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大河武俠小說 少時悟路志 槪要

아래 글에서 언급한 인터넷 사이트 주인공이 Pepe인데, 실명은 모르겠으나 꽤 알려져 있는 사람인듯. "大河武俠小說 少時悟路志 槪要"란 꽤 오래 전에 어디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글도 이 양반 '작품'인 모양이다. 흥미롭다.
들어가는 부분만 인용해 놓는다. "먼 옛날 중국 동부 독일사(獨一寺)의 청년 승려 갈막수(渴莫水)는 비록 생활이 다소 사치스럽고 문란하여 돈 쓰기를 물 쓰듯이 하였으나 무술수련에 나름대로 몰두하고 있었다.." 갈막수(渴莫水)라... ㅎㅎ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아서 논평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시도다.

ps) 예전에 루만을 중국어로 어떻게 표현하나 찾아 본 적이 있는데... 확인해보니 "尼克拉斯 卢曼" 이다. 어떻게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ps2) 'pepe'의 실명, 실체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랭카스터 대학 박사, 역서 「정체성 싸움」 등...).

만들어진... 상상된... 구성된... ' - 발견' '-탄생'

"만들어진 우울증" (크리스토퍼 레인, 한겨레출판)이란 책이 나왔나 보다. '만들어진...' 은 한국에서 유행하는 표현인 모양이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원제는 뉘앙스가 다르다. "Shyness: How Normal Behavior Became a Sickness". 지난 해엔간 출간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원제도 'God Delusion'이다. '만들어진...' 외에 수 년전부터 비슷한 느낌을 주는 표현이 책제목으로 자주 등장한다. 민족주의 연구 쪽에서도,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원제가 'Imagined Communities',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은 "The Invention of Tradition".

철학, 사회이론 쪽에서는 '사회적, 문화적 구성..'이라는 표현이 수십년 동안 지배적이다. 몇 전 년에 출간된 "The social construction of disease"라는 광우병 연구서 얘기를 들으면서, 흠, 이젠 좀 진부한 표현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을 정도로. "Ian Hacking은 The Social Construction of What?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이라는 책에서 서구학계에서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이라는 말이 남용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정확히 무엇이 구성되었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 Hacking은 또한 건축적 메타포인 사회적 구성construction이라는 말이 얼마나 마구 쓰이는지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당연한 대상에 사회적이라는 말을 쓴다던가, 아니면 구성되었다는 말을 쓰기 힘들 정도의 분석을 내놓으면서 건축적 메타포인 사회적 구성이라는 말을 끌어다 쓰는 것을 지적한다. (...) Hacking과 같은 학자는 '사회적 구성'이라는 말이 남용된다고 개탄을 하는데, 한국에는 일견 그런 거북하고 어려운 말을 사용한 책 제목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대신 재미있게도 한국에서는 최근에 '탄생'이라는 메타포가 많이 쓰이고 있다.."

방금 이 구절을 인용한 인터넷 사이트는 고맙게도 '-의 탄생'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책 이름을 모아 놓았다. 그 양반 추적에 따르면 국내서 중에서는 이진경의 <근대적 시. 공간의 탄생> (1997)이 선구적인 모양이다. 올 해 나온 '번역의 탄생'(이희재)가 있고. 서구학자 중에서는 푸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예컨대 '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 (푸코) [원제는 The Birth of the Clinic: An Archaeology of Medical Perception/ Naissance de la clinique. Une archéologie du regard médical] 혹음 '임상의학의 탄생'. 이진경과 푸코는 '친하니까' 푸코 영향이었을 거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구성주의, 푸코류 포스트모던 대략 그런 전통에서 쓰기 시작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윗 사이트에서는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한 '...탄생'을 알려준다. 바로 니체의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edie)! 포스트모던 사상의 선구자로 니체를 꼽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우연만은 아닐 지도...
'-탄생'의 기원을 아날학파에게서 찾는 이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탄생'의 개념이야말로 아날 학파와 심성사의 방법론을 대표하는 표제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푸코가 '탄생'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전면에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날 학파의 '배경'을 성공적으로 전유하고 매력적으로 자기화했기 때문이었다. 사건으로서의 역사, 제도로서의 역사가 아닌 하나의 개념과 그에 따르는 심성으로서의 역사, '탄생'의 개념은 바로 이러한 역사학을 이해하는 하나의 훌륭한 키워드인 것. '
그 밖에 '탄생'을 달고 있는 책들로... '연옥의 탄생'(2000), '아동의 탄생' (2003),'개인의 탄생'(2006),원제도 'Die Entdeckung des Individuums'1997), '생각의 탄생' (2007)(원제는 'Spark of Genius' 1999), '젊음의 탄생' (이어령 2009).
'발견'은 '낭독의 발견' (KBS 1TV).
그 기원이 아날학파든, 푸코든, 아니면 니체든, 이 같은 '구성주의'적 제목달기가 한국에 유행하고 있다는 건 한국 지성사의 큰 변화를 보여주는 증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변화의 내용과 원인이 과연 무엇일지, 그것을 알아내는 건 분명히 재미있는 지식사회학적 과제다. [한 가지 추측은 이런 변화가 '한국 근대성/현대성의 특성, 기원 등에 대한 관심 증가와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것. 내가 요즘 접할 수 있는 종이신문인 '조선일보'에서도 '100년전 우리는'이란 제목의 연재물에서 20세기초 한반도 풍경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한 가지 추측은 한국사회 매스미디어, 지성계, 혹은 공공 커뮤니케이션을 지배하는 인식론이 바뀌고 있다는 것. 리얼리즘에서 구성주의로...]

조금 다른 맥락에서... 최근 한국 민족주의 연구를 추적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인식 역시 놀라울 정도로 유연해졌음을 발견하고 있다. 딛고 서 있는 토대가 여전히 취약해서인지 '새 것'을 선호하고 동시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참으로 역동적이고 용감한 (... )다 [이 괄호 안에 어떤 표현을 넣을 지 사회학도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 민족? 국민? 어떤 집단에 이름을 붙이음로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 쉽지 않다. 아는 것이 병...].

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내용에 대한 합의/ 방법, 수단에 대한 합의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서 발견한 광고 하나가 내 왼쪽 뇌 활동을 심히 활발하게 하고 그 생각을 드러내야겠다는 욕망까지 자극하였다. 다름 아닌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단 '조직'이낸 성명선데 제목은... "정부는 국무총리 소속 '민보상위'(약칭)의 반헌법적 반국가적 활동을 즉각 중지시키고, 해체하라" 김대중 정부에서 만들어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대한 얘기다. 기이한 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온순한 조직도 없애지 못해서 안달이던 이 정부가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이런 '불순한' 조직을 남겨두었다니... 우리 '자유민주주의' 수호신을 자처하시는 영감님들이 분개하시는 것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내 이 자리를 빌어서 강력히 요청한다. 우파 - 대파, 쪽파, 양파도 아닌 '우파' 혹은 '극우파' - 어르신들께서 제 명을 누리실 수 있도록 2mb는 하루속히 '민보상위'를 없애라. 그 뭐 어려운 일이라고 뭉기적 거리고 있는가. 그러니 대중들 눈치보는 '파퓰리스트'라고 욕을 먹지. 서울시장 시절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행정수도 이전을 막고 싶다는 결기를 보이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결연함을 우리 어르신들이 기대하는 것 아닌가.

