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km를 뛰다. 기록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지만, 기록은 그 자체로는 참 지루하고 괴로운 일인 달리기에서 소소한 재미를 느끼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오늘 기록은 약 56분. 가장 좋은 기록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오늘은 유독 힘들었고 그래서 중간 중간 뛰다말고 걷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기록이 나올 수 있었을까? 내 해석은... 아무래도 런닝머신 위를 달리면서 평균 속도를 높였고 그 속도감이 몸에 붙었다... 정도? 내가 힘들다고 느끼는 것과, 실제 내 몸이 달리는 속도는 서로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이런 게 연습의 힘일까? 내 심리적인 상태나 판단과 상관 없이 몸이 반응하고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
야구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길 자주 한다. 특히 타격 폼을 바꾸거나, 투수가 새로운 구종을 익힐 때... 자꾸 던져서, 그리고 자꾸 반복 연습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를 '케이팝스타'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는 박진영씨도 이야기한다. 연습을 열심히 하고, 이런 저런 단점을 보완하려고 애쓰되, 무대에선 그 모든 것들 잊고서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그가 전하고 싶은 얘기는 아마도... 연습을 철저하게 해서 그런 점들을 몸에 익히라는... 체득하라는... 습관으로 만들라는... 그래서 의식하지 않더라도 발현되게끔 만들라는... 얘기일 터. 연습이 부족한 사례는 어쩌면 케이팝스타 참가자 박지민의 생방송 진출 자격을 얻기 위한 마지막 무대.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니까 예전에 지적받던, 그리고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하던 나쁜 습관이 나온 것. 어른스럽게 꾸미는, 누르면서 끌어올리는 발성...
위기상황에서 그 사람의 본심이 나오고, 본질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평상시엔 누구나 어느 정도 자신의 본질을 감추고서 꾸밀 수 있으니까... 그 위기상황에서도 '내가 지향하는 나', '내가 원하는 나'가 드러날 수 있게 하려면 철저하게 훈련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몸에 익어서 의식하지 않아도 발현될 수 있게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려면 자기 규율, 자기 관리는 피할 수 없나 보다. 그런 것까지 포기하고서 정말 자유롭게 살려면 인간으로 인정받겠다는 기대를 포기해야지... 조영남씨 같은 경우가 그런 삶에 좀 가까운 듯... 그이만큼이라도 자유롭게 살 자신이 없다면, 다른 길 없다. 그냥 자기 검열, 자기 규율, 훈육하며 좀 더 좋은 모습이 나오도록 자신을 가꾸고, 꾸미고, 만들어 가는 수밖에...
여하튼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런닝머신에서 속도를 높여 가면서 속도감을 체득하고, 밖에서 뛸 때는 적용되는지 확인해 보고...
2012년 2월 29일 수요일
최근 조직의 인사, 평가, 연봉, 리더십, 직제개편 그리고 선거 등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직간접적으로 겪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원칙이나 작동 원리와 실제 물밑에서 오고 가는 행위들 사이엔 큰 차이가 있었다.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나 비슷한 현상이 관찰될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그 차이의 정도나 심각성에 있겠지. 그 차이가 적을수록 선진사회, 제대로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언행일치'란 표현이 있지만 그보다는 '정명'正名이나 '명실상부'名實相符 가 더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유가에서 강조하는 이야기니, 사실 한국에서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사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듯. 죽여야할 공자는 '명분'名分만 내세우는 그런 공자일테고... 오히려 서구의 근대화는 정확하게 명실상부'名實相符를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리주의... 서구의 근대성 형성에 동아시아의 유교가 (혹은, 불교도?) 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건 유가 가르침에 내표되어 있는 실용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적 요소를 가리키는 이야기일 것이다. '명'과 '실'이 따로 놀고 '명분'만이 남는 그런 유가사상의 폐해가 조선왕조의 몰락, 나아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적 유교 전통이 근대로 이어지지 못하게 된 원인일 수 있을텐데, 그런 나쁜 습관은 서구 중심 근대화의 틀을 수용하고 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서구적 근대성 중심으로 짜여진 틀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겉모습, 즉 '명'만을 취하고, '실'은 다른 내용으로 채워지는... 명과 실의 괴리! 스스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모르고 내뱉는 저 많은 이야기들.... 구조적으로 미끄러지는 (structural drift) 명과 실... 그 간극을 줄이는 일이 중요한 과제다.
2012년 2월 28일 화요일
통합: 사회통합, 체계통합
요즘 '통합'에 대해서 쓰고 있다. integration! 통합은 크게 체계통합과 사회통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생태적 통합'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1) 통합은 동등한 위치에 놓여 있는 단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체계통합). 동등한 차원에서 존재하는 단위들 사이의 구분이 없어진다면 그건 융합(fusion) 혹은 동화(assimilation)다. 통합은 단위의 정체성은 유지하되 다른 단위와의 관계 때문에 그 단위가 선택할 수 옵션들이 줄어드는 상태에 대한 것이다 (자유도의 축소).
이런 통합 정의를 엄밀하게 적용하자면 사회통합의 반대인 탈통합(disintegration) 상태는 한편으로는 한편으로 단위들이 아무런 관계 없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를, 다른 한편으로 완전히 융합 혹은 동화되어서 단위들을 더 이상 구분하기 힘든 상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탈통합이라면 대개 전자를 가리키고, 후자에 대해선 대개 '과잉통합' 같은 표현을 쓴다. 통합 자체는 대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긍정적 상태, 즉 요소들 간의 적절한 결합보다 결합 정도가 약한 경우에 '탈통합' 혹은 '해체'로 표현하고, 적절한 결합보다 결합 정도가 강한 경우엔 '과잉통합'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 요소들 간의 결합력 +
탈통합, 해체 < 통합 < 과잉통합
(2) 통합은 어떤 한 단위가 그보다 더 큰 단위의 활동에 적절하게 참여하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사회통합). 이는 포함, 포섭 (inclusion)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개인이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에 통합되는 경우 말이다. 예컨대, 외국인이 한국사회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 문제는 이런 표현들이 가리키는 '한국 사회'가 도대체 무엇인지, '한국사회'라는 단위가 매우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여하튼... 특히, 이런 경우에 통합은 '동화'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 개인과 상위 단위의 사회체계들 간의 관계
독립, 배제, 해체, 탈통합 < 통합(포함, 포섭) < 과잉통합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서 체계에 굳이 통합되지 않아도 되는 경우 (예를 들어 부자들과 경제체계)와 체계에 참여할 수 없어서 배제되는 경우는 (예를 들어 빈민들) 같은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다.
(3) 사회는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어떤 요소를 중심으로 사회를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사회에 대한 매우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는 통합에 대한 이야기에도 적용된다. 통합의 대상이 되는 요소들이 어떤 수준, 차원이냐에 따라 매우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개인 간의 통합인가, 조직 간의 통합인가, 사회의 기능체계들 간의 통합인가, 아니면 개인과 조직 간의 통합인가 등등. 이런 다양한 통합 (탈통합이나 과잉통합을 포함한...) 양상들의 관계는 그야말로 복잡하다. 현대사회 복잡성을 보여주듯이... 어떤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기능하는 통합이 다른 차원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특히, 사회통합 차원에서 이 문제는 더 복잡한 것 같다.
