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2일 목요일

이사 안내

좀 더 세련된 집으로 이사갑니다. 여기로 -->  https://jungkwangjin.wordpress.com

좋은 세상이라 세간을 고스란히 다 옮겨 갈 수 있네요. 새집 이름이 좀 후진데 나중에 바꿀 생각입니다. 

2015년 2월 11일 수요일

비만은 인류가 수렵채집기, 즉 음식을 지방으로 효율적으로 저장하는 생리 시스템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던 시기, 그 시기의 환경에 적응한 습성(시스템)이 고칼로리 음식이 사방에 널려 있는 환경으로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설명한다.(진화의 식탁, 44)

어떤 시스템/ 구조는 환경에 대한 적응의 산물. 환경이 변했는데 그 구조, 시스템을 고집하면? 그것은 비만과 같은 사회문제, 질곡이 된다.

한국의 국가주의, 실용주의, 국가주의적 과학 정책이 그런 것이다. 후발국으로서 경제성장, 산업화,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그런 상황에서 이는 나름 긍정적 결과를 가져 온 메커니즘이었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변한 환경에서는 이제 문제의 근원이 되기 쉽다. 이와 긴장 관계에 있는 새로운 구조, 제도, 문화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 두 제도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환경! 환경으로의 적응을 위한 구조, 제도, 문화!
환경변화! 한편으로 기존 구조, 제도, 문화의 지속.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구조, 제도, 문화 수용, 도입(변이).
이 둘 사이에 갈등!


- 다윈은 생물의 개체 수의 증가, 이로 인한 생존 투쟁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맬서스의 학설도...("다윈의 경건한 생각", 42쪽). 커닝햄은 이것이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가장 폭넓게 적용한 사례"라고 덧붙인다(ibid.).
- "굴드는 다윈주의가 '자연에 적용한 아담스미스의 경제학'이라는 참으로 정확한 표현을 했다"(49)

- "...경쟁을 통한 진보... 로버트 영 같은 역사학자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조와 다윈의 자연선택론이 너무나 닮아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다윈의 진화론이 영국사회에서나 나올만한 이론이라고 분석하기도 했지요"("다윈의 식탁", 161)

다윈의 진화론 자체가 산업혁명, 자본주의 시장경제 확대, 도시화 등 당대의 사회적 조건과 이를 성찰하던지성사적 배경 속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봐야겠다.

루만과 연결시키자면 개체 수의 증가는 커뮤니케이션 증가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이론 이한 복잡성 증가, 복잡성을 처리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사회의 내적 분화. 개체들의 생존 투쟁에 비교할만한 커뮤니케이션 간의 투쟁이 있을까? '전쟁'? 혹은 체계의 이기적 확장으로 인한 체계 간 충돌?
과학이라고 똑같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적 지식의 축적되면서 지속되는 방향을 과학 내적인 원인으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 왜? 사람들이 과학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의 관심, 호기심, 필요에 따라서 연구 방향과 속도가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과학이 "사회의 과학"이라는 점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근대 과학은 지식과 주장의 확실함, 엄밀함을 검증할 수 있는 놀라운 메커니즘을 발전시켜 왔다.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여하튼 과학자들, 특히 과학근본주의자들은 사회적 영향을 인정하는데 매우 인색하다. 과학에 의한, 과학을 위한 과학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런 태도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과학의 정당성을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여하튼, 생명과학이 특히 논쟁적이라는 점은 "사회의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다시 과학 지식 발전 방향에 영향을 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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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과학자가, 심지어 전체 과학자 집단이 먼 우주의 기원을 잘못 파악한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개미의 수렵에 대한 적절하지 않은 모형을 세우고, 공룡 멸종에 대한 황당한 설명을 하더라도, 이런 실수가 끔직(?)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인간에 대한 그릇된 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파국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가장 높은 수준의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통속 다윈주의 심리학자들이 대체로 일상생활을 근거로 삼아 우리에게 제시하는, 인관관계에 대한 해명을 증거로 삼아선 안 된다."(P Kitcher 1987, Vaulting Ambition: Sociobiology and the Quest for Human Nature. MIT Press, p.9) ["다윈의 경건한 생각", Conor Cunningham, 297f에서 인용됨]

원문: "In the free-for-all of scientific research, ideas are often tossed out, tentatively accepted,and only subsequently subjected to genuinely rigorous tests. Arguably,the practice of bold overgeneralization contributes to the efficient working of science as a community enterprise: hypotheses for which there is "some evidence" or, perhaps, "reasonably good evidence" become part of the public fund of ideas, are integrated with other hypotheses, criticized, refined, and sometimes discarded. Yet when the hypotheses in question bear on human concerns, the exchange cannot be quite so cavalier.
If a single scientist, or even the whole community of scientists, comes to adopt an incorrect view of the origins of a distant galaxy, an inadequate model of foraging behavior in ants, or a crazy explanation of the extinction of the dinosaurs,then the mistake will not prove tragic. By contrast, if we are wrong about the bases of human social behavior, if we abandon the goal of a fair distribution of the benefits and burdens of society because we accept faulty hypotheses about ourselves and our evolutionary history, then the consequences of a scientific mistake may be grave indeed. (...) 
The genuine worry behind the political criticism of sociobiology is that, while claims about nonhuman social behavior may be carefully and rigorously defended, the sociobiologists appear to descend to wild speculation precisely where they should be most cautious.(Gould expresses admiration for Wilson's nonhuman sociobiology; however, even nonhuman sociobiology has its critics.)"
"진화"는 인간과 사회의 작동 설명을 위해서도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 때 '진화' 이해 혹은 사용 방식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1) 자연과학적 진화 메커니즘의 연장선상에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려는 시도. 사회다윈주의,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생존, 적응 등의 진화 메커니즘을 인간 행동, 사회의 작동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스펜서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봐야. 이런 접근은 생물학적 결정론이라고 비난받기 쉽다. (2) 진화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파슨즈나 루만이 여기에 해당한다. 생물학적 진화 메커니즘을 비유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회 설명에 적용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진화론적 설명과는 거리가 있다. 사회를 사회로 설명하는 방식이고, 사회 발전, 변동을 결정하는 요인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다. 진화를 분화라는 개념으로 대체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
“한마디로 과학의 성공은 자정 능력에 있다. 과학은 스스로를 교정할 수 있다. 과학에서는 새로운 실험 결과와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올 때마다 그 전에는 신비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있던 미지의 사실이 설명될 수 있는 합리적 현상으로 바뀌어 간다.”(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29쪽)

