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ion"에 민족, 국가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처럼, "ethnicity"도 민족, 인종, 종족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nation과 구별하고, 또 인종엔 race란 단어가 있으니까, '종족'이 가장 적절한 번역어일 것 같지만 만족스럽진 않다) . 이 언저리에 있는 말들은 하나 같이 쓰임새가 현란해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바로 그 애매모호함 때문에 더 각광받는 단어들 아니겠는가. 물론 지역적으로 한반도, 혹은 한반도의 남반부에서는 굳이 민족, 국가(국민), 인종, 종족을 엄밀하게 구분해서 써야 필요성이 크지 않았고 그래서 심지어 "우리 나라" "우리 말글" 등등 "우리"라고 표현해도 통할 정도 아니던가. 그런 탓에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그런 '편견'을 갖고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 사례를 하나 '고백'하면..
독일 유학 초기 "위험사회학" 수업을 담당하던 선생님 - 그 당시 '교수'가 아니었단 얘기다 ㅎㅎ- 과 개인 면담 시간에서 그 '업계'에서 나름 잘 나가던 S. Jasanoff 교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때 일이다. J 교수의 '얼굴'과 '옷차림'을 사진으로 봐서 알고 있던 나는 그 "외적 조건"을 기준삼아 "그 분이 '인도인'이죠?"라고 물어봤다. 선생님 왈, "아니. 영국인일 거야..." 영국에서 공부했던 이력도 알고 있어서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마음으로' 수용되진 않았다. '한 번 해병대면 영원한 해병대'도 아니고... '출신성분'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민족''인종'적 정체성을 판단하게 되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특히 '한국인'에겐 익숙한 정체성 배치 방식이었던 것이다 (잠깐! 여기에서 '한국인'이란? ㅎㅎ).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아니 심지어 미국에서 태어난 2세라고 할 지라도 외양이 한국사람같고, 한국말 '비슷하게' 하면 한국인 취급을 해준다. 유승준 덕에 멀쩡해 보이는 한국인도 '미국인' 취급을 해 줄 수 있다는 대오각성의 쓰나미가 밀려 들기도 했지만... '출신성분'에 기초한 정체성 배치 기제는 여간해선 바뀌기 힘들 것 같다. 박노자씨가 장사하던 어떤 아주머니 (할머니?)와 얘기하던 중 자기가 한국인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인정해 주지 않다가 결국 '귀화 한국인'으로 인정을 받았다나 어쨌다나...
그리고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가진 이들도 있다. 저 북쪽 사람들이 아닌 재일 동포 중에... 분단되지 않은 '조선'을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 물론 그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공적 도움은 남, 북 그 어디에서도 기대하기 힘들다.
여하튼, nationhood, ethnicity는 앞으로 지구 어디에서나 큰 사회적 논란거리가 될 것 같다. "우리"에겐 - 아, 여기에선 '우리'는? 난 도대체 누구를 '우리'로 상정하고 있는 것일까... 어렵다... - 너무도 익숙한 민족중심주의적 생각 틀은 한 번에 모두 버리기는 좀 그렇고 - 여전히 '민족국가건설' 같은 '근대적' 과제가 남아있으니까 - 잘 고쳐서 써야 할 것이다. '우리'라는 '정체성'은 별로 나은 대안같진 않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우리말글'로 고쳐 부르는 이들이 있는 것 같은데 듣기에 나쁘진 않으나 그 '우리'의 해석 경계가 너무 열려 있어서 오히려 갑갑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ps) "the term ethnicity derives etymologically and historically from the ancience Greek ethno, meaning 'nation'" 흠. 어원학적으로 따져선 별 소득이 없다. 의미론으로 접근해야... 이 "ethno"는 "ethnomethodology"의 그 'ethno'이기도 하잖은가...
2009년 9월 25일 금요일
2009년 9월 24일 목요일
중심/ 주변
Zentrum/ Peripherie 라는 구분은 복잡성을 줄이는데 여러 모로 유용하고 실제로 알게 모르게 우리가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 구분은 우선 종속이론에서 중심부, 주변부, 반주변부 운운할 때 연상되는 그런 공간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매우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애해야 한다. 읽어야 할 논문이 너무 많다면 그 중에서 인용되는 빈도가 높은 논문을 읽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되는데, 자주 인용되는 논문은 '명성'이라는 '장'에서 중심부에 위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 중심/주변 구분은 대개 신분 질서 속에서 이해되어서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결정은 대개 귀족등 상층부에서 일어난다. 역사학에서, 역사 기술에서 '큰' 사건, 인물 등 중심부를 중심에 관심을 기울였던 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론 그런 '큰 이야기'가 아닌 '작은 이야기'를 강조하는 흐름이 없진 않다. "장기 지속"을 얘기하는 아날학파, 푸코, 문화사, 일상사 등. 그 동안 역사기술에서 배제되었던 이름없는 이들, 여성, '써발턴', 피지배자, 식민지 백성 등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제공하는 것, 혹은 복원하는 것, 절실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포스트모던"역사학이라고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허나 이런 노력이 기존 중심/주변의 구분이 갖는 제국주의적, 남성적, 지배적, 서구적 성격을 드러내고, 해체하는 것은 좋으나 그리고 난 이후에 별다른 설명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때리고 비판할 '중심'이 건재해야 그것을 해체하려는 노력이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숙주 없는 기생충 같은 그런 신세는 아닌지... 이는 역사의 역설이라고 해도 좋을 듯. 서구 여성들은 어쩌면 60년대 여성운동이 한참 달아오를 때 가장 행복했을 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선 90년대 일까?). 남성중심의 지배적 질서 (학문 포함)를 깨뜨리는 것으로... 민주화, 노동운동도 마찬가지이고. 이는 "기생"의 운명이다. '주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루만은 한편으로 근대사회는 중심/주변 구분을 부차적인 것으로 자주 얘기한다. 근대 세계사회는 전근대처럼 지역적 차이나 신분 차이가 더 이상 중요한 구분이 아니고, 자족적인 여러 기능체계가 병렬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신분제에서 해방된, 다시 말해 개인화된 '개인'은 사회의 환경에 있다고 보니까. 하지만 근대사회에 대한 루만 이론에서도 중심/주변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데 그건 바로 "Primat de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 얘기하는 그 자리에서다. "Primat"라... 참 애매하고, 비판에서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우선 다른 방식의 분화를 인정한다는 것. 사회적 불평등, 남성/여성, 민족적, 인종적 분화 등등. 기능적 분화의 관점에서 볼 때 다른 분화 원칙은 기능체계를 가로 질러서 ("quer") 관찰된다는 것. 기능적 분화의 우선성에 대한 도전은 루만 스스로 제기했다. Inklusion/ Exklusion을 "meta code"로 보면서... inclusion/ exclusoin와 세계사회의 중심부/주변부 구분이 결합되면 "Primat de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그래도... 어쨌거나 "Primat" de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가 가장 중요/우세하다고 강변하는 주장이 루만 전통 체계이론의 핵심적 주장인데,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서구중심적''남성적' '큰이야기' 등등 전형적인 비판이 제기될 것이고. 어쩌면 그런 학문적 비판, 비난의 대상으로서 현역에 있는 드문 이론이라는 점이 체계이론의 기능은 아닐지... 어제 우연히 Knorr-Cetina와 Luhmann이 별도로 행한 인터뷰를 읽었는데, 루만은 늘 하던 자기 얘기를 반복하고, Knorr-Centina는 인터뷰 1/3 정도는 루만 비판에 할애했다. 질문자의 의도에 따른 결과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체계이론이 사회학에서 중심에 있다고 보기도 힘들다. 빌레펠트에서나 그렇지... 세계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루만을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로 보는 이들이 주류가 아닌가. 그렇다면 주변부에 위치한 체계이론은 '중심'에 더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고, '기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루만은 한편으로 근대사회는 중심/주변 구분을 부차적인 것으로 자주 얘기한다. 근대 세계사회는 전근대처럼 지역적 차이나 신분 차이가 더 이상 중요한 구분이 아니고, 자족적인 여러 기능체계가 병렬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신분제에서 해방된, 다시 말해 개인화된 '개인'은 사회의 환경에 있다고 보니까. 하지만 근대사회에 대한 루만 이론에서도 중심/주변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데 그건 바로 "Primat de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 얘기하는 그 자리에서다. "Primat"라... 참 애매하고, 비판에서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우선 다른 방식의 분화를 인정한다는 것. 사회적 불평등, 남성/여성, 민족적, 인종적 분화 등등. 기능적 분화의 관점에서 볼 때 다른 분화 원칙은 기능체계를 가로 질러서 ("quer") 관찰된다는 것. 기능적 분화의 우선성에 대한 도전은 루만 스스로 제기했다. Inklusion/ Exklusion을 "meta code"로 보면서... inclusion/ exclusoin와 세계사회의 중심부/주변부 구분이 결합되면 "Primat de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그래도... 어쨌거나 "Primat" de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가 가장 중요/우세하다고 강변하는 주장이 루만 전통 체계이론의 핵심적 주장인데,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서구중심적''남성적' '큰이야기' 등등 전형적인 비판이 제기될 것이고. 어쩌면 그런 학문적 비판, 비난의 대상으로서 현역에 있는 드문 이론이라는 점이 체계이론의 기능은 아닐지... 어제 우연히 Knorr-Cetina와 Luhmann이 별도로 행한 인터뷰를 읽었는데, 루만은 늘 하던 자기 얘기를 반복하고, Knorr-Centina는 인터뷰 1/3 정도는 루만 비판에 할애했다. 질문자의 의도에 따른 결과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체계이론이 사회학에서 중심에 있다고 보기도 힘들다. 빌레펠트에서나 그렇지... 세계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루만을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로 보는 이들이 주류가 아닌가. 그렇다면 주변부에 위치한 체계이론은 '중심'에 더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고, '기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사람이었네': 체계이론이 '발견'한 인간(!?)