(4) 반면에 체계통합은 좀 단순하다. 체계들 간의 관계는 적절하게 통합되는 게 가장 좋다. 지나치게 독립적이어도 곤란하고, 한 체계가 다른 체계들을 먹어삼키려 드는것도 좋지 않다. 적절하게 긴장을 유지하면서 협력하는 상태가 가장 좋다. 그러니 체계들 간의 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면 체계들의 관계는 요동이 좀 있더라도 쉽게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 최근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도 그런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계가 다른 체계들을 좌지우지하는 경향에 대한 반발...
(5) 물론 현대사회는 매우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는 체계들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전체적으로 조정하는 그런 통합메커니즘은 존재하기 힘들다. 그러니 체계들 간의 통합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일은 어떤 체계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냐를 구체적으로 설정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야기될 수 있다).
(6) 체계통합의 어려움을 가져오는 또 다른 이유는 체계가 준거로 삼는 수준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 차원을 주된 준거 수준으로 삼는 정치체계와 세계적 차원에서의 재생산을 지향하는 과학체계는 지향 수준의 차이 때문에 적절한 통합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런 이유에서 체계 간의 통합을 조정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와 과학체계의 통합 메커니즘은 대표적으로 인권, 개인주의 등이다. 물론 이 밖에도 다양한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준거하는 차원의 다름이 문제가 될 때 이를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그렇다는 말씀. 체계 간의 적절한 통합을 위해서는 다양한 체계통합 메커니즘 간의 균형이 중요하다.
(7) 사회통합의 경우엔 체계통합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 같다. 이를 교통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 모든 통합이 긍정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통합을 위해서는 탈통합이 전제되어야 하기도 하고... 그러니 이 역시 사회통합 간의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길 할 수 있을 뿐.
(1) 통합은 동등한 위치에 놓여 있는 단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체계통합). 동등한 차원에서 존재하는 단위들 사이의 구분이 없어진다면 그건 융합(fusion) 혹은 동화(assimilation)다. 통합은 단위의 정체성은 유지하되 다른 단위와의 관계 때문에 그 단위가 선택할 수 옵션들이 줄어드는 상태에 대한 것이다 (자유도의 축소).
이런 통합 정의를 엄밀하게 적용하자면 사회통합의 반대인 탈통합(disintegration) 상태는 한편으로는 한편으로 단위들이 아무런 관계 없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를, 다른 한편으로 완전히 융합 혹은 동화되어서 단위들을 더 이상 구분하기 힘든 상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탈통합이라면 대개 전자를 가리키고, 후자에 대해선 대개 '과잉통합' 같은 표현을 쓴다. 통합 자체는 대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긍정적 상태, 즉 요소들 간의 적절한 결합보다 결합 정도가 약한 경우에 '탈통합' 혹은 '해체'로 표현하고, 적절한 결합보다 결합 정도가 강한 경우엔 '과잉통합'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 요소들 간의 결합력 +
탈통합, 해체 < 통합 < 과잉통합
(2) 통합은 어떤 한 단위가 그보다 더 큰 단위의 활동에 적절하게 참여하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사회통합). 이는 포함, 포섭 (inclusion)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개인이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에 통합되는 경우 말이다. 예컨대, 외국인이 한국사회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 문제는 이런 표현들이 가리키는 '한국 사회'가 도대체 무엇인지, '한국사회'라는 단위가 매우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여하튼... 특히, 이런 경우에 통합은 '동화'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 개인과 상위 단위의 사회체계들 간의 관계
독립, 배제, 해체, 탈통합 < 통합(포함, 포섭) < 과잉통합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서 체계에 굳이 통합되지 않아도 되는 경우 (예를 들어 부자들과 경제체계)와 체계에 참여할 수 없어서 배제되는 경우는 (예를 들어 빈민들) 같은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다.
(3) 사회는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어떤 요소를 중심으로 사회를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사회에 대한 매우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는 통합에 대한 이야기에도 적용된다. 통합의 대상이 되는 요소들이 어떤 수준, 차원이냐에 따라 매우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개인 간의 통합인가, 조직 간의 통합인가, 사회의 기능체계들 간의 통합인가, 아니면 개인과 조직 간의 통합인가 등등. 이런 다양한 통합 (탈통합이나 과잉통합을 포함한...) 양상들의 관계는 그야말로 복잡하다. 현대사회 복잡성을 보여주듯이... 어떤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기능하는 통합이 다른 차원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특히, 사회통합 차원에서 이 문제는 더 복잡한 것 같다.
(4) 반면에 체계통합은 좀 단순하다. 체계들 간의 관계는 적절하게 통합되는 게 가장 좋다. 지나치게 독립적이어도 곤란하고, 한 체계가 다른 체계들을 먹어삼키려 드는것도 좋지 않다. 적절하게 긴장을 유지하면서 협력하는 상태가 가장 좋다. 그러니 체계들 간의 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면 체계들의 관계는 요동이 좀 있더라도 쉽게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 최근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도 그런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계가 다른 체계들을 좌지우지하는 경향에 대한 반발...
(5) 물론 현대사회는 매우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는 체계들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전체적으로 조정하는 그런 통합메커니즘은 존재하기 힘들다. 그러니 체계들 간의 통합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일은 어떤 체계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냐를 구체적으로 설정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야기될 수 있다).
(6) 체계통합의 어려움을 가져오는 또 다른 이유는 체계가 준거로 삼는 수준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 차원을 주된 준거 수준으로 삼는 정치체계와 세계적 차원에서의 재생산을 지향하는 과학체계는 지향 수준의 차이 때문에 적절한 통합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런 이유에서 체계 간의 통합을 조정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와 과학체계의 통합 메커니즘은 대표적으로 인권, 개인주의 등이다. 물론 이 밖에도 다양한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준거하는 차원의 다름이 문제가 될 때 이를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그렇다는 말씀. 체계 간의 적절한 통합을 위해서는 다양한 체계통합 메커니즘 간의 균형이 중요하다.
(7) 사회통합의 경우엔 체계통합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 같다. 이를 교통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 모든 통합이 긍정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통합을 위해서는 탈통합이 전제되어야 하기도 하고... 그러니 이 역시 사회통합 간의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길 할 수 있을 뿐.
큰 돈은 아니지만 어쨌든 돈을 버는 일에 하루 반 정도 시간을 쓰다. 짧은 글을 쓰는 일... 분량 자체가 워낙 작고 게다가 번역에 가까워서 그다지 많은 노동량을 요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하기 싫어서몸을 배배꼬다가 억지로 겨우... 중요한 것은 어쨌든 해 냈다는 것. 도대체 어떻게 해 낼 수 있었을까?
