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1일 일요일

이것고 맞고 저것도 맞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오늘도 진실은 그 어디쯤에서
이러 저리 방황하고 있을테요

그러니 어느 길목 한켠에 자리를 잡고
그 녀석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만날 수 있을 것이요

진실을 만나기 어렵다는 진실!
그게 진실인데 사람들은 그 진실에 그닥 감동하는 눈치가 아니요

우연히 한 번 만난 진실을 가지고
- 얘기했듯이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은 그 녀석을 만날 수 있는 법이거든 -
좌판을 펼치거나 상점을 여는 장사치들
그리고 거기에 가서 진실을 흥정하는 사람들

알면서도 속고 모르고서도 속는
경제학자들의 경기예측 같은 그런 진실

진실을 만나게되는 그 순간
그 녀석은 냉큼 다른 길로 도망가 버리거든

그렇다고 진실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죄 부질 없는 일이어서
아애 입을 닫아야 할까
아님, 어설프지만 그래도 얘기해 봐야 할까

어짜피 역사적 진공상태에서 살 수 없다면
시간 공간을 좌우축으로 삼는 좌표 위 어느 한 지점에 있는 거라면
그 순간의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게 옳을 지도...
하지만 좌표가 이동하는 순간!
그 진실이 몽땅 거짓이 될 수 있다는 진실을 잊지 않은 채 말이지

무척이나 혁신적인, 심지어 혁명적인 냄새마저 풍기는 진실도
타이밍을 놓치고 뭉기적거리는 순간!
더할 나위 없는 보수반동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리거든

모든 것이 말하는대로 창조되는 시대에서
그러니끼 시작도 끝도 없이 돌고 도는
꼬리가 꼬리를 물고 또 물리는 세상에서
진실을 얘기할 때
그건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단면에 대한 것이거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진실에 대한 진술은 아이러니, 역설, 모순, 풍자, 비유, 염세주의가 될 수 밖에 없어
산문이 아닌 시로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뭐야. 벌써 7월의 마지막 날인거야? 내 참... 우습지도 않군ㅠ ㅠ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이 버벅대는 도서관 네트워크, 꾸물대며 기분나쁘게 쫘악 가라않은 저 날씨... 허나 이 모든 게 왠치 친숙하오. 너무 친숙해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요. 아~ 그렇게... 나의 2011년 7월은 가고 있는 게요.

2011년 7월 28일 목요일

요즘처럼 온라인 접속 상태로 지내는 시간이 길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리적으로 가능하더라도 애써 피하려고 했으니까. 늘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낮시간에 접속된 상태로 있어야만 한다. '업무'상... 그러다보니 아닌게 아니라 여기 저기 더 들쑤시고 다니게 된다. 대표적으로 페이스북... 친구들이 많지 않아 업데이트되는 내용도 그리 많지 않은데도... 흠. 그다지 좋은 현상이라고 보긴 힘든데... 이러다 말까? 줄어들까?

2011년 7월 27일 수요일

서울에 물난리가 났다. 집과 일터 근처는 평온해서 '남의 일'인가 보다 했는데, 평소 차로 이삼십분 거리이던 출근길이 세시간 넘게 걸렸다던 아내 얘길 듣는 순간! 바로 '내 일'로 해석되기 시작... 어쩔 수 없다. 주어지는 정보와 뉴스를 모두 '내 일'인양 걱정하다간 내 뇌는 처리 용량을 넘어선 정보량 때문에 이내 작동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리라. 그런 점에서 볼 때 기억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기억이 아닌 망각에 있다는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다. (기억을 통해서 다른 것들을 망각하고 이를 통해 새로 기억할 용량을 확보한다!)
여하튼... 날씨 얘긴 그냥 말을 시작하기 위해서 꺼낸 소재일 따름이고...