루만은 'Inklusion'이란 개념을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심리체계와 사회체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사용한다. 이때는 T.Parsons와 T.H.Marshall이 사용했던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루만이 Inklusion/ Exklusion 개념쌍을 도입하고, 특히 Inklusion이 아닌 Exklusion에 '급'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개 1990년대 이후라고 얘기한다. 1990년대 초에 브라질 빈민가(favela)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 "eher unfreiwillig" Esser 2000:411 - '육체'로만 이해되고, 커뮤니케션의 영역, 즉 사회 바깥으로 배제된 인간들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여러 학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일화라 없던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 한 사건이 미친 영향이 그 정도 컸을지 의심스럽다). 이런 후기 루만의 '인간 발견'을 Esser(2000)가 매우 냉소적으로 비꼬았는데, "ein unfassbarer theoretischer Schock"이란 표현도 쓰고 학술 논문에서 발견하기 힘든 "unglaublich!"란 단어도 최소한 두 번 등장한다. Nassehi(2000)는 "마침내 인간을 발견했다고?"라고 의문부호를 달면서 '정통' 체계이론 입장에서 Esseer와 같은 맥락에서 Schimank등도 비판하는 것 같은데, 정작 후기루만이 '인간'을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는 것 같다 (꼼꼼히 읽어보지 않아서...). 이전 논문에서는 "후기 루만의 인간 발견 테제"를 스스로 주장하는 것 같았고... (Nassehi/ Nollmann 1997).
- Esser, Hartmut (2000), Inklusion und Exklusion – oder: die unvermutete Entdeckung der leibhaftigen Menschen und der Not in der Welt durch die soziologische Systemtheorie, in: Oskar Niedermayer/ Bettina Westle (eds.), Demokratie und Partizipation.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407 – 146.
- Nassehi, Armin (2000), Endlich die Menschen entdeckt? Über einige Unschärfen im Diskurs um ‚Inklusion und Exklusion’. Vortrag auf dem Workshop „Inklusion und Exklusion“ an der Universität Mannheim am 6. Juli 2000 (pdf)
- Nassehi, Armin/ Nollmann, Gerd (1997) ‘Inklusionen. Organisationssoziologische Ergänzungen der Inklusions-/Exklusionstheorie’, Soziale Systeme 3(2): 393–411.
내 경우 공교롭게도 독일체류를 마무리할 즈음에서야 루만이 그의 이론 여정 끝에서 인간을 발견했음을 발견했다. Inklusion/Exlusion 얘기야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고 심지어 관련 논문을 여러 편 읽기까지 했지만 그 논쟁이 갖는 의미를 그 동안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포함/배제 논쟁을 좇아가면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이지만, 루만은 그 이론 비행 여정에서 1984년 Soziale Systeme에서 가장 높은 고도로 날았고, 그 이후로는 점점 고도를 낮추어 왔다. 그럴수록 수학적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깔끔했던 체계 이론 비행기는 공격받고, 상처를 입어서 결국 착륙할 무렵렝 여기 저기 때운 흔적을 감추지 못한 고물이 되어버렸다. 한 쪽에서 고물비행기를 폐기처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체계이론가들은 그런 고물이라도 잘 고쳐서 쓰면 한참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고 항변하고 있는 형국 아닌가...
- Esser, Hartmut (2000), Inklusion und Exklusion – oder: die unvermutete Entdeckung der leibhaftigen Menschen und der Not in der Welt durch die soziologische Systemtheorie, in: Oskar Niedermayer/ Bettina Westle (eds.), Demokratie und Partizipation.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407 – 146.
- Nassehi, Armin (2000), Endlich die Menschen entdeckt? Über einige Unschärfen im Diskurs um ‚Inklusion und Exklusion’. Vortrag auf dem Workshop „Inklusion und Exklusion“ an der Universität Mannheim am 6. Juli 2000 (pdf)
- Nassehi, Armin/ Nollmann, Gerd (1997) ‘Inklusionen. Organisationssoziologische Ergänzungen der Inklusions-/Exklusionstheorie’, Soziale Systeme 3(2): 393–411.
내 경우 공교롭게도 독일체류를 마무리할 즈음에서야 루만이 그의 이론 여정 끝에서 인간을 발견했음을 발견했다. Inklusion/Exlusion 얘기야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고 심지어 관련 논문을 여러 편 읽기까지 했지만 그 논쟁이 갖는 의미를 그 동안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포함/배제 논쟁을 좇아가면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이지만, 루만은 그 이론 비행 여정에서 1984년 Soziale Systeme에서 가장 높은 고도로 날았고, 그 이후로는 점점 고도를 낮추어 왔다. 그럴수록 수학적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깔끔했던 체계 이론 비행기는 공격받고, 상처를 입어서 결국 착륙할 무렵렝 여기 저기 때운 흔적을 감추지 못한 고물이 되어버렸다. 한 쪽에서 고물비행기를 폐기처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체계이론가들은 그런 고물이라도 잘 고쳐서 쓰면 한참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고 항변하고 있는 형국 아닌가...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얘기하고 싶은 욕구

좀 뜬금없을까, 이런 사진을 올리는 '짓'이? 웬 여배우 사진? 자, 그렇담 이제 이 사진을 올리기까지 내 의식의 흐름을 한 번 추적해 보기로 하자.
블로그에 무엇인가를 '올리고' 싶은 욕구, 그건 어쩌면 소통에 대한 욕구일 수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는 우화 속 그 주인공이 가졌을... 작가들은 대개 그런 욕망을 유난히 강하게 느끼는 이들 아니던가... 얘기하고 싶은 욕망... 그 소통에 대한 욕구의 내용은 결국 지금 내가 느끼는 바, 심정, 심리상태를 알리고, '공감시키고' 싶은 마음 아닐까? 그런 욕구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고 실제로 - 누가 알려주기 않아도 - 여러 방식으로 배출, 분출하고 있을 것이다. '잡담','수다'가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표적 기제일 것이고 그럴 대상이 주위에 없을 때 인터넷, 블로그로 향하게 되는 것 아닐까? 사회학에서 쓰는 표현을 좇는다면... 이 경우 '블로그'는 '대화 상대'의 '기능적 등가물'(functional equivalence)이다. 익명의 상대에게 건내는 내 소식(메시지)...
여하튼.. 지금 내 심리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까 고민하던 중, 숙제하는 마음으로 가끔씩 들르는 '이동진의 영화풍경'에서 윗 사진을 발견하고선 "바로 이거다"라는 느낌을 얻었던 것. 이 사진을 올리면서 난 전도연이란 배우 '개인'에 대한 정보가 아닌 이 '사진'에서 내가 얻었던 느낌을 전달하고 싶은 거다. 허나 '그림'이 그런 것처럼 이 '사진'이 주는 정보 역시 '글'과는 다르게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어서 과연 내가 느낀 바가 전달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전도연... 사실 잘 모른다. 아니, 특별히 자세히 알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지도 않았던 평범한 배우였다. 물론 '밀양'에서 했던 연기는 어쨌든 높게 평가할만하고, '멋진 하루'에서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도 그리 깊이 있는 배우라는 생각을 해 보진 않았는데... 이 사진(과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일련의 다른 사진)은 매우 좋다. '사진발'로 돌리기 힘든 그 어떤 힘, 깊이가 느껴진다 (장진영도 비슷한 느낌을 전해주는 사진을 남겼던 것 같다) [그런 사진발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다른 배우들 사진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느낌이 좋다. 난 단지 그 '느낌'을 전하고 싶은 거고... '해석'은 독자의 몫일 뿐이고... 관찰에 대한 관찰에 대한 관찰...
(사진 출처, 작가는 김현호)
2009년 9월 21일 월요일
정체성, 체계
교회 규정 검토하는 일을 마무리 하려고 열심히 논의하던 중 발견한 사실. 규정엔 '교인'과 '회원'이라는 표현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이 비슷한 두 표현이 도대체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을까?
우선 '교인'을 다시 세 등급의 '회원'으로 구분하는 맥락에서 두 표현으로 사용된다. 교인을 정회원, 준회원, 아동회원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하지만 '교인'이라는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하려면 '정교인', '준교인', '아동교인'으로 부르면 되는데, 굳이 왜 '회원'이라는 표현을 도입했을까?
내 생각에 이는 서로 다른 체계에 준거하고 있는 정체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 같다. 체계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교인'은 Vollinklusion을 전제로 하는 종교 (혹은 기독교) 라는 '기능체계'에 대한 것이고, '회원'은 구성원 포함/배제가 일상사인 '조직체계'에 대한 것이다. 규정 작성자가 이런 체계이론적 구분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상상하긴 힘들지만, 만약 내 견해에 일리가 있다면 이는 체계이론이 도입하고 있는 사회체계의 구분이 - 사회, 조직, 상호작용 - 현장에서 (vor Ort) 일어나는 개별 커뮤니케이션을 분석하는데 유용한 범주를 제공함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체계는 그저 체계이론가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단위"(imagined unity)가 아닌 것이다.
그나저나 교회'일'을 하면서 '포함/배제' '정체성'등 사회학적 연관성을 떠올리는 이 '직업의식', 캬... 이런게 '사회학'의 매력이자 '사회학(도)/자'의 운명, 뭐 그런 것 아닐까. 문제라면 당사자들 빼곤 그 누구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얘길 주로 한다는...^^ 그 정도?
우선 '교인'을 다시 세 등급의 '회원'으로 구분하는 맥락에서 두 표현으로 사용된다. 교인을 정회원, 준회원, 아동회원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하지만 '교인'이라는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하려면 '정교인', '준교인', '아동교인'으로 부르면 되는데, 굳이 왜 '회원'이라는 표현을 도입했을까?
내 생각에 이는 서로 다른 체계에 준거하고 있는 정체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 같다. 체계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교인'은 Vollinklusion을 전제로 하는 종교 (혹은 기독교) 라는 '기능체계'에 대한 것이고, '회원'은 구성원 포함/배제가 일상사인 '조직체계'에 대한 것이다. 규정 작성자가 이런 체계이론적 구분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상상하긴 힘들지만, 만약 내 견해에 일리가 있다면 이는 체계이론이 도입하고 있는 사회체계의 구분이 - 사회, 조직, 상호작용 - 현장에서 (vor Ort) 일어나는 개별 커뮤니케이션을 분석하는데 유용한 범주를 제공함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체계는 그저 체계이론가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단위"(imagined unity)가 아닌 것이다.
