스를 지칭하는데, 그것은 국가 차원이 아닌 global governance나 EU 같은 초국가 기구나, 혹은 중앙(연방)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에 긴요한 개념이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그리 설득력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럼 국가단위에서는 어떤 변화도 찾아볼 수 없단 말인가? 체계이론적 구도 안에서 분명히 목도되는 변화를 이론적 일관성을 잃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 경우 politics와 polity를 구분하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통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네트워크형 거버넌스, 참여 거버넌스는 정치과정/정책결정과정에서 - 즉, politics - 더 자주 관찰된다 (전문가자문, 시민참여, 각종 자문위원회는 대개 이런 차원에서. 체계이론에서도 그런 접근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정치체계 내의 변화니까). 그리고 국가의 정책이 위계적일지라도 그것의 집행방식은 네트워크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계적 거버넌스의 일부 혹은 위계적 거버넌스의 그림자 내에서 변화일 뿐이고, 체계이론적 관점에서는 그런 위계적 거버넌스도 실제로는 자기거버넌스로 해석되어야한다. 실제로 많은 연구가 실제 network 형 거버넌스는 오히려 찾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polity 차원에서 거버넌스는 위계적이거나 (정치), 자기조정적인 것이 여전히 주류적 양태인 것이다. 루만의 이론은 이런 경험연구의 결론과 매우 친화적이다. 정리하면 루만과 체계이론적 입장은 거버넌스 이론의 태동에 영감을 주었지만, 변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최근 거버넌스 입장에 대해서는 오히려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내 이론적 기여는 politics와 polity 의 구분을 도입해서 변화와 경계유지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겠다.

2008년 2월 15일 금요일

Governane 논의에 기여

structure/ semantics 의 구별을 굳이 거버넌스 논의에 적용하려면 대략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다. "4, 5장의 한국 사례가 Governance 논의에 대한 기여할 수 있는 바는, 성공적인 혹은 효과적인 governance는 제도적, 구조적 측면을 만족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이다. 주류 governance 논의에서 semantic governance 라고 할 수 있을 그런 측면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족했다. 더구나 bioethics 의 경우 해석적 차원을 이해하는 것이governance를 둘러싼 갈등의 원인, 해소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메타거버넌스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유형의 제도적 거버넌스의 거버넌스이기도 하지만,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구조적 거번너스'와 '의미론적 거버넌스' 두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거버넌스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인위적인 구분인 것처럼 들린다. 루만의 structure/semantics 도식은 이미 문제가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governance 개념 자체가 체계이론에서 굳이 그 사용처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내 이론의 기여는 애초에 목적한 대로 거버넌스 논의의 삼단계 구분이다. 특히, politics/polity를 구분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효과적/성공적 거버넌스의 조건은 politics가 얼마나 원래의 기능을 하느냐는 것과 (집합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정의 산출), politics의 논의가 어떻게 polity 차원의 거버넌스 구조에 반영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오히려 체계이론과의 연결성을 확보해 주는 것 같다. "4장이 보여주는 것은, politics의 불안정성. 열심히 논의를 하긴 했는데, 그것이 대중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 같지 않고, 매우 특정한 이슈를 중심으로 논의를 했다는 것, politics 에서 실제로 대표성을 가지고 논의하지 못했다는 점. 각 조직, 체계 역시 자율적 거버넌스 메카니즘을 갖추면서 실제로 그 내부의 politics가 매우 취약했음을 보여준다. 국가로부터의 거버넌스 압력이 컸다는 점. 5장은 그런 불완전한 politics, polity 가 거버넌스 실패의 원인이라는 점,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마련된 메카니즘은 일부 혼란스러운 상황을 성공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했다는 점. 결과적으로 효과적인 거버넌스 메카니즘을 만드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 여러 실패를 통해서 효과적 거버넌스를 위한 전제조건들을 채워가고 있다는 점. 결론을 일반화 시키면, politics/polity/ policy 차원의 유기적인 governance가 성공적/효과적 governance의 중요한 조건이다. politics 에만 충실하면 전체적으로 보아 매우 유연성 없는 거버넌스 구조를 갖게될 가능성이 크다.

2008년 2월 12일 화요일

Human Nature (2001) Michel Gondry

주연: Tim Robbins, Patricia Arquette, Rhys Ifans
각본: Charlie Kaufman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 베니스, 토론토를 비롯해 전 세계 38개 영화제에서 88개 부문 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되어 41개 상을 수상한 화제작 '존 말코비치 되기'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 이때 받은 상의 갯수만 해도 열 셋. '존 말코비치 되기'가 찰리 카우프만을 천재 작가로 불리게 해줬다면, 두번째 야심작 '휴먼 네이쳐'는 그를 세계 최정상 시나리오 작가의 반열에 올렸다. (...)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CF로 기네스 북에 오른 리바이스 'Drugstore'를 연출한 미셸 곤드리 감독은 헐리우드의 초대형 러브 콜을 마다하고, '휴먼 네이쳐'를 그의 첫 장편 데뷔작으로 낙점했다."