요 며칠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조금' 우울하다.
(1) 먼 곳에 남겨두고 온 일 관련해서...
(2) 한 때 뭔가 해 보려고 좀 관련을 맺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멀어진 이들의 근황과 활동을 전해들으면서 느끼게 되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반면, 생각의 다른 한 켠에선 오늘 아침 출근길에 읽었던 책 내용이 떠오른다. 직업선택에 관한 '거창고 십계명'이라는 것인데 그 중 제2계는... "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세상 일을 "내가 원하는 것/일"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일"로 구분하기 힘든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이런 건 어떤가. 내가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부딪쳐 보니 막상 그 곳에선 나를 그다지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다던지. 아니면 별로 하기 싫은 일인데 나를 필요로 하니 신이 나서 그 일을 하게 된다던지... 물론 거창고 얘기는 어떤 점을 더 중시할 것인가, 그 얘기를 하는 것일 테다.
내가 원하는 일을 찾기보다는 내가 필요한 곳에서 일할 마음을 먹으라는... 막상 우선순위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두면 결정을 내리기 훨씬 쉬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고서도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바엔 아애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기웃거릴 필요도 없다.
어쩌면 난 아직도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도...
하고 싶은 일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겹치는 그런 분야가 있긴 한대 유감스럽게도 직업전망과는 별무상관이다. 흠... 여하튼 누가 뭐래도 난 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 날 필요로 하는 곳 등을 모두 만족시키는 그런 쪽을 찾아 줄기차게 찾아 볼 테다. 어쩌면 평생 그럴 지도 모르지... 뭐, 그것 역시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잖은가? Oder?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변화를 통한 지속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어느 쪽이냐... 관점, 시점에 달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너무 열어놓는 것 역시 별로다. 이런 주장은 어떤가. 변화를 통한 지속. 변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니 변하지 않는다! 좀 더 와 닿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변화는 대개 주변부나 접경지대에서 일어나고 중심부는 그런 주변부에서의 변화를 통해서 면역력, 내성을 키워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윤리경영, 문화경영, 감성경영을 내세우는 대기업들! 대표적인 경우다. 외피를 바꿔보고, '심지어' 일부 단기적 손해를 감수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최대의 이익을 얻어내겠다는 전략 아닌가.
하지만 변화를 통한 지속이 늘 이렇게 노골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변화처럼 보이는 현상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어떤 목적달성에 기여하는지 좀 더 꼼꼼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맑시스트라면 모든 변화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질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고, ...
물론 어떤 변화를 나타내는 현상은 그저 반작용으로 이해하는 게 나을 것이다. 노르웨이 참사의 주인공, 우익세력이나 여타 근본주의 세력의 부흥이 '자본주의 질서 재생산'을 목적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세계화라는 변화 속에서 세계를 잃어버린 이들의 저항, 반작용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저항, 갈등을 얼마나 '잘' 흡수하는가가 '핵심부'의 지속을 결정짓는 중요한 이슈인 것이다. 정리하자.
변화엔 두 종류가 있다.
(1) 핵심부의 재생산을 통한 지속에 기여하는 주변부의 변화
(2) 기존 질서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나는 현상 (일탈에 가까운...)
핵심부는 (1)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다. 조장하기도 한다. (2)에 대해선 이중적 태도를 가진다. 때로는 재생산을 위해서 (2)를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근본주의를 이용해 먹는 정치집단들. 때론 (2)를 처리가능한 방식으로 거르거나 변형시켜서 재생산을 위한 조건으로 삼는다 (도덕적 논쟁을 다루는 방식인 '윤리화'가 대표적으로 그런 경우).
이택광 교수의 블로그 글을 보면서 놀랄 때가 가끔씩 있다. 내가 고민하던 내용들을 깔끔한 문장으로 정리해 내곤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런 경우를 발견했는데, 예를 들어 이런 문장: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분명하다. 체제의 변화가 개인을 소외시켰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브레이비크의 저항은 보수주의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세계화(globalization)가 만들어내는 '세계 없음'의 상황에 대한 극우파적인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를 없애버리는 세계화는 아무런 이념적 지향이나 적대도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세계화는 좌파 뿐만 아니라 우파에게도 하나의 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브레이비크는 '노동당'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 일부에 테러를 가함으로써, 무의미해진 좌우파의 대립구도를 폭력적으로 복권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의 '사명'은 이렇게 적을 명시하고 다시 적대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던 셈이다" (노르웨이 테러범 단상)


노르웨이에서 참사를 일으킨 테러범 베링 브레이비크에 대한 얘기다. "세계화가 만들어 내는 '세계 없음'". 캬...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인데 그걸 이렇게 간결하게 표현해 낸다. 음... 아직 멀었어...

'헤어드레서' (도리스 되리, 2010)


'파니 핑크' (1994)(원제 Keiner liebt mich)라는 인상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Doris Dörrie 감독의 신작이다. 원제는 'Die Friseuse'. 이동진 '기자'의 호의적인 평, 그리고 '독일영화'라는 이유 때문에 주말관람용으로 선택되었다. 허나 내가 영화 정보를 얻기 위해 애용하는 IMDb 점수는 썩 좋진 않았다. 6.5/10. 흠. 일단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좀 낮추고서 ins Kino gehen.
결론적으로... 영화 완성도만 놓고 보고 딱 IMDb 점수 정도 되는 영화다. 크게 나쁘지 않은 영화...
작게 나쁜 점들을 지적하자면... 지나치게 전면에 드러난 주제의식 (사회문제 수업용으로 쓰기 좋은...), 매끄럽지 않은 이야기 전개 (갑작스런 어머니와 딸의 화해, 김일영씨의 어정쩡한 역할 )... 한 마디로, TV 드라마 같은 '필'을 내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듯.

