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거버넌스 논의와 루만은 이중적 관계에 있다. 한편 루만은 거버넌스 논의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거버넌스 논의의 기초에는 국가중심성, 위계적 조정 능력에 대한 회의가 깔려있는데, 각 사회 체계의 자율성에 주목하는 루만의 체계이론은 오래 전부터 - 남들이 국가를 강조할 때 - 바로 그 주장을 해 왔던 것이다. 위계적 혹은 다른 체계에 대한 개입적 조정이란 없다, 정치는 자기의 문제를 조정할 뿐. 모든 체계는 자기조정적.
다른 한 편 체계이론 입장에서는 최근 거버넌스 논의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수평적 조정으로 조정양식으로 변화함을 과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가? 위계적 거버넌스 (국가의 기능상 어쨌든 위계적이긴 하다. )가 그리 쉽게 다른 양식으로 대체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국가를 강조하는 경향도 있는데, 그런 입장을 논의를 거버넌스 이전으로 돌리는 것 같다.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제한됨.) 거버넌스가 새롭다는 것은 주로 네트워크거버넌스를 지칭하는데, 그것은 국가 차원이 아닌 global governance나 EU 같은 초국가 기구나, 혹은 중앙(연방)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에 긴요한 개념이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그리 설득력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럼 국가단위에서는 어떤 변화도 찾아볼 수 없단 말인가? 체계이론적 구도 안에서 분명히 목도되는 변화를 이론적 일관성을 잃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 경우 politics와 polity를 구분하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통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네트워크형 거버넌스, 참여 거버넌스는 정치과정/정책결정과정에서 - 즉, politics - 더 자주 관찰된다 (전문가자문, 시민참여, 각종 자문위원회는 대개 이런 차원에서. 체계이론에서도 그런 접근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정치체계 내의 변화니까). 그리고 국가의 정책이 위계적일지라도 그것의 집행방식은 네트워크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계적 거버넌스의 일부 혹은 위계적 거버넌스의 그림자 내에서 변화일 뿐이고, 체계이론적 관점에서는 그런 위계적 거버넌스도 실제로는 자기거버넌스로 해석되어야한다. 실제로 많은 연구가 실제 network 형 거버넌스는 오히려 찾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polity 차원에서 거버넌스는 위계적이거나 (정치), 자기조정적인 것이 여전히 주류적 양태인 것이다. 루만의 이론은 이런 경험연구의 결론과 매우 친화적이다. 정리하면 루만과 체계이론적 입장은 거버넌스 이론의 태동에 영감을 주었지만, 변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최근 거버넌스 입장에 대해서는 오히려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내 이론적 기여는 politics와 polity 의 구분을 도입해서 변화와 경계유지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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