"과학사회학"이란 분야를 전공으로 염두에 둘 정도고, 심지어 논문 주제도 "과학에 대한 공공 갈등"아닌가. 꽤 오랫 동안 "과학"에 대해서 읽고 고민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이 "과학"에 대한 내 생각에 혁명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좁은 의미의 과학. 자연과학. 자연, 자연현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경험 학문. 과학에 대해서는 극단적 견해가 공존하는 것 같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는 활동으로 보고 무한신뢰를 보내거나 (과학이 왜곡되는 것은 과학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을 가지고 뭔가를 해보려는 비과학에 해당하는 할동... 과학 그 자체는 순수하다!), 아니면  다른 유형의 지식과 비교할 때  독특한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그 차이를 과잉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저 여러 지식 중 하나일 뿐... 예컨대 과학적 지식과 신화적 이야기, 종교적 신념 간에 위계를 지을 필요 없다는 견해. 극단적으로는 여러 사회적 문제의 뿌리로 보는 견해까지...

여하튼 근대과학은 "사회의 과학"이다. 자연과학자들도 사회, 더 정확하겐 "사회적 환경"이 과학 지식 탐구에 미치는 영향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 영향의 범위가 그저 연구 방향, 연구 주제 선정이나 설정 정도인지, 아니면 지식 그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때론 사회의 과학이기 때문에 일부 왜곡된 지식이 득세하는 경우가 있어도 결국 "자정작용" 때문에 해결될 것인지...

여하튼 과학은 "사회의 과학"이다.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영향력이란 것도 수용되는 분야, 범위 등에 따라 다르겠지만...

"과학은 사회의 과학이다"라는 루만의 테제가 막연하게 들리지만 사실 그 안에 어떤 과학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

과학을 제자리 찾아주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 한국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과학자들 스스로 자정능력을 갖출 생각도 그럴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두고 인문학,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일종의 "인문사회과학을 통한 과학 통제론" 혹은 "민주적 과학 제어론" 같은 것을 제시한다고 비꼬면서...  과학도 잘 모르는... 이라고 얘기하면서. 그 원초적 책임을 과학자들 스스로에게 있음을 인정하는데는 인색하면서...

과학을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 같다. 과학에 대해서 필요한 것만 빼먹으려는...

반면에 그것을 비판하는 입장 혹은 과학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접근(STS)에선 일부 논쟁적 과학 주제를 중심으로 갈등을 부각시켜서 과학 자체에 대한 성찰 혹은 회의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 같다.

"과학은 자기 검증을 생명으로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증거 제시라는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 과학은 자유로운 참구 정신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으며 자유로운 탐구가 곧 과학의 목적이다. ... 우리는 어느 누가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할지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열린 마음으로 자기 검증을 철저히 해야 한다."(195)

이런 이상화된 과학에 이념, 가치, 문화는 정말 얼마나 실제 과학활동을 반여하는 것일까? 과학사회학자들, 과학학자들은 이 점을 끈질기게 파고 들었다. 머튼의 "마태효과"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핵심엔 이런 특징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다른 체계들과 다른 점이다.

한국의 경우 (1)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인 과학 이해 (2) 지나치게 정치화된 과학 이해, 이 둘이 지배적인 것 같다. 막상 당사자인 과학자들은 많은 경우 지나치게 방어적,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대개 오만에 가까운 태도는 박탈감이나 피해의식의 산물이니까.

여하튼 과학에 제자리를 찾아주고, 과학의 장점을 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한국은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한편으로 실용주의적 과학 이해가 여전히 지배적이고, 이 지배적인 경향을 불만족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정치화시켜서 그런 경향을 바꾸려고 한다. 그렇게 갈등이 형성되면 과학에 제자리 찾아주기는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부터 언어를 사용했을까?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거다. 언어 학자들은 기원전 3,000년 경, 지금부터 약 5,000년 전에 사람이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초의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자란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서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우룩(Uruk)에서 발견된 문서로 기원전 3,100년 수메르어로 쓰였다. 앞으로 또 뭐가 발견될지는 모른다. 지금까진 그렇단 얘기다. 땅속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사람이 언어로 의사소통을 한 건 그보다 훨씬 전이다. 그게 언젠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벌거벗고 도끼 들고 사냥하러 다녔을 때도 말로써 의사소통을 했다."

2015년 2월 10일 화요일

논어에 이런 이야기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으며,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 ( 논어 )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우긴 배우는데 자기 생각이 없으면 죄다 헛것이요, 생각은 하지만 배우지 않으면 그 생각은 아슬아슬하다...