하지만 특별한 '관전 포인트'들 찾아내는 재미도 있었다.
- 서울의 몰취향 아파트촌을 연상시키는 동베를린 풍경 (아파트는 '파니 핑크'에서도 중요한 공간적 장치였다.)
- 독일이 겪는 사회 문제들... (여성문제, 구동독 주민들의 상황, 실업, 이주민들 문제 등등)
- 베를린 지역 방언들... (ex. gut -> 윳, keine -> 케이네, was -> 밭, 밧?)
- 한 때 독일 M-tv 진행을 맡기도 했던 김일영씨의 최근 모습

독일어 원제가 여성 미용사라는 뜻으로 흔히 쓰는 Friseurin이 아닌 Friseuse다. 주인공이 그런 내용을 언급하는 부분이 나왔는데 제대로 듣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 구글씨의 도움을 받아서 나중에 확인해 보니... 구동독 시절 여성 미용사를 Friseuse로 불렀다고... (사전적 의미로는 동의어라고 함). 아마 영화 속에서도 그런 설명이었으리라...

ps) 이 짧은 영화평은 facebook에 먼저 썼고 나중에 이 곳으로 옮겨 왔다. 아마 첫 사례일 듯한데... (지금까진 그 반대방향). blog-facebook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려는 신호일까? 아마 최근 facebook 친구 범위가 확대된 탓일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지켜 볼 일이다.

2011년 7월 24일 일요일

共振

강변 테크노 마트 진동은 12층 피트니스센터에서 진행된 '태보 운동' 때문이었다고 결론내려진 것 같다. 태보 운동의 수직 진동수 2.7Hz (1초에 2.7번 진동)가 우연히 건물 전체의 고유 수직진동수와 맞아떨어져 '공진 현상'(共振, resonance)을 일으켰다는 것.

모든 건물에 고유한 진동수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진동수만 맞다면 사소한 움짐임만으로도 예측하기 힘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영화 소재로도 사용될만한 흥미로운 사실 아닌가? 테러범들(??)이 정부요인들이(??) 묵고 있는 고층건물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태보운동'을 이용한다!!!

각설하고... 건물 뿐 아니라 사람들도 누구나 고유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물리적 진동이 아닌 사고.. 생각, 사고, 성찰의 진동수가 형성되면 새로운 정보가 주어져도 대개 그 진동 범위 내에서 이해한다. 내가 발산하는 진동수와 대화 상대의 진동수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큰 소리로 여러 사람이 떠들어도 잔향이 크지 않다. 반면에 진동수가 맞는 사람끼리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면... 엄청난 반향이 생긴다. 어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었을 때 내 속에 엄청난 반향이 일어난다면, 그건 그 양반과 나의 사고 진동수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롤 모델'로 삼을 필요가 있다.
내가 말하는 입장일 경우 청자들의 반향을 읽어 보면 드물게 큰 반향이 관찰되는 경우가 있다. 진동수가 맞은 것이다. 예전엔 "코드가 맞는다"는 표현을 썼는데, 정적인 느낌을 주는 '코드'보단 '진동수'가 더 어울리는 개념인 것 같다.

헤테로토피아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
『사물의 질서, The Order of Things, 1973』
우리가 수많은 유사한 사물들과 상이한 사물들을 분류하고자 할 때 어떤 사유 방식에 따라서 사물들을 절시화 하는지를 흥미롭게 묘사.
사유를 지배하는 질서의 법칙을 호모토피아(Homotopia)와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대립개념으로 서술.
호모토피아는 상이성을 배제하고 풍부한 통일성만을 확고한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정신의 상태를 의미, 세계의 통일된 구성체를 암시하는 감추어진 소수의 단서만을 인식하려는 성향.
헤테로토피아는 어의적인 의미로 사물들이 서로 상이한 방식으로 중첩되거나 위치하고 있어 이들 모두에게서 공통되는 위치를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물의 상태’, “혼란 속의 질서”[서구 사회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카오스 이론, 퍼지식 사고 등 새로운 학문적 접근은 우리가 무질서라고 생각하는 현상 속에도 질서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 아리스토텔레스의 2진 논리인 ‘이것 또는 이것이 아님(A or not A)’에 기초한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를 탈피하고, ‘이것과 이것이 아님(A and not A)'이라는 역설적인 논리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고의 인식을 전제]라고 사유체계를 확인가능.
하나의 고착된 사유영역에서 간과하게 되는 또 다른 사유 영역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유 체계의 다양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는데 기여"
[출처] 호모토피아, 헤테로토피아|작성자 숨