한국에선 흔히들 좌우갈등이 심하다고 얘기한다. 아니 좌우는 여전히 좀 걸끄러운 표현이라 - 좌빨, 극우보수, 이런 표현들을 대개 싸움을 걸고 싶을 때 쓴다 - 대개는 진보, 보수의 갈등 정도로 얘기된다. 전제군주나 파시스트 치하가 아닌 다음에야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가 공존하는 건 오리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박정희 시대의 그 '총화단결' '전국민 동원'에 대한 향수를 만들어 내면서까지 서로 다른 생각, 가치의 공존을 불편해 한다. 정치인들이 하나 같이 '국민의 뜻' 운운하는 게 그래서 난 몹시도 못 마땅하다. 아니 '국민'이라는 이름을 여기 저기 가져다 붙이는 것 참 거슬린다. 누가 감히 '국민'을 함부로 얘기하는가? 언제 내게 물어 봤냐고... '국민 배우', '국민 여동생', '국민 훈남'... 그런 이름을 붙이는 집단의식은 '인민 배우' '인민 과학자' '인민 영웅' 만들어 내던 그 전체주의와 근본 다를 게 없다. 물론 '국민..'은 그저 웃자는 얘기라고,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느냐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발화행위는 그 자체로 현실이고 실천이다 (cf. 영화 'Die Welle'). 국민과학자가되어 버린 황모씨를 모르시오?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건 민주주의 작동의 기본원리이고, 그런 '기본'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바로 복잡한 현대 사회의 역량인 것이다. 하버마스도 바로 그 얘길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담론윤리'운운 하면서... 합의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이전에 합의에 대해서 얘기하는 태도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하는 거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가 학문커뮤니케이션이다. 아주 이상화된 형태로 이해해서... 학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 장치는 현상에 대한 설명, 이론에 논쟁, 토론에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학문적 진술이 공유하고 있는 수단, 실험장치, 방법론에 대한 합의인 것이다.
정치는 대표적으로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고 와서 대표적으로 싸우기를 기대하는 영역이다. 법은 정치나 기타 사회 영역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려주도록 기대되는 영역이다. 이는 '합의에 이르기 힘든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여러 장치 중 하나이다.
우리의 '헌재'가 어제 보여준 모습은 찌질하기 그지없다. 국회에서 내린 결정에 문제가 많아서 '좀 대신 판단해 주십시오'하고 가져갔더니, 하시는 말씀...'음. 문제가 많긴 해. 하지만 니들이 알아서 할 문제야'. 밥은 드시고 다니시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삼권분립','법치', '공권력 보호',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대개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듣보잡')나 '자유총연맹'(<-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의 투사가 되시더만...

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헌법재판소... 뉘시더라?

지폐 위조 인정하나 화폐가치 있다는 꼴”
미디어법 헌재결정 뒤 야당·언론노조 관계자 기자회견에서 ‘조롱’ 쏟아져
뭐야, 무슨 말이야?…법 처리 과정 위법성 확인했는데 결과가 왜 유효?”


김어준씨가 노무현의 죽음 이후 '어느 신문이 박정희의 죽음을 서거라 하고 노무현의 죽음을 사거라 했다'는 '리얼 코미디'를 전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푸하하. 눈물을 단 채, 웃었다. 그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졸렬함이라니. 그 옹졸함을 그렇게 자백하는 꼴이 가소로워 한참이나 웃었다. (...)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거리낌 없이 비웃을 수 있게 해줘서. 한참을 웃고서야 내가 지금 그 수준의 인간들이 주인 행세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뼛속 깊이 실감났다. 너무 후지다. 너무 후져 내가 이 시대에 속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얘기 그대로를 그분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분노의 대상이 될 가치조차 없는 '분'들이다. 그냥 창피할 뿐이다. 2009년 10월,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내가 그들과 같은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 헌법재판소? 도대체 뭐하는 데지?

ps) 패러디... 이런 일엔 정색하고 혈압을 높이기 보단,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오프사이드는 맞지만 골은 인정된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회사자금을 횡령했지만 돈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훔친 물건이지만 소유권은 인정된다'
'금지약물을 복용한 것은 맞지만 메달을 박탈하지는 않는다'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 것은 잘못이지만 점수는 인정된다'
'무단횡단은 잘못이지만 이미 길을 건넜으니 괜찮다'
'주가조작은 불법이지만 시세차익은 유효하다'
'위조지폐임이 분명하나 화폐로서의 효력은 없다고 할 수 없다' (노회찬)
'입대를 기피하는 과정에 위법 행위는 있었지만, 군 면제는 유효하다'
'대리시험에 커닝까지 있었으나 합격자 발표는 유효하다' (노회찬)
'똥이 묻은 것은 사실이지만, 빤스는 유효하므로 벗을 수 없다'

ps) 이럴 땐 헌재 스스로 과거에 내뱉은 말을 가지고 이들에게 돌려주는 것도 적절한 대응이다. 서강대 임지봉 교수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이 그런 점을 적절하게 잘 지적하고 있어서 읽을만하다 (여기).

익숙....

한국에 살려면 익숙해져야 할 일들이 있다. 먼저 자동차와 친해져야 한다. 골목길에서 사람과 차는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운' 사이가 된다. 인간/비인간(자동차)을 구분하는 낡은 사고방식은 버려라. 자동차를 내 옆을 지나가는 동료 보행자 정도로 생각할 것. Latour가 보고선 씩 웃을 상황이다.
그리고 방금 경험했지만... 길거리에서 서 있는 아주머니들, 누군가 지나가면 시선을 주었다가 그 움직임에 맞추어 시선을 옮긴다. 때로는 상하로도 움직이면서... 눈은 게슴츠레하게 떠야 그 상황에 어울린다. 팔짱까지 끼면 더 좋고. 그 시선의 의미는... '내 영역에서 얼쩡거리는 저 족속의 정체는 무엇인고...' 정도로 해석된다. 위아래 좌우로 훓어내리는 탐색의 시선... 그들에게 익숙한 카데고리로 떠내기 힘든 나같은 족속에 대한 관심이 지대함을 드러내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뻔뻔함... 사람에 대한 Respekt 표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는듯한 그런 시선. 익숙해져야 한다.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loser 문학

영화 속 한 장면이었는데 영화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정말 영화에서 본 장면인지도 사실 불확실하다). 전후 문맥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아들이 아버지에게 - 어쩌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 빈곤한 기억력 하곤... - "You're a loser!"라고 외치는 그런...