그나저나 교회'일'을 하면서 '포함/배제' '정체성'등 사회학적 연관성을 떠올리는 이 '직업의식', 캬... 이런게 '사회학'의 매력이자 '사회학(도)/자'의 운명, 뭐 그런 것 아닐까. 문제라면 당사자들 빼곤 그 누구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얘길 주로 한다는...^^ 그 정도?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Bach, Sinfonia No. 2 in C minor (Glenn Gould)
모처럼 좀 쉬어가자는 순서(?!).
'비상시국'에 돌입한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있는 음악이 있는데 바로 Glenn Gould가 연주한 Bach Iventions & Sinfonias. 유투브에 여러 곡이 올라왔는데 그 중에서 좀 느린 편인 Sinfonia No. 2를 골랐다. 좀 집중해야 할 때 배경으로 깔아 놓는 음악은 있는 듯 없는 듯 한 게 미덕인데, 그것에 딱 어울리는 앨범. 기름을 쫙 빼고, 별다른 양념도 하지 않은 담백한 '맛'을 전해주지 않는가... '바흐'답게...
2009년 9월 17일 목요일
Integration/ Inklusion
Lockwood: system integration/ social integration
Luhmann: Integration/ Inklusion (Exklusion)
- Integration: social systems, structural coupling...
- Inklusion: Menschen als Personen in Kommunikationszusammenhänge behandelt, addressiert...(cf. 1984, Verhätnisse zwischen pyschische und soziale Systeme)
Bourdieu(?): Integration = Inklusion
Habermas/ B.Peters: Integration durch Inklusion (참여-숙의 민주주의)
Luhmann/ Bora: Integration durch Inklusion? (eine offene Frage)
Luhmann: Integration/ Inklusion (Exklusion)
- Integration: social systems, structural coupling...
- Inklusion: Menschen als Personen in Kommunikationszusammenhänge behandelt, addressiert...(cf. 1984, Verhätnisse zwischen pyschische und soziale Systeme)
Bourdieu(?): Integration = Inklusion
Habermas/ B.Peters: Integration durch Inklusion (참여-숙의 민주주의)
Luhmann/ Bora: Integration durch Inklusion? (eine offene Frage)
청년과 '어른'
'오빠와 아저씨를 구분하는 법'을 듣고서 공감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청년과 어른 구분하기'다. 물론 여기에서 '어른'은 청년기를 지난 어른을 얘기한다. 청년과 어른이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너무 따지지 말자, 피곤하다^^ 그리고 ideal type으로 생각하도록 하자. 어른은 의견 갈등이 있을 때 자신의 생각, 판단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타인이 바꾸길 기대, 요구하는 이들이고, 청년은 자신을 돌아보아 생각, 견해를 바꾸는 일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 어른은 대개 청년에 비해 삶에 대한 생각, 태도를 바꾸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을 때 치뤄야할 비용이 훨씬 크기 때문에 '어른스럽게' 행동하게 된다! 대신 '청년다움'은 잃게 될 수밖에...
남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은 - 학문이든 일상사든 - 易地思之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내 경험과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 평생 좇아야 할 길이고...
남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은 - 학문이든 일상사든 - 易地思之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내 경험과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 평생 좇아야 할 길이고...
'박재범 논란'에 대한 경쾌한 혹은 좀 모자란 분석
김어준 씨의 '작품' (한계레 기사)
애국주의나 '파시즘'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 박재범 발언을 문제 삼은 이들은 여러 부류가 있는데 (세 가지로 구분) "이 셋 중 가장 수가 많았던 건 첫 번째요 가장 먼저, 격하게 반응한 건 두 번째며 가장 본질과 거리가 있었던 건 세 번째였으되,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두 번째가 세 번째의 언어를 구사하며 첫 번째처럼 행동하면서다. 두 번째는 세 번째의 이념을 차용해 자신들의 분노를 정당화한다." 세번째가 "아니 대한민국을 비하했다고? 있을 수 없지. 딱 그만큼. 이 순수하게 우파적, 보수적, 국가주의적 관점" 첫 번째는 "소비자로서의 반응. 우리 동네서 장사하면서 우리 동네 욕했다고, 우씨." 두 번째는 "문화 소비자가 아니라 수컷 경쟁자로서의 반응. 돈 많이 벌고 인기도 있고 미국 시민권도 있는데다가 군대까지 안 가는 자식이 뭐라고."
그런데 왜 세 번째 이념을 차용할까? 이게 재미있는 분석이고 민족주의에 대한 내 지론과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게 안전하니까>. 나를 주눅 들게 만들던 알파 수컷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애국의 완장까지 채워진다.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러자 그 완장을 애국주의의 집단발호로 해석하고 만 먹물들의 관습적 훈시가 등장한다. 그것은 파시즘이다!"
"'애국’ 감성은, 일차적이고 원시적인 공동체적 감수성이다. 그게 다치면 집단 반응하는 것까진 당연한 거다. 문제는 그 정도를, 우리 사회가 자율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 뿐. 그런데 그런 감성의 존재 자체를 촌스럽고 위험하다 여기는 게, 비장한 책무인 줄 아는 흐름, 있다. 자신의 열패감을 애국주의로 치환하는 치졸한 수작들만큼이나 웬만한 ‘애국’ 감성은 간단히 파시즘으로 매도하는 그 게으르고 강박적인 호들갑이 안쓰럽다. 그건 오만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지적 태만이다."
이런 '감'도 되지 않는 일을 크게 만드는 주범으로 몰고 가는 '언론'이 문제라는 건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지 김어준씨는 - 상대적으로 덜 만만한 - "먹물"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용기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언젠가부터 가르치려 '드는' '지식인''먹물'을 비난하는 대중주의적 정서 대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그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자신이 언급하는 그 '흐름'이 그렇게 단순하게 요약될 수 있지 않는다는걸 모른다면 이건 그의 '지적 태만'이다.
애국주의나 '파시즘'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 박재범 발언을 문제 삼은 이들은 여러 부류가 있는데 (세 가지로 구분) "이 셋 중 가장 수가 많았던 건 첫 번째요 가장 먼저, 격하게 반응한 건 두 번째며 가장 본질과 거리가 있었던 건 세 번째였으되,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두 번째가 세 번째의 언어를 구사하며 첫 번째처럼 행동하면서다. 두 번째는 세 번째의 이념을 차용해 자신들의 분노를 정당화한다." 세번째가 "아니 대한민국을 비하했다고? 있을 수 없지. 딱 그만큼. 이 순수하게 우파적, 보수적, 국가주의적 관점" 첫 번째는 "소비자로서의 반응. 우리 동네서 장사하면서 우리 동네 욕했다고, 우씨." 두 번째는 "문화 소비자가 아니라 수컷 경쟁자로서의 반응. 돈 많이 벌고 인기도 있고 미국 시민권도 있는데다가 군대까지 안 가는 자식이 뭐라고."
그런데 왜 세 번째 이념을 차용할까? 이게 재미있는 분석이고 민족주의에 대한 내 지론과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게 안전하니까>. 나를 주눅 들게 만들던 알파 수컷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애국의 완장까지 채워진다.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러자 그 완장을 애국주의의 집단발호로 해석하고 만 먹물들의 관습적 훈시가 등장한다. 그것은 파시즘이다!"
"'애국’ 감성은, 일차적이고 원시적인 공동체적 감수성이다. 그게 다치면 집단 반응하는 것까진 당연한 거다. 문제는 그 정도를, 우리 사회가 자율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 뿐. 그런데 그런 감성의 존재 자체를 촌스럽고 위험하다 여기는 게, 비장한 책무인 줄 아는 흐름, 있다. 자신의 열패감을 애국주의로 치환하는 치졸한 수작들만큼이나 웬만한 ‘애국’ 감성은 간단히 파시즘으로 매도하는 그 게으르고 강박적인 호들갑이 안쓰럽다. 그건 오만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지적 태만이다."
이런 '감'도 되지 않는 일을 크게 만드는 주범으로 몰고 가는 '언론'이 문제라는 건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지 김어준씨는 - 상대적으로 덜 만만한 - "먹물"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용기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언젠가부터 가르치려 '드는' '지식인''먹물'을 비난하는 대중주의적 정서 대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그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자신이 언급하는 그 '흐름'이 그렇게 단순하게 요약될 수 있지 않는다는걸 모른다면 이건 그의 '지적 태만'이다.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파시즘
황우석 사태나 '디워' 사태 때 '대중독재', '유사파시즘' 같은 얘길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요샌 파시즘이란 표현이 '정권'에게 돌아간다. 이제 좀 균형이 맞게 된 건가? 노무현 때 같았으면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정도 시위가 일어났다면 또 대중독재 같은 표현이 등장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제 그런 운동은 파심즘적 정권에 대한 정당한 반대로 이해된다. 어쨌든 난 2mb 정부에게 '파시즘'이란 표현은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마찬가지로 황우석 때 대중들의 '열광'에 '대중독재' 같은 무시무시한 개념을 쓰고 싶지도 않다. 한국 사회,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 좋아지고 있다. 2mb 시대의 역할은 한 박자 쉬면서 우리 자화상을 한 번 그려 보게 하는 것 정도? 이게 우리 자화상이다. 최근 국정지지도가 5할을 넘어가는 그런... 슬픈 우리의 자화상...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체계이론과 STS
루만의 체계이론과 Science & Technlogy Studies 관계에 대해서 이미 적지 않은 논문들이 나와있다. 최근에 '발굴'한 G.Wagner(1998)의 논문을 읽던 중 눈에 띄는, 그러니까 정곡을 찌르는 비교점이 있어서 옮겨 놓는다.
"Soziale Systeme wie die Gesellschaft bestehen nicht aus Dingen, aber sie bauen auf ihnen auf. Der Satz, die Gesellschaft besteht aus Kommunikation, ist also eine extrem verkürzte Schreibweise einer vollständigeren Version...(SS 240). (...) Die STS interessieren sich aber nun gerade für diese Gesamtheit, sie wollen sie keinesfalls aus den Augen verlieren. Alles, was in einer Situation anwesend ist, sollte auch in seinem Anteil daran gewürdigt werden, und sei dieser noch so marginal. Die ommunikation wird nicht für wichtiger erachtet als die Telephone, die sie ermöglichen."(578f)
"Diesem Vollständigkeitsanspruch der STS scheint die kommunikationsfixierte Systemtheorie nicht genügen zu können" (582)
이렇게 루만과 STS를 서로 나란히 진행되어 교집합을 찾기 힘든 두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는 건 익숙한 설명방식이다. Wagner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루만이 확장시킨 '인식','관찰' 개념에서 STS적 가능성을 발견한다.