우선 가장 중요한 요인은 타인과 약속한 일이었다는 점. 스스로에 대한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 두번째는 약속의 대상과의 관계가 공적이었다는 점. 그 관계가 공적이면 공적일수록 강제하는 힘이 강하다. 세번째는 목표가 분명했다는 점. 어떤 내용으로, 언제까지... 네번째는 보상이 확실했다는 점. 눈에 바로 보이는 경제적 보상은 집중력을 발휘하게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듯. 물론 보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다. 심지어 스스로 만들 수도 있으니. 예컨대, 오늘 목표한 바를 이루면 나머지 시간엔 영화을 한 편 본다던지...
오랜 시간을 요하는 과제의 경우 집중력을 유지해서 목표를 이루기까지 그 과정이 험난하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수 년간 집중해서 매진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들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대부분 그러지 못하니 약속, 계획, 목표, 보상 등을 잘라서 배분할 필요가 있다. 일, 주, 월 단위로... 가능하면 목표 달성에 때한 점검을 공식적인 관계 속에서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했을 경우에 대한 보상도 관계 속에서 정해두고서... 가능하다면 그것도 공식적으로... 차선은 비공시적 보상. 차차선은 스스로에 대한 보상...
자. 오늘의 목표는? 이번 주의 목표는? 이번 달의 목표는? 각각의 목표에 대한 보상은? 누가 그 목표를 점검하고 보상을 제공할 것인가?
자. 오늘의 목표는? 이번 주의 목표는? 이번 달의 목표는? 각각의 목표에 대한 보상은? 누가 그 목표를 점검하고 보상을 제공할 것인가?
2012년 2월 24일 금요일
2012년 2월 22일 수요일
2012년 2월 21일 화요일
요즘 호르몬에 대해서 고민할 일이 좀 있었다. 인간의 생리작용을 조절하는(것으로만 막연하게 알고있는) 호르몬, 그 호르몬의 작용이 결국 인간의 감정까지도 궁극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 사랑, 우정, 끌림, 애착, 즐거움, 슬픔, 욕망 등등 인간의 감정은 대단히 비생물학적이고 심지어 미지의 신비한 영역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고차원적' 의미를 모르는 호르몬의 작용과 변화가 가져 온 결과일 수 있다는... 인간은 때로는 본능적 조건을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소소한 호르몬 변화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참으로 위태로운 존재라는...
치매 환자를 다룬 방송프로그램을 봤는데... 뇌의 어떤 미세한 변화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인간이란 존재의 위태로움. 그 위태로움 속에서 살금살금 살아가면서 내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다는 것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사회생물학처럼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생물학적인 언어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최근엔 그런 설명 방식에 마음을 좀 더 열게 되었다. 정말이지..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기계에 불과한지도...
치매 환자를 다룬 방송프로그램을 봤는데... 뇌의 어떤 미세한 변화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인간이란 존재의 위태로움. 그 위태로움 속에서 살금살금 살아가면서 내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다는 것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사회생물학처럼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생물학적인 언어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최근엔 그런 설명 방식에 마음을 좀 더 열게 되었다. 정말이지..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기계에 불과한지도...
하프마라톤 공식기록 2시간 5분 51초! 연습할 때 1km당 6분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딱 그만큼 나왔다. 2시간 페이스메이커를 12km 정도는 따라 갔는데 그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그냥 앞으로 보냈다. 한 번 더 하프 코스에 참가한다면 그 때는 '2시간 이내'를 목표로 삼으면 되겠지. 내 체격 조건이 급격하게 바뀌지 않는한 하프 코스 이상을 도전하는 건 욕심인듯. 러닝 머신에선 10km 정도, 실외에서라면 10 - 15km 정도가 몸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거리인 것 같다.
10km 마라톤에 참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하프는... 많이 달랐다. 한 번도 뛰어 보지 않은 거리를... 정말 뛸 수 있을지 당일까지 의심하던 그 거리를... 만족스러운 시간 안에 완주하다니. 이런 맛에 마라톤을 하나 싶다.
하루를 푹 쉬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더 시급한 문제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10km 마라톤에 참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하프는... 많이 달랐다. 한 번도 뛰어 보지 않은 거리를... 정말 뛸 수 있을지 당일까지 의심하던 그 거리를... 만족스러운 시간 안에 완주하다니. 이런 맛에 마라톤을 하나 싶다.
하루를 푹 쉬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더 시급한 문제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2012년 2월 16일 목요일
클래식 음악 중에서 피아노나 첼로 등 하나의 악기가 연주의 중심이 되는 곡을 좋아하는 편이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여러 악기들이 동시에 소리를 내는 음악의 경우, 그 소리들이 섞이면서 각 악기의 고유한 소리를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인 것 같다.
바흐 첼로 조곡을 헤드폰으로 좀 크게 듣다보니 - 옆 자리에서 전화통하화는 소리를 몰아내려고... - 연주자의 왼손 모양, 오른손 모양 그리고 전체적으로 연주하는 자세까지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연주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니 소리가 매우 인간적으로 들리게 되고... 교향곡 같은 걸 작은 스피커를 통해서 듣게 되면 아무리 연주 자체가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에서 대단한 감흥을 얻기란 어렵다. 역시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은 사람이 하는 연주는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는 게 최선이고,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런 효과를 최대한 얻을 수 있는 연주 장르나 청음 방식을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작가, 작자, 연주자의 흔적을 찾길 좋아하는 내 성향은 미술작품에 대한 취향에서도 발견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난 물감을 아끼지 않고 덕지덕지 칠한 유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화가가 붓을 놀린 자국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일수록 실물을 볼 때와 인쇄물로 볼 때의 차이가 큰 편이다. 그렇지 않은 평면적인 그림들은 실물을 봐도 특별한 감흥을 느끼기 힘들다. 동아시아 미술 전통의 수묵화가 그런 경우다. 물론 여백을 넓게 쓰면서 간결하게 그런 어떤 수묵화에선 - 역시 내가 좋아하는 - 매우 모던한 정취를 느낄 수 있긴 하다. 미니멀리즘... 절제의 미...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수묵화는 너무 평면적이다.사람 냄새, 고뇌의 깊이를 느끼기 힘든 것
언젠가 다른 글에서 소개했던 내용인데..
„우리 전통 회화에 강렬한 명암대비와 이에 기초한 실존적 불안의 이미지를 보기 어렵다는 점은 그만큼 우리에게 근대가 늦게 다가왔음을 시사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주헌, 지식의 미술관 , 79쪽)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앓는 소릴 자주 올리는 것 같아 좀 '거시기'하지만, 사실 그럴 때 쓰려고 만든 곳이니 독자제위께서는 이해해주시길...
모두 다 생각이 많은 탓이다. 지나치게... 좀 더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수도... 너무 단순한 삶을 오랫동안 살아서, 신경써야 할 일이 조금만 늘어나도 처리용량 부족으로 버벅거리는 현상일지도...
너무 단단하면 외려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부러지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정도를 높이는 게 항상 최선인 것도 아니다. 너무 복잡할 땐 단순하게 정도를 가는 게 옳을 때가 많으니까...