'성공' - 대개 외부로 드러나는 척도를 기준으로 평가되는 - 을 삶의 지상목표로 삼는 자본주의적 (혹은 근대적) 질서 속에서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로 평가되는 일은 치명적이다. 우리 근대인은 어쩌면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 실패자, 낙오자로 평가받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는지도... 그러니 'loser'얘긴 많은 이들에겐 사실 실존적 문제다. 허나 '루저 문화'라고 하면 갑자기 다른 것들이 연상된다. 어찌 보면 우린 장기하 같은 'loser'를 꿈꾸는 지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더 잘 나갈 수도 있는... 운동권이라고 다 같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로쟈'에게서 확인한 얘기에 따르면 이외수를 '루저 문학'으로 설정하는 모양이다. 이외수 정도로 '성공'을 해야 그런 '루저 문학'이란 '라떼루'를 붙여주지, 정말로, 실존적으로 '루저'였다면 어땠을까? 루저 문학, 루저 문화는 '루저'를 벗어나고 싶은 이들이 잠시 위로를 얻고 가는 휴식처이다. 그러니 장기하, 이외수 정도로 '성공'해야 - 아니 '출신성분'상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 그런 루저 문화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것. (로쟈 포스팅은 여기)

로쟈가 인용한 부분을 다시 인용해 둔다:

'한국문학의 다이어트-이외수 소설의 ‘대중성’에 대한 단상'이란 글에서 조영일 씨가 더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메인컬처로서의 한국문학은 90년대에 소프트-서브컬처 문학인 하루키의 영향과 더불어 사회와 개인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고(즉 내면으로의 침잠 또는 과거로의 회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그와 같이 개인이 사회를 초월함으로써(즉 사회를 왜소화시킴으로써) 하드-서브컬처 문학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해, 오늘날의 한국소설공간은 루저loser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근대문학을 가능하게 한 '전망(미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자, 소모적인 싸구려문화 속에서밖에 자신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외수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일찍이 ‘루저소설’을 써온 소설가로서일 것이다."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문화 읽기: 루저(loser), 싼티, 굴욕, 찌질, 망가짐...

최근 텔레비전 문화 흐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하던 차에 괜찮을 글을 한 편 만났다. 하재근의... (출처).

"스튜디오 안에서 항상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있는 신동엽은 과거의 사랑을 잃어가고 있다. 그의 재능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여전히 천재적 예능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중은 비록 어눌하더라도 루저, 싼티, 굴욕 코드에서 사람냄새를 맡으며 위안을 얻고 있다."

그런 사례로 반지하방에서 마시는 싸구려 커피를 노래하는 장기하와 TV 프로그램으로는 '1박 2일', '무한도전'등을 들고 있다. "<무한도전>도 루저와 싼티의 집합체다. 정준하, 정형돈, 노홍철 등이 ‘대한민국 평균이하’라고 할 때 시청자는 그것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정말이라고 느낀다." 이른 바 '싼티'전략... '사람냄새'를 내기 위해서 예전 같으면 숨기는 게 미덕이었을 아픈 과거를 기꺼이 '유머'의 소재로 제공한다 (이혼, 도박...). 또 돈을 벌어야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모습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뜨려면 망가져야 한다는 얘기도 자주 등장한다. 고현정이 그런 사례였고... '근엄하던' 남자 배우들도 망가져야 겨우 버텨나지 않는가. 노주현, 야동 순재 등 [예전 '최불암 씨리즈' 유행의 배경에도 이런 정서가 있었을 것이다". '무릎팍도사'는 바로 '스타' 망가뜨리기 그 자체를 컨셒으로 삼은 거고... 하재근 왈, 그 배경엔 이른 바 "2000년대 정서"가 있다는데...

"한국사회에서 2000년대를 표상하는 단어는 ‘양극화-민생파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생파탄이 20대 젊은이들에게 투영된 단어가 ‘88만원세대’다. 이제 풍요로움은 없다."

반면 '신비주의'를 지키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 그런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심리는 '상수'이다시피 하니까 (장동건, 이현우...). 종합하자면 "막장적 신데렐라 코미디 판타지의 허황된 밝음과 루저, 싼티, 굴욕의 ‘찌질함’이 공존"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과 같은 출구 없는 불안, 양극화, 빈곤, 패배감 등이 이어지는 한 이 기이한 풍경은 계속될 것으로 예측된다. 전자는 대중에게 환상을 안겨주고, 후자는 위안과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뭐, 아주 기발한 발상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었다. 이런 경향은 학문에 대해서도 기대되는 바가 아닌가? 황우석씨는 '소탈함''소박함'을 매개로 '민족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 아닌가? 요즘'대중'은 - 이게 도대체 누구인가마는... - 쉬운 얘기를 어렵게 하거나 스스로 잘 소화하지도 못한 얘기로 버벅거리는 이른 바 '전문가''학자''교수''지식인'들에겐 심지어 '분노' 비슷한 것까지 느끼는 것 같다.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권위주의'를 배척하는 건 좋은데 '필요한 권위'마저 서지 않는 건 심각한 문제다.황우석 논쟁, 디워 논쟁에서 보여 주듯이...
하지만 그렇다고 좀 고급스런 지식에 대한 동경이 없진 않은데 - 신데렐라 코미디와 '싼티'의 공존처럼 - 대신 소화하기 쉽도록 오물 오물 씹어서 입에 넣어주기를 기대한다. 그걸 잘 하는 대중적 지식인에 대한 열광 또한 대단한다. 대표적으로 김용옥, 진중권... 물론 이들은 예능인들과는 다르게 대중과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채널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예능인-지식인

'예능'은 매우 독특한 카테고리다. 텔레비전 방송국 부서로 '예능국'은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부서로는 '드라마국', '보도(제작)국', '편성국', '시사교양국' 등). 하지만 그 예능국은 드라마, 뉴스를 제외한 다른 방송 프로그램, 특히 개그, 코미디, 가요 등 각종 '쇼'에 대한 것이었다. '예능'이 하나의 독립된 방송 장르처럼 사용된 역사는 - 내가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 그리 길지 않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주말 버라이어티쇼'라는 이름으로 광고를 했었는데, 그 프로그램이 아마 시초가 아닐까? '버라이어티', 그러니까 여러 장르가 섞였다는... 언제부터인지 드라마도, 개그도 아니면서 여러 분야 출신 연예인들이 나와서 '토크'를 하거나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방송거리'을 만들어 내는 - constructed reality - 그런 프로그램에 '예능'이란 표현을 붙이게 되었다. 현재 한국 텔레비전 방송은 '드라마'와 '예능'이 양분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학계에서도 학제간 연구, 학문간 융합, 통섭을 강조하거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서 '혼성모방' 어쩌고 하더니 텔레비젼에서도 장르 간 혼성이 대세인 모양이다. 사실 그런 예능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만드는 건 '입심'이다. 유머, 재치의 향연장인데 정말이지 그곳에서 살아 남는 사람들의 '예능 본능' 혹은 내공에 놀랄 때가 있다 (거기에다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자막, CG등을 덧붙이는 '작가', PD들의 내공 또한 대단하다. 특히,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프로그램인 '라디오스타'의... 작가, PD들이 화면 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자주 관찰된다). 한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남자건 여자건 많은 말 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는 분위기였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어쨌든 입담 좋은 사람들은 '고향' 장르에서는 시원찮아도 예능에서 탁월함을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출신 분야에서 시원찮다는 것 자체가 입담 소재가 된다. 그래서 성공한 대표적 사례가 '컨츄리 꼬꼬'의 멤버 탁재훈, 신정환 (연예인들의 '어두운' 과거도 소재거리다. 연예인 부부들끼리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것도... 그런 풍토를 두고 너무 '험악해졌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인데, 연예인들이 사적, 공적 영역을 넘나드는 것, 그건 시대흐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른 바 지식인들 중에서도 '예능'에 진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이미 나름 그건 계보가 있다. 왜 TV에 단골로 출연하던 박사님들, 교수님들 있잖은가. 조경철 박사 (천문학), 김정흠 교수 (물리학), 조문부 (새 박사), 하재봉 (영화, 연예?)... 허나 그들은 그들의 전문분야를 끝까지 안고 간다는 점에서 '예능인'이라고 얘기하기 힘들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 쪽에 가장 가까이 간 인물로 '진중권' '김용옥'씨 정도를 꼽을 수 있을텐데... 아무리 그 진,김 선생이라고 하더라도 - 예를 들어 - '라디오스타'에 한 자리 차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식인들은 그 지식인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예능'에 끼워주진 않는다 (왕년 씨름선수였던 김만기 교수가 보이기는 하고 교수임이 대화 소재로 사용되기도 하나 씨름선수로서 정체성이 더 강한 경우다).
여하튼... 진중권씨가 어떤 강연에서 자신을 대중의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갖춘 지식인으로 스스로를 평가해서, 그게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다 여기에 이르렀다. 진 선생이 얘기한 내용을 그래돌 옮기면...