푸코는 내게 해묵은 숙제 같은 인물이다. 좀 더 진득하게 붙잡고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늘 찔끔찔금 들춰보기만 했다. 투사, 계몽가, 선구자처럼 '핫'한 하버마스보다는 '쿨'한 루만이 마음에 들긴하나 그 양반은 너무 깔끔해. 수학자 혹은 물리학자 같은 깔끔함.... 칠판 가득 각양각종 수식을 써가면서 "봤지? 니들이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한 번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해볼게. [외계어!] 그리하여... 결론은...." 이런 얘길 하는 듯한... 세상을 설명가능한 방식으로 축소하려는... 푸코는 일단 지저분한다. 루만이 보여주는 '깔끔함'이 없다. 자기 생각을 일관된 이론으로 만들 생각도 없었고, 게다가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사람을 끌리게 만드는 철학자다운 풍모랄까 그런 게 있다. 게다가 매우 극적인 삶을 살았고...
'헤테로토피아' 이야기도 난 H. Willke 저서 이름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사실 푸코가 써서 이미 유명해진 개념이더구만. 여하튼... "역설적인 것들의 공존하는 공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텐데... 요즘 상황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표현인듯. "비동시성의 동시성" 같은 표현은 이미 시간의 선후관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거림칙한 표현이 있고... "근대의 다양성" (varieties of modernity)에게도 비슷한 혐의를 씌울 수 있을 것 같고...
이제 우리가 관찰하는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현상에서 뿌리나 시작을 찾고 사건의 선후관계를 찾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접근법이다. 근대주의자들이 그리도 붙들고 싶어하는.... "근대성의 기원은 유럽" 같은 주장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젠 그런 것 따지는 행위 자체가 아주 번지 수를 잘못찾은 고리타분한 접근이라는...
어제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독교 근본주의자에다 극우적 성향을 가진 32세 청년이 저지른 학살이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며 갈등, 분쟁 없기로 유명한 노르웨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어쩌면 그런 게 헤테로토피의 한 모습일 지도... (물론 유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9.11 테러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와 뉴욕 쌍둥이 빌딩과의 조우. 아니 미국은 이미 최첨단 자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가 공존하는 헤테로토피아의 선구자 같은 존재였다).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 (A or not A), 즉 평화, 화해, 공존, 관용 아니면 갈등, 테러, 전쟁, 투쟁... 이기 때문에 "A 와 not A의 공존"이 위기거나 예외적 상황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이제 "A 와 not A의 공존"이 정상적 질서로 받아들여야 할 모양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례로 유럽인들이 수용하는 한국제 팝음악 (한류?) 등을 들 수 있겠다.

2011년 7월 22일 금요일

말을 해야 할 때와 참아야 할 때가 있는데...
때론 그 타이밍이 기묘하게 엇갈리는 경우가 있다. 한 마디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상황...
그런 위기 상황을 원천적으로 피하는 방식 중 하나가 분위기와 상관없이 일관성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 시종일관 말이 많거나, 말이 없거나... 눈치 없단 소리도 한 두번이지 이내 '에휴,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이런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절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공존.
아니.. 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선 '공존'이 아닌 '공생'에 가깝다.
그러니 시점, 관점, 강조점에 따라 다른 진술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급격한 변화가 관찰되고 변화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급격한 변화를 얘기하는 게 '오버'나 호들갑떠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변화를 강조하는 게 잘 변하지 않는 질서의 지속, 재생산을 위한 전략적 장치인 것 같기도 하고...

'다름'과 '같거나 비슷함'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시점, 관점, 강조점의 차이.
한국 문화와 독일 문화! 어떻게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매우 다르고.
국가 단위에서 작동하는 정치나 대중매체는 '다름'을 강조하거나 심지어 없던 차이도 만들어 내려고 안달하는 것 같다. 나라마다 경쟁적으로 '국가 브랜드' 어쩌구 하는 사업들을 하고 있고... 한국의 경우 '한류' 때문에 더 그런 방향이 탄력을 받고 있다. 결국 돈 좀 더 벌자는 얘기아닌가? 국가 브랜드, 한류 같은 이야기들? 문!화!산!업!
언제 어디서나 '차이' 나 '특징'은 구분을 통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지옥'이 없으면 '천국'은 있을 수 없다. '여자' 없는 '남자'가 있을 수 없고... 비정상 없는 정상은 그 의미가 성립불가하다.
그러니 중요한 질문은 '차이가 있다? 없다?' '비슷하다? 다르다?'가 아니라 '어떤 조건, 어떤 시점에서 어떤 차이가 왜 만들어지는가?'여야 한다.
'한국 문화'가 없다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어떤 특성이 한국문화라고 지칭되면 다른 문화와 구분되는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2011년 7월 21일 목요일

정보사회 담론이 지식사회, 위험사회, 네트워크사회, 탈현대사회 같은 담론에 자리를 내 주나 싶었더니 '소셜네트워크서비스' 같은 새로운 매체 덕에 다시 생명력을 얻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정보사회'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하진 않지만...
얼마 전엔 스마트폰이 삶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을 것처럼 떠들더니, 이제 그 바톤을 '클라우드 컴퓨팅'이 받아 든 형국이다.
물론 세상은 늘 변한다. 각종 정보통신기기나 네트워크가 거기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기도 한다. 아니... 때론 퇴행적으로 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정보통신기기가 그런 역변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
인터넷이란 매체 등장이 시각적 정보의 유통을 증가시키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이 '읽게' 된 경우도 '많다고' 한다. 문자문화는 영상문화로 그리 쉽게 대체될 수 없는 것.
세상이 변한다고 너무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호들갑을 떨어야 겨우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게 대중매체의 특성이고, 정보사회의 중요한 한 단면이다.
그러면 정보사회란 얘기인가?