하지만 이런 광고성 멘트와는 다르게 이 영화에 대한 평은 실제로 그리 좋지 않았다. 언급할만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지도 못했을뿐더러, 대중의 평가도 박한 편이었다 (imdb에서는 6.2/10 를 받았고 한국 cineline 에서도 비슷한 6/10을 받았다. 난 7.5/10 정도는 주고 싶다.). 하지만 곤드리 감독과 카우프만은 새로운 영화에서 한 번 더 손을 잡는데, 그것이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이 두번째 합작 영화는 오스카 각본상을 비롯 모두 36 개의 상을 받는 등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imdb user rating도 8.5/10로 최상위급에 속함.). 난 개인적으로 'Eternal Sunshine'보다 'Human Natue'를 더 재미있게 봤다. 'Eternal sunshine'은 서로 다른 기억이 충돌하는 것을 절묘하게 화면으로 표현하는 등 연출력이 뛰어나고, 전체적으로 보아 영화적 완성도가 높은 편이긴 하지만, 소재가 주는 충격이 좀 덜하다. 인간 기억의 고장 혹은 인위적 개입으로 삶이 뒤죽박죽되는 소재를 다룬 영화들은 적지 않고, 그런 소재를 더 극적으로 표현한 영화들도 여럿 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human nature' 는 'Eternal'보다 엉성한 면이 있긴 하지만, 독특한 재료를 깔끔하게 잘 요리했고, 또 마침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를 다뤄서 더 흥미롭게 봤던 것 같다.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비인간의 경계 설정". 이제 본격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이거 왠일인가, 마구 마구 귀찮아진다. 그래서 줄거리 요약은 과감히 생략. 도대체 난 이렇게 귀찮아하면서도 왜 블로그를 만들어 애써 흔적을 남기려는걸까? 몇 명이나 읽을 거라고... 그 이유는 ... 영화 조달(?)하고, 보는 데 나름 적지 않은 노력, 시간을 들이니까, 거기서 최대한 많이 뽑아내기 위함이다. Anyway,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인간본성에 대한 영화다. 인간은 어떤 본성/ 본능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은 인간이려면 이 본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동물과 인간의 구별은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처리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 영화는 이런 류의 질문을 시종일관 던진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일은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과 침팬지를 구분하는 것에 어려움을 갖는 사람들(혹은, 침팬지들)은 없을 것이다. 경계 설정을 문제삼으려고 하면 그러니까 다른 접근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은 어느 한 범주에 넣기 애매한 잡종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여러 유형의 경계문제를 논하는 학술적 논의에서도 많이 사용한다.). 이 영화의 경우, 온 몸에 털이 나는 여자,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으나 숲 속에서 태어나 동물처럼 자란 존재가 그런 역할을 한다. 다른 한 편 매우 '인간적인' 존재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우리의 주인공. 에티켓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의 필수조건이라고 믿으며, 쥐실험(자세한 내용 생략, 혹시라도 앞으로 영화를 볼 독자(^^)를 위해)을 통해 그런 인간성은 학습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생물학자. 그를 중심으로 물고 물리는 인간/비인간 (혹은 덜 인간)들의 관계. 에티켓을 신봉하는 그도 하지만 성욕의 노예이긴 마찬가지. 다만 '덜 인간' 처럼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을 뿐.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참 많은 장치를 만들어 놓았고, 때로는 그것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 오히려 그 장치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오히려 '참 인간'인지도... (cf. 루소 '자연으로 돌아가라'). 끝부분에 귀여운 반전이 있음도 언급해 두고 싶다 (그게 없었으면 싱겁게 끝날 뻔 했다). 결론적으로 인간 본성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인간인가? 본능, nature 만 따지자면 인간도 그리 '인간적'이지 않다. 인간은 본능을 억제할 수 있어야 인간이다. 본능을 '인간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나름 많은 장치를 만들어 놓고 있다. 그 정도인가?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오늘은 우선 이 정도로... 연기는 전반적으로 괜찮은 편. Tim Robbins도 좋지만 연기하기 훨씬 더 어려웠을 털복숭이 여자역을 잘 소화한 Patricia Arquette가 더 강하게 남는다.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일하지 않는 하나님

험악한 시절에 알려졌던 '혀 짤린 하나님'이라는 섬뜩한 제목을 가진 노래가 있었다 (80년대 초 김흥겸이라는 신학생이 노래극을 위해 만듦. 여기 참조) 사회의 부조리와 죄악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 넋두리였다. 꼭 그 정도로 절박한 상황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세상이 이 모양인가?' '왜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왜 응답하시지 않는가' 정도의 질문은 자주 하고 또 자주 듣는다. 그런 질문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침묵은 곧 하나님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어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보여주고, 확인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에게 말을 건넬 주체, 하나님이 아애 존재하지 않는, 그런 ''절대無'의 상태의 귀결인가? 아니면 '空'의 상태, 즉,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존재의 하나의 표현인 그런 상태의 결과인가? 그 누구도 인간의 언어로 이런 문제에 대해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다. 그건 감성, 지성을 동원해서 이루어지는 언어적 사고의 차원이 아니라 영성의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굳이 하나의 가능성을 말로 표현해 보자면, 어쩌면 하나님은 침묵으로 말씀하시고, 일하지 않음으로 일하시는 지도 모른다. 비유컨대, 부모가 세세히 간섭하면서 자식을 키울 수도 있지만 그냥 내 버려둘 수도 있는 것처럼... 일반적으로는 자녀가 어릴수록 부모의 개입 여지가 커지지만, 어느 정도 큰 자식들에 대해선 방임형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교육 방식일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고, 개입하신 사례 목록을 만드는 일도 아주 불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판단 기준은 대개 인간 편에서 세운 것 아닌가? 하나님은 어쩌면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실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비가 아닌가 생각한다. 환자가 질병에서 놓임받는 그런 신비와는 다른 차원의...

천국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서 우리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이 의미는 경계 설정, 구분 짓기를 통해서 주어진다. 너와 나를 구분하면서 비로소 '자아'가 생성되고, 일본인, 중국인...이 있어야 우린 한국인일 수 있다. 죽음이 있어야 삶이 가치 있고, 늙음이 있으니까 젊음이 아름답다. 더 이상 경계를 설정할 수 없는 상황은 의미의 종말이다. 천국과 천국의 의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천국의 의미는 지옥과 대조될 때 주어진다. 그 경계가 유지되고, 어느 쪽으로 갈 수 있는 선택지가 남아 있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다. 막상 천국에 들어가면 어떨까? 영생하고 사랑이 지배한다는 그 천국... 죽을 수 없는 상황에서 영생은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까? 미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의 관계에 어떤 의미가 주어질까? 이 땅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그 방식을 가지고서는 천국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 같은 질문에 부딪힌다. 천국,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다른 질서, 법칙을 가진 세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하나님 나라 신비에 대한 초딩급 이해이다.