나 같은 경우는 좀 다르다. 나는 본래 의미의 지식인보다는 일종의 아이돌로 소비된다. 대중문화의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들어왔다. 옛날 지식인처럼 ‘우리를 위해 대신 싸우는 사람’ 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귀염둥이’다(웃음). 자기 대신 게임을 해서 그를 위해 싸우는 ‘캐릭터’가 된 거다. 내가 ‘진화한 먹물’인 셈이다. 독백형·지사형·선지자형의 전통 먹물은 씨도 안 먹히고, 지금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을 보면 철저하게 대화 구조로 풀어낸다. 저도 별명이 '횽아'다. 대중이 "중권 횽아를 괴롭히지 마라" 해버린다(웃음).

그 밖에 이 기사에서 하고 있는 얘기는 그럴듯하다. '그럴듯하다'라고 얘기하는 건, 너무 붕붕 뜨는 얘기들이기 때문에... 변화하고 있다고 얘기하기는 의외로 쉽다. 그리고 덜 위험하다. 대개 현재 발언이 미래에 평가되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 현재적 의미가 높게 평가되기 때문이다. 자극을 주는, 혹은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그런 내용이 있는 더러 있다.

ps) 진선생의 얘긴 화려하기 그지 없다. 그에 대한 기사, 발언을 읽거나, 접해 들은 뒤에 종종 찜찜함 기분을 갖곤 하는데, 불쑥 불쑥 던지는 큰 얘기들 사이에 일관성이 없는 경우에 특히 그런 것 같다. 그런 논리적 일관성 부족을 현란한 언사로 덮는 건 아닌지...

귀속(歸屬)지위

며칠 전 집 근처 서점에서 겪은 일. 책을 주문하면서 내 주소, 이름 따위를 알려줘야 했다. 이름을 보던 주인장, 어디 정씨냐고 묻는다. "나주 정씬데요"라는 내 대답에, 그 양반 왈 "예, 저도 정씨라서요...". "아 그러세요..."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집에 돌아온 후 그 상황을 '복기'(復棋/復碁?)해 볼수록 뭔가 찜찜했는데 결국 그 원인을 발견했다. 그 양반이 내 본관(本貫)을 물어봤으니 나도 물어봐 주는 게 예의바른 행동이라고 기대되진 않았을지...

그런데 어쩌나... 난 그 양반이 같은 본, 심지어 8촌 아저씨 뻘이 된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반가웠을 것 같지 않고, 그런 정보 자체가 전혀 궁금하지가 않은 것이다. 이와 연결되는 몇 년 전 에피소드 하나...

한국에서 독일 기업을 방문한 일행 (세 명) 통역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호텔에서 처음 대면한 이후, 그 양반들이 이것 저것 묻기 시작. 독일 땅에서 유학생을 한 명 만났는데 그 사람을 과연 어떤 카데고리에 집어넣어야 할 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그들이 '독일 유학생'이란 카데고리는 가지고 있을 리는 없을테니... 변죽을 울리는 Q/A 시간이 지나고, 알고 싶어서 입 안이 간질간질 하던 질문을 던진다.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내 답을 들은 그들의 표정에서 난 심지어 '회심의 미소' 비슷한 것을 읽었다. 이제서야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알겠다는 안도하는 분위기... 재미있게도 일행 중 한 명이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이었다. 그 정보가 내게 좀 더 특별한 의미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 같기도 한데 내가 보인 반응은 며칠 전 서점에서와 비슷했다. '아 그러세요...'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가 오히려 반대 입장에 있었던 기억도 있다. 디플롬 과정에서 이행해야 할 '실습'(Praktikum)을 위해 '참여연대'에 '다니던' 시절. 오며 가며 상근 간사들과 인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에 대해 어느 누군가가 '저 분도 독일에서 공부하셨는데'라고 하는 것.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 '독일 출신'에게 가서 '아, 독일에서 공부하셨어요. 저는 지금 거기서 공부하고 있는데...' 그런 비슷한 내용을 전달했다. 그 양반 반응이 참 서늘했는데...한 마디로 '그런 것 좀 그만 따지죠'. '어디 참여연대까지 와서 연고를 좇느냐'는 그런 반응으로 이해했다. 그 상황에선 '그 사람 참 까칠하네. 뭘 저렇게까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그런 것'을 덜 따지게 된다. 여기서 '그런 것'을 사회학 개념으로는 '귀속지위'라고 통칭할 수 있겠다.

(...) 사회학적 성찰은... to be continued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예능사회학: "산업역군 아이돌의 시대"