2011년 7월 20일 수요일

한국어의 공대법, 존대법... 어렵다. 어떤 표현이 최적인지 늘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예를 들어, 비슷한 연배끼리 '자제분' 운운하는 건 너무 '닭살스럽다고' 생각해서 상대방이 내게 '자제분' 이란 표현을 쓰면서 질문을 했음에도 내가 그 상대의 가족 상황을 물으면서 '아이들'이란 표현을 썼다면... '찝찝함'이 남는다. 내 '지조'를 지키긴 했지만, 내가 평소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리 없는 상대로선 ' 예의도 모르는 저런 인간이 있느냐'고 속으로 욕했을 지도 모를 일이기에...
이런 고민을 줄이는 손쉬운 방법이 대화 상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존대하기다. 특히, 서비스업이나 안내를 맡은 사람들이 택하는 방식인데... 예를 들어 "여긴 3층이시거든요." "5천원 이세요" 등등. 처음에 이런 적절하지 않은 존대법이 몹시도 거슬렸으나, 존대법 때문에 고민하는 경우들이 생겨나면서 어쩌면 그런 '지나친 존대법'은 매우 합리적이고도 탁월한 위기 해결책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2011년 7월 15일 금요일

정보가 오고 가는 대화에서 발신, 수신 사이의 시간적 거리(pause)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경우 그 사이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의사소통한다. 다시 말해 그 거리를 인지하는 경우 - 대부분 평소보다 더 길게... - 그 상황은 재빠르게 '낯선 것', '특별한 해석이 필요한 상황', '위기'로 해석된다. 그 거리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있을 텐데 그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은 상황, 대화상대자, 문화권 등 여러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내가 경험한 상황의 경우 약 1초 정도의 지연이 있었다. 일상적으로 답변이 나오는 순간에서 약 1초 후에 답변이 나왔다는 말씀. 아니나 다를까 답변은 부정적인 내용이었다. 이렇게 지연은 대개 부정적인 답신과 연결되는 경험이 쌓이면 그런 상황을 '위기'로 해석하게 되는 것 같다. 여하튼... '위기'로 해석하기 쉬운 답신 지연 상황을 맞닥뜨려도 최대한 '쿨'하게 넘길 일이다. '위기' 상황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걸 표내는 순간! 없던 위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벗뜨... 그런 '침묵'의 순간, 답신 지연의 순간을 두려워해서 아애 그런 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 받기도 한다. 대화가 끊기는 침묵. 고요의 순간을 '위기'로 느끼는 대화 '문화'. 특히, 현대인들이 그러지 않을까?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 심지어 혼자 있는 그 순간에도... 뭔가를 듣거나 보거나...
특히 스마트폰이 널리 사용된 이후로 길을 걸으면서도 손에 든 기계를 보는 사람들이 자주 관찰된다. 보기 좋지 않는데스마트폰을 구입하게 되면 - 아이폰5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 나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
침묵, 고요함, 정보 발신과 수신 사이의 그 시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위기'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사실 침묵으로 말할 수 있는 게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어짜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은 너무도, 너무도 제한적이니까...

ps) 최근 거주하고 있는 나라를 벗어나 논문발표를 한 친구 소식을 들었는데 그 친구 연구 주제를 새삼 떠 올리면 든 생각을 팀 워크샵(이라고 부르지만 엠티 성격을 갖는...) 출발하기 전 남는 어중강한 시간을 이용해 적어 둔다.

2011년 7월 13일 수요일

過猶不及 은 진리다!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못쓰는 법! 요새 '비'가 그렇다. 지난 겨울엔 '눈'이 그렇더니...
비, 눈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드네.
하지만 그렇다고 비도 눈도 적당하고 햇볕도 적당한 그런 곳에 살면 늘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까?
노우! 네버!
'늘 좋은 날씨'는 바깥에서 봤을 때 내리는 평가다. 그 속에 들어가는 순간 다른 기준이 생기는 것.
천국에 대한 묘사는 바로 천국 바깥에서만 그릴 수 있는 그런 모습이듯....
그러니... 좋은 날씨를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요새 날씨에 고마워해야 할지도...

다른 한편, 너무 지나칠까 勞心焦思 하는 것도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중간만 하자". "튀지 말자", "남하는 만큼만 하자"...)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정하는 순간!! "제명이 됐어요!!"가 아니라....^^ 지루해지고, 고리타분해지고, 재미없어지고, 어른스러워진다.
지니침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中庸이 반드시 좋을 수도 없다.
그러니... 지혜가 필요한 것. '센스'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치를 보란 얘기가 아니라... 지혜롭게 잘 판단하라는 말이다. 세상에 '항상 이래야 한다... '는 건 없다.

2011년 7월 12일 화요일

보호는 지배의 다른 이름이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

신은 망했다.

