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의식의 흐름을 좇는 초현실주의처럼... 이런 글은 떠 오르는 생각을 붙잡아 놓은 것이니 그냥 그러려니... 무시하시길...)
가족주의, 권위주의, 연고주의... 가 신뢰 형성을 막는다. '전근대적 문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근대적 합리성의 기초는 개인주의다. 구조자체가 전근대적이었을 때는 우선 구조를 바꾸는 일에 집중한다. 구조를 바꾸면 문화도 바뀌리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전근대적 문화는 근대사회의 구조적 조건에서 일부 저항을 받기는 하지만, 좀 더 세련된 모습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전근대성을 뻔뻔하게 드러내면서도 살아남는다.
특히, 전근대적 문화가 변화된 구조의 재생산에 역기능적으로 작용함이 드러날 때 비로소 문화 변혁에 힘이 실린다. 문화는 결코 구조 변화를 그대로 좇아가는 법이 없다. 독자적인 생존력을 가지고 있다. 전근대적 문화가 새로운 구조와 잘 지내게되면 전근대적 문화를 바꾸기는 더 힘들어진다. 대표적으로 정치계, 언론계, 조직 문화, (일상적) 친밀한 관계 등을 들 수 있겠다.
역기능을 보이는 분야들이 좀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 선수들 (히딩크가 선수들끼리 서로 이름부르도록 한 것, 하지만 그것은 매우 일시적, 일회적 사건이었다. 홍명보가 감독으로서 이끈 올림픽 대표팀도 위계적 질서를 중시했다고 하고... '고참의 역할' 운운하는 프로야구팀들... 선후배 관계를 확인하는... ), 과학의 경우 실험실의 권위주의, 위계적 질서 등이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 나아가 과학의 긍정적 재생산에 방해가 됨이 드러나면서... (황우석 사건), 혹은 연고주의에 의해 부정한 방식으로 취득한 학위가 경력에 해가 될 수 있다면... 그런 경우도 줄어들 수도 있다.
기능적 분화는 전근대적 문화와 관련해서 두 가지 경향을 동시에 종용한다. 한편으로 근대적 문화가 역기능, 혹은 구조의 지속에 불리하게 작용함이 드러나면서 근대적 문화 도입을 종용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구조의 유지와 재생산에 전근대적 문화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할 경우도 있어서 그런 경우 전근대적 문화는 살아남는다. 전근대적 문화는 근대적 구조의 재생산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 때 그 때 다르다.
체계이론적 접근을 통해서 우리는 구조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문화의 변화 그리고 수렴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지적할 수 있다. 오히려 근대적 구조가 전근대적 문화의 온존, 지속을 - 합법적으로 - 가능하게 만들기도 함을 보여줄 수 있다. 근대적 구조, 특히 기능 체계의 합리성은... 사회 전체에 대한 비합리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방식은 여전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전근대적 문화는 유지,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근대적 구조와 전근대적 문화의 친화성!!
연구윤리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닌 접근이다. 체계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절차 같은 것.
하지만 그런 연구윤리조차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전근대적 문화다.
전근대적 문화는 근대적 구조에서도 여전히 많은 경우 효과적이고, 그래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기능체계는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는지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조직'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더군다나 네트워킹을 생각하면 더더욱...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는 근대사회의 기능적 분화는 조직사회라는 특징과 갈등을 빚을 때가 많다. 특히... 일관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않은 비서구 지역에서는 더더욱...
기능적 분화는 비합리적 문화가 발흥하기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억제하는 메커니즘들이... 이리 저리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것들로 지켜내기엔... 버거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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