'아이돌','아이돌 그룹' 같은 표현이 언제부터 '어린' 스타들과 연결되었는지 알 길은 없다. 영어 원뜻만 따지자면 - idol, 우상 -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늙은 우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허나... 이론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 한국에서 '아이돌'은 '어린' 혹은 '젊은' 층에게만 부여되는 호칭이다: 대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20대 후반만 되어도 더 이상 '아이돌' (혹은 '요정') 세대가 아니라는 것이 한 연예인/예능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3,40대 연예인들은 그들도 '예능인'이면서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것을 방송에서 드러내지 못해 안달일 정도로... (심지어 자신이 '아이돌'이면서 다른 '아이돌'을 좋아함을 감추지 않는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이돌' 소비 메카니즘이 많아 달라졌다. 아이돌은 아이돌이면서도 - '전형적인' 혹은 '고전적인' - 아이돌이지 않기를 기대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듯). 어쨌든... 한국의 '예능인들'은 '아이돌'과 '아이돌'이 아닌 이들도 양분된다. 다른 언어권에서도 '아이돌'이 '어린 스타'로 이해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한국에서 '아이돌'에 대한 이런 이해는 어쩌면 우리말 "아이'들'"과 발음상 가깝기 때문은 아닐지 억측을 제시해본다 ('아이돌'의 의미론을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내 느낌으론 - '느낌'이다 - '스타' 혹은 '아이돌' - 그러고 보니 '스타 -> 아이돌'이 된 것일까? - 의 연소화는 세계적 추세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아이돌 소비 계층의 연령이 낮아지는 것과 연결시켜서 설명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요즘 '아디돌'은 '기획사'가 만들어낸 '상품'이고 '행사'를 '뛰며' '회사''사장님'에게 충성해야 하는 존재임을 숨기지 않는다. 한 마디로 뻔뻔해진 것... 지나치게 돈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자본주의 정신'이 한반도 남부에 만개한 탓인지 '돈 밝히는 것'을 이젠 '우스개'의 소재로 삼는다 (cf. '라디오스타'). '라디오스타'에선 방송이 몇 개 줄었다, 출연료, 기획사를 찾고 있는 중이라던지... 이런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얘기들이 대화 내용을 지배하기까지 한다.
예능 담론의 변화는 다른 방향에서도 추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호칭의 변화... 오빠, 누나, 동생... 이런 호칭을 '출연자'들끼리 거침없이 쓴다. 음. 이 역시 예전에 그러지 않았다. 작가 혹은 pd의 등장. 방송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방송의 일부가 된다. 혹은 시청자의 반응이 다음 회 방송에 소재로 등장한다던지... 한 마디로 방송의 경계가 무뎌졌다. 그 자체로 - 1회분 방송 - 독립적, 완성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 던졌다.

이런 한국사회 연예계/예능 담론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산업역군이 된 아이돌은... 어쩌면 이른 바 'IMF 사태' 이후 한국 자본주가 더 뻔뻔해진 탓은 아닐런지... '자본주의 정신'을 덮어주던 '정'같은 정서가 사라진 것. 비정규직 문제, 양극화 심화와 예능인 담론의 '산업화'는 궤를 같이하는 현상은 아닐지... 방송과 비방송 혹은 방송의 세계(공적 영역)와 방송 바깥의 세계(사적 세계) 구분이 흐려진 것은 변화된 매체 환경 탓일 수 있다. 방송이 독점하던 영역이 좁아진 것. 쉽게 채널을 돌리고, 심지어 TV 매체 자체에 대한 인내심, 충성도가 높지 않은 시청자, 소비자들에게 자세를 낮추고, 목에 힘을 빼고 접근하는 것.

'동아닷컴' 기사를 읽은 후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78년생' - 이 경우 나이가 왜 중요한 정보인 것처럼 필자 소개에 등장하는지 묻고 싶지만 - '경영컨설턴트' 박지하씨.

"지금의 유명한 '사장님'들의 현역시절, 즉 이수만 박진영 양현석 등이 현역에서 활동하던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데뷔할 때는 그렇게 어리지도 않았다. 물론 가수 뒤에 매니저가 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지원하는 사람의 이미지였지 지금처럼 '만드는' 사람들로 비춰지지는 않았다.

대중가요계는 남들을 위해 춤추고 노래하는 직업이 '딴따라'라고 불리우며 괄시를 받던 시절을 지나오면서 일종의 '대중예술'이 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지금처럼 연예인이 선호되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뭔가 기존의 예술 분야의 공통점을 가지고 싶어했다. 싱어송라이터들이 가지는 뭔가 우월한 이미지는 여전히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예술의 전당'의 무대에 서고 싶어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래서 TV에 나와서도 '사장님' '회사' '행사' 같은 이야기는 가능한 안 하려고 노력했다. 돈 이야기가 전면에 나오는 순간 이미지가 깨지니까. 비록 예술가 이미지를 따라가려고 굳이 애쓰지 않는 댄스그룹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예술적 이미지를 차용할 필요는 없었지만 최소한 그에 반하지는 않는 것이 일종의 컨센서스였달까.

그런데 지금은 좀 각도가 달라졌다. '아이돌'이라는 기획사가 처음부터 키워낸 집단이 인기몰이를 하면서부터 '산업적 근면함'이 각광받는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오디션을 통과했는가, 연습생간의 끊임없는 경쟁구도를 어떻게 이겨냈는가, 하루에 몇 시간씩 춤 연습을 했는가가 테마가 된다. (...)

이제 스타들은 우리와 동떨어진 천재예술가를 지향하기보다 건실한 산업역군을 지향한다. 19세기에 시를 쓰기 위해서는 천재적 시인과 종이와 펜으로 충분했다면, 이제 인터넷으로 뮤직비디오 한 편을 보기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기반구조가 필요한 것이다."


ps) '예능사회학'은 어쩌면 '우주사회학'과 더불어 이 분야 선구자로 나설 수도 있는^^ '소장 사회학자'의 블로그에서 빌려 온 표현이다.

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胡蝶夢

낮잠을 자면서 꾼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래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이렇게 있는 것인지 구별이 안되었다... 莊子에 나오는 얘기다.
긴 시간을 흘려 보내고 이전의 그 공간으로 돌아 왔는데,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낯설면서도 익숙한, 또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변한 척 하는 것 같기도 한 - 나만 빼고서... cf. 영화 '트로만쇼' - 그래서 흘려 보낸 그 시간이 긴 꿈 같기도 한... 일종의 공간, 시간의 분리와 재결합이 일어나는 와중에 장자의 이 얘기가 생각났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스스로 즐겁게 느끼면서도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니 자신은 엄연한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다. 이러한 것을 물화(物化)라 부른다."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莊子(內篇)第2篇 齊物論[26])

2009년 10월 13일 화요일

2009 노벨 경제학상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평화상 수상자 정도가 내 평소 관심 범위 안에 있을까 그것 외엔 대부분 내 지적 영역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회학과 사회과학으로 묶일 수 있어서 좀 가까울 법도 한 경제학상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진 않아서 대개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리곤 했다. 노벨경제학상은 원이름이 '알프레드 노벨 기념 스웨덴 은행 경제학상'(The Bank of Sweden Prize in Economic Sciences in Memory of Alfred Nobel)로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제정했다. 노벨의 유언에 의해 시작된 상이 아니라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고 하지만 경제학도들이라면 자부심을 가질만 하겠다. 노벨사회학상,노벨정치학상은 없지 않은가? 어쨌든... 대학 시절에 '정치경제학' '경제학사' 쪽은 나름 들여다 보긴 했고, 'IMF 사태' 이후 경제 문제에 대한 관심을 심각하게 가져 보기도 했지만 노벨경제학 수상자들의 업적을 공감하며 이해할 정도로 주류경제학을 섭렵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올 해 수장자 '오스트롬' '윌리암슨', 이 양반들 이름은 왠지 친근한 것이다. 혹시 그 '오스트롬', 그 '윌리암슨'? 기대하며 내 문헌목록을 살펴 보았더니 동일인이었다. 그러면서 스며든 반가운(?) 마음의 생성 원인은?
내가 읽거나, 적어도 훓어 보긴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는 말씀 ㅎㅎ - 이들의 논문은...