"Folgen wir hier Luhmann, läßt sich eine ganz neue Hierarchie von Fähigkeiten erstellen, die das Soziale unter sich ausmachen: Wer beobachtet, gehört dazu. Mit einem solchermaßen 'flach' ansetzenden Beobachterbegriff läßt sich ganz ausgezeichnet techniksoziologisch arbeiten." (582)
이후 Wagner가 설명하는 내용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내 독해력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듯. 왜냐면 그 스스로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Einer fruchtbaren Zusammenarbeit steht also vielleicht doch nicht soviel im Wege." (588)
여하튼 루만은 "die ältere Technikkritik"처럼 "Marginalisierung des Individuums durch die Technik"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 기술결정론에 가까운.. - "Tandem von Technik und Individualisierung, mit dem wir in die Nebel der Zukunft fahren" (1991b: 23) 같은 얘기로 그런 혐의를 피해보려고도 한다. 다른 관심, 즉 출발점,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이론을 애써 화해시킬 필요가 있을까? 차이를 분명하게 해두는 것은 필요한 일지만... 다름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악수를 교환하고서 제 갈길을 가면 된다.
- Wagner, Gerald (1998), Niklas Luhmanns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und ihre Bedeutung für die Wissenschafts- und Technikforschung, Journal for History of Law (Rechtshistorisches Journal) 17: 574 – 588.
- Albertsen, N./ Diken, B. (2004), Artworks networks - field, system or mediators? Theory, Culture & Society, 21 (3): 35-58
- Farías, Ignacio (2005), Gebt mir einen Doppeldecker und ich werde die Stadt von dessen Dach aus verwandeln, in: die Stütze: Nr. 10 Oktober 2005: 5 – 8.
- Fuchs, Stephan/Marshall, Douglas A. (1998): Across the Great (and Small) Divides. In: Soziale Systeme 4 (1): 5-30.
- Lorentzen, Kai F. (2002), Luhmann goes Latour - Zur Soziologie hybrider Beziehungen. In: Rammert, Werner/Schulz-Schaeffer, Ingo (Hg.): Können Maschinen handeln? Soziologische Beiträge zum Verhältnis von Mensch und Technik. Frankfurt a.M./New York: Campus, S. 101-118.
- Noe, Egon/ Alrøe, Hugo Fjelsted (2006), Combining Luhmann and Actor-Network Theory to see Farm Enterprises as Self-organizing Systems. In: Cybernetics and Human Knowing, 13 (1): 34-48.
- Teubner, Gunter (2006), Rights of Non-humans? Electronic Agents and Animals as New Actors in Politics and Law, in: Journal of Law and Society 33(4): 497 – 521.
"Soziale Systeme wie die Gesellschaft bestehen nicht aus Dingen, aber sie bauen auf ihnen auf. Der Satz, die Gesellschaft besteht aus Kommunikation, ist also eine extrem verkürzte Schreibweise einer vollständigeren Version...(SS 240). (...) Die STS interessieren sich aber nun gerade für diese Gesamtheit, sie wollen sie keinesfalls aus den Augen verlieren. Alles, was in einer Situation anwesend ist, sollte auch in seinem Anteil daran gewürdigt werden, und sei dieser noch so marginal. Die ommunikation wird nicht für wichtiger erachtet als die Telephone, die sie ermöglichen."(578f)
"Diesem Vollständigkeitsanspruch der STS scheint die kommunikationsfixierte Systemtheorie nicht genügen zu können" (582)
이렇게 루만과 STS를 서로 나란히 진행되어 교집합을 찾기 힘든 두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는 건 익숙한 설명방식이다. Wagner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루만이 확장시킨 '인식','관찰' 개념에서 STS적 가능성을 발견한다.
"Folgen wir hier Luhmann, läßt sich eine ganz neue Hierarchie von Fähigkeiten erstellen, die das Soziale unter sich ausmachen: Wer beobachtet, gehört dazu. Mit einem solchermaßen 'flach' ansetzenden Beobachterbegriff läßt sich ganz ausgezeichnet techniksoziologisch arbeiten." (582)
이후 Wagner가 설명하는 내용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내 독해력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듯. 왜냐면 그 스스로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Einer fruchtbaren Zusammenarbeit steht also vielleicht doch nicht soviel im Wege." (588)
여하튼 루만은 "die ältere Technikkritik"처럼 "Marginalisierung des Individuums durch die Technik"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 기술결정론에 가까운.. - "Tandem von Technik und Individualisierung, mit dem wir in die Nebel der Zukunft fahren" (1991b: 23) 같은 얘기로 그런 혐의를 피해보려고도 한다. 다른 관심, 즉 출발점,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이론을 애써 화해시킬 필요가 있을까? 차이를 분명하게 해두는 것은 필요한 일지만... 다름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악수를 교환하고서 제 갈길을 가면 된다.
- Wagner, Gerald (1998), Niklas Luhmanns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und ihre Bedeutung für die Wissenschafts- und Technikforschung, Journal for History of Law (Rechtshistorisches Journal) 17: 574 – 588.
- Albertsen, N./ Diken, B. (2004), Artworks networks - field, system or mediators? Theory, Culture & Society, 21 (3): 35-58
- Farías, Ignacio (2005), Gebt mir einen Doppeldecker und ich werde die Stadt von dessen Dach aus verwandeln, in: die Stütze: Nr. 10 Oktober 2005: 5 – 8.
- Fuchs, Stephan/Marshall, Douglas A. (1998): Across the Great (and Small) Divides. In: Soziale Systeme 4 (1): 5-30.
- Lorentzen, Kai F. (2002), Luhmann goes Latour - Zur Soziologie hybrider Beziehungen. In: Rammert, Werner/Schulz-Schaeffer, Ingo (Hg.): Können Maschinen handeln? Soziologische Beiträge zum Verhältnis von Mensch und Technik. Frankfurt a.M./New York: Campus, S. 101-118.
- Noe, Egon/ Alrøe, Hugo Fjelsted (2006), Combining Luhmann and Actor-Network Theory to see Farm Enterprises as Self-organizing Systems. In: Cybernetics and Human Knowing, 13 (1): 34-48.
- Teubner, Gunter (2006), Rights of Non-humans? Electronic Agents and Animals as New Actors in Politics and Law, in: Journal of Law and Society 33(4): 497 – 521.
2009년 9월 13일 일요일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정체성 - 가족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위치
질병관리본부가 2006~2008년까지 응급실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회복된 자살시도자 1천59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족구성원 또는 연인과 갈등’을 원인으로 든 사례가 46.5%를 차지했다고 한다. 반면 우울증을 포함 각종 정신건강 상태로 인해 자살을 시도했다는 답은 14.1%에 그쳤다.
이런 통계치를 해석할 때는 항상 삐딱한 시선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선 자살 시도한 후 '실패(?!)해서' 응급로 후송된 경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 (기사에서도 "자살 사망자의 동기와는 다를 수 있다"는 질병관리본부의 설명을 덧붙이긴 했다). 또 기사에서도 연구자의 발언으로 소개되었듯이 "이같은 결과는 외국에 비해 우울증 치료를 많이 받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만약 가족 간 갈등의 결과 우울증 치료를 받는 경우는 어느 쪽에 해당하는 것이지? 두 가지 카테고리 '가족 간 갈등', '우울증'이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고서라도 기사가 전하는 내용이 내 평소 관찰 혹은 상식에 비추어 봐서 크게 어긋나지 않기에 정보가 쉽게 수용된다.
생명윤리학자들도 비슷한 얘길한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 참여할 때 '정보를 제공하고서 동의'를 받는 절차가 있는데 ('informed consent') '서구적' 전통에서는 대개 '당사자'가 그 결정권자이다 (혹은 다른 의료시술에 대한 결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터이다). 현대 문명은 지역적 편차가 있겠지만 대개 개인, 개인주의, 개별 책임을 근간으로 하고 있고, 이 경우도 그런 이해를 근거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아시아권'에서는 개인의 동의 이외에 '가족'의 동의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실정'에 맞는 것이라고 생명윤리학자들은 얘기한다.
주체, 개인의 위치는 여러 좌표에서 설정되는데 - 계급, 체계, 지역, 학교 등등 - 특히 한국인들에 '가족' 내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맺어진 관계 속에서 갖는 위치가 무척 중요하다는 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얘길 좀 실감나게 전해주는 사회과적 연구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다들 큰 얘기에만 너무 열중하는 탓일까? including me....
이런 통계치를 해석할 때는 항상 삐딱한 시선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선 자살 시도한 후 '실패(?!)해서' 응급로 후송된 경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 (기사에서도 "자살 사망자의 동기와는 다를 수 있다"는 질병관리본부의 설명을 덧붙이긴 했다). 또 기사에서도 연구자의 발언으로 소개되었듯이 "이같은 결과는 외국에 비해 우울증 치료를 많이 받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만약 가족 간 갈등의 결과 우울증 치료를 받는 경우는 어느 쪽에 해당하는 것이지? 두 가지 카테고리 '가족 간 갈등', '우울증'이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고서라도 기사가 전하는 내용이 내 평소 관찰 혹은 상식에 비추어 봐서 크게 어긋나지 않기에 정보가 쉽게 수용된다.
생명윤리학자들도 비슷한 얘길한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 참여할 때 '정보를 제공하고서 동의'를 받는 절차가 있는데 ('informed consent') '서구적' 전통에서는 대개 '당사자'가 그 결정권자이다 (혹은 다른 의료시술에 대한 결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터이다). 현대 문명은 지역적 편차가 있겠지만 대개 개인, 개인주의, 개별 책임을 근간으로 하고 있고, 이 경우도 그런 이해를 근거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아시아권'에서는 개인의 동의 이외에 '가족'의 동의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실정'에 맞는 것이라고 생명윤리학자들은 얘기한다.
주체, 개인의 위치는 여러 좌표에서 설정되는데 - 계급, 체계, 지역, 학교 등등 - 특히 한국인들에 '가족' 내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맺어진 관계 속에서 갖는 위치가 무척 중요하다는 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얘길 좀 실감나게 전해주는 사회과적 연구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다들 큰 얘기에만 너무 열중하는 탓일까? including me....
