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0일 금요일

이거슨... 봄...비...
그렇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봄비다.
조용한 사무실이 더 조용하게 느껴진다.
이미 낮은 마음은 더 낮아진다. 가라앉는다.
그나마...
'책상 이웃들'이 있어서 이 아침의 침몰을 막아준다.
아니. 어쩌면...
더 내려 놓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더 가라앉아야 할 지도..

2012년 3월 29일 목요일

이제 날씨는 완벽하게 봄으로 접어들었다. 하여... 모처럼 달리기를 했다. 오랜만이라 무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10km를 뛰었다. 5km지점을 찍고서 돌아오는 길은... 생각 이상 힘들었다. 속도에 욕심을 내지 않은 탓에 후유증은 별로 없지만... 역시 뭐든지 꾸준히 해야 함을 새삼 느낌.

목요일 오전... 내 공부 쪽으로 들어가기가 힘들다. 우회해야겠다. 다른 책을 좀 읽으며...

2012년 3월 27일 화요일

어제 밤 '힐링캠프'. 출연자는 내가 좋아하는 김정운 교수!
그 양반의 모든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바로 그런 점때문에 그 양반 장점이 사는 것이기 때문에 패스.
대부분 평소에 책이나 방송에서 읽고 듣던 얘기들이라 한번 더 확인한다는 의미가 컸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새롭게 다가왔다. 이경규와 김제동을 비교하면서... 이경규나 자신이 '위악' 쪽이라면, 김제동은 '위선'... 까지는 아니지만 착함에 대한 강박, 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강박이 있다면서... 머리가 좋기는 '위악'한 사람들이라며... 왜? 그런 사람들에겐 기대치가 낮기 때문에 뭘 잘못해도 쉽게 넘어가지만, 착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조그마한 잘못에도 '훅'가는 수가 있다는...
강하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의외로 쉽게 무너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위악'을 애써서 지향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착하고 완벽하게 살려고 아둥바둥 할 필요도 없다는 '위로'(^^)로 다가왔다.
그래 넌 잘 살고 있어. 아니. 조금 더 망가져도 돼...
사회학이 어려운 점은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연구대상이 무엇인지 그 자체가 논쟁적인 경우가 많다는데 있다. 일상적 대화 상황이나 매스미디어에서 등장하는 개념, 주장과 사회학적 개념, 주장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회학 연구도 많이 있지만...). 예를 들어, 자살에 대한 진술만 보더라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리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불분명해진다. 도대체 그 다양한 원인과 형태를 갖는 죽음의 현상들을 모두 '자살'이라는 카데고리 아래로 묶을 수 있을지. 그렇게 묶어서 자살률의 등락을 언급하고, 조사하는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실업, 실업률도 마찬가지고...
생명공학, 생명과학 같은 개념도 마찬가지다. 매우 다양한 연구 활동을 이렇게 큰 이름 아래 묶고 있는데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통합'이란 개념도 마찬가지. 통합을 어떻게 정의하고 구분하든 통합이라고 불리는 현상들을 파헤치다보면 그 속에서 너무나도 다양한, 상이한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언론이나 정부보고서 같은 데서 "사회통합을 지향, 강화해야...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지,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저런 진술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복지국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경제중심주의적 편향이 작용한 결과다. 경제적 편향은 체계이론 논의에서도 일부 발견되는데 대표적으로 Uwe Schimank. 그는 현대사회를 기능적으로 분화된 자본제 사회로 정의하면서, 조세국가, 복지국의 형태를 갖는 현대 국가는 바로 이런 자본제적 경제체계의 지배적 경향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해한다. Schimank가 왜 이렇게 경제 편향적 시각을 갖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체계이론은 어떤 특정 체계의 지배성을 배제, 배척하는 것을 이론적 정체서의 핵심적 요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 사회이론의 근본적 한계는 이런 저런 결정론 때문이다. 자본주의 혹은 근대 분업화된 산업경제의 출현과 근대(성)의 출현을 동일시하디시피한 각종 접근들. 베버, 맑스 , 뒤르켐, 스펜세 등등. 정치적 질서, 특히 국가중심으로 근대사회를 이해하려는 경향. 최근에는 과학, 지식, 기술, 위험 등의 관점에서 현대사회를 그리려는 시도들: 위험사회, 과학사회, 기술사회, 지식사회, 생태사회 등등. 체계이론의 관점은 어떤 특정한 체계나 사회 분야가 근대성의 형성과 사회의 근대적 재생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을 배격하고, 여러 체계의 상호작용 과정 속에서 우연이 형성된 산물로 본다는 점에서 가장 독창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베버의 어떤 주장들의 연속 선상에서). 물론 모든 체계가 똑 같은 수준에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기계적 균형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종교, 예술 같은 체계의 경우 사실 경제, 정치보다 중요성이 덜하긴 하다. 어떤 체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하튼 경제가 지배적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거기에서 다른 체계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복지국가가 해야 하고. 하지만 국가는 다른 체계로부터의 위험이나 위기, 그리고 경제를 제외한 체계, 그리고 체계들 간의 관계에도 개입해서 조정해야 한다. 실제로 그래오고 있고... 그런 여러 체계의 작동에 개입하는 특징을 '법치국가'라는 이름으로 기술하기도 했지만, 지금 국가의 역할은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다. '조정국가'라는 개념이 그런... (Steuerugnsstaat, F.X.Kaufmann).
사회통합 측면에서 국가는 경제로의 참여 이외에 다른 체계로의 참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교육, 의료, 과학, 예술 등등. 그런 것을 모두 복지국가라는 이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왜냐면 각 체계들이 지나치게 경제에 침투당해서, 즉 경제적 맥락으로 참여를 제한하는 경우들이 있으니까... 
경제적 목적을 위해, 경제체계에 대해서 제공하도록 여러 체계들을 이용, 동원하는 국가를 '발전국가'로 이해할 수 있겠다.
예방국가, 보험국가, 안전국가의 역할의 경우... 국가는 경제체계를 넘어서 다른 체계들의 과도한 통합경향을 막으려한다 (각종 위험, 생태문제 등등. 
근대 초기에는 경찰국가의 역할이 중요했고... 
어떤 것을 예방한다기 보다는 체계들 간의 관계에 대한 개입은 '조정국가'이고...
그러니.... '복지국가'적 성격만 가지고서 - 그것을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고 해도 - 현대 국가의 다양한 역할을 묘사하기엔 터무니 없이 어렵다.