- 이갑수, <신은 망했다>


클릭 한 번에 만난 詩이고, 한 번 더 클릭해서 이 시가 영국 시인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의 시에 나오는 구절 'God made the country, and man made the town'에 한 줄 더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갑수 시인의 재기발랄함이 놀랍고, 이런 정보를 너무 쉽게 얻을 수 있어서 한 번 더 '새삼' 놀란다.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결국 문제는 근대성이다. 사회 변화, 시대의 흐름을 높은 고도 심지어 구름 위에서 내려다 보려면 '근대성' 이란 단어를 피하기 힘들다 (물론 '근대' '근대성' '모더니티' 같은 개념을 쓰지 않고서 역사학, 사회이론 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이 있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는 얘기다). 초기 사회학자들이 '근대성' 혹은 '근대'의 등장을 설명하려 했다면, 20세기말부터 사회학자들은 이 근대성/근대의 변환을 설명하고 있다. 전근대-근대-후기-(혹은 탈-) 근대!! 이런 시대 구분, 사회 성격 구분이 너무 '도식적'이라고 비판하면서 '폐기'하자는 주장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이건 '탈근대'적 현상이라고 가볍게 이해해주시면 된다.
근대성을 추상화해서 역사적으로 유럽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는 multiple modernities 주장은 비서구인 관점에서 볼 때 위로는 될지언정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그냥 유럽에서 시작되었다고 인정해주자. 물론 그 과정 자체는 이미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유럽이 진공상태 혹은 폐쇄된 공간이 아니었기에... 그건 굳이 걔네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우연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우연... 그러니 너무 주눅 들 필요도 없고, 자존심에 상처받은 것 표내면서 '오버 리액션'할 필요도 없다.
어쨌든 그 근대는 '속성상' 특수적이기 보단 일반적, 배제적이기 보단 포용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다양한 변이, 변형은 근대에 원래부터 프로그램되어있었던 것이다. 서구가 근대의 오리지날이고 비서구는 서구를 좇아가고 (근대화) 거기에 성공하는 나라들은 다 비슷해진다는 수렴론은 이미 실패한 것으로 판명났다. 서구식 근대가 있었던 것이고, 서구란 것도 그 내부를 살펴보니 다양한 변이들이 발견되고 있고, 비서구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 다양한 근대 버전이 관찰되는 것이고... 그러니 근대의 다양성, 변이는 기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구분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지만 그래도 '근대'라는 상위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지, 그게 핵심적이 논쟁점이다. 난 그런 게 있다고 보는 것이고... 그런 '근대'가 있다고 상정하는 입장도 또 나뉜다. 그 '근대'가 생명력을 다해서 '탈근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입장과 '근대'의 핵심적 특징은 지속으로 관찰되고 있다는 입장으로.
여기에서 단일한 근대, 근대의 지역적 변이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근대'가 객관적 실체로 물건처럼 관찰되는 대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근대는 구성물이다. 모든 사회적인 것이 그러하듯이... 한국의 근대성을 유적 발굴하듯이 발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 한국도 근대라는 틀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연히 - 그렇다고 온전히 우연도 아니지만... -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성이라는 OS로 세계가 포맷되었고, 이제 그 이후론 좋건 싫건 간에 일단 근대성이라는 OS로 부팅된 상태에서 출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완전히 다른 OS를 깔 수만 있다면 우린 전혀 다른 세계사를 쓸 수 있다는 말씀...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민주주의' '인권' '자아실현' '화폐경제' 같은 근대적 결과물 위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

한국적인 것 -> 탈근대? (이어령, 김지하, 등)
"잘 이해된 말은 해갈의 생수. 그러나 잘못 이해된 말은 찌르는 칼이 된다. 말을 주고받았으니 소통? 칼을 주고받으면 서로 아픈 피만 흐를 뿐이다." (이진경)

2011년 7월 10일 일요일

한겨레 기사에서 확인한 경찰청 박현중 경감의 이런 발언은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국제기준 = 선진국기준!! 뭐 여러 분야, 특히 정책 쪽에선 늘 그래왔으니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만 너무 화끈하게 표현해서 좀 당황스럽다고 해야 하나.... '우측보행', '좌회전 신호등'에 이은 경찰들의 선진국, 국제기준 타령 제 삼탄인 셈이다. 챙피한 줄 모르는, 왜 챙피해야 하는 줄도 모르는 것 같은 저 화끈한 발언에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 (...) 현준영 분당 서울대병원(안과) 교수는 “신호등을 형태로 구분하도록 만들어 주면 색각이상자들도 무리없이 운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정지 신호인 빨간색은 삼각형, 멈춤 신호인 노란색은 사각형, 직진은 원형, 좌회전은 화살표 모양으로 바꾸면 색각이상자들이 쉽게 가려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경찰청은 이런 제안에 난색을 나타냈다. 경찰청 교통운영계 박현준 경감은 “우리만 국제기준과 다른 신호등 모양을 도입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며 “선진국이 도입한다면 우리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2011년 7월 6일 수요일

공존의 이유, 2011

너무 솔직해지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상처가 많은 우리들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그런 애기들만 나누기로 합시다

가벼운 얘기를 꺼내기 힘들다면
그 때 헤어집시다
너무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도록 합시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하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그렇게 대세를 거스르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앞에 서글픈 그 날이 올지라도
늘 해왔던대로
가벼운 눈웃음과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조병화 '공존의 이유'를 현재 내 심리상태를 관찰하며 비틀어 보다 2011.7.6.]