2008년 2월 9일 토요일

연습곡 (Island Etude) (2006) 후아이-엔 첸

Lian xi qu (2006) Huai-en Chen

"청각 장애가 있는 밍... 대학을 졸업하기 전 자전거로 타이완을 일주할 계획을 세우고 길을 떠난다. 그가 타이완을 일주하는 6박 7일 동안 만나는 여러 사람들과 타이완의 자연 풍광..."

Ang Lee 감독 영화를 제외하고 대만출신 감독 영화는 처음인 것 같다. 이 영화는 하지만 훨씬 더 대만적이다, 부정적인 뜻에서. 혹시 대만관광공사 혹은 대만항공에서 위탁한 영화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이런 영화를 로드무비라고 하던가. 영화 만들기 쉬운 장르 중 하나일 것이다. 일단 화면을 채울 것들이 풍부하다. 여행하면서 지나치는 자연풍광으로 반 채우고,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 새로운 이야기들 반 채우면 한 편 뚝딱. 이 영화도 볼만은 하다. 시원한 바다, 열대와 온대 중간쯤 되는 듯한 독특한 풍경 (우리나라로 치자면 제주도 풍경과 산세가 험한 동해안 풍경을 합성시켜 놓은 것 같은...). 그런데 그런 예쁜 화면엔 금새 질린다. 이야기에 긴장감이 있어야 풍경도 사는 법인데, 그러기에 이 영화는 턱없이 모자란다. 대만 경치를 자랑하기 위해서 사건들을 끼워넣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청각 장애가 있는 청년이 해안을 따라 자전거 일주여행을 한다는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인물들이 너무 평면적인 것이다. 착하디 착한 주인공에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따뜻하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 인물들 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첫부분에 역시 자전거 여행을 하는 반항기 있고, 유복한 청년이 등장하고, 둘 사이 갈등구도가 살짝 보이긴 했는데, 그마저 더 깊어지지 않고 짧은 에피소드로 지나가버린다. 참, 한 가지 더, 젊은 청년이 주인공인데도 연애이야기가 없네. 그럴 '뻔한' 기회가 두 번 있었는데, 포스터 사진이 무색하게도 그냥 맥없이 끝나고 연결되지 않는다. (그런 류 러브스토리를 넣는 것이 너무 상투적이어서 의도적으로 생략했을까? Ich glaube eher nicht!)
언제부터인가 - 세상을 알아버린 이후로^^ - 이런 착한 영화를 꼼꼼하게 보기가 힘들어졌다. 더 자세히 보았다면 건질 게 분명히 더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경우 나는 생각할 거리, 정보, 메세지를 조금 놓치더라도 시간과 집중력을 아끼는 편을 택한다. 더 좋은 영화들 찬찬히 볼 시간도 내기 어려운 탓이다. 첸 감독과 분명히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을 착한 주인공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다음엔 좀 더 좋은 영화에서 만나게 되기를...

뱀발: 기본적으로 이 블로그는 텍스트를 지향한다. '문자적 합리성'을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이미지와 영상문화의 홍수 속에 빠져 버린 조국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웃지마시라, 나 진지하다!). 하지만 그걸 지향할 뿐 고집하는 것은 아니어서, 어울리는 좋은 그림 있으면 가끔 넣을 생각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 포스터, 좋지 아니한가? 그러고 보니 음악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OST 하나 채집해서 연결시켜 둔다.