2012년 3월 26일 월요일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에다 어제는 감기 기운까지 있어서 월요일 시작하는 마음이 좀 찜찜했다. 어쨌거나 대략 정리가 되었고, 컨디션도 최상은 아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상태로 보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까지 약 한 시간 정도 남아있다. 운동하고 저녁 먹고 하면서 흐름을 완전히 놓친 상태라 다시 제 궤도로 올라서기가 쉽지 않서 여러 시간 그냥 보냈다.ㅠㅠ


현대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탈통합 혹은 배제다 (그에 상응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생태적 위협, 위기 정도...).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방안을 특징짓는 개념은 사회통합, 포함(inclusion) [혹은, '포섭'이나 '참여'] 같은 것들이고...
대개 경제체계로의 포함 혹은 배제가 핵심적인 이슈다. 경제체계로 포함시키려는 노력들이 대표적 사회정책들인 것이고, 그런 일에 힘을 쏟는 국가가 복지국가인 것이고... 복지국가는 경제로부터 배제된 개인들을 경제체계로 포함시키는 것 이외에 (사회통합), 경제체계가 과잉통합시키려는 경향으로부터 다른 체계들을 보호해서 그 체계들이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역할도 한다 (체계통합).
사회통합차원에서 국가의 복지활동은 경제체계 이외 다른 체계로의 참여를 보장하는 활동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문화/예술로의 참여를 보장하는 활동에 대해서 쓰는 '문화복지' 개념. 물론 모든 체계로의 통합/포함/참여를 '복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체계통합차원에서 복지국가의 활동은 경제의 과잉통합 경향에서 다른 체계들을 보호하는 것 뿐 아니라 다른 체계가 과잉통합적 경향을 보일 때 개입하는 활동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이 경우 더 이상 복지국가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복지국가의 활동영역이 확대되면서, 또 각 체계의 자율성이 확대되면서 체계 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규제국가, 조정국가로 발전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물론 복지국가와 규제국가/조정국가는 공존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전 발전국가에서 복지국가로 이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더 중요한 것은 규제국가/조정국가일 것이다. 경제체계 뿐 아니라 다른 체계들의 과잉통합 경향도 보이고 (정치는 물론이고, 과학의 경우에도.., 매스미디어, 종교 등, 모든 체계들이 그 중심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관찰하고 그런 경향을 일반화하려고 하지 않는가), 경제체계에 대한 개입 및 조정도 다른 체계와의 관계 속에서 조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한편으로 복지국가 개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문화복지?
- 다른 한편으로 복지국가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규제국가, 조정국가...