그럼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춰야하나. 어쩌면 지금 그 갈림길 주위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두 다 생각이 많은 탓이다. 지나치게... 좀 더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수도... 너무 단순한 삶을 오랫동안 살아서, 신경써야 할 일이 조금만 늘어나도 처리용량 부족으로 버벅거리는 현상일지도...
너무 단단하면 외려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부러지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정도를 높이는 게 항상 최선인 것도 아니다. 너무 복잡할 땐 단순하게 정도를 가는 게 옳을 때가 많으니까...
그럼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춰야하나. 어쩌면 지금 그 갈림길 주위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인지도...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histopian)이 트위터에 올리는 글에서 배우는 바가 많다. 오늘 들은 얘기를 옮겨 놓는다.
1. 옛날에는 ‘국격’이 통치자의 칭호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황제의 나라는 제국, 왕의 나라는 왕국, 공(公)의 나라는 공국. 한자문화권에서는 호칭의 격을 더 많이 따졌죠. President를 천황보다 하급인 대통령으로 번역한 건 일본인들이었습니다.
2. 우리는 처음 추장이라고 부르다가 미국과 수교할 때 중국의 예를 따라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이라고 썼습니다. 미국에 국서를 보낼 때는 ‘대백(大伯)’이라고도 했죠. 우리가 ‘대통령’이라 부르기 시작한 건 1892년 경부터였습니다.
3. 조선 초기 군대와 청나라 팔기에는 ‘통령’이라는 벼슬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그보다 한 등급만 높았던 거죠. 신해혁명 이후 공화제를 채택한 중국은 자기들 통치자를 ‘총통’이라 했습니다. '총(總)'이 '통(統)'보다 윗급이었거든요.
4. 요즘 각하께서 부쩍 ‘국격’을 강조하시는군요. 옛날식으로 국격을 높이려면 ‘대통령’을 ‘대총통’으로 바꾸면 될 겁니다만, 히틀러가 걸리네요. 요즘 국격은 통치자의 ‘칭호’가 아니라 그의 ‘인격’과 ‘정책’, ‘청렴도’에 좌우되는 거겠죠.
1. 옛날에는 ‘국격’이 통치자의 칭호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황제의 나라는 제국, 왕의 나라는 왕국, 공(公)의 나라는 공국. 한자문화권에서는 호칭의 격을 더 많이 따졌죠. President를 천황보다 하급인 대통령으로 번역한 건 일본인들이었습니다.
2. 우리는 처음 추장이라고 부르다가 미국과 수교할 때 중국의 예를 따라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이라고 썼습니다. 미국에 국서를 보낼 때는 ‘대백(大伯)’이라고도 했죠. 우리가 ‘대통령’이라 부르기 시작한 건 1892년 경부터였습니다.
3. 조선 초기 군대와 청나라 팔기에는 ‘통령’이라는 벼슬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그보다 한 등급만 높았던 거죠. 신해혁명 이후 공화제를 채택한 중국은 자기들 통치자를 ‘총통’이라 했습니다. '총(總)'이 '통(統)'보다 윗급이었거든요.
4. 요즘 각하께서 부쩍 ‘국격’을 강조하시는군요. 옛날식으로 국격을 높이려면 ‘대통령’을 ‘대총통’으로 바꾸면 될 겁니다만, 히틀러가 걸리네요. 요즘 국격은 통치자의 ‘칭호’가 아니라 그의 ‘인격’과 ‘정책’, ‘청렴도’에 좌우되는 거겠죠.
2012년 2월 14일 화요일
2012년 2월 13일 월요일
런닝머신 위에서 77분 동안 13km를 달리다. 애초에 90분, 15km를 목표로 삼았고 더 뛸려면 뛸 수 있었으나 무리하지 않았다. 밖에서 달리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같은 자리를 뛰는 일이라 무엇보다 지겹다. 다만 내 속도와 거리 등을 점검하면서 달릴 수 있어서 페이스를 익히는 데는 매우 유익한 것 같다. 대회까지는 이제 1주일도 남지 않았다. 하프 마라톤이니까 21km하고도 좀 더 되는 거리인데 아직 그 정도로 긴 거리를 뛰어 본 적은 없다. 내 마라톤 멘토이자 그 날 페이스메이커를 해주기로 한 선배는 충분히 뛸 수 있다고 하는데 한 편 걱정이 되기도 한다. 10km 마라톤은 뛰고 나서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엔 확실히 다를 것 같긴하다.
요즘 생각이 많고 - 어디 요즘 뿐이겠는가마는... - 뭔가 억눌린 것들이 있는지 악몽을 자주 꾼다. 혼자 있을 때 가끔씩 작은 일에도 욱하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아마 2월 달에 해결해야 할 몇 가지 일들 때문인 것 같다. 감추고 싶은 내 위치를 확인하게 만들 그런 일들이라서...
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그냥 더 열심히 해서 극복하는 수밖에... 모두 내 탓이니 그때까진 감내하는 수밖에...
요즘 생각이 많고 - 어디 요즘 뿐이겠는가마는... - 뭔가 억눌린 것들이 있는지 악몽을 자주 꾼다. 혼자 있을 때 가끔씩 작은 일에도 욱하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아마 2월 달에 해결해야 할 몇 가지 일들 때문인 것 같다. 감추고 싶은 내 위치를 확인하게 만들 그런 일들이라서...
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그냥 더 열심히 해서 극복하는 수밖에... 모두 내 탓이니 그때까진 감내하는 수밖에...
공공적 질서나 원칙이 제대로 서있지 않거나 그것을 깨는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에서... 개념없는 운전자들에 대해서, 개념없는 행정과 공공의식 부재가 낳은 길거리 풍경에 대해서, 2mb와 그 무리들의 천박한 행태에 대해서... 원칙을 중시한다고해서 '법대로'의 그 형식적 법치주의자로 오해되면 섭섭... 개인의 자율성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그런 최소한의 게임의 법칙을 세우는 일에 대한 관심이다. 개별 인간의 구체적 삶에 대한 관심은 적은 편... 독일에서는 그런 점에서 분노를 느낄 일이 오히려 적었다. 예측가능한 사회... 여하튼 공공적 질서의 문제는 '체계통합'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을듯...
진로와 인생의 방향을 고민할 때 심장을 뛰게 하는 일에서 찾으라고 얘기한다. 내 심장이 특별히 더 뛰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특별한 즐거움, 희열을 느낄 때. 혹은 어떤 일, 상황이 짜증, 슬픔, 안타까움, 때로는 그것을 넘어선 분노를 느끼게 할 때.
아래에 쓴 글은 그런 기준을 내게 적용해 본 결과다. 아직 원론적인 얘기일 뿐이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자면 그 리스트는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융합' '통섭' '통합'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별 성찰없이 그런 개념들을 그저 유행을 좇는듯 가져다 쓰는 경향이 탐탁치 않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한국문화로의 동화를 얘기하면서 '다문화주의'란 표현을 가져다 쓰는 경향도 못마땅하다.