2011년 7월 4일 월요일



ㅋㅋ 신기하네. 물 위를 클릭해보시라...
"흥미롭게도 임재범 신드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대중은 '나는 가수다'를 서바이벌이라는 냉혹한 게임의 법칙에 맡겨두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쟁의 조건에서 처절하게 자신을 불사르는 고통의 스펙터클을 보고 싶어 한다. 이 스펙터클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윤리에 대한 대리물이라고 하겠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현실에서 강제되고 있는 경쟁구도를 ‘피도 눈물도 없는 세계’로 이해한다. 이 세계에서 이들은 자기 자신의 과잉을 드러낼 수가 없다. 이 과잉에 대한 억압이 곧 결핍을 낳는다.

결핍은 없는 것이라기보다 너무 많아서 강제로 억눌러놓은 것이다. 임재범이라는 과잉의 존재는 대중에게 ‘돌아온 탕아’라는 종교적 형상의 파토스를 각인시킨다. 이 파토스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대중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이는 탈권위적 카리스마이다. 카리스마는 카리스마이되 가르치거나 명령하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대중 앞에 반보 앞서 있는 카리스마가 필요한 것이다. 임재범에 대한 동일시는 이 때문에 일어난다. ‘고고한 천상’에 노닐던 예술가가 생활인으로 전락하는 전도된 영웅서사에 한국 사회는 쉽게 감동을 받는다.

김종서를 비롯해서 김태원에 이르기까지 이런 영웅서사를 만들어온 이들은 익히 존재했다. 과거에 청춘스타였던 노주현이나 한진희 같은 배우들이 코믹연기를 펼치면서 ‘망가지는 모습’도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한 반감이 상존한다는 사실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이지아-서태지 소송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 (이택광 블로그에서)


"고통의 스펙터클..." "임재범 = 돌아온 탕아" (가르치거나 명령하지 않고 대중 앞에 반보 앞서 있는) "탈권위적 카리스마"... 모두 설득력있는 설명인 것 같다. 세 가지로 구분해 보자.
(1) 일단 성공했거나 전문가여야 한다. 전문가적 카리스마... (사회적 지위)
(2) 그 사람은 극적 스토리를 갖춰야 한다 (필요하면 각색해서라도... 고통, 극복...),
(3) 그 사람은 대중에게 친근해야 한다. 너무 전문가인 척하면 안된다.
대중시대에 주목받고 대중적으로 성공하려면 이 세가지를 갖춰야 한다. '나가수' 바깥에도 널려 있다. 성공한 정치인들은 대개 이런 요소를 갖추고 있고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3)을 갖추지 못했고, - 그 때문에 - (2)를 더 극적으로 만들지 못했던 대표적 정치인이 이회창씨다. 그 밖에 황우석씨를 들 수 있고... 또 이건 굳이 한국 상황에만 해당하진 않는다. 오바마는 또 어떤가...
대중, 대중문화, 대중적 영웅이 막 만들어지던 시절에 - 히틀러? - 영웅은 너무 대중적이어선 안되었다. 신비주의... 없으면 오히려 만들어야 했다. 대중의 기대, 대중문화의 성격이 바뀐 것. 그저 수동적으로 소비만 하기엔 오히려 신비적 영웅이 낫다. 적극적 소비의 시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네트워크 지식사회에선 신비주의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예: 인터넷의 신상털기). 괜히 아닌 척 했다가 창피당하기 십상. 전문가가 전문가적임을 주장할 비장의 카드가 줄어든다. 조금만 노력하면 대개 갖출 수 있다. 접근 가능성은 기본적으로 열려있다. (하다못해 - 접속수가 적을 순 있겠지만 - 유투브를 통해서 공개할 수 있으니...).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 발 앞서가는... "탈권위적 카리스마"! 적절한 표현이다.

2011년 7월 2일 토요일

"이론은 근육이다. 보기에 좋은 근육도 있겠지만, 마땅히 근육이라면 힘을 쓰기에 좋아야 한다. (...) 근육을 사용해야 걷거나 달릴 수 있듯이, 이론이 있어야 우리는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는 현실의 중력에 대항해서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다른 것이야말로 '새로운 것'이다. 중력을 거스르기 위한 힘, 이것이 바로 근육의 쓸모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론은 익숙한 것들에서 낯선 것을 찾아내는 관점을 뜻하기도 한다. (...)
(...) 이론은 문제를 해설하고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론은 낡은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목험이다. (...)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의 고전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면서 읽는 게 아니라, 이론적인 관점에서 그 문제의식들에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만한 계기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 철학적 문제의식들에서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나아간 문제를 던지는 것이 이론의 역할이다. (...)
(...) 인문좌파는 기존의 정치지형도에서 합의한 우파와 좌파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주체이다.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가 바로 인문좌파다." (이택광,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중에서)

그런 좌파라면 나도 기꺼이 인문좌파하련다.
최근에 확인한 독일대학에서 보낸 '엽기적' 혹은 '소름끼치는' 공지 메일 하나. "성탄절 기간 학교 폐쇄 안내"! !
내가 '엽기적'이라고 느낀 세 가지 이유:
(1) 바깥 온도가 30도에 육박하는 이 시절에 어찌되었던 성탄절 얘길 들으니 어쨌든 조금이라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고
(2) 만성적 시간 압박 시달림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성탄절, 2011/2012... 이런 얘기만 들어도 벌써 가슴이 철렁...
(3) 6개월 이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리면서 준비하라는 독일인들의 저 '문명인'다운 ' 준비성! 숨이 턱 막히지 않는가... 모든 게 속전속결, 바로바로 서비스가 일상화된 '야만국'에 살다보니 더 그렇게 느끼게되는 듯

2011년 7월 1일 금요일

"경쟁은 몸치인 당신을 춤추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춤추는 당신은 원래의 당신이 아닐 것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다만, 이 사회에선 그러지 않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뿐."