2008년 2월 6일 수요일

세계사회론

교수신문 2006년 10월 01일

문화전파에서 국가역할 분석...'세계사회론' 주목
빌레펠트대에서 명박 받은 존 마이어 교수와 스탠포드학파


지난 5월 빌레펠트대는 미국 스탠포드대의 존 마이어(John W. Meyer) 교수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사회학자로서는 1980년 수상자인 노베르트 엘리아스 다음으로 두 번째다. 1978년부터 스탠포드대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지금까지 (공)저자로서 발표한 논문과 책이 2백 종이 넘을 정도로 왕성한 학문활동을 펼쳐왔는데, 특히 초기의 교육사회학과 조직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그가 1977년 브라이언 로완(Brian Rowan)과 함께 써서 American Jounral of Sociology에 발표한 조직에 관한 논문은 그 저널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며, 동시에 신제도주의적 조직사회학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그가 가장 중점을 두고 연구했던 분야는 사실 세계사회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이어는 제자들과 함께 -- 이들을 흔히 ‘스탠포드학파’라고 부른다 -- 사회학에 "지구화’ 바람이 일기 훨씬 전인 70년대부터 세계적 제도, 문화의 등장과 그것이 세계적으로 관철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연구해 왔던 것이다.
마이어의 주요 관심사는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유사한 제도와 문화적 지향이 지역적 조건이 매우 다른 국가들에서 관찰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를 그는 서구에서 만들어진 제도,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국가의 정체성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이런 제도·이념을 동틀어 ‘세계문화’(world culture/polity)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삽된 세계문화가 그것을 수용하는 국가에 무리 없이 관철되어 합리화를 이뤄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파된 제도와 실천 사이의 어긋남이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고, 때로는 상충되는 이념이 수입되어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스탠포드학파는 지금까지 이런 세계문화의 전파, 수용의 메카니즘을 교육, 환경문제, 정치, 과학 등 다양한 사례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독일 사회과학계에서는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신제도주의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는데, 마이어의 이론은 특히 조직과 세계화 연구에서 기존에 지배적이었던 견해와 비교되면서 빈번하게 다뤄지고 있다. 최근에는 그가 동료들과 함께 1987년에서 2000년 사이에 쓴 이론편에 해당하는 논문 일곱 편을 모은 ‘세계문화: 어떻게 서구의 원칙이 세계적으로 관철되는가’(Suhrkamp)라는 책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마이어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는 이 같은 최근 독일내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빌레펠트대와 마이어의 세계사회론의 관계에는 더 특별한 것이 있는데, 지난 2000년 사회학부 내에 세워진 ‘세계사회 연구소’가 마이어 이론에 비교할만한 독일 버전 세계사회론의 중심지라는 점에서다. 이 연구소가 지향하는 연구의 이론적 뿌리는 니클라스 루만에게서 찾을 수 있다. 마이어처럼 루만 역시 세계사회 테제를 이미 1971년에 발표한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에 이를 때까지 이를 더 적극적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데 이는 70~80년대에는 그가 이론작업을 위해 수용할 수 있는 경험적 연구나 문헌들이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한다(R. Stichweh).
루만의 정의에 따르면 사회는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합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지구적으로 연결 가능한 이 시대에 사회는 세계사회일 수밖에 없다. 세계사회 바깥에 다른 사회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사회는 공유된 가치, 민족-인종 등 집합적 정체성, 법적 헌법적 토대 등으로 통합된 공동체가 아니다. 세계사회의 통일성은 내적 분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데, 이 내적 분화는 원칙은 일차적으로 기능적이다. 하지만 정치, 법, 예술, 경제, 과학 등의 기능체계들의 분화 결과가 곧 세계사회의 성립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둘은 다른 게 아닌 것이다. 이 기능체계들을 이루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영토적 구분은 원칙적으로 의미가 없지만, 정치체계의 경우에는 -- 법도 마찬가지 -- 2차적으로 국가 단위로 분화되어있다고 본다.
루만의 세계사회론에서 국가는 여러 기능 체계를 영토 안에 포괄하는 지역적 단위가 아니라 다만 세계정치체계의 기능을 지역의 다양한 필요와 요구에 에 맞게 수행할 수 있도록 분화된 부분체계인 것이다. 이런 루만의 국가 이해는 마이어의 이론과 유사한 점이 있다. 두 이론에서 세계사회와 국가는 서로 배제하는 개념이 아니라, 세계사회라는 창발적 질서 속의 행위자로 등장한다. 다만 국가와 관련해서 루만의 관심은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세계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자율적인 다른 기능체계들과의 관계 속에서 국가가 어떤 기능, 과제를 수행 하는 지를 파악하는 데 있고, 마이어는 세계문화 확산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확인하는 데 있다. 기능적 분석과 문화적, 이념적 분석의 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인데, 경험적 분석을 위해서는 두 이론을 보완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회연구소’는 지난 해 ‘세계사회: 이론적 접근과 경험적 문제들’(Lucius & Lucius, 502면)이라는 묵직한 논문 모음집을 펴냈는데, 그 속에서는 두 세계사회론의 흔적이 모두 발견된다. 책은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우선 여러 세계사회 개념과 다양한 이론적 이슈를 소개하는 논문들이 실려 있고, 정치, 특허, 스포츠, 무역, 네트워크, 초국가적 헌법 등 다양한 세계사회 현상에 대한 논문들이 이어진다. 마지막 부분은 세계사회에서 국가, 유럽지역의 의미, 지역 간 비교에 대한 논문들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은 90년대 이후 주춤하던 지구화 논의가 독일에서는 마이어, 루만 등의 이론적 자원을 바탕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루만 체계이론의 전성시대