2012년 2월 11일 토요일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때로는 심지어 '분노'의 감정을 유발하는 견해 혹은 접근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1) 결정론!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정치, 경제, 미디어, 기술 등 한 두가지 요인이나 힘을 독립변수로 삼아서 설명, 해석하는 접근.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이나 페이스북,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것처럼 떠벌이는 미디어 결정론... 근본주의적 성향의 종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2) '표피'만에 대한 설명 (문화결정론?)! 깊든 얕든 어떤 현상 이면엔 역사적, 구조적인 차원이 있는 법인데, 그런 관계를 깊이 고려하지 않고 드러나는 모습만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떠는 경향. 소위 '문화'에 대한 대부분의 담론이나 연구, 혹은 포스트모너니즘을 달고 나오는 많은 견해가그런 입장을 취한다.
3) 깊은 성찰없이 단어, 개념, 이론을 유행처럼 가져다 쓰는 경우.
4) 그 반대의 극단에 있는 경우인데, 번역어 혹은 외국 이론을 쓰는 경우 원어, 원문, 원전의 의미를 신성시하다시피해서 한국어 번역어나 번역문의 잘잘못을 따지는 경우.
5) 연구나 사고의 대상을 성스럽게 여기는 경향을 '훈고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칸트, 헤겔, 베버, 하버마스, 루만, 지젝, 혹은 공자, 노자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저작을 경전처럼 모시면서 조심스럽게 주석을 다는 그런 작업들. 그러다가 그런 학자, 인물에 사랑에 빠져서 그들을 성스러운 존재로 격상시키기까지... 가장 역겨운 짓거리 중 하나. 성서, 불경, 꾸란 등 종교 경전에 대해서 성찰적 거리를 두지 못하고 문자주의적으로 접근하는 태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6) 역사의식 결여! 훈고학에 빠지는 경우는 대개 자기의 현재 입장을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상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역사적 맥락,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텍스트 그 자체를 진리처럼 여기면서 주석을 달거나, 혹은 그 텍스트의 현재적 의미를 고민하지 않는 그런... 한국 교회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가 이에 해당한다.
7) 민족주의, 아니 국수주의 (唯我論)?)! 국가에 대해선 국수주의지만, 지역주의, 가족주의도 포함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 그룹의 견해,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둘러싼 환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견해.
내가 지향하는 태도...
1) 복잡성을 인정하기! 세상과 인생은 너무도 너무도 복잡하다. 그렇게 쉽게 한 두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컨대, 이명박이 물러나고 대통령만 바뀌면 - 예컨대, 안철수, 문국현... - 세상이 좋아지나? 자본주의만 무너뜨리면, 자본가들만 몰아내면 새세상이 펼쳐지나?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하나? Unsinn... 세상이 복잡하다는 걸 인정한다는 건 단순하고 명쾌한 설명을 믿지 않는다는 것. 만병통치약은 없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
2) 다양성을 존중하기! 세상이 복잡함을 인정한다는 건, 곧 시원하고 명쾌하게 모든 것을 한큐에 설명하기 힘듦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건 곧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러면 결국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얘기다. 겸손하고, 다른 견해를 존중하고... 결국 유연한 태도.... 절대적인 무엇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3) 자율성! 권위 혹은 각종 이데올로기나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강압, 억지에 대한 저항. 개인의 판단, 입장, 견해를 존중!
4)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자율성을 존장하다고 해서 Anything goes!일 수는 없다. 상대주의를 극단으로 끌고 가서는 곤란. 다만... 악(惡)하거나 잘못되거나 옳지 않은 상태나 행동이라는 판단을 조심스럽게 내리기.
5) 공존, 연대! 자율성을 가진 개인들, 집단, 그리고 심지어 사회체계들 사이에서 힘과 자원 등의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럴 땐... 철저하게 약자, 약한 집단, 체계의 편에 설 것.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용인하는 그런 천박한 자유주의는 배척! (전경련, 대기업 따위들이 주장하는 그런 자유주의...)
1) 결정론!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정치, 경제, 미디어, 기술 등 한 두가지 요인이나 힘을 독립변수로 삼아서 설명, 해석하는 접근.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이나 페이스북,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것처럼 떠벌이는 미디어 결정론... 근본주의적 성향의 종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2) '표피'만에 대한 설명 (문화결정론?)! 깊든 얕든 어떤 현상 이면엔 역사적, 구조적인 차원이 있는 법인데, 그런 관계를 깊이 고려하지 않고 드러나는 모습만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떠는 경향. 소위 '문화'에 대한 대부분의 담론이나 연구, 혹은 포스트모너니즘을 달고 나오는 많은 견해가그런 입장을 취한다.
3) 깊은 성찰없이 단어, 개념, 이론을 유행처럼 가져다 쓰는 경우.
4) 그 반대의 극단에 있는 경우인데, 번역어 혹은 외국 이론을 쓰는 경우 원어, 원문, 원전의 의미를 신성시하다시피해서 한국어 번역어나 번역문의 잘잘못을 따지는 경우.
5) 연구나 사고의 대상을 성스럽게 여기는 경향을 '훈고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칸트, 헤겔, 베버, 하버마스, 루만, 지젝, 혹은 공자, 노자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저작을 경전처럼 모시면서 조심스럽게 주석을 다는 그런 작업들. 그러다가 그런 학자, 인물에 사랑에 빠져서 그들을 성스러운 존재로 격상시키기까지... 가장 역겨운 짓거리 중 하나. 성서, 불경, 꾸란 등 종교 경전에 대해서 성찰적 거리를 두지 못하고 문자주의적으로 접근하는 태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6) 역사의식 결여! 훈고학에 빠지는 경우는 대개 자기의 현재 입장을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상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역사적 맥락,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텍스트 그 자체를 진리처럼 여기면서 주석을 달거나, 혹은 그 텍스트의 현재적 의미를 고민하지 않는 그런... 한국 교회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가 이에 해당한다.
7) 민족주의, 아니 국수주의 (唯我論)?)! 국가에 대해선 국수주의지만, 지역주의, 가족주의도 포함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 그룹의 견해,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둘러싼 환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견해.
내가 지향하는 태도...
1) 복잡성을 인정하기! 세상과 인생은 너무도 너무도 복잡하다. 그렇게 쉽게 한 두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컨대, 이명박이 물러나고 대통령만 바뀌면 - 예컨대, 안철수, 문국현... - 세상이 좋아지나? 자본주의만 무너뜨리면, 자본가들만 몰아내면 새세상이 펼쳐지나?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하나? Unsinn... 세상이 복잡하다는 걸 인정한다는 건 단순하고 명쾌한 설명을 믿지 않는다는 것. 만병통치약은 없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
2) 다양성을 존중하기! 세상이 복잡함을 인정한다는 건, 곧 시원하고 명쾌하게 모든 것을 한큐에 설명하기 힘듦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건 곧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러면 결국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얘기다. 겸손하고, 다른 견해를 존중하고... 결국 유연한 태도.... 절대적인 무엇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3) 자율성! 권위 혹은 각종 이데올로기나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강압, 억지에 대한 저항. 개인의 판단, 입장, 견해를 존중!