2012년 3월 23일 금요일

공적, 사적

"어떤 조직이 단순히 정부냐 비정부기구냐(NGO)라든지 또는 영리기업이냐 아니냐(NPO)로 그 순수함과 정당성을 주장하던 시대가 간 듯 합니다. 문제는 과연 그 조직이 공공선(Public Goods)에 주된 가치를 두고 존재하며 일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조금 자극적으로 말하자면 사익집단이냐 공익집단이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론 비정부기구, 비영리조직이라는 표현보다 공익기관, 공익단체 등의 표현이 더욱 적절할 듯 합니다. (...)
가슴 아픈 것은 이 땅의 '기독교회'는 어찌된 영문인지 언제부터서인가 비정부적이고 비영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사익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페친)

중요한 언급이고 그 안타까움을 공유한다. GO/NGO, PO/NPO 같은 개념들로 표현되기 힘든 특징에 대한 '공익/사익 조직[집단]' 이라는 '새로운' 구분법을 제시한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다만... 사회이론적으로 '공적'/'사적' 구분은 명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공론장'(public sphere, Oeffentlichkeit) 같은 개념에 대한 다양한 사용, 다른 이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가 아는 한 루만은 이 애매한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법에서도 공법과 사법의 구분이 갈수록 불명확해지고 있다고 읽은 기억이 있고...
어떤 의미에서 현대사회에서 정말로 사적인 것은 가족이나 일상적 상호작용 정도가 아닐까.
대부분은 공적이거나 공적, 사적 구분이 쉽지 않은 영역이다. 기업의 활동! 그것은 사적인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공적이기도 하다. 기능체계나 조직들은 대개 공적이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 기능, 역할은 공적이기 한 것.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는 것보다 교회의 기능,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012년 3월 20일 화요일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약점을 다루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고, 거기에서 고수와 하수를 나눌 수 있다. 지금은 몰락했지만 한때 한국 교회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어떤 분의 설교에서 들었던 얘기인데... 그분은 팔씨름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한다. 왜? 팔힘이 그토록 강해서? 노우!! 팔씨름을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 본인이 팔힘이 약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질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았다는  말씀. 허무 개그!  그런 류를 '고수'라 부르고 싶진 않지만 머리 한 쪽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걸 봐서 나름 꽤 인상 깊게 들었나보다.
약점이 분명히 보이는데 그 약점을 세련되게 잘 처리하는 사람을 보면 심지어 호감이 급상승하기도 한다. 내 기억에 남는 경우는... 일종의 자학개그라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사람의 경우 이  자학개그가 효과적이다. 장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 사람의 자학은 정말 '자학'으로 보이지만, 나름 잘 난 구석도 있는 사람의 자학은 자기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는 정확한 자기인식과 그 정도약점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신감과 여유가 없으면 고난이도 자학개그를 하기 힘들다. 자신의 약점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레파토리를 만들어 두는 것도 좋다.

ps) 사실  오늘 저녁을 먹으면서 '발생한' 대화상황에서 느낀 바다. 아 그 상황에서 나에 대한 얘기를 이런 식으로 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생각난 것.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꼭 이걸 써 먹을 테다.

2012년 3월 18일 일요일

야구는 다른 운동 종목과 비교할 때 지적인 측면이 유독 중시되는 경기라고 생각한다. 또 靜적이기도 하고. 체력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상대적으로! 내가 야구보기를 즐겨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아웃 카운트 하나 하나, 공 하나 하나, 주자의 유무, 위치 등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투수, 포수, 타자, 야수 모두 매순간 다른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 상황판단을 잘해서 스마트하게 경기하는 선수, 팀을 좋아한다. 프로야구에서 뛴다면 일단 기본 실력 이상을 갖추었다고 봤을 때 스마트함, 자신감, 성실성 이 세 박자를 고루 갖춘 선수를 좋아한다. 어디 야구 뿐이랴... 차곡차곡다져진 지식과 지혜의 힘과 판단력, 담대함과 용기, 꾸준함...이런 것들을 갖추고 정진하면... 언제가 자기 꽃을 피울 것이다. 그게 가을 혹은 겨울이 될 수도 있다. 아니 몇 년 동안 잠잠하다가 자기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도 있는 것이고...
특히... 스마트함이 떨어지는 선수는... 안타깝게도 가능성이 가장 떨어지는 것 같다. 담대함과 성실함보다 스마트함을 배우고 익히면서 키우기기 가장 어려운 탓이다.  