2009년 9월 10일 목요일
정체성... 포섭/배제
나는 누구인가? 동서고금 이런 질문을 무수한 '사람들'이 던졌겠지만,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묻는 일이 자연스럽다는 건 지극히 '근대'스러운(?!) 현상임에 분명하다 ('근대'는 커녕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도 이미 낡아버린 이 포스트-포스트모던 시대에 '근대' 운운하는 '큰 얘기'를 꺼내기가 부담스럽긴 하다. 계속 고민할 거리...). '개인'(individuum)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에 출생했으니까. (우리말 '개인'은 일본에서 만들어낸 번역어). 인간을 '개인''주체'로 보는 것, 개인의 탄생, 주체의 발견, 사실 이게 근대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권'의 탄생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스토리'다. 다른 정체성의 등장은 좀 더 역설적이다. 예를 들어 '시민'(권), 국민, 민족 같은 정체성은 개인, 주체 발견과 그것의 사회적 조건인 기능적 분화의 뒷 이야기다. 기능체계는 모두 개인들이 각 기능체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universalism). 여러 기능 체계마다 다른 '출입증'이 필요한 것. individuum 은 dividuum이 되었다. 정체성 혼란, 위기... 민족, 시민, 국민 등은 그런 '주체 분열'에 대한 긴급처방인 것이다 (루만 표현으로 transitorische Semantik). 모두가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것 사실 커뮤니케이션에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구분을 할 수 없으니... '불평등'에 대한 기능적 요구.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혹은 근대적 의미로 재창조해낸다 (물론 체계 내부에서 다른 역할을 갖기에 주어지는 다른 정체성, 그것은 배제하고서라도... cf. Stichweh). 우선 "조직"이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어떤 대학 출신인지.. 학벌! 심지어 '지방대', '수도권대'라는 구분. 혹은 지역적 차별: 전라도, 경상도. 혹은 성에 기초한 정체성, 남성, 여성; 호모, 헤테로. 한국인, 외국인; 백인, 흑인, 이도 저도 아닌; 등등. 기능체계와 크게 관련 없는 여러 정체성들이 커뮤니케이션 재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체계이론은 '불평등'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능체계의 재생산은 '불평등'에 상당히 강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Luhmann, Nassehi). 그래서 조직 차원에서 포섭, 배제 메카니즘을 봐야 불평등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Nassehi).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직'을 통해서 다룰 수 있는 불평등, 정체성 제공 논의의 여지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아.. 원래 하려고 했던 얘기는... (1) '국민''한국인' 혹은 '인종'(피부색깔)으로서의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계에 기초한 정체성을 쉽게 무력화시키는. (2) 한국인들의 정체성 중에서 가장 취약한 게 '시민'이 아닌가 싶다. '공화국의 시민'. 국가와 계약을 맺은 그런 존재. 그 계약 속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시민'이라는 인식, 한국인이 아니라. 탁석산씨가 '시민국가'라는 개념을 제기했다는데 이런 맥락에서 한 얘기일 것이다. 아, 생각이 come and go... here and there...
아.. 원래 하려고 했던 얘기는... (1) '국민''한국인' 혹은 '인종'(피부색깔)으로서의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계에 기초한 정체성을 쉽게 무력화시키는. (2) 한국인들의 정체성 중에서 가장 취약한 게 '시민'이 아닌가 싶다. '공화국의 시민'. 국가와 계약을 맺은 그런 존재. 그 계약 속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시민'이라는 인식, 한국인이 아니라. 탁석산씨가 '시민국가'라는 개념을 제기했다는데 이런 맥락에서 한 얘기일 것이다. 아, 생각이 come and go... here and there...
우리 안의 애국주의
풍경 1)
'2PM' 이라는 진영팍이 '키우는' 그룹에 '재범'이라는 청년이 있는데 한국계 미국인이란다. 그가 4년 전에 미국 인터넷 공간에 올린 글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결국 그룹을 탈퇴해서 미국(모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내가 잘 모르는 '청년'의 일이지만... 벌써 논쟁의 구도가 쫘악 들어온다. 한 쪽에서" 2PM 재범 탈퇴, 나는 공포를 느낀다. 우리는 진정 '애국주의 아이돌'을 원하는가?"라고 묻고, 다른 한 쪽에선 "애국주의 희생양으로 포장하기에 바쁜 수구좌파"들 운운. 딴지에 실린 위 글은 명문장이다. 이제 쿨한 애국주의 2.0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반공협회, 자유총연맹, 해병대전우회 등과는 '레벨'이 다른 것이다. 황빠 중에서도 꽤 세련된 논리를 펼치는 이들도 있었고, 그들은 '무식하게' '민족''국익'반미'만 지겹게 주장하지 않는다. 시민권, 인권, 생명윤리 등을 황우석 지지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nationalism as totalizing/unifying semantics). 이번 '재범 사건'은 한국 민족주의/국가주의/애국주의 논쟁의 전형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듯하다. 2000년 이후 관찰되는... 여기서 내 명제! "민족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세련되어질 뿐이다!"
풍경 2)
장선생의 블로그 글 "인터넷 자가진단 서비스..ㅎㅎ: 정당 선택을 도와 드려엽 Wahl-O-Mat"에서 안내된 곳으로 가서 여러 정책에 대한 내 견해가 어던 독일 정당의 주장과 가장 비슷한지 확인해 보았다. 장선생의 자평: "나는 맑스레닌주의 정당과 심지어 (그들의 세부적인 주장과는 무관하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저주해 마지않는데!...) NPD와 친화성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TT. (예상컨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의외의(?!) 결과에 살짝 놀랄(?!) 듯...ㅋㅋ...결과에 따르면...나에게 ...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도...TT)"에 자극받아 나도 한 번 해 볼 마음을 먹었다. 결과는... 경악... 충격...
다시 한 번 글을 살펴보니 "피질문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항에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주고"... 이 과정을 빼 먹긴 했다. 어쨌든 그런 오차를 감안하고서라도 결과는 엽기적이었다. 8개까지 선택할 수 있는 정당 중 '왼쪽 지향'을 많이 넣긴 했지만...
MLPD 58 von 76 Punkten
DKP 58 von 76 Punkten
DIE LINKE 54 von 76 Punkten
NPD 54 von 76 Punkten
GRÜNE 50 von 76 Punkten
SPD 40 von 76 Punkten
FDP 32 von 76 Punkten
CDU/CSU 30 von 76 Punkten
맑스레닌주의당, 독일공산당이 공동 1위, 좌파당과 독일국민(민족)당이 공동 3위, 녹색당 5위, 사민당 6위... 일부러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긴 했지만, 나름 '자유주의'적 입장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는데... 하긴 한국에선 독특한 역사, 분단상황 때문에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쉽게 떨쳐 내지 못하고 있는데, 거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은 참 드문 것 같다. 임지현, 권혁범 같은 '분'들의 용기에 아무 힘껏 박수를 쳐드려도 부족함이 없을 듯...
허나 다른 '콘텐츠'가 충분히 확보되고, 확산되기 전에 '민족주의''국가중심성'은 쉽게 내팽개칠 수 없다. 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꼴이 되기 쉬우니까. 어쨌든 너무 한 쪽으로 쏠리는 걸 막을 필요는 있겠다 싶은데, 이번 결과를 보니 과연 내가 그런 얘기를 할 '마음''정신'무의식'의 준비가 되어있는지 반성해 본다.
'2PM' 이라는 진영팍이 '키우는' 그룹에 '재범'이라는 청년이 있는데 한국계 미국인이란다. 그가 4년 전에 미국 인터넷 공간에 올린 글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결국 그룹을 탈퇴해서 미국(모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내가 잘 모르는 '청년'의 일이지만... 벌써 논쟁의 구도가 쫘악 들어온다. 한 쪽에서" 2PM 재범 탈퇴, 나는 공포를 느낀다. 우리는 진정 '애국주의 아이돌'을 원하는가?"라고 묻고, 다른 한 쪽에선 "애국주의 희생양으로 포장하기에 바쁜 수구좌파"들 운운. 딴지에 실린 위 글은 명문장이다. 이제 쿨한 애국주의 2.0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반공협회, 자유총연맹, 해병대전우회 등과는 '레벨'이 다른 것이다. 황빠 중에서도 꽤 세련된 논리를 펼치는 이들도 있었고, 그들은 '무식하게' '민족''국익'반미'만 지겹게 주장하지 않는다. 시민권, 인권, 생명윤리 등을 황우석 지지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nationalism as totalizing/unifying semantics). 이번 '재범 사건'은 한국 민족주의/국가주의/애국주의 논쟁의 전형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듯하다. 2000년 이후 관찰되는... 여기서 내 명제! "민족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세련되어질 뿐이다!"
풍경 2)
장선생의 블로그 글 "인터넷 자가진단 서비스..ㅎㅎ: 정당 선택을 도와 드려엽 Wahl-O-Mat"에서 안내된 곳으로 가서 여러 정책에 대한 내 견해가 어던 독일 정당의 주장과 가장 비슷한지 확인해 보았다. 장선생의 자평: "나는 맑스레닌주의 정당과 심지어 (그들의 세부적인 주장과는 무관하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저주해 마지않는데!...) NPD와 친화성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TT. (예상컨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의외의(?!) 결과에 살짝 놀랄(?!) 듯...ㅋㅋ...결과에 따르면...나에게 ...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도...TT)"에 자극받아 나도 한 번 해 볼 마음을 먹었다. 결과는... 경악... 충격...
다시 한 번 글을 살펴보니 "피질문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항에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주고"... 이 과정을 빼 먹긴 했다. 어쨌든 그런 오차를 감안하고서라도 결과는 엽기적이었다. 8개까지 선택할 수 있는 정당 중 '왼쪽 지향'을 많이 넣긴 했지만...
MLPD 58 von 76 Punkten
DKP 58 von 76 Punkten
DIE LINKE 54 von 76 Punkten
NPD 54 von 76 Punkten
GRÜNE 50 von 76 Punkten
SPD 40 von 76 Punkten
FDP 32 von 76 Punkten
CDU/CSU 30 von 76 Punkten
맑스레닌주의당, 독일공산당이 공동 1위, 좌파당과 독일국민(민족)당이 공동 3위, 녹색당 5위, 사민당 6위... 일부러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긴 했지만, 나름 '자유주의'적 입장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는데... 하긴 한국에선 독특한 역사, 분단상황 때문에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쉽게 떨쳐 내지 못하고 있는데, 거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은 참 드문 것 같다. 임지현, 권혁범 같은 '분'들의 용기에 아무 힘껏 박수를 쳐드려도 부족함이 없을 듯...
