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동서고금 이런 질문을 무수한 '사람들'이 던졌겠지만,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묻는 일이 자연스럽다는 건 지극히 '근대'스러운(?!) 현상임에 분명하다 ('근대'는 커녕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도 이미 낡아버린 이 포스트-포스트모던 시대에 '근대' 운운하는 '큰 얘기'를 꺼내기가 부담스럽긴 하다. 계속 고민할 거리...). '개인'(individuum)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에 출생했으니까. (우리말 '개인'은 일본에서 만들어낸 번역어). 인간을 '개인''주체'로 보는 것, 개인의 탄생, 주체의 발견, 사실 이게 근대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권'의 탄생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스토리'다. 다른 정체성의 등장은 좀 더 역설적이다. 예를 들어 '시민'(권), 국민, 민족 같은 정체성은 개인, 주체 발견과 그것의 사회적 조건인 기능적 분화의 뒷 이야기다. 기능체계는 모두 개인들이 각 기능체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universalism). 여러 기능 체계마다 다른 '출입증'이 필요한 것. individuum 은 dividuum이 되었다. 정체성 혼란, 위기... 민족, 시민, 국민 등은 그런 '주체 분열'에 대한 긴급처방인 것이다 (루만 표현으로 transitorische Semantik). 모두가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것 사실 커뮤니케이션에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구분을 할 수 없으니... '불평등'에 대한 기능적 요구.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혹은 근대적 의미로 재창조해낸다 (물론 체계 내부에서 다른 역할을 갖기에 주어지는 다른 정체성, 그것은 배제하고서라도... cf. Stichweh). 우선 "조직"이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어떤 대학 출신인지.. 학벌! 심지어 '지방대', '수도권대'라는 구분. 혹은 지역적 차별: 전라도, 경상도. 혹은 성에 기초한 정체성, 남성, 여성; 호모, 헤테로. 한국인, 외국인; 백인, 흑인, 이도 저도 아닌; 등등. 기능체계와 크게 관련 없는 여러 정체성들이 커뮤니케이션 재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체계이론은 '불평등'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능체계의 재생산은 '불평등'에 상당히 강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Luhmann, Nassehi). 그래서 조직 차원에서 포섭, 배제 메카니즘을 봐야 불평등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Nassehi).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직'을 통해서 다룰 수 있는 불평등, 정체성 제공 논의의 여지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아.. 원래 하려고 했던 얘기는... (1) '국민''한국인' 혹은 '인종'(피부색깔)으로서의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계에 기초한 정체성을 쉽게 무력화시키는. (2) 한국인들의 정체성 중에서 가장 취약한 게 '시민'이 아닌가 싶다. '공화국의 시민'. 국가와 계약을 맺은 그런 존재. 그 계약 속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시민'이라는 인식, 한국인이 아니라. 탁석산씨가 '시민국가'라는 개념을 제기했다는데 이런 맥락에서 한 얘기일 것이다. 아, 생각이 come and go... here and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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