4)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자율성을 존장하다고 해서 Anything goes!일 수는 없다. 상대주의를 극단으로 끌고 가서는 곤란. 다만... 악(惡)하거나 잘못되거나 옳지 않은 상태나 행동이라는 판단을 조심스럽게 내리기.
5) 공존, 연대! 자율성을 가진 개인들, 집단, 그리고 심지어 사회체계들 사이에서 힘과 자원 등의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럴 땐... 철저하게 약자, 약한 집단, 체계의 편에 설 것.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용인하는 그런 천박한 자유주의는 배척! (전경련, 대기업 따위들이 주장하는 그런 자유주의...)
심장을 뛰게하는 일을 해야 한다. 분명하다. 잡스 형님도 이렇게 얘기하지 않으셨던가... (아래 영문 참조)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뚝심을 가지고 밀어 붙여야 한다. 때로는 무식하게, 때로는 독하게... 생각이 많은 탓에 (잔머리...)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고 배려하려고 하다보면, 비록 친철하다는 칭찬을 들을 수는 있겠으나, 결국엔 미적거리다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혹은 뭔가를 시작했으나 뒤심 부족으로 마무릴 제대로 짓지 못하고 만다. "Ende gut, alles gut"은 독일 속담일 뿐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이기도 하다.
영국 작가 버나드 쇼(1856- 1950)는 아주 재기발랄한 사람이었는지 살아 생전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오역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무덤 주변(즉, 살아가는 곳, 이 세상, 이승)에서 머무를 만큼 머물다 보면, 이렇게 무덤에 들어가게 될 줄을 난 알았지"란 뜻이라고...]
이런 말을 남은 쇼는 그 명성이 말해주듯이 우물쭈물하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분히 다 하고 가셨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말을 남길 여유를 갖질 못하는 법이거든...
결국 어떤 일에 심장이 뛰는 지를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여자만 보면 어쩔쭐 모르는 청년처럼 너무 많은 일에 심장이 뛰면 우물쭈물 우왕좌왕하면서 결국 다 놓치기 십상이다. 왼쪽을 보면서 동시에 오른쪽으로 곁눈질 해서야 - 좌고우면 (左顧右眄) - 무엇을 제대로 이룰 수 있겠는가. 물론 충분히 그리고 깊게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역사의식!). 그렇지 않고선 결국 헛된 일에 힘을 쓰고선 우스꽝 모습으로 남기 쉽다. 여하튼 문제는 균형이다 균형.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시점에선 뚝심있게 끝까지 밀어 붙어야 하고. 무턱대고 덤비는 사람들은 좀 더 성찰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고...지금 내게 필요한 건...뚝심이고 뒷심이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분명한 소신을 갖고서 뚝심있게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베버, 짐멜 등 독일 사회학을 소개하고 연구하는 K교수, 루만 연구자 J교수, 조지 헨리 사상과 성경적 경제관 전도사인 J교수, 한국과 빈국의 가난 문제 해결에 몸을 던진 K목사,...
세상에 중요한 일은 너무나 많다. 이것 저것 기웃거리다간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심장을 뛰게하는 일에 헌신할 일이다. 세상과 인생은 너무도, 너무도 복잡하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어떤 일 혹은 분야에 내가 헌신해서 기여한다고 세상이 크게 바뀔 리 없다. 그래도 그런 기여, 노력이 모여서 세상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 아닌가? 그러니 세상이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음을 인정해주길 기대할 필요도 없고, 인정받으려고 좌충우돌할 필요도 없다. 뚝심, 뒷심은 자기에게 발휘되는 것이다.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뚝심을 가지고 밀어 붙여야 한다. 때로는 무식하게, 때로는 독하게... 생각이 많은 탓에 (잔머리...)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고 배려하려고 하다보면, 비록 친철하다는 칭찬을 들을 수는 있겠으나, 결국엔 미적거리다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혹은 뭔가를 시작했으나 뒤심 부족으로 마무릴 제대로 짓지 못하고 만다. "Ende gut, alles gut"은 독일 속담일 뿐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이기도 하다.
영국 작가 버나드 쇼(1856- 1950)는 아주 재기발랄한 사람이었는지 살아 생전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오역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무덤 주변(즉, 살아가는 곳, 이 세상, 이승)에서 머무를 만큼 머물다 보면, 이렇게 무덤에 들어가게 될 줄을 난 알았지"란 뜻이라고...]
이런 말을 남은 쇼는 그 명성이 말해주듯이 우물쭈물하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분히 다 하고 가셨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말을 남길 여유를 갖질 못하는 법이거든...
결국 어떤 일에 심장이 뛰는 지를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여자만 보면 어쩔쭐 모르는 청년처럼 너무 많은 일에 심장이 뛰면 우물쭈물 우왕좌왕하면서 결국 다 놓치기 십상이다. 왼쪽을 보면서 동시에 오른쪽으로 곁눈질 해서야 - 좌고우면 (左顧右眄) - 무엇을 제대로 이룰 수 있겠는가. 물론 충분히 그리고 깊게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역사의식!). 그렇지 않고선 결국 헛된 일에 힘을 쓰고선 우스꽝 모습으로 남기 쉽다. 여하튼 문제는 균형이다 균형.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시점에선 뚝심있게 끝까지 밀어 붙어야 하고. 무턱대고 덤비는 사람들은 좀 더 성찰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고...지금 내게 필요한 건...뚝심이고 뒷심이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분명한 소신을 갖고서 뚝심있게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베버, 짐멜 등 독일 사회학을 소개하고 연구하는 K교수, 루만 연구자 J교수, 조지 헨리 사상과 성경적 경제관 전도사인 J교수, 한국과 빈국의 가난 문제 해결에 몸을 던진 K목사,...
세상에 중요한 일은 너무나 많다. 이것 저것 기웃거리다간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심장을 뛰게하는 일에 헌신할 일이다. 세상과 인생은 너무도, 너무도 복잡하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어떤 일 혹은 분야에 내가 헌신해서 기여한다고 세상이 크게 바뀔 리 없다. 그래도 그런 기여, 노력이 모여서 세상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 아닌가? 그러니 세상이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음을 인정해주길 기대할 필요도 없고, 인정받으려고 좌충우돌할 필요도 없다. 뚝심, 뒷심은 자기에게 발휘되는 것이다.
야구에서 강팀이 되려면 1점 차 승부에 강해야 한다거나 혹은 종반(終盤)에 강하야 한다는 얘길 가끔 듣는다. 어디 야구 뿐이랴... 뒷심이 강하지 못해서 큰일이다. 뚝심도 아주 없진 않은데... 좀 더 키워야 하고...