2012년 3월 16일 금요일

페이스북에는 감성적인 얘기를 남겨두기 힘들다. 100명이 넘는 이들이 내게, 아니 내가 올리는 글에서 기대하는 바를 고려해야 하는 탓이다.여기에서 보다 훨씬 더 공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렇게 한 주가 또 내 뒤로 밀려난다...
새 하루가 시작되었다. 유독 타이핑 소리가 큰 '동료' 옆자리로 '이사'갔는데 예의 그 소리가 옆에서 내 귀를 때린다. 뭐 도서관도 독서실도 아니니... 그나마 연구가 존재 목적인 곳이라 다른 사무실에 비해서  전화통화나 잦은 방문으로 인한 '방해'가 적다는 점에서 위로받아야지. 이곳을 직장으로 삼아 오래 다니는 분들은 외려 도서관 분위기를 피하려고 하신다. 이해할만도 하다. 작은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도서관으로 누가 매일 출퇴근하고 싶어할까. 여하튼 새로운 분위기에서 새롭게 하루를 시작해 보자. 꽃마다 피는 계절이 다르다니 내 꽃도 언젠가는 피겠지.
아.. 그리고 인터넷 접속을 몇 시간 동안 차단한다. 그 프로램 이름은 freedom. What a paradoxical name...

2012년 3월 15일 목요일

현대사회에서 존재의 존재양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사회학적인 표현으로는 '사회적 질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매일 매일 살고는 있는데... 도대체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지 그림을 그리기 힘들다. 그래서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세계사회'는 좋은 출발점이다. 지구 위의 모든 관계는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좀 소박하게 표현하면, 적어도 지구적 연결가능성만큼은 주어져 있다. 물론 '국가' - 영토국가 - 는 여전히 중요한 준거 단위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이다. 지역적으로 천차만별 다른 상황을 전지구적으로 통제, 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근대적 존재 양태를 복잡하게 만드는 (복잡성을 처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복잡성) 중요한 두 가지 원천은 다음 두 가지다.
- 기능적 분화: 다양한 기능체계들이 분화되어서 독립하는 것.
- 지구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 간의 다양한 연계 방식.
자, 다시 블로그의 새로운 글쓰기 페이지를 열었다. 물론 공책을 펼쳐도 되고, 워드 새문서를 열어도 되지만 굳이 이 곳을 열었다. 끊어 두었던 인터넷을 다시 연결시키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내가 이 블로그를 찾는 이유는... " (최양락의 "내가 이 카페를 찾는 이유는..."에서 빌려 옴^^) 무엇보다 '독자'를 상정할 수밖에 없는 '공공성' 때문이다. 여긴 그러니까 공개하는 일기장 같은 그런 곳이다. 누군가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생각과 표현을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는 것.여하튼...그런 자발적으로 떠안은 부담의 힘을 빌어 생각을 좀 정리해 보려 한다.

결국은 존재의 이유!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왜 존재하는가?
왜 지금 이 상태로 존재하는가?
더 좋은 상태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존재의 목적은? 행복? 만족? 즐거움?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현상태를 진단할 필요가 있다.

