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5일 월요일

변화를 통한 지속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어느 쪽이냐... 관점, 시점에 달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너무 열어놓는 것 역시 별로다. 이런 주장은 어떤가. 변화를 통한 지속. 변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니 변하지 않는다! 좀 더 와 닿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변화는 대개 주변부나 접경지대에서 일어나고 중심부는 그런 주변부에서의 변화를 통해서 면역력, 내성을 키워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윤리경영, 문화경영, 감성경영을 내세우는 대기업들! 대표적인 경우다. 외피를 바꿔보고, '심지어' 일부 단기적 손해를 감수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최대의 이익을 얻어내겠다는 전략 아닌가.
하지만 변화를 통한 지속이 늘 이렇게 노골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변화처럼 보이는 현상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어떤 목적달성에 기여하는지 좀 더 꼼꼼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맑시스트라면 모든 변화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질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고, ...
물론 어떤 변화를 나타내는 현상은 그저 반작용으로 이해하는 게 나을 것이다. 노르웨이 참사의 주인공, 우익세력이나 여타 근본주의 세력의 부흥이 '자본주의 질서 재생산'을 목적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세계화라는 변화 속에서 세계를 잃어버린 이들의 저항, 반작용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저항, 갈등을 얼마나 '잘' 흡수하는가가 '핵심부'의 지속을 결정짓는 중요한 이슈인 것이다. 정리하자.
변화엔 두 종류가 있다.
(1) 핵심부의 재생산을 통한 지속에 기여하는 주변부의 변화
(2) 기존 질서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나는 현상 (일탈에 가까운...)
핵심부는 (1)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다. 조장하기도 한다. (2)에 대해선 이중적 태도를 가진다. 때로는 재생산을 위해서 (2)를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근본주의를 이용해 먹는 정치집단들. 때론 (2)를 처리가능한 방식으로 거르거나 변형시켜서 재생산을 위한 조건으로 삼는다 (도덕적 논쟁을 다루는 방식인 '윤리화'가 대표적으로 그런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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