교수신문 2006년 04월 12일

루만 체계이론의 전성시대
미출간 유고, 해설서 봇물…경험연구와의 친화성 갖춰야

바야흐로 ‘루만의 전성시대’다. 니클라스 루만(1928~1998)은 생전에 6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와 30여년에 걸쳐 쌓아올린 체계이론으로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의 대표 사회이론가로 명성을 누렸지만, 체계이론에 기초한 사회학 연구는 타계후 더 화려하게 만개하고 있다.
루만과 체계이론에 대한 반향을 최근 출간된 서적과 논문으로 살피면 크게 다섯 줄기로 볼 수 있다. 우선 루만의 유고출간이다. 10여권 정도 나왔는데, 최근 것으론 ‘교육학 논문집’(2004)과 강의녹취록인 ‘사회이론입문’(2005)이 있다.
둘째, 이론 소개서들이다. ‘체계이론 입문서 시장’이라 할 정도로 루만이론을 쉽게 소개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삽화와 도식을 곁들인 ‘쉽게 이해하는 루만’(2003)이 인기다. 셋째, 루만이론의 각론을 다른 학문·이론과 비교하는 것이다. 가령 루만의 정치이론에 관해 지난 3년간 발간된 연구서만 6권에 달한다.
넷째, 체계이론 자체를 발전시킨 연구들이다. 루만은 ‘루만학파’를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스스로를 한명의 체계이론가로 여겼던 것. 제자그룹이 있긴 하나 루만을 교조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체계이론을 심화·발전시키고 있다. 대표주자로 D. 배커, R. 슈티히베, P. 푹스, A. 나세히를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루만과 다른 접근법으로 혹은 그가 자세히 다루지 못했던 영역에 대한 연구서들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끝으로, 구체적 사회학 연구에 체계이론을 적용시키는 경우다.
이에 해당하는 문헌은 워낙 다양한데, 특기할만한 점은 경험적 연구의 부재라는 체계이론에 대한 대표적 비판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만한 연구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연구는 대부분 ‘조직’이나 ‘상호작용’을 분석단위로 삼고 해석학적 방법론을 사용한다. 루만은 사회에 대한 분명한 이론없이 데이터를 모으고 해석하는 경험적 사회학과 고전의 뼈다귀만을 갉아먹고 있는 이론사회학 모두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에 필생의 과제를 사회에 대한 새로운 통합적 이론을 세우는 것으로 삼았다.
루만과 후학들의 노력으로 체계이론은 어느때보다 정교해졌지만 경험적 연구와 친화성을 갖추는 일은 여전히 중요과제로 남아있다. 이를 해결 못한다면 루만의 전성시대는 체계이론가들만의 파티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밖에 체계이론가들은 독립된 논의의 지면도 확보하고 있는데, 체계이론적 사회 이론지를 표방하며 1995년 창간된 ‘Soziale Systeme’가 그것이다. 현재 편집장은 스위스 루체른 대학의 루돌프 슈티히베 교수가 맡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도 체계이론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http://www.listserv.dfn.de/cgi-bin/waA0=luhmannhttp://groups.yahoo.com/group/sociocybernetics/)
이같은 체계이론 전성시대의 도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거시 사회이론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이 시대에 사회학도들을 끌어당기는 루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우선 체계이론이 ‘세계사회’에서 ‘조직’, ‘상호작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현상을 하나의 이론틀로 설명하려는 드문 ‘슈퍼이론’이기 때문이다. 사회학 연구전통에서 오랫동안 사회는 국가와 동일시됐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심화된 지구화는 이러한 사회학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이에 대한 사회학의 반응은 지구화를 하나의 현상으로 기술하거나, 조직, 네트워크 등 더 미시적인 차원에 시야를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만은 이미 1971년에 발표한 ‘세계사회’라는 논문에서 국가는 정치체계의 자기서술일 뿐이고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에는 유일한 하나의 ‘세계사회’가 있을 뿐이라는 테제를 제시했다. 그리고 기능적 분화, 지역적 분화, 사회, 조직 등 다양한 차원의 체계와 그들 간의 관계를 하나의 이론틀 안에서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시도가 매끄럽게 진행된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야심찬 기획임엔 틀림없다.
또 다른 이유로 체계이론의 개방성을 들 수 있다. 체계이론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은 기존 사회학도들에게 생소하고 난해하기로 악명높다. 하지만 일단 그 패러다임 속에 들어가 복잡한 개념들의 연결고리를 찾기만 하면 쉽게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덧붙일 수 있기도 하다. 체계이론은 루만에 의해 완성된 이론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사회에 대한 이론작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괴로운 정독의 시기를 거쳐야만 한다. 또한 독일어를 모르면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 극히 일부만 번역됐기 때문. 외국인의 경우 설령 독일어를 익혔더라도 루만이 전제하고 있는 철학적, 사회과학적 전통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소화하려면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제약 때문에 체계이론이 갖는 장점에도 불구, 비독일어권에서 루만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리라고 예측하기는 힘들다.
한국에서도 루만과 체계이론에 대해 소개된 내용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최근 연구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루만의 저서 두 권과 한 권의 입문서가 번역됐을 따름이다. 하지만 예정대로 올 상반기에 루만의 주저로 꼽히는 ‘사회체계’(1984)가 박여성 제주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다면, 그것이 루만에 대한 본격적 논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루만과 체계이론 소개를 또 다른 서구 이론의 ‘수입’으로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문닫아 걸고 한국어로만 학문할 수는 없는 이상 말이다. 그 보다는 한국 학문 생태계의 건강 유지와 자생력을 키워나가기 위한 ‘이론 다양성’의 자원으로 이해하는 게 나을 것이다. 편식은 건강에 해롭지 않은가.

