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일하지 않는 하나님
험악한 시절에 알려졌던 '혀 짤린 하나님'이라는 섬뜩한 제목을 가진 노래가 있었다 (80년대 초 김흥겸이라는 신학생이 노래극을 위해 만듦. 여기 참조) 사회의 부조리와 죄악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 넋두리였다. 꼭 그 정도로 절박한 상황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세상이 이 모양인가?' '왜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왜 응답하시지 않는가' 정도의 질문은 자주 하고 또 자주 듣는다. 그런 질문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침묵은 곧 하나님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어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보여주고, 확인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에게 말을 건넬 주체, 하나님이 아애 존재하지 않는, 그런 ''절대無'의 상태의 귀결인가? 아니면 '空'의 상태, 즉,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존재의 하나의 표현인 그런 상태의 결과인가? 그 누구도 인간의 언어로 이런 문제에 대해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다. 그건 감성, 지성을 동원해서 이루어지는 언어적 사고의 차원이 아니라 영성의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굳이 하나의 가능성을 말로 표현해 보자면, 어쩌면 하나님은 침묵으로 말씀하시고, 일하지 않음으로 일하시는 지도 모른다. 비유컨대, 부모가 세세히 간섭하면서 자식을 키울 수도 있지만 그냥 내 버려둘 수도 있는 것처럼... 일반적으로는 자녀가 어릴수록 부모의 개입 여지가 커지지만, 어느 정도 큰 자식들에 대해선 방임형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교육 방식일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고, 개입하신 사례 목록을 만드는 일도 아주 불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판단 기준은 대개 인간 편에서 세운 것 아닌가? 하나님은 어쩌면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실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비가 아닌가 생각한다. 환자가 질병에서 놓임받는 그런 신비와는 다른 차원의...
깊이 공감합니다.
답글삭제아이쿠. 거의 이년 전에 쓴 글까지 읽으셨군요. 좀 아는 척 해 보았지만 어쩌면 신앙에 대해선 죽을 때까지 알겠다, 모르겠다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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