존재의 이유란 것은 매우 추상적인 주제라서 좀 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철학, 종교 등이 대개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고...
존재의 이유를 파악기 위한 중요한 자원은 역사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지식, 연구가 필요하고...
존재의 이유,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한 노력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 방식이 동원되는데 그런 활동을 문학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존재의 이유나 목적이 아닌 존재의 현상태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한 활동들이 또 있다. 자연과학도 그렇고 사회과학도 대개 그런 주제를 다룬다. 우리는 왜 지금 이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철학) 어떻게 살아 왔는가? (역사학) 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존재의 존재 양태는 매우 다양하다. 개인, 가족, 조직, 국가 등등. 현대의 존재 양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복잡하다. 사회학은 존재의 현상태를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으면 된거다. 거기에서 존재의 목적과 개선 방향 등을 찾아내는 것은 다른 차원, 다른 단계의 과제다.
"fail fast and learn from it" (출처)


맞는 이야기이긴 한데... 무서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2012년 3월 14일 수요일

공부는 어짜피 혼자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산속에 들어가 道를 닦는 심정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면... 그저 단순히 지식을 늘리고 교양을 쌓기 위해서 공부하는게 아니라면... 직장을 잡고 학문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계속 활동하려면... Wissenschaft als Beruf... 학문은 진리를 탐구하는 무슨 대단히 숭고하면서도 외로운 그런 활동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져 있고 알게 모르게 대중의 (심지어 학자의) 과학, 학문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그런 신비의 껍데기를 좀 벗겨 낼 필요가 있다. 그런 작업을 과학사회학이 오랫 동안 해 오고 있는데... 루만도 그래서 '과학과 사회'가 아니라 '사회의 과학' (Die Wissenschaft der Gesellschaft)을 천명했으니...
과학은 집단적 활동이다. 새로운 과학 커뮤니케이션은 뭔가를 근거, 전거로 삼고서 거기에 새로움을 더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완전히 새로운 지식, 연구, 학문?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그런 작업을 '맥락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Kontextualisierung). 자신의 연구를 어떤 학문적 담론 맥락에 연결시키느냐... 그것은 모두 학적 작업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할 때... 바로 그 시작...

2012년 3월 12일 월요일

조직생활의 꽃은 역시 '人事'다. 외부에서는 조직 전체의 성과, 실적을 따지겠지만... 조직에 속한 개인에게는 말그대로 '인사가 萬事다'. 바로 그 만사인 인사때문에 조직이 며칠동안 술렁거리고 있다. 하여...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한다. 집에서라고 공부가 될 것 같지 않으니 이런 날은 자료나 좀 정리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잠자리에 일찍 드는 게 상수다.

자신의 미래가 걸린 승진과 인사이동이 정리가 되면 이제 관심은 상사와 동료로 누가 새로 오느냐다. 새로 오기로 결정된 어떤 사람이 그닥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나 보다. 서로 다른 부서로 미룬다. 어디로 가든 환영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다는 건 불가능하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여하튼 최대치로(!) 환영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같은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12년 3월 10일 토요일

(1) 서로 다른 단위들 간의 융합이 아닌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통합된 상태가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적 통합의 실현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현대사회에서는 통합의 차원이 분화되었고, 그 때문에 어떤 한 차원에서 긍정적 통합이 다른 차원에서의 통합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2) 통합의 차원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 사회(적) 통합: 개인과 사회의 관계
- 체계(적) 통합: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체계들(기능체계, 제도) 간의 관계
- 생태(적) 통합: 개인, 사회와 자연환경 간의 관계

(3) 통합을 이해할 때 핵심적인 주제는 연계 메커니즘이다. 다양한 체계들, 단위들은 어떤 방식을 통해서 연계되는가?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고, 특히 요즘에는 정치의 역할은 주로 '거버넌스'란 개념을 중심으로해서 다뤄진다. 통합을 지향하는 거버넌스는 다시금 다양한 거버넌스 메커니즘을 사용한다. 법을 통한 강제력, 금전적 수단 등이 고전적 메커니즘이고 최근에는 네트워크 등이 중요하게 언급된다. 

(4) 그 밖에 도덕, 윤리, 문화 등의 유연한 메커니즘도 언급할 수 있다. 물론 (넓은 의미로) 문화를 통한 거버넌스, 문화 거버넌스를 통한 통합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다른 단위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합의를 이끌어 내는 그런 문화가 실제로 존재하고, 그걸 지향해야 한다는 이론적 전통도 있지만 - 최근의 하버마스까지 - 실제로 합의, 일치를 지향하는 '문화 통합'은 '신화'라는 것이 지배적 견해다. 그렇다고 문화 통합을 포기할 수는 없다. 문화는 여전히 중요한 연계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자리에 '지식'을 넣어도 될 것 같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문화'는 규범적이라기 보다는 인지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니... 문화 통합, 지식 통합...).

