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loser 문학

영화 속 한 장면이었는데 영화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정말 영화에서 본 장면인지도 사실 불확실하다). 전후 문맥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아들이 아버지에게 - 어쩌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 빈곤한 기억력 하곤... - "You're a loser!"라고 외치는 그런...

'성공' - 대개 외부로 드러나는 척도를 기준으로 평가되는 - 을 삶의 지상목표로 삼는 자본주의적 (혹은 근대적) 질서 속에서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로 평가되는 일은 치명적이다. 우리 근대인은 어쩌면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 실패자, 낙오자로 평가받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는지도... 그러니 'loser'얘긴 많은 이들에겐 사실 실존적 문제다. 허나 '루저 문화'라고 하면 갑자기 다른 것들이 연상된다. 어찌 보면 우린 장기하 같은 'loser'를 꿈꾸는 지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더 잘 나갈 수도 있는... 운동권이라고 다 같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로쟈'에게서 확인한 얘기에 따르면 이외수를 '루저 문학'으로 설정하는 모양이다. 이외수 정도로 '성공'을 해야 그런 '루저 문학'이란 '라떼루'를 붙여주지, 정말로, 실존적으로 '루저'였다면 어땠을까? 루저 문학, 루저 문화는 '루저'를 벗어나고 싶은 이들이 잠시 위로를 얻고 가는 휴식처이다. 그러니 장기하, 이외수 정도로 '성공'해야 - 아니 '출신성분'상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 그런 루저 문화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것. (로쟈 포스팅은 여기)

로쟈가 인용한 부분을 다시 인용해 둔다:

'한국문학의 다이어트-이외수 소설의 ‘대중성’에 대한 단상'이란 글에서 조영일 씨가 더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메인컬처로서의 한국문학은 90년대에 소프트-서브컬처 문학인 하루키의 영향과 더불어 사회와 개인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고(즉 내면으로의 침잠 또는 과거로의 회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그와 같이 개인이 사회를 초월함으로써(즉 사회를 왜소화시킴으로써) 하드-서브컬처 문학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해, 오늘날의 한국소설공간은 루저loser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근대문학을 가능하게 한 '전망(미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자, 소모적인 싸구려문화 속에서밖에 자신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외수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일찍이 ‘루저소설’을 써온 소설가로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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