80년만에 막스 베버의 새로운 전기 출간

교수신문 2005년 12월 10일

80년만에 막스 베버의 새로운 전기 출간
肉體·질병과의 오랜 싸움 부각 … 지나친 도식화 아닐까


막스 베버(1864~1920)만큼 사회학, 정치학, 법학, 행정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여러 분야에 두루 영향을 미친 학자는 찾기 힘들다. 그는 ‘경계인’이었고 학문 경계 뛰어넘기가 주특기였다.
하지만 학문이 세분화되고 그 사이에 놓인 담이 견고해지면서 반쪽 혹은 사분의 일쪽이 된 베버만이 보일 뿐, 온전한 베버를 복원하는 일은 희망사항으로만 남아 있었다. 빌레펠트대 역사학부의 요아힘 라드카우 교수가 그 일을 떠맡아서 마리안느 베버의 베버전기 이후 무려 80년만에 새로운 자료를 반영한 ‘막스 베버: 사유의 열정’(Carl Hanser Verlag 刊)을 출간했다.
그는 후학들에게 영웅화된 베버는 “매력”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라면서 성인의 반열에 올라가 있는 베버를 끌어 내려서 그의 사상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했음을 밝힌다. 1천쪽이 넘는 지면엔 그의 가족사, 당대 지식인들 정치인들과의 교류, 저작들 뿐 아니라 그 시대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 그리고 죽음 이후 수용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베버에 대한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방대한 저작을 관통하는 ‘이념형’을 라드카우는 ‘Natur’(육체, 질병, 내면, 욕구)로 삼았다. 베버의 생애를 ‘Natur’와의 갈등, 싸움으로 본 것이다. 학문적 창조성이 강할수록 감성적 측면도 두드러지기 마련인데 “베버만큼 사유의 감정적 기반을 이를 악물고 부정하려고 했던 사람도” 없었다. 베버는 자신의 내적 자연을 억제하고, 자연은 그런 베버에게 보복한다. 그 이후 베버는 다시 자연과 화해하면서 구원을 경험한다. 이런 변증법적 구도가 이 책의 줄거리다.
베버는 이미 20대 후반에 학문적 명성을 얻었고 교수로 임용된다. 친척인 마리안느와 결혼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일중독’처럼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는데 이는 실상 만성우울증에서 도피하는 수단이었다.
베버는 1898년부터 신경쇠약이 심해져서 더 이상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이 이른다. 라드카우는 이것을 과로나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당시 정치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생소한 경제학 교수로 임용돼 학문적 방향상실을 경험하는 등 예전처럼 일로 도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는데 그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임포텐츠 때문에 부부생활도 불완전한 상태였고, 마조키즘적 특성도 가지고 있었는데, 외적으로는 활달한 남성상을 지향하는 베버에겐 이것 역시 장벽이었다. 도피처 없음과 내면의 억제, 이것이 베버를 신경쇠약이라는 파국으로 몰고갔다는 것이다.
1898년에 강의·연구 불능 상태에 이른 베버는 대학 강의를 중단한다. 강단에는 20년이 지난 1918년이 되어서야 다시 서게 된다. 대학을 떠난 후 베버 부부는 이탈리아 등지에서 치료와 요양 생활을 했고, 이 시기의 베버는 직업, 결혼에서 실패자였고 확실한 거처도 없고 경제적으로 독립되지 않는 등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1902년부터 다시 학문적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마저 1909년까지는 병의 재발 때문에 수시로 중단되어야만 했다. 이런 한계상황에서 종교는 이후 그가 천착하게 되는 주요 주제가 된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3년 로마에 머물면서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베버는 유명한 ‘근대자본주의 정신과 청교도적 금욕주의 사이의 선택적 친화성’ 테제를 제시한다. 베버가 ‘금욕주의’를 제시한 것을 일반적으로 버림받은 상태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삶의 방식을 찾으려고 고심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라드카우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면서 상황의 직접적인 반영이라기보다는 삶과 저작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로 해석한다.
1909년부터 그의 죽음까지는 ‘구원과 계시’의 시기이다. 비록 외도를 통해서였지만 베버의 ‘구원’은 성적인 옥죄임에서 놓여난 후 찾아왔다. 베버는 1909년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엘제 야페와 사랑에 빠지고, 또 1912년에는 피아니스트인 미나 토블러와도 연인의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베버는 평생 그를 괴롭히던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생애 마지막 십년은 학문적 생산성이 가장 높은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종교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데, 종교의 의미를 ‘구원’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다. ‘프로테스타티즘의 윤리’에서는 금욕을 정신의 원천으로 고양하였지만 이는 실상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라드카우는 베버가 ‘구원’을 화두로 삼은 것은 지옥 같은 상황에서 구원에 대한 무한한 욕구, 필요성을 느꼈던 탓으로 해석한다. 구원은 일련의 종교사회학 저작 뿐 아니라 이후 ‘경제와 사회’에서도 다루는 주제가 된다. 1920년 56세로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할 때 그의 침대 곁엔 마리안느와 연인 엘제가 함께 있었다. 베버의 구원은 정신, 금욕에서가 아니라 결국 사랑, 육체, 내적 자연과 화해함에서 찾아왔다.
역사학자다운 꼼꼼함과 치밀함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이 책은 베버 개인사 뿐 아니라 당대 독일 사회사를 이해하기 위한 교재로도 적합하다. 하지만 베버가의 사생활을 지나치리만큼 자세하게 드러내는 것이 과연 저자가 목적으로 삼았던 온전한 베버를 드러내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여지가 있다.
또한 ‘Natur’ 개념을 축으로 베버의 생애와 저작을 해석한 것은 하나의 해석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겠지만, ‘Natur’ 개념의 불명료성과 ‘Natur’와 생애, 저작 사이의 관계, 삶의 경험과 저작 사이의 인과관계가 긍정되기도 부정되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무리한 도식화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일부 베버 저작에 대한 해석에선 기존 베버 연구자들의 시각과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해서 이 책에 대한 베버 연구자들 사이에 논의가 뜨거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의 견해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앞으로 베버 연구자라면 라드카우의 이 전기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ps) 통신원으로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 (2005년 12월 10일자). 모름지기 서평은 책을 꼼꼼히 읽은 후 써야 할 것이나 전문서평도 아닌 탓에 이틀 정도 '훑어 보고' 또 다른 서평을 참고해서 썼었다.

Bioethical Governance: 정의

생명윤리 거버넌스는 생의학의 발달로 야기된 윤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적 권력행사의 기제.

Governance: 정의 (廣意)

거버넌스는 공적인 관심사와 관련된 권력행사의 기제이다. 구체적으로 세 차원으로 구분된다: polity, politics, policy. 권력행사에 있어서 정부, 비정부 조직 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규칙 (polity),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 (politics), 권력행사 수단 (policy).

[몇 년 전에 썼는데... 글쎄... 요즘 같아선 "거버넌스 = 공적/공공 조정" (public coordination) 정도로 간략하게 정의하면 충분할 것 같다.]