허나 다른 '콘텐츠'가 충분히 확보되고, 확산되기 전에 '민족주의''국가중심성'은 쉽게 내팽개칠 수 없다. 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꼴이 되기 쉬우니까. 어쨌든 너무 한 쪽으로 쏠리는 걸 막을 필요는 있겠다 싶은데, 이번 결과를 보니 과연 내가 그런 얘기를 할 '마음''정신'무의식'의 준비가 되어있는지 반성해 본다.
황우석 사태와 민족주의, 국가 중심성
... 그래서 황우석 사태와 과학 민족주의 관계가 어떠했다는 말씀? "황우석 사태"와 관련해서 지배적인 견해는 박정희에서 한 정점을 이루었던 과학 민족주의가 ('박정희 패러다임') 지속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내 모스크바 테제는... 이 사건은 그보다는 과학 민족주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박정희 시절엔 과학, 기술을 조국근대화에 동원하는 정부 주도 국가 이데올로기였다면, 민족 영웅으로서 황우석의 등장은 과학자 스스로 자신의 연구를 국가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것을 언론, 정치 등이 가져다 쓰고, 그것이 다시 황우석의 발언을 강화시키고.. 등등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며 만들어 낸 co-product가 되었다 ('과학자','과학'의 민족주의화). 좁은 의미로 황우석 사태, 그러니까 황 지지 대중, 언론의 반응은 '갈등' 혹은 '사건'의 민족주의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한편으로는 박정희 민족주의에 비해 지속성도 짧고, 충성도도 그리 높지 않은 반짝 즐기는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스포츠민족주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 엄청난 지지의 '쓰나미'가 보여주듯이 '민족주의화된 사건 이해'의 폭발력, 다시 말해 배제하는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갈등이라고 얘기하기도 뭣한, 너무 일방적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황우석 사태는 국가중심성의 약화를 보여주는 사례인가? 더 기능적 분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얘기해 주기에 한국 국가는 여전히 너무도 강하다. 구조적으로, 의미론적으로... 그 끈질긴 생명력... '국가'나 '정치'에 대한 지나친 기대 그리고 급실망의 반복은 한국이 얼마나 여전히 '정치 중심적 사회'인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타협'이 어렵고, 사생결단의 혈전의 장이 쉽게 되는 건 바로 이 과도한 기대 때문이다.
과학 민족주의(애국주의)만 놓고 보면 그렇지만, '박정희 패러다임' 주장자들이 얘기에는 기실 과학 거버넌스의 다른 내용들도 포함하고 있다: 성장주의, 과학만능주의, 결과지상주의 등등. 민족주의가 유지되지만 다른 맥락에서 생성되는 것처럼 박정희 패러다이 얘기하는 다른 "특성" 역시 사라지진 않았고 다만 그것이 생성되는 맥락, 환경이 달라졌다. 그 대표적인 주장이 한국국가의 성격 변화:'발전국가'에서 '과학기술국가'로 (Uttam). 변화를 해 나가면서 국가중심성은 관철되고 있다. 보수, 진보에 큰 차이는 없다. 최근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소장 학자들의 정치지향성을 조사한 결과는 (표본 수 2^^) 이들 '국가중심적 사고' 정도가 예상 이상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다.
대안은? 쉽지 않다.
민족주의의 과잉이 염려되어서 탈민족주의를 실천하면 당장 담론의 공간이 비어 버린다. 채워 줄 "이념적 콘텐츠"가 터무니 없이 부족한 것이다. '국가 혹은 정치중심주의' 역시,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국가'혹은 '정치' 중심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아애 관심을 거둔다면 정말 한 줌의 세력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게 놔두는 꼬락서니가 된다. 2mb와 그 무리들은 멀쩡한 대낮에 사람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그런 짓을 하지 않는가. 진부하지만 대안은 이미 나와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을 것이지만... 민주주의, 기능적 분화 같은 틀을 만들어 놓았다면, 이제는 '의미론' '담론' '콘텐츠'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가중심성 같은 지배적 관념을 대체할 "콘덴츠"를 부지런히 만들어 내고 유포해야 할 것이다.
과학 민족주의(애국주의)만 놓고 보면 그렇지만, '박정희 패러다임' 주장자들이 얘기에는 기실 과학 거버넌스의 다른 내용들도 포함하고 있다: 성장주의, 과학만능주의, 결과지상주의 등등. 민족주의가 유지되지만 다른 맥락에서 생성되는 것처럼 박정희 패러다이 얘기하는 다른 "특성" 역시 사라지진 않았고 다만 그것이 생성되는 맥락, 환경이 달라졌다. 그 대표적인 주장이 한국국가의 성격 변화:'발전국가'에서 '과학기술국가'로 (Uttam). 변화를 해 나가면서 국가중심성은 관철되고 있다. 보수, 진보에 큰 차이는 없다. 최근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소장 학자들의 정치지향성을 조사한 결과는 (표본 수 2^^) 이들 '국가중심적 사고' 정도가 예상 이상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다.
대안은? 쉽지 않다.
민족주의의 과잉이 염려되어서 탈민족주의를 실천하면 당장 담론의 공간이 비어 버린다. 채워 줄 "이념적 콘텐츠"가 터무니 없이 부족한 것이다. '국가 혹은 정치중심주의' 역시,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국가'혹은 '정치' 중심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아애 관심을 거둔다면 정말 한 줌의 세력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게 놔두는 꼬락서니가 된다. 2mb와 그 무리들은 멀쩡한 대낮에 사람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그런 짓을 하지 않는가. 진부하지만 대안은 이미 나와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을 것이지만... 민주주의, 기능적 분화 같은 틀을 만들어 놓았다면, 이제는 '의미론' '담론' '콘텐츠'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가중심성 같은 지배적 관념을 대체할 "콘덴츠"를 부지런히 만들어 내고 유포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 과잉의 뒷면
한국 민족주의에 대해서 참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민족주의는 그 자체가 미끈미끈 잘 빠져 나가는 뱀장어 같은 개념이라 제자리에서 차근차근 뜯어보기 힘들기도 하다 ('banal nationalim' (Billig)에서 얘기하는 'empty signifier'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게다가 한국 민족주의를 얘기하는 그 맥락은 더 복잡하다. 대개 시중에 유통되는 민족주의에 대한 견해는 대개 서구의 경험을 기초로 하고 있는 거라 한국 상황에 연결시키려고 하면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同牀異夢의 상황 같은... 그렇다고 루만처럼 민족주의를 철지난 모델로 치부하기엔 조국(^^) 상황은 여전히 너무도 긴박하다. 농담 삼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루만을 써 먹기 위해서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민족사적 관점에서 '통일'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當爲'인데, 허나...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볼 것 같으면 억지로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통일, 친북, 민족, 반민족 운운하며서 우리 '민족'의 힘을 빼느니 차라리 더 큰 틀에서 모두를 포괄해 버리는 건 어떨가. 임지현, 권혁범 등이 취하는 입장이 이 쪽 아닌가? 서구 학자들은 '민족주의'가 'empty signifier'라고 얘기하지만, 한국에선 그것더 없다면 얘기할 근거가 더 없다. 좌파(?) 쪽은 그나마 좀 낫지만 그것도 매우 '엘리트'적이고,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은 막상 자유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르는... '민족주의 과잉' 이면엔 어쩌면 '사상' '철학' '성찰'의 빈곤일 지도 모르겠다. 2mb 정부와 '의식있는^^ 국민'과의 싸움, 국회의 치열한, 너무도 치열한 갈등의 내용은 너무도 부실하다. 우리의 너무도 강렬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민족의식, 애국심의 뒷면은 한마디로 - 좀 '오버'해 보면... - '無識'이다. '우리들' 사고와 담론의 질을 좀 높히기 위해서라도 통일이나, 통일 비슷한 무엇라도 좀 일어나야 할 것이다.
체계이론과 민족주의
...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사회의 단위로 보는 탓에 '근대 이후로 사회가 하나 있는데 그건 세계사회다'라고 주장하며, '공간성'엔 심드렁한 눈길만을 주는 체계이론... 기능적 분화 속에 '민족'이 '공식적으로' 들어 설 자리는 고작 근대 국가가 '민족국가'라는 정도? 지역적 분화나 민족적(national, ethnic) 분화에 대해서 루만이 언급한 구절들은 손에 꼽을 정도. 이후 슈티히베, 나세히, 얍 등이 좀 쓰긴 했지만 역시 그리 많지 않다. 아니 어쩌면 딱히 더 쓸 말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기능적 분화을 으뜸가는(primär-) 분화원칙으로 삼는 현대사회는 중심이 없는고로 통합력이 매우 약하다. 민족은 이런 구조적 취약성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한다 (Nassehi 1990). 혹은 여러 체계에 각기 따로 포섭되어야 하는 (Multiinklusion) 현대인들이 겪는 정체성 위기, 그에 대한 '부가적' 의미론이라는 기능도 있고 ('identitätsbildende Vollinklusion von Personen in die Gesellschaft' ibd. S.274). 하지만 통틀어서 체계이론이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싸늘하다. 기능적 분화와 더불어 민족이 사라질 거라고 볼 필요도 없고, 민족은 기능적 분화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볼 필요도 없다 (ibd. 275).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공존할 것 (Geser 1981).
루만의 견해는 좀 더 비관적이다.
"Man kann daher vermuten, daß wir uns heute in einer Auslaufphase dieser Idee befinden, in der sie mehr Schaden als Nutzen stiftet und in der Soziologie eines jener obstacles épistémologique bildet, die auf Grund vergangener Plausibilitäten die jetzt nötigen Einsichten blockierenä (GG 1055).
"Auslaufphase"란다. 막을 내리고 있다는.. 흠. 과연 그럴까?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될 'tansitorische Semantik'에 불과할까? 어쩌면 그건 루만의 희망사항일지도..