* "전반, 중반, 후반"을 구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틀린 구분방식이다. "초반, 중반, 종반"의 구분 방식과 "전반, 후반"의 구분 방식. 이 두 방식이 섞여서 제 삼의 구분 방식이 탄생된 것 같은데, 두 구분법의 "반"을 같은 한자로 생각하면서 생긴 일인 듯.
- 초반(初盤): (바둑이나 운동 경기 따위에서) 승부의 첫 판국, 또는 첫 단계 [중반(中盤, 종반(終盤)]
- 전반(前半): (전체를 둘로 나누었을 때) 앞부분이 되는 절반. [후반(後半)]
* "전반, 중반, 후반"을 구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틀린 구분방식이다. "초반, 중반, 종반"의 구분 방식과 "전반, 후반"의 구분 방식. 이 두 방식이 섞여서 제 삼의 구분 방식이 탄생된 것 같은데, 두 구분법의 "반"을 같은 한자로 생각하면서 생긴 일인 듯.
- 초반(初盤): (바둑이나 운동 경기 따위에서) 승부의 첫 판국, 또는 첫 단계 [중반(中盤, 종반(終盤)]
- 전반(前半): (전체를 둘로 나누었을 때) 앞부분이 되는 절반. [후반(後半)]
아래 영문은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연설 중 일부분이다.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같은 문구가 유명해졌다. 췌장암 수술을 받고 난 이후에 한 얘기라 더 특별하게 들린다. 하지만... 어쩌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뭔가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도 사실 대단한 특권이다. 잡스는 아마 시류에 맞춰서 직장을 선택하고 인생을 사는 스탠포드 졸업생이나 그런 부류를 염두에 두고서 그런 충고를 했을 것이다. 그들에겐 적절한 충고였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은 하루 하루 목숨을 이어가느니라 죽음과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일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다. 잡스처럼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할 그들에게 죽음은 더 큰 충격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고 얘기하지만, 어떤 죽음이냐를 따지면 결코 평등하지 않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2012년 2월 10일 금요일
이 공간을 빌어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볼까 한다 (게시하지 않고 저장해 둘 수도 있겠으나 일단 게시하고 나중에 또 읽으면서 고치려고 한다. 아무래도 게시를 해야 내용을 개선해야 한다는 압력을 더 느낄테니...)
내가 '개인'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자율적으로 사고, 판단하고 그에 기초해서 행동하는 개인들이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자율과 연대! 다양성과 조화!
하지만 현대사회는 개인 중심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사회의 많은 영역, 사회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많은 일, 사건은 개인의 차원이 아닌 사회체계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회체계의 관계, 인간과 사회체계 간의 관계를 고려하면, '자율성을 누리면서 서로 연대하는 개인들'이라는 상황이 얼마나 이상적인지, 그리고 그런 상황을 사회 전체로 확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금새 드러난다. 현대인은 홀로 있을 때, 혹은 좁은 범위 내에서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자율성을 누릴 수 있을지언정, 그의 생활이 대부분의 영역에서 그가 어찌 해 볼 수 없는 집단의 논리, 조직의 논리, 체계의 논리에 휘둘려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본원적으로 갖게되는 불안, 갈등, 불활실성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회학 개념을 빌리면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과 체계통합 (system integration)의 분화, 상호작용(interaction)과 사회의 분리 등등.
개인은 그 두 통합 체계 사이에서 끊입없는 선택의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불안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자유도 얻고, 안전도 최대한 확보하려는 게 현대인들의 욕심이고 욕망이다. 사실 최대한 안전하게 자유로우려는 이 현대인의 과잉 욕망과 욕심을 채워주려고 모두 저 난리들인 것이다. 욕망, 기대치를 채워주겠다는 약속은 또 다른 욕망, 기대를 낳고... 낳고... 낳고... 그 욕망(안전과 자유)을 채우기 위해서 근대의 기초를 놓은 유럽인들은 그 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땅까지 정복해서 착취했고 (소위 '신대륙', 요즘엔 '남극'까지...), 그 후손들은 동식물, 자원을 착취하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후손과 지구에 거주하는 다른 생명의 몫을 착취하고... 하지만 욕망과 기대치는 계속해서 높아지기 때문에 (Anspruchsinflation), 만족을 모르는데... 그것을 만족시키려고 체계들은 열심히 확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개인의 요구의 증가와 체계의 확장 경향은 서로를 부추기면서 파국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일단... 이런 견해는 현대사회가 사회전체에 대해서 특정한 기능을 수행고, 서로에게는 특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체계들로 분화되어 있다는 그런 관점에 기초한 것이다. 현대사회를 기능적 분화된 사회로 볼 때 일단 배제되는 시각은 경제 결정론이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경제, 특히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찾는 경우...)
각 체계는 할 수 있는 것을 극대화하려는 성향이 있다. 연구할 수 있다면, 새로운 연구가 가능하다면 그것을 끝까지 하려고 하고... 이윤추구도 마찬가지고... 기업들은 돈을 벌 수 있다면, 구멍가게라도 접수하려고 하고... 정치는 권력을 얻으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 먹으려 하고... 사랑은 또 어떤가? 극단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종교는? 종교세력을 확산하려 한다. 매스미디어는 흥미를 끌고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사건들은 어떻게든 보도하려고 한다. 의료체계는 치료할 수 있는 질병들을 다 치료하려고 하고... 각종 조직은... 조직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착취하고...
[이런 진단이 사실이라면 '경제'특히 자본주의 경제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시각은 한계가 있다. 물론 돈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만은 사실이긴 하다. 결국 보상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이루어지니까. 매스미디어... 스포츠... 등등.
극대화하려는 경향은 필연적으로 체계 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사회 전체의 파국, 심지어 지구 생명체 전체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급한 것은 체계의 경계를 정해주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체계를 달래가면서 지속하게 만드는 것...
물론 나름 똑똑한 인간들, 성찰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들은 (혹은 체계들은) 그렇게 당하고만 있진 않다. 체계들의 확장경향을 통제하는 여러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한 체계가 확산하는 경향이 너무 강해서 다른 체계의 재생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는 경향을 막는 장치들이 마련된다. 그런 확산하는 경향력이 강하고 실제로 확산하는 힘, 영향력으로 다른 체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체계들을 막아서, 그 체계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재생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막거나 예방하는 장치들이 만련되는 것이다.
사회의 많은 논의들이 대개 이 언저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를 달래고 한계를 정해주는 일... 그래서 지속가능한 체계유지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유일한 희망인가? 이렇게 위태위태한 균형상태, 평형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체계들을 달래가면서 기능적 분화 상태를 유지하는 것 말고는 도대체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전부 다 산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자족하지 않는 이상...
과학체계에 대해선... 이는 우선, 과학의 한계를 정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즉, 한 편으로는 과학의 연구 욕심, 확산 경향이 다른 체계 혹은 인간을 착취하는 경향을 막으려는 것이다. 동시에 정치 혹은 경제 등 다른 체계 혹은 개인들이 과학을 악용 혹은 그 경계를 침범하면서 '정상적' 과학활동을 망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일단 동료심사, 윤리위원회 등 각종 자기규제 장치들이 있고, 혹은 좀 더 공식적인 장치들로는 헌법, 여러 관련 법들이 있다.