Ostrom, Elinor/ James Walker/ Roy Gardner (1992), Covenants With and Without a Sword: Self-Governance is Possible, in: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6 (2): 404-417.
Williamson, Oliver. E. (1981), The Economics of Organization: The Transaction Cost Approach. In: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87: 548-577.

돌이켜 보면 지난 해 수상자 폴 크루그먼도 내겐 낯선 인물은 아니다. 90년대 말 한국 금융위기에 대한 소논문을 쓸 때 그의 견해를 참고한 적이 있고, Internatioanl Herald Tribune에 실린 칼럼도 가끔씩 읽었으니까. 하지만 크루그먼에 비해 오스트롬, 윌리암슨은 경제학자란 인상이 덜하다. 정치학, 사회학 저널에 논문을 싣기도 하지 않았나. 최근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노벨경제학상 선정의 정치'에 어떤 변화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갖지만 내 지식으로 그 이상 판단하기는 힘들다. 아래는 이번 수상자에 대한 한겨레 기사.

"미국의 여성 정치학자 엘리너 오스트롬(76·미국 인디애나주립대·왼쪽 사진) 교수와 신제도주의 경제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올리버 윌리엄슨(77·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오른쪽) 명예교수가 2009년 노벨 경제학상 공동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는 12일(현지시각) “경제적 지배구조(Economic governance)에 관한 연구의 공로를 인정해 이들을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오스트롬은 올해로 40년째를 맞는 노벨 경제학상의 첫 여성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오스트롬과 윌리엄슨이 공공경제학의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이들의 공동수상은 시장의 불완전성과 공공성 문제에 대한 연구 필요성이 주목을 받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스트롬은 개인의 사익 추구 행위 때문에 제대로 관리되기 힘든 목초지·산림·어장 등 공유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해 나갈 수 있는 ‘제3의 길’을 제시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공유 자원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을 하거나 시장을 통해 민영화해야 제대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 기존의 학계 정설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롬은 공동체 중심의 자치제도를 통한 협력체계가 공유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역사적 실증과 게임이론 모델 등을 활용해 보여줌으로써 고전경제학의 오래된 믿음인 ‘공유지의 비극’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의 이론은 최근 기후변화 등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리로도 활용되고 있다. 1990년 나온 그의 대표적 저서 <거버닝 더 코먼스>(Governing the commons)가 <집합행동과 자치제도>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기도 했다.

윌리엄슨은 로널드 코스가 처음 제시한 ‘거래비용 이론’을 집대성한 학자로, 시장의 불완전성에 따른 ‘거래비용’ 때문에 기업이 존재하고 그 규모를 키워나가게 된다고 설명한다. 즉 시장이 항상 효율적이라면 기업이 몸집을 늘릴 유인이 없지만, 시장의 불완전성에 따른 거래비용이 생기게 마련이고 이를 줄이기 위해 기업은 거래를 내부화함으로써 조직을 점차 키워나간다는 것이다."

2009년 10월 11일 일요일

디지털 遊牧民/ 流浪人

휴대용 컴퓨터에 인터넷이 연결되니 독일에서 '작업하던' 것과 큰 차이 없는 환경이 갖추어진다. 노트북 컴을 들고다니는 것조차 번거롭다면 파일을 웹하드에 저장하고 '넷' 상에서 구동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이용하면된다. 어떻게든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 공간, 영토, 지역 경계를 쉬이 넘나드는 현대인은 또 다시 '유목민'이 되었(단)다. 첨단 IT기기를 갖추고 있다고 해서 이들을 '디지탈 유목민'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만국의 디지털 유목민들이여, 접속하라!

"1만년의 정착시대를 끝내고 새 유목시대를 열고 있는 종족이 바로 21세기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노마드(유목민)’다. ‘디지털 노마드’가 보통명사처럼 쓰인 지 오래다.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는 “21세기는 정보기술(IT) 장비를 갖추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라고 예측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레비는 한술 더 떠 “우리는 다시 유목민이 됐다”고 선언했다. ‘디지털’과 ‘유목’은 피할 수 없는 새 인류의 운명이란 지적이다." (인용하는 문장은 경향신문 2004년도 기사에서 가져온 것. 좀 '된' 얘기를 퍼오자니 자못 멋쩍다. 어쨌든 최근 스스로 경험하면서 새삼 확인한 바니까... )

그러고 보니 '공간''영토'가 의미 없진 않다. 땅을 딛고 있는 공간이 아닌 '싸이버/ 가상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다를 뿐.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지만 좀 낭만적으로 들리기까지 하는 '디지털 유목민'의 이면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남쪽 세계에 속한 인구는 ‘디지털 노마드’로 변신을 꾀하기는커녕 굶지 않기 위해 흙먼지길을 전전해야 하는 영구적인 유랑인으로 남게 될 지 모른다.
유랑의 삶은 정체성 혼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세계시민이 아닌 단순 무국적자의 혼란을 이미 한국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기러기아빠를 흔하게 구경할 수 있으며, 가족 구성원이 2개국 이상에 흩어져 사는 ‘다국적 가족’이 드물지 않다. 교육시장의 저생산성 때문에 일어나는 ‘교육 노마드’ 현상은 전통적인 가족·학교공동체 관념을 흔들고 있다
."

어째 이 몸은 유목민보다는 유랑인에 더 가까운 것 같다는 '확신'이 스물스물...^^

ps) 이 블로그의 새 이름 'from the(brave) new world'는 새롭게 정착한 이 영토를 가리키려는 의도로 사용했으나, 이주 경험을 통해서 디지털 유랑인/유목민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었다는 의미라고 '강변'해도 좋을 듯하다.ㅎㅎ

값싼 도시 풍경, 얕은 지적 풍경

늘 가지고 있었으나 '신대륙'으로 이주한 다음 더 굳어진 생각으로...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거슬리는 - 게 간판, 전봇대, 그리고 포괄적인 의미로 '色感, 美感'이다. 색과 '디자인'이 너무 화려해서 - 적어도 내 눈에는 - 촌스럽게 보이는 것들 투성이다. 우리가 워낙 화려한 색, 문양을 좋아하긴 했다. 한복, 단청, 조각보 등을 보더라도... 허나 이전엔 몇 가지를 제외하곤 대부분 자연색을 썼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간판, 생활용품, TV 세트 등 시선이 가는 곳마다 너무나 현란해서 '무척' 부담스럽다. 過猶不及... 한국미를 '절제의 미', '여백의 미'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건 한국'전통미'로 '철저하게' 한정해야 할 듯. 근대한국미는 '절제하지 못하는... 여백을 모르는 미'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 이런 좀 '값싸 보이는' ('저렴한') 풍경은 다른 맥락에서도 관찰되는데 - 그런 경우에 '천박'(淺薄)이란 표현이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 특히 2mb 정부가 들어선 다음 더 자주 관찰되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에 대한 '천박한' 이해를 꼽을 수 있겠다 (구체적 사례는 무궁무진하나 가장 따끈따근한 것으로 '나름' 진보 경제학자 정교수의 '소액용돈 천만원' 발언을 들 수 있겠다). 음... 어쩌면 내가 '원주민'이 아닌 '이주민' 혹은 '귀화인'의 '까칠한' 시선을 가지고 있어서 좀 야박한 감상을 내 놓는 지도 모르겠지만... 벗뜨... 역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쭉 좋아질 거라고 굳게 믿는다.