더군다나 한국이나 일본을 생각하면... 그게 결코 쉽게 사라질 수 없는 거다. [루만은 일본을 예외적인 경우로 언급하고 있다. 민족, 국가가 일치하면서 그 정도 규모를 가질 수 있는 나라가 드물다는 것 (GG 1054f). 당연히 한국도 그런 사례에 포함된다]. 특히 유럽 역사에서 '민족'은 '명백하게' 근대의 산물이었고, 요즘 EU 국가들 간 교류를 생각하면 루만의 '심정'도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나... 민족주의의 미래에 대해선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기 힘들 것 같다. 워낙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니까.
Geser, H. (1981), Der „ethnischer Faktor“ im Prozeß gesellschaftlicher Modernisierung. In: Schweizerische Zeitschrift für Soziologie 7: 165 – 178
Japp, Klaus P. (2007), Regionen und Differenzierung, in: Soziale Systeme 13(1+2): 185 – 195
Nassehi, Armin (1990), Zum Funktionswandel von Ethnizität im Prozeß gesellschaftlicher Modernisierung. Ein Beitrag zur Theorie funktionaler Differenzierung, in: Soziale Welt 41: 261- 282
Stichweh, Rudolf ([1994]2000), Nation und Weltgesellschaft. In: ders., Weltgesellschaft, Frankfurt a.M.: Suhrkamp, 48 – 65.
루만의 견해는 좀 더 비관적이다.
"Man kann daher vermuten, daß wir uns heute in einer Auslaufphase dieser Idee befinden, in der sie mehr Schaden als Nutzen stiftet und in der Soziologie eines jener obstacles épistémologique bildet, die auf Grund vergangener Plausibilitäten die jetzt nötigen Einsichten blockierenä (GG 1055).
"Auslaufphase"란다. 막을 내리고 있다는.. 흠. 과연 그럴까?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될 'tansitorische Semantik'에 불과할까? 어쩌면 그건 루만의 희망사항일지도..
더군다나 한국이나 일본을 생각하면... 그게 결코 쉽게 사라질 수 없는 거다. [루만은 일본을 예외적인 경우로 언급하고 있다. 민족, 국가가 일치하면서 그 정도 규모를 가질 수 있는 나라가 드물다는 것 (GG 1054f). 당연히 한국도 그런 사례에 포함된다]. 특히 유럽 역사에서 '민족'은 '명백하게' 근대의 산물이었고, 요즘 EU 국가들 간 교류를 생각하면 루만의 '심정'도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나... 민족주의의 미래에 대해선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기 힘들 것 같다. 워낙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니까.
Geser, H. (1981), Der „ethnischer Faktor“ im Prozeß gesellschaftlicher Modernisierung. In: Schweizerische Zeitschrift für Soziologie 7: 165 – 178
Japp, Klaus P. (2007), Regionen und Differenzierung, in: Soziale Systeme 13(1+2): 185 – 195
Nassehi, Armin (1990), Zum Funktionswandel von Ethnizität im Prozeß gesellschaftlicher Modernisierung. Ein Beitrag zur Theorie funktionaler Differenzierung, in: Soziale Welt 41: 261- 282
Stichweh, Rudolf ([1994]2000), Nation und Weltgesellschaft. In: ders., Weltgesellschaft, Frankfurt a.M.: Suhrkamp, 48 – 65.
2009년 9월 8일 화요일
구성주의적 인식론
"Dass sinnhafte Identitäten (empirische Objekte, Symbole, Zeichen, Zahlen, Sätze usw.) nur rekursiv erzeugt werden können, hat weitreichende epistemologische Konsequenzen." (Luhmann, GG: S.47, 강조 kj)
어떤 대상의 정체성은 회귀적인 방식으로만 만들어진다는 주장... 바로 여기가 전통적인 존재론적 인식론과 구별되는 구성주의적 인식론, 인식론의 커뮤니케이션적, 언어적 전환의 출발점이다. 존재, 대상과 표상, 관찰의 관계를 동시성으로 인식하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일상적으로는 옳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식론에 벗어나지 못하면 루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대상의 정체성은 회귀적인 방식으로만 만들어진다는 주장... 바로 여기가 전통적인 존재론적 인식론과 구별되는 구성주의적 인식론, 인식론의 커뮤니케이션적, 언어적 전환의 출발점이다. 존재, 대상과 표상, 관찰의 관계를 동시성으로 인식하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일상적으로는 옳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식론에 벗어나지 못하면 루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그림읽기: 음식과 종교
이런 류는 '난이도'가 낮은 편에 속하는 그림읽기라고 볼 수 있겠다. 서양미술에서 먹는 것은 종교, 그러니까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얘기. 한편으로 구원의 상징이기도 하고, 탐욕, 심지어 음욕과 연결되기도 했다고... 아닌 게 아니라 동양 전통에서 먹는 것을 그린 그림들은 자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동양을 서양을 구분하는가?
맛있는 그림/미야시타 기쿠로 지음·이연식 옮김/271쪽·1만5000원·바다출판사
“그리스도교는 죄와 구원 모두가 먹는다는 행위와 관련된 특이한 종교이다. 서양미술에서 식사가 중요한 주제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저자는 동양미술과는 달리 서양미술에서 식사와 음식을 소재로 한 그림이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 서양미술과 음식의 관계를 소개했다.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인류구원을 선포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중세 서양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구원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음식은 음욕(淫慾)의 죄와 연결됐고 따라서 최대한 검소한 식사나 단식이 미덕이었다.
맛있는 그림/미야시타 기쿠로 지음·이연식 옮김/271쪽·1만5000원·바다출판사
“그리스도교는 죄와 구원 모두가 먹는다는 행위와 관련된 특이한 종교이다. 서양미술에서 식사가 중요한 주제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저자는 동양미술과는 달리 서양미술에서 식사와 음식을 소재로 한 그림이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 서양미술과 음식의 관계를 소개했다.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인류구원을 선포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중세 서양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구원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음식은 음욕(淫慾)의 죄와 연결됐고 따라서 최대한 검소한 식사나 단식이 미덕이었다.
2009년 9월 6일 일요일
동,서양 사고방식의 차이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고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식의 주장은 꽤 오래 전부터 유통되어 왔다. 지금까지 여러 버전의 '오리엔탈리즘' '옥시텐탈리즘'이 있었을 것이다. '서양 - 문명/ 동양 - 야만' 같은 구분 도식도 있었을 것이고.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자주 얘기하는데, 오늘 요즘 한창 뜨고 '계시는' - 동양식 존대?^^ - '다윈' 선생과 미시간대 사회심리학 교수인 '니스벳'의 가상 대화록에서 그런 내용을 발견했다 (여기). 사실 그 주장 자체로는 전혀 신선하진 않다. 다만 예로 든 사례들을 혹시 나중에 '써 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기록으로 남겨둔다. (흠. 우린 '먹는다'라는 표현을 이런 경우에도 쓰는 구나.'써 먹다'. 고 노통께서 '대통령직 못 해 먹겠다'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고.) 어쨌든 이런 구분법은 그럴듯 해 보이고, 실제로 그런 면이 많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선뜻 동의해 주기는 꺼려지는 그런 주장이 (어쩌면 '체계이론'도 이런 인상을 주지 않나 모르겠다. 그래서 대개 '표면적으로 보아 그런 것 같긴 하나, 실상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는 반론을 얻어 '먹게' 되는... Knorr-Cetina 교수가 'Unterkomplexitaet'라고 비판했던 그런 맥락... )결론적으로 다른 사고방식이 융합하고 있다는 주장은 오히려 쉽게 동의해 줄 수 있겠다.
니스벳=네. 미국과 중국 아이들에게 소, 닭, 풀을 보여주고 이 중 2개를 하나로 묶어보라고 해봤어요. 그랬더니 중국 아이는 주로 소와 풀을, 미국 아이는 소와 닭을 묶더군요. 중국 아이는 소가 풀을 먹는다는 관계적 이유 때문에, 미국 아이는 소와 닭이 동식물 분류상 같은 동물에 해당된다는 범주적 이유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겁니다.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인의 사고방식은 물속 장면을 보여준 애니메이션 실험에서도 확인됐어요. 일본 학생은 물고기보다는 물속 배경을, 미국 학생은 물고기 자체를 더 잘 기억했죠. 동양인은 주변 환경에 기초해 개별 사물을 기억하는 관계적 사고를 하는 반면, 서양인은 배경과 개별 사물을 분리해 생각합니다.
다윈=전체론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의 차이로군요. 아주 새로운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니스벳=한 20년 전쯤에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중국계 학생이 지도교수에게 불만을 품고 교수와 학생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한 충격적 사건이 있었어요. 미국인은 이 범죄의 원인을 그 학생의 사악한 본성 탓으로 돌렸지만 중국인들은 그 학생의 주변 관계, 총기 구입이 쉬웠던 상황들을 언급하며 ‘상황론’을 들고 나왔지요.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맥락을 훨씬 더 중시합니다.
다윈=그러고 보니 동양인은 문화적으로 모두 ‘공자’의 후예들이랄 수 있겠네요. 유교는 개인의 개성보다 공동체 속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이죠. 그런 전통이 요즘처럼 문화들이 서로 융합되는 사회에서도 인간의 사고 과정 속에서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니스벳=의학 전통도 문화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허리가 삐끗해서 동양의 침술을 경험해 본 서양인이라면 다 느꼈을 거예요. 서양 의학은 병든 ‘부분’을 고치거나 도려내는 수술을 먼저 떠올리는 반면, 동양 의학은 몸의 전체 균형을 되찾아 질병을 치유하려 하죠. 부분과 전체, 개인과 집단, 분석과 관계, 본성과 상황, 추상성과 실용성 등은 서양과 동양의 사고방식을 구분하는 키워드입니다.
다윈=솔직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해석이긴 합니다만 뭐랄까, 문화 간 생각의 차이를 입증한 이 연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얘기처럼 들리지 않아요. 예컨대 선생의 연구 결과가 맞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도 가능하잖아요. 분석력과 개성적 사고에 상대적으로 능한 서양인들이 경쟁과 독창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 더 적합하다, 적어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과학계에서는 동양인들이 불리하다, 뭐 이런 결론 말입니다. 이건 좀 위험한데요….