(5) 체계간의 통합에서도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고, 체계 통합과 사회 통합의 균형을 맞출 때에도 그렇다. 예를 들어, '인권' '개인주의' 각종 '상식' 등이 대표적으로 그런 역할을 한다. 여러 체계에서 수용될 수 있는 문화, 합의를 얻을 수 있는 문화는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 밖에 각 체계에 대한 고유한 문화 - 체계에 대한 이해! 경제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과학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등등 - 가 널리 공유되고 인정될 때 체계 통합에 유리하다.

(6) 근대화를 앞서서 이룬 서양의 경우 이런 문화에 대한 이해도, 신뢰도, 공유도가 높은 편이다. 비서양의 경우 구조적으로는 서양의 근대성과 비슷한 모습을 띠나, 문화적 측면에서 괴리감이 큰 편이다.

(7) 아시아의 사회통합과 체계통합의 안정성, 안정도(?)를 비교할 때, 사회통합의 안정도가 체계통합보다 더 높은 것 같다. 체계통합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유지시킬 것인지가 중요한 더 어려운 과제로 남는다. 그 이유를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회통합을 위한 문화는 훨씬 다양한 것 같다. 감정적, 규범적, 정서적인 측면들도 강한 편이고. 반면에 체계통합의 문화는 인지적이고 더 정교하다. 과학윤리, 경제윤리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그러하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공유하는 정도, 실제로 그런 대답이 상식적으로 작동하는지의 여부. 그런 점에서 서양과 비서양이 구별되는 것이다.
문자 메시지로 소통하는 일엔 좀 더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이모티곤이나 ㅠㅠ ~~ ^^ 같은 표시를 덧붙이지 않으면 무척 도전적으로 들린다. 아니 읽힌다. 대면 대화 상황에서는 수시로 조정할 수 있으니 오해의 가능성이 덜한 편이다. 여하튼 문자 메시지를 통한 소통이건 대면 대화이건 간에 내 메시지가 어떤 의미로 전달 될 지를 고민하는 일은 적잖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친하다는 건... 어쩌면 그런 일에 사용되는 에너지 양이 적은 관계를 가리키는 것 아닐까? 아니... 반드시 그런 것 같진 않다.
우선... 애매한 관계, 서로 재는 것이 많은 그런 관계의 경우보단 적게 사용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완전히 낯선 관계에서보다는 더 많이 사용될 것이다. 식당, 가게 주인과 대화를 나눌 때 특별히 신경 쓸 일이 뭐 있겠는가. 지나치게 신경쓰는 일도, 신경 쓸 일이 없는 관계가 지배적인 것도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스스로 너무 고민하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신경을 좀 더 자주 끌 일이고, 배려가 너무 적은 편이라면 그런 일로 좀 더 자주 고민해야 할 것이고... 나는?

편하다는 건 신경이 덜 쓰인다는 얘기이기도하다. 서로 통하는 바가 큼을 확인하는 것이거나 흔히 말하는 애정이 식어가는 상태...

2012년 3월 8일 목요일

애매한 신분이긴하지만 어쨌든 지금 속해있는 이 조직에 다니면서 배우는 바, 느끼는 바가 참 많다. 예를 들어... 조금 전에 인사 발령이 있었다. 역시 조직생활의 꽃은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조직에서 내가 인정받는지, 인정받고 있지 못하는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것이 바로 '인사'다.
이 조직은 여러 면에서 내게 그리 매력적인 조직은 아니라서 뭐 특별한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자세한 얘긴 남기지 않으련다.
오랜만에 달리다. 런닝머신 위에서 5km를 27분 12초 걸렸서... 다음엔 27분을 목표로 생각하면 되겠다. 아직 달리는 속도, 거리 등에 대한 감을 익히는 중이다. 그러기 위해선 런닝머신이 특히 유익하다. 5km를 27분 정도 달리면 하프마라톤 코스를 2시간 내에 달릴 수 있다. 그 정도 속도를 몸에 익히고 그 속도로 꾸준히 달리는 연습을 하면 될 듯.
4월 초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석하자고 하는 걸 고사했다. 그러러면 벌써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은근히 신경쓰이는 일이라... 5월 1일 노동조합 주최로 열리는 대회가 또 있다고 해서 일단 그 대회 참가를 생각하고 있다.
주중엔 달리기 아니면 수영을 거의 매일 하는데도 몸무게는 줄질 않는다. 참 희한한 일이다. 듣자하니 체중을 줄이려면 운동의 강도를 지속적으로 높이거나 변화를 줘야 한다는데... 운동도 익숙해져 버리면 몸이 더 이상 운동으로 여기지 않는대나 뭐래나. 어휴. 뭐 딱히 살쪄 보이는 것도 아니니 몸무게는 그냥 신경끄기로 하자. 내 몸무게가 줄지 않는 건... 근육량이 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 때문이다!! 이상!!