'나가수'에서 드러난 '경쟁'의 속성을 다룬 딴지일보 한 기사의 말미다. 한국인이 이런 저런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는 것 모를 사람 없을 것이다. 그게 유독 한국에사 더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겠지만... 다만 한국이 선진국에 비해 낙오자에 대한 안전망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선 알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여하튼 '경쟁'의 지나침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나가수'에서 대해서도 쓴소리를 하는 심정 이해할 수 있다. 인용한 윗 문장도 그런 맥락에서 썼을 것이고.
난 경쟁이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는 것도 무시하지 말자는 쪽이다.

'기자'는 원래 춤이라면 질겁을 하던 사람이 경쟁 때문에 챙피함을 무릎쓰고 춤을 추는 경우를 가상의 예로 들었는데, 썩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추기 싫은 춤을 '억지로' 췄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김연우가 그런 예가 아닌가 싶다. 한 번 꼴지를 한 이후 평소 창법에 변화를 줬다고 하고 그래서 다음 번엔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김연우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엔 대단한 변화를 준 것 같지도 않았지만, 여하튼 내 눈엔 목청을 자랑하려고 오버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추기 싫은 춤을 추는...
경쟁구도에서 발생하는 변화에 대한 강박을 긍정적으로 풀어 낸 '좋은' 사례도 많이 있다. 이소라가 그랬고, 김범수가 그랬다. 특히 김범수는 기다렸다는듯이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이 평소에 해보고 싶던 공연을 펼쳤다고 했다. 그 이후주어지는 무대는 그래서 덤으로 생각한다고... 김범수는 슬픈 발라드를 잘 부르는 가수로 이미지가 굳어졌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변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무대에서 오히려 그 틀을 깰 수 있었던 것이다.
경쟁이라면 치를 떠는 그대여... 경쟁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어떤 형태의 경쟁도 사라지면 우린 과연 더 행복할까? 아니, 성적을 매기거나 줄을 세우며 평가하는 그런 외부에서 강제하는 경쟁만 문제인가? 인간은 그 내부에서 서로 다른 자아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기도 하다. 외부로 느러나는 노골적 경쟁은 그런 자아간의 경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나는 잘 모르지만 나름 유명한 역사학자인 모양이다. Time 인터뷰에 등장하는 걸 보니... David McCullogh. 흠. 데이비드 맥컬로프? 잠시 구글해 보니 한국어로는 그밖에도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불리는듯. 매컬러, 맥클라우, 머컬러 등등. 여하튼 그 양반 대답 하나가 인상에 남아서 기록해 두려고 한다.

질문: We often can't understand how people in the past could have owned slaves or not educated girls. What do you think people will wonder about us?

맥컬로프: How we could have spent so much time watching TV.

그렇지... TV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긴 하지. 때론 시청하는 시간보다 리모콘을 들고 채널 돌리는 시간이 더 많기도 하지만...
순간 난 해당되지 않는다고 좋아했다. TV 앞에 앉아 있는 절대적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생각이 이내 '인터넷'에 미쳤다. 인터넷 들쑤시고 다니는 데 소비한 그 많은 시간들... 끔찍하다. 잠 자는 시간 외엔 늘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 있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그런 얘길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이 블로그에서 언젠가 "게으름을 찬양"한다는 러셀의 발언에 동의한다는...
TV나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널려 있는 정보 속을 정처없이 떠돌게 한다는 것 (필요한 목적을 위해 선택적으로 이 매체를 이용하는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러다 좀 흥미로운 곳을 바견하면 잠시 머물고... 그러다 만나는 정보가 소 뒷걸음으로 쥐잡듯이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드문 경우고. 그러니까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은 공허한 심신, 뿌리내리기 힘든 심신이 그런 상황에 있다는 현실을 잊게 하는 역할을 한다. 질적으로 다른 상태로 이끄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시간만큼 이전 상태를 연기할 뿐이다. 잠시 잊을 뿐이다. 그건 러셀이나 정광진이 찬양하는 '게으름'이 아니다 (라고 했지만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굳이 표현하자면... "주체의 의지"라고 할까. 그저 게으름에 맡겨 버리는게 아니라, 의지적으로 게으르겠다고 하는 것... 흐음. 분명하지 않다...).

여하튼... 역사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더 겸손할 수 있고, 더 지혜로울 수 있다. 다른 '과목'(인생의 여러... ) 게을리 하는 건 용서할 수 있어도 '역사'에 무식한 것, 역사 공부 하지 않는 건 용서할 수 없다. 그 누구보다 내게 먼저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