p.s.) 현정부가 '천박'이라면 노무현 정부엔 어떤 표현이 어울릴까? '촌스럽다'가 적절할 것 같다. '잊지말라 황우석'(이형기 지음, 2007) 이란 그 스스로 촌스러운^^ 제목을 단 책에서 이 표현이 되풀이되어서 등장한다. 내 판단으로 노무현 정부가 지향했던 바는 큰 줄기에선 옳았지만 유난히 과기정책에 대해선 촌스러움, 어쩌면 천박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과기정책 말고 FTA같은 것도 들 수 있겠다). '과학기술중심사회구축'이라는 '구호'도 그렇고... 황우석에 대해서 '마술'운운한 것은 그 절정이고. 아, '세계 최초 인간배아줄기세포 획득 기념 우표' 찍어낸 것, 황에게 경호원 붙여준 일 등은 세금으로 만들어 낸 코미디고. 김대중 정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제2의 건국 운동' 같은 유사 '새마을 운동'이 대표적. 황우석에 대해선 우리 DJ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복제소에게 '진이'란 이름을 '하사'하신 것. '과학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지식인, 지성인, 지도자, 한국에선 찾기 힘들다. '천박'을 '컨셒'으로 설정하신 우리 2mb정부야 말할 것도 없고. 척박/세련 얘기를 꺼낸 김에 역대 정부 세련도를 따져보자면 아무래도 DJ - 노무현 - 03 순인 것 같다. 하위 리그인 전두환 - 노태우 - 2mb 중에선 그나마 노태우가 좀 낫고 2mb 와 전두환이 비슷한 것 같다 (물론 시대 차이를 어느 정도는 고려해서...). 박정희야 워낙 독특한 시대였고, 그 이전은 비교하기 힘든 시대고...

2009년 10월 10일 토요일

is social media a fad?



독일유학을 가려고 마음 먹었던 시절에 유행했던'정보사회학'. 그런 논의에 딱 어울리는 내용이다. 다만 좀 에누리해서 들을 필요는 있을 듯. 여하튼 이는 여전히 펄펄 살아있는 주제인데 한국의 '정보사회학'은 아직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윗 주장('social media is not a fad')의 근거를 조금은 무너뜨리는 주장. Web 2.0 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커뮤니케이션에서는 Beitrag(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기고? ) 에 대한 평가 없이는 그 지적 능력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Youtube 같은 경우 '방문자 수' 정보, Wikipedia의 경우 '운영위원회' 비슷한 게 있지 않나?

[이 두 Youtube Beitraege 존재에 대한 정보는 루만 메일링리스트에서 얻음]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의외성, 낯설게 하기...

사진을 볼 때 (혹은 읽을 때) 얻는 효과를 '의외성'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일상 속에서는 형형색색 움직임으로 인식되던 대상이나 현상을 정지된 상태, 특정 부분이 확대된 상태, 혹은 '흑백'으로 접할 때 느껴지는 낯섬, 혹은 참신함.
그림 중에도 그런 류에 속하는 것들이 있고, 아니나 다를까 그런 그림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대표적으로 마그리트의 그림. 하나만 소개하면...[The Listening Room, 1958.]



사과 모습이야 익숙한 그대로지만 그 사과가 방에 꽉 찬 모습이라... 그림을 보는 이로서는 혼돈스럽기도 하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낯설게 보이는지 생각해 보게 되고... 이런 그림을 통해 도대체 무슨 '철학'을 전달하려 했는지 캐려는 '오버'는 좀 참아줬으면 하지만 (화가 스스로 자기 그림에 대한 지나친 해석을 경계했다), 마그리트 그림은 이런 효과를 주는 데에서는 탁월하다. 새로운 '무엇'을 주는 게 아니라 일상을 재발견하게 하는... (푸코가 가져다 써서 유명해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도...) . [브뤼셀에 '마그리뜨 미술관'이 만들어졌다는 기사를 몇 달 전에 읽었는데, 기회를 만들어 꼭 가고 싶다는...]

여행에서도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낯선 도시에 가서 이것 저것 새로운 정보, 지식, 경험을 얻어오기도 하지만 여행이 가져다 주는 효과의 핵심엔 '자기 발견'이 있다. 일상 속에서 감춰져 있던 내면의 어떤 모습이 낯선 환경에서 불쑥 튀어 나오는 그런 효과... 많은 노력, 시간, 물질을 들여서 떠난 여행에서 결국 '나'를 발견하고 오는 것... '자기객관화'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고... 최초의 '자아'는 스스로를 타자화 하는 데서 발견되고 (J.H. Mead), 그런 인식을 확장시켜서 다양한 상황에 대한 적용력을 갖춘 사람들을 대개 '어른'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아직 '아이'!). 낯선 상황에 있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그런 성찰의 순간을 즐기는 사람, 자신의 새로운 모습과 기꺼이 대면하려는 사람, 그게 '청년'의 모습이다.

'표절' 사회학

'표절'(剽竊 아이쿠 어려운 한자다)은 여러 영역에서 발견된다. 최근 'g드래곤'인가 하는 그룹 노래 표절 여부로 시끄러웠고, 학계 출신 공직자들에 대한 '검증' 과정에서 논문 중복게재와 더불어 '자기표절' 이 거의 짝으로 등장한다. 미술에서도 표절은 문제가 되지만, 유독 표절에 관대한 경우도 있는데 바로 '성악'인다. 예를 들어... 파바로티와 똑같이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람 당장 대가 반열에 오른다^^). 어쨌든.. 이제 그 표절 시비 대열에 '성직자'들도 끼워줘야 할 모양이다. 오늘 우연히 '설교 표절'에 대한 기사를 접한 것 (뉴스앤조이 기사).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목사들의 엉터리 학위 취득 과정 등 그 동안 더 센 이야기들에 단련이 됐으니까...]
제목을 '표절 사회학'이라고 붙인 건 표절 현상의 증가 (혹은 그 관찰의 증가)는 분명히 사회학적으로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형적인 근대화 결과일 수도... 특히, 근대성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해도 좋을 '개인주의'와의 연관성은 쉽게 떠올릴 수 있고. "Fälschungen. Zu Autorschaft und Beweis in Wissenschaften und Kunst" (Suhrkamp 2006)이란 책을 사 두고 전혀 읽지 않았었는데, 아마 표절의 사회학 혹은 사회사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은 이역(異域)만리 어느 지하 창고 속에서 광명을 다시 찾을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ㅎㅎ

2009년 10월 6일 화요일

긍정, 낙관의 힘: 피그말리온 효과

아는 표현을 정확하게 쓰기, 모르는 표현은 그 어원을 찾기. 이는 취미라고 불러도 좋을 오랜 내 습관 중 하나다. 인터넷 덕에 어원찾기 같은 일은 정말 '식은 죽먹기'가 됐다. 오늘은 '피그말리온 효과'. 두 가지 근원을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우선 심리학자 로젠탈(T.L.Rosenthal)이 1964년 무언가에 대한 사람의 믿음, 기대, 예측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경향을 표현하기 위해서 도입했고, 그 표현은 다시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을 사랑한 고대 그리이스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 얘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를 지켜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 조각상을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출처 1, 출처 2). 이 피그말리온 효과는 사실 주철환씨 인터뷰에 등장한 표현이라 찾아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겨레 인터뷰 기사). 참 인생을 멋있게 사는 사람이다. 내가 지향하는 '청년 같은 삶'의 전형 아닌가! [이 양반은 한 술 더 떠서 '童心'까지 내려가려고 하네...]