2012년 3월 5일 월요일

전쟁같은 주말을 보내고 난 후 맞는 월요일. 내 공부의 경로 위로 다시 올라서기까지 (einsteigen)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영부영 오전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좀 더 일찍 '출근'해야 할 모양이다. 그래서 9시부턴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그러려면 일찍 자야하고... 늦은 밤 예능프로그램 시청을 끊어야 할 듯... 긍정적 선순환이 만들어지길... 점심시간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다. 밥값은 해야지?

2012년 3월 3일 토요일

두 목사님 이야기

소개하려는 이 두 목사님에겐 개신교 교단 목사님이라는 것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내 '페친'이라는... 물론 내 페이스북 친구인 목사님은 그 외에도 여럿 있지만... 여하튼 오늘 내 일기장에 언급해두려는 두 페친 목사님은 김동호, 김은호 목사님!
김동호 목사님은 직접 뵌 적은 없다. 아마 그 분 책을 두어권 읽은 것 같긴 하지만,  인간적 면모는 페북을 통해서 제대로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보면 볼수록 멋진 분이다. 페북 활동 초기엔 '나꼼수'에 대한 '보수적' 견해 때문에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했지만, 그 이후 올라오는 글들은 그 분이 얼마나 멋있고 매력있는 분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보수 교단에서 보기 드물게 화통하고, 솔직하고, 진실된 목회자... 자신의 삶과 생각을 참고문헌 삼아서  써내려가는 소박하고 진솔한 글들이 좋다.
또 다른 분은 김은호 목사님. 지금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 담임목사.  좋은 점, 매력적인 점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목회자다. 무엇보다  무척이나 열려있고, 이런 저런 눈치보며 꺼려할만한 일도 과감하게 시도한다는 점에서... 최근 교회 중고등부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새벽예배(기도회?)가 '부흥'하고 있는데 참석 인원이 100명 이상이 되면 담당 교역자들이 머리 염색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100명을 넘겨서 몇몇 담당 목사님들이 얼마전 염색을 했다고... 김목사님은 참석인원이 500명을 넘기면 본인도 염색을 하겠다고 공약. 이번 주에 중고등부 학생을 대상으로 열린 큰 행사가 겹치면서 500명을 넘겼고, 김목사님은 며칠 전 머리 염색 인증샷을 페북에서 공개. 와인색으로 했다가 학생들의 요구 때문에 앞머리에 녹색을 더했다는... 목회자가 머리염색을 하다니 이 무슨 해괴망칙한 짓이냐고 비웃을 수도 있고, 머리염색이건 뭐건 간에 교회에서 모임 참석인원을 놓고서 뭔가를 내건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난 그런 시도를 과감하게 할 수 있는 용기있는 모습이 좋다.

2012년 3월 2일 금요일

며칠 전에 잠시 언급한,  하기 싫은 일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게 되는 일 2탄을 조금 전에 마치다.  우여곡절이 좀 있었다. 원고를 보내고 나서 홀가분한 기분을 누리고 있을 즈음에 걸려온 전화. 청탁한 사람이 내용을 덧붙여주길 원한 것. 심리적 저항이 밑에서부터 올라왔으니 가라 앉혔다. 비합리적인 요구가 아니었고, 원래 요구받은 바를 내가 임의적으로 축소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내가 들인 노력에 비해선 적지 않다고 할만한 보상을 벌었으니... 언제 입금될 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한 건 이처럼  급하게 해야 할 다른 일들이 있을 때면 내 공부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솓구친다. 막상 그런 일들이 다 끝나고 아무런 방해없이 내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되면...  자꾸만 다른 곳으로 또 도망치고 싶은 것. 아... 그러니 뭔가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정말로... 매일, 매주 내 성과를 점검하고 평가하고 보상 혹은 처벌하는 그런 장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