니스벳=다른 건 다른 거죠. 하지만 서양인이 추상적 사고와 분석 능력에 상대적으로 뛰어나 과학적 탐구에 유리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동양인이 능한 실용적 사고와 관계적 사고로는 사회적 갈등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동서양의 문화가 서로 충돌하거나 한쪽으로(서양 자본주의 문화) 흡수통합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융합되는 흐름이죠. 서양인이 점점 더 동양의 문화를 찾고, 동양인이 서양의 경쟁적이고 개성적인 지배문화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는 상황 아닌가요?
다윈=이제야 독자들이 이 책을 ‘무경계5’로 뽑아줬는지 알겠어요. 동서양의 경계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탐구를 통해 인간 사고 과정을 좀 더 명확히 보여줬다는 뜻이겠네요. 독자들이 저보다 더 현명합니다. 고맙습니다. 차 더 하시겠어요?(More tea?)
니스벳=중국에서는 이 상황에서 ‘Drink more’라 말하죠. 서양은 범주를 타나내는 명사를, 동양은 관계를 나타내는 동사를 더 빨리 배우고 강조한답니다. 하하.
윗 대화록이 실린 기사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이런 내용을 다룬 니스벳의 책 '생각의 지도'(2003, 김영사)가 한국에 번역되어 있다 (부제: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원제: The Geography of Thought). 그 소개글 중 일부...
동.서 사고방식의 차이를 논증하는 책. '인간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라는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을 뒷받침한다. 문화심리학자인 저자는 여타 학문에서는 인지하고 있지만 심리학적으로 생소한 동.서양인들의 심리적 차이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 학문으로 체계화했다.
동양은 전체를 종합하는 반면 서양은 분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동양은 경험을 중시한다면 서양은 논리를 중시한다. 동양은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한다면 서양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동양은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본다면 서양은 명사를 통해 세상을 본다. 이런 분류는 쉽게 추측가능한 이분법이지만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기에 더욱 유의미하다.
니스벳=네. 미국과 중국 아이들에게 소, 닭, 풀을 보여주고 이 중 2개를 하나로 묶어보라고 해봤어요. 그랬더니 중국 아이는 주로 소와 풀을, 미국 아이는 소와 닭을 묶더군요. 중국 아이는 소가 풀을 먹는다는 관계적 이유 때문에, 미국 아이는 소와 닭이 동식물 분류상 같은 동물에 해당된다는 범주적 이유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겁니다.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인의 사고방식은 물속 장면을 보여준 애니메이션 실험에서도 확인됐어요. 일본 학생은 물고기보다는 물속 배경을, 미국 학생은 물고기 자체를 더 잘 기억했죠. 동양인은 주변 환경에 기초해 개별 사물을 기억하는 관계적 사고를 하는 반면, 서양인은 배경과 개별 사물을 분리해 생각합니다.
다윈=전체론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의 차이로군요. 아주 새로운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니스벳=한 20년 전쯤에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중국계 학생이 지도교수에게 불만을 품고 교수와 학생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한 충격적 사건이 있었어요. 미국인은 이 범죄의 원인을 그 학생의 사악한 본성 탓으로 돌렸지만 중국인들은 그 학생의 주변 관계, 총기 구입이 쉬웠던 상황들을 언급하며 ‘상황론’을 들고 나왔지요.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맥락을 훨씬 더 중시합니다.
다윈=그러고 보니 동양인은 문화적으로 모두 ‘공자’의 후예들이랄 수 있겠네요. 유교는 개인의 개성보다 공동체 속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이죠. 그런 전통이 요즘처럼 문화들이 서로 융합되는 사회에서도 인간의 사고 과정 속에서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니스벳=의학 전통도 문화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허리가 삐끗해서 동양의 침술을 경험해 본 서양인이라면 다 느꼈을 거예요. 서양 의학은 병든 ‘부분’을 고치거나 도려내는 수술을 먼저 떠올리는 반면, 동양 의학은 몸의 전체 균형을 되찾아 질병을 치유하려 하죠. 부분과 전체, 개인과 집단, 분석과 관계, 본성과 상황, 추상성과 실용성 등은 서양과 동양의 사고방식을 구분하는 키워드입니다.
다윈=솔직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해석이긴 합니다만 뭐랄까, 문화 간 생각의 차이를 입증한 이 연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얘기처럼 들리지 않아요. 예컨대 선생의 연구 결과가 맞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도 가능하잖아요. 분석력과 개성적 사고에 상대적으로 능한 서양인들이 경쟁과 독창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 더 적합하다, 적어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과학계에서는 동양인들이 불리하다, 뭐 이런 결론 말입니다. 이건 좀 위험한데요….
니스벳=다른 건 다른 거죠. 하지만 서양인이 추상적 사고와 분석 능력에 상대적으로 뛰어나 과학적 탐구에 유리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동양인이 능한 실용적 사고와 관계적 사고로는 사회적 갈등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동서양의 문화가 서로 충돌하거나 한쪽으로(서양 자본주의 문화) 흡수통합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융합되는 흐름이죠. 서양인이 점점 더 동양의 문화를 찾고, 동양인이 서양의 경쟁적이고 개성적인 지배문화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는 상황 아닌가요?
다윈=이제야 독자들이 이 책을 ‘무경계5’로 뽑아줬는지 알겠어요. 동서양의 경계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탐구를 통해 인간 사고 과정을 좀 더 명확히 보여줬다는 뜻이겠네요. 독자들이 저보다 더 현명합니다. 고맙습니다. 차 더 하시겠어요?(More tea?)
니스벳=중국에서는 이 상황에서 ‘Drink more’라 말하죠. 서양은 범주를 타나내는 명사를, 동양은 관계를 나타내는 동사를 더 빨리 배우고 강조한답니다. 하하.
윗 대화록이 실린 기사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이런 내용을 다룬 니스벳의 책 '생각의 지도'(2003, 김영사)가 한국에 번역되어 있다 (부제: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원제: The Geography of Thought). 그 소개글 중 일부...
동.서 사고방식의 차이를 논증하는 책. '인간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라는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을 뒷받침한다. 문화심리학자인 저자는 여타 학문에서는 인지하고 있지만 심리학적으로 생소한 동.서양인들의 심리적 차이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 학문으로 체계화했다.
동양은 전체를 종합하는 반면 서양은 분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동양은 경험을 중시한다면 서양은 논리를 중시한다. 동양은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한다면 서양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동양은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본다면 서양은 명사를 통해 세상을 본다. 이런 분류는 쉽게 추측가능한 이분법이지만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기에 더욱 유의미하다.
2009년 9월 2일 수요일
생의 의지, 승부욕, 어느 여배우의 죽음
비를 맞으면서 테니스를 쳤다. 난 승부에 대해서 '집착'(執着)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을, 딱 그 정도로만 승부에 '집중'한다. 아니, 그러려고 한다. 인생은, 사회는 생존경쟁이다. 아니 그렇다고들 얘기한다. 경쟁이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스포츠'아니던가. 그렇다면 스포츠에 임하는 태도와 인생을 대하는 태도 사이엔 강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인가? 장진영씨가 죽었다. 그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서 살았는지 전혀 모른다. 다만 자기 일 즐기면서, 많이 '집착'하지 않으면서 살 것 같은 배우라 이른 죽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기를 쓰고 살아 남으려고 하는 사람들만 살아 남는 세계라면 좀 슬프지 않은가. 아니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이라면 너무 지루하지 않겠는가.
9월의 첫 날...
...이 아직 30분 남았다. 모처럼 비가 시원하게 내렸고. 한국 DJ들이 자주 썼던 표현을 빌자면... '가을을 재촉하는' 그런 비... 누가 뭐래도 이젠 가을이다. 茶를 마신다. Blutorange... 음악을 듣는다. Radiohead의 Creep. 요즘 심리상태가, 뭐랄까, 최적은 아니다. 조금 정돈할 필요가 있을 듯. 흠. 이건 너무 일기 같은 걸. 이 참에 아애 일기 '코너'를 하나 만들까보다. 어제 '것'도 '레이블'을 그 쪽으로 바꾸고...
2009년 9월 1일 화요일
8월의 마지막 날...
이번 달에도 10개는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날 강박하다. 몇 개 쓸 거리가 분명히 있었는데 때를 놓쳤고 게다가 기록해 놓지 않은 탓에 도무지 떠 오르질 않는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찔러 보면... 우선 정치 쪽... 어제 일본에서 민주당이 수십 년만에 정권 교체를 이뤄 냈고, 빌레펠트에서 사민당 출신이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또 독일 몇 개주 선거에선 좌파당, 녹색당, 자민당 등이 선전을 했다고 하고. 4주 정도 남은 총선에선 CDU/FDP 연정이 탄생할 지 지켜볼 일이고... 한국에선 남북관계가 풀리고 있고, 2mb씨 지지도가 오른다고 하고, 오늘 청와대 참모진을 재편했는데 돌고 돌아 결국 참여정부 비슷한 틀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들리고... 과학기술특보와 IT특보 신설 소식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이명박 정부가 나름 지난 두 정부와 차별화를 여러 방향에서 시도했는데 결국 '삽질경제'만이 a genuine policy made by 2mb로 역사에 남지 않을까 싶다. 수십조원들여 4대강 생태계 파괴하는 이 짓은 어쩌면 기네스북에 남을만한 '치적'이다. '바보스러운 정책' 같은 항목이 있다면... 유로화 환율은 좀체 떨어지질 않는데 한국 경제 성적이 가장 좋은 편이라고 한다. 음... 불가사의한 일이다. 분명히 어떤 음모나 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가 있을 것만 같단 말이지.... 생각해 보니 며칠 전 부산대에서 박사 학위 없는 시간 강사들이 '짤렸다'는 얘길 듣고 뭔가 써 보려 했었던 것 같네. 울산대에선 최초로 교수 연봉제를 실시한다는 기사도 읽었고. 아, 요 며칠새 가을이 성큼, 정말 성큼 다가왔다. 해가 나와 있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 들고 있고, 아침 저녁 제법 춥다. 오늘 낮에 커피를 마시면서 햇볕이 드는 자리를 찾았을 정도로... 쓸 거리가 없다보니 이런 싱거운 얘기만... 그리고... 어쩌면 독일에서 마지막이 될 일들이 하나 둘씩 생겨난다. 그런데 어째 마무리가 좀 시원찮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