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5일 수요일

"극단주의는 열등감과 소외감 속에서 시작한다."

"역사적인 상실감 때문에 과거로의 회귀를 원하는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이 출현하고, 이들이 원리주의를 내세우며 지지 기반을 얻어 성장하고, 더더욱 극단으로 나아가 건국까지 해버린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까지 설명한 '역사적 박탈감'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부터 설명할 '이슬람의 게으름'이다."

"초기 이슬람의 교리와 그 해석은 진보적이었고 세련되었다. 신자의 5대 의무에 '자선의 의무'를 넣을 정도로 경제 정의를 챙겼고, 여성을 비롯한 일반 인권의 개념을 발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그 후예들은 여전히 오일 머니의 분배에 게으르고, 옆동네 극단주의자가 오늘 내 딸을 강간하지 않기만을 바라다가 강간을 당하면 딸을 죽여버리는 식의 인권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슬람의 신학이 그만큼 게을렀기 때문에 생긴 나비 효과다."

아래 게재한 "옳은 말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다"와 상통하는 얘기다. IS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옳은 말과 논리로 바꾸기 힘들다. 마음을 바꿔먹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글은 이런 논리를 기독교에도 적용하고 있는데 꽤 설득력 있다.

"기독교가 극단주의를 방지했던 첫 번째 원인은 교황청이었다. 신학의 최종 해석권을 쥐고서, 너무 많이 나가버린 사람들은 이단 판정을 내리고는 파문을 던져 잘라내어버린다. 두 번째 원인은 토론이다. 정통과 이단의 사이에서는 마냥 토론이 벌어져도 용납한다. 옆동네 아랍에서 사촌인 이슬람이 발흥한 후로는 적극적으로 대응 논리를 개발해야 할 필요도 있어서 지속적인 신학 발전이 이루어진다. 발전이 지나쳐서 이단이 되면 다시 쳐낸다. 이 사이클이 돌면서 기독교는 역사의 발전 상태를 따라가며 진화했다.

사이클의 기능이 퇴화해서 타락상이 손대기 힘들어지자, 마르틴 루터 같은 원리주의자들이 등장해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이번엔 경쟁자로 형제가 뜬 것이니, 졌을 경우 영업상 문제가 크다. 초반엔 시아파와 수니파만큼이나 서로 물어뜯고 싸웠지만, 그런 게 중요하지 않은 세계가 되자 전쟁은 신학적인 토론과 경쟁으로 바뀐다. 세계 역사가 변화하는 만큼 구교와 신교는 각자의 방식으로 변화에 적응하고 진화한다. 

권위 있는 어르신 - 즉 정론의 존재, 그리고 토론이라는 두 가지 핵심을 통해 신학을 진화시키는 게 적응의 테크트리이건만...  기독교가 성공한 이 지점에서 이슬람은 계속 실패해왔다. 토론은 충분했으나 그 결과 지나치게 나가버린 케이스를 규제하거나 금지할 권위가 없었다. 칼리파? 그거 유명무실해진 게 언제인데. 술탄? 정치하기도 바쁜 애들인데 뭐. 이맘? 자꾸 새 학파만 만들고 뭘 바로잡는 쪽엔 약한 듯. 현재 슬슬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 극단주의 세력 또한 같은 프로세스로 성장하고 있다. 

기독교 신교 강세의 국가 미국에서, 당연히 파문 등의 신학적으로 강력한 이단 제제 조치가 없는 상태에서, 흑인이나 여성의 인권/민권이 강화되고 세계 패권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상실감을 느낀 자들이 극단주의에 빠져든다. 근대 이슬람이 빠졌던 함정에 그대로 빠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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