인터뷰 일부를 옮겨 놓는다.

-항상 주변에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어른들과 가깝게 지내기 싫어하는데.
"지금은 제 친구보다 친구의 아들딸들과 더 친하게 지냅니다. 친구들 만나는 것보다 젊은애들을 만나는 게 더 즐겁고 신나거든요. 많은 분들이 제게 젊은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비결을 묻는데 방법은 단순해요. 일단 돈을 써야 해요. 만나서 밥도 사주고 공연도 보여주면서 장터를 마련해줘야 그들이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죠. 또 포용력과 전문성도 필요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값비싼 식사나 술을 사줘도 만나서 재미없거나 잔소리를 들으면 더 이상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와 생각이 다르거나 다소 버릇없이 굴어도 '그럴 수 있다'라고 포용해야 하고, 그들에게 들려줄 전문 분야의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55세의 중년남성에겐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참 귀엽습니다.
"죄송하다뇨, '귀엽다'는 게 제겐 찬사예요. 전 귀여움으로 승부하거든요.(웃음) 제가 귀엽다면 그 비결은 동심을 유지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은 남을 지배하거나 정복하려 하지 않고 나이로 누르려거나 지위로 무시하지 않아요.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귀여움'으로 무장하고 다가서면 다들 마음이 편해지고 경계심을 풉니다. 어린아이만 귀여우라는 법이 있나요. 전 앞으로 60, 70이 되어도 귀여운 할아버지로 나이들고 싶어요. 다행히 송해, 이어령 선생 등 귀여운 어르신들이 주변에 많아 벤치마킹하려고 합니다. "

短見

인터넷과 TV가 오랫 동안 공존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종이신문 역시 인터넷의 위력에 휘청거리고는 있지만 쉽사리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신문에 났는데...'라고만 해도 발언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대에 비하면 '종이'신문의 위상 추락은 극적이까지 하지만...). 어쨌든... 종이신문의 가장 큰 특징은 신문이 아니었더라면 보지 않았을 기사까지도 접하게 해 준다는 점이다. 인터넷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듣고, 알고 싶은 지가 분명한 세대에게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자기 관심 이외 영역을 접할 기회가 좁아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주위에 '조선일보' ('디지탈 조선' 혹은 '조선닷컴'이 아니라) 밖에 없는 탓에 꼼꼼하게 보게 된다. 그러다가 오늘 접한 기사... 특파원 칼럼인데 제목이 '유럽좌파' (인터넷으론 여기에서).
앞 부분을 인용한다.

"'20 대 7'.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중 우파 정권과 좌파 정권 비율이다. 최근 독일 총선에서 사회민주당(SPD)이 전대미문의 참패를 당하자, 유럽 언론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좌파의 몰락'이 다시 핫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4일 총선에서 그리스는 사회당으로 다시 시계추가 움직였지만 유럽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좌파 후퇴' 쪽이다.

독일 사민당은 이번 총선에서 2차 대전 이후 최저의 득표율(23%)을 기록하며, 무려 76석의 의석을 잃었다. 개표 이후 '표심'에 대한 분석결과는 사민당 지도부뿐 아니라 유럽 정치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전통적인 사회주의 지지층인 청년, 블루칼라, 구(舊)동독지역 유권자들이 철저히 사민당을 외면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양반 무식해도 이렇게 무식할 수가... (이 게시물 제목은 短見이라고 좀 완곡하게 붙였지만 사실 이건 無識에 가깝다). SPD가 참패한 거야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게 독일 좌파의 몰락이라고 몰아붙이는 건 '오버'에 '무식'이 겹친 꼴이다.

한겨레 기사를 인용한다.
"오스카어 라퐁텐 의장이 이끄는 좌파당은 이번 총선에서 11.9%를 득표해 76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2005년 총선 당시 8.7%(53석)에 견주면 괄목할 성장이다. 2002년 총선에서 득표율 5%에도 못 미쳤던 좌파당은 이날 “우리가 장벽을 뛰어넘고 두자릿수 득표를 기록해 정당으로서 위상을 확립했다”고 환호했다. 좌파당은 기반인 동독 지역뿐 아니라 사민당의 ‘변절’에 실망한 전통 좌파 지지층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겨레 기사는 SPD를 '중도좌파'으로 지칭하며 '좌파당'과 구분하면서 '무식'을 온천하에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자칭 '대한민국 일등신문', 부끄럽지 않은가? 적어도 아래처럼 얘기하는 연합뉴스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유럽 정치 지형에서 우파의 득세와 좌파의 쇠퇴가 가속화하고 있다. (...) '사민당의 몰락=사민주의의 몰락'이라는 등식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사민주의 정당들이 '현대적 사민주의'라는 구호아래 섣부르게 중도로 나갔다가 정체성 위기로 역풍을 맞고 있는 것일 뿐 사민주의의 이념은 오히려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ps) 진보신당 유럽당원협의회에 실린 독일총선 '관전' 지침 (여기)도 참조.

뉴스: 인터넷과 텔레비전

모처럼 (^^) 9뉴스를 TV로 보면서 든 생각. 오랫 동안 인터넷을 통해 한국 소식을 접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TV 뉴스가 너무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30여분 동안에 전달되는 정보량이 터무니 없이 적다. 인터넷에선 우선 흥미로울만한 뉴스만 골라보게 되고 열었는데 기대만큼 흥미롭지 않다면 '클릭'해서 다음 뉴스로 넘어갈 수 있지만 TV 앞에선 정말이지 그 '상자' 앞에서 '바보'처럼 꼼짝없이 앉아서 방송사가 마련해 놓은 뉴스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하는데, 지루한 장면에선 '->' 버튼을 이용해서 빨리 넘겨버리고 싶다는 충동 말이다. 인터넷이 대신할 수 없는 TV 고유 기능이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일지 좀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듯.

2009년 10월 4일 일요일

자화상 (自畵像) [서정주, 1941]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ps) 이 작품은 시인이 23세(歲) 되던 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출처는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역사가 되다 ... (2)

"독일에 온 지 얼마나 되셨어요?"란 질문이 서서히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면, 이젠 다른 질문에 익숙해질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언제 돌아가세요?" 하지만, 우리 영사미 옹께서 이미 오래 전에 "닭목아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복음을 설파하셨고,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금언도 전해져 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이제 새벽을 깨울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I will awaken the dawn! (Ps.57:8)"

2008년 2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이 블로그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글귀.

2009년 10월 3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