과학과 기술: 따로 또 같이

이제 곧 출범할 이명박 정부의 행정부 조직개편을 두고 말이 많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조직개편은 의례히 하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유난히 더 시끄러운 이유는 그 개편 폭이 전례없이 넓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내 눈길을 끄는 내용 중 하나는 과학기술부(과기부)의 운명이다. 어떤 식으로든 축소될 것으로 보이는 과기부는 노무현 정권에서 부총리급으로 격상되었던 호시절을 그리워해야 할 신세가 되었다. 과기부 개편에 대한 대표적인 논점중 하나가 '과학'과 '기술'을 붙이느냐 떼느냐다. 처음 인수위에서 내세웠던 안은 과학, 기술을 분리해서, 과학 쪽은 축소된 교육부와 합쳐서 인재과학부로 만들고, 기술 쪽은 산업자원부가 흡수하여 지식경제부의 일부로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과학'과 '기술'이 너무 '친한' 것, 특히 기술에 종속되다시피한 과학의 신세를 늘 가련히 여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과학과 기술을 분리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좋게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후 논의되는 사정을 보니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과학의 미래를 심히 염려해야 할 상황에 가까운 것 같다. 과학이 포함된다고 하지만 교육부도 기능도 대폭 축소된다고 하니 그 둘의 연합체인 인재과학부의 서열이 '실용주의'의 모터로 떠오르는 지식경제부에 밀려도 한참 밀릴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럴 경우 이미 강고하게 자리잡은 기술 중심 패러다임이 오히려 강화되고, 김대중 정부 이후에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은 기초과학의 기반이 상실되지는 않을까 염려된다. 이명박 정부는 기초학문의 산실인 대학을 자율화하려고 한다는데 그 명목으로 기초학문에 대한 지원을 대폭 줄일 작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기초연구에 대한 정당성은 늘 기술과의 연관성 속에서 주어졌는데 (한국식 과학의 사회적 계약), 이제 산업화 가능한 기술을 더 강조하다보면 그렇지 않아도 찬밥인 기초과학은 이제 차다 못해 얼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지... 일부 학자들 중 한국에서 유난히 '과학기술'이라는 서구에서는 쓰지 않는 새로운 단어를 쓴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과학과 기술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나도 과학, 기술을 분리해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예를 들어 황우석 사태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전개된 원인 중 하나가 한국에서 과학의 과학성에 대한 사회적 성찰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을 찬 방으로 내쫓고, 기술을 더 우대하는 식으로 과학, 기술을 나눈다면, 그런 경우 과학에 대한 성찰력 부족을 만회할 기회는 오히려 더 줄어드는 상황이 만들어 질 것이다. 대개 과학자들, 과학자 단체에서는 "과학과 기술은 함께 가야한다"는 논리로 과기부가 분리되는 것에 반대하는 모양인데, 그런 논리로 과학자의 입장을 변호할 수밖에 없는 한국 과학자들의 신세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과학의 과학성, 기술의 기술성, 이 둘의 경계가 어디서 나뉘는지에 대한 성찰의 부족은 '우리 민족의 밝은 미래'를 위해 해결되어야 할 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왠지 이명박 정부에서는 오히려 그 부족함의 정도가 더 깊어질 것 같다. (한 가지: '과학기술'이 우리만 쓰는 표현이라는 데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과학과 기술'을 편의상 '과' 없이 붙여 쓰는 것 아닌가? 영어 표현으로도 "science and technology" (약자로 "S & T")는 자주 등장한다. 독일어 "Wissenschaft und Technologie" (W &T) 도 마찬가지고. 다만 '과학기술'이라고 늘 부르다보면 과학, 기술을 굳이 나누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줄어드는 것은 분명한 일이겠지만. 혹시 '과학기술'이라는 독립적인 개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까?)

최근의 소식에 따르면 교육과학기술부로 가기로 한 모양이다. 언제 또 바뀔 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잘 된 일인가? (2월 20일, 양당 합의문 중: "교육과학부는 교육과학기술부로 한다." )

p.s.) 과학, 기술을 섞어 쓰는 예를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최근 우연히 발견한 사례가 있어서 덧붙인다.

사례 1) 신문 기사
"순수성과 객관성-. 과학기술.과학자는 독점적 지위를 늘 인정받을 수 있을까. 과학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연구자의 순수한 열정이자, 동시에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18세기까지 서양에서 과학기술의 후원자는 계몽군주. 귀족이었다. 과학자는 궁궐.살롱을 드나들며 후원자와 교감해야 했다. 그 시절에는 연구자의 열정이 좀 더 통했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과학기술이 돈이요, 무기'라는 의식이 퍼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후원자의 얼굴은 군주, 귀족에서 국가, 기업으로 바뀌었다. 특히 나라의 뭉칫돈은 그 사회 과학기술의 방향.속도.내용을 정한다. 사회적 합의가 없으면 대규모 과학기술 연구 사업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강조는 인용자)

이 짧은 인용문만 봐도 "정신사납다", 어지럽다.

사례 2) <조선의 프로페셔널>(2007, 안대희 지음) 중.
18세기 인물인 최천약을 '과학기술자'로 표현하고 있다. 과학기술자란 '과학자'와 '기술자'를 총칭하는 표현아닌가? 그 시대 조선에 B. Latour가 사용한 개념'technoscience' 의 담지자라고 할 - Latour 스스로 이런 표현을 쓴 것 같진 않지만 - 'technoscientist'의 원형 모델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책을 읽지 않아서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굳이 현대적 개념을 가져다 쓰고 싶으면 어색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기술자'가 더 적합한 표현이지 않을까? 예를 들어, 우리가 다빈치를 과학기술자라고 부르지는 않지 않은가?

과학, 기술의 개념사에 대해서 짧게라도 써야 하겠다.

식객 (2007) 전윤수

주연: 김강우, 임원희

만화나 소설을 기초로 해서 만든 영화는 최소한의 스토리라인은 확보하고 있다 (우리 심형래씨에게 꼭 이 얘기를 해 주고 싶다. 참고하시라고...). 그 덕에 '식객'을 '싸움'보다는 윗길로 쳐줄 수 있겠다 ('싸움'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너무 험담하는 건 아닌지,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한다. 쏘리!). 허나 너무 착하기만한, 그리고 가난하지만 '자알' 생긴 '우리 편'과 심술과 탐욕이 얼굴에 덕지 덕지 묻어 있는 '나쁜 편'. 이 둘이 싸운다. 이 싸움의 최종 승자는 누구? (참고: 우리 편은 그 때까지 계속 지고 있었다.) 긴장되시는가? 그렇담 당신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갖추었다. 즐감!

허영만이라는 빼어난 만화가가 발굴해 놓은 재료가 워낙 독특해서 그나마 끝까지 볼 수 있었음. 한 가지, 김강우라는 청년, 반듯하게 생긴대다 목소리 톤 좋고, 발음도 분명하다. 연극무대에서 연기수업 받았으리라. 무게감도 적당히 있긴 한대, 강한 '바른생활사나이' 이미지를 떨쳐 낼 수 있을지... 지켜볼 것.

싸움 (2007) 한지승

주연: 설경구, 김태희.