내가 '개인'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자율적으로 사고, 판단하고 그에 기초해서 행동하는 개인들이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자율과 연대! 다양성과 조화!
하지만 현대사회는 개인 중심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사회의 많은 영역, 사회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많은 일, 사건은 개인의 차원이 아닌 사회체계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회체계의 관계, 인간과 사회체계 간의 관계를 고려하면, '자율성을 누리면서 서로 연대하는 개인들'이라는 상황이 얼마나 이상적인지, 그리고 그런 상황을 사회 전체로 확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금새 드러난다. 현대인은 홀로 있을 때, 혹은 좁은 범위 내에서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자율성을 누릴 수 있을지언정, 그의 생활이 대부분의 영역에서 그가 어찌 해 볼 수 없는 집단의 논리, 조직의 논리, 체계의 논리에 휘둘려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본원적으로 갖게되는 불안, 갈등, 불활실성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회학 개념을 빌리면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과 체계통합 (system integration)의 분화, 상호작용(interaction)과 사회의 분리 등등.
개인은 그 두 통합 체계 사이에서 끊입없는 선택의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불안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자유도 얻고, 안전도 최대한 확보하려는 게 현대인들의 욕심이고 욕망이다. 사실 최대한 안전하게 자유로우려는 이 현대인의 과잉 욕망과 욕심을 채워주려고 모두 저 난리들인 것이다. 욕망, 기대치를 채워주겠다는 약속은 또 다른 욕망, 기대를 낳고... 낳고... 낳고... 그 욕망(안전과 자유)을 채우기 위해서 근대의 기초를 놓은 유럽인들은 그 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땅까지 정복해서 착취했고 (소위 '신대륙', 요즘엔 '남극'까지...), 그 후손들은 동식물, 자원을 착취하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후손과 지구에 거주하는 다른 생명의 몫을 착취하고... 하지만 욕망과 기대치는 계속해서 높아지기 때문에 (Anspruchsinflation), 만족을 모르는데... 그것을 만족시키려고 체계들은 열심히 확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개인의 요구의 증가와 체계의 확장 경향은 서로를 부추기면서 파국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일단... 이런 견해는 현대사회가 사회전체에 대해서 특정한 기능을 수행고, 서로에게는 특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체계들로 분화되어 있다는 그런 관점에 기초한 것이다. 현대사회를 기능적 분화된 사회로 볼 때 일단 배제되는 시각은 경제 결정론이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경제, 특히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찾는 경우...)
각 체계는 할 수 있는 것을 극대화하려는 성향이 있다. 연구할 수 있다면, 새로운 연구가 가능하다면 그것을 끝까지 하려고 하고... 이윤추구도 마찬가지고... 기업들은 돈을 벌 수 있다면, 구멍가게라도 접수하려고 하고... 정치는 권력을 얻으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 먹으려 하고... 사랑은 또 어떤가? 극단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종교는? 종교세력을 확산하려 한다. 매스미디어는 흥미를 끌고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사건들은 어떻게든 보도하려고 한다. 의료체계는 치료할 수 있는 질병들을 다 치료하려고 하고... 각종 조직은... 조직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착취하고...
[이런 진단이 사실이라면 '경제'특히 자본주의 경제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시각은 한계가 있다. 물론 돈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만은 사실이긴 하다. 결국 보상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이루어지니까. 매스미디어... 스포츠... 등등.
극대화하려는 경향은 필연적으로 체계 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사회 전체의 파국, 심지어 지구 생명체 전체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급한 것은 체계의 경계를 정해주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체계를 달래가면서 지속하게 만드는 것...
물론 나름 똑똑한 인간들, 성찰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들은 (혹은 체계들은) 그렇게 당하고만 있진 않다. 체계들의 확장경향을 통제하는 여러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한 체계가 확산하는 경향이 너무 강해서 다른 체계의 재생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는 경향을 막는 장치들이 마련된다. 그런 확산하는 경향력이 강하고 실제로 확산하는 힘, 영향력으로 다른 체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체계들을 막아서, 그 체계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재생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막거나 예방하는 장치들이 만련되는 것이다.
사회의 많은 논의들이 대개 이 언저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를 달래고 한계를 정해주는 일... 그래서 지속가능한 체계유지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유일한 희망인가? 이렇게 위태위태한 균형상태, 평형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체계들을 달래가면서 기능적 분화 상태를 유지하는 것 말고는 도대체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전부 다 산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자족하지 않는 이상...
과학체계에 대해선... 이는 우선, 과학의 한계를 정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즉, 한 편으로는 과학의 연구 욕심, 확산 경향이 다른 체계 혹은 인간을 착취하는 경향을 막으려는 것이다. 동시에 정치 혹은 경제 등 다른 체계 혹은 개인들이 과학을 악용 혹은 그 경계를 침범하면서 '정상적' 과학활동을 망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일단 동료심사, 윤리위원회 등 각종 자기규제 장치들이 있고, 혹은 좀 더 공식적인 장치들로는 헌법, 여러 관련 법들이 있다.
2012년 2월 9일 목요일
오후 공부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빙빙돌고 있다. 이제 이 글을 쓰고 그리고 이를 닦고 와서는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는 프로그램을 작동시킬 것이다 (그 프로그램 이름이 'freedom'이다). 다섯시엔 달리기를 할 예정이니 그래봐야 세 시간 남짓 남았다. 양이 많아지면 질적으로 새로운 무엇인가가 톡 튀어 나오길 기대하면서 ('양질전환') 입력양을 늘린지 벌써 수 년째... 여전히 잡힐듯 잡히지 않는 생각의 줄기... 참... 어렵다... 잡았다고 생각해서 좀 오르다 보면 어느새 내 손은 허공 속을 휘젓고 있는... 정말이지...少年易老하나 學難成이로구나...
2012년 2월 8일 수요일
현대사회는 큰 위기를 잘게 쪼개고, 그리고 그 잘게 쪼갠 위기를 일상화함으로 결과적으로 큰 위기, 전본적인 위기를 피해가는 사회라고 얘기할 수 있다. 자연재해, 전쟁, 왕조 교체, 폭동 혁명 등등. 예컨대, 정치적 위기는 선거와 정권교체를 통해서, 경제적 위기는 시장 경제체계를 통해서, 자연재해는 각종 기술과 토목사업을 통해서... 대부분은 현대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안전하고, 풍요로운 시기를, 그것도 가장 오래 살면서 누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일상화된 스트레스, 긴장, 두려움, 절망이 있다. '한 방에 훅 갈' 위험은 적어졌지만, 대신 자잘한 스트레스를 달고 살아야 한다. 우리 과연 선조들보다 더 행복한지... 진보된 삶인지... 쉽게 판단하기 힘들다.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상황에서 조금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더 많은 사람들이 갖도록 노력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