이창동 영화가 왜 높게 평가받고 그리고 전도연이 연기 잘한다는 소리를 왜 듣는지 새삼 느낌. 첫 장면에서 김태희가 눈물 흘리며 버럭 버럭 소리는 지르는데, 절절함은 느껴지지 않고,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듬. 그 장면에서 이미 꼼꼼히 볼 영화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됨. -> 버튼 몇 번 누르지 않아서 느낌은 확신이 되었음. 성큼 성큼 영화를 건너 뛰다 걸리는 장면마다 어색한 연기가 눈에 들어옴. 설경구야 겨우 이름값 정도 하는 것 같은데... 그 양반은 이런 평이한 역보다 조금 더 '극적인' 배역이 어울리는 것 같아 ('오아시스'에서 그런 역... ^^). 모두 합쳐 5분도 보지 않았으니까 줄거리를 모르는 건 당연. 알고 싶지도 않음. 도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듣자하니 흥행에서도 별 재미를 못 본 것 같은데, 어짜피 큰 돈을 쓴 것 같지도 않으니 큰 손해는 아니었으리라. '디워'에 열광하던 관객들이 어쩌다 이런 영화는 골라낼 줄 알았을까?

도킨스가 독일에서도 이렇게 인기일 줄...

"클린턴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 ~ ) 는 케냐 나이로비태생의 영국인 동물학자이다. 그는 현재 옥스포드 대학교의 교수이며, 생존하는 가장 저명한 생물학자중의 한 명이다." (한글 위키피디아에서)

지난 1월 30일 빌레펠트 대학 SMD (기독학생회) 주최 강연회가 있었다. 강사는 마부르크에 있는 "신앙과 학문 연구소" (Institut fuer Glaube und Wissenschaft) 위르겐 스피스 박사 (Juergen Spiess)였고, 강연 제목은 "과학이 신을 장례지냈는가? 도킨스의 신반대 논증". 이런 강연을 들으러 몇 명이나 올까 생각하며 느즈막히 H1 에 도착. 들어설 때 훅 느껴지는 열기가 예사롭지 않더니 ... 왠걸 ... 그 큰 강당이 만원인 것이다. (H1 는 Audi Max 를 제외하고 가장 큰 강당이다.). 심지어 서 있는 사람, 통로에 앉아 있는 사람들까지... 경악... 어떻게 이런 일이! 신과 과학에 대한 이야기라면 일부 먹물 기독교인들이나 관심을 보일 법한 주제 아닌가? 계몽적, 합리적, 이성적 사고가 지구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더 내면화된 독일에서, 기독학생회가 주최한 강연에 강사는 신앙과 학문 연구소 소장이라니, 이 얼마나 "더 이상 uncool 하기도 힘든" 그런 시츄에이션 아닌가? 허나 이후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 날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도킨스 때문에 왔던 것 같다. 도킨스에 대한 인기가 독일에서 그 정도인줄 미처 몰랐었는데, 2006년 저작 "The God Delusion" (독어제목: Der Gotteswahn/ 우리말 제목: 만들어진 신)이 독일에서도 비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2위까지 올랐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꽤 많이 읽히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도킨스에 대한 그 '지구적' (약각 오버하자면) 열광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날 스피스는 도킨스 주장을 네 가지로 테제로 요약하고, 각 테제에 대한 나름의 반론을 다른 자연과학자들의 견해를 기초로 해서 제시하였다 (스피스 박사의 전공은 고대사).
도킨스의 기본 입장은 "나는 무신론자이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스피스 박사가 정리한 도킨스 책의 네 가지 테제는 (사실은 도킨스가 미국 어느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스스로 정리한 방식에서 빌린 것)
1. 과학으로 종교는 증명될 수 없다. 종교는 믿음일 뿐 (과학은 증명될 수 있는 지식)
2. 세상은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의 결과이다. (도킨스 스스로 가장 중요한 테제라고 강조)
3. 종교가 없다면 훨씬 더 나은 세상이 될 것 (종교는 전쟁, 갈등의 원인)
4. 복음서 기사는 허구다.

강연은 내게 그리 신선한 지식을 전달해 주지는 못했다. 사실 도킨스의 주장이나 스피스의 반론이나 모두 오래 묵은 주장의 리바이벌에 가까운 것이다. 내게는 오히려 그 날 도킨스에 대한 독일인들의 그 관심을 확인했던 것이 훨씬 더 재미있는 일이었다. 도킨스의 인기, 성공의 비밀은? 도킨스의 네임 밸류 때문? 자연과학으로 신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커진 걸까? 그렇게 합리적인 척하는 독일인들에게 오히려 자연과학에 기초한 무신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드물었고, 모처럼 도킨스가 가려운 곳을 시원시원하게 긁어주었던 것일까? 독일에선 기독교가 국교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니, 아무리 합리적, 이성적이고 싶어도 차마 신을 장례까지 지낼 수는 없어서 인내하고 있었던 것일까?

버트런드 러셀의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가 (1927에 행한 강연, 1957년 책으로 나온 후 유명해짐) 출간된 후 반응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저명한 학자가 용기있게 (?) 무신론을 주장할 때, 그것에 편승해 자신의 평소 신념을 부담없이 드러내는 것?! 러셀과 도킨스가 다른 점이 있다면, 도킨스는 그의 비판 대상을 시의적절하게(!) 기독교 뿐만 아니라 유일신을 믿는 다른 종교로 - 예를 들어 이슬람 - 확장시켰다는 사실.

p.s.) 조금 더 찾아보니 그 동안 독일에서 꽤 심각한 논의가 있었다. 그날 학생들이 그렇게 많이 모인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 (교수신문 2007.10.8. 참조.)

"'슈피겔'은 지난 5월 '모든 게 신 탓이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십자군 전쟁' 이란 제목으로 각국의 무신론적 종교 비판을 점검하는 13페이지 가량의 글을 실은 특집호를 발간했다."

"종교를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창조론과 진화론 간의 해묵은 싸움이 아니라 종교의 외피로 은폐된 정치 투쟁이자 문화 논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종교에 대한 문제제기는 자본이 전지구화된 현 세계 질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위기에 대한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